국사교본/제1편 상고
상고의 전기(태고-삼국 이전)
[편집]제1장 여명기의 동태
[편집]1. 우리 민족의 기원과 그의 분포
[편집]우리 民族은 東北亞細亞 種族의 一派로서 西北大陸 方面으로부터 東南으로 내려와 白頭山을 가운데에 두고 滿洲一帶와 半島에 걸쳐 分布된 것이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시아 종족의 일파로서 서북대륙 방면으로부터 동남으로 내려와 백두산을 가운데에 두고 만주 일대와 반도에 걸쳐 분포된 것이다.
2. 원시사회의 모양
[편집]『社會의 움지김』 山과 숲을 根據로 하는 狩獵生活로부터 河川流域을 中心으로 하는 農牧時代에 들면서 나라의 틀이 잡히게 되었다.
『그릇과 연장』그 時代에 쓰던 器具를 通하여 그 時代의 生活狀態와 文化의 程度를 대개 推察할 수가 있나니 우리 原始時代의 器具로는 石鏃 石斧 石刀 따위의 石器와 (朝鮮과 滿洲에서 發見되는 石器는 같은 系統의 것임) 骨角器 等이 많이 發見되고 있다.
『遺跡』 支石(고인돌) 立石(선돌) 具塚 累石塚 等이 各地에 많이 남아있다.
『信仰』 天神을 비롯하여 山川 樹木 等 神靈께 제사하고 정성을 드리던 것이니 特히 祭天은 예로부터 우리 信仰의 中心이 된 것이다.
『사회의 움직임』 산과 숲을 근거로 하는 수렵생활로부터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농목(農牧)에 들어가면서 나라의 틀이 잡히게 되었다.
『그릇과 연장』 그 시대에 쓰던 기구를 통하여 그 시대의 생활 상태와 문화의 정도를 대개 미루어 살펴볼 수가 있으니 우리 원시시대의 기구로는 석촉(石鏃), 석부(石斧), 석도(石刀) 따위의 석기와 (조선과 만주에서 발견되는 석기는 같은 계통의 것임) 골각기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유적』 고인돌, 선돌, 패총, 누석총 등이 각지에 많이 남아있다.
『신앙』 천신을 비롯하여 산천, 수목 등 신령께 제사하고 정성을 드리던 것이니 특히 제천은 예로부터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제2장 조국의 유구
[편집]1. 고조선
[편집]【檀君의 肇國(肇國紀元을 國紀라 略稱함)】『前朝鮮』 大同江 流域은 가장 일찌기 牧畜과 농사가 일어난 곳이니 檀君 王儉께서 平壤(王儉城)을 中心으로 맨 처음에 나라의 터를 닦으셨다(國紀 元年은 西紀前 2333). 옛 글을 상고하면 처음에 桓雄天王께서 하늘로부터 太伯山에 내려오사 神市를 베풀고 이 세상을 보살피시며 檀君을 낳으시고 檀君께서 다시 平壤으로 내려오사 나라를 열어 國號를 朝鮮이라 하고 神政을 行하셨다 하였다. 이로부터 神政시절이 約 千餘年동안 繼績하였나니 이를 가르쳐 前朝鮮이라 하는 것이다.
『後朝鮮』 前朝鮮의 神政이 오래ㅅ동안 行하는 사이에 産業도 차차 열리고 民知도 점점 깨쳐지매 새로운 國家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가르쳐 後朝鮮이라 하거니와 이도 역시 王儉城을 서울로 하여서 있었던 것으로서, 그의 地域은 대개 半島의 北部와 滿洲의 南部一帶에 걸쳐 있어 胡朝鮮 가운데에도 가장 일찌기 열린 곳이었다.
【八條의 禁法】 그리하여 約 千年의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文化와 産業이 자못 發達하여 民間에는 八條의 禁法이 行하였으며 正直과 禮義를 귀히 여기고 平和와 潔白을 좋아하며 안악네는 믿음성스러워 몸 가지기를 깨끗이 하였다. 그리고 농사와 養蠶과 질쌈이 매우 열렸으며 장사(交易)도 이미 시작되었고 그릇과 연장도 또한 보암직한 것이 있었다.
後朝鮮은 그의 末期에 이르러 燕나라와 다투어 西쪽 땅을(遼東 遼西) 잃은 뒤로 나라의 형세가 자못 쇠약하더니 準王 때에 일찌기 歸化하여 西部 國境땅에서 세력을 모두고 있던 燕人 衛滿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國紀 2140 西紀前 194)
【扶餘와 辰】 後朝鮮을 가운데 두고 南쪽과 北쪽에는 扶餘와 辰國 等이 아울러 서 있었다. 扶餘는 扶餘部族이 세운 나라로서 東滿一帶에 서 있었으며, 辰國은 韓部族이 세운 것으로서 漢江流域으로부터 南部에 걸쳐 있었다.
衛滿이 또한 王儉城을 서울로 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을 衛滿朝鮮이라 한다. 衛滿은 이웃한 眞番(黃海道의 大部分)臨屯(江原道의 北部와 咸南의 一部) 等 여러 작은 나라를 굴복시켜 세력이 자못 强盛하더니 그의 손자 右渠 때에 이르러 漢나라와(武帝) 衝突하여 마침내 亡하였다(國紀 2226 西紀前 108).
【附】『漢의 四郡』 漢武帝가 衛滿朝鮮의 땅을 빼앗아 그곳에『樂浪』(平南馺 黃海의 北端) 眞番(黃海道의 大部分) 臨屯(江原道의 北部와 咸南의 一部)玄菟(처음에는 鴨綠江流域의 通溝가 中心임) 等 四郡을 두었더니, 우리 原住民의 抗爭이 매우 굳세었으므로 겨우 二十餘年 뒤에 郡의 廢合을 행하였다. 臨屯과 眞番의 二郡을 廢하고 臨屯 땅에 東部都尉 眞番땅에 南部都尉를 두어 樂郞郡에 붙이고, 玄菟郡은 西으로 興京方面을 거쳐 다시 奉天 근방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高句麗에게 亡하였으며, 樂浪郡은 約 四百餘年동안 平壤一帶에서 命脉을 보존하다가(東部都尉와 南部都尉도 얼마 後에 없어졌거니와) 高句麗에게 (美川王 때에) 멸망되고 말았다. 이 樂郞(平壤一帶)을 中心으로 在來文化와 漢文化가 交流하여 이른바 樂浪文化가 (樂浪遺跡) 發達하였으며, 이 文化가 우리 南北 여러 나라에 끼친바 影響도 적지 아니하였다.
【단군의 개국. 조국 기원을 국기(國紀)라 약칭함】 『전조선(前朝鮮)』 대동강 유역은 가장 일찍이 목축과 농사가 일어난 곳이니 단군왕검께서 평양(왕검성)을 중심으로 맨 처음에 나라의 터를 닦으셨다.(국기 원년은 서기전 2333년) 옛 글을 상고하면 처음에 환웅 천왕께서 하늘로부터 태백산에 내려와서 신시를 베풀고 이 세상을 보살피시며 단군을 낳으시고 단군께서 다시 평양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신정(神政)을 행하셨다 하였다. 이로부터 신정 시절이 약 천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으니 이를 가르쳐 전조선이라 하는 것이다.
『후조선(後朝鮮)』 전조선의 신정이 오랫동안 행하는 사이에 산업도 차차 열리고 백성의 지혜도 점점 깨쳐지게 되자 새로운 국가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가르쳐 후조선이라 하는데 이도 역시 왕검성을 서울로 하여서 있었던 것으로서, 그 지역은 대개 반도의 북부와 만주의 남부 일대에 걸쳐 있어 고조선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찍이 열린 곳이었다.
【8조의 금법】 그리하여 약 천 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문화와 산업이 자못 발달하여 민간에는 8조의 금법을 행하였으며 정직과 예의를 귀히 여기고 평화와 결백을 좋아하며 아낙네는 믿음직스러워 몸 가지기를 깨끗이 하였다. 그리고 농사와 양잠과 길쌈이 많이 열렸으며 장사[교역]도 이미 시작되었고 그릇과 연장도 또한 볼만한 것이 있었다.
후조선은 그 말기에 이르러 연나라와 다투어 서쪽 땅[요동과 요서]을 잃은 뒤로 나라의 형세가 자못 쇠약하더니 준왕 때에 일찍이 귀화하여 서부 국경 땅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던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국기 2140년, 서기전 194년)
【부여와 진】 후조선을 가운데 두고 남쪽과 북쪽에는 부여와 진국 등이 아울러 서 있었다. 부여는 부여 부족이 세운 나라로서 동만 일대에 서 있었으며, 진나라는 한(韓) 부족이 세운 것으로서 한강 유역으로부터 남부에 걸쳐 있었다.
위만이 또한 왕검성을 서울로 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을 위만 조선이라 한다. 위만은 이웃한 진번(황해도의 대부분), 임둔(강원도의 북부와 함경남도의 일부) 등 여러 작은 나라를 굴복시켜 세력이 자못 강성하더니 그의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 한나라(무제)와 충돌하여 마침내 망하였다.(국기 2226년, 서기전 108년)
【부록】 『한나라의 4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의 땅을 빼앗아 그곳에『낙랑』(평안남도 및 황해도의 북단), 진번(황해도의 대부분), 임둔(강원도의 북부와 함경남도의 일부), 현토(처음에는 압록강 유역의 통구가 중심임) 등 4군을 두었으나 우리 원주민의 항쟁이 매우 굳세었으므로 겨우 이십여 년 뒤에 군의 폐합을 행하였다. 임둔과 진번의 2군을 폐하고 임둔 땅에 동부도위, 진번 땅에 남부도위를 두어 낙랑군에 합치고, 현토군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방면을 거쳐 다시 봉천(奉天) 근처로 옮겼다가 마침내 고구려에게 망하였으며 낙랑군은 약 4백여 년 동안 평양 일대에서 명맥을 보존하다가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도 얼마 후에 없어졌음) 고구려 미천왕 때에 멸망되고 말았다. 이 낙랑(평양 일대)을 중심으로 토착 문화와 한(漢) 문화가 교류하여 이른바 낙랑 문화(낙랑 유적)가 발달하였으며, 이 문화가 우리 남북 여러 나라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2. 남북의 여러 나라
[편집]地理的 環境과 大陸 세력의 衝動에 依하여 南北 各地에 걸쳐있던 우리 여러 部族 사이에 수 많은 나라가 버려졌다.
【南北의 여러나라】 옛 나라인 扶餘를(長春 吉林一帶를 中心으로) 비롯하여 高句麗(鴨綠江流域을 中心으로) 濊(江原道一布 咸南一部) 沃沮(咸與一帶를 中心으로) 等 여러 部族國家가 半島北部와 東南滿洲에 겉쳐 일어났나니 特히 高句驪와 濊와 沃沮는 漢의 郡縣을 쳐 몰아내고 일어난 것이다. 南쪽의 辰國은(稷山을 中心으로)後朝鮮과 아울러 일어난 것으로서 韓部族의 여러部落 가운데에 盟注가 되었다.
【三韓】 이와 같이 辰國을 盟主로 하던 여러 半自治的 部落은 차차 地理的 條件과 經濟的 發達을 따라 각각 여러 나라로 分化되었나니 (가) 馬韓(京畿의 漢江 流域 以南으로부터 忠淸 全羅에 걸침)은 伯濟(廣州를 中心으로) 月支(稷山을 中心으로)를 비롯하여 五十餘의 部落國家로 되고 (나) 辰韓(慶尙道의 東北部)은 斯盧(慶州를 中心으로) 等 十二國으로 되었으며 (다) 弁韓(弁辰이라고도 하나이 慶尙道의 西南部)은 狗耶(金海를 中心으로) 等 十二國으로 되었다.
【諸國의 社會相】 (가)『政治와 刑罰』정사는 君長의 거느리는 아래에 우두머리 【部落의 우두머리로는 馬韓의 臣智, 邑備·扶餘의 馬加, 牛加·高句麗의 大加 等】 가 각각 部落을 다스렸으며 刑罰은 대개 엄하였나니 扶餘에서는 殺人한 者는 죽일 뿐만 아니라 그의 家族까지 종을 만들고 도적질을 하면 그 물건의 열두배를 물리며 高句麗에사는 罪人이 나면 여러 우두머리가 모여 議論한 다음에 그를 죽이며 그의 妻子까지 종을 만들었다.
(나)『社會』위ㅅ 階級은 特權을 가지고 庶民과 奴隷를 부렸으며, 庶民은 대개 위ㅅ 階級 【위ㅅ 階級으로는 高句麗의 大家가 곧 그것이며 庶民은 즉 下戶임】의 부림을 받았고 그 밖에 奴隷가 있었다.
(다)『信仰과 宗敎的 習俗』十月에 天神에 고사지내는 風이 널리 行하였으며 【高句麗의 東盟 扶餘의 迎鼓 濊의 舞天, 馬韓의 十月고사 等】 이 밖에 馬韓에는 天神을 제사하는 사람을 天君이라 하여 그의 여러 나라에서는 각기 天君 한사람씩을 두어 제사를 맡게 하고, 【祭政의 分離】 또 각처에 蘇塗(솟대)를 세웠나니 이는 鬼神을 제사하는 神聖한 곳이었다.
(라)『産業』농사(五穀)와 養蠶과 길쌈(명주와 삼베)이 자못 발달하였으며 魚·監은 山꼴까지 넘나들었고 【辰韓의 鐵】 弁·辰韓에서는 鐵을 캐어 貨幣와 같이 썼으며 그것을 다시 樂浪地方과 日本에까지 流通시켰다.
(마)『武器와 器具』 武器로는 弓, 失, 刀, 槍 等을 썼나니 特히 활은 貊弓, 檀弓 화살은 楛矢라 하여 예로부터 이웃 나라에까지 이름이 들렸으며, 짐질에는 『지게』를 쓰고 있었다.
(바)『家屋 服飾 其他 娛樂 等』 家屋은 平地에는 『움집』山꼴에는 『귀틀집』이 많았고 溫突은 뒷날 高句麗로부터 시작되었다. 衣服의 빛갈은 대개 白色이었나니 이것은 청결함을 좋아하는 우리 民族性에서 나온 것이며, 特히 上流階級은 衣服에 사치를 하여 金 銀 珠 玉으로 장식하였다. 우리의 여러 族屬은 歌舞를 特히 질겼나니 이는 樂天的이며 平和를 좋아하는 性格에서 나온 것이며 樂器도 보암직한 것이 있나니 辰韓의 비파와 같은 樂器가 그의 一例이다.
지리적 환경과 대륙 세력의 충동에 의하여 남북 각지에 걸쳐있던 우리 여러 부족 사이에 수많은 나라가 버려졌다.
【남북의 여러 나라】 옛 나라인 부여(장춘과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를 비롯하여 고구려(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예(강원도 일대, 함경남도 일부), 옥저(함흥 일대를 중심으로) 등 여러 부족 국가가 반도 북부와 동남 만주에 걸쳐 일어났으니 특히 고구려와 예와 옥저는 한나라의 군현을 몰아내고 일어난 것이다. 남쪽의 진국(직산을 중심으로)은 후조선과 아울러 일어난 것으로서 한(韓) 부족의 여러 부락 가운데에 맹주가 되었다.
【삼한】 이와 같이 진국을 맹주로 하던 여러 부락 가운데 반자치적인 부락은 차차 지리적 조건과 경제적 발달을 따라 각각 여러 나라로 분화되었으니 (가) 마한(경기의 한강 유역 이남으로부터 충청 전라에 걸침)은 백제(광주를 중심으로), 월지(月支, 직산을 중심으로)를 비롯하여 오십 여의 부락 국가로 되고 (나) 진한(경상도의 동북부)은 사로(斯盧, 경주를 중심으로) 등 12국으로 되었으며 (다) 변한(변진이라고도 하니 경상도의 서남부)은 구야(狗耶, 김해를 중심으로) 등 12국으로 되었다.
『여러 나라의 사회상』 (가) 『정치와 형벌』 정사는 군장의 거느리는 아래에 우두머리가 각각 부락을 다스렸으며 【부락의 우두머리로는 마한의 신지·읍락, 부여의 마가·우가, 고구려의 대가 등이 있다.】 형벌은 대개 엄하였다. 부여에서는 살인한 사람은 죽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종을 만들고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열두 배를 물렸다. 고구려에서는 죄인이 생기면 여러 우두머리가 모여 의논한 다음에 그를 죽였으며 그의 처자까지 종을 만들었다.
(나) 『사회』 윗 계급은 특권을 가지고 서민과 노예를 부렸으며, 서민은 대개 윗계급의 부림을 받았고 그 밖에 노예가 있었다. 【윗 계급으로는 고구려의 대가가 곧 그것이며, 서민은 즉 하호임】
(다) 『신앙과 종교적 습속』 10월에 천신에 고사지내는 풍습이 널리 행해졌으며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마한의 10월 고사 등】 이밖에 마한에는 천신을 제사하는 사람을 천군이라 하여 그의 여러 나라에서는 각기 천군 한 사람씩을 두어 제사를 맡게 하고, 【제정의 분리】 또 각처에 소도(솟대)를 세웠으니 이는 귀신을 제사하는 신성한 곳이었다.
(라) 『산업』 농사(오곡)와 양잠과 길쌈(명주와 삼베)이 자못 발달하였으며 어염은 산골까지 넘나들었고 【진한의 철】 변한과 진한에서는 철을 캐어 화폐와 같이 썼으며 그것을 다시 낙랑 지방과 일본에까지 유통시켰다.
(마) 『무기와 기구』 무기로는 활, 화살, 칼, 창 등을 썼으니 특히 활은 맥궁과 단궁, 화살은 고시(楛矢)라 하여 예로부터 이웃 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으며, 짐질에는 『지게』를 쓰고 있었다.
(바) 『가옥, 복식, 기타 오락 등』 가옥은 평지에는 『움집』산골에는 『귀틀집』이 많았고 온돌은 뒷날 고구려부터 시작되었다. 의복의 빛깔은 대개 백색이었으니 이것은 청결함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성에서 나온 것이며, 특히 상류 계급은 의복에 사치를 하여 금은 주옥으로 장식하였다. 우리의 여러 족속은 가무를 특히 즐겼으니 이는 낙천적이며 평화를 좋아하는 성격에서 나온 것이며 악기도 볼만한 것이 있으니 진한의 비파와 같은 악기가 그 일례이다.
상고의 후기(삼국 시대)
[편집]제1장 삼국의 발흥과 발전
[편집]1. 삼국의 일어남과 6가야
[편집]『高句麗』 高句麗 部族이 漢나라의 세력을 (玄菟) 몰아내고 部落國家의 生活을 하다가 生蒙(鄒牟로도 씀)이 일어나 卒本(滿州의 懷仁縣)을 中心으로 새 나라를 마련하였나니 (國紀 2297 西紀前 37) 이 분이 高句麗의 始祖 東明聖王이다.
高句麗 사람은 본래부터 山꼴에서 農牧과 사냥으로 生活을 하며 또 같은 種族의 여러 部族과 (扶餘 沃沮 濊 等) 다른 種族들(漢의 遼東·玄菟-이 玄菟는 興京老城 方面으로 쫒겨가 있던 것임-樂浪 鮮卑 挹樓 等)에게 둘려쌓였으므로 이러한 가운데에서 發展함에는 자연히 鬪爭의 길을 밟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서 高句麗 사람은 제절로 武를 숭상하고 용맹스러운 性格을 갖추게 되어 鴨綠江流域을 中心으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나니, 高句麗는 처음부터 이웃 여러 나라를 倂呑하면서 漢나라(王莽)와 衝突을 거듭하였으며, 도읍은 琉璃王 때에 (第二代) 鴨綠江流域의 要衝인 國內城(滿洲의 通溝附近)으로 옮겼다.
『百濟』 馬韓의 伯濟(廣州)로부터 일어난 것이니 百濟는 始祖 溫祚를 中心으로 南으로 내려온 扶餘系統의 流移 族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國家로서 나타난 것이다.(國紀 2316 西紀前 18) 그러므로 百濟의 治者階級은 대개 扶餘系統을 받은 것으로서 뒷날까지도 百濟에는 有力한 氏族으로서 所謂 八族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國內의 要城은 王子와 宗族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百濟는 처음부터 南으로 馬韓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면서 때로는 西北으로 帶方 地方(黃海道 一帶)을 쳐 차차 領土的으로 發展하였고 도읍은 始祖 때에 잠간 慰禮城(지금 京城 附近)에 정하였다가 다음에 河南 慰禮城(廣州 古邑)으로 옮겼다.
『新羅』辰韓의 斯盧(慶州) 【斯盧와 新羅는 同音異寫임】로부터 일어난 것이니 斯盧의 氏族社會가 發展됨을 따라 六村 【斯盧의 六村 : 閼川楊山村, 突山高墟村, 嘴山珍支村, 茂山大樹村, 金山加利村, 明活山高耶村】 의 우두머리들이 赫居世를 임금으로 받들었다. (國紀 2277 西紀前 57) 이에서 斯盧는 새로운 나라로서 出發케 된 것이다.
新羅는 차차 안으로 여러 制度가 서며 밖으로 이웃 땅을 차지하면서 천천히 發展의 발길을 내디뎠다. 이같이 新羅는 氏族社會를 基礎로 하였으므로 【骨品制】 위ㅅ 階級에 있어서는 血統을 따라 聖骨 眞骨의 差別이 생겨 初期에는 聖骨出身이 王位에 오르게 되었으며 (第二十八代 眞德女王까지) 또 骨品이 같으면 氏가 다르더라도 王位에 오르는 준례가 서게 되어 朴(赫居世系) 昔(第四代 脫解王系) 金(第十三代 味鄒王系)의 세 系統이 서로 넘나들며 王位에 오르게 되었다
『六伽耶』 弁韓에서도 여러 새로운 나라가 일어났나니 六伽耶 【六伽耶 : 駕洛(金官), 大伽耶, 小伽耶, 星山伽耶, 險羅伽耶, 古寧伽耶】가 곧 그것이다. 六伽耶 가운데에도 洛東江 下流域에 首露王이 일어난 駕洛國 【駕洛과 狗耶는 同音異寫임】 과 (國紀 2375 西紀 42) 洛東江 上流域의 大伽耶(高靈)가 세력과 文化에 있어 가장 보암직한 것이니 特히 駕洛國은 狗耶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産業과 交通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고구려』 고구려 부족이 한나라의 세력(현토)을 몰아내고 부락국가의 생활을 하다가 주몽(추모로도 씀)이 일어나 졸본(만주의 회인현)을 중심으로 새 나라를 마련하였으니(국기 2297년, 서기전 37년) 이 분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다.
고구려 사람은 본래부터 산골에서 농목과 사냥으로 생활을 하며 또 같은 종족의 여러 부족(부여, 옥저, 예 등)과 다른 종족들(한나라의 요동, 현토-이 현토는 흥경노성(興京老城) 방면으로 쫒겨나 있던 것임-, 낙랑, 선비, 읍루 등)에게 둘러싸여 있으므로 이러한 가운데에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투쟁의 길을 밟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 사람은 저절로 무를 숭상하고 용맹스러운 성격을 갖추게 되어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처음부터 이웃 여러 나라를 병탄하면서 한나라(왕망)와 충돌을 거듭하였으며, 도읍은 제2대 유리왕 때에 압록강 유역의 요충인 국내성(만주의 통구 부근)으로 옮겼다.
『백제』 마한의 백제[광주]로부터 일어난 것이니 백제는 시조 온조를 중심으로 남으로 내려온 부여 계통의 유리 족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가로서 나타난 것이다.(국기 2316년, 서기전 18년) 그러므로 백제의 치자 계급은 대개 부여 계통을 받은 것으로서 뒷날까지도 백제에는 유력한 씨족으로서 이른바 8족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국내의 중요한 성은 왕자와 종족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백제는 처음부터 남쪽으로 마한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면서 때로는 서북으로 대방 지방(황해도 일대)을 쳐서 차차 영토적으로 발전하였고 도읍은 시조 때에 잠깐 위례성(지금의 경성 부근)에 정하였다가 다음에 하남 위례성(광주 옛 고을)으로 옮겼다.
『신라』 진한의 사로(경주)로부터 일어났으니 【사로와 신라는 같은 음으로 다른 글자임】 사로의 씨족사회가 발전됨에 따라 6촌 【사로의 6촌 :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의 우두머리들이 혁거세를 임금으로 받들었다.(국기 2277년, 서기전 57년) 이에 사로는 새로운 나라로 출발하게 되었다.
신라는 차차 안으로 여러 제도가 서며 밖으로 이웃 땅을 차지하면서 천천히 발전의 발길을 내디뎠다. 이같이 신라는 씨족사회를 기초로 하였으므로 【골품제】 윗 계급은 혈통을 따라 성골, 진골의 차별이 생겨 초기에는 성골 출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제18대 진덕여왕까지) 또 골품이 같으면 씨가 다르더라도 왕위에 오르는 준례가 서게 되어 박(혁거세계), 석(제4대 탈해왕계), 김(제13대 미추왕계)의 세 계통이 서로 넘나들며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6가야』 변한에서도 여러 새로운 나라가 일어났으니 6가야가 곧 그것이다. 【6가야 : 가락(금관), 대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6가야 가운데에서도 낙동강 하류 유역에 수로왕이 일으킨 가락국 【가락과 구야(狗耶)는 같은 음으로 다른 글자임】과 (국기 2375년, 서기 42년) 낙동강 상류 유역의 대가야(고령)가 세력과 문화에 있어 가장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가락국은 구야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산업과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2. 삼국의 발전과 쟁패
[편집]- (1) 三國의 領土的 發展
(가) 高句麗는 特히 大祖王(第六代) 時代로부터 美川王(第十五代) 時代까지가(國紀 2356-2644 西紀 53-311) 그의 興隆期로서, 西으로는 漢, 魏, 燕과 싸우면서 東北으로 扶餘, 挹婁, 東으로 沃沮, 濊 等을 經略하고, 西쪽의 玄菟(新)와 南쪽의 樂浪을 자조 쳐 美川王 때에 이르러는 마침내 玄茗(新)을 평정하여 遼河의 東편 地域을 차지하였으며 樂浪을 쳐 滅하여 半島로부터 漢族의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帶方방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 百濟는 廣州를 中心으로 점점 發展하더니 古爾王(第八代) 때로부터 近肖古王(第十三代) 時代까지가 (國紀 2567-2708 西紀 234-375) 그의 興隆期로서 안으로는 文物制度가 갖추어지고, 밖으로는 馬韓 諸國을 거의 平定하였으며 西北으로 帶方 一帶에 세력을 펴 高句麗와 다투기에 이르렸다.
(다) 新羅는 西北으로 百濟는 東南으로 領域이 각각 늘어가매 羅 濟兩國 사이에는 일찍부터 衝突을 거듭하였으며, 다시 新羅는 奈勿王(第十七代) 때에 이르러 그의 세력이 北으로 何瑟羅(江陵) 一帶에까지 미치게 되매 (國紀 2730 西紀 397年頃) 高句麗와의 관계도 점점 시끄럽게 되었다.
- (2) 麗濟의 攻爭과 羅濟의 同盟
(가) 百濟는 近肖古王 때에 이르러 帶方 땅에 세력을 펴고 平壤城下까지 쳐 들어가 高句麗의 故國原王(第十六代)을 戰死케 한 뒤로 (國紀 2704 西紀 371)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險惡하게 되었다.
(나)『廣開土王의 偉業과 高句麗세력의 南進』 【廣開土王碑】 高句麗의 廣開土王(第十九代)은 東征西伐 南進北討에 一生을 보내어 (國紀 2425-2745 西紀 392-419) 高句麗의 威力을 빛내며 領域을 크게 늘여 廣開土王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나니, 南으로 百濟를 쳐 漢水 以北을 차지하고 다시 新羅의 邊境을 엿보던 日本兵을 쳐 그것을 洛東江 上流域에서 殲滅하였으며, 東으로 향하여 당시 叛服이 無常하던 沃沮와 濊를 거듭 平定하고 北으로 碑麗國을 쳐 松花江 流域을 차지한 위에 東北으로 挹婁의 여러 部族을 (寧古塔 附近으로부터 沿海州에 걸쳤음) 平定하는 等 우리 歷史上에 未曾有의 武勳을 빛내었다.
그 다음 長壽王 때에는 廣開土王의 餘勢로써 세력을 더욱 南으로 내밀어 도읍을 平壤으로 옮기고(國紀 2760 西紀 427) 百濟를 드리쳐 그의 國都를 두려빼며 盖鹵王(第二十一代)을 베혀 百濟로 하야금 도읍을 熊津(公州)으로 옮기게 하였다.(國紀 2808 西紀 475) 【百濟는 그 뒤 聖王 때에 도읍을 다시 泗泚城으로 옮겼음】
그리고 연다라 新羅까지 쳐 南으로 내려온 結果 그의 領域은 竹嶺一帶로부터 南陽灣의 線까지 미치게 되었다. 高句麗의 壓力이 이같이 커지매 羅 濟兩國은 더욱 不安을 느껴 共同防禦를 目的으로 同盟을 맺었나니 이러한 三國間의 國際관계는 그 뒤 約 百餘年동안 계속되었다.
- (1) 삼국의 영토적 발전
(가) 고구려는 특히 태조왕(제6대 시대부터 제15대 미천왕 시대) 시대까지가 (국기 2356-2644년, 서기 53-311년) 그의 융성기이다. 서쪽으로는 한, 위, 연나라와 싸우면서 동북으로 부여, 읍루, 동으로 옥저, 예 등을 경략하고, 서쪽의 현토(新)와 남쪽의 낙랑을 자주 쳐서 미천왕 때에 이르러는 마침내 현토를 평정하여 요하의 동편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낙랑을 쳐서 멸하여 반도로부터 한족의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대방 방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 백제는 광주를 중심으로 점점 발전하더니 제8대 고이왕 때부터 제13대 근초고왕 시대까지가 (국기 2567-2708년, 서기 234-375년) 그의 융성기로서 안으로는 문물 제도가 갖추어지고, 밖으로는 마한 여러 나라를 거의 평정하였으며 서북으로 대방 일대에 세력을 펴 고구려와 다투기에 이르렀다.
(다) 신라는 서북으로 백제는 동남으로 영역을 각각 확장하면서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일찍부터 충돌을 거듭하였다. 신라는 제17대 내물왕 때에 이르러 그 세력이 북쪽으로 하금라(何瑟羅, 강릉) 일대에까지 미치게 되어 (국기 2730년, 서기 397년 경) 고구려와의 관계도 점점 시끄럽게 되었다.
- (2) 고구려·백제의 분쟁과 신라의 동맹
(가)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대방 땅에 세력을 펴고 평양성 아래까지 쳐들어가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한 뒤로 (국기 2704년, 서기 371년)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험악하게 되었다.
(나) 『광개토왕의 위업과 고구려 세력의 남진』 【광개토왕비】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왕은 동정 서벌과 남진 북토에 일생을 보내 (국기 2425-2745년, 서기 392-412년) 고구려의 위력을 빛내며 영역을 크게 늘여 광개토왕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다. 남으로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다시 신라의 변경을 엿보던 일본병을 쳐서 낙동강 상류 유역에서 섬멸하였으며, 동으로 향하여 당시 반역과 복종이 무상하던 옥저와 예를 거듭 평정하고 북으로 비려국을 쳐서 송화강 유역을 차지한 위에 동북으로 읍루의 여러 부족을(영고탑 부근으로부터 연해주에 걸쳤음) 평정하는 등 우리 역사상에 미증유의 무훈을 빛내었다.
그 다음 장수왕 때에는 광개토왕의 여세로써 세력을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국기 2760년, 서기 427년) 백제를 공격하여 그의 국도를 빼앗고 제21대 개로왕을 베어 백제의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기게 하였다.(국기 2808년, 서기 475년) 【백제는 그 뒤 성왕 때에 도읍을 다시 사비성으로 옮겼음】
그리고 연달아 신라까지 쳐서 남으로 내려온 결과 그 영역은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의 선까지 미치게 되었다. 고구려의 압력이 이같이 커지자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더욱 불안을 느껴 공동 방어를 목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삼국 간의 국제 관계는 그 뒤 약 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제2장 신라의 융성과 고구려의 무위
[편집]1. 신라의 강성
[편집]新羅 智證王(第二十二代) 때에 이르러 (國紀 2833-2847 西紀 500-514) 文物制度와 産業이 발달되었으며 세력도 매우 떨치기 시작하였나니 州, 郡, 縣의 地方制度가 갖추게 되었고 農業과 (牛耕이 시작되었음) 商業(서울의 東市가 열렸음)이 盛하였으며 于山國(鬱陵島)을 평정하여 海上에까지 세력을 펴게 되었다. 그 다음 法興王 때에 官制와 律令과 百官의 公服 等 여려 制度가 다시금 갖추게 되고 佛敎가 자못 行하였으며 駕洛國을 倂合하여 南海의 門戶를 손아귀에 넣었다.
【眞興王의 巡境碑】 다시 眞興王 時代에 이르러(國紀 2873-2999 西紀 540-576) 新羅의 세력이 飛躍的으로 發展되어 三國統一의 基礎가 잡혔나니 西北으로 漢江流域을 차지하여 麗·濟兩國을 南北으로 牽制하는 한편에 唐나라와의 通路를 열었으며, 西南으로는 六伽耶 가운데에 最後까지 남아 있던 大伽耶를 평정하고 北으로는 東海岸으로 뻗어나가 咸興 地方에까지 세력을 폈으며, 한편으로는 百濟의 聖王(第二十六代)을 邀擊하여 그를 주인 結果 오랫동안 계속되던 羅 濟同盟도 깨여지고 말았다.
【花郞】그 때에 國內에는 花郞의 活動이 자못 盛하여 國民의 推進力이 되었으며, 國史의 撰修와 (居柒夫 等) 巨刹(皇龍寺 興輪寺 等)의 創建 等 新羅의 國力과 文化가 크게 떨쳐 三國의 國際的 형세가 一變하기에 이르렀다.
제22대 신라 지증왕 때에 이르러 (국기 2833-2847년, 서기 500-514년) 문물제도와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세력도 매우 떨치기 시작하였다. 주·군·현의 지방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농업(우경이 시작되었음)과 상업(서울의 동시(東市)가 열렸음)이 성하였으며 우산국(울릉도)을 평정하여 해상에까지 세력을 펴게 되었다. 그 다음 법흥왕 때에 관제와 율령과 백관의 공복 등 여러 제도가 다시금 갖추어지게 되고 불교가 자못 행하여졌으며 가락국을 병합하여 남해의 문호를 손아귀에 넣었다.
【진흥왕의 순수비】 다시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국기 2873-2909년, 서기 540-576년) 신라의 세력이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삼국통일의 기초가 잡혔으니 서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남북으로 견제하는 한편 당나라와의 통로를 열었으며, 서남으로는 6가야 가운데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대가야를 평정하고 북으로는 동해안으로 뻗어나가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을 폈다. 한편으로는 백제의 제26대 성왕을 요격하여 그를 죽인 결과 오랫동안 계속되던 나제 동맹도 깨어지게 되었다.
【화랑】 그 때에 국내에는 화랑의 활동이 자못 성하여 국민의 추진력이 되었으며, 국사의 찬수(거칠부 등)와 거찰(황룡사, 흥륜사 등)의 창건 등 신라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떨쳐 삼국의 국제적 형세가 일변하기에 이르렀다.
2. 고구려와 수·당의 충돌
[편집]『隋寇』 (가) 隨 文帝와 煬帝의 侵略的 野望에 대하여 高句麗는 積極策으로써 遼西 地方으로 進擊하는 蒙古 一帶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突厥과 맺어 隋나라를 牽制하려 하였나니 이에서 두 세력이 마침내 부딪치게 되었다.
(나)『第一次 入寇』 嬰陽王(第二十六代) 九年에 (國紀 2931 西紀 598) 隨 文帝는 水陸 三十萬軍으로써 侵入하다가 中途에서 敗歸하고 말았다.
(다)『第二次 入寇와 蕯水大捷』 隨 煬帝(文帝 子)는 본래 政治的 虛榮心과 豪蕩한 性格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당【隨 煬帝가 大運河를 판 것도 高句麗 遠征 準備의 하나임】시 唯一의 强敵인 高句麗를 쳐 그들의 不安을 없이하는 同時에 그의 征服慾을 채우고 宿怨을 풀려는 決心 아래서 모든 國力을 기우려 遠征의 準備를 하였다.
그리하여 嬰陽王 二十三年에 이르러 隨 煬帝는 드디어 陸軍 百 十三 萬餘名과 江淮 水軍을 動員하여 大擧 侵入하였나니 이것은 未曾有의 大軍事 行動이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 편에서는 乙支文德의 總指揮 아래에서 邀擊의 態勢를 가다듬으며 멀리 온 敵을 疲勞케 한 다음에 쳐 부시려는 作戰을 세웠다. 隨軍은 遼河를 건너 遼東 각처의 要城을 攻擊하였으나 우리 軍의 굳세게 지킴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저편에서는 어느 곳보다도 高句麗의 서울 平壤을 치는 것이 勝利의 捷徑이라 하고 于伸文 宇文述 等이 精銳 三十萬 五千으로서 鴨綠江을 건너 平壤을 향하여 쳐 들어온다. 그 때에 乙支文德은 敵을 깊이 끌어들여 그것을 疲困케 한 다음에 一 擊을 加하려는 計劃을 세우고 짐짓 敗하는척 하면서 敵을 平壤 附近까지 끌어들였다. 隨軍은 과연 極度로 疲勞하여 戰意를 잃고 退却치 아니치 못하였나니 이에 各處에서 待機하고 있던 우리 군사는 四方에서 몰아쳐 蕯水(淸川江)까지 이르렀다. 【蕯水大捷】 그리하여 隋軍이 절반쯤 건너가는 것을 기다려 最後의 總攻擊을 한 結果 隨軍은 거의 殲滅되어 살아간 者가 二千 七百人 밖에 되지 못하였다. 隨 煬帝는 一敗塗地로 달아나니 전부터 사나운 政治에 不平을 품고 있던 그의 民衆은 機會에 四方에서 叛亂을 일으켜 隨나라는 마침내 滅亡하고 말았다.
『唐太宗의 入寇』 (가) 高句麗는 隨나라를 거꾸러트린 뒤에 그의 세력이 더욱 떨쳐 새로 일어난 唐나라에 큰 威脅을 주고 있었다. 그 때에 新羅에서는 麗濟 兩國을 牽制하려고 聯唐策을 써 자주 唐나라를 움지겼으며 高句麗에는 莫離支 【莫離支는 「머리치」로 읽을 것으로서 軍政 兩權을 걷어쥔 大臣의 職名임】 인 淵蓋蘇文이 唐나라에 對하여 强硬策을 쓴 結果 麗·唐의 兩大 세력 사이에 衝突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나)『安市城의 勝利와 唐 太宗의 敗歸』 寶藏王(第二十八代) 三代(國紀 2977 西紀 644)에 唐 太宗은 드디어 자기 國家의 脅威를 除去하려 決心하고 水陸 三十萬軍을 스스로 指揮하여 遼東 땅으로 侵入하였다. 이에 對하여 高句麗에서는 淵蓋蘇文의 作戰 아래에서 굳게 守勢를 지켜 敵으로 하여금 疲弊케 하는 戰法을 取하였다. 唐軍은 遼東 各處에서 高句麗의 要城을 攻擊하였으나 용이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犧牲을 내어 겨우 그것을 뺏었다. 그리고 당시 遼東 地方에 있던 高句麗의 主力은 安市城(盖平 東北의 英城子)에 모여 있으므로 이 城을 뺏지 못하면 平壤으로 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에 唐 太宗은 全軍을 몰아 安市城을 치나 우리 軍은 교묘히 막아내었다. 唐軍은 城밖에 土山을 쌓아 그 위에서 城中 【安市城】 을 내려다보고 치려하였으나 그 土山조차 우리 軍에게 빼앗겼다. 이리하여 八十八日 동안 安市城을 치던 唐 太宗은 마침내 맥이 풀려 敗軍을 걷어가지고 遼東의 진펄을 간신히 건너 허둥지둥 도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침입』 (가) 수 문제와 양제의 침략적 야망에 대하여 고구려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요서 지방으로 진격하는 몽고 일대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돌궐과 맺어 수나라를 견제하려 하였으니 이에 두 세력이 마침내 부딪치게 되었다.
(나) 『제1차 침입』 제26대 영양왕 9년(국기 2931년, 서기 598년)에 수 문제는 수륙 30만 군사로써 침입하다가 도중에서 패하여 돌아가게 되었다.
(다) 『제2차 침입과 살수대첩』 수 양제(문제의 아들)는 본래 정치적 허영심과 호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당시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도 고구려 원정 준비의 하나임】 유일의 강적인 고구려를 쳐서 그들의 불안을 없애는 동시에 그의 정복욕을 채우고 숙원을 풀기 위해 모든 국력을 기울여 원정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영양왕 23년에 이르러 수양제는 드디어 육군 113만여 명과 강회(江淮) 수군을 동원하여 대거 침입하였으니 이것은 미증유의 대군사 행동이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 편에서는 을지문덕의 총지휘 아래 요격의 태세를 가다듬으며 멀리서 온 적을 피로하게 한 다음에 쳐부수려는 작전을 세웠다. 수나라 군대는 요하를 건너 요동 각처의 요해처에 있는 성을 공격하였으나 우리 군이 굳세게 지키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저편에서는 어느 곳보다도 고구려의 서울 평양을 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라 하고 우신문, 우중술 등이 정예 30만 5천으로써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향하여 쳐들어왔다. 그때에 을지문덕은 적을 깊이 끌어들여 그들을 피로하게 한 다음에 일격을 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짐짓 패하는 척하면서 적을 평양 부근까지 끌어들였다. 수나라 군사는 과연 극도로 피로하여 전의를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에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 군사는 사방에서 몰아쳐 살수(청천강)까지 이르렀다. 【살수대첩】 그리하여 수나라 군사가 절반쯤 건너가는 것을 기다려 최후의 총공격을 한 결과 수나라 군사는 거의 섬멸되어 살아간 자가 2천 7백인 밖에 되지 못하였다. 수 양제는 패하여 재기불능의 상태로 달아나니 전부터 사나운 정치에 불평을 품고 있던 그의 민중은 이 기회에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당 태종의 침입』 (가) 고구려는 수나라를 거꾸러뜨린 뒤에 그 세력이 더욱 떨쳐 새로 일어난 당나라에 큰 위협을 주고 있었다. 그때에 신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견제하려고 당나라와 연합하는 정책을 써 자주 당나라를 움직였으며 고구려에는 막리지 【막리지는「머리치」로 읽으며 군사와 정치 두 권력을 거머쥔 대신의 직명임】 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하여 강경책을 쓴 결과 고구려와 당나라의 양대 세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말았다.
(나) 『안시성의 승리와 당 태종의 패귀(敗歸)』 제27대 보장왕 3년(국기 2977년, 서기 644년) 에 당 태종은 드디어 자기 국가의 위협을 제거하려 결심하고 수륙 30만 군을 스스로 지휘하여 요동 땅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의 작전 아래에서 굳게 수세를 취해 적을 피폐하게 하는 전법을 취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요동 각처에서 고구려의 중요 성들을 공격하였으나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성(요양)을 공략함에도 많은 희생을 내어 겨우 그곳을 빼앗았다. 당시 요동 지방에 있던 고구려의 주력은 안시성(개평 동북의 영성자)에 모여 있으므로 이 성을 빼앗지 못하면 평양으로 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에 당 태종은 전군을 몰아 안시성을 쳤으나 우리 군사들은 교묘히 이를 잘 막아내었다. 당나라 군사는 성 밖에 토산을 쌓아 그 위에서 성 안 【안시성】 을 내려다보고 치려하였으나 그 토산조차 우리 군사들에게 빼앗겼다. 이리하여 88일 동안 안시성을 치던 당 태종은 마침내 맥이 풀려서 남은 군사를 거두어 요동의 진펄을 간신히 건너 허둥지둥 도망하고 말았다.
제3장 삼국의 통일과 문화
[편집]1. 신라의 고구려·백제 합병
[편집]『三國의 情勢』 眞興王 以後로 新羅의 세력이 강성함에 高句麗와 百濟는 크게 위협을 받아 서로 맺게 되었다. 孤立 상태에 빠져 있던 新羅는 善德女王(第二十七代) 때에 積極的으로 聯唐策을 쓰며 金春秋는 外交에, 金庾信은 軍政에 힘을 들여 國力을 튼튼히 하고 있었다.
『百濟 平定』 百濟의 武王(第三十代)과 그 다음 義慈王은 享樂과 사치를 極히 하여 人民을 괴롭히고 政治를 어지럽게 한 위에 부질없이 新羅를 자조 侵攻하여 國力을 消耗하였다. 그 때에 新羅에는 聯唐策을 쓰던 金春秋가 王位에 오름에 (第二十九代 太宗武烈王) 唐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親密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武烈王 七年에 (國紀 2393 西紀 660) 新羅는 마침내 唐을 움지겨 聯合軍으로써 百濟를 치기에 成功하였다. 【唐의 百濟에 대한 積極策을 百濟의 與國인 高句麗 征伐의 前提임】
新羅에서는 金庾信이 五萬의 精兵을 거느리고 東北쪽으로 쳐 내려오고, 唐나라에서는 蘇定方이 十三萬軍으로써 바다를 건너 錦江 어구로 들어왔다. 不意의 夾擊을 받게 된 百濟는 매우 낭패하여 階伯은 決死隊 五千으로써 黃山벌에 나아가 金庾信과 싸웠으나 衆寡가 不敵으로 徶亡되고 錦江 어구에서 唐軍을 막던 百濟軍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羅唐軍은 서로 呼應하며 百濟의 서울 泗泚城(扶餘)을 두려빼고 義慈王을 항복시켜 百濟를 滅하였다. (百濟는 三十一代 六百七十八年을 지내었음)
『高句麗 平定』 高句麗에는 國威를 빛내고 있던 淵蓋蘇文이 寶藏王 二十五年에(國紀 2998 西紀 665) 죽으매 그의 一族 사이에 政權을 다루는 內訌이 일어나 그의 長子 男生은 唐나라로 내달아 降伏하고, 그의 아우 淵淨土는 十二城을 가지고 新羅에 붙이었다. 高句麗의 內部가 이같이 무너지매 百濟를 滅한 다음에 高句麗를 엿보던 新羅는 다시 唐나라와 맺아 出兵하기에 이르렀나니, 이는 文武王(第二十代) 七年의 일이다(國紀 3000 西紀 667).
唐나라에 있어서는 高句麗가 그들의 宿敵인지라 唐主 高宗(太宗의 子)은 新羅와 呼應하여 男生을 嚮導로 하고 李勣을 總指揮로 水陸 大軍을 움지겨 高句麗에 侵入하였다. 그 때에 高句麗는 內部가 아수선한 위에 凶年이 거듭 들어 나라의 基礎가 흔들었으나 오히려 二年 동안이나 敵軍과 싸우다가 寶臧王 二十七年(國紀 3001 西紀 668)에 平壤城이 羅唐軍에게 陷落되어 마침내 亡하고 말았다.(高句麗는 二十八代 七百五年을 지내었음)
『半島統一의 完成』 新羅가 唐나라를 끌어 百濟와 高句麗를 滅한 것은 그의 目的이 본래 唐나라의 세력을 利用하여 三國을 統一함에 있었다. 그러나 唐나라는 百濟 高句麗가 거꾸러진 뒤에 그의 중요한 각 地域을 軍事的으로 占據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래 新羅가 容認할바 아니려니와 百濟의 遺民과 高句麗의 遺民이 또한 抗唐의 旗幟를 내세우고 復興運動을 일으켰다.
百濟 사람으로는 王族 福信과 僧 道琛 等이 王子 豐을 세우고 周留城과 任存城 等을 근거로 하여 唐軍을 크게 괴롭혔으며 高句麗 사람으로는 劍牟岑 等이 寶臧王의 外孫 安舜을 세우고 한참동안 唐軍과 抗戰하였다. 이 兩國 遺民의 抗唐 復興運動을 大勢에 끌려 모두 失敗로 돌아갔으나 唐軍에 있어서는 또한 적지 않는 타격이었다.
이때에 新羅에서는 實力으로써 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기로 하고, 먼저 百濟 땅에 留屯하고 있는 唐軍을 쳐 내몰고 高句麗의 舊彊은 高句麗 遺民의 協力을 얻어 마침내 大同江 流域까지 回收하였나니, 이로부터 新羅의 北境은 大同江 流域으로부터 元山灣에 이르는 線이었다. 新羅의 이러한 强硬策으로 말미암아 唐나라와의 關係가 한 때에는 매우 險惡하였으나 세력이 차차 弱해 가고 있던 唐나라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삼국의 정세』 진흥왕 이후로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고구려와 백제는 크게 위협을 받아 서로 동맹을 맺게 되었다. 고립 상태에 빠져 있던 신라는 제27대 선덕여왕 때에 적극적으로 당나라와 연합 정책을 쓰고 김춘추는 외교에, 김유신은 군정에 힘을 들여 국력을 튼튼히 하고 있었다.
『백제 평정』 백제의 제30대 무왕과 그 다음 의자왕은 향락과 사치를 극히 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정치를 어지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질없이 신라를 자주 침공하여 국력을 소모하였다. 그때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 정책을 쓰던 김춘추가 제29대 태종 무열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당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친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열왕 7년에(국기 2393년, 서기 660년) 신라는 마침내 당을 움직여 연합군으로써 백제를 치기에 성공하였다. 【당의 백제에 대한 적극책은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려 정벌의 전제임】
신라는 김유신이 5만의 정병을 거느리고 동북쪽으로 쳐서 내려오고, 당나라는 소정방이 13만 군사로 바다를 건너 금강 어구로 들어왔다. 뜻하지 않게 협공을 받게 된 백제는 매우 낭패하였다. 계백은 결사대 5천으로써 황산벌에 나아가 김유신과 싸웠으나 많은 군사를 대적하지 못하고 패망하고 금강 어구에서 당나라 군사를 막던 백제군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은 서로 호응하며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의자왕을 항복시켜 백제를 멸하였다. (백제는 31대 678년을 지내었음)
『고구려 평정』 고구려는 국위를 빛내고 있던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국기 2998년, 서기 665년)에 죽자 그의 일족 사이에서 정권을 다투는 내홍이 일어나 그의 장자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가서 항복하고, 그의 아우 연정토는 12성을 가지고 신라와 붙었다. 고구려의 내부가 이같이 무너지자 백제를 멸한 다음에 고구려를 엿보던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맺어 출병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제20대 문무왕 7년의 일이다.(국기 3000년, 서기 667년)
당나라는 고구려가 그들의 숙적인지라 당 고종(태종의 아들)은 신라와 호응하여 남생에게 길을 인도하게 하고 이적을 총지휘자로 하여 수륙 대군을 움직여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 때에 고구려는 내부가 어수선할 뿐만 아니라 흉년이 거듭 들어 나라의 기초가 흔들렸다. 그러나 오히려 2년 동안이나 적군과 싸우다가 보장왕 27년(국기 3001년, 서기 668년)에 평양성이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에게 함락되어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28대 705년을 지내었음)
『반도 통일의 완성』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그 목적이 본래 당나라의 세력을 이용하여 삼국을 통일함에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거꾸러진 뒤에 그 중요한 각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거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래 신라가 용인할 바 아니었으나 백제의 유민과 고구려의 유민이 당나라에 저항하는 기치를 내세우고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백제 사람으로는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이 왕자 풍을 세우고 주류성과 임존성 등을 근거로 하여 당나라 군사를 크게 괴롭혔다. 고구려 사람으로는 검모잠 등이 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우고 한참동안 당나라 군사와 항전하였다. 이 양국 유민의 항당 부흥운동은 대세에 끌려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나라 군사에게는 또한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이때에 신라에서는 실력으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기로 하고, 먼저 백제 땅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사를 내몰고 고구려의 옛 강토는 고구려 유민의 협력을 얻어 마침내 대동강 유역까지 회수하였다. 이로부터 신라의 북쪽 경계는 대동강 유역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게 되었다. 신라의 이러한 강경책으로 말미암아 당나라와의 관계가 한때는 매우 험악하였으나 세력이 차차 약해지고 있던 당나라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2. 발해국(진국)의 일어남
[편집]高句麗의 遺將 大祚榮이 高句麗의 遺民과 靺鞨族을 걷우어 東牟山(滿洲의 敦化 附近)을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고 (國紀 3032 西紀 699) 國號를 震이라 하였나니(渤海는 唐에서 붙인 이름임)이는 高句麗 遺民의 復興運動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渤海는 始祖 高王(大祚榮) 때로부터 武王(第二代) 文王(第三代니 이 王 때에 도읍을 上京 龍泉府 즉 吉林省 東京城에 옮겼음)을 거쳐 宣王(第十代)에 이르는 동안에 周圍의 여러 族屬을 평정하여 廣大한 領域을 차지하였나니 東은 東海에 達하고(沿海州) 北은 黑龍江·松花江이 경계가 되었으며, 西는 松花江의 北流로부터 開原에 이르는 線이 國境이었고, 南은 咸南의 龍興江 附近에서 新羅와 接하였다.
【海東盛國】 그리하여 國內는 五京 十五府 六十二州로 나뉘었고 制度와 文物이 크게 發達하였으며 外交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新羅와 사귀는 한편에 唐나라와 通交를 열어 文物을 받아 들였고 때로는 日本과도 交通하였나니 당시 渤海는 海東盛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渤海는 그 뒤 哀王(第十四代) 때에 이르러 國勢가 자못 쇠약하더니 西쪽 이웃인 契丹에게 亡하였다.(國紀 3259 西紀 926, 十四代 二百五十年) 【高麗初期 渤海의 遺民이 많이 國內로 들어왔음】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거두어 동모산(만주의 돈화 부근)을 도읍으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국기 3032년, 서기 699년)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으니(발해는 당에서 붙인 이름임) 이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발해는 시조 고왕(대조영) 때부터 제2대 무왕, 제3대 문왕(이때에 도읍을 상경 용천부 즉 길림성, 동경성으로 옮겼음)을 거쳐 제10대 선왕에 이르는 동안에 주위의 여러 족속을 평정하여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동쪽은 동해에 이르고(연해주), 북쪽은 흑룡강과 송화강이 경계가 되었으며, 서쪽은 송화강의 북쪽 지류로부터 개원에 이르는 선이 국경이었고, 남쪽은 함경남도의 용흥강 부근에서 신라와 닿아 있었다.
【해동성국】 그리하여 국내는 5경 15부 62주로 나뉘었고 제도와 문물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일찍부터 신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당나라와 통교를 열어 문물을 받아 들였고 때로는 일본과도 교통하였으니, 당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발해는 그 뒤 제14대 애왕 때에 이르러 국세가 자못 쇠약해지더니 서쪽 이웃인 거란에게 망하였다. (국기 3259년, 서기 926년, 14대 250년) 【고려시기 발해의 유민이 많이 국내에 들어왔음.】
3. 삼국과 외국의 관계
[편집](가)『大陸 諸國과의 關係』 三國의 隆盛期는 대개 中國의 大分裂期 곧 五胡十六國 南北朝 時代에 당하므로 그에 대한 三國의 外交策은 매우 微妙하고 複雜하였다. 그러나 대개 政治的으로는 遠交近攻策, 文化的으로는 善隣策을 써 세력의 均衡과 文物의 輸入을 兼行하였다. 特히 中國과의 外交에 있어서는 朝貢 【朝貢은 곧 公的 貿易의 한 형식임】 이라는 形式을 通하여 實質的으로 貿易을 행한 것은 經濟와 文化의 發展에 있어 큰 意義가 있는 것이다. 高句麗는 中國과 이웃한 만큼 그의 南北 各期는 勿論이오. 匈奴 突厥과도 修交를 하였으며 百濟와 新羅는 黃海를 通하여 大陸의 여러 나라와 通交를 하였나니, 특히 新羅는 地理的 관계로 中國과의 直接 通交가 比較的 늦었었다.
(나)『大陸 文物의 流入과 佛敎의 弘通』 漢學과 技藝를 비롯하여 大陸의 文物 制度가 三國 文化에 적지 아니한 影響을 끼쳤거니와 特히 佛敎는 高句麗 小獸林王 때에 (國紀 2703 西紀 372) 前秦으로부터 들어와 뒤에 新羅에까지 流通되었으며, 百濟의 佛敎는 枕流王 때에 (國紀 2717 西紀 384) 바다를 건너 東晋으로부터 들어왔다. 이로부터 佛敎는 우리의 宗敎와 思想과 學藝 等 여러 방면에 큰 影響을 주어온 것이다.
(다)『日本과의 關係』 日本은 본래 많은 섬으로 나뉘어 있어 우리의 南北 諸國이 列立해 있을 時期에는 (三韓 時代) 日本에도 역시 수많은 部落 國家가 서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邪馬臺(야마도)國이 있어 차차 여러 部落 國家에 세력을 떨쳤던 듯하다. 그리고 그의 産業으로는 약간의 農業도 行하였으나 主로 고기잡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찍부터 弁韓의 狗耶(金海)등지에 건너와 우리의 文物을 받아가기 시작하였으며, 三國時代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文物 制度가 百濟를 主로 하여 日本(邪馬臺國을 中心으로)에 흘러가 소위 日本 文化의 基礎가 된 것이다. 新羅 高句麗와 日本 사이에는 文物이 흘러간 것은 적지 아니하나 政治的 관계는 거의 보암직한 것이 없었고 百濟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日本이 新羅와 관계가 圓滑치 못하였으므로 (日本 邊民의 侵寇로 因하여) 百濟에 향하여 親和를 求하였다. 그리하여 漢學 佛敎와 百工 技藝가 거의 百濟로부터 흘러간 것이다. 日本은 이와 같이 文化的으로 百濟에 依存한만큼 軍事에 있어서는 간혹 援助한 일도 있었다.
(가) 『대륙 여러 나라와의 관계』 삼국의 융성기는 대개 중국의 대분열기 곧 5호 16국, 남북조 시대에 해당하므로 그에 대한 삼국의 외교책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였다. 그러나 대개 정치적으로는 원교 근공책(遠交近攻策), 문화적으로는 선린책을 써서 세력의 균형과 문물의 유입을 겸행하였다. 특히 중국과의 외교는 조공 【조공은 곧 공적 무역의 한 형태임】 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무역을 행한 것은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있어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과 이웃할 만큼 그의 남북 각 왕조는 물론이요, 흉노·돌궐과도 수교를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는 황해를 통하여 대륙의 여러 나라와 통교를 하였다. 특히 신라는 지리적 관계로 중국과 직접 통교가 비교적 늦었다.
(나) 『대륙 문물의 유입과 불교의 전파와 보급』 한학과 기예를 비롯하여 대륙의 문물제도가 삼국 문화에 적지 아니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국기 2703년, 서기 372년) 전진으로부터 들어와 뒤에 신라에까지 유통되었으며,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때에(국기 2717년, 서기 384년) 바다를 건너 동진으로부터 들어왔다. 이로부터 불교는 우리의 종교와 사상과 학예 등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은 본래 많은 섬으로 나뉘어 있어 우리의 남북 여러 나라가 열립해 있을 시기(삼한 시대)에는 일본에도 역시 수많은 부락 국가가 서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사마도(邪馬臺) (야마도)국이 있어 차차 여러 부락 국가에 세력을 떨쳤던 듯하다. 그리고 산업으로는 약간의 농업도 행하였으나 주로 고기잡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찍부터 변한의 구야(김해) 등지에 건너와 우리의 문물을 받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문물제도가 백제를 주로 하여 일본(사마대국을 중심으로)에 흘러가 소위 일본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 고구려와 일본 사이에는 문물이 흘러간 것이 적지 아니하나 정치적 관계는 거의 볼만한 것이 없었고 백제와의 관계는 일본이 신라와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였으므로 (일본 변민의 침구로 인하여) 백제에 친화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한학, 불교와 백공, 기예가 거의 백제로부터 흘러 들어갔다. 일본은 이와 같이 문화적으로 백제에 의존한 만큼 군사를 간혹 원조한 일도 있었다.
4. 삼국의 문화와 사회상
[편집](가)『宗敎』 在來의 信仰으로 十月의 天神 고사 日月山川 祖上 其他 神靈의 제사 무당 占術 等이 佛敎의 弘通에 따라 思想 學問 工藝 等이 크게 발달하였다.
(나)『學問과 工藝』 天文, 【慶州의 瞻星臺는 東洋 最古의 天文臺임】 曆學 醫藥 漢學 算學 術數 國史 纂修 【李文眞의 刪修留記(高句麗) 高興의 百濟書記】 等이 널리 행하였으며, 敎育 機關으로는 大學(五經博士가 있음)과 學堂(高句麗에서는 扃堂이라 하였음)이 있었고 工藝로는 建築(城址 宮址 寺址 石塔 古墳 等) 그림(古墳의 壁畵) 彫刻(佛像 鍾 塼 瓦當 等) 裝身具(金冠 劍 帶 耳飾 頸飾 等) 樂器(玄琴 伽耶琴 琵琶 大笒 中笒 小笒 鼓 角 等) 等이 발달되었다.
(다)『社會』 貴族과 豪族이 特權을 가졌으며 (新羅의 聖骨 眞骨, 百濟의 八族, 高句麗의 五族 等) 庶民은 農 工 商業에 從事하였고 奴隷는 貴族과 豪族에게 매였었다.
(라)『特殊制度』 特殊制度로는 新羅의 花郞과 和白이 있나니 花郞의 精神은 實로 新羅 國家 發展의 推進力이 된 것이다. 花郞은 貴族 子弟로 美貌의 靑少年을 뽑아 만든 것이니 花郞들은 道義로 써 서로 가다듬고 歌樂으로 써 서로 즐기며 名山 大川을 찾아다니면서 祈禱도 하고 정성도 드려 精神을 修養하여 나라 일을 맡아볼 人材를 기르는 것으로서 宗敎的 修養團과 같은 것이다. 【五戒】 그의 精神으로는 당시의 『世俗五戒』인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有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이 곧 그것이다.
【和白】 和白도 新羅에서 行하던 것이니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사람을 모아 의논하여 決定하나니 만일 한 사람이라도 異議가 있으면 能議가 되는 법이다. 이는 氏族社會로부터 發達되어 내려온 美風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政治의 獨裁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가) 『종교』 재래 신앙으로 10월의 천신 고사, 일월 산천, 조상 및 기타 신령의 제사, 무당, 점술 등이 널리 행해졌으며 불교의 전파와 보급에 따라 사상, 학문, 공예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나) 『학문과 공예』 천문 【경주의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임】, 역학, 의약, 한학, 산학, 술수, 국사 편수 【고구려 이문진의 산수유기, 고흥의 백제서기】 등을 널리 행하였으며, 교육 기관은 대학(오경박사가 있음)과 학당(고구려에서는 경당이라 하였음)이 있었고, 공예는 건축(성지, 궁지, 사지, 석탑, 고분 등), 그림(고분의 벽화), 조각(불상, 종, 전, 와당 등), 장신구(금관, 검, 띠, 귀걸이, 목걸이 등), 악기(현금, 가야금, 비파, 대금, 중금, 소금, 고, 각 등) 등이 발달되었다.
(다) 『사회』 귀족과 호족이 특권을 가졌으며 (신라의 성골과 진골, 백제의 8족, 고구려의 5족 등) 서민은 농, 공, 상업에 종사하였고 노예는 귀족과 호족에게 매였었다.
(라) 『특수 제도』 특수 제도로는 신라의 화랑과 화백이 있으니 화랑의 정신은 실로 신라 국가 발전의 추진력이 되었다. 화랑은 귀족 자제로 미모의 청소년을 뽑아 만들었다. 화랑들은 도의로써 서로 가다듬고 가악으로써 서로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기도도 하고 정성도 드려 정신을 수양하여 나랏일을 맡아볼 인재를 기르는 것으로서 종교적 수양단과 같은 것이다. 【오계】 그 정신으로는 당시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인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유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 곧 그것이다.
【화백】 화백도 신라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사람을 모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의논을 그치게 되는 법이다. 이는 씨족 사회로부터 발달되어 내려온 미풍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정치의 독재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