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본/제4편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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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민족의 수난과 반항[편집]

【海外亡命】 韓日合倂의 詔書가 내리자 新聞의 論調를 嚴重히 누르며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면 모다 잡아 가두고 政治 演說과 集會를 一切 禁하며 우리 同胞는 오즉 숨만 겨우 쉴 지경에 이르렀다. 분함을 참다 못하여 海外로 亡命한 志士들도 많았고 혹은 나의 피를 스스로 흘려 이 드럽힌 歷史를 씨스려고 自殺한 선비 官吏 學生들도 많았으며 또 寺內統監과 韓國 高官의 暗殺陰謀와 地方騷擾도 있었으나 日本의 자심한 壓迫으로 차츰 平定되어가는듯 하였다. 總督官制가 發布되고 寺內正毅가 初代總督이 되어 武斷政治를 실시하고 言論結社의 自由를 完全히 뺏어 不平分子라고 認定하면 모조리 잡아 가두고 新聞의 發行도 停止시키게 되었다.

이와 같이 눈 귀 입을 트러막히우고 우리 民族은 어둠속에서 헤매었으며 政治上 社會上 不平은 날로 높아갔으나 혹독한 壓迫下에는 해여볼 도리가 없었다.

【亡命志士活動】 몇몇 志土들은 큰 뜻을 품고 美國 露領의 沿海州 혹은 中國 上海 等地로 亡命하여 그곳을 根據삼고 國權의 回復을 꾀하였으니, 西紀 一九一四年 七月에 第一次 歐洲大戰이 일어나고 一九一七年 八月에 瑞典 서울「스토크호름」에서 萬國社會黨大會가 열리자 代表를 보내어 朝鮮의 獨立을 要望하였으며 그 해 九月에 美國 「뉴욕」에서 弱小民族 二十五國會議가 열리자 또 代表를 보내는 等 亡命鬪士의 運動은 자못 믿엄직 하였다. 第一次 歐洲大戰은 獨逸의 屈服으로 끝이 나고 그 때 美國大統領 「윌손」이 民族自決主義를 부르짖으니 온 世界의 弱小民族은 獨立運動을 일으키게 되었다.

【國權同復運動】 이때를 당하여 우리 民族은 內外地에서 呼應하여 힘을 모으더니 드디어 日本政府·貴衆兩院·政黨首領·朝鮮總督에게 『合倂後 朝鮮人 一般은 日本政治에 服從치 않으며 그 다스림을 받고저 하지 않으니 國權을 돌리어 보내라』는 글을 보내고 美國 大統領과 巴里講和會議에 대하여는 「平和를 基礎로 한 새 世界가 建設되려는 오늘날 朝鮮만이 日本의 壓迫政治 아래 있음」을 하소연하기로 하여 一大 獨立運動을 일으키게 되었다.

【三一運動】 즉 民族代表 孫秉熙 등 三十三人은 天道敎 基督敎 佛敎 其他의 諸團體 내지 學生 貴族 등과 연락하여 西紀 一九一九年 己未 三月 一日에 서울 탑골公園에서 數十萬의 大衆과 더부러 「獨立宣言書」를 朗讀하고 大韓獨立萬歲를 高唱하며 一大示威運動을 일으키니 이에 全國이 呼應하여 방방곡곡에서 獨立萬歲 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나 한때 굉장한 氣勢를 보이었다.

日本은 軍隊로써 이를 누르려 할새 여러 곳에서 民衆과 衝突하여 多數한 死傷者를 내였거니와 더욱이 水原郡 鄕南面에서는 日兵의 放火와 發砲로 殘忍을 極한 虐殺이 있었다. 이것을 三一運動 또는 己未萬歲事件이라 하며 이 소동의 餘波는 여러 해를 두고 움직이게 되었고 많은 志士가 獄中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假政府樹立】 이 事件을 기틀로 하여 大韓民國臨時政府가 組織되어 本部를 上海 佛國 租界에 두고 끊임없이 內外와 連絡하여 好機가 오기만 기다리었다.

이 己未運動은 비록 列國에 호소하여 獨立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民族覺醒에 큰 힘을 주었으니 言論 宗敎界등 모든 知識人은 民族自立의 基礎는 民族文化의 向上에 있음을 깨닫고 敎育振興 物産獎勵 등의 運動에 힘을 기우리게 되었다. 이 事件後 武斷政治는 물러가고 齋藤實이 總督으로 와서 所謂 文化政治를 내세우고 新聞의 發行 許可 등 약간 어루만지려는 뜻이 보이었으나 根本으로 그 악착스러운 植民地政策이 變할수 없어 여러 번 總督이 바뀌는 동안에 敎育 行政 등 모든 方面에 차차로 좀먹어 들기 시작하여 터문이 없이 우리 겨레를 자기네에게 同化시키려 하였다. 오랜 歷史와 찬란한 文化를 가졌던 우리 民族이 이 흉한 꾀에 넘어갈배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다.

【燭彈事件】 이와 같은 壓迫 속에서도 上海 臨時政府가 보낸 義烈團員 羅錫疇는 우리 기름진 땅의 피를 긁어먹던 京城 東洋拓殖會社에 爆彈을 던졌으며(西紀 1926) 星州 사람 張鎭弘은 朝鮮銀行 大邱支店에 爆彈을 던져(西紀 1927) 잠들려던 民衆을 깨우쳤다.

【光州學生事件】 西紀 一九二九年 十一月에는 光州에서 汽車 通學을 하던 朝·日 中學生間에 싸움이 일어나 이것이 端緖가 되어 마침내 全朝鮮 學生의 集團的 示威運動이 벌어지고 때를 타서 社會主義 先輩들의 指導로 萬歲運動이 全國的으로 일어나 百 二十九校의 젊은 生徒가 이에 가담하여 그 이듬해 二月까지 계속하였다.

【新幹會運動】 그동안 社會主義의 地下活動도 눈부시게 展開되어 部分的인 經濟的 鬪爭에서 政治運動으로 옮기고 民族主議와 社會主義는 合同하여 民族單一戰線으로서 新幹會의 創立을 보게 되어 三萬餘의 會員을 가지게 되었다.

西紀 一九三一年 日本이 滿洲事變을 일으키니 그들의 우리에 對한 壓迫 干涉은 더욱 심하여지므로 海外의 鬪士들은 中國의 抗日反滿運動과 손을 잡아 活潑한 活動을 開始하였다. 臨時政府 金九가 보낸 李奉昌은 西紀 一九三二年 一月 八日에 日本 天皇을 그 宮城 櫻田門 밖에서 狙擊하였으며 그 해 四月 二十九日에는 尹奉吉이 日皇 生日 祝賀式場에 爆彈을 던지어 中國을 좀먹어들어가던 魁首 白川大將을 卽死케 하고 駐華大使 重光과 海軍中將 野村 등을 負傷케 하여 一時 世上의 耳目을 놀라게 하였다.

【해외 망명】 한일합병의 조서가 내려지자 신문의 논조를 엄중히 누르며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고 정치 연설과 집회를 일절 금하며 우리 동포는 오직 숨만 겨우 쉴 지경에 이르렀다. 분함을 참다못하여 해외로 망명한 지사들도 많았고 혹은 나의 피를 스스로 흘려 이 더럽혀진 역사를 씻으려고 자살한 선비, 관리, 학생들도 많았으며 또 사내(寺內, 데라우치) 통감과 한국 고관의 암살 음모와 지방 소요도 있었으나 일본의 자심한 압박으로 차츰 평정되어가는 듯하였다. 총독 관제가 발포되고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 정치를 실시하고 언론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뺏어 불평분자라고 인정하면 모조리 잡아 가두고 신문의 발행도 정지시켰다.

이와 같이 눈, 귀, 입을 틀어막으니 우리 민족은 어둠속에서 헤매었으며 정치상, 사회상의 불평은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혹독한 압박 아래에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망명 지사 활동】 몇몇 지사들은 큰 뜻을 품고 미국, 러시아령의 연해주 혹은 중국 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그곳을 근거삼아 국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서기 1914년 7월에 제1차 구주대전이 일어나고 1917년 8월에 스웨덴의 서울인「스톡홀름」에서 만국 사회당 대회가 열리자 대표를 보내어 조선의 독립을 요망하였으며 그해 9월에 미국 「뉴욕」에서 약소민족 25국 회의가 열리자 또 대표를 보내는 등 망명 투사의 운동은 자못 믿음직하였다. 제1차 구주대전은 독일의 굴복으로 끝이 나고 그 때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부르짖으니 온 세계의 약소민족은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국권 회복 운동】 이때를 당하여 우리 민족은 내외에서 호응하여 힘을 모으더니 드디어 일본 정부, 귀·중 양원(貴衆兩院), 정당 수령, 조선 총독에게 『합병 후 조선인 일반은 일본정치에 복종하지 않으며 그 다스림을 받고자 하지 않으니 국권을 돌려보내라』는 글을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하여 「평화를 기초로 한 새 세계가 건설되려는 오늘날 조선만이 일본의 압박 정치 아래 있음」을 하소연하기로 하여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3·1 운동】 즉 민족대표 손병희 33인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기타 여러 단체 내지 학생, 귀족 등과 연락하여 서기 1919년 기미년 3월 1일에 서울 탑골공원에서 수십만의 대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일대 시위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전국이 호응하여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나 한때 굉장한 기세를 보였다.

일본은 군대로 이들을 누르려 하였으나 여러 곳에서 민중과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더욱이 수원군 향남면에서는 일본의 방화와 발포로 잔인한 학살이 있었다. 이것을 3·1 운동 또는 기미만세사건이라 하며 이 소동의 여파는 여러 해를 두고 움직이게 되었고 많은 지사가 옥중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임시 정부 수립】 이 사건을 기틀로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본부를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두고 끊임없이 내외와 연락하여 좋은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미운동은 비록 열국에 호소하여 독립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 각성에 큰 힘을 주었다. 언론, 종교계 등 모든 지식인은 민족 자립의 기초는 민족문화의 향상에 있음을 깨닫고 교육 진흥, 물산 장려 등의 운동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무단정치는 물러가고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이 총독으로 와서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고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약간 어루만지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식민지 정책이 변할 수 없어 여러 번 총독이 바뀌는 동안에 교육, 행정 등 모든 방면에 차차로 좀먹어 들기 시작하여 터무니없이 우리 겨레를 자기네에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우리 민족이 이 흉한 꾀에 넘어가지 않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폭탄 사건】 이와 같은 압박 속에서도 상해 임시정부가 보낸 의열단원 나석주는 우리의 기름진 땅을 긁어먹던 경성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며(서기 1926년) 성주 사람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서기 1927년) 잠들려던 민중을 깨우쳤다.

【광주 학생 사건】 서기 1929년 11월에는 광주에서 기차 통학을 하던 조·일 중학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이것이 단서가 되어 마침내 전조선 학생의 집단적 시위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를 타서 사회주의 선배들의 지도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129학교의 젊은 생도가 이에 가담하여 그 이듬해 2월까지 계속하였다.

【신간회 운동】 그동안 사회주의의 지하 활동도 눈부시게 전개되어 부분적인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 운동으로 옮기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합동하여 민족 단일 전선으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보게 되어 3만 여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다.

서기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더니 그들은 우리에 대한 압박과 간섭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해외의 투사들은 중국의 항일 반만 운동과 손잡고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임시정부 김구가 보낸 이봉창은 서기 1932년 1월 8일에 일본 국왕을 그 궁성 영전문(櫻田門) 밖에서 저격하였다. 그해 4월 29일에는 윤봉길이 일왕 생일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중국을 좀먹던 괴수 백천(白川,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즉사하게 하고 주중 대사 중광(重光, 시게미쓰 마모루)과 해군 중장 야촌(野村, 노무라 기치사부로) 등을 부상하게 하여 한때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제2장 민족의 해방[편집]

日本帝國主義의 그칠줄 모르는 壓迫과 侵略을 滿洲事變과 中日戰爭을 일으키고 나아가 美英과도 싸움을 시작하여 世界의 여러 나라와도 外交를 끊고 孤立하게 되었다.

【言論束縛】 그러는 동안에 우리에 對한 政策은 날로 苛酷하여져서 우리의 말을 배우지도 못하게 쓰지도 못하게 하며 이를 썼다 하야 天眞한 學徒 兒童들에게 간악한 刑罰을 주고 우리말의 新聞雜誌를 廢止시키며 學術團體를 解散시켰다. 그뿐아니라 創氏制度를 實施하여 强制로 日本式 氏名을 짓게 하여 소위 內鮮一體라 부르짖고 志願兵制를 强行하여 우리의 靑年들을 戰場으로 몰아내고 그도 不足하므로 徵兵 徵用의 制度를 만들어 우리의 수많은 일꾼들을 犧牲으로 바치면서 戰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日本이 侵略以來 우리의 쌀로 배부르게 살더니 開戰以來 우리의 農民이 피 땀으로 걷우운 食糧을 거의 다 供出케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生地獄에서 허덕이게 하였다. 日本은 歷史가 있어옴으로 부터 外國과의 戰爭에 저본적이 없다고 뻠내고 그렇게 속여 왔었다.

그러나 惡한 者는 天罰로 망하는 법이라 人道와 正義를 짓밟은 그들은 마침내 西紀 一九四五年 八月 九日에 美 英 中 蘇의 聯合軍앞에 無條件으로 降服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日本은 侵略한 모든 領土를 잃고 聯合軍 管理下로 들어가니 우리 朝鮮도 三十五年만에 그들의 굴레를 벗게 되었다. 아! 얼마나 시원한 일이냐 日本의 惡政으로 복끼고 시달리던 우리는 이제야 지난날의 試鍊을 토대로 하여 眞正한 民主主義의 國家와 찬란한 文化를 건설하야 全世界 人類의 平和와 自由에 이바지함이 있어야 하겠다.

일본제국주의의 그칠 줄 모르는 압박과 침략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나아가 미·영과도 싸움을 시작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와도 외교를 끊고 고립하게 되었다.

【언론 속박】 그러는 동안에 우리에 대한 정책은 날로 가혹하여져서 우리의 말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를 썼을 경우 천진한 학도, 아동들에게 간악한 형벌을 주었으며 우리말의 신문 잡지를 폐지시키고 학술 단체를 해산시켰다. 그뿐 아니라 창씨 제도를 실시하여 강제로 일본식 씨명을 짓게 하여 소위 내선일체라 부르짖고 지원병제를 강행하여 우리의 청년들을 전장으로 몰아내었다. 그도 부족하여 징병, 징용 제도를 만들어 우리의 수많은 일꾼들을 희생으로 바치면서 전쟁을 계속하였다.

일본이 침략 이래 우리의 쌀로 배부르게 살더니 전쟁을 시작한 이래 우리의 농민이 피 땀으로 거둔 식량을 거의 다 공출하게 하여 백성을 생지옥에서 허덕이게 하였다. 일본은 역사가 생긴 이래 외국과의 전쟁에 져 본 적이 없다고 뽐내고 그렇게 속여 왔었다.

그러나 악한 자는 천벌로 망하는 법이라 인도와 정의를 짓밟은 그들은 마침내 서기 1945년 8월 9일에 미·영·중·소의 연합군 앞에 무조건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침략한 모든 영토를 잃고 연합군의 관리 아래로 들어가니 우리 조선도 35년 만에 그들의 굴레를 벗게 되었다. 아! 얼마나 시원한 일이냐. 일본의 악정으로 볶이고 시달리던 우리는 이제야 지난날의 시련을 토대로 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의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여 전 세계 인류의 평화와 자유에 이바지함이 있어야 하겠다.


나머지의 말[편집]

解放前 三十五年이란 歲月은 우리의 過去 數千年 歷史의 긴 歲月에 比하면 한 瞬間, 刹那에 지나지 못하나 우리의 光輝있는 民族史上에 印찍힌 恥辱의 汚點은 이를 씻으려하여도 씻을 수 없고 또 그 동안 받은 壓迫의 苦痛은 잊으려하여도 잊을 수 없다.

옛날에도 外族의 侵入과 壓力으로 혹은 굴복 혹은 國土의 一部를 빼앗긴 일도 있었지만 우리의 온 國土, 온 民族을 들어 外族의 統治下에 놓이게 하여 아무런 自由를 가지지 못한 奴隷의 生活을 한 것은 지나간 倭政時代가 첨이었다.

그러나 어느 點으로 보면 이 恥辱과 苦痛은 過去 오래ㅅ동안 병들어 온 우리 民族에 對한 一種의 藥石이요 또한 큰 敎訓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란 원래 患難에서 緊張하고 放心에서 禍를 당하기 쉽거니와 過去 조선 사람처럼 緊張이 속히 풀어져 姑息的 小局的인 態度를 가진 民族은 드문 것 같다. 또 우리의 先民이 古來 事大主義의 慣性에서 自主獨立性이 박약하였던 것도 속일 수 없는 事實이다. 이런 버릇은 우리가 이를 악물고 고치지 아니 하면 우리의 進路에 또 어떠한 禍難이 닥칠지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半島의 位直가 幸이라 할찌 不幸이라 할찌 諸外國勢力의 侵入과 爭衝을 되푸리하기 쉬운 곳임을 더 한번 認識하고 깨다를 必要가 있다.

이 解放이 비록 聯合軍의 偉大한 勝利로 因하여 結果된 것이라 할찌나 그 동안 우리 先輩 志士들이 많은 목숨을 바쳐가며 오래ㅅ동안 鬪爭하여 온 나머지의 天의 報答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여 보면 이번 이 解放이 순연히 남의 힘으로만 된 安價的의 것은 決코 아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過去를 똑 바루 回顧하고 反省하고 現下의 內外情勢를 잘 把握하는 同時에 大局的인 立場에서 小我 小局的인 態度를 버리고 앞으로 新國家 新文化의 建設을 위하여 一路 邁進하여야 하겠고 또 나아가 世界의 平和와 文化에 이바지할 覺悟와 自負心을 가져야 할 것을 거듭 말하여둔다.

해방 전 35년이란 세월은 우리의 과거 수천 년 역사의 긴 세월에 비하면 한 순간, 찰나에 지나지 못하나 우리의 광휘 있는 민족사상에 낙인찍힌 치욕의 오점은 이를 씻으려하여도 씻을 수 없고 또 그 동안 받은 압박의 고통은 잊으려하여도 잊을 수 없다.

옛날에도 외족의 침입과 압력으로 혹은 굴복 혹은 국토의 일부를 빼앗긴 일도 있었지만 우리의 온 국토, 온 민족을 들어 외족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하여 아무런 자유를 가지지 못한 노예의 생활을 한 것은 지나간 왜정 시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느 점으로 보면 이 치욕과 고통은 과거 오랫동안 병들어 온 우리 민족에 대한 일종의 약석(藥石)이요, 또한 큰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란 원래 환란에서 긴장하고 방심에서 화를 당하기 쉽거니와 과거 조선 사람처럼 긴장이 속히 풀어져 고식적, 소국적인 태도를 가진 민족은 드문 것 같다. 또 우리의 선조가 종래 사대주의의 관성에서 자주 독립성이 박약하였던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버릇은 우리가 이를 악물고 고치지 아니 하면 우리의 진로에 또 어떠한 화난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더구나 우리 반도의 위치가 행인지 불행인지 여러 외국 세력의 침입과 충돌을 되풀이하기 쉬운 곳임을 더 한번 인식하고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해방이 비록 연합군의 위대한 승리로 인한 결과일지라도 그 동안 우리 선배와 지사들이 많은 목숨을 바쳐가며 오랫동안 투쟁하여 온 나머지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여 보면 이번 이 해방이 순연히 남의 힘으로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과거를 똑바로 회고하고 반성하고 현재의 국내의 정세를 잘 파악하는 동시에 대국적인 입장에서 소아(小我) 소국적인 태도를 버리고 앞으로 새 국가, 새 문화의 건설을 위하여 매진하여야 하겠고 또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문화에 이바지할 각오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을 거듭 말하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