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본/제3편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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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전기(국기 3725-3900년, 태조-명종 말)[편집]

여기에 이른바 前期는 즉 李氏 太祖의 開國으로부터 第十三代 明宗 末까지의 約 一百 七十 六年間을 가리킨 것이니 이것을 또 細分한다면 國初로부터 第九代 成宗 末까지를 前一期, 第十代 燕山君으로부터 明宗 末까지를 後一期로 나누어볼 수 있다.

【前一期】 前一期에 있어서는 대개 治者 階級에 偉大한 抱負를 가진 이가 續出하여 ─ 모든 過渡期的 現象에서 ─ 政治·經濟의 改善, 文化의 向上에 온 힘을 기우리어 文物 制度의 찬란(燦爛)한 꽃밭을 이루게 되었고 儒敎로써 治國의 原理를 삼았던 만큼 이를 偏重한 느낌은 있었으나 그러나 그 儒敎는 空理空談的인 理學(道學)이 아니고 利用厚生의 實學이었으며 佛敎에 對하여는 國初로부터 多少 制限을 加하여왔으나 世宗·世祖와 같은 好佛의 主가 있어 도리어 이를 保護하였다. 또 밖으로 胡人(女眞) 倭人을 制壓하여 特히 胡人에게는 不絶한 積極策을 써서 그들을 豆滿 鴨綠(上中流) 兩江 外로 물리쳐 江內의 땅을 確保하였다. 그리하여 半島國家로서의 가장 隆盛期를 이루는 同時에 近世朝鮮의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後一期】그런데 後一期에는 前日로부터의 오랜 太平 속에 나쁜 慣性이 생기기 시작하여 혹은 호사방종(豪奢放縱)의 主(燕山君)가 나서 政治를 어지러이 하고 모든 方面에 弊害를 끼쳐주었으며 혹은 朝臣 사이에 理論·感情의 對立, 政權의 다툼으로 여러 번 참혹한 禍(士禍)을 되푸리하여 黨派 大分裂의 조짐이 이미 싹텄었다. 그러한 가운데 政治는 姑息的이요 消極的임을 免치 못하였고 學界는 理學(道學) 一便으로, 佛敎는 점점 壓迫의 一路를 밟게 되었다. 또 밖으로 北胡南倭의 跳梁에 對하여도 아무런 確乎한 對策과 防備를 시설치 못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後日 倭亂 胡亂에 있어 朝鮮이 土崩瓦解의 쓰라린 經驗을 맞보게 된 까닭이었다. 이와 같이 前後 二小期에는 각각 다른 點이 많이 있으나, 그러나 全般을 通하여 보면 안으로나 밖으로나 아직 全體的인 큰 變動과 큰 刺戟을 본 일이 없이 國內의 太平이 계속되었던 것은 事實이다. 이것이 第二編에 述할 中期의 歷史와는 多少 다른 點이라 하겠다.

여기에 이른바 전기는 즉 이씨 태조의 개국으로부터 제13대 명종 말까지의 약 176년간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을 또 세분하면 국초로부터 제9대 성종 말까지를 전1기, 제10대 연산군으로부터 명종 말까지를 후1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1기】 전1기는 대개 지배 계급에서 위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이 속출하여 -모든 과도기적 현상에서- 정치·경제의 개선, 문화의 향상에 온 힘을 기울여 문물제도의 찬란한 꽃밭을 이루게 되었고 유교를 치국의 원리로 삼았던 만큼 이에 편중한 느낌은 있었다. 그 유교는 공리공담적인 이학(도학)이 아니고 이용후생의 실학이었다. 불교는 국초부터 다소 제한을 가하여 왔으나 세종·세조와 같은 호불(好佛)의 군주가 있어 도리어 이를 보호하였다. 또 밖으로는 호인(여진), 왜인을 제압하였는데 특히 호인에게는 계속 적극책을 써서 그들을 두만강, 압록강(상류와 중류) 밖으로 물리쳐 강 안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반도국가로서의 융성기를 이루는 동시에 근세조선의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후1기】 그런데 후1기에는 오랜 태평 속에 나쁜 관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호사 방종한 왕 연산군이 나타나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모든 방면에 폐해를 끼쳤으며 혹은 조정의 신하 사이에서 이론·감정의 대립, 정권의 다툼으로 여러 번 참혹한 사화를 되풀이하여 당파 대분열의 조짐이 이미 싹텄다. 그런 가운데 정치는 고식적이고 소극적이었으며 학계는 이학 즉 도학으로, 불교는 점점 압박의 일로를 밟게 되었다. 밖으로는 북호 남왜의 날뛰는 짓에 대하여 확고한 대책과 방비를 마련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훗날 왜란, 호란으로 조선이 토붕 와해의 쓰라린 경험을 맞보게 된 까닭이었다. 이와 같이 전후 두 시기에 각각 다른 점이 많이 있으나 전반을 통하여 보면 안으로나 밖으로나 아직 전체적인 큰 변동과 자극 없이 나라의 태평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제2편에서 서술할 중기의 역사와는 다소 다른 점이라 하겠다.


제1장 초기의 정치와 문화[편집]

1. 이씨 조선의 개국과 국도 문제[편집]

【朝鮮의 開國】 麗末 永興 出身의 武臣인 李成桂의 現出은 開京의 舊貴族과 王室에 對한 一大脅威이었다. 開京의 舊勢力과 및 그것을 背景으로한 一派는 대개 麗末의 現狀을 維持하려 함에 對하여 新勢力인 李成桂의 一派는 그것을 打破 改革하려 하였다. 이 두 勢力 사이에 격렬한 對立과 鬪爭이 展開되다가 결국 李氏派의 一方的 勝利에 依하여 舊勢力은 一掃되고 最後의 괴뢰(傀儡) 王室도 따라 廢하여지고 대신 新王朝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國紀 3725年 (恭讓王 四年) 壬申 七月 十七日은 즉 이 新貴族 李成桂가 無血革命에 依하여 開京에서 盛大한 卽位式을 擧行하던 開國의 첫날이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李氏朝鮮의 太祖(改諱旦)니 太祖는 卽位初에 있어 人心을 너무 刺戟시키지 아니하려 함인지 (혹은 對明關係로 因함인지) 國號를 前대로 高麗라 하고 모든 制度와 組織을 고치지 아니하고 一見 舊王朝의 延長과 같은 느낌을 주었었다. 國號를 政式으로 고치어 朝鮮이라고 한 것은 卽位 二年 二月이었다.

【太祖의 政策】 太祖를 中心으로 한 革命派는 대개 佛敎를 排斥하던 麗末의 儒臣들이었으므로 太祖는 그들의 主義 主張에 依하여 儒敎를 누르고 儒敎로서 治國의 原理를 삼았었다. 그리하여 儒敎는 이후 기리 五百年間 政治와 敎學에서 뿐아니라 一般 國民의 日常生活에까지 그 原理가 支配하여 왔던 것이다. 또 太祖는 종래의 農本主義에 立脚하여 開國 벽두(劈頭)로부터 農業의 獎勵, 田野의 開墾, 鳥口의 增殖에 就하여 地方官吏를 督勵하였으니 이 政策은 역시 代代로 繼承되어 農業國家로서의 發展을 一層 보게 되었던 것이다.

【漢陽定都】 그런데 太祖의 卽位初의 第一關心事는 國都 遷奠 問題에 있던 當時 開京은 舊家世族의 오랜 根據地로 傳來의 陰陽者(迷信書)에 그곳은 신하가 임금을 廢하는 不吉의 地라는 說이 있어 太祖는 여기에 사로잡히어 무엇보다도 遷都 問題를 緊急視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親히 신하를 데리고 鷄龍山(公州), 母岳(京城西), 漢陽(京城) 等地를 돌아다니며 도읍터를 求하다가 三年 겨울에 드디어 國都를 漢陽에 定하고 宮殿·宗廟·社稷·官衙 및 都城을 쌓아 面目을 새롭게 하였다. 漢陽 定都에는 실로 太祖의 心身을 수고로이 한 바가 많았던 것이다.

【開京移御】 그러나 遷都 後 불과 五 六年인 定宗 元年에 이르러 갑자기 新都를 버리고 도루 舊都(開京)로 移御하는 事態가 發生하였다. 그 重要한 理由는 前年 新都에서 王室의 큰 不祥事가 일어났던 때문이다. 즉 太祖의 第五男 芳遠(後의 太宗)이 군사를 이르켜 世子 芳碩(太祖의 季男) 一派를 죽인 骨肉의 慘變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定宗 二年에 開京에서도 또 王子의 亂이 일어났으니 第四王子 芳幹과 芳遠과의 싸움이었다. 定宗은 芳遠을 世子로 封하여 位를 그에게 傳하고 말았다. 이가 곧 第三代 太宗이다.

【漢陽還都】 太宗은 父王(太祖)의 뜻을 重히 여기어 卽位후 곧 新都 漢陽으로 還都하려 하였으나 朝臣間에 異論이 있어 實行치 못하고 여러 해 밀우다가 드디어 五年에 漢陽으로 再遷하여 五百年 政治 及 文化의 中心地로 一定不易의 地位를 줌에 이르렀다. 太宗은 儒敎主義의 임금으로 民意를 重히 여기고 迷信에 關한 書籍을 禁하며 佛敎를 누르고 寺院을 整理하였지만 【銅活字】 三年(國紀 3736 西紀 1403)에 銅活字를 만들어 많은 書籍을 印刷함과 같은 것은 그 가장 著名한 治蹟의 하나이었다. 金屬活字는 이미 高麗 末葉에도 만든 일이 있었으나 李氏朝鮮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아마 첫 實驗이요 또 西洋 活字의 發明보다도 半世紀나 앞섰던 것이다.

【조선의 개국】 고려 말 영흥 출신의 무신인 이성계의 출현은 개경의 구귀족과 왕실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개경의 구세력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일파는 대개 여말의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고 신세력인 이성계 일파는 그것을 타파하여 개혁하려 하였다. 이 두 세력 사이에 격렬한 대립과 투쟁이 전개되다가 결국 이씨파의 일방적 승리에 의하여 구세력은 제거되고 최후의 괴뢰 왕실도 없어지고 대신 새로운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국기 3725년(공양왕 4년) 임신년 7월 17일은 새로운 귀족 이성계가 무혈혁명에 의하여 개경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던 개국의 첫날이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태조(고친 이름은 단(旦))이니 태조는 즉위 초에 인심을 너무 자극시키지 아니하려 함인지 혹은 대명관계 때문인지 국호를 전대로 고려라 하고 모든 제도와 조직을 고치지 않아서 언뜻 보면 구왕조의 연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국호를 정식으로 고쳐 조선이라고 한 것은 즉위 2년 2월이었다.

【태조의 정책】 태조를 중심으로 한 혁명파는 대개 불교를 배척하던 여말의 유신들이었으므로 태조는 그들의 주의, 주장에 의하여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치국의 원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유교는 이후 5백년 간 정치와 교학에서 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에까지 그 원리가 지배하였다. 또 태조는 종래의 농본주의에 입각하여 개국 벽두부터 농업의 장려, 전야의 개간, 호구의 증식을 취하여 지방 관리를 독려하였다. 이 정책은 대대로 계승되어 농업국가로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양 정도】 그런데 태조의 즉위 초의 제일 관심사는 국도를 옮겨 정하는 문제에 있었다. 당시 개경은 옛 세족의 오랜 근거지로 전래의 음양서(미신서)에 그곳은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불길의 땅이라는 설이 있어 태조는 여기에 사로잡혀 무엇보다도 천도 문제를 긴급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친히 신하를 데리고 계룡산(공주), 모악산(경성의 서쪽), 한양(경성) 등지를 돌아다니며 도읍터를 구하다가 3년 겨울에 드디어 국도를 한양에 정하고 궁전·종묘·사직·관아 및 도성을 쌓아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실로 태조의 심신을 수고롭게 한 바가 많았던 것이다.

【개경 이어】 그러나 천도 후 불과 5, 6년인 정종 원년에 이르러 갑자기 새로운 도읍을 버리고 도로 옛 도읍(개경)으로 이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중요한 이유는 전년 새로운 도읍지에서 왕실의 큰 불상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태조의 제5남 방원(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태조의 막내 아들) 일파를 죽인 골육의 참변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정종 2년에 개경에서도 또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니 제4왕자 방간과 방원의 싸움이었다. 정종은 방원을 세자로 봉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였다. 이 사람이 곧 제3대 태종이다.

【한양 환도】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뜻을 중히 여기며 즉위 후 곧 새로운 도읍지 한양으로 환도하려 하였으나 조정 신하들 사이에 다른 의논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고 여러 해 미루었다. 드디어 재위 5년에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여 5백 년 정치 및 문화의 중심지로 일정불변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태종은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민의를 중히 여기고 미신에 관한 서적을 금하였으며 불교를 누르고 사원을 정리하였다. 【동활자】 재위 3년(국기 3736년, 서기 1403년)에 동활자를 만들어 많은 서적을 인쇄한 것은 그의 가장 저명한 치적의 하나였다. 금속활자는 이미 고려 말엽에도 만든 일이 있었으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첫 실험이요, 또 서양 활자의 발명보다도 반세기나 앞선 것이다.


2. 서울의 도시 시설[편집]

新都 漢陽은 麗代의 南京 所在地로 國初에 漢城府라 改稱하고 府制를 設하였지만 歷代의 施設로는 보잘 것이 없고 李朝에 들어와서 비로소 都市다운 施設이 있게 되었다. 府의 範圍는 市外 즉 城外 十里의 連接地까지를 包含하였음으로 都城의 그것과는 무론 一致하지 아니한다. 都城의 全長은 九千 九百 七十 五步로 今日의 그것과 一致하고 城의 內外를 連絡하는 出入門으로는 四大正門과 四小門이 있었다.

【部·坊制·長行廊】 舊都의 部·坊制를 襲用하여 市內(즉 城內)를 五部(東 西 南 北 及 中) 五十二坊(後에 四十九坊)으로 나누고 市街 幹線 道路의 兩側에는 長行廊(長屋)을 세워 商人으로 商店을 열게 하였다. 【鐘樓】 特히 서울의 한복판인 鍾路 十字路土에는 二層 高樓를 세워 (世宗時 改建) 樓上에 大鍾을 달고 朝夕으로 市民에게 시각을 알리우고 樓下에는 人馬를 通行케 하는 十字形의 길이 노여 있고 그 附近에는 六矣廛(六주비전)이란 六大 商店(立(선)慶 즉 絹織店·綿布廛·綿紬廛·紙廛·苧布廛·魚物廛)을 비롯하여 其他 여러 商店이 벌려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鍾路 네거리는 都市의 心藏部를 일우어 있는만치 가장 繁華한 곳이었다.

【開川】 구거(溝渠) 施設로는 城內 中央에 開川을 넓히 파고 修築하여 各山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아 水口門으로 빠지게 하고 處處에 橋梁을 놓아 通行을 편리케 하였다. 【防火施設】 防火施設로는 城內 連接 家屋에 防火墻이란 것을 쌓게 하고 各 官衙 안에는 消火用의 우물을 파고 宗廟 闕內 및 鍾樓에는 救火器機란 消防器具를 備置케 하고 【禁火都監】 또 特히 禁火都監이란 一種의 消防署 같은 것을 두어 防火의 事務를 맡게 하였는데 火災가 있을 때는 鍾을 처서 알리게 하였다(世宗時). 勿論 그 때 防火 器具란 것은 今日의 것에 比하여 대단 幼稚하였겠지만 施設 方法만은 거이 現代的이라할만치 用意周到하였다.

【其他施設】 其他 文敎 施設로 成均館(太學)·四學(中東南西의 四部學堂), 觀測施設로 觀象監, 醫療施設로 濟生院·惠民局·東西活人院 等이 있고 神祠로는 木覓祠(南山), 寺刹로는 太祖時의 興天寺(貞洞)·興德寺(東部), 世祖時의 圓覺寺(今 파고다 公園) 等이 있었다. 【戶數】 都城 內外의 民屋數는 때를 따라 달랐겠지만 世宗 末年의 統計를 보면 城內에 一萬 七千 十五戶, 城外(十里)에 一千 七百 七十戶가 있었다 한다.

새 도읍지 한양은 고려시대의 남경 소재지로 국초에 한성부라 이름을 바꾸고 부제(府制)를 두었지만 역대의 시설로는 보잘 것이 없었고 조선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도시다운 시설을 갖추었다. 부의 범위는 시외 즉 성 밖 10리의 연접지까지를 포함하였으므로 도성의 그것과는 물론 일치하지 않는다. 도성의 전체 길이는 9천 9백 7십 5보로 지금과 일치하고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출입문은 4대 정문과 4소문이 있었다.

【부(部)·방제(坊制)·장행랑(長行廊)】 옛 수도의 부·방제를 습용하여 시내(즉 성안)를 5부(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52방(뒤에 49방)으로 나누고 시가 간선도로의 양측에는 장행랑(장옥)을 세워 상인에게 상점을 열게 하였다. 【종루(鐘樓)】 특히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 십자로에는 2층 누각을 세워(세종 때에 고쳐지었다.) 누각 위에 큰 종을 달고 아침저녁으로 시민에게 시각을 알리고 누각 아래에는 인마를 통행하게 하는 십자형의 길이 놓여 있었다. 그 부근에는 육의전(육주비전)이란 6대 상점 즉 견직점·면포전·면주전·지전·저포전·어물전을 비롯하여 기타 여러 상점이 벌여 있었다. 이 종로 네거리는 도시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개천(開川)】 도랑 시설은 성안 중앙에 개천을 넓게 파고 수축하여 각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아 수구문으로 빠지게 하고 곳곳에 교량을 놓아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다. 【방화 시설】 방화 시설은 성안에 인접한 가옥에 방화장이란 것을 쌓게 하고 각 관아 안에는 소화용의 우물을 파고 종묘, 궐내 및 종루에는 구화 기기란 소방 기구를 비치하게 하였다. 【금화도감】 또한 특히 세종 때에는 금화도감이란 일종의 소방서 같은 것을 두어 방화의 사무를 맡게 하였는데, 화재가 있을 때에는 종을 쳐서 알리게 하였다. 그때의 방화기구라는 것은 지금의 것에 비하여 대단히 유치하였지만 시설 방법만은 거의 현대적이라 할 만큼 용의주도하였다.

【기타 시설】 기타 문교 시설은 성균관(태학)·사학(중부·동부·남부·서부의 4부 학당), 관측 시설은 관상감, 의료 시설은 제생원·혜민국·동서활인원 등이 있다. 신사는 목멱사(남산), 사찰은 태조 때의 흥천사(정동)·흥덕사(동부), 세조 때의 원각사(파고다 공원) 등이 있었다. 【호수(戶數)】 도성 내외의 가옥의 수효는 때에 따라 다르지만 세종 말년의 통계를 보면 성안에 1만 7천 15호, 성 밖(십리)에 1천 7백 7십 9호가 있었다.


3. 세종대왕과 그 위업[편집]

太宗의 아들로 그 位를 傳受한 분이 곧 世宗大王(第四代)이니 大王은 우리 歷史上에서 뿐만 아니라 온 世界 人類史上에 드물게 보는 偉人이었다.

【大王의 性行】 天性이 어질고 부지런하고 學問을 좋아하고 趣味와 才藝가 多方面에 걸쳐 通치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日常生活은-政事를 보살피는 餘暇에 讀書와 思索에 잠기어 머리쓰기를 쉬지 아니하였으나 쓸데없는 일과 생각은 하지 아니 하였다. 또 大王은 意志가 굳어서 自己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떠한 反對가 있더라도 기어코 實行하고 말았다. 大王은 널리 民族을 사랑하고 特히 國民의 간고(艱苦)한 生活에 깊은 同情을 가져 人民을 本位로 한 王道의 治, 愛恤(휼)의 治를 하였지만 自身이 항상 深宮에 處하여 백성들의 간고를 잘 아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一生 동안에 여러 가지 有益하고 빛난 事業을 일우어 기리 後世에까지 그 福音을 내려주셨다.

【大王의 事業】 訓民正音이란 우리의 國文字를 製定하여 (二十五年에 製定하여 二十八年에 반포함) 약간의 완고한 신하들의 反對를 물리치고 實行에 힘쓰심과 같은 것은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다. 【訓民正音】 더욱 그 動機가 이때껏 우리의 글이 없음과 智識 階級에 行하는 漢文은 一般民衆에게 널리 쓰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누구나 쉽게 알아야할 글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그 얼마나 거룩하고 어진 생각이었는가, 文字의 發明 그것보다도 그 民族을 사랑하고 民衆을 애닯히 여기신 그 마음고토리가 거룩한 것이었다. 이 國文 製作에는 물론 大王의 創意가 많이 加하여 있지만 또한 大王의 手足이라할 만한 集賢殿 學士 특히 成三問, 崔恒, 申叔舟 等의 도움도 많았던 것이다.

【集賢殿과 編纂】 集賢殿은 闕內에 둔 一種의 學問硏究所로서 國內의 優秀한 學者들을 모아 날마다 함께 學問을 討論하며 또 여러 가지 有益한 書籍을 編纂하였으니 其中에 高麗史·農事直說·五禮儀·八道地理志·三綱行實·治平要覽·龍飛御天歌·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 및 醫方類聚와 같은 책들은 더욱 著名한 것이었다. 大王은 신하를 부리되 그 재조와 바탕에 따라 適當한 자리에 適當한 사람을 써서 일을 맡겼으니 例를 들면 鄭摠 等은 天文을 硏究케 하고 蔣英實은 大小時計를 만들(製作)게 하고 朴堧(연)으로는 音樂을 整理케 하고 成三問 申叔舟 等으로는 語學과 音韻 等을 硏究케 하였다. 朴堧의 整理한 音樂은 즉 東洋의 最古樂인 雅樂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演奏가 昌德宮 雅樂部에 依하여 傳하고 있다.

【測雨器】 大王의 業蹟中에 또 한 가지 獨創的 發明의 것은 즉 二十四年(國紀 3775 西紀 1442)에 銅으로 測雨器를 만들어 中央과 各 地方의 雨量 分布를 測定케 한 것이니 測雨器의 發明은 西洋보다 앞서기 二百 餘年 前이였다.

佛敎에 對하여는 初年에 역시 抑壓策을 써서 諸宗派를 禪·敎 兩宗으로 統合하고 寺刹를 많이 줄이더니, 【內佛堂과 佛書飜譯】 晩年에는 好佛의 主로 化하여 모든 儒臣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혹은 闕內에 內佛堂을 이룩하고 혹은 佛書를 飜譯하여 그 方面 文化에도 큰 業蹟을 남기었다. 각종 書籍을 만드는 한편 活字와 印刷術에도 여러 차례 改良을 加하여 前日보다 一段의 進步를 보였다.

大王은 內治 뿐만 아니라 外治에 있어서도 光輝있는 功蹟을 남기었지만 이에 關하여는 後節에 말하려 한다.

태종의 아들로 그 왕위를 전수한 분이 곧 제4대 세종대왕이다. 대왕은 우리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인류사상에 드물게 보는 위인이었다.

【대왕의 성품과 행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예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났다. 그리하여 그의 일상생활은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독서와 사색에 잠겨 머리 쓰기를 쉬지 않았으나 쓸데없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또 대왕은 의지가 굳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기어코 실행하였다. 대왕은 널리 민족을 사랑하고 특히 국민의 힘든 생활에 깊은 동정을 가져 백성을 본위로 한 왕도의 다스림,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다스림을 하였지만 자신이 항상 깊은 궁궐에 처하여 백성들의 간고를 잘 알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일생 동안에 여러 가지 유익하고 빛난 사업을 이루어 길이 후세에까지 그 복음을 내려주셨다.

【대왕의 사업】 훈민정음이란 우리의 문자를 제정하였는데 (25년에 제정하여 28년에 반포함) 약간의 완고한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실행에 힘쓰심과 같은 것은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다. 【훈민정음】 더욱이 그 동기가 이때껏 우리의 글이 없음과 지식 계급에서 쓰는 한문은 일반 민중에게 널리 쓰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 얼마나 거룩하고 어진 생각이었는가, 문자의 발명 그것보다도 그 민족을 사랑하고 민중을 애달프게 여기신 그 마음이 거룩한 것이었다. 이 국문 제작에는 물론 대왕의 창의가 많이 가해졌지만 또한 대왕의 수족이라 할 만한 집현전 학사 특히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의 도움도 많았다.

【집현전과 편찬】 집현전은 궁궐 안에 둔 일종의 학문 연구소로서 국내의 우수한 학자들을 모아 날마다 함께 학문을 토론하며 또 여러 가지 유익한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 중에서 고려사·농사직설·오례의·팔도지리지·삼강행실·치평요람·용비어천가·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및 의방유취와 같은 책들은 더욱 저명한 것이었다. 대왕은 신하를 부릴 때 그 재주와 바탕에 따라 적당한 자리에 적당한 사람을 써서 일을 맡겼다. 예를 들면 정총 등은 천문을 연구하게 하고, 장영실은 크고 작은 시계를 만들게 하고, 박연은 음악을 정리하게 하고, 성삼문·신숙주 등은 어학과 음운 등을 연구하게 하였다. 박연이 정리한 음악은 즉 동양의 가장 오래된 음악인 아악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연주가 창덕궁 아악부에 의하여 전하고 있다.

【측우기】 대왕의 업적 중에 또 한 가지 독창적 발명품은 즉 24년(국기 3775년, 서기 1442년)에 동으로 측우기를 만들어 중앙과 각 지방의 강우량 분포를 측정하게 한 것이다. 측우기의 발명은 서양보다 2백여 년 앞서 있다.

불교에 대하여는 초년에 역시 억압책을 써서 여러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사찰을 많이 줄이더니 【내불당과 불서 번역】 만년에는 호불의 군주로 화하여 모든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궐 안에 내불당을 만들고 혹은 불서를 번역하여 그 방면의 문화에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각종 서적을 만드는 한편 활자와 인쇄술도 여러 차례 개량하여 전날보다 한층 진보하였다.

대왕은 내치뿐만 아니라 외치도 빛나는 공적을 남기었지만 이에 관하여는 뒤에서 말하겠다.


4. 세조와 성종의 치세[편집]

世宗 다음에는 아들 文宗이 서고 文宗의 뒤에는 그 아들 端宗이 섰더니 나이 어리고 여러 非凡한 叔父가 있는 중 首陽大君이 속에 큰 뜻을 품고 王의 자리를 뺏으니 이가 世祖이었다. 【死六臣】 成三問 等(朴彭年·河緯地·李塏·兪應孚·柳誠源) 六臣은 이에 義憤을 참지 못하여 비밀이 端宗의 復位를 꾀하다가 發覺되어 悲壯한 죽엄을 당하였다. 이를 세상에서 死六臣이라 하여 그 忠義를 우러러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世祖의 治蹟】 世祖는 이와 같이 비록 義롭지 못한 일을 하였으나 在位 十三年間에 文武의 治가 볼만한 것이 많았다. 밖으로는 여러 번 北쪽의 野人을 물리치고, 또 이때 咸鏡道人 李施愛의 叛亂을 平定하였으며 안으로는 父王과 같이 佛敎를 崇信하여 城內에 大圓覺寺(지금 塔골公園 內)를 이룩하고 十三層의 塔을 쌓았으니 塔은 우리가 보는바와 같이 그 만든 솜씨가 朝鮮 美術의 精華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그 밖에 刊經都監을 두고 佛書를 飜譯하여 刊行한 것이라든지 國初 以來의 모든 法令과 條例에 依하여 經國大典이란 큰 法典을 編纂한 것은 그의 빛난 治蹟의 하나이었다. 이 法典은 다음 임금들이 이것을 더욱 完城시키어 朝鮮 五百年 政治의 큰 標準이 된 것이었다.

【成宗의 治蹟】 第九代 成宗은 父祖 以來의 治를 이어 밖으로 豆滿江 方面의 오랑캐의 소굴(巢窟)을 소탕(掃蕩)하고(北征) 鴨綠江 方面의 野人을 쫓았으며(西征) 안으로는 특히 儒者 文人을 優待하고 이들로 하여금 有用한 書籍(東國通鑑·東國輿地勝覽·樂學軌範·東文選 等)을 編纂케 하고 活字를 改造하여 많은 책을 印刷케 하였다. 朝鮮 初期의 制度 文物은 이에 이르러 거이 完城된 느낌이 있었다.

세종 다음에는 아들 문종이 서고 문종의 뒤에는 그 아들 단종이 섰으나 나이가 어리고 여러 비범한 숙부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 중 수양대군이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왕의 자리를 뺏으니 이가 세조이다. 【사육신】 성삼문 등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6신은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밀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이들을 세상에서는 사육신이라 하여 그 충의를 우러러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세조의 치적】 세조는 이와 같이 비록 의롭지 못한 일을 하였으나 재위 13년간에 문무의 다스림이 볼 만한 것이 많았다. 밖으로는 여러 번 북쪽의 야인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함경도 사람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또한 부왕과 같이 불교를 숭신하여 성안에 대원각사(지금의 탑골공원 안)를 세우고 13층의 탑을 쌓았다. 이 탑은 그 만든 솜씨가 조선 미술의 정화를 보여주었다. 그밖에 간경도감을 두고 불교 서적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국초 이래의 모든 법령과 조례에 의하여 경국대전이란 큰 법전을 편찬한 것도 그의 빛난 치적의 하나였다. 이 법전은 다음 임금들이 이것을 더욱 완성시켜서 조선 5백년 정치의 큰 표준이 되었다.

【성종의 치적】 제9대 성종은 세종과 세조 이래의 다스림을 이어 밖으로는 두만강 방면의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고 압록강 방면의 야인을 쫓았다. 안으로는 특히 유자 문인을 우대하고 이들에게 유용한 서적 즉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악학궤범·동문선 등을 편찬하게 하고 활자를 개조하여 많은 책을 인쇄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의 제도와 문물은 이때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었다.


5. 초기의 관제·학제·과거 및 기타[편집]

初期의 官制 學制 科擧 및 其他에 就하여 알기 쉽게 表解로서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官制

초기의 관제, 학제, 과거 및 기타에 대하여 알기 쉽게 표로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관제


(2) 學制
(2) 학제


以上은 儒學에 關한 學校이나 또 中央과 地方에 外國語學과 醫學 律(法)學 天文地理學 등을 가르치는 各 機關이 있음.

(3) 科擧

【文武 其他 技術官 資格試驗, 每三年에 보는 定期試驗과 其他 種種의 臨時試驗이 있음】

이상은 유학에 관한 학교이나 또 중앙과 지방에 외국어학과 의학, 율학, 천문지리학 등을 가르치는 각 기관이 있음.

(3) 과거

【문무 기타 기술관 자격시험, 3년마다 보는 정기시험과 기타 여러 가지 임시시험이 있음】


生進斗(小科) 合格者에는 白牌라는 白色紙의 證書를 주고 文科(大科) 合格者에는 紅牌라는 紅色紙의 及第證書를 줌.

都試 【每年 春秋에 中央과 地方에서 보는 武士試驗】

생진과(소과) 합격자에게는 백패라는 백색지 증서를 주고 문과(대과) 합격자에게는 홍패라는 홍색지의 급제 증서를 줌.

도시 【매년 봄가을에 중앙과 지방에서 보는 무사 시험】


雜科는 一種의 技術官 採用 試驗이니 대개 中人階級에 限하여 봄.

(4) 歷代(前期)의 活字改造 -(太宗-中宗)-

잡과는 일종의 기술관 채용 시험이니 대개 중인 계급에 한하여 봄.

(4) 역대(전기)의 활자 개조 -(태종-중종)-


活字名稱 年代 材料
1. 癸未字 太宗三年鑄造 銅活字
2. 庚子字 世宗二年同 同上
3. 甲寅字 同王十六年同 同上
4. 丙辰字 同王十八年同 鉛活字
5. 庚午字 同王三十三年同 銅活字
6. 乙亥字 端宗三年同 同上
7. 乙酉字 世祖十年同 同上
8. 甲辰字 成宗十五年同 同上
9. 癸丑字 同王二十四年同 同上
10. 丙子字 中宗十一年同 眞鍮活字
활자명칭 연대 재료
1. 계미자 태종 3년 주조 동활자(銅活字)
2. 경자자 세종 2년 주조 동활자
3. 갑인자 세종 16년 주조 동활자
4. 병진자 세종 18년 주조 연활자(鉛活字)
5. 경오자 세종 33년 주조 동활자
6. 을해자 단종 3년 주조 동활자
7. 을유자 세조 10년 주조 동활자
8. 갑진자 성종 15년 주조 동활자
9. 계축자 성종 24년 주조 동활자
10. 병자자 중종 11년 주조 진유활자(眞鍮活字)


6. 사회 계급[편집]

李氏朝鮮의 階級制度는 매우 엄중하여 階級에 따라 地位와 職業과 待遇가 다른 것은 물론이요 居住地까지도 다른바가 있었으니 지금 눈으로 보면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수한 線이 그이어 있고 칸이 막히어 있었다. 그 때의 階級을 大別하면 兩班·常人·賤人의 네 階級으로 나누어 볼 수밖에 없지만 같은 階級에도 嫡庶의 別과 職業의 別로 종종의 差等이 있었다

1. 兩班階級 …… 兩班이란 말은 본시 東班(文官)·西班(武官)을 合稱한 名詞로 因하여 士大夫階級 즉 士宦 階級을 이르는 階級의 뜻이 되고 말았지만 社會的 地位는 가장 높아 종종의 特權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兩班으로도 지체가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文官 집은 武官 집보다 높이 여기고 庶類(妾子孫) 편은 嫡類(正妻子孫) 편과 差別하여 賤待를 받고 文武科의 試驗에도 應할 資格이 없고 따라 높은 벼슬은 바라볼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2. 中人階級 …… 兩班에 다음가는 階級으로 그 이름은 그들의 居住 區域이 서울의 中央部에 있었던 關係로 생긴 것이니 대개 北村과 南村에는 兩班들이 살고 西部에는 우대(上垈) 사람 즉 胥吏(各 官衙의 아전)들이 살고 東南部에는 아래대(下垈) 사람 즉 軍校(下級將校)들이 살았던 것이다. 中人들의 傳統과 敎養은 兩班에 못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그들의 官職이 技術的 事務에 關한 벼슬에 局限되어 兩班과 같은 높은 벼슬을 못하였을 뿐이니 그들의 官職은 대개 計士(財政官)·觀象監員(天文 地理를 맡음)·譯官(通譯官)·寫字官·圖畫署員(畫員) 等에 限하였던 것이다. 위에 보인 胥吏(中央과 地方 官廳의 아전) 軍校 같은 層은 中人보다는 좀 지체가 떨어지고 常人보다는 높으나 넓은 意味의 中流階級에 속한다.

3. 常人階級 …… 農業·漁業·商工業을 하는 平民이 이 階級에 속하거니와 그들의 대부분은 無敎育者이었다.

4. 賤人階級 …… 社會的으로 最下級에 속하여 賤待를 받는 사람들이니 이를 大別하면 公賤(公奴隷)과 私賤(私奴隷)의 二種이 있었다. 公職은 妓生·內人(宮女)·官奴婢·驛卒 等이요 私賤은 僧侶·俳優者·무당·판수·私家奴婢 및 白丁들인바 그중에도 가장 社會的 地位가 낮고 종종의 압박과 賤待를 받고 社會의 最下層에서 신음(呻吟)하던 階級은 白丁이었다. 白丁은 戶籍에도 편입되지 않고 따라서 國民으로서의 生存權을 拒否당한 것과 마찬가지었으니 그들의 사는 곳도 보통 사람들과 달리 市街地의 변두리나 村落 밖에 特殊部落을 이루어 十數戶 내지 數百戶의 密集生活을 하였던 것이다. 職業에 있어서는 歷史的으로 一種의 獨占的 職業을 가져 屠殺·製革·고기장사(肉商)·고리장이(柳器匠) 等의 業을 하였다. 이러한 階級은 맨처음에 흔히 俘虜로 잡힌 外國人과 그 子孫들로 形成되었던 것임으로 特殊한 最下位에 處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계급제도는 매우 엄중하여 계급에 따라 지위와 직업과 대우가 다른 것은 물론이요, 거주지까지도 달랐다. 같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무수한 선이 그어 있었고 칸이 막히어 있었다. 그때의 계급을 크게 구별하면 양반·중인·상인·천인의 네 계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같은 계급도 적서의 차별과 직업의 차별로 여러 가지 차등이 있었다.

(1) 양반 계급 …… 양반이란 말은 본시 동반(문관)·서반(무관)을 합쳐 부르는 명사로 인하여 사대부계급 즉 사환 계급을 이르는 뜻으로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아 여러 가지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같은 양반으로도 지체의 높고 낮음이 있으니 문관 집을 무관 집보다 높이 여겼다. 서류(첩의 자손)는 적류(정처의 자손)와 차별하여 천대를 받고 문무과의 시험에도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따라서 높은 벼슬은 바라볼 생각도 못하였다.

(2) 중인 계급 …… 양반에 다음가는 계급으로 그 이름은 그들의 거주 구역이 서울의 중앙부에 있었던 관계로 생긴 것이다. 대개 북촌과 남촌에는 양반들이 살고 서부에는 우대[上垈] 사람 즉 서리(각 관아의 아전)들이 살고 동남부에는 아래대[下垈] 사람 즉 군교(하급 장교)들이 살았다. 중인들의 전통과 교양은 양반에 못지않았으나 다만 그들의 관직이 기술적 사무에 관한 벼슬에 국한되어 양반과 같은 높은 벼슬을 못하였을 뿐이다. 그들의 관직은 대개 계사(재정관, 관상감원, 천문지리를 맡음)·역관·사자관·도화서원 등에 한하였다. 서리(중앙과 지방 관청의 아전), 군교 같은 층은 중인보다는 좀 지체가 떨어지고 상인보다는 높으나 넓은 의미의 중류(中流) 계급에 속한다.

(3) 상인 계급 …… 농업·어업·상공업을 하는 평민이 이 계급에 속한다. 그들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4) 천인 계급 …… 사회적으로 최하층에 속하여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니 이를 크게 구별하면 공천(공노예)과 사천(사노예)의 두 종류가 있었다. 공천은 기생·내인(궁녀)·관노비·역졸 등이고, 사천은 승려·배우자·무당·판수·사가 노비 및 백정 들이다. 그중에도 가장 사회적 지위가 낮고 여러 가지 압박과 천대를 받고 사회의 최하층에서 신음하던 계급은 백정이었다. 백정은 호적에도 편입되지 않았으니, 국민으로서의 생존권을 거부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사는 곳도 보통사람들과 달리 시가지의 변두리나 촌락 밖에 특수 부락을 이루어 수십 호 내지 수백 호의 밀집 생활을 하였다. 직업은 일종의 독점적 직업을 가져 도살·가죽제품 만들기·고기 장사·고리장이 등의 업을 하였다. 이 계급은 맨 처음에 흔히 포로로 잡힌 외국인과 그 자손들로 형성되었던 것이므로 특수한 최하위에 처하였던 것이다.


7. 토지제도와 세법[편집]

國初의 土地制度는 麗末의 그것을 承襲하여 原則的으로 公田制度를 베풀고 例外로 貴族·官公吏·其他 官廳에 私田을 주어 이것의 所有權을 公認하였지만 여기 이른바 公田·私田은 옛날의 그것과 달라 無稅地를 公田, 收稅地를 私田이라 한 것이니 後世에 이르러 前者는 國有地가 되고 後者는 民有地로 化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國初의 소위 公田은 後世의 國有地로서 이를 農夫(耕作者)에게 分配하여 그 收益의 十分의 一(租)을 받아들이고 稅는 물리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對하여 私田은 貴族 官公吏 및 各 官衙에 班給하는 것으로 田主는 역시 小作人으로부터 收益 十分의 一을 租로 取하고 그 租에서 每結 二斗씩을 國家에 稅로 바치었던 것이다. 後에는「租」와「稅」가 혼동되어 區別이 없게 되었지만 國初에는 分明히 區別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土地란 것은 땅이 좋고 나쁜데 따라 소출이 다르고 豐凶에 따라 收獲이 一定치 아니한즉 租稅를 매김에 있어 어떠한 표준이 있어야 할 것은 勿論이다. 그래서 世宗 때에는 여기 關하여 여러번 討究한 結果 田分六等과 年分九等의 法을 案出하여 施行하였으니, 田分六等은 土地의 品等을 六等에 나눈 것으로 每等의 量尺을 달리하고 年分九等은 每年의 收獲을 九等에 나누어 納稅의 差를 매기었던 것이다.

田畓의 飛態와 境界는 늘 變動하기 쉽고 또 해를 따라 새로 개간되는 밭과 논도 많으므로 역시 世宗 때에는 每二十年마다 全國의 田沓을 測量하여 土地臺帳을 새로 꾸미도록 마련하였다. 그러나 後世에는 잘 施行하지 아니하였다.

이 밖에 各 地方에 따라 土産을 바치는 貢物과 兵役·賦役(勞役)의 代로 바치는 軍布와 其他의 雜稅가 있었다.

국초의 토지제도는 여말의 그것을 이어받았다. 원칙적으로 공전 제도를 베풀고 예외로 귀족·관공리·기타 관청에 사전을 주어 이것의 소유권을 공인하였다. 그러나 공전과 사전은 옛날의 제도와 다르게 세금을 매기지 않는 땅(무세지)을 공전,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땅(수세지)를 사전이라 하였다. 후세에 이르러 공전은 국유지가 되고 사전은 개인이 소유한 땅으로 변화하였다. 즉 국초의 소위 공전은 후세의 국유지로서 이를 경작자인 농부에게 분배하여 그 수익의 십분의 일의 조를 받아들이고 세금은 물리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사전은 귀족·관공리 및 각 관아에 반급하는 것으로 전주는 역시 소작인으로부터 수익의 십분의 일을 조로 취하고 그 조에서 매 결 2두씩을 국가에 세로 바쳤다. 뒷날에는「조」와「세」가 혼동되어 구별이 없게 되었지만 국초에는 분명히 구별되었다.

그런데 토지의 좋고 나쁨과 소출의 많고 적음 즉 풍흉에 따라 수확이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조세를 매길 때 적절한 표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이에 관하여 여러 번 연구한 결과 전분 6등과 연분 9등의 법을 생각해 내어 시행하였다. 전분 6등은 토지의 품등을 6등으로 나누어 등마다 양척을 달리하는 것이고 연분 9등은 해마다의 수확을 9등으로 나누어 납세의 차이를 매기었던 것이다.

전답의 형태와 경계는 늘 변동하기 쉽고 또 해마다 새로 개간되는 밭과 논도 많았으므로 세종 때에는 20년마다 전국의 전답을 측량하여 토지대장을 새로 꾸미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는 잘 시행되지 않았다.

이 밖에 각 지방에 따라 토산을 바치는 공물과 병역·부역의 대가로 바치는 군포와 기타의 잡세가 있었다.


제2장 대외관계[편집]

1. 명과의 관계[편집]

太祖는 卽位 以前부터 親明策을 主張하고 실행하여 오던 터이므로 開國後에도 그리하여 代代 소위『事大』의 禮를 行하여 定期로 使節의 派遣, 禮物(貢物)의 贈送이 있었지만 그것은 形式上 謙讓의 禮 혹은 外交上 手段 方法 내지 公的 貿易의 意義를 가진 것에 불과하고 實質에 있어서는 모든 政治를 獨自的 自主的 立場에서 行하였왔던 것이다. 원래 中國이란 나라는 땅이 크고 人物이 번성하고 優越한 文化를 가지고 내려와 오만(傲慢)하기 짝이 없으므로 이와 親하려는 周圍의 모든 나라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비위와 성미를 맞춰 주었던 것이다. 禮物의 贈答(交換)과 같은 것은 실제에 있어 貿易의 性質을 띄우고 있던 것이다. 朝鮮서 明에 보내는 禮物의 주요한 자로는 金銀, 馬匹, 人蔘, 豹皮, 苧布(모시) 花文席 螺鈿(자개그릇) 等이나 이 밖에 明의 隨時的 要求에 應하여 多量의 馬匹과 및 處女·고자(宦官) 등을 보내었고 (朝鮮女子로 明帝의 后妃가 된 사람도 있었고, 宦者로 勢力을 잡아 本國을 괴롭게 한 자도 있었음) 또 明으로부터 받는 答禮物(代償物)로는 主로 綵段(絹織) 磁器 藥材 禮服 등속인 外에 朝鮮의 要求에 依하여 종종의 書籍을 보내어 왔었다.

【金銀問題】 그런데 朝鮮 禮物中에 가장 困難한 것은 金銀이었으니 비록 그 數量은 썩 많다할 程度는 아니나 當時 朝鮮의 産出量으로는 (國內의 需要도 있으므로) 대단 不足을 느끼었던 것이다. 그래서 朝廷에서는 일변 官吏를 시켜 各地의 金銀鑛을 採掘하기도하고 또 金銀의 流出禁正 使用制限 내지 民間 金銀의 供出등을 行하기도 하였지만 여기에 여러 가지 弊害가 따르고 또 이후 기리 明의 需要에 應하자면 限量이 없으므로 애져녁에 짐을 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明에 對하여 金銀은 本國의 所産이 아니란 理由를 부쳐 免除를 여러 번 請하였던바 世宗 十一年에 드디어 소청대로 되었다. 이 때문에 朝鮮 金銀의 流出은 더욱 嚴禁되고 採鑛의 業은 全廢의 運을 당하여 後來 國內의 産業과 財政에 큰 不利한 影響을 주었던 것은 事實이다.

그 다음 處女·고자의 送出은 定期的이 아니요 隨時的이지만 그것이 人道上 社會上에 關한 問題인만큼 또 그것의 影響과 弊害가 큰 만큼 當時의 爲政者도 역시 苦痛을 느끼던 바이었다. 明의 絹布와 같은 것은 公的 貿易에서뿐 아이라 私的貿易에서도 盛히 輸入되었지만 그것은 한갓 國人의 奢侈風을 돕고 또 國內의 그 方面 工業을 발전시키었다는 것보다도 도리어 不振狀態에 빠트린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明使의 來去에 짝하는 번폐(煩弊)는 또한 커서 원래 中國 사신을 勅使라 하여 俗에 勅使 대접이란 말까지 생기었지만 그 一行이 留京할 동안은 물론이요 그 迎送에 上下의 物心 兩面의 奉仕가 얼마나 컸던가는 지금 우리의 想像 以上이었다. 지금 서울의 太平街에는 明使를 接待하던 太平館이란 것이 있었다.

태조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책을 주장하고 실행하여 왔기 때문에 개국 후에도 대대로 이른바『사대』의 예를 행하여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하고 예물(공물)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상 겸양의 예 혹은 외교상의 수단, 방법 내지 공적 무역의 의의를 가진 것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모든 정치를 독자적이며 자주적인 입장에서 행하였다. 원래 중국이란 나라는 땅이 크고 인물이 번성하여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주위의 모든 나라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비위와 성미를 맞춰 주었던 것이다. 예물의 교환 같은 것은 실제로 무역의 성질을 띄우고 있었다.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예물의 주요 품목은 금은, 필마, 인삼, 표피, 저포, 화문석, 누전(자개 그릇) 등이다. 이밖에 명나라의 수시 요구에 응하여 다량의 마필과 처녀·고자(환관) 등을 보내었다. (조선 여자로 명나라 황제의 후비가 된 사람도 있었고, 환자로 세력을 잡아 본국을 괴롭힌 자도 있었음) 또 명나라로부터 받는 답례물(대상물)은 주로 채단(견직), 자기, 약재, 예복 등이다. 이밖에 조선의 요구에 의하여 종종 서적을 보내주었다.

【금은 문제】 그런데 조선 예물 중에 가장 곤란한 것은 금은이었다. 비록 그들이 요구한 수량은 썩 많지는 않았지만 당시 조선의 산출량으로는 (국내의 수요도 있으므로) 대단히 부족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한편으로는 관리를 시켜 각지의 금은광을 채굴하기도 하고 또 금은의 유출을 금지하고 사용을 제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의 금은을 공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폐해가 따르고 또 계속하여 명의 수요에 응할 수 없으므로 처음부터 짐을 더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명나라에 대하여 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면제해 줄 것을 여러 번 청하였다. 드디어 세종 11년에 청한 대로 면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금은의 유출은 더욱 엄금되고 채광업은 전폐되어서 뒷날 국내의 산업과 재정에 크게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 처녀와 고자의 송출은 수시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정과 사회에 큰 폐해와 영향을 끼친 만큼 당시의 위정자들도 역시 고통을 느꼈다. 명나라의 견포와 같은 것은 공적 무역에서뿐 아니라 사적 무역에서도 왕성히 수입되었지만 그것은 한갓 나라 사람들의 사치 풍조를 돕고 국내의 직물 공업 발전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부진한 상태에 빠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명나라 사절의 내법에 짝하는 번폐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래 중국 사신을 칙사라 하여 세속에 ‘칙사 대접’이란 말까지 생겼다. 그 일행이 서울에 머물 동안은 물론이요, 그들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에 드는 물심양면의 비용과 봉사가 얼마나 컸는가는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 서울의 태평가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란 것이 있었다.


2. 야인(여진)과의 관계[편집]

【明과 野人과의 關係】 滿洲族인 女眞을 이때에는 흔히 野人이라 일컬었는데 그들은 앞서 大元 帝國의 支配下에 있다가 帝國이 崩潰되고 明이 일어남으로부터는 明에 속하여 所謂 三衛(建州衛·野人衛·毛憐衛)의 設置를 보게 되었으나, 이는 形式에 지나지 못하고 實質에 있어서는 明의 統治圈 外에 속하여 여러 部族으로 나뉘어 無統一 狀態를 이루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도 明에 歸順하는 자는 官爵을 주고 居住地域을 許認하고 또 商利를 願하는 자에는 貿易을 許하고 邊境을 침노하는 자는 이를 討伐함이 常例이었다. 【조선과 야인과의 관계】 朝鮮과 野人(朝鮮과 野人과의 關係)과의 關係도 역시 이리하여 그들의 叛服이 無常하였는데 그들은 대개 衣食住의 安定을 얻지 못하면 侵寇의 野性을 發揮하였던 것이다.

【東北方面】 東北方面(咸鏡道)의 野人은 麗末 以來 李 太祖의 經略에 依하여 (그들을) 豆滿江 外로 몰아내어 처음으로 江內의 땅을 차자하였던바, 그 후 그들이 年年 北界를 소란케 하므로 太宗 때에는 할 수 없이 後退의 策을 써서 지금 鏡城 以北의 땅을 버리기까지 하였다.

世宗 때 廷臣間에 또 後退의 議가 일어나자 大王은 祖宗의 舊疆을 寸土라도 주릴 수 없다 하여 이에 反對하고 【六鎭開拓】 그 후 金宗瑞를 시켜 이 方面 經營을 담당케 하여 마침내 鍾城·穩城·會寧·慶源·富寧의 北邊 六鎭을 完成하고 長城을 豆滿江邊에 쌓아 國防을 嚴히 하였다. 六鎭은 新開拓地인만큼 住民의 充實을 必要러 하므로 南方 諸道의 人民을 前後 이곳에 移住케 하였다. 世祖 成宗 때에 가끔 野人이 侵入하여 北界를 소요케 하였으나 곧 將兵을 보내어 討滅하였고 그 후에도 이러한 일이 여러 번 되푸리하였으나 六鎭의 變化는 없었다.

【西北方面의 野人과의 關係】 그 다음 西北方面(鴨綠江)의 野人에 對한 經略은 역시 麗末로부터 시작되어 太祖의 武功이 여기에도 많았지만 太宗 때에는 새로 江界府를 設하고 또 甲山의 一部를 나누어 閭延(여연)이란 郡을 두었더니 世宗 때에 婆豬江(鴨綠江의 大支流인 渾江) 方面의 野人이 자주 쳐들어와 邊民을 괴롭게 하므로 數次 將兵을 보내어 그 소굴(巢窟)을 두려빼고 閭延 外에 慈城(閭延과 江界 中間)·茂昌(閭延 東쪽)·虞芮(閭延 慈城中間)의 三部을 前後 加設하여 西邊 四郡을 完成하였다. 【四郡設置】 이것이 위의 六鎭 開拓과 아울러 世宗大王의 英雄的 事業인 同時에 朝鮮史上의 한 劃期的 事實이었으니 朝鮮의 北界가 이때에 完全히 豆滿江과 鴨綠江의 上流에까지 達하였던 것이다.

【四郡撤廢】 그런데 그 후 四郡의 地는 防備의 困難으로 廷臣間에 撤廢의 論이 일어나 端宗 때에 먼저 虞芮·閭延·茂昌의 三郡을 罷하고 世祖 때에는 나머지 一郡인 慈城을 마저 罷하였다. 그러나 四郡 撤廢는 決코 領士의 抛棄가 아니고 한 行政上의 變動 閾防線의 後退에 지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世祖는 西邊을 侵寇하는 建州野人(婆豬江 方面) 李滿住 等에게 數次 소탕(掃蕩)의 打擊을 주어 마침내 그 괴수를 목 베었고 成宗 때에는 明나라의 要請으로 역시 建州野人을 처서 大捷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西邊 北邊의 小小한 外患은 後에도 끝일 사이가 없었다.

【鏡城·慶源의 貿易所】 朝廷은 國初로부터 野人에 對하여 오직 武力으로만 臨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 對한 懷柔策으로 혹은 鏡城과 慶源에 貿易所를 두어(太宗 六年) 朝鮮의 鹽·鐵을 自由로 사가게 하고 혹은 野人 酋長의 朝貢과 歸化를 장려하여 그들에게 官職과 衣粮·鞍馬·家舍·奴婢 등을 주었다. 朝貢도 一種의 貿易이지만 그들이 朝鮮에 가지고 오는 物品의 主要한 것은 馬匹을 위시하여 土豹·貂鼠皮·態皮·鹿皮 등의 毛物이었고 또 그들아 가지고 가는 物品은 대개 우리의 金銀·苧布·麻布·農具·食器·紙物과 其他 米豆·鹽醬·酒類 등의 食料品이었다.

【北平館】 當時 서울에는 北平館(今 東大門 內)을 두어 野人의 貿宿所로 하였으니 明使의 太平館과 倭使의 東平館(今 樓井街)과 並立하여 있던 것이다.

【명과 야인의 관계】 만주족인 여진을 이때에는 흔히 야인이라 일컬었는데, 그들은 앞서 대원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제국이 붕괴되고 명이 일어나자 명에 속하여 이른바 3위(건주위·야인위·모린위)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일 뿐 실질적으로는 명의 통치권 밖에 속하여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로 지내었다.

그리하여 명에 귀순하는 자에게는 관작을 주고, 거주 지역을 허락하고, 또 상업 이익을 원하는 자에는 무역을 허락하고, 변경을 침노하는 자는 토벌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조선과 야인과의 관계】 조선과 야인의 관계도 역시 비슷하여 그들의 이반과 복종이 무상하였는데 그들은 대개 의식주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침구의 야성을 발휘하였다.

【동북 방면】 동북 방면(함경도)의 야인은 여말 이래 태조의 경략에 의하여 그들을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어 처음으로 두만강 안의 땅을 차지하였던 바, 그 후 그들이 매해 북계를 소란하게 하므로 태종 때에는 할 수 없이 후퇴의 책략을 써서 지금의 함경 이북의 땅을 버리기까지 하였다.

세종 때 조정의 신하 사이에 또 후퇴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대왕은 조종의 옛 강토를 한치의 땅이라도 줄일 수 없다 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6진 개척】 그 후 김종서를 시켜 이 방면의 경영을 담당하게 하여 마침내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북변 6진을 완성하고 장성을 두만강 변에 쌓아 국방을 엄히 하였다. 6진은 신개척지인 만큼 주민의 충실을 필요하였으므로 남쪽 여러 도의 백성을 전후 이곳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세조, 성종 때에 가끔 야인이 침입하여 북계를 소요하게 하였으나 곧 장병을 보내어 토멸하였고 그 후에도 이러한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었으나 6진의 변화는 없었다.

【서북 방면의 야인과의 관계】 서북 방면(압록강)의 야인에 대한 경략은 역시 고려 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태조의 무공이 여기에도 많았지만 태종 때에는 새로 강계부를 설치하고 또 갑산의 일부를 나누어 여연이란 군을 두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파저강(압록강)의 큰 지류인 혼강 방면의 야인이 자주 쳐들어와 변방의 백성을 괴롭게 하므로 여러 차례 장병을 보내어 그 소굴을 두려빼고 여연 밖에 자성(여연과 강계 중간)·무창(여연 동쪽)·우예(여연·자성 중간)의 3부를 전후 가설하여 서쪽 변경의 4군을 완성하였다. 【4군 설치】 이것이 위의 6진 개척과 아울러 세종대왕의 영웅적 사업인 동시에 조선 역사상 하나의 획기적 사실이었다. 조선의 북계가 이때에 완전히 두만강과 압록의 상류에까지 도달하였던 것이다.

【4군 철폐】 그런데 그 후 4군의 땅은 방비의 곤란으로 조정의 신하 사이에 철폐의 논의가 일어나 단종 때에 먼저 우예·여연·무창의 3군을 파하고 세조 때에는 나머지 1군인 자성마저 파하였다. 그러나 4군 철폐는 결코 영토의 포기가 아니고 한 행정상의 변동, 국방선의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조는 서변을 침략하는 건주야인(파저강 방면) 이만주 등에게 여러 차례 소탕의 타격을 주어 마침내 그 괴수를 목 베었고 성종 때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역시 건주야인을 쳐서 대첩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서변·북변의 소소한 외환은 후에도 그칠 날이 없었다.

【경성·경원의 무역소】 조정은 국초부터 야인을 오직 무력으로만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고 혹은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태종 6년) 조선의 소금·철을 자유로이 사가게 하고 혹은 야인 추장의 조공과 귀화를 장려하여 그들에게 관직과 의복과 식량·안마·가사·노비 등을 주었다. 조공도 일종의 무역이지만 그들이 조선에 가지고 오는 물품의 주요한 것은 마필을 위시하여 토표·초서피·웅피·녹피 등의 털가죽이었고 또 그들이 가져가는 물품은 대개 우리의 금은·저포·마포·농구·식기·지물과 기타 미두·염장·주류 등의 식료품이었다.

【북평관(北平館)】 당시 서울에는 북평관(지금의 동대문 안)을 두어 야인의 유숙소로 하였으니 명나라 사신의 태평관과 왜국의 사신이 묵는 동평관(지금의 누정가)과 병립하여 있던 것이다.


3. 왜인과의 관계[편집]

麗末 以來 倭寇 問題를 中心으로 朝廷과 日本 幕府와의 사이에 修交가 成立되어 彼我의 使節이 자주 往來하더니 世宗 初에 海賊의 소굴인 對馬島를 응징(應懲)하기 爲하여 征伐을 果行한 후로 일시 交通이 杜絶되었다. 對馬島란 땅은 山岳이 많아 耕作地가 매우 작고 陸上 産物은 島民의 口腹을 채우기에 족하지 못하여 島民은 항상 침략과 商利에 依하여 生活을 維寺하여 오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交通 杜絶로 因하여 제일 苦痛을 느끼는 자는 物資의 供給을 받지 못하는 對馬人이었다.

【三浦開港】 그리하여 對馬島主 宗貞盛은 마침내 사람을 보내어 謝罪의 뜻을 表하고 交通의 許可를 애걸하매 朝廷에서는 이로부터 平和懷柔策을 適用하여 그 請을 허락하고 이어 三浦 즉 熊川의 乃而浦(薺浦)·東萊의 富山浦(釜山浦)·蔚山의 鹽浦를 열어 倭人의 貿易 交通을 公許하고 또 여기에 倭館을 設하여 日本 各地로부터 오는 使客을 接待케 하였다.

【癸亥約條】 그러나 倭人으로 三浦에 來住하는 자가 많아지매 朝廷은 이에 對하여 여러 번 制限를 加하여 久住者 以外에는 全部 撤歸를 命하였으며, 世宗 二十五年 癸亥에는 島主와 條約을 맺고 해마다 物資를 얻기 爲하여 朝鮮에 派遣하는 島主의『歲遣船』을 五十艘에 制限하고 每年 朝廷이 島主에게 賜給하는 『歲賜米豆』는 二百石으로 定한 外에 또 부득이한 경우에는 歲遣船 外에 數三의 特送船을 보낼 수 있음을 規定하였다.

【圖書】 朝廷은 오히려 島主의 確實한 圖書(證印)가 아니면 對馬島와 日本 各地로부터의 船舶을 들이지 아니하도록 嚴規를 定하였으니 ─이는 물론 假稱 使船의 出入의 弊를 막기 爲함이어니와─ 圖書는 銅製로, 朝鮮 禮曹에서 製送하여 一片은 朝鮮에, 一片은 島主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日本 幕府 또는 그 地方 土豪와의 交通도 열리어 倭人의 來朝 進貢이 빈번하였는데 그네들의 進上物은 대개 硫黃·蘇木·銅·銀이 主가 되고 朝廷에서의 回賜品은 麻布·綿絲와 書籍 등이었다.

【東平館】 그리고 특히 對馬島 및 其他 地方의 有力한 倭人에 對하여는 朝廷으로부터 職帖을 주어 이를 소위 受職倭人이라 하여 來朝 貿易(公貿易)의 特權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倭使의 在京 貿宿所는 위에 보임과 같이 이를 東平館이라 하였다.

南方의 琉球國서도 사신을 자주 보내와 蘇木·胡椒·香料·砂糖·錫·犀·角 등의 南洋 産物을 貢物로 바친 일이 있었다.

여말 이래 왜구 문제를 중심으로 조정과 일본 막부 사이에 수교가 성립되어 양쪽 사절이 자주 왕래하더니 세종 초에 해적의 소굴인 대마도를 응징하기 위하여 정벌을 단행한 뒤로 일시 교통이 두절되었다. 대마도는 산악이 많아 경작지가 매우 작고 육상 산물은 도민의 배를 채우기에 부족하여 도민은 항상 침략과 상업 이익에 의하여 생활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 교통 두절로 인해 제일 고통을 느끼는 자는 물자의 공급을 받지 못하는 대마도 사람이었다.

【삼포 개항】 그리하여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은 마침내 사람을 보내어 사죄의 뜻을 표하고 교통의 허가를 애걸하자 조정에서는 이로부터 평화 회유책을 적용하여 그 청을 허락하였다. 이어서 삼포 즉 웅천의 내이포(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열어 왜인의 무역 교통을 공식 허가하고 또 여기에 왜관을 설치하여 일본 각지로부터 오는 사객을 접대하게 하였다.

【계해약조】 그러나 삼포에 왕래하는 왜인이 많아지자 조정은 이에 대하여 여러 번 제한을 가하여 오래 머무르는 자 이외에는 전부 철수하여 돌아가기를 명하였다. 세종 25년 계해년에는 대마도주와 조약을 맺고 해마다 물자를 얻기 위하여 조선에 파견하는 도주의『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매년 조정에서 도주에게 사급하는 『세사미두』는 2백 석으로 정하였고 이밖에 부득이한 경우에는 세견선 외에 두 세 차례의 특송선을 보낼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도서(圖書)】 조정은 오히려 도주의 확실한 도서(증인)가 아니면 대마도와 일본 각지로부터의 선박을 들이지 아니하도록 엄한 규정을 정하였다. 이는 물론 사행선이라 가칭한 선박 출입의 폐단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도서는 동제(銅製)로, 조선의 예조에서 만들어 보내어 한 조각은 조선에, 한 조각은 대마도주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일본 막부 또는 그 지방 토호와의 교통도 열려 왜인의 내조 진공이 빈번하였다. 그들의 진상물은 대개 유황·소목·동·은이 주가 되고 조정에서의 회사품은 마포·면사와 서적 등이었다.

【동평관(東平館)】 그리고 특히 대마도 및 기타 지방의 유력한 왜인에게는 조정에서 직첩을 주어 이를 소위 수직왜인이라 하여 내조 무역(공무역)의 특권을 가지게 하였다. 왜사의 서울 유숙소는 동평관이라 하였다.

남방의 유구국에서도 사신을 자주 보내와 소목·호초·향료·사탕·석·서·각 등의 남양 산물을 공물로 바친 일이 있었다.


제3장 사화와 사상계의 동향[편집]

【御用學派, 士林派, 節義派, 淸談派】 國初 以來 歷代의 임금이 文治에 힘을 쓰고 儒學을 장려한 까닭에 儒者와 文人들이 무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世祖 成宗 時에 그들 가운데는 實學을 主로 한 御用學者派와 文章 經學을 主로 한 士林派(金宗直 等)와 節義를 主로 한 節義派(金時習 等)와 詩와 술로 벗하여 세상을 흘겨보는 淸談派(南孝溫 等)가 있었다. 이 네 派 가운데 가장 反目이 甚한 것은 御用學者派와 士林派니, 御用學者派에는 대개 서울을 中心으로 한 世族이 많이 있고, 士林派에는 대개 嶺南의 儒者 金宗直을 中心으로 하여 文人들이 많이 모였다. 이 士林派가 서울에 와서 벼슬하기는 成宗 때로부터이었는데 그 派의 中心 人物인 金宗直은 成宗의 비상한 사랑을 받아 그 門人들까지도 벼슬자리에 많이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士林派중에는 날카로운 新進이 많아 매양 御用學者派를 깨끗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이와 반대로 御用學者派에서는 그들을 輕薄한 무리라 하여 귀엽게 보지 않는 傾向이 있었다.

士林派의 史官으로서 (즉 金宗直 門人의 金馹孫 등) 世祖의 不義한 짓과 御用學者派 中의 아름답지 못한 행실을 國史에 올린 일이 있었다. 【戊午史禍】 十代 燕山君 때에 이르러 이것이 발각되자 御用學者派중에 가장 士林派의 미움을 받은 李克暾·柳子光 等은 이를 좋은 機會로 여겨 본래 文人을 싫어하는 燕山君을 激憤시켜 金馹孫 等 士林派의 거의 전부를 罪人으로 몰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을 보냈다. 이 事件이 있기 전에 이미 죽은 金宗直 같은 이는 그 무덤을 파고 시체를 목 베는 등 泉壤의 禍를 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戊午의 史禍라 하는 것이니 戊午는 곧 燕山郡 四年에 당한다. 史筆로 말미암은 士林의 禍인 까닭에 史家는 이를 특히 史禍라 이른다.

【甲子士禍】 燕山君 十年(甲子)에도 큰 士禍가 있었으니 그 원인은 燕山君의 어머니인 尹氏가 燕山의 어릴 때에 투기를 하다가 宮을 쫓겨나 억울히 죽은 것을 이때 알고 그 일에 關係한 사람은 물론이요 앞서 史禍에 關係된 사람까지도 함께 몰아 죽이니 이를 甲子士禍라 한다.

【燕山君의 失政】 燕山君은 원래 방탕하여 學問을 싫어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自己의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하려 하여 심지어 成均館(今 經學院)을 宴樂의 장소로 또는 藏義寺(洗劍亭 北)와 大圓覺寺(탑골公園)를 妓樂의 所로 하는 등 실로 大膽한 짓을 하였다.

【中宗反正】 이렇게 모든 政治를 어지러이 하다가 그는 필경 신하들에게 쫓겨나고 대신 그 아우가 들어서서 임금이 되니 이는 곧 中宗이었다. 中宗은 燕山의 나쁜 政治를 바로잡는 한편 趙光祖와 같은 젊은 儒者들을 들어 썼다. 【趙光祖 等의 理想政治】 趙光祖 등은 처음에는 中宗의 사랑을 받아 自己네의 마음먹은 순연한 儒者의 政治를 實現코저 할 새 從來의 制度와 法俗 中에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차례로 改革하려 하였다. 그들의 變法主義的 理論과 施設에는 자못 볼만한 點도 있었다. 特히 良風·美俗을 기르기 爲하여 迷信 打破와 鄕約(勸善·懲惡과 相互 扶助의 精神을 主로 한 鄕村의 規約) 實施를 주장하고 혹은 民衆의 精神生活과 物質生活에 有益한 여러 가지 書籍을 번역하고 印刷하여 널리 펴치는 등-종종의 社會 敎化 運動과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더러 現實을 無視하는 일도 있고 그 手段이 너무 과격하고 急進的인 것도 있었으며 또 自己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다른 文臣을 小人이라 指目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軋轢(알록)과 反目이 일어났었다. 이것이 장차 그들의 致命傷을 받게 될 장본(張本)이었다. 【己卯士禍】 中宗 十四年(己卯)에 趙光祖 一派는 마침내 反對派인 南袞(곤) 沈貞 등에게 몰리어 억울한 주검과 竄黜(찬출)을 당하고 말았다. 史家는 이를 己卯士禍라 이르고 그 士禍에 걸린 一派를 己卯名賢이라한다.

中宗의 뒤는 仁宗이 이어서고 仁宗의 뒤는 그 異母弟인 明宗이 이어 섰다. 明宗의 나이 어리므로 그 生母인 文定王后 尹氏가 後見政治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王의 死戚들 사이에 反目과 暗鬪가 생기었다. 즉 明宗의 外叔인 尹元衡과 仁宗의 外叔인 尹任과의 싸움이었다. 즉 前者를 小尹, 後者를 大尹이라 指稱하거니와 小尹을 中心으로 한 一派는 權勢를 빌어 大尹을 비롯하여 自己네의 미워하는 士類를 罪로 몰아 역시 참혹한 禍에 빠뜨렸다. 【乙巳士禍】 이때는 明宗 卽位初인 乙巳이므로 史家는 또한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士禍後 思想界의 動向】 위의 여러 차례 士禍로 因하여 特히 己卯士禍 以後로 士類들의 기운이 매우 저상되어 그들은 政界를 등지고 出林(田園)을 唯一한 樂園으로 삼아 오로지 學問에만 힘쓰는 ─말하자면 政治와 學問을 둘로 나누는 경향이 생기었고, 또 先儒의 舊基에 書院이란 것을 세워 그들의 講學과 集會所로 삼는 風習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學問의 경향도 思索과 理論에 기울어져 高尙한 哲理 硏究(性理 硏究)를 主眼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方面의 大家가 많이 일어났으니 徐敬德(花潭) 李彦廸(晦齋) 李滉(退溪) 曹植(南冥) 金麟厚(河西) 奇大升(高峯) 李珥(栗谷)와 같은 名儒들이 즉 그였다. 【李滉과 李珥】 이 중에도 李滉과 李珥는 그 學問과 人格으로 보아 東方에 典型的 儒者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개는 편벽되어 朱子學을 鐵則으로 삼아 이와 反對되는 다른 學問에 對하여는 寬容性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半島의 學界를 朱子學으로 單一化하여 多彩 多樣할 빛을 發치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遺憾된 點이었다.

【佛敎界】 이때 佛敎界는 어떠하냐하면 앞서 成宗·燕山·中宗의 歷朝를 通하여 排斥과 壓迫에 退縮되어 人間 社會와 격리(隔離)된 느낌이 있었으나, 寺院은 원래 祈禱와 信仰의 大本山인만큼 宮廷 및 民中 特히 婦女子들과의 사이에 항상 關係를 가지고 있었다. 明宗의 母后 文定王后가 攝政하였을 때에 佛敎를 숭상하여 普雨라는 僧侶를 優待하매 佛敎界는 俄然 活氣를 띠어 擴張의 形勢를 보이었다. 즉 奉恩寺(廣州)를 禪宗 奉先寺(楊州)를 敎宗으로하고 僧科의 試驗制를 다시 設하고 八道의 절을 일시 혁신하였다. 그러나 이때 儒臣과 太學生들 사이에는 佛敎反對 普雨排斥의 맹렬한 運動이 일어나 文定王后의 下世와 同時에 普雨는 濟州로 귀양가 죽고 僧科도 페지의 運을 당하여 佛敎는 다시 일어날듯 하다가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어용학파, 사림파, 절의파, 청담파】 국초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한 까닭에 유자와 문인들이 무리로 쏟아져 나왔다. 세조, 성종 때에 그들 중 실학을 주로 한 어용학자파와 문장 경학을 주로 한 사림파(김종직 등)와 절의를 주로 한 절의파(김시습 등)와 시와 술로 벗하여 세상을 흘겨보는 청담파(남효온 등)가 있었다. 이 네 파 가운데 가장 반목이 심한 것은 어용학자파와 사림파이다. 어용학자파는 대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세족이 많이 있고, 사림파는 대개 영남의 유학자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여 문인들이 많이 모였다. 이 사림파가 서울에 와서 벼슬하기는 성종 때부터인데 그 파의 중심 인물인 김종직은 성종의 비상한 사랑을 받아 그 문인들까지도 벼슬자리에 많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림파 중에는 날카로운 신진이 많아 매양 어용학자파를 깨끗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이와 반대로 어용학자파는 그들을 경박한 무리라 하여 귀엽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사림파의 사관으로서 즉 김종직 문인의 김일손 등은 세조의 불의한 짓과 어용학자 중의 아름답지 못한 행실을 국사에 올린 일이 있었다. 【무오사화】 10대 연산군 때에 이르러 이것이 발각되자 어용학자파 중에 가장 사림파의 미움을 받은 이극돈·유자광 등은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본래 문인을 싫어하는 연산군을 격분시켜 김일손 등 사림파의 거의 전부를 죄인으로 몰거나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을 보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죽은 김종직 같은 이는 그 무덤을 파고 시체를 베는 등 천양(泉壤)의 화를 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무오사화라 하는 것이니, 무오는 곧 연산군 4년에 해당한다. 사필(史筆)로 말미암은 사림의 화인 까닭에 역사가는 이를 특히 사화(史禍)라 이른다.

【갑자사화】 연산군 10년(갑자년)에도 큰 사화가 있었으니 그 원인은 연산군이 어머니인 윤씨가 연산이 어릴 때에 투기를 하다가 궁을 쫓겨나 억울하게 죽은 것을 이때에 알고 그 일에 관계한 사람은 물론이요, 앞서 사화에 관계된 사람까지도 함께 몰아 죽이니 이를 갑자사화라 한다.

【연산군의 실정】 연산군은 원래 방탕하여 학문을 싫어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하였다. 심지어 성균관(지금의 경학원)을 연회와 오락의 장소로 또는 장의사(세검정의 북쪽)와 대원각사(탑골공원)를 기생들과 노는 장소로 하는 등 대담한 짓을 하였다.

【중종반정】 이렇게 모든 정치를 어지러이 하다가 그는 마침내 신하들에게 쫓겨나게 되고 대신 그 아우가 들어서서 임금이 되니, 이 분이 곧 중종이다. 중종은 연산의 나쁜 정치를 바로잡는 한편 조광조와 같은 젊은 유학자들을 등용했다. 【조광조 등의 이상 정치】 조광조 등은 처음에는 중종의 사랑을 받아 그들이 마음먹은 순연한 유자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여 종래의 제도와 법속 중에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차례로 개혁하려 하였다. 그들의 변법주의적 이론과 시설에는 자못 볼만한 점도 있었다. 특히 좋은 풍습과 아름다운 풍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 타파와 향약(권선징악과 상호 부조의 정신을 주로 한 향촌의 규약) 실시를 주장하고 혹은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하고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는 등-여러 가지 사회 교화 운동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더러 현실을 무시하는 일도 있고 그 수단이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도 있었으며 또 자기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다른 문신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었다. 이것은 장차 그들의 치명상을 받게 될 근원이었다. 【기묘사화】 중종 14년(기묘년)에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반대파인 남곤, 심정 등에게 몰리어 억울한 죽음과 찬출을 당하고 말았다. 역사가는 이를 기묘사화라 이르고 그 사화에 걸린 일파를 기묘명현이라 한다.

중종의 뒤는 인종이 이어 서고 인종의 뒤는 그 이복동생인 명종이 이어 섰다. 명종의 나이가 어리므로 그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가 후견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왕의 외척들 사이에 반목과 암투가 생겼다. 즉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과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의 싸움이었다. 즉 전자를 소윤, 후자를 대윤이라 지칭하였는데 소윤을 중심으로 한 일파는 권세를 빌어 대윤을 비롯하여 그들이 미워하는 사류를 죄로 몰아 역시 참혹한 화에 빠뜨렸다. 【을사사화】 이때는 명종 즉위 초인 을사이므로 역사가는 또한 이를 을사사화라 한다.

【사화 후 사상계의 동향】 여러 차례의 사화로 인해 특히 기묘사화 이후로 사류들의 기운이 매우 떨어져 그들은 정계를 등지고 산림(전원)을 유일한 낙원으로 삼아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는 ─ 말하자면 정치와 학문을 둘로 나누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선유가 살았던 옛 터전에 서원이란 것을 세워 그들의 강학과 집회소로 삼는 풍습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학문 경향도 사색과 이론에 기울어져 고상한 철리 연구(성리 연구)를 주안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방면의 대가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화담 서경덕,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와 같은 명유들이 그들이다. 【이황과 이이】 이 중에도 이황과 이이는 그 학문과 인격으로 보아 동방의 전형적 유학자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편벽되어 주자학을 철칙으로 삼아 이와 반대되는 다른 학문에 대하여는 관용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반도의 학계를 주자학으로 단일화하여 다채롭고 다양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유감된 점이었다.

【불교계】 이때 불교계는 성종·연산·중종의 배척과 압박에 퇴축되어 인간 사회와 격리된 느낌이 있었으나, 사원은 원래 기도와 신앙의 대본산인 만큼 궁정 및 민중 특히 부녀자들과 항상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하였을 때에 불교를 숭상하여 보우라는 승려를 우대하자 불교계는 갑자기 활기를 띠어 확장의 형세를 보였다. 즉 광주에 있는 봉은사를 선종, 양주에 있는 봉선사를 교종으로 하고 승과의 시험제도를 다시 설치하고 8도의 절을 일시 혁신하였다. 그러나 이때 유신과 태학생들 사이에서 불교 반대, 보우 배척의 맹렬한 운동이 일어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동시에 보우는 제주로 귀양 가 죽고 승과도 폐지하여 불교는 다시 일어날듯 하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근세의 중기(국기 3901-4057년, 선조 원년-경종 말년)[편집]

第十四代 宣祖 元年으로부터 第二十代 景宗 末年까지의 約一百 五十 七年間을 近世의 中期로 잡은 것이지만 이를 또 둘로 나누어 보면 宣祖로부터 第十六代 仁祖 末까지의 約 八十 二年間을 前一期, 第十七代 孝宗으로부터 景宗 末까지의 約 七十 五年間을 後一期로 잡을 수 있다.

【前一期】 前一期에 있어서는 前日로부터의 오랜 太平 속에 發酵된 支配階級(兩班)의 政權 다툼이 드디어 黨派의 大分裂을 일으켜 自黨을 愛護하고 反對黨을 공격하는 風이 더욱 露骨化 尖銳化하였고 또 이리하는 동안에 南으로 倭人의 二次 大入寇와 그후 北으로 胡人의 二次 大侵入을 받아 가위 土崩瓦解의 勢를 이루었다. 特히 倭亂은 그 規模로 보아 또 그 미친바 範圍와 影響으로 보아 全國的인 큰 患難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모든 階級의 사람이 一致協力하여 國難에 當한 것은 特書할 事實이며 또 이 外難으로 因하여 人口의 大消耗를 보게 된 것도 소길 수 없는 事實이었다.

【後一期】 後一期에 있어서는 前者로부터의 支配層의 黨爭이 더욱 發展하여 激甚의 度를 加하고 學問은 黨爭과 아울러 後者의 武器로 化하였다. 그러나 兩大 外難의 뒤라 自我에 對하여 覺醒과 批判이 加하여지고 復興 改新의 氣運이 促進되고 또 內外의 衝動과 刺戟으로 因한 新文化 運動의 萌芽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大明이 이미 몰락하고 胡人이 中國에 侵入하여 大淸 帝國을 建設할 때라 朝鮮의 明에 對한 同情心 즉 尊明思想과 淸에 對한 敵愾心이 國內에 彌滿한 것이라든지 實現은 못하였지만 一時 北伐(淸國 征伐)을 計畫하였던 것은 事實이다. 要컨대 中期의 歷史는 外寇의 侵入과 黨爭의 激甚이 그 가장 두드러진 特徵을 삼아 있거니와 다음 後期 歷史에 나타나는 勢道政治 혹은 閥族政治라든지 國家 經濟의 大紊亂이라든지 또 이로 因한 民衆의 大動亂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後期 歷史와 區別되는 點이라 하겠다.

제14대 선조 원년부터 제20대 경종 말년까지의 약 157년간을 근세의 중기로 잡았지만 이를 또 둘로 나누어 보면 선조부터 제16대 인조 말까지의 약 82년간을 전1기, 제17대 효종부터 경종 말까지의 약 75년간을 후1기로 잡을 수 있다.

【전1기】 전1기는 전일로부터 오랜 태평 속에 발효된 양반 지배계급의 정권 다툼이 드디어 당파의 대분열을 일으켜 자기의 당을 애호하고 반대당을 공격하는 풍이 더욱 노골화, 첨예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동안에는 남으로 왜인의 2차 대침입과 그 후 북으로 호인의 2차 대침입을 받아 토붕와해의 형세를 이루었다. 특히 왜란은 그 규모, 범위, 영향이 전국적인 큰 환란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모든 계급의 사람이 일심협력하여 국난을 물리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며 또 이 난리로 인해 인구가 크게 소모를 보게 된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후1기】 후1기에 있어서는 지배층의 당쟁이 더욱 발전하여 심화되었고 학문은 당쟁과 아울러 무기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양대 외란의 뒤인지라 자아에 대한 각성과 비판이 가하여지고 부흥 개신의 기운이 촉진되고 또 내외의 충동과 자극으로 신문화 운동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명나라가 이미 몰락하고 호인이 중국에 침입하여 대청 제국을 건설할 때라 조선의 명에 대한 존명 사상과 청에 대한한 적개심이 국내에 가득차 있었다. 실현은 못하였지만 한때 북벌 즉 청국 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중기의 역사는 외구의 침입과 당쟁의 격심이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이 시기는 후기 역사에 나타나는 세도정치 혹은 벌족정치, 국가 경제의 큰 혼란 또 이로 인한 민중의 큰 동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것이 후기 역사와 구별되는 점이라 하겠다.


제1장 동서의 분당[편집]

【儒者의 세 傾向】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四大士禍가 연달아 일어나는 동안에 儒者들의 動向은 대개 山林을 本居로 하여 官場(政界)에 出入하는 것을 대단 삼갔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소위 政治的 動物인 까닭에 豪華스러운 欲望을 永히 抑制치 못하고 나아가 活躍하기를 조아하는 파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 儒者들 가운데는 대개 세 가지 傾向이 있었다. (1) 하나는 벼슬을 全然 斷念하고 山林에 들어앉아 오로지 學問과 행실을 닦는 派 (2) 또 하나는 가끔 나아가 벼슬은 하되 本心은 山林에 있어 形便을 보아 자주 물러와 學行에 힘쓰는 派 (3) 하나는 이름은 山林에 두고 뜻은 政界에 있어 기틀을 보아 나아가 벼슬 자리를 노리는 派이었다. 成運(大谷) 徐敬德(花潭) 및 曹植(南冥)과 같은 이는 第一에 속하고, 李滉(退溪) 金麟厚(河西) 奇大升(高峯) 李珥(栗谷)와 같은 이는 第二의 경우에 속하나 공부와 지조가 이들만 못한 儒者들은 대개 第三의 境遇에 속하였다.

이 第三類에 속한 儒者들은 원래 벼슬 야심이 있으므로 이들 사이에는 暗暗裏에 자리다툼 權力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또 利害關係 혹은 정의(情誼) 關係로 한편을 두호하고 다른 편을 미워하는 일이 생기었다. 儒者들의 이 습성(習性)이 점점 커져서 分黨의 염려가 있게 되매 宣祖 初의 元老인 李浚慶 같은 이는 이를 매우 걱정하였던 것이다. 과연 宣祖 八年에 이르러 東西의 分黨이 일어나니 沈義謙을 두호하는 一派는 西人이라 指目하고 金孝元을 두호하는 一派는 東人이라 指目하였다. 그것은 沈의 집이 서울 西편에 있고 金의 집이 東편에 있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黨派가 東西로 나뉘어 東人은 西人을 공격하고 西人은 東人을 헐어 말하여 싸움이 벌어지매 李聞(栗谷)와 같은 이는 이를 크게 염려하여 각각 두 派를 달래어 나라일에 同心協力하도록 무한 애를 써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고, 싸움은 그대로 격렬해져 후에는 黨에서 黨이 나뉘고 派에서 派가 갈리었다. 즉 東人 中에서 南人 北人이 생기고 北人 中에서 또 大北 小北 其他 여러 細派가 생기었다. 이 黨爭의 風이 자꾸 계속되어 여러 백 년 동안 우리의 政治를 그르치고 우리의 맘자리와 風俗을 나쁘게 하여 왔지만 이런 버릇은 우리가 이를 악물고라도 고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유자(儒者)의 세 경향】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4대 사화가 연달아 일어나는 동안에 유자들의 동향은 대개 산림을 근거지로 하여 관장(정계)에 출입하는 것을 대단히 삼갔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소위 정치적 동물인 까닭에 호화스러운 욕망을 영원히 억제하지 못하고 나아가 활약하기를 좋아하는 파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 유자들 가운데는 대개 세 가지 경향이 있었다. (1) 하나는 벼슬을 전연 단념하고 산림에 들어앉아 오로지 학문과 행실을 닦는 파 (2) 또 하나는 가끔 나아가 벼슬은 하되 본심은 산림에 있어 형편을 보아 자주 물러와 학행에 힘쓰는 파 (3) 하나는 이름은 산림에 두고 뜻은 정계에 있어 기틀을 보아 나아가 벼슬자리를 노리는 파이었다. 대곡 성혼, 화담 서경덕 및 남명 조식과 같은 이는 첫 번째에 속하고,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와 같은 이는 두 번째의 경우에 속하나 공부와 지조가 이들만 못한 유자들은 대개 세 번째의 경우에 속하였다.

이 세 번째에 속한 유자들은 원래 벼슬 야심이 있으므로 이들 사이에는 암암리에 자리다툼 즉 권력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또 이해관계 혹은 정의 관계로 한편을 두호하고 다른 편을 미워하는 일이 생기었다. 유자들의 이 습성이 점점 커져서 분당의 염려가 있게 되자 선조 초의 원로인 이준경 같은 이는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과연 선조 8년에 이르러 동서의 분당이 일어나니 심의겸을 두호하는 일파는 서인이라 지목하고 김효원을 두호하는 일파는 동인이라 지목하였다. 그것은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편에 있고 김효원의 집이 동편에 있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당파가 동서로 나뉘어 동인은 서인을 공격하고 서인은 동인을 헐어 말하여 싸움이 벌어지자 율곡 이이와 같은 이는 이를 크게 염려하여 각각 두 파를 달래어 나라일에 동심협력하도록 무한 애를 써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싸움은 그대로 격렬해져 후에는 당에서 당이 나뉘고 파에서 파가 갈리었다. 즉 동인 중에서 남인, 북인이 생기고 북인 중에서 또 대북, 소북, 기타 여러 갈래의 파가 생기었다. 이 당쟁의 풍이 자꾸 계속되어 수백 년 동안 우리의 정치를 그르치고 우리의 마음자리와 풍속을 나쁘게 하여 왔지만 이런 버릇은 우리가 이를 악물고서라도 고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제2장 왜란과 이순신[편집]

1. 임진왜란 이전의 왜변[편집]

앞서 世宗 때에 三浦를 開港한 以後로 倭人의 居留者가 날로 불어 本國人과 서껴 살게 되고 그리하여 그 사이에 간혹 衝突도 일어나며 또 그곳 官吏로 居留倭人을 多少 壓迫한 일도 있었다.

【三浦의 倭亂】 中宗 五年 庚午에는 三浦의 倭人이 釜山僉使 李友曾에 對한 不平으로 드디어 對馬島 倭人의 도움을 얻어 變亂을 일으키어 友曾을 죽이고 三浦를 소란케 하매 朝廷에서 將兵을 보내어 이를 鎭壓하였다. 亂後 朝廷은 三浦를 閉鎖하고 倭人과의 交通을 끊으니 對馬島는 또다시 物資의 困難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島主는 日本 幕府(室町幕府)에 請하여 朝鮮과의 交通을 交涉하였다. 【壬申約條】 朝鮮은 이 애걸(哀乞)과 간청(懇請)에 못 이기어 同王 七年(壬申)에 島主와 소위 「壬申約條」란 것을 맺고 從前의 歲遣船 數와 歲賜米豆의 數를 半減하고 三浦 中에서 단지 薺浦만을 열기도 하였다. (그 후 또 薺浦에서 倭人과 本國人과의 사이에 衝突이 일어나 그들의 居留 貿易港을 釜山으로 옴기었다)

다음 明宗 때에도 여러 번 倭變이 있어 朝廷은 그들의 活刺한 動作과 거기 對한 防備에 多少 注意는 일이키었으나 確乎한 큰 對策은 강구치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오랜 太平 속에서 國家의 機構가 解弛하여지고 上下의 人心이 緊張力을 잃었던 까닭이다. 【李滉·李珥의 提言】 李滉(退溪)·李珥(栗谷)와 같은 名儒는 이때 倭人의 動向 뿐만 아니라 北方 胡人의 그것도 아울러 憂慮하여 國防과 軍備의 充實을 提言하였으나 採用되지 못하고 말았다.

앞서 세종 때에 삼포를 개항한 이후로 왜인의 거류자가 날로 불어 본국인과 섞여 살게 되었고 그 사이에 간혹 충돌도 일어났으며 또 그곳 관리가 거류 왜인을 다소 압박한 일도 있었다.

【삼포의 왜란】 중종 5년 경오년에 삼포의 왜인이 부산 첨사 이우증에 대한 불평으로 드디어 대마도 왜인의 도움을 얻어 변란을 일으켜 이우증을 죽이고 삼포를 소란하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장병을 보내 이를 진압하였다. 변란 후 조정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과 교통을 끊으니 대마도는 또다시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마도주는 일본 실정(室町) 막부에 청하여 조선과의 교통을 교섭하였다. 【임신약조】 조선은 이 애걸과 간청에 못 이기어 중종 7년 임신년에 대마도주와 이른바「임신약조」란 것을 맺고 종전의 세견선 수효와 세사미두의 수효를 반감하고 삼포 중에서 단지 제포만을 열기로 하였다. (그 후 또 제포에서 왜인과 본국인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그들의 거류 무역항을 부산으로 옮기었다.)

다음 명종 때에도 여러 번 왜변이 일어나자 조정은 그들의 횡포와 그에 대한 방비에 다소 주의하였으나 확고한 큰 대책은 강구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오랜 태평 속에서 국가의 기구가 해이하여지고 상하의 인심이 긴장감을 잃었던 까닭이다. 【이황과 이이의 건의】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같은 명유는 이때 왜인의 동향뿐만 아니라 북방 호인의 동향도 아울러 우려하여 국방과 군비를 충실히 할 것을 제언하였으나 채용되지 못하고 말았다.


2. 제1차 왜란과 이순신의 활약[편집]

【豐臣秀吉의 妄想】 이때 日本에는 豐臣秀吉이란 怪傑이 있어 어수선한 그 나라를 統一하고 지나친 妄想을 일으키어 朝鮮과 明나라를 노리려 하여 먼저 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의 內情을 살피게 하는 同時에) 朝鮮에 對하여 明을 칠 터이니 길을 빌리라 하였다. 물론 朝廷에서는 이를 허락할 性質의 것이 아니므로 拒絶하였다.

宣祖 二十五年(壬辰) 秀吉은 드디어 小西行長 加藤淸正 黑山長政 以下 諸將에게 十五萬 大軍을 주어 朝鮮을 侵入하게 하였다. 【倭軍의 上陸】 이 해 四月에 敵의 釜山 上陸의 急報가 들어오매 朝廷에서는 당황하여 李鎰(일) 申砬(립) 등 날랜 장수를 연방 보내어 倭軍의 進路를 막았으나 모조리 봉패(逢敗)하였다. 【平壤占據】 宣祖는 부득이 서울을 버리고 義州로 向하니 敵은 무난히 쳐 들어와 서울을 占領하고 一派는 東北(咸鏡道)으로 向하고 一派는 西北(平安道)으로 平壤에 닥쳐 왔었다.(六月) 불과 두 달 동안에 敵이 이와 같이 깊이 쳐 들어온 것은 물론 오랜 安逸 속에 우리 군대의 訓練이 부족하고 防備가 허수하였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敵에게는 이때 鳥銃이란 新銳 武器가 있어 特別한 効果를 나타냈던 까닭이다.

海上 方面에 있어는 처음 慶尙右水使(本營은 巨濟島) 元均의 過失로 因하여 敵으로 하여금 쉽사리 上陸케 하였던 것이다. 그 후 敵의 海上活動 내지 補給을 處處에서 분쇄하여 猛威를 나타내는 同時에 항상 制海權을 잡았던 이는 全羅左水使(本營은 麗水) 李舜臣이었다. 【李舜臣의 龜船과 活躍】 그는 일즉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까 하여 미리 모든 戰艦을 수리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는데 그 戰艦 中에는 龜船이란 거북 비슷한 모양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무수한 鐵송곳을 꽂고 안에는 前後 左右로 銃砲를 걸어 노아 攻擊에 당돌하고 움직임에 재빠른 배가 있었다. 이러한 이름의 배는 近世 初期로부터 있었으나 이러한 구조와 장치는 李舜臣 장군이 特히 創造하였던 것이다. 장군은 다른 水軍과도 連絡하여 모든 戰鬪 準備를 마친 후 屢次 艦隊를 이끌고 敵의 水軍을 번번히 쳐 깨트렸는데 第一次로 玉浦(巨濟島 東岸)에서 第二次로 泗川·唐浦(統營 附近)·唐項浦(固城 會華面)에서, 【閑山島海戰】 그 후 第三次로 閑山島(巨濟와 固城 사이) 앞바다에서 敵船을 모조리 쳐 부시어 敵의 혼담을 꺽는 대첩(大捷)을 올리었다. 特히 閑山島海戰은 유명한 싸움으로 우리 軍은 이 싸움에서 敵 艦船 七十餘隻을 파멸하고 무수한 敵兵을 바다 속에 장사하였던 것이다. 舜臣의 이러한 活躍 때문에 倭軍이 멀리 西海로 通치 못함은 물론이요. 全羅 南岸에도 침범치 못하였던 것이다. 위의 戰功으로 舜臣은 후에 三路(忠淸·全羅·慶尙) 水軍統制使가 되어 閑山島에 統營을 두고 三道 海軍의 總指揮官의 任에 當하였다.

【國內 各處의 義兵】 이때 國內 各處에서는 모든 階級의 사람들이 義憤에 불타 趙憲 郭再祐 高敬命 金千鎰 鄭文孚와 같은 儒者들과 休靜(西山大師) 및 그 弟子 惟政(泗溟堂) 같은 僧侶들도 義兵(義勇軍)을 일으켜 到處에서 敵과 싸워 혹은 肉彈으로 壯烈한 죽엄을 한 이도 있고 혹은 敵을 쳐 부시어 功을 세운 이도 있었다.

【明의 救援】 朝鮮의 要請으로 明에서는 처음 將兵을 보내어 倭의 西北 根據地인 平壤을 치다가 失敗하고 그 다음 日本 事情에 通한 沈惟敬이란 자를 平壤에 보내어 休戰을 꾀하게 하는 同時에 일변 李如松에게 大兵을 주어 朝鮮을 救援케 하였다. 如松은 我軍과 힘을 아울러 平壤을 쳐서 빼앗으매(癸巳 正月) 倭는 南으로 물러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如公은 乘勝의 氣勢로 倭軍의 뒤를 쫓아오다가 碧躋館(高陽) 싸움에서 大敗를 입고 겨우 몸을 빠치어 달아나니 倭軍은 일시 京城에 머무러 있었다. 【幸州大捷】 이때 官軍으로 京城 附近에서 외로히 敵과 싸워 大捷을 올린 이는 全羅監司 權慄(율)이니, 즉 그는 이 해(癸巳) 三月에 幸州山城(西漢江 邊)에서 背水陣을 치고 大敵을 맞이하여 孤軍奮鬪로 통쾌히 쳐 부시었던 것이다.

李如松의 敗北 後 明의 說客 沈惟敬이 서울에 와서 또다시 和議를 제창하매 倭軍은 海上 陸上을 通하여 朝鮮軍의 活刺(랄) 其他 補給의 困難 등 여러 가지로 形勢가 不利하므로 할 수 없이 和議에 應하여 京城을 撤退하였다(癸巳 四月). 明軍이 이어 入城하여 또 倭軍의 뒤를 쫓으니 倭軍은 멀리 南으로 달아나 釜山을 根據로 하고 南方의 要地인 晋州城을 攻圍하였다. 【晉州陷落】 城은 前年 十月에 牧使 金時敏의 굳센 抵抗으로 敵이 大損害를 입고 물러간 곳이어니와 그 후 時敏은 戰傷으로 죽고 그 대신 徐元禮가 牧使로 被任되었었다. 이때에 역시 牧使 以下 軍官民이 한덩어리가 되어 끝까지 城을 死守하다가 마침내 城의 함락과 運命을 같이하고 말았다(同年 六月).

金時敏의 晋州固守, 李舜臣의 閑山島海戰, 權慄의 幸州싸움은 壬辰 三大捷으로 꼽는 것이지만 徐元禮 以下의 壯烈한 죽엄도 朝鮮의 魂을 보인 것의 하나라 하겠다. 倭軍은 熊川(昌原)과 西生浦(蔚山) 사이에 城壘를 쌓고 오래 머물기를 꾀하더니 그 후 和議가 進行됨에 따라 大部分은 徐徐히 自國으로 물러갔다.

【還都】 京城이 회복되자 宣祖 以下 諸臣도 徐徐히 北에서 還都하여(癸巳 十月) 일변 復興에 착수하였다.

【풍신수길의 망상】 이때 일본에는 풍신수길이란 괴걸이 있어 어수선한 그 나라를 통일하고 지나친 망상을 일으켜 조선과 명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먼저 대마도주에게 우리의 내정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 명을 칠 터이니 길을 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물론 조정에서는 허락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이를 거절하였다.

선조 25년 임진년에 풍신수길은 드디어 소서행장, 가등청정, 흑산장정 이하 여러 장수에게 15만 대군을 주어 조선에 침입하게 하였다. 【왜군의 상륙】 이 해 4월에 적의 부산 상륙의 급보가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당황하여 이일, 신립 등 날랜 장수를 연방 보내어 왜군의 진로를 막았으나 모조리 낭패를 보았다. 【평양 점거】 선조는 부득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향하니 적은 무난히 쳐 들어와 서울을 점령하고 일파는 동북(함경도)으로 향하고 다른 일파는 서북(평안도)으로 향하여 평양까지 닥쳐왔다.(6월) 불과 두 달 동안에 적이 이와 같이 깊이 쳐 들어온 것은 오랜 안일 속에 우리군대의 훈련이 부족하고 방비가 허수하였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적에게는 이때 조총이란 신예 무기가 있어 특별한 효과를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해상 방면은 처음 경상 우수사(본영은 거제도) 원균의 과실로 인하여 적이 쉽게 쉽사리 상륙하게 하였다. 그 후 적의 해상활동 내지 보급을 곳곳에서 분쇄하여 맹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항상 제해권을 잡았던 이는 전라 좌수사(본영은 여수)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활약】 그는 일찍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까 하여 미리 모든 전함을 수리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다. 그 전함 중에는 귀선이란 거북 비슷한 모양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무수한 철 송곳을 꽂고 안에는 전후좌우로 총포를 걸어 놓아 공격에 당돌하고 움직임에 재빠른 배가 있었다. 이러한 이름의 배는 근세 초기부터 있었으나 이러한 구조와 장치는 이순신 장군이 특히 창조하였던 것이다. 장군은 다른 수군과도 연락하여 모든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여러 차례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을 번번이 쳐서 깨뜨렸다. 제1차로 옥포(거제도 동쪽 해안)에서 제2차로 사천·당포(통영 부근)·당항포(고성 회화면)에서, 【한산도 해전】 그 후 제3차로 한산도(거제와 고성 사이) 앞바다에서 적선을 모조리 쳐부수어 적의 혼담을 꺾는 대첩을 올리었다. 특히 한산도 해전은 유명한 싸움으로 우리 군은 이 싸움에서 적의 함선 70여 척을 파멸하고 무수한 적병을 바다 속에 장사하였다. 이순신의 이러한 활약 때문에 왜군이 멀리 서해로 통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전라도 남쪽 해안에도 침범하지 못하였다. 위의 전공으로 이순신은 후에 삼로(충청·전라·경상) 수군 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통영을 두고 삼도 해군의 총지휘관의 직임을 맡았다.

【국내 각처의 의병】 이때 국내 각처에서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의분에 불타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와 같은 유자들과 휴정(서산대사) 및 그의 제자 유정(사명당) 같은 승려들도 의병(의용군)을 일으켜 도처에서 적과 싸워 혹은 육탄으로 장렬한 죽음을 한 사람도 있었고 혹은 적을 쳐부수어 공을 세운 사람도 있었다.

【명나라의 구원】 조선의 요청으로 명에서는 처음 장병을 보내어 왜의 서북근거지인 평양을 치다가 실패하고 그 다음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심유경이란 자를 평양에 보내어 휴전을 꾀하게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여송에게 대병을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여송은 계사 정월에 우리 군과 힘을 아울러 평양을 쳐서 빼앗았으니 왜는 남으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여송은 승승의 기세로 왜군의 뒤를 쫓아오다가 벽제관(고양) 싸움에서 대패를 당하고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니 왜군은 일시 경성에 머물러 있었다. 【행주대첩】 이때 관군으로 경성 부근에서 외로이 적과 싸워 대첩을 올린 이는 전라 감사 권율이니, 즉 그는 계사년 3월에 행주산성(서한강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고 대적을 맞이하여 고군분투로 통쾌히 쳐부수었다.

이여송의 패배 후 명의 설객(說客) 심유경이 서울에 와서 또다시 화의를 제창하였다. 왜군은 해상, 육상을 통하여 조선군의 활동과 기타 보급의 곤란 등 여러 가지로 형세가 불리하므로 할 수 없이 화의에 응하여 경성에서 철수하여 물러났다.(계사년 4월) 명군이 이어 입성하여 또 왜군의 뒤를 쫓으니 왜군은 멀리 남쪽으로 달아나 부산을 근거로 하고 남방의 요지인 진주성을 에워싸서 공격하였다. 【진주 함락】 진주성은 전년 10월에 목사 김시민의 굳센 저항으로 적이 큰 손해를 입고 물러간 곳이었는데, 그 후 김시민은 전쟁 부상으로 죽고 그 대신 서원례가 목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에 역시 목사 이하 군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마침내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하고 말았다(같은 해 6월).

김시민의 진주 고수,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 권율의 행주 싸움을 임진 3대첩으로 꼽지만 서원례 이하의 장렬한 죽음도 조선의 혼을 보인 것의 하나라 하겠다. 왜군은 웅천(창원)과 서생포(울산) 사이에 성첩을 쌓고 오래 머물기를 꾀하더니 그 후 화의가 진행됨에 따라 대부분은 서서히 자국으로 물러갔다.

【환도(還都)】 경성이 회복되자 선조 이하 여러 신하도 서서히 북에서 환도하여(계사년 10월) 한편으로 부흥에 착수하였다.


3. 제2차 왜란(정유재란)과 이순신의 최후 활약[편집]

앞서 沈惟敬의 提唱한 和議에 對하여 朝鮮側에서는 대개 反對의 意思를 表하였으나 明나라 朝廷에서는 이를 支持하여 이후 二 三年간 交涉의 使節이 가고 오고 하더니 明으로부터 秀吉을 日本國王에 封한다는 國書가 傳達되매 秀吉은 비로소 惟敬의 術策에 속은 것을 깨닫고 드디어 再入寇를 決行하였다. 【再入寇】 즉 秀吉은 宣祖 三十年 丁酉에 다시 小西行長 加藤淸正으로 하여금 十四萬軍을 이끌고 朝鮮에 쳐 들어와 앞서 南海岸에 쌓던 諸 舊壘에 웅거하였다. 그리하여 倭軍은 北으로 稷山(忠淸道) 西으로 南原(全羅道)에까지 침범하였는데, 明의 援軍이 또 와서 我軍과 협력하여 敵을 막아 南으로 쫓았다.

【李舜臣의 罷免과 再起用】 그러나 이때 倭의 水軍은 자못 활발한 行動을 取하였으니 그것은 李舜臣 장군이 敵의 反間과 그를 미워하는 자의 참소(讒訴)로 因하여 그간 統制使의 자리를 罷免당하고 (뿐만 아니라 거이 極刑에 處할뻔하다가 一等을 減하였고) 그를 시기하던 元均이 대신 統制使가 되어 敵의 꾀임에 빠져 싸움에 大敗하였던 까닭이다.

朝廷에서는 이에 李舜臣을 다시 이르켜 統制使를 삼으니 舜臣은 元均 敗戰 後의 惡條件을 무릅쓰고 간신히 남은 戰艦과 散卒을 걷우어 西海로 通하려는 敵의 大軍을 【鳴梁大捷】 鳴梁 海上(珍島)에서 마지하여 거의 여지없이 쳐 부시어 敵의 氣勢를 크게 꺾었고 또 明의 水軍提督 陳璘(린)과 聯合하여 敵을 古今島(康津南)에서 大破하였다.

陸戰에 있어서도 明의 援軍이 官軍으로 더부러 南方 到處에서 敵과 交戰하는 동안에 敵軍側에는 큰 變動이 생기었다. 그것은 戊戌八月에 倭亂의 張本人인 秀吉이 病들어 죽으매 遺命으로 군사를 撤退케 한 事實이었다. 이로 因하여 倭軍이 차례로 물러갈새 舜臣은 이 틈을 타서 撤退하는 倭軍을 섬멸하려하여 露梁(南海島와 河東間) 海上에서 敵의 大部隊와 어울려 싸우다가 不幸히도 敵의 流彈에 맞아 壯烈한 最後를 마치었다. 때는 戊戊 十一月 十九日이니 舜臣의 나이 五十四歲이었다.

舜臣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싸워 적은 兵力으로 능히 敵의 大軍을 여러 번 쳐 깨트렸으니, 오직 나라를 위하는 그 지극한 정성 崇高한 人格, 偉大한 統率 指揮力 또 그 神妙한 戰略은 모두 世界 海戰史上에 類例가 드문 것이다. 이 싸움에 倭의 水軍은 드디어 敗하여 돌아가고 그 陸軍도 죄다 撤歸하고 말았다.

앞서 심유경이 제창한 화의에 대하여 조선 측에서는 대개 반대의 의사를 표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지지하여 이후 2, 3년 간 교섭의 사절이 오고 갔다. 그러나 명으로부터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국서가 전달되자 풍신수길은 비로소 심유경의 술책에 속은 것을 깨닫고 드디어 두 번째 침략을 결행하였다. 【두 번째 침략】 즉 풍신수길은 선조 30년 정유년에 다시 소서행장, 가등청정에게 14만의 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앞서 남해안에 쌓았던 여러 옛 보루에 웅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은 북쪽으로 직산(충청도), 서쪽으로 남원(전라도)까지 침범하였는데, 명의 원군이 또 와서 우리 군과 협력하여 적을 막아 남쪽으로 쫓았다.

【이순신의 파면과 재기용】 그러나 이때 왜의 수군은 자못 활발한 행동을 취하였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적의 반목과 그를 미워하는 자의 참소로 인하여 그간 통제사의 자리를 파면당하고 (뿐만 아니라 거의 극형에 처해질 뻔하다가 일등을 감하였고) 그를 시기하던 원균이 대신 통제사가 되어 적의 꼬임에 빠져 싸움에 대패하였던 까닭이다.

조정에서는 이에 이순신을 다시 등용하여 통제사로 삼으니 이순신은 원균 패전 후의 악조건을 무릅쓰고 간신히 남은 전함과 병졸을 거두어 서해로 통하려는 적의 대군을 【명량대첩】 명량(진도) 해상에서 맞이하여 거의 여지없이 쳐부수어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또 명의 수군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적을 고금도(강진의 남쪽)에서 대파하였다.

육전에서도 명의 원군이 관군과 더불어 남방 도처에서 적과 교전하는 동안에 적군 측에는 큰 변동이 생겼다. 그것은 무술년 8월에 왜란의 장본인인 풍신수길이 병들어 죽으며 유명으로 군사를 철퇴하게 한 사실이었다. 이로 인하여 왜군이 차례로 물러가려 하자 이순신은 이 틈을 타서 철퇴하는 왜군을 섬멸하려 하여 노량(남해도와 하동 사이) 해상에서 적의 대부대와 어울려 싸우다가 불행히도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다. 때는 무술년 11월 19일이니 이순신의 나이 54세였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싸워 적은 병력으로 능히 적의 대군을 여러 번 쳐 깨뜨렸으니, 오직 나라를 위하는 그 지극한 정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 지휘력 그리고 그 신묘한 전략은 모두 세계 해전사상에 유례가 드문 것이다. 이 싸움에서 왜의 수군은 드디어 패하여 돌아가고 그 육군도 죄다 철수하여 돌아가고 말았다.


4. 전시의 새로운 시설과 신무기[편집]

王亂中에 있어 倭軍 明軍의 武藝와 武器에 刺戟되어 我軍側에서도 여러 가지 新施設과 新武器의 現出을 보게 되었는데, 【訓鍊都監】 그 중 著名한 施設로는 訓鍊都監의 設置니 宣祖의 還都 翌年인 甲午에 京城에 이것을 두고 五部의 壯丁을 뽑아 中國敎士를 초빙하여 그 나라 浙江兵의 武藝를 가르치었다. 그 武藝中에는 砲手(銃兵) 射手(弓兵) 殺手(槍劍兵)의 三種이 있어 部門을 나누어 操練을 시켰던 것이다. 또 이와 同時에 地方에도 哨官(초관) 혹은 束伍軍(속오군)이란 것을 두고 역시 敎官을 派遣하여 三手의 技術을 가르치었다.

【飛擊震天雷, 火車】 武器에 있어서는 倭軍 鳥銃에 큰 洗鍊을 받았던 만큼 中央과 地方에서 그것을 速히 모방하여 많이 만들었고 또 火砲工 李長孫은 中國의 震天雷(爆彈)를 大砲에 利用하여 目的地에 쏘아 떨어져 폭발케 하는 飛擊震天雷란 것을 發明하였고 邊以中이란 이는 一種의 탕크 비슷한 「火車」를 만들었는데 이는 수레 속에 四十處의 銃穴을 내고 거기에 銃을 걸고 심지를 連하여 차례차례로 쏘는 武器였다. 飛擊震天雷는 壬辰 九月에 慶尙 左兵使 朴晋이 慶州奮還戰에 이것을 使用하여 特効를 알외였고 火車는 權慄의 幸州싸움에 역시 이를 利用하여 敵을 놀래게 하였던 것이다.

전란 중에 왜군, 명군의 무예와 무기에 자극되어 우리 군 측에서도 여러 가지 새로운 시설과 신무기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훈련도감】 그 중 저명한 시설로는 훈련도감의 설치니 선조의 환도 다음해인 갑오년에 경성에 이것을 두고 5부의 장정을 뽑아 중국 교사를 초빙하여 그 나라 절강병의 무예를 가르쳤다. 그 무예 중에는 포수(총병), 사수(궁병), 살수(창검병)의 3종이 있어 부문을 나누어 조련을 시켰다. 또 이와 동시에 지방에도 초관 혹은 속오군이란 것을 두고 역시 교관을 파견하여 삼수의 기술을 가르쳤다.

【비격진천뢰와 화차】 무기는 왜군 조총에 큰 시련을 받았던 만큼 중앙과 지방에서 그것을 속히 모방하여 많이 만들었고 또 화포공 이장손은 중국의 진천뢰(폭탄)를 대포에 이용하여 목적지에 쏘아 떨어져 폭발하게 하는 비격진천뢰란 것을 발명하였다. 변이중은 일종의 탱크 비슷한 「화차」를 만들었는데, 이는 수레 속에 40곳의 총혈을 내고 거기에 총을 걸고 심지를 이어서 차례차례로 쏘는 무기였다. 비격진천뢰는 임진 9월에 경상 좌병사 박진이 경주분환전에 이것을 사용하여 특효가 있음을 알렸고 화차는 권율의 행주 싸움에서 역시 이를 이용하여 적을 놀라게 하였다.


5. 전후의 국내 형편과 국교 회복[편집]

【朝鮮의 瘡痍】 七年에 걸친 戰役이 朝·明·日 三國에 준 影響은 대단히 커서 三國이 다 疲弊를 느끼었지만 中에도 朝鮮은 더 甚하였으니, 敵의 侵攻을 받는 外에 明軍의 북세와 등쌀에 또한 精神上 物質上의 적지 않은 影響을 받았던 것이다. 戰役 中에 얼마나 많은 國內 人口가 消耗되었는지는 戰前 戰後의 戶口에 關한 統計조차 傳치 아니하므로 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平時 京城의 戶數가 八 九萬 이었던 것이 壬亂後에는 겨우 數萬戶에 지나지 못하였다는 記錄을 보면 全體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其他 都市 農村의 疲弊도 가히 想像할 수 있지만 其中에도 慶尙 一道는 倭寇 侵人의 門戶요. 또 일시 그들의 根據地이었던만큼 다른 곳보다도 더 큰 被害를 입었었다(또 흔히 戰後에 따르는 飢饉과 疾疫으로 많은 人命을 잃었다).

그러나 그 후 上下 官民이 戰後 復興에 온갓 힘을 다 하였던 까닭에 차차 平時狀態로 돌라가게 되었다. 【倭人에 對한 敵愾心】 戰後에 있어 朝鮮人의 愛國心과 民族的 意識은 決코 前日의 比가 아니었고 倭人에 對한 敵愾心이라던지 明나라에 對한 崇慕心은 더욱 强烈하였던 것이다. 즉 明은 朝鮮에 對하여 再造의 恩이 있다 하여 우리 知識層의 尊明思想 事大主義는 날로 커갈 뿐이었다. 이러한 思想과 主義는 後日 明이 亡하고 淸이 일어나 이와 關係를 맺은 후에도 變함이 없었다.

【日本과의 國交回復】 日本에서는 秀吉이 죽은 후에 德川家康이 그 뒤를 이어 國內를 정돈할새 먼저 朝鮮과 和를 맺으려하여 對馬島主를 通하여 여러 번 交涉이 있었으나 朝廷에서는 잘 듣지 아니하다가 宣朝 四十年에 이르러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前後하여 日本으로부터 我國人 男女의 俘虜된 자의 歸還도 많이 있었지만 歸還되지 못하고 그냥 눌러 산 자도 많았던 것이다. 【陶器製造術의 傳播】 歸還 不歸還을 물론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日本에 傳播된 文物과 技術이 있었으니 陶器 製造의 技術과 같은 것은 그 두드러진 例이며 또 戰役 中에 倭人이 直接 약탈하여 가지고 간 것도 많았으니, 例하면 여러 가지의 圖書와 實物과 其他 活字 등이었다. 【朝鮮活字의 模倣】 그리하여 日本서는 朝鮮 圖書의 重刊, 朝鮮 活字의 모방이 행하여져 日本 文化上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德川幕府와의 修交는 위에 말한바와 같이 宣祖 四十年부터 시작되어 이후 거의 使臣의 往來가 그치지 아니하였고 對馬島와의 通商貿易도 光海君 初로부터 시작되어 釜山에 倭舘이 다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전후의 상처】 7년에 걸친 전쟁이 조선·명·일본 3국에 준 영향은 대단히 커서 3국이 다 피폐해졌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은 더 심하였다. 적의 침공을 받은 것 이외에 명군의 북새와 등쌀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국내 인구가 소모되었는지는 전쟁 전과 전쟁 후의 호구에 관한 통계조차 전하지 아니하므로 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평시 경성의 호구가 8, 9만이었던 것이 임란 후에는 겨우 수만호에 지나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전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기타 도시, 농촌의 피폐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상도 한 지역은 왜구 침입의 문호요, 또 일시 그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다른 곳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또 흔히 전후에 따르는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인명을 잃었다.)

그러나 그 후 상하 관민이 전후 부흥에 온갖 힘을 다 하였던 까닭에 차차 평시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왜인에 대한 적개심】 전후에 조선인의 애국심과 민족적 의식은 결코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왜인에 대한 적개심이라든지 명나라에 대한 숭모심은 더욱 강렬하였다. 즉 명은 조선에 대하여 재조의 은혜가 있다 하여 우리 지식층의 존명 사상과 사대주의는 날로 커갈 뿐이었다. 이러한 사상과 주의는 훗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 이와 관계를 맺은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일본과의 국교 회복】일본은 풍신수길이 죽은 후에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그 뒤를 이어 국내를 정돈하면서 먼저 조선과 화의를 맺으려 하였다. 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여러 번 교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잘 듣지 아니하다가 선조 40년에 이르러 이를 허락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남녀의 귀환도 많이 있었지만 귀환되지 못하고 그냥 눌러 살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도기(陶器) 제조술의 전파】 귀환, 불귀환을 물론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일본에 전파된 문물과 기술이 있었으니, 도기 제조의 기술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전쟁 중에 왜인이 직접 약탈하여 가지고 간 것도 많았으니, 예를 들면 여러 가지의 도서와 실물과 기타 활자 등이었다. 【조선 활자의 모방】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조선 도서의 중간(重刊)과 조선 활자의 모방이 행하여져 일본 문화상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않았다.

덕천(德川, 도쿠가와) 막부와 수교한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조 40년부터 시작되어 이후 거의 사신의 왕래가 그치지 아니하였고 대마도와 통상 무역을 한 것도 광해군 초부터 시작되어 부산에 왜관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제3장 북방 문제와 호란[편집]

1. 광해조의 오랑캐에 대한 비책[편집]

宣祖의 다음에 卽位한 光海郡 때에는 안으로 小北 大北의 黨人들이 政權을 잡아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킬새 【光海君의 悖倫行爲】 그들의 强請과 凶計에 빠져 王은 아우와 兄을 죽이고 또 母后(異生母) 仁穆大妃를 廢하여 西宮에 가두는 悖倫行爲를 하여 이로 因하여 後日 결국 廢位를 당하게 되었지만 【光海의 治蹟】 王은 한편으로 書籍의 編纂과 刊行이라든지 亂後 史庫의 整備라든지 武士 萬人을 試取하여 軍事를 장려한 것이든지 더욱 밖으로 國境 防備와 外交에 있어 항상 用意周到한 조처(措處)를 행한 것은 다 王의 훌륭한 治績이라 하겠다.

【胡人의 勃興】 이보다 앞서 滿洲에는 建州胡人(野人)의 누르하치(努爾哈赤)란 자가 일어나 建州(根據는 今 興京老城)를 中心으로 하여 모든 部族을 차차 統一하고 明나라의 邊境을 침략하더니 光海君 八年에는 지금의 興吉老城에서 드디어 自立하여 後金國汗이라 일컬었다. 明에서는 이를 듣고 將兵을 보내어 칠새 朝鮮에 對하여도 援兵을 請하니 朝鮮으로서는 三角關係에 있어 立場이 매우 困難하나 어찌할 수 없이 姜弘立 등을 보내어 明을 돕게 하였다. 明軍이 敗하매 弘立 등은 敵陣에 通하여 朝鮮의 出征이 不得已 하였다는 것을 表하고 그 무리와 함께 後金에 항복하였다.

그 후 後金國軍이 遼東을 함락하매 明將 毛文龍은 椵島(鐵山)에 陣을 베풀고 遼東을 항복하려 하여 朝鮮과의 사이에 緊密한 連絡과 活躍을 取하려 하니 朝鮮의 事情은 더욱 困難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光海君은 朴燁(엽)이란 智略이 깊은 사람을 平安監司에 任命하여 그곳에 오래 있어 國境을 嚴히 防備하는 한편 後金의 內情을 정탐하게 하여 朝廷과의 連絡을 緊密히 하였으므로 光海君 당시에는 後金이 朝鮮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선조 다음에 즉위한 광해군 때에는 안으로 소북, 대북의 당인들이 정권을 잡아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다. 【광해군의 폐륜 행위】 그들의 강력한 요구와 흉계에 빠져 왕은 아우와 형을 죽이고 또 모후[異生母]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가두는 패륜 행위를 하여 이때문에 훗날 결국 폐위를 당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치적】 하지만 왕은 한편으로 서적의 편찬과 간행, 전란 후 사고의 정비, 무사 만인을 시취하여 군사를 장려한 것 등 더욱 밖으로 국경 방비와 외교에 항상 용의주도한 조처를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왕의 훌륭한 치적이라 하겠다.

【호인(胡人)의 발흥】 이보다 앞서 만주에는 건주 호인(야인)의 누르하치란 자가 일어나 건주(근거는 지금의 흥경노성)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부족을 차차 통일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침략하더니 광해군 8년에는 지금의 흥경노성에서 드디어 자립하여 후금국 한(汗)이라 일컬었다. 명에서는 이를 듣고 장병을 보내어 쳐들어갈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입장이 매우 곤란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강홍립 등을 보내어 명을 돕게 하였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 등은 적진에 통고하여 조선의 출정이 부득이하였다는 것을 표하고 그 무리와 함께 후금에 항복하였다.

그 후 후금국 군이 요동을 함락하자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가도(철산)에 진을 베풀고 요동을 정복하려 하여 조선과 긴밀한 연락과 활약을 취하려 하니 조선의 사정은 더욱 곤란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광해군은 박엽이란 지략이 깊은 사람을 평안감사에 임명하여 그곳에서 오랫동안 국경을 엄히 방비하는 한편 후금의 내정을 정탐하게 하여 조정과 연락을 긴밀히 하였으므로 광해군 당시에는 후금이 조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2. 인조의 반정과 호란[편집]

앞서 말한 光海君의 癈母事件은 지금껏 北人에 눌려 지내던 西人에게 좋은 理由꺼리가 되어 西人은 마침내 이를 理由로 光海君을 癈하고 대신 仁祖를 세우게 되었다. 이른바 仁祖反正이라는 것이니 이 反正에 따라 앞서 癈母를 强請하던 北人 李爾瞻·鄭仁弘 등 數十人은 極刑에 處하고 그 나머지도 귀양가고 쫓겨난 자가 약 數百人이었다. 그리하여 北人의 政權은 저절로 西人의 손으로 넘어 왔다.

그 후 西人間에 功을 다투는 난리(李适의 亂)와 黨爭이 있어 어수선한 사이에 後金의 太宗(누르하치의 아들)이 군사를 보내어 쳐 들어오매 朝廷에서는 亂을 江華島로 避하더니 할 수 없이 거기서 和義를 맺고 兄弟國의 約과 其他 몇 가지의 條件을 許하고 돌려보냈다.(仁祖 五年) 이것을 丁卯胡亂이라 한다. 仁祖 十四年에 後金 太宗은 大淸皇帝라 하였는데 이때 朝鮮이 淸과 和를 끊고 明과 通하므로 太宗은 親히 十萬의 大軍을 이끌고 쳐 들어오니 仁祖는 南漢山城으로 避難하였다. 【仁祖降服】 淸太宗은 京城에 들어와 일변 王族과 貴族이 避難해 있는 江華島를 함락하고 南漢山城의 包圍를 甚히 하므로 이때 城內에서는 朝臣간에 主戰派와 主和派가 한참 어수선히 다투다가 마침내 主和派 崔鳴吉의 말을 쫓아 城門을 열고 三田渡(松坡)에 이르러 항복하니 이것이 丙子胡亂이란 것으로 近世史上에 처음 나타나는 一大 耻辱的인 事實이었다.

丙子의 亂後 그 耻辱을 씻으려 하여 義州府尹 林慶業은 몰래 明과 通하여 淸을 치고저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어 明이 淸에게 亡하였으며 일찌기 淸에 人質로 갔던 孝宗이 仁祖의 뒤를 이어 北으로 淸을 치려 하여 여러 가지 準備를 하였다. 그러나 王도 역시 在位 十年에 돌아가매 이 計劃도 水泡로 돌아가고 말았다.

앞서 말한 광해군의 폐모 사건은 지금껏 북인에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좋은 이유거리가 되어 서인은 마침내 광해군을 하고 대신 인조를 세우게 되었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라는 것이니, 이 반정에 따라 앞서 폐모를 강청하던 북인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인은 극형에 처해지고 그 나머지도 귀양 가고 쫓겨난 자가 약 수백 인이었다. 그리하여 북인 정권은 저절로 서인의 손으로 넘어 왔다.

그 후 서인 사이에 공을 다투는 난리(이괄의 난)와 당쟁이 발생하였다. 이 어수선한 사이를 틈타 후금의 태종(누르하치의 아들)이 군사를 보내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피난하더니 할 수 없이 거기서 화의를 맺고 형제국의 약속과 기타 몇 가지의 조건을 허락하고 돌려보냈다. 인조 5년에 발생한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인조 14년에 후금 태종은 대청 황제라 하였는데, 이때 조선이 청과 화의를 끊고 명나라와 통하므로 태종은 친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인조의 항복】 청 태종은 경성에 들어와 한편으로는 왕족과 귀족이 피난해 있는 강화도를 함락하고 남한산성의 포위를 심히 하므로 이때 성안에서는 조정의 신하 간에 주전파와 주화파가 한참 어수선히 다투었다. 마침내 주화파 최명길의 말을 쫓아 성문을 열고 삼전도(송파)에 이르러 항복하니, 이것을 병자호란이라 한다. 이것은 근세 사상에 처음 나타나는 굉장히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병자의 난후 그 치욕을 씻으려 하여 의주부윤 임경업은 몰래 명나라와 통하여 청나라를 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하였으며 일찍이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북으로 청나라를 치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효종도 역시 재위 10년에 돌아가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4장 당파 싸움의 얽힘[편집]

1. 당쟁의 어지러운 이유[편집]

黨爭과 黨論이란 어느 나라 어느 時代에든지 있지만 近世 朝鮮처럼 長久히 代를 이어가며 싸우는 나라는 없었다. 이는 決코 朝鮮사람의 마음자리가 본래 나뻐서 그렇다는 것보담 그 때 그것이 같은 儒者 文人들 사이의 싸움이란 것과 또 言論의 自由가 너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黨派싸움이 武力에 依한 것이라면 一戰에 勝負가 날 것이어늘 다만 서로 붓과 혀 끝으로 가진 모략(謀略)과 음계 (陰計)로써 暗暗裡에 反對쪽을 몰아내려는 것이었으므로 업치락 뒤치락해서 속히 결말이 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리하는 동안에 모두 大局을 잊고 小局的인 榮辱에만 눈이 떠이어 倭亂 胡亂같은 大變亂을 치루면서도 필경 큰 覺醒과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뒤에도 歷代를 通하여 싸움이 얼키었으니 이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여 보겠다.

당쟁과 당론이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지 있지만 근세조선처럼 오랫동안 대를 이어가며 싸우는 나라는 없었다. 이는 결코 조선 사람의 마음자리가 본래 나빠서라기보다는 같은 유자, 문인 사이의 싸움이란 것과 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파 싸움이 무력에 의한 것이라면 일전에 승부가 날 것이지만 다만 서로 붓과 혀끝으로 잦은 모략과 비밀스런 계략으로써 암암리에 반대쪽을 몰아내려는 것이었으므로 엎치락뒤치락해서 속히 결말이 나지 못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모두 대국을 잊고 소국적인 영욕에만 눈이 멀어서 왜란, 호란 같은 대변란을 치루면서도 큰 각성과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뒤에도 역대를 통하여 싸움이 얽히게 되었으니 이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여 보겠다.


2. 서인과 남인의 다툼[편집]

仁祖以來 政權은 오래동안 西人의 손에 있었으므로 여기에 눌려 지내던 南人一派는 매양 울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마침 孝宗의 喪에 母后 趙大妃의 服이 朞年(一周年)에 해당하다는 西人 宋時烈 等의 主張이 있어 그것이 採納되매 南人 尹鑴(휴) 許穆(목) 등은 일어나 三年(二周年)服이 옳다하여 이것으로써 맹렬히 西人을 공격하였고 또 顯宗 末年 孝宗妃 仁宣后의 喪에 역시 趙大妃의 服制問題가 일어나 西人은 大功(九個月)說 南人은 朞年說을 主張하여 【南人執權】 결국 이러한 問題로써 南人은 西人을 몰아내고 대신 政權을 잡았다. (이후 南人 中에 西人 領袖 宋時烈을 죽이자는 派를 淸南, 이 極端的 行爲에 反對하는 南人을 濁南이라 함) 이때는 肅宗이 이미 卽位한 뒤니 肅宗은 南人들의 專政을 미워하여 六年에 南人을 쫓아내고 西人을 쓰기 시작하였다.

인조 이래 정권은 오랫동안 서인의 손에 있었으므로 여기에 눌려 지내던 남인 일파는 매양 울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효종의 상에 모후 조대비의 복이 기년(1주년)에 해당하다는 서인 송시열 등의 주장이 채납되자 남인 윤휴, 허목 등이 일어나 3년(2주년) 복이 옳다고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였다. 또 현종 말년 효종비 인선후의 상에 역시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일어나 서인은 대공설(9개월),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남인의 집권】 결국 이러한 문제로써 남인은 서인을 몰아내고 대신 정권을 잡았다. (이후 남인 중에 서인 영수 송시열을 죽이자는 파를 청남, 이 극단적 행위에 반대하는 남인을 탁남이라 함) 이때는 숙종이 이미 즉위한 뒤니 숙종은 남인들의 전단을 미워하여 6년에 남인을 쫓아내고 서인을 쓰기 시작하였다.


3. 노론과 소론의 나뉨[편집]

【老少分黨】 이로부터 西人들이 다시 勢力을 얻게 되었는데 西人의 領袖인 宋時烈과 그 門人 尹拯(증) 사이에 不和가 생기어 마침내 老少 兩派의 나뉨을 보게 되었으니 宋을 中心으로한 一派는 老論의 指目을, 尹을 두호하는 一派는 少論의 指目을 받았다. 肅宗 十五年에 南人이 再用되다가 二十年에 다시 西人 中의 少論派가 政權을 잡은 후로는 老論 少論의 업치락 뒤치락하는 싸움이 계속되었고 南人은 곧 勢力을 잡지 못하고 말았으며 少論의 勢力이 英祖 때에 몇번 꺾인 후로는 기리 老論의 獨舞臺가 되었다.

【蕩平策】 특히 英祖는 몸소 黨爭의 참담함을 여러 번 보고 깊이 느낀바가 있어 우선 날선비로 政事의 是非를 論하는 上疏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또 老論 少論을 並用하여 될수록 黨派의 調和에 힘을 썼으니 이른바 英祖의 蕩平(不偏不黨)策이라는 것이다. 英祖의 손자 正祖 또한 이 뜻을 이어 蕩平에 힘썼으나 黨爭의 뿌리는 뽑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큰 참담한 폐는 없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붕당】 이로부터 서인들이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는데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그 문인 윤증 사이에 불화가 생겨 마침내 노·소 양파의 나뉨을 보게 되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일파는 노론의 지목을, 윤증을 두호하는 일파는 소론의 지목을 받았다. 숙종 15년에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가 20년에 다시 서인 중의 소론파가 정권을 잡은 후로는 노론, 소론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싸움이 계속되었고 남인은 곧 세력을 잡지 못하고 말았다. 소론의 세력이 영조 때에 몇 번 꺾인 후로는 오랫동안 노론의 독무대가 되었다.

【탕평책】 특히 영조는 몸소 당쟁의 참담함을 여러 번 보고 깊이 느낀 바가 있어 우선 날선비로 정사의 시비를 논하는 상소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또 노론, 소론을 병용하여 될수록 당파의 조화에 힘을 썼으니 이른바 영조의 탕평책이라는 것이다. 영조의 손자 정조 또한 이 뜻을 이어 탕평에 힘썼으나 당쟁의 뿌리는 뽑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큰 참담한 폐해는 없게 되었다.


제5장 새 시설과 새 문화의 싹틈[편집]

1. 새 시설[편집]

支配階級의 黨爭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國家社會의 當面한 모든 現實問題에 對하여는 미상불 한편으로 爲政者의 苦心한 바도 적지 아니하였다. 倭亂以後 軍制의 再編成이라든지 國家經濟의 改善이라든지 民衆生活의 福利에 關하여 여러 가지 考案이 提出되어 종종의 새 施設을 보게 되었다.

軍制로 말하면 國初 以來의 五衛(京軍)의 制가 없어지고 壬亂中에 訓鍊都監이 新設된 후 뒤를 이어 네 軍營이 차례로 생기었으니 【五軍營】 하나는 摠戎廳 하나는 守禦廳 하나는 御營廳 또 하나는 禁衛營이었다. 訓鍊都監까지 合하여 五軍營 혹은 五營軍이라 하거니와 訓鍊都監은 이미 말한바와 같이 (壬亂 中에) 京內의 장정을 뽑아 三手(砲手·射手·殺手)의 武藝를 訓鍊시키던 곳이며 總戎廳은 仁祖 二年에 둔 것으로 南陽·水原·長湍의 三鎭의 軍務를 통솔하던 곳이요 守禦廳은 역시 仁祖 二年에 南漢山城을 쌓고 그곳을 中心으로 附近의 諸鎭을 지키기 爲하여 同王 四年에 同 山城內에 둔 것이며 御營廳은 孝宗 三年에 둔 것으로 銃砲兵과 騎兵을 主로 한 兵營이며 다음 禁衛營은 특히 京城을 守護하는 兵營으로 肅宗 八年에 둔 것이다. 各營에는 大將·中軍·別將 以下의 將兵들이 隷屬되어 있는바 禁衛營·御營廳에 소속된 군인은 역시 半農半兵의 鄕軍으로 번차례로 上京 入番하던 것이다.

【大同法의 施行】 그 다음 民弊를 덜고 國家의 財政을 再編成하기 爲하여 大司法이란 것을 實施하자는 것이 이때 識者間의 重要한 論題이었다. 大司法은 즉 田稅(租稅) 外에 地方의 土産을 바쳐오던 貢物이 中間에 여러 가지 弊害가 있었으므로 (그 弊害를 덜기 爲하여) 이것도 田稅와 같이 米穀으로 바치게 하여 한결같이 (統一) 하자는 것이었다. 이 理論과 實行方法을 처음으로 말한 이는 宣祖 때의 李珥(栗谷)였는데 그 후 李元翼(梧里)·趙翼(浦渚)들이 大同宣惠의 이름으로 이 法의 具體案을 提議하여 仁祖 때에 一部 地方에 실시하다가 未久에 廢止의 運을 당하고 孝宗 때에 金堉(육)의 力請으로 再次 地方에 따라 차차 施行하였던 것이다.

【通貨의 實施】 이때 現實問題의 하나로 또 識者 사이에 論議되던 것은 通貨問題이었다. 貨幣는 國初에 『朝鮮通寶』를 비롯하여 榰貨 箭幣들을 만든 일이 있었으나 널리 또 오래 行치 못하였고 그 대신에 主로 곡식과 포목(木布)으로써 賣買에 使用하여 왔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不便과 弊害가 있었고 또 이 때문에 나라가 富치 못하였던 것도 事實이다.

그리하여 銅鐵로 돈을 만들어 쓰자는 議論이 宣祖 때의 首相 李德馨(漢陰) 等에 依하여 提唱되매 代代 그런 議論이 거듭하여 仁祖 十一年에는 드디어 『常平通寶』란 돈을 만들더니, 얼마 아니하여 廢止되고 그후 金堉이 또한 用錢의 利를 절실히 주장하여 孝宗 二年에 역시 常年通寶를 鑄造하여 西北 諸道와 서울 市內에 使用하더니 그 후 六 七年에 또 停罷의 運을 당하고 肅宗 四年에 이르러 再次 鑄錢論이 일어나 마침내 實現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鑄錢의 原料는 銅과 錫을 썼는데 朝鮮서는 이미 말한바와 같이 일즉부터 鑛山 採掘을 禁하여오던 터이므로 그 原料를 他國에 依賴치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즉 銅은 日本서, 錫은 淸國(北京)서 貿易해들임이 常例이었다.

【金堉】 金堉(潛谷)은 識見이 높은 政治家요 學者였으니 그는 비단(非但) 大同法의 實施라든지 用錢의 必要를 論하였을뿐 아니라 그밖에 中國의 水車의 制와 用車의 利를 말한 일도 있고 또 일즉이 西洋曆의 合理性을 論하여 그의 奏請으로 孝宗 四年에 在來의 歷을 폐지하고 時憲曆이란 新曆을 採用한 일도 있었다. 要컨대 金堉은 당시 儒者群에서 뛰어난 進步的 學者로서 남의 長處를 取하여 종종의 改善을 하려던 文明의 先導者요 先覺者이었다.

지배계급의 당쟁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국가사회의 당면한 모든 현실문제에 대하여는 미상불 한편으로 위정자의 고심도 적지 않았다. 왜란 이후 군제의 재편성이라든지 국가경제의 개선이라든지 민중생활의 복리에 관하여 여러 가지 고안이 제출되어 종종 새 시설을 보게 되었다.

군제는 국초 이래의 5위(경군)의 제도가 없어지고 임란 중에 훈련도감이 신설된 후 뒤를 이어 네 군영이 차례로 생겼다. 【5군영】 5군영은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인데, 훈련도감까지 합하여 5군영 혹은 5영군이라 하였다. 훈련도감은 경내의 장정을 뽑아 삼수[포수·사수·살수]의 무예를 훈련시키던 곳이며, 총융청은 인조 2년에 둔 것으로 남양·수원·장단의 3진의 군무를 통솔하던 곳이요, 수어청은 역시 인조 2년에 남한산성을 쌓고 그곳을 중심으로 부근의 여러 진(鎭)을 지키기 위하여 인조 4년에 남한산성 안에 둔 것이며, 어영청은 효종 3년에 둔 것으로 총포병과 기병을 주로 한 병영이며, 금위영은 특히 경성을 수호하는 병영으로 숙종 8년에 둔 것이다. 각 영에는 대장·중군·별장 이하의 장병들이 예속되어 있다. 금위영·어영청에 소속된 군인은 반농 반병의 향군으로 번차례로 상경하여 입번하였다.

【대동법의 시행】 그 다음 민폐를 덜고 국가의 재정을 재편성하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것이 식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제가 되었다. 대동법은 즉 전세(조세) 외에 지방의 토산을 바쳐오던 공물이 중간에 여러 가지 폐해가 있었으므로 그 폐해를 덜기 위하여 토산물을 전세와 같이 미곡으로 바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이론과 실행 방법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선조 때의 율곡 이이였는데 그 후 오리 이원익·포저 조익 등이 대동 선혜의 이름으로 이 법의 구체안을 제의하여 인조 때에 일부 지방에서 실시하다가 오래지 않아 폐지되고 효종 때에 김육의 요청으로 재차 지방에 따라 차차 시행하였다.

【통화의 실시】 이때 현실 문제의 하나로 또 식자 사이에 논의되던 것은 통화 문제였다. 화폐는 국초에 『조선통보』를 비롯하여 저화, 전폐를 만든 일이 있었으나 널리 또 오래 행하지 못하였고 그 대신에 주로 곡식과 포목을 매매하여 사용하여 왔다. 이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과 폐해가 있었고 나라가 부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동철로 돈을 만들어 쓰자는 의론이 선조 때의 수상 한음 이덕형 등에 의하여 제창되자 대대로 그 의론이 거듭하더니 인조 11년에 드디어 『상평통보』란 돈을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고 그 후 김육이 화폐 유통의 이익을 절실히 주장하여 효종 2년에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서북 여러 도와 서울 시내에서 사용하였다. 그 후 6, 7년 뒤에 또 폐지되었는데 숙종 4년에 이르러 재차 주전론이 일어나 마침내 실현되었다. 주전의 원료는 구리와 주석을 썼는데 조선에서는 이미 일찍부터 광산 채굴을 금하여 왔으므로 그 원료를 타국에 의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구리는 일본에서, 주석은 청나라(북경)에서 무역해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육】 잠곡 김육은 식견이 높은 정치가요 학자였으니, 그는 비단 대동법의 실시, 화폐 유통의 필요를 논했을 뿐 아니라 그밖에 중국의 수차의 제도와 수레 사용의 이익을 말한 일도 있다. 또 일찍이 서양력의 합리성을 논하여 그의 주청으로 효종 4년에 재래의 역법을 폐지하고 시헌력이란 새로운 역법을 채용한 일도 있었다. 요컨대 김육은 당시 유자들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진보적 학자였다. 그는 남의 장점을 취하여 여러 가지 개선을 하려던 문명의 선도자요 선각자였다.


2. 의식의 확대[편집]

宣(祖)·光(海) 以前의 朝鮮人의 意識과 世界觀은 매우 좁았다. 世界의 文明이 中國과 印度에서 일어나고 또 그 發達이 이 두 나라와 朝鮮 등 몇 나라에서만 된 것으로 여기었으며 그리하여 이들 몇 나라를 除하고는 그밖에 다른 文明國이 있음을 아지 못하였다. 【朝鮮人의 西洋에 關한 知識】 그리하여 西洋에 關한 知識은 역시 宣·光 以前에는 매우 빈약하였으니 中宗 때에 비록 中國을 通하여 西洋布(즉 西洋木)가 輸入되어 西洋이란 말은 듣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에 位置하고 어떠한 나라들이 었는지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宣祖 晩年 頃에 明京(北京)에 갔든 使臣이 돌아올 때에 歐羅巴地圖를 가지고 와서 그로 因하여 一部 識者層에서는 西洋에 關한 地理知識을 多少 알게 되었고 또 宣·光間에는 耶蘇會 宣敎師 利瑪竇(Matteo Ricci)의 지은 天主實義란 天主敎에 關한 책도 中國으로부터 傳來되어 이때의 碩學인 李晬光(芝峯)은 그것을 보고 內容을 약간 紹介한 일까지 있었다.

【和蘭人 朴淵 등의 漂着】 仁祖 때에 와서는 西洋에 關한 知識이 점점 늘어 갔으니 그것은 仁祖 六年에 南으로 和蘭人 朴淵(J. Adam Weltevree) 等 三名이 漂着 入京하여 訓鍊大將 具仁垕 麾下에 있었는데 其中 淵은 大砲를 잘 만들고 朝鮮 女子를 얻어 子女를 났기까지 하였으며 【西洋文物의 渡來】 또 仁祖 九年에 明京에 사신으로 갔던 鄭斗源이 돌아올 때에 北京서 西洋人에게 火砲·千里鏡·竹鳴鍾 따위의 機械와 西洋風俗記·地圖·天文書 其他 天主敎에 關한 書籍을 얻어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

仁祖 二十三年 昭顯世子(仁祖 長男)가 淸에 人質로 있을 때에 역시 西洋人 湯若望(J. Adam Schall)과 사귀어 여러 가지 科學書와 天主敎書를 가지고 왔었는데 世子는 歸後 三月에 不行히도 갑작이 下世하였다. 어떠턴 仁祖 때로부터 西洋人과의 接觸이라든지 그 文物의 渡來로 因하여 西洋科學 及 思想에 關한 知識과 好奇心이 차차 커가게 된 것은 事實이었다. 더욱 西洋曆에 對한 注意와 硏究는 자못 時急한 것으로 여기어 앞서 말한 金堉은 觀象監提調(天文臺長)로 있어 王에게 請하여 硏究生을 北京에 보내어 新曆을 講究케 하고 孝宗 四年에 이것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和蘭人 하멜 等의 漂着】 그런데 同年에는 偶然한 일이지만 和蘭人 하멜(Hendrick Hamel) 等 三十餘人이 濟州島에 漂着되어 이듬해 서울로 送致되고 朝廷에서는 그들을 일시 訓鍊都監에 隷屬케하여 앞서 漂着된 同國人 朴淵으로 하여금 감독케 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역시 星曆을 解하는 자와 島銃 大砲에 능한 자도 있었다 한다. 그 후 十三年만에 하멜 等 八人은 日本 長崎로 도망하여 마침내 自國으로 돌아가 漂流記를 著述하여 그들의 十餘年間 抑留生活과 朝鮮의 風俗을 적었으니 이것이 朝鮮의 事情을 歐洲人에게 紹介한 最初의 記錄이라 하겠다.

孝宗 때는 南漢의 恥를 雪하려하여 李浣을 訓鍊大將에 任하고 부지런히 北伐을 計畫하였거니와 이때 하멜 等 和蘭人이 이 北伐計畫에 있는 訓鍊都監에 일시 兵卒로 隷屬되어 李浣의 指揮와 訓鍊을 받았던 것은 한 興味있는 事實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하멜入京의 歲는 여러 가지 興味를 끄는 事實이 있지만 【羅禪征伐】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 해에 淸國의 要請으로 朝鮮서 羅禪征伐의 軍을 내인 事實이다. 羅禪은 즉 Russian(露西亞人)의 音譯으로 이때 露人은 차차 外興安嶺을 넘어 黑龍江流域에 침입하여 雅克薩城을 함락하고 알바진城을 쌓는 등 不絶히 東侵南下의 勢를 보이므로 淸國은 土人의 請에 依하여 비로소 露人과 衝突하게되어 朝鮮에까지 援軍을 要請하였던 것이다. 朝廷은 이 要請에 依하여 孝宗 五年에 邊岌以下 百 五十名의 勇士를 보내어 黑龍江方面에 나아가 淸兵을 도아 露人을 쳐 부시었고 또 同王 九年에도 역시 淸의 要求에 應하여 申瀏 等 將兵을 보내어 淸軍으로 더부러 黑龍江方面의 露人을 征伐한 일이 있었으니 朝鮮人과 露人과의 接觸은 이 孝宗 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露人의 勢力은 駸駸然하여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이 있었다.

【西勢東漸의 向路】 西勢東漸의 向路를 둘로 나누어 본다면 一은 北으로 陸路를 通하여 東侵하는 자, 一은 南으로 南路를 通하여 東來하는 자니 露人의 東侵은 前者에 속하고 葡萄牙人 西班牙人 和蘭人 等의 東來는 後者에 속한다.

西人의 海上東進은 西紀 十六世紀 前半에 시작되어 葡萄牙人이 最先鞭을 着하고, 그 다음이 西班牙人, 또 그 다음이 和蘭人이었으나 길이 東洋貿易 覇權을 잡은 자는 오직 和蘭뿐이었다. 和蘭은 西紀 一六○二年 (宣祖 卅五年)에 東印度會社를 創立하고 未久에 짜바島의 빠다비아를 取하여 거기를 根據地로 삼아 周闈의 群島를 占領하는 同時에 中國·日本과의 交通을 트고 特히 日本 幕府로부터는 平戶 長崎 博多 等 地에 居留貿易을 許하였으며 西紀 一六二三年(仁祖 元年)에는 北臺灣의 싼살바돌城 산도밍고城을 取하여 이후 三十 八年間 先據者인 西班牙人을 驅逐하고 全島의 支配權을 確立함에 이르렀다.

朴淵과 하멜 等은 다 前後 本國에서 짜바와 臺灣을 거쳐 長崎로 向하다가 朝鮮에 漂流된 것이나 西勢東漸이란 큰 물결에 뜬 한 잎사귀에 지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선조·광해군 이전의 조선인의 의식과 세계관은 매우 좁았다. 세계의 문명이 중국과 인도에서 일어나고 또 그 발달이 이 두 나라와 조선 등 몇 나라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이들 몇 나라를 빼고는 그밖에 다른 문명국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조선인의 서양에 관한 지식】 따라서 선조·광해군 이전에는 서양에 관한 지식이 매우 빈약하였다. 중종 때에 이르러 비록 중국을 통하여 서양포(서양목)가 유입되어 서양이란 말은 듣게 되었지만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고 어떠한 나라들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선조 만년 무렵에 명나라 수도(북경)에 갔던 사신이 돌아올 때에 구라파 지도를 가지고 왔으므로 일부 식자층에서는 서양에 관한 지리 지식을 다소 알게 되었다. 또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야소회 선교사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란 천주교에 관한 책도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이때의 석학인 지봉 이수광은 천주교의 내용을 약간 소개한 일까지 있었다.

【화란 사람 박연 등의 표착】 인조 때에는 서양에 관한 지식이 점점 늘어 갔다. 인조 6년에 화란 사람 박연(J. Adam Weltevree) 등 3명이 표착하여 경성에 들어온 일이 그 동기이다. 훈련 대장 구인후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 중 박연은 대포를 잘 만들었으며 조선 여자를 얻어 자녀를 낳기까지 하였다. 【서양 문물의 도래】 또 인조 9년에 명나라 수도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돌아올 때에 북경에서 서양인에게 화포·천리경·자명종 따위의 기계와 서양풍속기·지도·천문서 및 기타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얻어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

인조 23년 소현 세자(인조의 장남)가 청에 인질로 있을 때에 서양인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과 사귀어 여러 가지 과학책과 천주교 책을 가지고 왔는데 세자는 귀국 후 3월에 불행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쨌든 인조 때부터 서양인과 접촉이라든지 그 문물의 도래로 인하여 서양과학 및 사상에 관한 지식과 호기심이 차차 커지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서양력에 대한 주의와 연구는 자못 시급한 것으로 여겨져 앞서 말한 김육은 관상감 제조(천문대의 수장)로서 왕에게 청하여 연구생을 북경에 보내어 새 역법을 강구하게 하여 효종 4년에 이것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화란 사람 하멜 등의 표착】 그런데 같은 해 우연한 일이지만 화란 사람 하멜(Hendrick Hamel) 등 30여 인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이듬해 서울로 송치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일시 훈련도감에 예속하게 하여 앞서 표착한 같은 나라 사람인 박연에게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성력(星曆)을 이해하는 자와 조총, 대포에 능한 자도 있었다. 그 후 13년 만에 하멜 등 8인은 일본 장기(長崎,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마침내 자국으로 돌아가 표류기를 저술하여 그들의 10여 년간 억류 생활과 조선의 풍속을 적었다. 이것이 조선의 사정을 유럽인들에게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다.

효종 때는 남한산성의 수치를 설욕하기 위해 이완을 훈련 대장에 임명하고 부지런히 북벌을 계획하였다. 이때 하멜 등 화란 사람이 이 북벌 계획에 있는 훈련도감의 병졸로 일시 예속되어 이완의 지휘와 훈련을 받았던 것은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하멜이 입경한 해는 여러 가지 흥미를 끄는 사실이 있지만, 【나선 정벌】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 해에 청국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나선정벌의 군대를 파견한 사실이다. 나선은 즉 러시아인(노서아인)의 음역으로 이때 러시아인(노인)은 차차 외흥안령을 넘어 흑룡강 유역에 침입하여 아극살성을 함락하고 알바진성을 쌓는 등 계속하여 동침 남하의 형세를 보이고 있었다. 청나라는 지역민들의 청에 의하여 비로소 러시아인과 충돌하게 되어 조선에까지 원군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조정은 이 요청에 의하여 효종 5년에 변급 이하 150명의 용사를 보내어 흑룡강 방면에 나아가 청병을 도와 러시아인을 쳐부수었고 또 효종 9년에도 역시 청의 요청에 응하여 신류 등 장병을 보내어 청군과 더불어 흑룡강 방면의 러시아인을 정벌한 일이 있었으니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접촉한 일은 이 효종 때가 처음이다. 그런데 러시아인의 세력은 매우 빠르게 확장되어 업신여길 수 없었다.

【서세동점의 향로】 서세동점의 향로를 둘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북으로 육로를 통하여 동침(東侵)하는 자, 다른 하나는 남으로 해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오는 자가 있었다. 러시아인의 동침은 전자에 속하고 포도아인(포르투갈인), 서반아인(에스파냐인), 화란인(네덜란드인) 등의 동래는 후자에 속한다.

서양인의 해상 동진은 서기 16세기 전반에 시작되어 포도아인이 최선편을 잡고, 그 다음이 서반아인, 또 그 다음이 화란인이었는데, 오랫동안 동양무역 패권을 잡은 자는 오직 화란뿐이었다. 화란은 서기 1602년(선조 35년)에 동인도회사를 창립하고 오래지 않아 자바섬의 빠다비아를 취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주위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는 동시에 중국·일본과 교통을 텄다. 특히 일본 막부는 평호(平戶, 히라도), 장기(長崎, 나가사키), 박다(博多, 하카타) 등지에 거류 무역을 허하였으며 서기 1623년(인조 원년)에는 북대만의 싼살바돌성, 산도밍고성을 취하여 이후 38년간 미리 근거지로 삼은 서반아인을 몰아내고 섬 전체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박연과 하멜 등은 다 전후 본국에서 자바와 대만을 거쳐 장기(나가사키)로 향하다가 조선에 표류된 것이나 서세동점이란 큰 물결에 뜬 한 잎사귀에 지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3. 학풍의 변천[편집]

在來의 朝鮮 學者의 學問이란 것은 中國의 經學·文學 ─ 特히 朱子學에만 치우쳐 오래동안 그 弊를 벗지 못하더니 倭亂 胡亂을 격고 또 外來 文物의 刺戟을 받은 후로는 비로소 自我에 눈뜨기 시작하여 【自我의 反省과 批判】 우리의 過去가 너무도 虛無하고 缺陷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空理空談의 죽은 學問보다 實際에 利로는 산 學問 ─ 즉 利用厚生의 學을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과 우리의 固有한 文學과 歷史도 硏究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차차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에 學風의 一變을 보게 되었다.

【李晬光】 위에 말한 李晬光(芝峯)은 일즉이 中國에 奉使한 일도 있고 또 그 學問의 視野가 넓고 매양 實地에 立脚하여 觀察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던 만큼 在來의 孤陋偏狹한 類의 學者와는 확실히 異彩가 있던 이니 學風變遷의 最先進이라 할 만하였다. 【韓百謙】 이와 때를 같이한 韓百謙(久庵)은 그 視野가 李晬光처럼 넓지는 못하나 東國의 歷史 地志에 就하여 多少 考證學的 方法을 取하여 이 方面硏究의 最先鞭을 着한 이었다.

【金堉】 위에 말한 金堉도 實學派의 一人으로 종종의 有益한 提議와 實施를 行하였고, 【柳馨遠】 그보다 後輩인 柳馨遠(磻溪)이란 學者는 孝宗·顯宗 때 사람으로 한平生 草野에 파무쳐 實用의 學을 主로 硏究하여 많은 著書를 남기고 여러 가지 時弊와 改良策을 말하였다. 【朴世堂】 이와 同時인 朴世堂(西溪)은 大將히 朱子의 說을 批判하고 自家의 見解를 세워 이 때문에 斯文亂賊이란 소리까지 들은 이지만 그는 역시 實學을 主로 하여 農書의 一種인 穡經을 著述하여 後世에 남겨주었다.

【李瀷과 그 學派】 柳馨遠의 學을 祖述하여 經濟實用의 學을 主로 하면서 博學多彩한 學風을 일으킨 이는 李瀷(星湖)이니 이도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고 林下에 있어 學問에만 專力하여 經史 諸子의 書로부터 天文 地理 律算 醫藥에 이르기까지 硏究하고 特히 西洋 學述의 精密함을 매양 탄복하였다.

李瀷이 이러한 學風을 일으키매 그 一門과 弟子들도 역시 그의 學을 繼承하여 一層의 發展을 일우었으니 그 一門 中에서는 李用休(惠寰) 李家煥(貞軒)의 父子와 李福休 李重煥 같은 이가 나오고 그의 弟子 中에서는 尹東奎(邵南) 安鼎福(順庵) 愼後聃(河濱) 같은 碩學이 나왔다. 이들은 다 畿下의 南人學者로 그 姻戚間에도 그러한 學風이 퍼져 우수한 學者들이 많이 쏘다져 나왔다. 安鼎福은 特히 史學에 硏究가 기퍼 東史綱目 列朝通紀 등의 史書를 남기었다.

재래의 조선학자의 학문은 중국의 경학·문학 특히 주자학에만 치우쳐 오랫동안 그 폐단을 벗지 못하더니 왜란, 호란을 겪고 또 외래문물의 자극을 받은 후로는 비로소 자아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자아의 반성과 비판】 우리의 과거가 너무도 허무하고 결함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리공담의 죽은 학문보다 실제에 이로운 산 학문 즉 이용후생의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의 고유한 문학과 역사도 연구하여야겠다는 생각이 차차 일어나게 되었으니 학풍의 일변을 보게 되었다.

【이수광(李睟光)】 앞에서 말한 이수광은 일찍이 중국에 봉사한 일도 있고 또 그 학문의 시야가 넓고 매양 실지에 입각하여 관찰하기를 마지아니하였던 만큼 재래의 고루편협한 학자와는 확실히 이채가 있었던 사람으로 학풍 변천의 최선진이라 할 만하였다. 【한백겸(韓百謙)】 이와 때를 같이 한 구암 한백겸은 그 시야가 이수광처럼 넓지는 못하나 동국의 역사 지리에 대하여 다소 고증학적 방법을 취하여 이 방면 연구의 최선편을 잡았다.

【김육(金堉)】 김육도 또한 실학파의 1인으로 종종 유익한 건의와 실시를 행하였고, 【유형원(柳馨遠)】 그보다 후배인 반계 유형원은 효종·현종 때 사람으로 한평생 초야에 파묻혀 실용 학문을 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기고 여러 가지 시폐와 개량책을 말하였다. 【박세당(朴世堂)】 이와 동시에 서계 박세당은 대단히 주자의 설을 비판하고 자기의 견해를 세워 이때문에 사문난적이란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실학을 주로 하여 농서의 일종인 「색경」을 저술하여 후세에 남겨주었다.

【이익(李瀷)과 그 학파】 유형원의 학문을 조술하여 경제실용의 학문을 주로 하면서 박학하고 다채로운 학풍을 일으킨 이는 성호 이익이다. 그는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고 임하에서 학문에만 전력하여 경사 제자의 책부터 천문, 지리, 율산, 의약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였고 특히 서양 학술의 정밀함을 매양 탄복하였다.

이익이 이러한 학풍을 일으키자 그 일문과 제자들도 역시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한층 발전을 이루었다. 그 일문 중에서는 혜환 이용휴, 정헌 이가환의 부자와 이복휴, 이중환 같은 이가 나오고 그의 제자 중에서는 소남 윤동규, 순암 안정복, 하빈 신후담 같은 석학들이 나왔다. 이들은 다 경기 이남의 남인 학자로 그 인척 간에도 그러한 학풍이 퍼져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안정복은 특히 역사학에 연구가 깊어 동사강목·열조통기 등의 사서를 남겼다.


근세의 후기(국기 4058-4243년, 영조 원년-순종 말)[편집]

後期는 第二十二代 英祖 元年(國紀 4058 西紀 1725)으로부터 第二十七代 純宗 末年(國紀 4243 西紀 1910)까지의 約 一百 八十 六年間을 劃한 것으로 이를 또 둘로 나누어보면 英祖로부터 第二十五代 哲宗 末(國紀 4196 西紀 1863)까지의 約 一百 三十 九年間을 前一期, 第二十六代 高宗 元年(國紀 4197 西紀 1864)으로부터 純宗 末까지의 約 四十 七年間을 後一期로 볼 수 있다.

【前一期】 前一期 中의 英祖 正祖 兩代 동안은 近世後期에 있어 가장 特色이 있는 時代로 일종의 文藝復興的 氣運이 濃厚하던 때니 舊文化의 精華를 再現함은 勿論이요 西來 新交化의 浸入으로 學界와 思想界가 多彩多異한 觀을 띄우게 되었다.

그러나 黨爭에 있어서는 소위 蕩平策을 썼음에 不拘하고 뿌리는 그대로 든든하여 큰 變化가 없이 내려오던 중 國戚이 차차 머리를 들고 政權 獲得에 熱中하매 거기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純祖 初로부터는 뚜렷한 外戚의 「勢道政治」가 열리어 王이 갈릴 때마다 「勢道」는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政治는 밖으로 물결쳐 들어오는 西敎 西學에 對하여 여러 차례 大彈壓을 加하여 世界 大勢에서 逆行의 길을 밟았고 안으로는 賄賂(희뢰)와 誅求가 公公然하게 行하여 中央의 政治와 地方의 行政이 한가지로 흐려지매 稅制는 紊亂하여지고 民衆은 生活에 脅威를 받아 動搖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民衆은 마침내 武力에 依한 反亂 혹은 暴動과 또는 思想에 依한 革新運動을 일으키었다.

【後一期】 後一期에 있어서는 高宗의 卽位와 同時에 大院君의 攝政이 시작되어 一時 果斷있는 革攻의 政治를 하였으나 역시 그는 外勢에 눈이 어두어 무서운 鎖國策을 固執하다가 閔氏와의 葛藤으로 마침내 下野하고 그 대신 閔氏의 勢道가 시작되매 나라를 開放하여 日本을 비롯하여 諸外國과의 修交와 通商을 텄었다.

이로부터 國內 一部社會에 開化運動이 일어났거니와 新文化 新制度 新組織을 急務로 하는 新進改革派와 이와 反對되는 守舊派와의 사이에 또 鬪爭과 反目이 생기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기 政敵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外國의 勢力을 利用하다가 도리어 外國勢力의 侵入을 誘致하여 半島로 하여금 諸外國勢力의 爭衝地로 化하게 하였다. 淸日이 여기서 衝突되고 露日이 이 때문에 戰爭을 일으켜 결국 日本의 勝利로 朝鮮은 그 칼 도마우에 올라앉아 마침내 그의 料理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동안 民衆들은 民族的 意識에 불타올라 內部的으로 覺醒運動과 外部壓力에 對한 反抗運動이 일어났었다. 나라가 亡한 뒤에도 이러한 運動은 늘 계속되었던 것이다.

후기는 제21대 영조 원년(국기 4058년, 서기 1725년)으로부터 제27대 순종 말년(국기 4243년, 서기 1910년)까지의 약 186년간을 이른다. 이 시기를 다시 둘로 나누어보면, 영조부터 제25대 철종 말(국기 4196년, 서기 1863년)까지의 약 139년간을 전1기, 제26대 고종 원년(국기 4197년, 서기 1864년)으로부터 순종 말까지의 약 47년간을 후1기로 볼 수 있다.

【전1기】 전1기 중의 영조, 정조 양대 동안은 근세 후기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시대로 일종의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던 때이니 옛 문화의 정화를 재현함은 물론이요, 서양에서 온 신문화의 침입으로 학계와 사상계가 다채롭고 다양한 관점을 띄우게 되었다.

그러나 당쟁에서는 이른바 탕평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뿌리는 그대로 든든하여 큰 변화가 없이 내려오던 중 외척이 차차 머리를 들고 정권 획득에 열중하여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순조 초부터는 뚜렷한 외척의 「세도정치」가 열려 왕이 갈릴 때마다 「세도」는 바뀌게 되었다.

그들의 정치는 밖으로 물결쳐 들어오는 서교, 서학에 대하여 여러 차례 대탄압을 가하여 세계의 대세에 역행하는 길을 밟았고 안으로는 뇌물 수수와 가렴주구를 공공연하게 행하여 중앙의 정치와 지방의 행정이 한가지로 흐려져 세제는 문란하여지고 민중은 생활에 위협을 받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민중은 마침내 무력에 의한 반란 혹은 폭동과 또는 사상에 의한 혁신 운동을 일으켰다.

【후1기】 후1기는 고종의 즉위와 동시에 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되어 한때 과단 있는 개혁의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세에 눈이 어두워 무서운 쇄국책을 고집하다가 민씨와 갈등하여 마침내 하야하였다. 그 대신 민씨의 세도가 시작되어 나라를 개방하여 일본을 비롯한 여러 외국과 수교를 맺고 통상을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국내 일부 사회에 개화 운동이 일어나 신문화, 신제도, 신조직을 급선무로 하는 신진개혁파와 이와 반대되는 수구파의 사이에 또 투쟁과 반목이 생겼다. 그들은 각기 정적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외국의 세력을 이용하다가 도리어 외국세력의 침입을 유치하여 반도를 여러 외국 세력의 절충지로 변화하게 하였다. 청나라와 일본이 여기에서 충돌하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결국 일본의 승리로 조선은 그 칼도마 위에 올라앉아 마침내 그의 요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동안 민중들은 민족적 의식에 불타올라 내부적으로 각성 운동과 외부 압력에 대한 반항 운동이 일어났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이러한 운동은 늘 계속되었다.


제1장 영조·정조 시대의 문운(文運)[편집]

1. 영조의 치적[편집]

【英·正 時代의 槪觀】 英·正 兩代 동안은 정히 淸朝 文化의 絶頂期인 乾隆의 治世에 當하여 外部的으로 그 刺戟과 影響을 받고 內部的으로 中期 後半서부터 復興 發展하여오는 文化의 新潮流를 이어 文人 學者의 輩出과 함께 文化의 一層 찬란한 꽃을 피게 하여 近世 前期의 世宗·世祖·成宗의 治世를 방불케 한 感이 있었다.

【英祖의 治蹟】 英祖는 性이 매우 嚴格하고 過斷에 富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莊獻世子에 對하여도 보통 人情을 超越한 非常한 處置를 敢行하였지만 그 國家를 사랑하고 文化를 向上시키고 大體와 民意를 重히 여김에 있어 학실이 賢明한 임금이었다. 그는 이미 말한바와 같이 黨論의 弊를 痛切히 느끼어 소위 蕩平策을 쓰고 特히 民政에 注意하여 農桑을 장려하고 사치(奢侈)를 禁하고 均役의 法을 마련하고 또 文臣에게 命하여 續大典(元典인 經國大典에 對한)을 비롯하여 종종의 書籍(續兵將圖說·續五禮議·國朝樂章·文獻備考 等)을 編纂케 하였다.

【均役法】 英祖의 以上 治蹟 中에 特히 注意할 것은 均役法의 마련이니 이때 非士族인 平民層의 丁年者에게 兵役 勞役(負役)의 代로 받아들이는 軍布(丁布)란 稅가 있어 每一人에게 綿布 二匹씩을 徵收하였는데 이 稅가 過重하다는 論議가 일어나 마침내 英祖 二十六年(國紀 4083 西紀 1750)에 均役廳을 베풀고 軍布를 半減하여 一匹로 하는 同時에 그 不足額을 漁業稅 鹽稅 船舶稅와 및 隱結(土地臺帳에 빠진 田畓)의 結錢(稅錢)으로써 補充하였다. 이것을 均役法이라하여 役을 平均히 한다는 뜻으로 쓰여 있으나 실상은 負擔을 가벼이 하였으므로 輕役이라는 편이 좋지 아니할가 한다.

여기에 注意할 것은 漁鹽·船舶에 關한 納稅니 우리 朝鮮이 三面바다로 둘려있으되 漁鹽의 利는 일찌기 國家에서 取치 못하고 私門 豪族에게로 돌아갔던 것으로 肅宗은 一官을 設하여 그것을 專管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번에 戶曹判書 朴文秀의 主張에 依하여 實地를 調査케 한 후 이것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영조·정조 시대의 개관】 영조·정조 양대 동안은 청조 문화의 절정기인 건륭의 치세에 당하여 외부적으로는 그 자극과 영향을 받고 내부적으로는 중기 후반에서부터 부흥 발전하여 오는 문화의 새 조류를 이어 문인 학자의 배출과 함께 한층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게 하여 근세 전기의 세종·세조·성종의 치세를 방불케 한 감이 있었다.

【영조의 치적】 영조는 성품이 매우 엄격하고 과단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장헌세자에게 인정을 초월한 비상한 처치를 감행하였지만 그 국가를 사랑하고 문화를 향상시키고 대체와 민의를 중히 여기는 현명한 임금이었다. 그는 당론의 폐해를 통절히 느껴 이른바 탕평책을 쓰고 특히 민정에 주의하여 농상을 장려하고 사치를 금하였다. 또한 균역법을 마련하고 문신에게 명하여 속대전(원전인 경국대전에 대한 이름임)을 비롯하여 속병장도설·속오례의·국조악장·문헌비고 등 여러 종류의 서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균역법】 영조의 치적 중에 특히 주의할 것은 균역법의 마련이다. 사족이 아닌 평민층의 정년자(丁年者)에게 병역· 노역(부역)의 대가로 받아들이는 군포세를 한 사람마다 면포 2필씩 징수하였는데, 이 세가 과중하다는 논의가 일어나 마침내 영조 26년(국기 4083년, 서기 1750년)에 균역청을 베풀고 군포를 반감하여 1필로 하였다. 동시에 그 부족액을 어업세·염세·선박세와 은결(토지 대장에 빠진 전답)의 결전(세전)으로써 보충하였다. 이것을 균역법이라 하여 역을 평균하게 한다는 뜻으로 쓰였으나 실상은 부담을 가벼이 하였으므로 경역(輕役)이라는 편이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염·선박에 관한 납세이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려있었으나 어염의 이익은 일찍이 국가에서 취하지 못하고 사사로이 호족에게로 돌아갔었다. 이에 숙종은 하나의 관청을 설치하여 그것을 전담하여 관리하게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번에 호조 판서 박문수의 주장에 의하여 실지를 조사하게 한 후 이것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2. 정조의 치적[편집]

正祖는 莊獻世子의 아들로 祖父 英祖의 뒤를 이어 역시 黨論에 있어 蕩平을 主義로 하였고 特히 農政에 留意하여 이에 關한 書籍을 印刷 廣布할뿐더러 各道의 官民으로 하여금 實地에 關한 意見을 알게 하였으며 또 王은 누구보다도 好學 能文의 主로 著述에 富하여 弘齋全書란 巨帙의 文集을 남기었지만 【奎章閣과 書籍編纂】 일찌기 闕內에 奎章閣이란 일종의 王立圖書館 혹은 王立硏究院 같은 것을 두고 國內의 俊才를 뽑아 古今을 討究하고 또 여러 가지 書籍을 編纂 혹은 印刷케 하였으니 옛날 世宗大王의 集賢殿과 비슷하였던 것이다.

王의 治世 中에 儒臣에게 命撰한 書籍은 그 수효가 많아 일일히 들어보이기 어려우나 其中 大典通編(法典)·武藝圖譜通志·文苑黼黻·尊周彙編·奎章全韻·全韻玉篇·同文彙攷·秋官志·五倫行實 等이 著名하고 王의 手撰에 된 것도 많아 八子百選·朱書百選·五經百篇 等이 있었다.

【活字】 王은 매양 世宗의 治를 본받아 活字·印刷 方面에도 留意하여 여러 차례 改良을 加하였으니 世宗 때의 甲寅字를 字本으로 한 壬辰字(銅活字)를 비롯하여 韓構의 글씨를 본으로 한 韓構字(鈵活字)와 淸의 聚珍板字典을 字本으로 한 生生字(木活字)와 그밖에 整理字(銅活字) 등이 있었다.

정조는 장헌세자의 아들로 조부 영조의 뒤를 이어 역시 당론에 있어 탕평을 주의로 하였고 특히 농정에 유의하여 이에 관한 서적을 인쇄하여 널리 퍼뜨렸을 뿐만 아니라 각 도의 관민에게 실지에 관한 의견을 알게 하였다. 또 정조는 누구보다도 호학, 능문의 임금으로 저술에 힘써 홍재전서란 거질의 문집을 남겼지만 【규장각과 서적 편찬】 일찍이 궐내에 규장각이란 일종의 왕립 도서관 혹은 왕립 연구원 같은 것을 두고 국내의 뛰어난 인재들을 뽑아 고금을 토의 연구하고 또 여러 가지 서적을 편찬 혹은 인쇄하게 하였다. 옛날 세종대왕의 집현전과 비슷하였던 것이다.

정조의 치세 중에 유신에게 명하여 편찬한 서적은 그 수효가 많아 일일이 들추어내기 어려우나 그 중 대전통편(법전)·무예도보통지·문원보발·존주휘편·규장전운·전운옥편·동문휘고·추관지·오륜행실 등이 저명하다. 정조가 직접 편찬한 것도 많이 있으니 팔자백선·주서백선·오경백편 등이 있다.

【활자(活字)】 정조는 매양 세종의 치세를 본받아 활자·인쇄 방면에도 유의하여 여러 차례 개량을 가하였으니 세종 때의 갑인자를 자본으로 한 임진자(동활자)를 비롯하여 한구의 글씨를 본으로 한 한구자(동활자)와 청의 취진판자전을 자본으로 한 생생자(목활자)와 그밖에 정리자(동활자) 등이 있다.


3. 영조·정조 시대의 학예[편집]

【學風】 英·正 時代의 學界를 槪觀하면 아직도 순연히 空理 空談의 편파한 理學을 되푸리하는 派가 있었지만 一部 學者間에는 안으로 李瀷(星湖) 一派의 學風과 밖으로 淸朝 考證學의 影響을 입어 實用實事를 主로하고 博學多聞을 기치(旗幟)로 하는 學風이 일어나 單調한 半島 學界의 寂寞을 깨친 일이 있었다.

申景濬(旅庵)·徐命膺(保晩齋)·洪良浩(耳溪)-洪大容(湛軒)·朴趾源(燕岩)·李德懋(雅亭)·柳得恭(惠風)·朴齊家(楚亭)·成海應(硏經齋)·申綽(石泉)·丁若鏞(茶山) 等은 다 이때 이 新學風의 巨匠으로 其中 徐命膺·洪良浩·洪大容·朴趾源·朴齊家·李德懋·柳得恭 등은 北京에 奉使 혹은 隨行員으로 가서 淸朝의 文物을 구경하고 당시 淸朝의 名流들과 交遊하여 그 見聞을 넓히고 淸朝 文化의 極盛을 흠모(欽慕)하였다.

【北學論派】 그리하여 朴齊家와 같은 이는 北으로 淸朝의 物質文化를 불가불 배워야 하겠다는 趣旨 밑에서 北學議란 책을 著述하기까지 하였고 朴趾源도 역시 이 北學派의 巨頭로 燕行日記란 책을 지었지만 특히 그의 文章은 古今文體를 融合하여 自家獨特의 新境界를 開拓하였던 것이다. 李德懋·朴齊家·柳得恭은 詩人으로도 유명하여 李書九(薑山)와 함께 四家의 稱를 듣거니와 그들의 詩文은 當時 淸國人의 激讚을 받기까지 하였다. 成海應·申綽(작)·丁若鏞의 三人은 北京에 발을 디딘 일은 없었지만 항상 新來의 書籍을 보아 깊이 淸朝 考證學의 影響을 입고 다 훌륭한 著書를 남기었는데 成氏·丁氏의 著述은 방대(厖大)하고 多方面的이며 其中에도 丁氏의 것이 더욱 그러하다.

【金正喜】 以上 여러 大家보다는 後輩지만 淸朝 考證學의 影響을 가장 濃厚히 또 가장 直接的으로 받은 이는 金正喜(秋史 혹은 阮堂)이었다. 그는 二十四歲(純祖 九年)에 使行을 따러 北京에 가서 淸朝의 大家인 翁方綱·阮元 등과 交遊하여 일찍부터 視野를 넓히었지만 非凡한 才質로 그 후 꾸준한 硏磨를 쌓아 經學과 金石學에 새 權威를 세웠고 더욱 書家로 이름을 높이 날리었으니 그의 글씨는 古今 書法의 眞髓를 얻어가지고 自家獨特의 書體를 비저낸 것으로 半島書道史上에 一大 奇觀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金正喜의 글씨를 위에 말한 朴趾源(燕岩)의 文章과 또 同時代의 畫家로 역시 獨步의 稱을 듣는 金弘道(檀圖)의 그림과 아울러 後期 藝園의 三高峰이라 하고 싶다.

【학풍(學風)】 영조·정조 시대의 학계를 개관하면 아직도 순연히 공리공담의 편파한 이학을 되풀이하는 파가 있었지만 일부 학자 간에는 안으로 이익 일파의 학풍과 밖으로 청나라의 고증학의 영향을 입어 실용실사를 주로 하고 박학 다문을 기치로 하는 학풍이 일어나 단조로운 반도 학계의 적막을 깨친 일이 있었다.

여암 신경준·보만재 서명응·이계 홍양호·담헌 홍대용·연암 박지원·아정 이덕무·혜풍 유득공·초정 박제가·연경재 성해응·석전 신작·다산 정약용 등은 이때 새로운 학풍의 거장이었다. 그 중 서명응·홍양호·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은 북경에 봉사 혹은 수행원으로 가서 청조의 문물을 구경하고 당시 청조의 명사들과 교유하여 그 견문을 넓히고 청조 문화의 극성(極盛)을 흠모하였다.

【북학론파(北學論派)】 그리하여 박제가는 북으로 청조의 물질문화를 배워야 하겠다는 취지 아래 「북학의」란 책을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박지원도 역시 이 북학파의 거두로 「연행일기」란 책을 지었는데 특히 그의 문장은 고금 문체를 융합하여 스스로 독특한 새로운 경계를 개척하였다.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은 시인으로도 유명하여 강산 이서구와 함께 4가로 일컬어졌으며 그들의 시문은 당시 청나라 사람의 격찬을 받기까지 하였다. 성해응·신작·정약용 세 사람은 북경에 발을 디딘 일은 없었지만 항상 새로 전래된 서적을 보아 깊이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입어 훌륭한 저서를 남겼다. 성해응·정약용의 저술은 방대하고 다방면적인데 그 중에서도 정약용의 것이 더욱 그러하다.

【김정희(金正喜)】 이상 여러 대가보다는 후배이지만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가장 농후하게 또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은 김정희(추사 혹은 완당)이었다. 그는 24세(순조 9년)에 사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청조의 대가인 옹방강·완원 등과 교유하여 일찍부터 시야를 넓혔고 비범한 재질로 그 후 꾸준히 연마하여 경학과 금석학에 새 권위를 세워 더욱 서가로 이름을 높이 날렸다. 그의 글씨는 고금 서법의 진수를 얻어가지고 스스로 독특한 서체를 빚어내었으니 반도의 서도 역사상 굉장한 기관을 이루었다. 나는 이 김정희의 글자를 위에 말한 연암 박지원의 문장과 동시대의 화가로 독보적인 칭호로 불리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 아울러 후기 예원의 세 봉우리라 하고 싶다.


제2장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편집]

天主敎에 關한 書籍이 宣·光 時代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西洋 科學書類와 함께 一部 學者간에 注意를 이끌게 되었다 함은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얼마동안은 순연한 學的 好奇心과 知的 探究慾을 가지고 그런 書籍을 對한데 不過하였던 것이다. 그 후 天主敎書는 점점 民間에 流行되어 거기에 對한 信仰과 實踐運動이 차차 일어났으니 이때 政權을 잃은 南人 學者와 其他 不平이 많은 階級과 地方에서 特히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天主敎의 實踐運動】 그리하여 南人 名士의 一人인 李承薰은 正祖 七年(國紀 4116 西紀 1783) 겨울에 아버지를 따라 北京에 갔을 때 西洋人 神父에게 洗禮를 받고 많은 書籍을 求하여 가지고 돌아왔었다. 이것이 南人 新進派의 天主敎 實踐運動에 있어 가장 記錄的이요 가장 꽃다운 場面으로 이때 그 方面 人士에게 刺戟과 影響을 줌이 매우 컸었다.

【天主敎에 對한 彈壓】 이 信仰 實踐運動이 熱烈하여짐에 따라 士類로 신주를 파묻고 제사를 폐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니 儒敎를 根本으로 삼는 在來의 傳統과는 여간 背馳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正祖 十年 以後 朝廷에서는 이를 雅學이라 하여 法으로써 禁하고 中國으로부터의 모든 書籍의 輸入을 嚴禁하였으며 同王 十五年(辛亥)에는 士人으로 신주를 살려 없앤 尹持忠 權尙然을 死刑에 處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正祖는 원악 寬大한 政策을 써서 後日에서처럼 그렇게 廣範圍에 걸친 甚한 虐殺과 迫害는 加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周文謨의 入國】 正祖 十九年(國紀 4127 西紀 1794)에 周文謨란 淸人의 天主敎 神父가 朝鮮에 발을 들여놓아 이후 七年간 비밀히 傳道에 從事하매 信者의 數가 날로 늘어가더니 正祖가 下世하고 純祖가 卽位하여 大王大妃 金氏(英祖妃)가 後見함에 이르려는 天主敎에 對하여 혹독한 迫害가 나리어 無數한 信者가 잡히어 죽었다. 【辛西邪獻】 즉 위의 李承薰을 비롯하여 李家煥·丁若鍾·黃嗣永 等 南人 名士는 다 목숨을 빼았기고 그들의 家族姻戚으로 여기에 관련되어 혹은 죽고 혹은 귀양간 이가 많았으며 神父 吉文謨도 自首하여 死刑에 就하였다. 이것이 純祖元年 辛西에 일어났으므로 해서 辛西邪獄이라 한다.

그러나 禁하면 禁할수록 더 커지는 朝鮮의 天主敎는 그후 憲宗 二年(國紀 4169 西紀 1836)에 세 사람의 西洋人 神父(鄭牙各伯·羅伯多祿·范世享)를 처음으로 마지 하였더니 【己亥邪獄】 同王 五年(己亥)에 이것이 발각되어 神父 三人과 敎徒 三十餘名이 잡히어 죽었다.(己亥邪獄)

이 해 朝廷에서는 西敎를 철저히 禁하기 爲하여 「五家作統」의 法을 마련하여 一般에 실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다섯 집을 一統으로 하여 自治的으로 敎를 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 因하여 敎勢가 매우 쇠하였으나 그 후 敎徒는 숨어서 活動을 하고 또 西洋人 神父도 몰래 들어오고 그리하여 金大建이란 朝鮮人 最初의 神父까지도 생기게 되더니 同王 十二年(丙午)에 그는 잡히어 죽고 말았다. 다음 哲宗 때에 禁令이 좀 느추어지매 敎徒의 數가 다시 와짝 늘고 많은 西敎의 敎士도 들어오게 되었다.

천주교에 관한 서적은 선조·광해군 시대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서양 과학서류와 함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주의를 끌었다. 얼마 동안은 순연한 학적 호기심과 지적 탐구욕을 가지고 그런 서적을 대하였으나 그 후 천주교에 관한 책은 점점 민간에 유행되어 신앙과 실천 운동으로 차차 변화하였다. 이때 정권을 잃은 남인학자와 기타 불평이 많은 계급과 지방에서 특히 주목하였다. 【천주교의 실천 운동】 그리하여 남인 명사 중 한 사람인 이승훈은 정조 7년(국기 1416년, 서기 1783년) 겨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많은 서적을 구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남인 신진파의 천주교 실천운동에 가장 기록적이며 꽃다운 장면으로 이때 그 방면의 인사에게 매우 큰 자극과 영향을 끼쳤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신앙 실천운동이 열렬하여지면서 사류 중에 신주를 파묻고 제사를 폐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유교를 근본으로 삼는 재래의 전통과 여간 배치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정조 10년 이후 조정에서는 이를 사학이라 하여 법으로 금하고 중국에서 오는 모든 서적의 수입을 엄금하였다. 정조 15년(신해년)에는 사인으로 신주를 없앤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워낙 관대한 정책을 써서 뒷날처럼 광범위하고도 심한 학살과 박해는 가하지 아니하였다.

【주문모(周文謨)의 입국】정조 19년(국기 4127년, 서기 1794년)에 주문모란 청나라의 천주교 신부가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7년간 비밀히 전도에 종사하자 신자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즉위하여 대왕대비 김씨(영조의 왕비)가 후견하게 되자 천주교에 대하여 혹독한 박해를 가하여 무수한 신자가 잡혀 죽었다. 【신유사옥】 이승훈을 비롯하여 이가환·정약종·황사영 등 남인 명사는 다 목숨을 빼앗기고 그들의 가족과 인척으로서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신부 주문모도 자수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이 순조 원년 신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신유사옥이라 한다.

그러나 금하면 금할수록 더 커지는 조선의 천주교는 그 후 헌종 2년(국기 4169년, 서기 1836년)에 세 사람의 서양인 신부 즉 정아각백(鄭牙各伯)·나백다록(羅伯多祿)·범세향(范世享)을 처음으로 맞이하였다. 【기해사옥】 헌종 5년 기해년에 이것이 발각되어 신부 3인과 교도 30여 명이 잡혀 죽게 되었으니 이를 기해사옥이라 한다.

이 해에 조정에서는 서교를 철저히 금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을 마련하여 일반에서 실행하게 하였다. 이는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여 자치적으로 천주교를 금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교세가 매우 쇠하였으나 그 후 교인들은 숨어서 활동을 하고 또 서양인 신부도 몰래 들어와서 김대건이라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헌종 12년 병오년에 김대건은 잡혀서 죽고 말았다. 다음 철종 때에 금령이 좀 늦추어지자 교인의 수가 다시 급속도로 늘고 많은 서교의 교사도 들어오게 되었다.


제3장 세도정치와 홍경래의 난[편집]

1. 세도정치[편집]

勢道政治라는 것은 王의 信任을 받아 政權을 잡고 행사하는 것이니 官吏를 내고 能하는 權力과 其他 모든 重要한 任務를 맡아 거의 마음대로 行하다 싶이하는 것을 이름이다. 앞서 英祖 晩年에 正祖가 世孫으로 있을 때 王命을 받아 政事를 대신 보살필새 그 外從祖되는 洪麟漢이 勢道를 부리고 싶었으나 世孫이 영특하므로 世孫을 미워하여 害코지하더니 世孫은 그 宮僚인 洪國榮의 두호를 입어 無事하게 되었다.

【洪榮國의 勢道】 正祖 卽位後 洪麟漢을 죽이고 洪國榮에게 모든 政權을 마꼈으니 이것이 勢道라는 것의 처음이었다. 洪國榮이 政權을 잡으매 신하들 가운데는 그가 차차 방자하여 나쁜 것이 많다 하여 四年에 그를 내쫓았다. 正祖 뒤에 아들 純祖가 열한살의 어린나이로 임금이 되매 英祖繼妃인 貞純王后 金氏가 뒤에서 政治를 後見하고 밑에서 金祖淳이 이를 돕더니 【金祖淳의 勢道】 祖淳의 딸이 純祖의 王妃가 되자 이때부터 金氏의 勢道가 시작되어 오래동안 나라의 모든 政治가 그들 일가친척 손에서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일가 사이에도 勢力 다툼과 자리다툼이 일어나 政治가 腐敗한 중 흉년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수 없게 되니 民心이 날로 소란해졌다.

세도정치라는 것은 왕의 신임을 받아 정권을 잡고 행사하는 것이니 관리의 인사권과 기타 모든 중요한 임무를 맡아 거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영조 만년에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정사를 대신 보살피게 되었다. 그때 그의 외종조 되는 홍인한이 세도를 부리려 하였으나 세손이 영특하므로 세손을 미워하여 해하고자 하더니 세손은 그 궁료인 홍국영의 두호를 입어 무사하게 되었다.

【홍국영의 세도】 정조 즉위 후 홍인한을 죽이고 홍국영에게 모든 정권을 맡겼으니 이것이 세도라는 것의 처음이었다. 홍국영이 정권을 잡자 신하들 가운데 그가 차차 방자하여 나쁜 것이 많다 하여 4년에 그를 내쫓았다. 정조 뒤에 아들 순조가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자 영조의 계비인 순정왕후 김씨가 뒤에서 정치를 후견하고 그 밑에서 김조순이 이를 도왔다. 【김조순의 세도】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자 이때부터 김씨의 세도가 시작되어 오랫동안 나라의 모든 정치가 그들의 일가친척 손에서 놀았다. 그런데 그들 일가 사이에서도 세력 다툼과 자리다툼이 일어나 정치가 부패한 중 흉년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 수 없게 되니 민심이 날로 소란해졌다.


2. 홍경래의 난[편집]

이때 平安道 龍岡 땅에 洪景來라는 사람이 있으니 從來 平安道 사람은 높은 자리에 쓰지 않음을 不平품고 있던 차에 金氏 勢道 아래 官吏의 노략질이 심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수 없음을 보고 일어나 나라를 바로 잡겠다 하고 禹君則 金昌始 等으로 더부러 反亂을 꾀할새 同志를 뫃고 軍器를 만들드니 마침내 純祖 十 一年 十 二月(國紀 4144 西紀 1811)에 군사를 이르켰다.

【洪景來의 擧兵】 金氏 勢道판인 朝廷을 미워하는 平安道 民衆은 구름과 같이 뫃여들고 또 景來의 用兵은 날래어 嘉山 宣川을 뺏고 淸川江 以北을 호령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定州城에 웅거하였다. 朝廷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래 李堯憲을 兩西巡撫使로 삼고 先鋒將 朴基豐·柳厚源 등을 前後 보내어 치게 하였다. 定州城이 險固하여 잘 함락되지 않는지라 官軍은 四月에 이르러 한 계교를 내어 땅속으로 굴을 파고 城밑에 다달아 火藥을 묻어 爆破하니 城이 비로소 함락되고 洪景來도 戰死하여 이에 亂이 平定되었다. 이 洪景來 亂은 곧 그 때 백성의 뜻이었으니 民衆은 대개 勢道政治의 腐敗에 對하여 큰 不平을 품고 있던 때문이다.

民間에 이러한 큰 난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外戚 사이에는 또 勢道의 싸움이 일어났으니 즉 다음 王 憲宗(純祖의 孫) 때에 金氏와 趙氏와의 反目이 그것이었다. 趙氏는 즉 憲宗의 舅인 趙萬永의 一族으로 憲宗 卽位後 金氏와 勢力을 다투다가 마침내 金氏의 勢道를 뺏게 되었던 것이다. 【趙萬永의 勢道】 趙氏의 勢道도 한 때 장하였으나 憲宗이 돌아가고 哲宗이 들어스매 도루 그 勢道가 金氏에게로 넘어갔다. 【金汶根의 勢道】 그것은 純祖의 妃인 大王大妃 純元王后 金氏가 在世하여 後見하고 그의 近族인 金汶根의 딸을 哲宗의 妃로 삼아 그 一族이 權勢를 잡게 되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外戚의 勢道가 자주 뒤바뀌는 사이에 나라의 政治는 자꾸 병들어가고 民心은 나날이 動搖하여졌다.

이때 평안도 용강 땅에 홍경래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종래 평안도 사람은 높은 자리에 쓰지 않음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김씨 세도 아래 관리의 노략질이 심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수 없음을 보고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우군칙, 김창시 등과 더불어 반란을 꾀할 새 동지를 모으고 군기를 만들더니 마침내 순조 11년 12월에(국기 4144년, 서기 1811년) 군사를 일으켰다.

【홍경래의 거병】 김씨 세도판인 조정을 미워하는 평안도 민중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고 또 홍경래의 용병은 날래어 가산, 선천을 빼앗고 청천강 이북을 호령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정주성에 웅거하였다. 조정은 이 소식에 크게 놀라 이요헌을 양서 순무사로 삼고 선봉장 박기풍·유후원 등을 앞뒤로 보내어 치게 하였다. 정주성이 험고하여 잘 함락되지 않자 관군은 4월에 이르러 한 계교를 내어 땅속으로 굴을 파고 성 밑에 다다라 화약을 묻어 폭파하니 성이 비로소 함락되고 홍경래도 전사하여 이에 난이 평정되었다. 이 홍경래 난은 곧 그때 백성의 뜻이었으니 민중은 대개 세도정치의 부패에 대하여 큰 불평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간에 이러한 큰 난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척 사이에는 또 세도의 싸움이 일어났으니 즉 다음 왕 헌종 때에 김씨와 조씨와 반목이 심해졌다. 조씨는 즉 헌종의 장인인 조만영의 일족으로 헌종 즉위 후 김씨와 세력을 다투다가 마침내 김씨의 세도를 빼앗았다. 【조만영의 세도】 조씨의 세력도 한때 장하였으나 헌종이 돌아가고 철종이 즉위하자 도로 그 세도가 김씨에게로 넘어갔다. 【김문근의 세도】 그것은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살아있는 동안 후견하고 그의 가까운 일족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삼아 그 일족이 권세를 잡게 되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외척의 세도가 자주 뒤바뀌는 사이에 나라의 정치는 자꾸 병들어가고 민심은 나날이 동요하였다.


제4장 삼정의 문란과 민중의 동요[편집]

1. 삼정의 문란[편집]

나라 政治에 제일 根本되는 것은 財政問題이다. 이것이 바로 잡히지 못하고 어지러워질 때는 나라의 큰 살림이 마치 사사 사람의 그것과 같이 무너지는 것이다.

【三政】 從來 朝鮮의 財政가운데 가장 重要한 것은 所謂 三政(田政·軍政·還穀)이라는 세 가지 納稅였는데 이것이 哲宗 때에 와서는 極度로 紊亂하여져서 國庫는 말라들고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三政이라는 것은

 > (一) 田政…土地에서 받아들이는 租稅

  (二) 軍政…軍籍에 박힌 壯丁들에게서 받아들이는 代役稅

  (三) 還穀…어려운 백성들에게 低利로 貸與한 穀物의 還納 등이다.

【地方官吏의 行惡】 이 制度가 朝鮮 中葉부터 차차 문란하기 시작하여 末葉에는 더욱 地方官吏(地方의 高等官 及 所屬吏員)들의 여러 가지 협잡(挾雜)으로 큰 弊害를 일으키니 백성들은 그 토색(討索)과 가렴(苛歛)에 죽을 지경이었고, 政府의 收入은 그대로 줄어들었으며 결국 살찌는 자는 中間에서 협잡질하는 地方官吏들이었다. 더욱 各地의 高等管吏는 대부분 勢道家의 族親들이었으므로 權勢 背景 밑에서 가진 탐묵(貪墨)의 手段을 다 부리었다. 【暗行御史】 이 때문에 임금은 때로 地方官吏에게 탐묵을 禁하는 峻嚴한 글을 내리며 혹은 暗行御史(地方官吏의 善惡을 探偵하는 官吏)를 보내어 政況을 살피게 하였으나 滔滔히 흐르는 濁流는 이를 막을 수 없고 따라 地方의 民心은 極度로 흔들이었다.

나라 정치 중 제일 근본이 되는 것은 재정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잡히지 못하고 어지러워질 때는 나라의 큰 살림이 마치 개인의 그것처럼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삼정】 종래 조선의 재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삼정(전정·군정·환곡)이라는 세 가지 납세였는데, 이것이 철종 때에 와서 극도로 문란하여져서 국고는 말라들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삼정이란

  (1) 전정 … 토지에서 받아들이는 조세

  (2) 군정 … 군적에 박힌 장정들에게서 받아들이는 대역세

  (3) 환곡 … 어려운 백성들에게 낮은 이자로 대여한 곡물의 환납 등이다.

【지방 관리의 횡포】 이 제도가 조선 중엽부터 차차 문란하기 시작하여 말엽에는 지방관리 즉 지방의 고등관 및 소속 이원들의 여러 가지 협잡으로 더욱 큰 폐해를 일으켰다. 백성들은 그 토색과 가렴에 죽을 지경이었고, 정부의 수입은 그대로 줄어들었으며 결국 살찌는 자는 중간에서 협잡질하는 지방 관리들이었다. 더욱 각지의 고등 관리는 대부분 세도가의 족친들이었으므로 권세 배경 아래에서 갖은 탐묵의 수단을 다 부렸다. 【암행어사】 이 때문에 임금은 때로 지방 관리에게 탐묵을 금하는 준엄한 글을 내리며 혹은 암행어사(지방 관리의 선악을 탐정하는 관리)를 보내어 정황을 살피게 하였으나 도도히 흐르는 탁류는 이를 막을 수 없고 따라서 지방의 민심은 극도로 흔들렸다.


2. 민중의 동요[편집]

【晉州民擾】 그리하여 官吏 탐학(貪虐)에 對한 民衆의 분노(憤怒)는 마침내 哲宗 十三年(國紀 4195 西紀 1862) 晋州의 民擾(민요)로서 폭발되어 慶尙 忠淸 全羅의 三南 全體에 뻗고 其他 咸興 濟州島에서도 民亂이 일어났다. 특히 晋州의 民亂은 全民亂의 앞잡이가 된만큼 가장 맹렬하였으니 즉 이 해 二月에 民衆은 兵使 白樂莘의 탐학(貪虐)에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들고 일어나 長官을 내쫒고 사람을 죽이고 흰 수건(白巾)을 머리에 두르고 竹槍을 들고 城內로 모여들어 기세가 매우 놀라웠다. 朝廷에서는 朴珪壽를 三道 按覈使(안핵사)로 삼아 그곳에 보내어 實情을 조사케 하고 亂民을 按撫(안무)시켰다.

民亂의 原因이 制度의 결함(缺陷)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制度를 나쁘게 運用하는 官吏와 또 그런 官吏를 내보내는 어지러운 朝廷에 더 있었으니 이에 對한 民衆의 反感과 不平은 실상 오래전부터 있었다.

위로 特權階級의 腐敗, 알로 被搾取階級의 動搖, 밖으로 西洋勢力의 東漸, 안으로 政治의 紊亂 등 ─ 이때야 말로 큰 變動 큰 改革이 있어야 될 때였다.

【崔濟愚의 東學】 哲宗 年間에 慶州에 崔濟愚(福述)라는 이가 있어 思想에 依한 改革運動을 일으킬새 종래 조선 사람이 믿어오던 天神思想 祈禱儀式에 儒·佛·仙 三敎의 思想 내지 약간의 圖讖(豫言)的 要素를 加味하여 이름을 東學이라 하고 廣濟蒼生을 民衆에 向하여 부르짖었다. 東學은 西學(天主敎)에 對한 反對的 立場을 表示한 敎名으로 겉으로는 西學을 排斥하나 실상은 그것의 刺戟과 影響을 입은 바가 많았던 것이다.

東學敎門의 宣傳에 依하여 民衆의 歸依와 움직임이 날로 늘고 커지게 되었다. 그 敎門에 뫃여드는 民衆은 대게 特權階級에 눌려지내던 不平 많은 사람들이라 官人이 이를 겁내고 미워하게 되더니, 【崔濟愚의 死刑】 哲宗 末年(國紀 4196 西紀 1863)에 崔濟愚는 마침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惑世誣民(혹세무민)의 徒라하여 잡히여 이듬해 大邱에서 死刑을 받았었다. 東學敎門의 運動은 이와 같이 대탄압(大彈壓)을 입어 敎徒들은 풍비박산(風飛雹散)으로 헤터져 山谷에서 山谷으로 숨어단이며 餘脈을 보전하게 되었다.

【진주 민요】 그리하여 관리의 탐학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철종 13년(국기 4195년, 서기 1862년)에 진주의 민요로서 폭발되어 경상, 충청, 전라의 삼남 전체에 뻗고 기타 함흥, 제주도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특히 진주민란은 모든 민란의 앞잡이가 될 만큼 가장 맹렬하였다. 즉 이 해 2월에 민중은 병사 백낙신의 탐학에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들고 일어나 장관을 내쫒고 사람을 죽이고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죽창을 들고 성 안으로 모여들어 기세가 매우 놀라웠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삼도 안핵사로 삼아 그곳에 보내어 실정을 조사하게 하고 민란을 안무시켰다.

민란의 원인은 제도의 결함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제도를 나쁘게 운용하는 관리와 또 그런 관리를 내보내는 어지러운 조정에 더 있었으니 이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불평은 실상 오래전부터 있었다.

위로는 특권계급의 부패, 아래로는 피착취계급의 동요, 밖으로는 서양세력의 동점, 안으로는 정치의 문란 등 이때야 말로 큰 변동, 큰 개혁이 있어야 될 때였다.

【최제우의 동학】 철종 연간에 경주에 최제우라는 이가 있어 사상에 의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종래 조선 사람이 믿어오던 천신 사상 기도 의식에 유·불·선 삼교의 사상 내지 약간의 도참(예언)적 요소를 가미하여 이름을 동학이라 하고 광제 창생을 민중에 향하여 부르짖었다.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반대적 입장을 표시한 이름으로 겉으로는 서학을 배척하나 실상은 그것의 자극과 영향을 입은 바가 많았다.

동학 교문의 선전에 의하여 민중의 귀의와 움직임이 날로 늘고 커지게 되었다. 그 교문에 모여드는 민중은 대개 특권계급에 눌려 지내던 불평 많은 사람들이라 관인이 이를 겁내고 미워하더니, 【최제우의 사형】 철종 말년(국기 4196년, 서기 1863년) 최제우는 마침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혹세무민의 무리라 하여 잡혀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았다. 동학 교문의 운동은 이와 같이 대탄압을 입어 교도들은 풍비박산으로 흩어져 산골짜기에서 산골짜기로 숨어 다니며 여맥을 보전하게 되었다.


제5장 대원군 집정과 쇄국[편집]

1. 대원군의 집정[편집]

【高宗卽位】 哲宗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매 王大妃 趙氏의 傳敎로 英祖의 玄孫인 興宣君(昰應)의 次子를 翼宗(憲宗父追尊)의 嗣子로 맞아 大統을 잇게 하니 이분이 高宗이다. 그 친아버지 興宣君을 높여 大院君이라 하고 高宗은 이때 나이 겨우 열 둘이라 趙大妃 뒤에 앉고 모든 政事를 大院君이 決하게 되었다.

大院君은 果斷있는 人物로 그 때의 나쁜 政治를 改革할새 위선 外威으로 勢道부리던 金氏를 누르고 黨爭의 고질을 뽑으려하여 【四色登用】 오래 꺾여있던 南人 北人을 써서 四色(南·北·老·少)을 平等케 하였으며 地方과 階級의 差別을 없이하여 人材를 널리 골라 썼다.

【書院撤毁】 그리고 전부터 여러 가지 폐단을 비저내려오던 全國의 數많은 書院을 헐어버리게 하고 또 平民만이 물던 代役稅를 兩班에게도 負擔시키며 나쁜 官吏를 嚴罰하고 나쁜 慣習과 衣服을 고치었으니 실로 그가 아니면 이러한 果敢한 改革을 하기 어려웠다.

【景福宮重建】 高宗 二年(國紀 4198 西紀 1865)에 景福宮을 重建하여 새 政府의 威嚴을 세우려고 백성에게 願納錢이란 美名下에 돈을 바치게 하며 當百錢이라는, 한푼돈을 百文으로 쓰게 하는 특별한 돈을 만들어 貨幣의 信用을 떨어트리며 負役을 억지로 시키니 차침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閔妃】 四年에 王妃를 뽑을새 外戚의 세도부림을 막기 위하여 고단한 집에서 맞아들기로 하고 大院君의 妻族인 閔氏의 따님을 가려 王妃를 삼으니 그 뜻이 비록 좋았으나 나중에 大院君 自身이 밀려나고 閔妃의 친가에 養子로 들어온 閔升鎬를 비롯하여 諸閔이 세도를 잡게 되었다.

【고종의 즉위】 철종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자 왕대비 조씨의 전교로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익종(헌종의 아버지를 추존한 이름이다.)의 후계자로 맞아 대통을 잇게 하니 이 분이 고종이다. 그 친아버지 흥선군을 높여 대원군이라 하고 고종은 이때 나이 겨우 열두 살이라 조대비 뒤에 앉고 모든 정사를 대원군이 결정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과단 있는 인물로 그때의 나쁜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우선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김씨를 누르고 당쟁의 고질을 뽑으려 하였다. 【4색(四色)의 등용】 그간 오래 꺾여있던 남인과 북인을 써서 4색 즉 남인·북인·노론·소론을 평등하게 하였으며 지방과 계급의 차별을 없애고 인재를 널리 골라 썼다.

【서원 철폐】 그리고 전부터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킨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헐어버리게 하고 또 평민만이 물던 대역세를 양반에게도 부담시켰으며 나쁜 관리를 엄벌하고 나쁜 관습과 의복을 고쳤으니, 실로 그가 아니면 이러한 과감한 개혁을 하기 어려웠다.

【경복궁 중건】고종 2년(국기 4198년, 서기 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하여 새 정부의 위엄을 세우려고 백성에게 원납전이란 미명하에 돈을 바치게 하였고 당백전이라는 한 푼 돈을 백문으로 쓰게 하는 특별한 돈을 만들어 화폐의 신용을 떨어뜨렸으며 부역을 억지로 시키니 차츰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민비(閔妃)】 4년에 왕비를 뽑을 때 외척의 세도 부림을 막기 위하여 고단한 집에서 맞아들이기로 하고 대원군의 처족인 민씨의 따님을 가려 왕비로 삼았다. 그 뜻은 비록 좋았으나 나중에 대원군 자신이 밀려나고 민비의 친가에 양자로 들어온 민승호를 비롯하여 여러 민씨가 세도를 잡게 되었다.


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편집]

【天主敎迫害】 大院君은 위와 같이 많은 弊政을 고쳤으나 오즉 外治에는 눈이 어두어 오래 鎖國主義(쇄국주의)를 固執하고 天主敎를 嚴禁하니 高宗 三年 丙寅 正月에 敎人 南鍾三 등과 佛國 神父를 죽이고 八道에 令을 내리어 敎徒를 虐殺하였다. 【佛艦侵入】 그 神父 中 한사람인 리-덜(李德)이 몰래 배를 타고 빠져나가 天津에 있는 佛國派遣艦隊에게 이 經過를 報告하였다. 이에 노한 佛國 軍艦 三隻은 八月에 仁川 바다로 들어와 江華島를 거쳐 漢江 楊花津에까지 이르러 偵察하고 가더니 九月에 또 다시 佛艦 七隻이 와서 江華島를 침범(侵犯)하였다.

【李容熙防禦】 朝廷에서는 각처에 防備를 嚴히 하는 同時에 中軍 李容熙로 先鋒을 삼아 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니 容熙는 通津을 지키고 哨官 韓聖根은 文殊山城을 지키다가 聖根이 山城 南門에서 敵의 一部隊를 마지하여 이를 쳐부시고 【丙寅洋擾】 또 千摠 梁憲洙는 中軍의 命을 받아 五百餘名의 銃砲兵을 거느리고 가만히 江華 鼎足山城에 들어가 埋伏하여 있다가 佛兵을 마지하여 銃砲를 퍼부어 물리치니 敵艦隊는 할 수 없이 한 달 만에 江華에서 물러가게 되었다. 이 해가 丙寅年이므로 이 亂을 丙寅洋擾(요)라 한다.

【美船事件】 그런데 이 해 여름에는 美國商船 「제너랄숴맨」號가 物資를 팔기 爲하여 天津 方面으로부터 大同江을 거슬려올라 平壤에 이르러 容易히 물러가지 않고 그들을 拒否하는 官民들에게 폭행과 약탈을 加하므로 軍民이 일어나 그 배를 불지르고 船員을 죽인 일이 있었다. 이 事實이 後에 美國政府에 알려지매 美國政府는 조선에 問責을 行하는 同時에 强制로 通商條約을 맺으려고 北京에 있는 美國公使에게 調令하여 亞細亞艦隊를 出動케 하였다.

【美艦侵入】 그리하여 高宗 八年 辛未에 美國軍艦 五 六隻이 京畿 近海에 나타나 그 中 三隻이 江華海峽에 들어오려 할 때 廣城鎭 砲臺에서는 砲門을 열고 싸움을 걸었더니 美艦으로부터 砲擊이 集中되어 砲臺는 무너지고 中軍 魚在淵은 下陸한 美兵을 逆擊하다가 壯烈한 죽엄을 하였다. 美軍은 甲串(갑곶)에 上陸하여 江華를 攻略하려고 陣營을 베풀새 江華守兵 五百名이 밤중에 갑작이 敵을 猛襲하여 그 屯所에서 쫓아버렸다. 【辛未洋擾】 이리하여 美軍은 역시 本來의 目的을 達치 못하고 江華에서 물러가니 이것이 辛未洋擾이다.

여러 차레 洋人을 물리친 大院君은 意氣洋洋하여 外國이 무서울 것이 없다 하여 더욱 斥洋鎖國決心을 굳게 하고 【斥和碑】 서울 鍾路와 地方 各處에 斥和碑를 세워 글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 하여 어데까지든지 積極的으로 洋人과 싸워 和를 말기를 全國民에게 알리었다.

【천주교 박해】 대원군은 위와 같이 많은 폐정을 고쳤으나 오직 외치(外治) 에는 눈이 어두워 오래 쇄국주의를 고집하고 천주교를 엄금하니 고종 3년 병인년 정월에 교인 남종삼 등과 프랑스 신부를 죽이고 8도에 영을 내리어 교도를 학살하였다. 【프랑스 군함의 침입】 그 신부 중 한사람인 리-덜(李德)이 몰래 배를 타고 빠져나가 천진에 있는 프랑스 파견 함대에 이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에 노한 프랑스 군함 3척은 8월에 인천 바다로 들어와 강화도를 거쳐 한강 양화진에까지 이르러 정찰하고 가더니 9월에 또 다시 프랑스 군함 7척이 와서 강화도를 침범하였다.

【이용희의 방어】 조정에서는 각처에 방비를 엄히 하는 동시에 중군 이용희로 선봉을 삼아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이용희는 통진을 지키고 초관 한성근은 문수산성을 지키다가 산성 남문에서 적의 한 부대를 맞이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병인양요】 또 천총 양헌수는 중군의 명을 받아 5백여 명의 총포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강화 정족산성에 들어가 매복하여 있다가 프랑스 병사를 맞이하여 총포를 퍼부어 물리치니 적의 함대는 할 수 없이 한 달 만에 강화에서 물러가게 되었다. 이 해가 병인년이므로 이 난을 병인양요라 한다.

【미국 선박 사건】그런데 이 해 여름에는 미국 상선「제너랄숴맨」호가 물자를 팔기 위하여 천진 방면으로부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에 이르러 쉽게 물러가지 않고 그들을 거부하는 관민들에게 폭행과 약탈을 가하므로 군민이 일어나 그 배에 불을 지르고 선원을 죽인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뒤에 미국 정부에 알려지자 미국 정부는 조선에 문책을 행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는 미국 공사에게 훈령하여 아시아 함대를 출동하게 하였다.

【미국 군함의 침입】 그리하여 고종 8년 신미년에 미국 군함 5, 6척이 경기 근해에 나타나 그 중 3척이 강화 해협에 들어오려 하였다. 이때 광성진 포대에서 포문을 열고 싸움을 걸었더니 미국 함대로부터 포격이 집중되어 포대는 무너지고 중군 어재연은 상륙한 미국 병사를 역공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미군이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를 공략하려고 진영을 베푸는 사이에 강화 수병 5백 명이 밤중에 갑자기 적을 맹렬히 습격하여 그 둔소에서 쫓아버렸다. 【신미양요】 그리하여 미군 역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강화에서 물러가니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여러 차례 양인을 물리친 대원군은 의기양양하여 외국을 무서워하지 않고 더욱 척양 쇄국의 결심을 굳게 하고 【척화비】 서울 종로와 지방 각처에 척화비를 세워 글에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의하는 것이며, 화의를 주장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 하여 적극적으로 양인과 싸워 화친하지 말 것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제6장 일본과의 교섭과 개화운동[편집]

1. 대원군의 하야와 민씨의 세도[편집]

膽略과 勇斷으로 弊政을 一新하고 또 鎖國을 固執하여 여러 번 洋人을 물리친 大院君도 그 獨裁政治가 여러 해에 미치매 그러지 않아도 勢道를 읽고 大院君을 미워하던 一派는 차츰 이를 빌미삼아 反對의 運動을 일으켰다.

【李氏 王子를 남】 앞서 外戚勢道의 後患을 없이하기 위하여 맞아들인 며눗님 閔妃는 宮에 들어와 한 때 上下의 愛敬을 한몸에 모으드니 高宗이 宮女 李氏를 사랑하여 그 몸에서 王子가 났고 大院君이 또한 이를 귀이 여겨 世子冊立의 뜻을 보이매 內心에 不平을 품게 되었다. 【閔升鎬의 暗躍】 그리하여 그 오라버니 閔升鎬를 시켜 勢道를 잃고 大院君과 등진 金氏 一派와 손잡으며 大院君의 맏아들 李載冕과 大院君의 兄 李最應을 끌어들여 大院君에게 重用되지 못한 사람을 中心으로 그의 反動勢力을 이루어 大院君을 물리칠 計劃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으로 高宗의 나이 이미 二十二歲라 친히 政事를 보살필 수 있으므로 이를 機會로 하여 儒生 崔益鉉 等을 충동시켜 大院君 彈劾의 上疏을 올리게 하니 【大院君下野】 巷間의 人心이 또한 이에 쏠리게 되매 時勢의 不利함을 깨달은 大院君은 執政 十年만에 할 수 없이 政權을 버리고 下野하게 되었다. 大院君이 下野한 후 朝政은 자연히 閔氏의 손에 들어가고 이후 閔氏와 大院君과의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葛藤)이 일어나게 되었다.

담략과 용단으로 폐정을 일신하고 또 쇄국을 고집하여 여러 번 양인을 물리친 대원군도 그 독재정치가 여러 해에 미치게 되었다. 세도를 잃고 대원군을 미워하던 일파는 차츰 이를 빌미삼아 반대의 운동을 일으켰다.

【이씨 왕자를 낳음】 앞서 외척 세도의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맞아들인 며느리 민비는 궁에 들어와 한때 상하의 공경과 사랑을 고종 한 몸에 모이게 하더니 궁녀 이씨가 왕자를 낳고 대원군 또한 그를 귀하게 여기며 세자 책립의 뜻을 보이자 내심 불평을 품게 되었다. 【민승호의 암약】 그리하여 그 오라버니 민승호를 시켜 세도를 잃고 대원군과 등진 김씨 일파와 손잡으며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과 대원군의 형 이최응을 끌어들여 대원군에게 중용되지 못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반동 세력을 이루어 대원군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으로 고종의 나이가 이미 22세가 되어 친히 정사를 보살필 수 있으므로 이를 기회로 하여 유생 최익현 등을 충동시켜 대원군 탄핵의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대원군의 하야】 항간의 인심이 또한 이에 쏠리게 되자 시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대원군은 집정 10년 만에 할 수 없이 정권을 버리고 하야하게 되었다. 대원군이 하야한 후 조정의 정치는 자연히 민씨의 손에 들어가고 이후 민씨와 대원군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2. 일본과의 수호[편집]

大院君을 몰아낸 閔氏 一派는 外交方針에 있어 처음부터 鎖國主義를 打破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世界의 大勢上 스스로 開國策을 쓰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오래동안 國交斷切 中에 있던 日本政府와 서로 修好條約을 맺게 되었다. 이 앞서 日本은 維新政府가 서서 歐美諸國과 通商을 트며 조선과도 修好하기를 여러 번 원하여 왔으나 大院君은 日本의 方式이 前日과 달으다 하여 應치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日本서는 征韓侖을 主張하는 一派도 생기더니 【日艦侵入】 高宗 十二年(國紀 4203 西紀 1875)에 日本軍艦 震揚號가 江華島 附近에 이르러 短艇으로 漢江에 들어오려 할새 江華島의 守兵이 이에 發砲하여 한 때 衝突이 생기었다. 그 이듬해(十三年 丙子) 日本은 黑田淸隆을 全權大臣, 井上馨을 副使로 삼아 조선에 보내어 靈揚號 砲擊事件을 힐날(詰難)하고 이를 機會로 修好條約을 맺으려 하거늘 【丙子條約】 처음에는 서로 意見이 잘 맞지 않더니 右議政 朴珪壽와 譯官 吳慶錫 等이 世界大勢로 보아 修交가 마땅하다 하매 王과 閔妃도 그리 여기여 드디어 江華島에서 두 나라의 修好條約을 맺게 되었다. 이를 丙子條約 혹은 江華島條約이라 하니 그 內容은 열 두 조목으로 되었고 그중에 주요한 것은 朝鮮이 自主獨立國이라는 것과 두 나라의 使節을 交換한다는 것과 釜山 外에 港口(仁川·元山)을 열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修信使往來】 그리하여 우리政府는 이해(丙子)에 金綺秀를 修信使로 삼아 日本에 보내고 그후 四年인 庚辰(十七年)에 또 金宏集(後名 弘集)을 보내어 修好의 禮를 보이었으나 【日公使館設置】 그 동안 日本서도 數次(十四·十六年) 花房議質을 代理公使로 京城에 보내어 十六年 己卯에는 西大門 밖 淸水舘(今 天然亭)을 假公使舘으로 하여 머물게 하고 釜山을 비롯하여 이후 元山 仁川의 諸港을 차례로 열게 되었다.

대원군을 몰아낸 민씨 일파는 외교 방침을 정할 때 처음부터 쇄국주의를 타파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계의 대세상 스스로 개국책을 쓰지 아니할 수 없었으므로 오랫동안 국교 단절 중에 있던 일본 정부와 서로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은 유신정부가 서서 구미 제국과 통상을 트며 조선과도 수호하기를 여러 번 원하였으나 대원군은 일본의 방식이 전일과 다르다 하여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일파도 생겼다. 【일본 함대의 침입】 고종 12년(국기 4208년, 서기 1875년)에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부근에 이르러 단정(短艇)으로 한강에 들어오려 하자 강화도의 수병이 이에 발포하여 한때 충돌이 생겼다. 그 이듬해 일본은 흑전청륭(黑田淸隆, 구로다 기요타카)을 전권대신, 정상형(井上馨, 이노우에 가오루)을 부사로 삼아 조선에 보내어 운양호 포격 사건을 힐난하고 이를 기회로 수호조약을 맺으려 하였다. 【병자조약】 처음에는 서로 의견이 잘 맞지 않더니 우의정 박규수와 역관 오경석 등이 세계의 대세로 보아 수교가 마땅하다 하자 왕과 민비도 받아들여 드디어 강화도에서 두 나라의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를 병자조약 혹은 강화도조약이라 한다. 그 내용은 열 두 조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주요한 것은 조선이 자주독립국이라는 것, 두 나라의 사절을 교환한다는 것, 부산 외의 항구 즉 인천·원산을 열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수신사 왕래】그리하여 우리 정부는 이 해에 김기수를 수신사로 삼아 일본에 보내고 그 후 4년인 경진년에 또 김굉집(뒤의 이름은 김홍집)을 보내어 수호의 예를 보였다. 그 동안 일본에서도 수차례(14년·16년) 화방의질(花房義質, 하나부사 요시모토)을 대리 공사로 경성에 보내어 【일본 공사관의 설치】 16년 기묘년에는 서대문 밖 청수관(지금의 천연정)을 임시 공사관으로 하여 머물게 하고 부산을 비롯하여 이후 원산과 인천의 항구를 차례로 열게 되었다.


3. 신문화의 수입[편집]

【紳士團과 領選使】 鎖國 朝鮮은 이리하여 門戶를 開放하고 同時에 外國의 新文化를 輸入하기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高宗 十八年 辛巳(國紀 西紀 1881)라는 해는 조선 開化運動史上에 있어서 特書할만한 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해에 紳士遊覽團이라하여 朴定陽 魚允中 趙準永 趙秉稷 沈相學 洪英植 等 十餘名의 紳士를 日本에 보내어 새로운 文物制度를 視察케 하고 또 한편으로는 金允植을 領選使로 삼아 六十九名의 靑年學徒를 이끌고 淸國 天津에 가서 모든 新機械에 關한 知識을 배우게 하였던 까닭이다. 이들의 遊覽과 留學은 결국 淸日 兩國을 通하여 西洋의 新文化에 接觸하여 그것을 배워드리는데 큰 使命이 있었던 것이다.

【制度改革】 이와 同時에 안으로 舊制度를 多少 改革하여 議政府에 統理機務衙門이라는 것을 (淸國에 모방하여) 새로히 두고 그 밑에 여러 機關을 公設하였으며 또 軍制를 고치어 武衛 壯禦의 두 營門을 新設하고 日本人 堀本禮造를 초빙(招聘)하여 新式訓鍊을 베풀고 한편으로 서울의 兩班 子弟 中에서 優秀한 사람을 뽑아 士官生徒라 이름하여 역시 日本式 敎練을 받게 하였다.

【開化派 守舊派】 그러나 이때 國內에는 各界를 通하여 新舊의 對立이 생김을 免치 못하였으니 新文化에 理解를 가진 사람은 開化派라 指目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를 守舊派라 하여 그 사이에 暗鬪와 反目이 생기게 되었다.

【신사유람단과 영선사】 쇄국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동시에 외국의 신문화를 수입하여 눈을 뜨게 되었는데 고종 18년 신사년(국기 4214년, 서기 1881년)은 조선 개화 운동사에 있어서 특서할만한 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해에 신사유람단이라 하여 박정양, 어윤중, 조준영, 조병직, 심상학, 홍영식 등 10여 명의 신사를 일본에 보내어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69명의 청년학도를 이끌고 청국 천진에 가서 모든 새로운 기계에 관한 지식을 배우게 하였던 까닭이다. 이들의 유람과 유학은 결국 청·일 양국을 통하여 서양의 신문화에 접촉하여 그것을 배워오는데 큰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제도 개혁】 이와 동시에 안으로 구제도를 다소 개혁하여 의정부에 통리 기무 아문이라는 것을 (청국을 모방하여) 새로이 두고 그 밑에 여러 기관을 공식적으로 설치하였으며 또 군제를 고치어 무위영과 장어영의 두 영문을 신설하고 일본인 굴본예조(堀本禮造, 호리모토 레이조)를 초빙하여 신식 훈련을 베풀었다. 한편으로 서울의 양반 자제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사관생도라 이름 하여 역시 일본식 교련을 받게 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 그러나 이때 국내에는 각계를 통하여 신구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신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개화파라 지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구파라 하여 그 사이에 암투와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4. 청국의 태도[편집]

조선의 開化策에 따라 日本의 勢力이 차차 半島안에 들어오매 종래 조선과 特殊한 關係를 맺어 오던 淸國은 이에 날카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조선과 淸國과는 원래 形式上 宗屬의 關係와 같이 되어 있었으나 實質에 있어서는 조선이 모든 政事를 自主的으로 하여오던 터이라 앞서 天主敎徒 虐殺 및 其他 事件으로 因하여 佛·美 諸國이 그 責任을 淸國에 무를 때 淸國은 조선이 自主國임을 明言하였는데 【韓美條約】 이제 日本의 勢力이 조선에 미침을 보고 淸은 이에 國際的 均衡을 보전키 爲하여 歐美諸國과의 修交를 조선에 勸하고 먼저 韓美通商條約의 締結을 종용(慫慂)하여 高宗 十九年에 그 實現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二 三年에 걸쳐 英 獨 露 佛과도 條約을 맺었거니와 韓美條約은 歐美諸國과 맺은 條約의 가장 처음되는 것이다.

조선의 개화책에 따라 일본의 세력이 차차 반도 안에 들어오자 종래 조선과 특수한 관계를 맺어 오던 청국은 이에 날카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조선과 청국은 원래 형식상 종속의 관계와 같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이 모든 정사를 자주적으로 하여왔다. 앞서 천주교도 학살 및 기타 사건으로 인하여 프랑스·미국 및 여러 나라가 그 책임을 청국에 물을 때 청국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언하였는데, 【한·미 조약】 이제 일본의 세력이 조선에 미치자 청은 국제적 균형을 보전하기 위하여 구미 제국과 수교할 것을 조선에 권하고 먼저 한·미 통상 조약의 체결을 종용하여 고종 19년에 그 실현을 보게 하였다. 이후 2, 3년에 걸쳐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다. 한·미 조약은 구미 제국과 맺은 조약의 가장 처음인 것이다.


제7장 임오군란과 갑신정변[편집]

1. 임오군란[편집]

【舊軍人의 不平】 開化의 바람이 軍制우에 불어 舊營門을 폐하고 新營을 두어 新式軍隊를 訓練시키게 된 것은 위에 이미 말한 바어니와 業을 잃은 舊軍人들의 閔氏에 對한 不平은 자못 컸고 게다가 그들의 給料는 여러 달 받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高宗 十九年 壬午 六月에 그들에게 밀린 給料 中 겨우 一個月分을 태워 줄 새 쌀의 品質이 좋지 못하고 (모래가 섞였다고 傳함) 數量도 대단히 不足하였다. 舊軍人들은 怒氣가 충천하여 倉吏와 말다툼을 하다가 일이 벌어져 그 중 몇 사람이 잡혀 가치매 【舊軍人의 反亂】 軍人들은 責任者인 宣惠廳堂上 閔謙鎬에게 억울함을 애소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더욱 激憤하여 드디어 일제히 亂을 일으키니 閔氏를 仇敵視하던 大院君은 이를 기회로 삼아 뒤에서 은근히 부채질 하였다.

【日本公使逃亡】 그리하여 亂軍은 軍器庫로 몰려가 軍器를 끄내가지고 閔氏네의 집을 습격하며 新式敎練官 堀本禮造를 죽이며 또 西大門 밖 日本公使舘을 습격하매 公使 花房義質은 仁川으로 도망하여 英國 測量船을 타고 本國으로 돌아갔다. 【閔妃避亂】 亂軍은 이튼날 다시 몰리여 大闕을 犯하여 闕內에 숨었던 閔謙鎬 等을 打殺하고 장차 閔妃를 弑害하려 하니 閔妃는 變服하고 宮을 나와 忠州로 亂을 避하였다.

【大院君再起】 大院君은 이 變을 듣고 곧 入闕하여 亂軍을 鍊撫하고 王命에 依하여 時局을 수습하는 重責을 맡으니 十年間 세도를 잃었던 大院君은 또다시 政權을 잡게 되고 따라 文武 要人들의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閔氏黨은 이로 因하여 큰 打擊을 받았으나 그들의 策動은 매우 機敏하여 이때 天津에 가 있던 金允植 等에게 기별하여 淸國의 援助를 請하였다. 【淸國來援】 淸國은 이때 조선의 內政을 干涉할 機會를 엿보고 있던 터이라 吳長慶 馬建忠 丁汝昌 等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大院君을 잡아가고 조선 政治에 干涉의 손을 대는 한편 밖으로 「朝鮮은 本來 中國의 屬邦이라」 宣言하였다. 【濟物浦條約】 日本公使 花房義質은 軍艦을 타고 와서 앞서 軍亂의 責任을 質問하여 드디어 濟物浦條約을 맺고 賠償金 五十萬兩을 물리고 亂軍의 괴수를 죽이고 또 修信使 朴泳孝를 보내어 謝過의 뜻을 표하게 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불평】 개화의 바람이 군제에 불어 구식 영문(營門)을 폐하고 새로운 영문을 두어 신식 군대를 훈련시키자 업을 잃은 구식 군인들의 민씨에 대한 불평은 자못 컸고 게다가 그들은 급료를 여러 달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종 19년 임오년 6월에 그들에게 밀린 급료 중 겨우 1개월분을 채워 주었는데 쌀의 품질이 좋지 못하고[모래가 섞였다고 전함] 수량도 대단히 부족하였다. 구식 군인들은 노기가 충천하여 창고 아전과 말다툼을 하다가 일이 벌어져 그 중 몇 사람이 잡혀 갇히게 되었다. 【구식 군인들의 반란】 군인들은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억울함을 애소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더욱 격분하여 드디어 일제히 난을 일으키니 민씨를 원수처럼 대하던 대원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뒤에서 은근히 부채질 하였다.

【일본 공사의 도망】 그리하여 반란군은 군기고로 몰려가 군기를 꺼내어 민씨네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신식교련관 굴본예조(호리모토 레이조)를 죽이고 또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공사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모토)은 인천으로 도망하여 영국 측량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민비의 피난】 반란군은 이튿날 다시 몰려 대궐을 범하여 궐내에 숨었던 민겸호 등을 타살하고 장차 민비를 시해하려 하니 민비는 변복하고 궁을 나와 충주로 난을 피하였다.

【대원군의 재기】 대원군은 이 변을 듣고 곧 입궐하여 반란군을 진무하고 왕명에 의하여 시국을 수습하는 중책을 맡으니 10년간 세도를 잃었던 대원군은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되고 따라서 문무 요인들의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민씨당은 이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그들의 책동은 매우 기민하여 이때 천진에 가 있던 김윤식 등에게 기별하여 청국의 원조를 청하였다. 【청나라의 내원(來援)】 청국은 이때 조선의 내정을 간섭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터이라 오장경, 마건충, 정여창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대원군을 잡아가고 조선 정치에 간섭의 손을 대는 한편 밖으로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방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제물포 조약】 일본 공사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모토)은 군함을 타고 와서 앞서 군란의 책임을 질문하여 드디어 제물포 조약을 맺고 배상금 50만 냥을 물리고 반란군의 괴수를 죽이고 또 수신사 박영효를 보내어 사과의 뜻을 표하게 하였다.


2. 청국 세력의 침입과 갑신정변[편집]

【閔氏一派의 事大主義】 大院君의 다시 일어남을 꺾기 위하여 淸國의 원조를 빌어 들인 閔氏 一派로는 처음의 自立策을 버리고 事大主義를 取하게 되었다. 그들은 淸國의 制度를 본받아 統理衙門을 베풀고 獨人 穆麟德을 內衙門에, 淸人 馬建忠을 外衙門에 두어 각각 顧問官을 삼는 동시에 淸의 全權大臣 李鴻章의 절제를 받게 되었다. 이어 淸將 吳長慶 袁世凱 等이 군사 三千名을 거느리고 京城에 와서 머므르니 마치 淸國의 屬國같이 되었다.

【守舊黨과 獨立黨】 이로부터 國內에는 守舊黨(事大黨)과 獨立黨(開化黨)의 두 派가 생기어 서로 對立하게 되니 守舊黨은 말할 것도 없이 淸國에 依賴하자는 事大主義派로 대개 宗室과 外戚(閔氏)이 이에 屬하고 獨立黨은 日本의 힘을 빌어 自主의 新國家를 만들겠다는 開化派로, 軍亂後 修信使로 日本에 派遣되었던 朴泳孝 以下 金玉均 徐光範 洪英植 등이 그 派의 主要할 人物들이었다.

이들 開化獨立黨人은 대개 나이가 젊고 기운이 팔팔한 有爲의 무리었으므로 매양 日本에 往來하여 새 制度 새 學術을 講究하는 同時에 그 新文明을 輸入하여 모든 낡은 것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淸國의 勢力과 이를 背景으로한 守舊黨을 除去하지 않고는 自己네의 理想을 達할 수 없었으므로 먼저 守舊黨 一派를 때려부셔 임금을 自己네 편으로 옴기어 올 陰謀를 비밀리에 行하였다. 이를 實現시킴에는 兵力이 必要하므로 그들은 미리 日本公使 竹添進一郞과 密議하고 그 군대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郵政局事件】 그리하여 擧事(實事)는 高宗 二十一年 甲申(國紀 4217 西紀 1884) 十一月 十七日(陽) 郵政局(遞信事務를 맏는 官廳) 落成式이 열릴 그때 그 場所로 定하였다. 이 落成式에는 守舊黨이 重要한 人物과 其他 內外國의 高官들이 參席하게 되었으므로 混雜한 그 틈을 타서 刺客을 들여보내놓고 잔치가 한참 벌어질 판에 이웃집에 불을 질러 불이 났다 외여치매 모였던 손들은 놀래여 밖으로 뛰어 나가는지라 刺客은 守舊黨의 괴수 閔泳翊을 찔렀으나 그는 負傷만 한 채로 도망하였다. 金玉均 朴泳孝 徐光範 등은 곧 宮中으로 들어가 거짓말로 淸兵이 亂을 일으켰다 하고 高宗을 모시고 景祐宮(今 徽文中學 附近)에 옴겨 日兵으로써 宮을 護衛한 후 【開化黨入閣】 守舊黨의 領袖인 閔泳穆 閔台鎬 趙寧夏 等 六人을 죽이고 그네들의 꿈꾸던 新內閣을 조직하였다.

【淸兵出動】 이튿날 王이 昌德宮으로 돌아오고 日本兵이 파수를 보더니 守舊黨은 이에 南大門 밖에 있는 袁世凱에게 알리어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宮城에 닥치게 한지라 日本兵과 砲火를 바꾼 나머지 日本軍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에 이르자 王은 士官生徒에게 업히어 洪英植 朴泳孝 等의 保護로 北廟에 避亂하더니 淸兵이 몰려와 洪과 朴을 죽이고 王을 모셔갔다. 이 亂中에 日本公使館이 불타고 그 居留民의 殺傷도 있었다. 【開化黨의 日本亡命】 일이 모다 틀리매 金玉均 朴泳孝 徐載弼 等은 日本으로 亡命하고 開化黨의 維新計劃은 일장춘몽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를 申申政變이라 한다. 이 失敗는 결국 開化黨의 計劃이 철저치 못함과 日本公使의 無力으로 援助가 뜻대로 되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민씨 일파의 사대주의】 대원군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청국의 원조를 빌린 민씨 일파는 처음의 자립책을 버리고 사대주의를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청국의 제도를 본받아 통리 아문을 베풀고 독일 사람 목인덕을 내아문에, 청나라 사람 마건충을 외아문에 두어 각각 고문관을 삼는 동시에 청의 전권 대신 이홍장의 절제를 받게 되었다. 이어 청나라 장수 오장경, 원세개 등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경성에 와서 머무르니 마치 청국의 속국 같이 되었다.

【수구당과 독립당】 이로부터 국내에는 사대당인 수구당과 개화당인 독립당의 두 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수구당은 말할 것도 없이 청국에 의뢰하자는 사대주의파로 대개 종실과 외척(민씨)이 이에 속하고 독립당은 일본의 힘을 빌려 자주의 신국가를 만들겠다는 개화파로, 군란 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박영효 이하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이 그 파의 주요한 인물들이었다.

이들 개화독립당 인물들은 대개 나이가 젊고 기운이 팔팔한 능력이 있는 무리였으므로 매양 일본에 왕래하여 새 제도, 새 학술을 강구하는 동시에 그 신문명을 수입하여 모든 낡은 것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청국의 세력과 이를 배경으로 한 수구당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들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었으므로 먼저 수구당 일파를 때려 부셔 임금을 자기들 편으로 옮겨 올 음모를 비밀리에 행하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병력이 필요하므로 그들은 미리 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다케조에 이치로)과 비밀리에 의논하고 그 군대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우정국 사건】 그리하여 거사는 고종 21년 갑신년(국기 4217년, 서기 1884년) 11월 17일(양) 우정국(체신 사무를 맡은 관청) 낙성식이 열릴 그 때 그 장소로 정하였다. 이 낙성식에는 수구당이 중요한 인물과 기타 외국인의 고관들이 참석하게 되었으므로 혼잡한 그 틈을 타서 자객을 들여보내놓고 잔치가 한참 벌어질 판에 이웃집에 불을 질러 불이 났다고 외치자 모였던 손님들은 놀래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자객은 이때 수구당의 괴수 민영익을 찔렀으나 그는 부상당한 채로 도망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짓말로 청나라 군사들이 난을 일으켰다 하고 고종을 모시고 경우궁(지금의 휘문중학 부근)으로 옮겨 일본 군사로서 궁을 호위한 후 【개화당의 입각】 수구당의 영수인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 6인을 죽이고 그들이 꿈꾸던 신내각을 조직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병】 이튿날 왕이 창덕궁으로 돌아오고 일본 병사가 파수를 보자 수구당은 남대문 밖에 있는 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에게 군사를 이끌고 궁성에 닥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일본병과 포화를 바꾼 나머지 일본군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왕은 사관생도에게 업혀 홍영식, 박영호 등의 보호 속에 북묘로 피난하였는데 청병이 몰려와 홍영식과 박영효를 죽이고 왕을 모셔갔다. 이 난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그 거류민의 살상도 있었다. 【개화당의 일본 망명】 일이 모두 틀어지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개화당의 유신 계획은 일장춘몽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이 거사는 결국 철저하지 못했던 개화당의 계획과 일본 공사의 무력으로 원조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3. 천진조약과 러시아 세력의 발동[편집]

【漢城條約을 맺음】 이 政變이 있은 다음달에 日本은 公使舘襲擊 居留民虐殺의 責任을 묻기 爲하여 全權大使 井上馨으로 하여금 步兵 二大隊를 거느리고 京城에 들어오게 하니 政府는 크게 낭패하여 乙酉(陽) 一月 九日에 漢城條約을 맺고 겨우 解決이 되었으니 日淸 兩國兵은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天津條約】 그 해 四月에 日本政府는 伊藤博文을 全權大使로 삼아 天津에 보내어 李鴻章과 담판케 하고 드디어 四個月 안으로 日淸 兩國은 朝鮮에서 撤兵할 것과 將來 朝鮮에 軍隊를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두 나라가 서로 미리 알릴 것이라는 等을 約定하였다. 이 條約에 依하여 얼마 뒤에 兩國兵은 물러갔으나 袁世凱는 通商事務 全權委員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袁世凱의 干涉이 날로 甚하여지매 事大黨도 차츰 이를 싫어하는 경향이 생기었다.

【韓露通商條約】 前年에 露西亞는 韋貝라는 사람을 보내어 조선의 外交顧問 穆麟德의 알선으로 韓露通商條約을 맺고 (甲申) 韋貝는 이내 公使로 머무르게 되었다. 또 그는 朝鮮과 陸路通商條約을 맺고 朝鮮兩國人의 國境貿易의 自由와 또 露人을 爲하여 富寧을 開放할 것을 規定하였다. 그는 매우 재간이 있어 宮中으로 자주 出入하여 王의 사랑을 받고 朝廷에는 차츰 親露의 一派가 생기게 되니 日本과 淸國의 들어오는 힘을 막는데는 露國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英艦 巨文島 占領】 이때 露國과 매우 사이가 좋지 못한 英國은 露國의 勢力이 朝鮮에서 날로 커감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高宗 二十二年 乙酉(國紀 4218 西紀 1885)에 이르러 英國은 東洋艦隊를 보내어 全羅道의 巨文島를 占領하고 砲臺를 쌓으며 兵營을 세우는지라, 露國도 不安을 품고 朝鮮政府에 抗議를 提出하였다. 李鴻章이 중간에 들어 露國은 朝鮮 땅을 侵略하지 안는다는 保證을 세운 뒤 英國은 二十四年 丁亥에 비로소 巨文島을 내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을 두고 淸露 露英 日露 日淸의 暗鬪가 날로 심하여감을 따라 차츰 조선은 그들의 씨름터가 되어졌다.

【新文化採用】 이러는 동안 새 文化의 물결은 밀려 들어 高宗 二十一年 甲申에는 午正에 大砲를 놓아 時間을 알리고 濟衆院을 세워 新式 治療法을 베풀고 育英公院을 세워 英語를 中心으로한 洋學을 가르치고 其他 機械局(兵器廠)·典圓局(貨幣製造局)을 두어 新式兵器 新式貨幣를 만들었다.

【한성조약을 맺음】 이 정변이 있은 다음 달에 일본은 공사관 습격, 거류민 학살의 책임을 묻기 위하여 전권대사 정상형(井上馨,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병 2대대를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오게 하니 정부는 크게 낭패하여 을유년 1월 9일에 한성조약을 맺고 겨우 해결하였다. 그러나 일, 청 양국의 병사는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천진조약】 그 해 4월에 일본 정부는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전권대사로 삼아 천진에 보내어 이홍장과 담판하게 하고 드디어 4개월 안으로 일·청 양국은 조선에서 철병할 것과 장래 조선에 군대를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두 나라가 서로 미리 알릴 것 등에 관한 내용을 약정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얼마 뒤에 두 나라 병사들은 물러갔으나 원세개는 통상 사무의 전권 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의 간섭이 날로 심하여지자 사대당도 차츰 이를 싫어하는 경향이 생기었다.

【한·러 통상 조약】 전년에 러시아는 위패(韋貝)라는 사람을 조선에 보내어 조선의 외교 고문 목인덕의 알선으로 한·러 통상 조약을 맺고 위패는 이내 공사로 머무르게 되었다. 또 그는 조선과 육로 통상 조약을 맺고 조선인과 러시아인의 국경 무역의 자유와 또 러시아인을 위하여 부령을 개방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는 매우 재간이 있어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왕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차츰 친러시아 일파가 생기게 되니 일본과 청국의 힘을 막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이때 러시아와 매우 사이가 좋지 못한 영국은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서 날로 커져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고종 22년 을유년(국기 4218년, 서기 1885년)에 이르러 영국은 동양 함대를 보내어 전라도의 거문도를 점령하고 포대를 쌓으며 병영을 세웠다. 이에 러시아도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어 조선 정부에 항의를 제출하였다. 이홍장이 중간에서 러시아는 조선 땅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세운 뒤 영국은 24년 정해년에 비로소 거문도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이 조선을 두고 청나라와 러시아, 러시아와 영국,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청나라의 암투가 날로 심하여져 차츰 조선은 그들의 씨름터가 되었다.

【신문화 채용】 이러는 동안 새 문화의 물결은 밀려들어 고종 21년 갑신년에는 정오에 대포를 놓아 시간을 알리고, 제중원을 세워 신식 치료법을 베풀고, 육영공원을 세워 영어를 중심으로 한 양학을 가르치고, 기타 기계국(병기창)·전환국(화폐 제조국)을 두어 신식 병기, 신식 화폐를 만들었다.


제8장 동학란과 청일전쟁[편집]

1. 동학 교문의 운동과 동학란[편집]

앞서 崔濟愚(水雲)의 이르킨 東學敎는 虐政에 시달리는 백성의 共鳴을 얻어 崔의 死後에도 자꾸 퍼져 마침내 큰 敎圈을 이루게 되었다. 【第二世敎主崔寺亨】 즉 이때까지 숨어가며 힘을 모아오던 그들은 第二世敎主 崔時亨(海月)을 中心으로 하여 그 運動을 차츰 表面에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表面化 運動이 시작되자 敎勢는 三南(慶尙·全羅·忠淸)을 위시하여 江原 黃海 平安道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敎視伸寃運動】 이리하여 高宗 二十九年 壬辰에 海月 崔時亨은 忠北 報恩을 中心地로 하여 各處의 敎徒를 모아놓고 敎主 崔濟愚의 寃을 풀자는 의논을 決한 後 긴 上書文을 政府에 올리었다. 翌年(癸巳)에도 敎徒 朴光浩 等의 主唱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이르러 歎願하는 上疏를 올리었으나 헛되이 退却당하였다.

官吏 土豪의 행패가 말할수 없을 지경이라 참고 참던 民衆은 이 東學敎門運動에 자극되고 또 그들의 부채질에 불이 붙어 高宗 二十七年부터는 民擾가 各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 守令을 내쫒고 官衙를 불지르며 納稅를 拒否하였다. 敎主 伸寃運動에 失敗하고 報恩으로 돌아온 東學敎徒는 그 수가 날로 불고 그 形勢가 장차 不穩할 지경에 이르매 朝廷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魚允中을 宣撫使로 보내어 그 敎徒를 타일러 헤쳐보내게 하였다. 敎徒들은 宣無使의 說諭로 말미암아 한때 解散하였으나 그들의 不平은 식을 날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떠한 기틀로 그들의 團體行動이 일어날지 모르는 形便이었으며 또 이때 一般民心도 地方官의 搾取로 말미암아 極度 動徭되어 마치 불덩이를 안은 것 같은 形便이었다.

【趙秉甲의 私慾】 이때 마침 全羅道 古阜郡守로 있던 趙秉甲이 高宗 三十一年(甲午)에 萬石洑라는 「물보」를 修理하매 數萬의 人夫를 부리고 그 보ㅅ물을 받는 사람에게서 水稅를 받아 혼자 제배만 채우니 이에 백성들은 분로하여 마침내 들구 일어낫었다.

【全琫準擧兵】 그 무리 중에는 東學敎徒가 많아 全琫準이라는 이를 괴수로 삼아 敎徒와 郡民이 합하여 古阜의 軍器庫를 占領하고 亂을 일으키니 郡守 趙秉甲은 이미 도망하였다. 이것이 곧 東學亂의 시초이었다. 이 消息을 들은 全羅監司는 軍隊를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古阜 白山 싸움에서 크게 지고 그의 領兵官 李庚鎬는 戰死하였다. 【全州陷落】 이에 政府에서는 洪啓薰을 招討使로 하여 官軍을 이끌고 치게 하였으나 첫 싸움에 또한 利롭지 못하니 이에 기세를 올린 東學軍은 井邑 泰仁 金溝를 거쳐 四月 廿七日에는 全州를 陷落시키고 말았다.

이 全州 占領 當時는 東學軍의 가장 떨친 때니 全羅道는 거의 그들 손에 들어가고 京畿 忠淸 慶尙諸道의 敎徒들도 서로 應하여 官長을 죽이고 혹은 내어쫓으며 倉庫를 약탈(掠奪)하는 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招討使 洪啓薰은 全琫準의 뒤를 쫓아 全州 城外에 다달아 맹렬한 砲擊을 시작하여 東學軍의 士氣를 차차 저상케 한 후 歸順 解散하라는 宣諭를 내리었다. 全琫準測으로 보면 官軍만에 對한 抗戰이라면 더 버틸 수도 있었겠지마는 淸兵의 來援이 있다함을 알고 士氣를 일키 시작하여 드디어 招討使의 宣諭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退却하겠다는 뜻을 전한 후 全州府를 撤退하였다.

【全琫準再擧】 그러나 全捧準은 그 무리를 解散치 않고 再擧의 機會를 엿보다가 그 해(甲午) 六月에 全州다시 일어나 公州등지를 범하니 官軍이 또 나려와 여러 곳에서 激戰을 거듭한 끝에 琫準을 잡아 서울로 보내 이듬해 死刑에 處하니 그 도무리 흩어지고 말았다.

앞서 수운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교는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의 공명을 얻어 최제우의 사후에도 자꾸 퍼져 마침내 큰 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제2대 교주 최시형】 즉 이때까지 숨어가며 힘을 모아오던 그들은 제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여 그 운동을 차츰 표면에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표면화 운동이 시작되자 교세는 삼남 즉 경상·전라·충청을 위시하여 강원·황해·평안도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교조 신원 운동】 이리하여 고종 29년 임진년에 해월 최시형은 충청북도 보은을 중심지로 하여 각처의 교도를 모아놓고 교주 최제우의 원한을 풀자는 의논을 결정한 후 긴 상서문을 정부에 올렸다. 그 이듬해 즉 계사년에도 교도 박광호 등의 주창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이르러 탄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헛되이 퇴각 당하였다.

관리와 토호의 행패가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참고 참던 민중은 이 동학 교문 운동에 자극되었다. 고종 27년부터는 민요가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 수령을 내쫒고 관아에 불을 지르며 납세를 거부하였다. 교주 신원 운동에 실패하고 보은으로 돌아온 동학교도는 그 수가 날로 불고 그 형세가 장차 불온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어윤중을 선무사로 보내어 그 교도를 타일러 헤쳐 보내게 하였다. 교도들은 선무사의 설유를 듣고 한때 해산하였으나 그들의 불평은 식을 줄 몰랐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떠한 기틀로 그들의 단체행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또 이때 일반 민심도 지방관의 착취로 말미암아 극도로 동요되어 마치 불덩이를 안은 것 같은 형편이었다.

【조병갑(趙秉甲)의 사욕】 이때 마침 전라도 고부 군수로 있던 조병갑이 고종 31년 갑오년에 만석보라는 「물보」를 수리하며 수만의 인부를 부리고 그 봇물을 받는 사람에게서 수세를 받아 혼자 제 배만 채우니 이에 백성들은 분노하여 마침내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全琫準)의 거병】 그 무리 중에는 동학교도가 많아 전봉준이라는 이를 괴수로 삼아 교도와 군민이 합하여 고부의 군기고를 점령하고 난을 일으키니 군수 조병갑은 이미 도망하였다. 이것이 곧 동학란의 시초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는 군대를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고부 백산 싸움에서 크게 지고 그의 영병관 이경호는 전사하였다. 【전주 함락】 이에 정부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하여 관군을 이끌고 치게 하였으나 첫 싸움에 또한 이롭지 못하였다. 이에 기세를 올린 동학군은 정읍, 태인, 금구를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를 함락시키고 말았다.

이 전주 점령 당시는 동학군이 가장 위세를 떨친 때니 전라도는 거의 그들 손에 들어갔다. 경기, 충청, 경상 등 여러 도의 교도들도 서로 응하여 관장을 죽이고 혹은 내쫓으며 창고를 약탈하는 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초토사 홍계훈은 전봉준의 뒤를 쫓아 전주의 성 밖에 다다라 맹렬한 포격을 시작하여 동학군의 사기를 차차 저하시킨 후 귀순, 해산하라는 선유를 내렸다. 전봉준 측에서 보면 관군에 대한 항전이라면 더 버틸 수도 있었지만 청병이 와서 도와준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를 잃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초토사의 선유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퇴각하겠다는 뜻을 전한 후 전주부에서 철수하여 물러났다.

【전봉준의 재봉기】 그러나 전봉준은 그 무리를 해산하지 않고 재봉기의 기회를 엿보다가 그 해(갑오년) 6월에 전주에서 다시 일어나 공주 등지를 범하였다. 이에 관군이 또 내려와 여러 곳에서 격전을 거듭한 끝에 전봉준을 잡아 서울로 보내 이듬해 사형에 처하니 그 무리도 흩어지고 말았다.


2.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편집]

【淸兵來駐】 앞서 東學亂이 일어나자 政府는 淸國에 援兵을 請하였으므로 淸將 葉志超는 六千의 군사를 거느리고 高宗 三十一年 六月에 牙山灣에 上陸하였으며 【日兵來駐】 日本도 天津條約에 依하여 또한 軍艦 七隻과 陸兵 八千으로 仁川에 上陸하여 그 중 一千四百名이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淸日 두나라 사이에 朝鮮 問題를 걸고 交涉 折衝이 있었으나 마침내 깨어지고 그 해 七月 二十 七日에 淸國軍艦이 日本軍艦에세 砲火를 퍼부음으로 부터 淸日戰爭은 시작되었다. 戰爭은 海陸에서 모두 淸軍에게 不利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주둔】 앞서 동학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청국에 원병을 청하였으므로 청나라 장수 섭지초(葉志超)는 6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종 31년 6월에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일본 군대의 주둔】 일본도 천진 조약에 의하여 군함 7척과 육군 8천으로 인천에 상륙하여 그 중 1천 4백 명이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청·일 두 나라 사이에 조선 문제를 두고 교섭과 절충이 있었으나 마침내 깨어지고 그해 7월 27일에 청국 군함이 일본 군함에 포화를 퍼부음으로써 청일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은 해상과 육상에서 모두 청군에게 불리하였다.


제9장 갑오경장과 나라의 새로운 체제[편집]

1. 갑오경장[편집]

【開化黨組閣】 淸日戰爭이 터지자 形勢 利롭지 못함을 안 袁世凱는 가만이 歸國하여 버리고 守舊黨의 勢力이 또한 수그러지기 시작하니 開化黨의 一派는 다시 大院君을 받들고 일어나 모든 守舊黨을 몰아낸 뒤 金弘集을 首班으로 革新內閣을 세웠다. 淸國과 맺은 모든 條約을 버리고 그 宗主權을 否認하며 開國 紀年을 쓰는 등 獨立國家로서의 面目을 갖후게 되었다.

【官制改革】 먼저 官制를 改革하여 宮內 議政의 二府와 內務, 外務, 度支, 軍務, 法務, 學務, 工務, 農商務의 八衙門을 두며 다시 內政의 改造에 着手하여 勅令으로 寡婦의 다시 시집감을 許하며 嫡子와 庶子의 差別을 없이 하며 奴婢賣買들 禁하고 賤民을 虐待에서 解放하였으니 이를 甲午更張이라 부른다. 이 勅命은 일반 百姓에게는 대단히 好感을 주었으나 완고한 兩班들은 퍽 조와하지 않았다. 그 해 十月 下旬에 井上馨이 새로 全權大使가 되어 와서 大院君이 東學黨을 부채질함을 나물하므로 부득이 大院君은 다시 隱退하고 日本亡命에서 돌아온 朴泳孝 徐光範 등을 넣어 온전히 改革黨(開化黨)으로만 內閣을 組織하게 되었다. (首相은 역시 金弘集)

【下關條約】 그동안 淸日戰爭은 牙山灣과 成歡과 平壤戰에서 淸軍이 大敗하고 그 뒤 旅順과 威海威가 陷落되매 淸國은 和議를 提出하여 李鴻章과 伊藤博文이 下關에서 條約을 맺고 싸움을 끝였는데 그 條約에 依하여 朝鮮의 獨立을 完全히 承認하고 淸國은 遼東半島를 日本에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日本이 遼東半島를 가짐은 東洋平和 攪亂의 禍根이 된다 하여 露·佛·獨三國의 威壓的 干涉으로 도루 淸國에 돌려보내게 되니 이에 朝鮮政府는 日本의 弱함을 알고 親露的 傾向을 띄우게 되었다. 【親露派組閣】 이때 마침 朴泳孝 一派가 逆名을 쓰고 日本으로 亡命하매 親日派의 改革黨을 一掃하고 親露派를 重用한 第三次 金弘集內閣이 서게 되었다.

【乙未事變】 이에 분개한 改革黨은 日本 浪人들과 더불어 숨어있는 大院君을 움지기게 하여 【閔妃殺害】 高宗 三十二年 乙未(國紀 4228 西紀 1895) 八月 廿日 새벽에 景福宮에 들어가 王에게 請하여 親露派를 내쫓고 王妃閔氏를 죽이니 이것이 乙未事變이라는 것이다.

이 政變이 있은 뒤 새 內閣에서는 모든 改革에 손을 대이니 이듬해 陰曆에 대신하여 陽曆을 쓰고 種痘法을 施行하며 郵便을 開始하고 建陽이라는 年號를 세우며 또 斷髮令을 내리우고 王이 먼저 模範을 보이었다. 그러나 閔妃의 變과 斷髮令은 民心을 크게 흔들어 여러 곳에서 民亂이 일어나므로 親衛隊의 태반을 地方에 보내어 民亂을 討平케 하니 親露派와 露國公使는 이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露國 水兵 百名을 仁川으로부터 入京시켜 【俄舘播遷】 이 해 二月에 王과 王世好를 俄舘(露國公使舘)으로 모시어 所謂「俄舘播遷」을 敢行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首相 金弘集과 農商工相 鄭秉夏는 景福宮으로 달려가다가 民衆에게 맞아죽고 度支大臣 魚允中도 鄕里로 가는 도중에 맞아죽었으며 그밖에 大臣들은 모두 日本으로 亡命하니 朝鮮은 온전히 親露派의 독차지가 되었다.

【大韓國號】 王은 一年 뒤에 慶運宮(今 德壽宮)에 듭시고 年號를 光武로 갈로 國號를 大韓이라 定하며 그 해 十月 十二日에 皇帝卽位式을 擧行하였다.(國紀 4230 西紀 1897) 改革이 되자 새로운 空氣가 넘치기 시작하여 鍾路네거리에는 數萬의 群衆을 모이고 政府를 攻擊하여 民衆을 啓蒙하는 勢辯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獨立協會 設立】 이들은 앞서 建陽元年 가을에 米國서 돌아온 徐載弼을 中心으로 한 獨立協會의 鬪士들이었다. 國文과 英文으로 獨立新聞을 發刊하며 지난날 中國의 使臣을 맞아들이던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는 등 차차로 自主的 氣勢를 보이게 되었다. 【皇國協會對立】 獨立協會는 모든 것을 通하여 現政府를 배척하므로 政府에서는 洪鍾宇 李基東 등을 시켜 皇國協會라는 것을 組織케 하여 前者를 누르고저 八道에 行商하는 褓負商(大組織體 商人團) 數千人을 끓어들여 西大門에서 獨立協會와 衝突케 하니 양쪽에 많은 死傷者를 내었다. 興奮한 民衆은 李基東 外 大官들의 집을 쳐 부시고 소동을 일으키니 마침내 皇帝는 內閣을 갈게 하고 대궐문에 나서서 維新을 面約하므로 비로소 大衆은 흩어졌다.

【개화당의 조각(組閣)】 청일전쟁이 터지자 형세가 이롭지 못함을 안 원세개는 가만히 귀국하여 버리니 수구당의 세력이 수그러지게 되었다. 이때 개화당의 일파는 다시 대원군을 받들고 일어나 모든 수구당을 몰아낸 뒤 김홍집을 수반으로 혁신 내각을 세웠다.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버리고 그 종주권을 부인하며 개국 기년을 쓰는 등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관제 개혁】 그들은 먼저 관제를 개혁하여 궁내부와 의정부의 2부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무의 8아문을 두어 다시 내정의 개조에 착수하였다. 칙령으로 과부의 재혼을 허하였으며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없앴으며 노비 매매를 금하고 천민을 학대에서 해방하였으니 이를 갑오경장이라 부른다. 이 칙명은 일반 백성에게는 대단히 호감을 주었으나 완고한 양반들은 퍽 좋아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하순에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새로 전권 대사가 되어서 대원군이 동학당을 부채질한 것을 나무랐다. 부득이 대원군은 다시 은퇴하고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서광범 등을 넣어 온전히 개혁당(개화당)으로만 내각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 내각의 수상은 김홍집이다.

【하관(시모노세키) 조약】 그동안 청일전쟁은 아산만과 성환과 평양전에서 청군이 대패하고 그 뒤 여순과 위해위가 함락되자 청국은 화의를 제출하여 이홍장과 이등박문이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맺고 싸움을 끝냈다. 그 조약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완전히 승인하고 청국은 요동반도를 일본에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요동 반도를 가지면 동양 평화 교란의 화근이 된다 하여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의 위압적 간섭으로 도로 청국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약함을 알고 친러시아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친러파 조각】 이때 마침 박영효 일파가 반역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자 친일파의 개혁당을 일소하고 친로파를 중용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서게 되었다.

【을미사변】 이에 분개한 개혁당은 일본 낭인들과 더불어 숨어있는 대원군을 움직이게 하여 【민비 시해】 고종 32년 을미년(국기 4228년, 서기 1895년) 8월 20일 새벽에 경복궁에 들어가 왕에게 청하여 친러파를 내쫓고 왕비 민씨를 죽이니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이 정변이 있은 뒤 새 내각에서는 모든 개혁에 손을 대었다. 이듬해 음력 대신 양력을 쓰고 종두법을 시행하며 우편을 개시하고 건양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또 단발령을 내리고 왕이 먼저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민비의 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므로 친위대의 태반을 지방에 보내어 민란을 토평하게 하였다.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는 이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러시아 수병 100명을 인천으로부터 입경시켜 【아관파천】 이 해 2월에 왕과 왕세자를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어 이른바「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수상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경복궁으로 달려가다가 민중에게 맞아죽고 탁지부 대신 어윤중도 향리로 가는 도중에 맞아죽었으며 그 밖의 대신들은 모두 일본으로 망명하니 조선은 온전히 친러파의 독차지가 되었다.

【대한 국호】 왕은 1년 뒤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들어가 연호를 광무로 갈고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였으며, 그 해 10월 12일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국기 4230년, 서기 1897년) 개혁이 되자 새로운 공기가 넘치기 시작하여 종로 네거리에는 수만의 군중을 모아서 정부를 공격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립협회 설립】 이들은 앞서 건양 원년 가을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의 투사들이었다. 국문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지난날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등 차차로 자주적 기세를 보이게 되었다. 【황국협회의 대립】 독립협회는 모든 것을 통하여 현 정부를 배척하므로 정부에서는 홍종우, 이기동 등을 시켜 황국협회라는 것을 조직하게 하여 독립협회를 누르고자 8도에 행상하는 보부상(대조직체 상인단) 수천 명을 끌어들여 서대문에서 독립협회와 충돌하게 하니 양쪽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흥분한 민중은 이기동 외에 대관들의 집을 쳐부수고 소동을 일으키니 마침내 황제는 내각을 갈게 하고 대궐문에 나서서 유신을 직접 약속하여 대중을 흩어지게 하였다.


제10장 러시아 세력의 남진과 러일전쟁[편집]

1. 러시아 세력의 남진[편집]

앞서 露國은 淸日戰爭에서 日本이 얻게 된 遼東半島를 淸國으로 돌려주게 한 후 淸國과 비밀히 條約을 맺고 日本을 共同의 敵으로 하는 同時에 露日이 戰爭을 일으킬 때에는 淸國은 온갓 힘을 들어 露國을 도운 것을 約束하고 또 淸國은 露國이 滿洲에 鐵道를 놓을 權利와 旅順 大連을 二十 五年間 使用할 權利(租借權)를 承認하였다.

【露國野心】 이때 露國의 野心은 滿洲에다 勢力의 뿌리를 박으려 할뿐더러 우리 半島에까지도 손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光武 四年 庚子(國紀 4233 西紀 1900)에 淸國에는 義和團의 亂이 일어나 外國人을 배척하고 殺害하매 露國은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北京에 出兵하고 한편으로 東淸鐵道 保護의 명목으로 大兵을 滿洲에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亂이 平定되어 各國이 모두 철병하되 露國만은 이에 應치 아니하고 도리어 旅順의 防備를 嚴히 하고 軍艦을 增派하며 그곳에 總督府를 두고 極東의 外交 行政 軍事를 맡아보게 하였다.

【龍巖浦施設】 露國의 計劃과 策略은 나날이 進涉하여 드디어 우리 半島에까지 손을 뻐치어 鴨綠江口에 있는 龍岩浦에다 廣大한 土地를 사들여 집을 짓고 군사를 보내는 등 모든 준비를 갖훈 후에는 마침내 우리 政府에 對하여 그곳의 租借를 要求하여 오게까지 되었다.

앞서 러시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얻게 된 요동반도를 청국으로 돌려주게 한 후 청국과 비밀히 조약을 맺고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동시에 러·일이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청국은 온갖 힘을 들여 러시아를 도울 것을 약속하였다. 또 청국은 러시아가 만주에 철도를 놓을 권리와 여순, 대련을 25년 간 사용할 권리(조차권)를 승인하였다.

【러시아의 야심】 이때 러시아의 야심은 만주에다 세력의 뿌리를 박으려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반도에까지도 손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광무 4년 경자년(국기 4233년, 서기 1900년)에 청국에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하고 살해하자 러시아는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북경에 출병하고 한편으로 동청 철도(東淸鐵道) 보호의 명목으로 대병을 만주에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난이 평정되어 각국이 모두 철병하였으나 러시아만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여순의 방비를 엄히 하고 군함을 증파하며 그곳에 총독부를 두어 극동의 외교, 행정, 군사를 맡게 하였다.

【용암포 시설】 러시아의 계획과 책략은 나날이 진보하여 드디어 우리 반도에까지 손을 뻗치어 압록강 입구에 있는 용암포에다 광대한 토지를 사들여 집을 짓고 군사를 보내는 등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그 후 마침내 우리 정부에 대하여 그곳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2. 러·일의 개전과 한일 간의 제협정[편집]

【露日開戰】 이러한 露國의 壓力은 韓國 自身에게 痛感을 주는 것보다도 韓國과 큰 利害關係를 가지고 있던 日本에게 더 큰 두려움을 주게 되어 露日間에 여러 번 交涉과 談判이 벌어지더니 그것이 깨어지매 두 나라의 國交는 끊어지고 光武 八年 二月(國紀 4237 西紀 1904)에 이르러 開戰하게 되었다.

【韓日議定書成立】 이에 對하여 우리 政府는 처음 中立을 宣言하였으나 日軍이 몰려 들어와 많은 땅을 軍用으로 占據하고 마침내 韓日間에 議定書를 成立케 하여 韓國의 獨立과 領土의 保證, 施設 改善의 勸告, 軍用地 使用 等 條件을 承認케 하니 먼저 韓露間에 맺인 모든 條約은 無效케 되었다. 이것은 물론 日本의 要請으로 된 것이어니와 日本은 계속하여 韓國 沿岸의 漁業權과 航行權을 얻게 되고 또 荒蕪地의 開墾權조차 얻으려 하다가 民衆의 反對로 因하여 成功치 못하였다. 그 해 八月에 이르러 日本側 要求에 依하여 韓日間에 第一次 協約이 맺어지니 이것은 日本 政府가 차차 韓國의 財政과 外交 其他 모든 것에 干涉하려는 것으로 그의 보낸 顧問官이 方面에 두어지게 되었다.

【講和條的】 露日의 戰爭은 旅順의 함락으로 日本의 勝利로 돌아가 그 結果 講和條約이 맺어지니 이 條約에서 日本은 韓國의 政治 軍事 經濟 等에 있어서 모든 特殊權益을 차지할 것이 承認되니 淸·露·日 三國이 오래 두고 노리던 韓國은 이제야 日本의 독차지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러일전쟁】 이러한 러시아의 압력은 한국 자신이 통감하는 것보다도 한국과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일본이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어 러·일 사이에 여러 번 교섭과 담판이 벌어지더니 깨어지고 말았다. 두 나라의 국교는 끊어지고 광무 8년(국기 4237년, 서기 1904년) 2월에 이르러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일 의정서 성립】 이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처음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 군대가 몰려 들어와 많은 땅을 군용으로 점거하고 마침내 한일 간에 의정서를 성립하게 하여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증, 시설 개선의 권고, 군용지 사용 등 조건을 승인하게 하니 먼저 한·러 간에 맺은 모든 조약은 무효하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일본의 요청으로 된 것이지만 일본은 계속하여 한국 연안의 어업권과 항행권을 얻게 되고 또 황무지의 개간권조차 얻으려 하다가 민중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해 8월에 일본 측 요구에 의하여 한일 간에 제1차 협약이 맺어졌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차차 한국의 재정과 외교 기타 모든 것에 간섭하려는 것으로 그들이 보낸 고문관을 그 방면에 두었다.

【강화 조약】 러·일의 전쟁은 여순의 함락으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그 결과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의 정치, 군사, 경제 등 모든 특수권익을 차지할 것이 승인되었으니 청·러·일 삼국이 오래 두고 노리던 한국은 일본의 독차지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제11장 한·일 협약과 의병[편집]

【第二次韓日協約】 戰後의 日本은 더욱 侵略의 거문 손을 내밀어 韓國에 있어서의 모든 權利를 뺏는 첫 일로 먼저 重要한 外交權을 걷우려 하여 光武 九年 十一月에 伊藤博文이 건너와 第二次의 協約案을 제출하니 처음에는 쉽사리 허락치 아니하였으나 그의 要求가 여러 차례 거듭하는 동안에 同月 十七日에 이르러 마침내 協約이 成立 調印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第二次 韓日協約으로 乙巳條約 或은 保護修約이라 하는 것이니 그 內容은 韓國 外交權의 接收, 日本統監의 駐在, 韓國皇室의 安寧維持의 保證 따위였다.

【國民激憤】 이 協約이 發表되자 民心은 크게 騷動되어 愛國的 演說會가 끊이지 않고 義憤에 불탄 나머지 侍從武官長 閔泳煥 같은 이는 國民에는 告하는 遺書를 남기고 自殺하였으며 其外 特進官 趙秉世 以下 京鄕 各地에서 원통함을 못 이겨 自決하는 이가 많았다.

 【參考】忠正公 閔泳煥 遺書(原文 漢文)

 -同胞에게 告함-

아, 우리 나라 우리 民族의 恥辱이 이 지경에까지 다달았고나. 生存競爭이 甚한 이 세상에 우리 民族의 運命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原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서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泳煥은 한죽엄으로 써 皇恩을 갚고 우리 二千萬 同胞에게 謝하려 한다. 泳煥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黃泉에서 여러분을 돕고저 한다. 바라건대 우리 同胞兄弟여! 千萬倍나 奮勵를 더하여 志氣를 굳게 갖고 學問에 힘쓰며 맘과 맘을 合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의 自由獨立을 회복 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地下에서 기꺼히 웃겠다. 아! 조금이라도 失望하지 말라. 大韓帝國 二千萬 同胞에게 마즈막으로 告한다.

【統監府設置】 이리하여 그 해 十二月 二十日에 日本은 서울에 統監府를 두고 長谷川好道가 臨時代理로 있더니 이듬해 三月에 伊藤博文이 첫 統監으로 왔다.

【義兵】 이와 前後하여 民族的 義憤은 불꽃과 같이 치밀어 國內 여러 곳에서 義兵을 일으키어 日本人에 對한 反抗運動을 開始한 義士가 많았으니 그 中 閔宗植 崔益鉉 申乭石 等은 가장 著名한 이로 서로 呼應하여 한 때 놀라운 氣勢를 보이었으나 후에 形勢 不利하게 되어 모두 잡히어 拘禁 혹은 귀양과 죽엄을 당하였다.

【一進會】 앞서 日本의 勢力이 커지매 이에 흡쓸여 들어가 私利를 채우려는 賣國奴도 있어 宋秉畯 尹始炳 같은 자는 維新會라는 것을 만들고 東學敎徒의 一人인 李容九를 달래어 그의 進步會와 합하여 一進會라 이름짓고 日本의 走句노릇을 하였는데 그들은 이 保護條約 체결 전부터 이미 韓國은 日本의 保護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發表하기까지 하였다. 【天道敎】 一進會가 이와 같은 意見을 發表하자 日本에 가 있던 東學 首領 孫秉熙는 곧 서울로 돌아와 李容九와 손을 끓고 天道敎를 일으키니 이로부터 東學正統은 天道敎라는 이름으로 發展하고 李容九는 따로 侍天敎를 일으키어 前者와 對立하였다.

【제2차 한·일 협약】 전후의 일본은 더욱 침략의 검은 손을 내밀어 한국의 모든 권리를 뺏는 첫 번째 일로 중요한 외교권을 거두려 하였다. 광무 9년 11월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건너와 제2차의 협약안을 제출하니 처음에는 쉽사리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요구가 여러 차례 거듭하는 동안에 동월 17일에 이르러 마침내 협약이 성립되고 조인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으로 을사조약 혹은 보호조약이라 하는 것이니, 그 내용은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의 주재, 한국 황실의 안녕 유지의 보증 따위였다.

【국민의 격분】 이 협약이 발표되자 민심은 크게 소동이 나서 애국적 연설회가 끊이지 않고 의분에 불탄 나머지 시종 무관장 민영환 같은 이는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으며 그 외 특진관 조병세 이하 경향 각지에서 원통함을 못 이겨 자결하는 이가 많았다.

 【참고】 충정공 민영환 유서[원문은 한문]

 - 동포에게 고함 -

아,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다다랐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민영환은 한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민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 배나 분려를 더하여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여라.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다. 아! 조금이라도 실망하지 말라.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

【통감부 설치】 이리하여 그 해 12월 20일에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임시 대리로 있더니 이듬해 3월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첫 통감으로 왔다.

【의병】 이와 전후하여 민족적 의분은 불꽃과 같이 치밀어 국내 여러 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에 대한 반항 운동을 개시한 의사가 많았다. 그 중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은 가장 저명한 사람으로 서로 호응하여 한때 놀라운 기세를 보였으나 후에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모두 잡혀 구금 혹은 귀양과 죽음을 당하였다.

【일진회(一進會)】 앞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이에 휩쓸려 사리를 채우려는 매국노도 있었다. 송병준, 윤시병 같은 자는 유신회라는 것을 만들고 동학교도의 한 사람인 이용구를 달래어 그의 진보회와 합하여 일진회라 이름 짓고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였다. 그들은 이 보호조약 체결 전부터 이미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천도교(天道敎)】 일진회가 이와 같은 의견을 발표하자 일본에 가 있던 동학 영수 손병희는 곧 서울로 돌아와 이용구와 손을 끓고 천도교를 일으키니 이로 부터 동학 정통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발전하고 이용구는 따로 시천교를 일으켜 천도교와 대립하였다.


제12장 민중의 자각과 새 운동[편집]

【政治學術團體亂立】 國內 한편에는 一進會와 같은 賣國奴的 反逆分子의 준동(蠢動)도 있었지마는 다른 한편에는 참된 民族的 意識과 自覺에서 불타오른 여러 가지의 새 運動이 마치 비 끝에 대순과 같이 일어났다. 政治團體로는 憲政硏究會 大韓自彊會 大韓協會 등이 前後하여 생기고 敎育文化團體로는 國民敎育會 興士團 靑年會 및 地方名을 띠운 各 學會 ─ 즉 西北學會(平安·黃海·咸鏡) 畿湖學會(京畿·忠淸) 湖南學會(全羅) 嶠南學會(慶尙) 關東學會(江原)의 諸 學會 ─ 가 생기어 民衆의 新敎育과 啓蒙運動에 많은 貢獻을 하였다. 이러한 各 地方學會는 본래 學術을 위주함 보다도 地方的 色彩를 띄고 있었으므로 각기 勢力 다툼에 분주하여 對立과 暗鬪가 繼續되어 나쁜 影響을 社會에 끼침이 적지 않았다.

【學校設立】 그러나 民間의 敎育熱은 이러한 團體의 일어남을 따라 더욱 높아져 서울 시골을 물론하고 無數한 私立學校가 前後하여 세워졌으니 오늘 서울의 普成 養正 徽文의 諸 男子學校와 進明 叔明의 두 女學校는 다 이때에 시작된 것이며 (培材 梨花의 두 男女學校는 이보담 오래전에 宣敎師들의 손으로 세운 것) 地方學校로는 平壤의 大成學校 江華의 普昌學校 等이 한때 이름을 날리었다.

【獨立新聞發刊】 言論機關으로는 建陽 元年 丙申(國紀 4229 西紀1896)에 徐載弼이 美國으로부터 돌아와서 創刊한 獨立新聞이 조선 신문의 처음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皇城新聞 等이 나와 모두 韓國의 獨立을 强調하고 日本의 政策을 攻擊하였고, 그 후 大韓每日申報도 發刊되어 排日思想을 북도다 주었다. 이 每日申報는 英國人 裵說과 梁起鐸이 시작한 것으로 오늘의 「서울신문」의 始祖가 되거니와 어떻게 심히 排目을 부르짖었든지 統監府는 英本國에 交涉하여 그를 上海로 逐放하였으나 그 뒤에도 梁起鐸이 中心되어 더욱 붓 끝을 날카롭게 하여 이를 계속하였다.

【國文普及】 自覺的 文化運動 結果로 또 新文體와 國文으로된 雜誌와 書籍이 이어 나오고 新小說이 出版되었으며 外國文學의 번역도 몇 가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말과 歷史에 대한 새로운 硏究를 하는 學者도 나오게 되어 오늘의 語文整理와 歷史硏究에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정치 학술 단체의 난립】 국내의 한편에는 일진회와 같은 매국노적 반역분자 준동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참된 민족적 의식과 자각에서 불타오른 여러 가지의 새 운동이 마치 비 끝의 대순과 같이 일어났다. 정치단체로는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이 전후하여 생기고 교육 문화 단체로는 국민교육회, 흥사단, 청년회 및 지방명을 띤 각 학회 즉 서북학회(평안·황해·함경), 기호학회(경기·충청), 호남학회(전라), 교남학회(경상), 관동학회(강원)의 여러 학회가 생겨 민중의 신교육과 계몽운동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각 지방학회는 본래 학술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지방적 색채를 띠고 있었으므로 각기 세력 다툼에 분주하여 대립과 암투가 계속되어 나쁜 영향을 사회에 끼침이 적지 않았다.

【학교의 설립】 그러나 민간의 교육열은 이러한 단체가 일어남에 따라 서울 시골을 물론하고 무수한 사립학교가 세워졌으니 오늘날 서울의 보성, 양정, 휘문의 여러 남자 학교와 진명, 숙명의 두 여학교는 다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 배재, 이화의 두 남녀 학교는 이보다 오래 전에 선교사들의 손으로 세운 것이다. 지방 학교로는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의 보창학교 등이 한때 이름을 날렸다.

【독립신문 발간】 언론 기관으로는 건양 원년 병신년(국기 4229, 서기 1896년)에 서재필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창간한 독립신문이 조선신문의 처음이었다. 그 뒤를 이어 황성신문 등이 나와 모두 한국의 독립을 강조하고 일본의 정책을 공격하였고, 그 후 대한매일신보도 발간되어 배일 사상을 북돋아 주었다. 이 매일신보는 영국인 배설과 양기탁이 시작한 것으로 오늘의 「서울신문」의 시조가 되었다. 이 신문은 어떻게나 심히 배일을 부르짖었는지 통감부는 영국과 교섭하여 배설을 상해로 쫓아내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양기탁이 중심이 되어 더욱 붓 끝을 날카롭게 하여 이를 계속하였다.

【국문 보급】 자각적 문화 운동의 결과로 또 신문체와 국문으로 된 잡지와 서적이 이어 나오고 신소설이 출판되었으며 외국 문학의 번역도 몇 가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하는 학자도 나오게 되어 오늘의 어문 정리와 역사 연구에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제13장 한국의 마지막[편집]

【하-그密使事件】 保護條約이 맺어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憤死한 이와 혹은 義兵을 일으켜 反抗하다가 壯烈한 죽엄을 한 사람도 있었거니와 그보다 이 딱한 事情을 國際 列强 앞에 呼訴하고자 때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光武 十 一年 六月(國紀 439 西紀 1907) 和蘭의 서울「하-그」(海牙)에서 열리는 第二回萬國平和會議에 參加하려고 가만이 皇帝의 親書와 信任狀을 몸에 품고 나타난 세 사람의 韓國密使가 있었으니 그는 前 議政府 參贊 李相卨, 前 判事 李儁(준), 露國公使舘書記 李瑋鍾이었다. 즉 이 세 사람은 그곳에 突然히 나타나 (列强의 힘을 빌어 日本의 勢力을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려 하여) 皇帝의 密書를 제출하고 會議에 참석하기를 要求하였다. 平和會議 議長은 韓國은 이미 日本의 保護國이 되어 外交權을 喪失하였으니 참가할 資格이 없다 하여 拒絶을 하였다. 이에 密使는 韓國과 日本과의 사이에 맺어진 保護條約은 全혀 日本의 협박에 依한 것으로 韓國 皇帝의 참뜻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力說하였으나 역시 참석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李儁의 自殺】 密使는 어디까지라도 歐洲列强의 여론을 일으키어 그 힘에 依하여 日本의 保護를 벗으려고 某某國 親聞記者들을 움지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오래동안 애써오던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매 密使의 一人인 李儁은 義憤에 못이겨 가졌던 短刀로 자기의 배를 갈러 스스로 죽고 말았다.

이 密使事件이 日本에 알려지매 日本의 朝野는 크게 놀래어 統監 伊藤博文을 통하여 韓國政府에 質問을 發하였다. 高宗은 일부러 그런 일이 없다 하였고 總理大臣 李完用도 內閣에서는 원래 아지 못하는 일이라 하여 될수록 責任을 회피하려 하였다. 伊藤은 密使派遣이 勅命에 依한 것이란 證據를 보이며 점점 강경한 태도로 臨하니 政府 各 大臣은 事態가 容易치 안함을 알고 궐내에 들어가 御前會議를 열기도 하고 또는 連日 內閣會議를 거듭하여 善後策을 강구한 結果 高宗의 讓位를 江行함이 適當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各 大臣은 高宗께 謁見하고 讓位의 부득이 함을 알왼바 高宗은 매우 怒한 빛을 띄어 허락치 아니 하더니 그 후 신하들의 懇請에 못 이겨 마침내 位를 皇太子(純宗)에게 내리고 讓位反對派인 朴泳孝·宋台觀들은 濟州島와 珍島로 流配했다. 【高宗退位】 光武 十一年 七月 十九日 讓位의 詔書가 나리니 人心은 극히 험악하여져 그 날 밤에 一進會의 新聞社가 부서지고 典洞의 侍衛隊兵이 나와 日本人을 襲擊하고 격분한 民衆은 이곳저곳에서 日人과 衝突하였다.

이 해 八月 二日에 光武 年號를 隆熙로 고치고 二十七日에 卽位式이 擧行되었으나 실제 讓位는 七月 二十日이었으며 그 후 四日에 日本과 새 協約을 맺고 이어 全國의 軍隊를 解散하였다. 【軍隊解散】 八月 一日에 軍隊解散式이 訓鍊院에서 擧行될새 西小門內 兵營에 있던 侍衛步兵 第一聯隊 第一大隊 隊長 朴性煥이 自殺하자 곧 소동을 일으키니 第二聯隊가 이에 應하여 日本軍隊와 한참동안 交戰하다가 겨우 진정되었다. 그러나 解散을 當한 京鄕의 군인들은 前日의 義兵과 合流하여 地方 이곳저곳에서 소란을 일으켜 五年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 뒤 情勢는 날로 急轉惡化하여 갈뿐으로 隆熙 二年 二月에는 外交顧問 美國人 須知分이 歸國하여 美國「샌푸란시스코」에서 日本保護政治에 對한 讚辭를 新聞에 썼다가 在留韓人 田明雲 張仁煥에게 拳銃으로 射殺을 당하고 【伊藤博文暗殺】 이듬해 十月 二十六日에는 前統監 伊藤博文이 露國藏相「코코프체프」와 만나려고「하르빈」(哈爾濱)에 도착하였을 때 驛頭에서 우리의 義士(信川人) 安重根의 拳銃에 맞아 卽死하고 重根은 잡히여 이듬해 二月 七日 旅順에서 三十二歲를 一期로 絞首臺위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擧事는 실로 義로워 世人의 맘을 통쾌케 하였다.

隆熙 三年 十二月에 一進會 會長 李容九는 日本과의 合邦이 좋다는 意見을 政府에 建白하였다가 大韓協會 興土團 등의 蹶起로 形勢 험하더니 統監府는 이를 抑制키 爲하여 兩派에게 意見의 發表를 一切 못하게 하였다. 同年 十二月에 李完用은 明洞 天主敎會堂에서 擧行된 白耳義 皇帝의 追悼式에 갔다가 나올 때에 문앞에서 平壤人 李在明이라는 二十三歲의 靑年에게 칼을 맞아 負傷을 當하고 李在明은 裁判後 死刑에 處하였다.

【韓日合倂】 그 이듬해 八月 二十一日에 寺內正毅와 李完用 사이에 비밀히 進行하던 韓日合倂案이 成立되어 御前會議를 거쳐 八月 二十九日에 條約이 發表되고 詔書가 내리니 朝鮮은 太祖 建國으로부터 二十七世 五百 十九年만에 나라를 잃고 우리 半島 江山은 殘惡한 日本 帝國主義의 植民地로 化하여 갖은 壓迫을 받게 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보호조약이 맺어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분사한 이와 혹은 의병을 일으켜 반항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한 사람도 있었고 그보다 이 딱한 사정을 국제 열강 앞에 호소하고 제때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광무 11년(국기 4239년, 서기 1907년) 6월에 화란의 서울「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려고 가만히 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몸에 품고 나타난 세 사람의 한국 밀사가 있었으니 그는 전 의정부 참찬 이상과 전 판사 이준,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이었다. 즉 이 세 사람은 그곳에 돌연히 나타나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의 밀서를 제출하고 회의에 참석하기를 요구하였다. 평화회의 의장은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외교권을 상실하였으니 참가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절을 하였다. 이에 밀사는 한국과 일본과 맺어진 보호조약은 전혀 일본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한국 황제의 참뜻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으나 역시 참석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준의 자살】 밀사는 어디까지라도 구주 열강의 여론을 일으켜 그 힘에 의하여 일본의 보호를 벗으려고 모모국 신문기자들을 움직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애써오던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되자 밀사의 한 사람인 이준은 의분에 못 이겨 가지고 있던 단도로 자기의 배를 갈라 스스로 죽고 말았다.

이 밀사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조야는 크게 놀라 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통하여 한국 정부에 질문을 발하였다. 고종은 일부러 그런 일이 없다 하였고 총리대신 이완용도 내각에서는 원래 알지 못하는 일이라 하여 될수록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다. 이등은 밀사 파견이 칙명에 의한 것이란 증거를 보이며 점점 강경한 태도로 임하니 정부 각 대신은 사태가 쉽지 않음을 알고 궐내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기도 하고 또는 연일 내각회의를 거듭하여 선후책을 강구한 결과 고종의 양위를 결행함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각 대신은 고종께 알현하고 양위의 부득이 함을 아뢰니 고종은 매우 노한 빛을 띠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왕위를 황태자(순종)에게 내리고 양위 반대파인 박영효·송태관을 제주도와 진도로 유배했다. 【고종의 퇴위】 광무 11년 7월 19일 양위의 조서가 내리니 인심은 극히 험악하여져서 그날 밤에 일진회의 신문사가 부서지고 전동의 시위대병이 나와 일본인을 습격하고 격분한 민중은 이곳저곳에서 일본 사람과 충돌하였다.

이 해 8월 2일에 광무 연호를 융희로 고치고 27일에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실제 양위는 7월 20일이었으며 그 후 4일에 일본과 새 협약을 맺고 이어 전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군대 해산】 8월 1일에 군대 해산식이 훈련원에서 거행되자 서소문 내 병영에 있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대장 박성환이 자살하였다. 이에 소동이 일어나 제2연대가 이에 응하여 일본 군대와 한참동안 교전하다가 겨우 진정되었다. 그러나 해산을 당한 서울과 지방의 군인들은 전일의 의병과 합류하여 지방 이곳저곳에서 소란을 일으켜 5년 동안이나 계속 저항하였다.

그 뒤 정세는 날로 급전되어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융희 2년 2월에는 외교고문 미국인 수지분(須知分)이 귀국하여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보호정치에 대한 찬사를 신문에 썼다가 재류 한인 전명운과 장인환에게 권총으로 사살을 당하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듬해 10월 26일에는 전 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러시아 장상 「코코프체프」와 만나려고「하얼빈」에 도착하였을 때 역전에서 우리의 의사(신천 사람)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 즉사하고 안중근은 잡혀 이듬해 2월 7일 여순에서 32세를 일기로 교수대 위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거사는 실로 의로워 세인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다.

융희 3년 12월에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일본과 합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정부에 건백하였다가 대한협회, 흥사단 등의 궐기로 형세가 험해지더니 통감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양편에게 의견의 발표를 일절 못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이완용은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거행된 백이의 황제의 추도식에 갔다가 나올 때에 문 앞에서 평양 사람 이재명이라는 23세의 청년에게 칼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이재명은 재판 후 사형에 처해졌다.

【한일 합병】 이듬해 8월 21일에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 사이에 비밀히 진행하던 한일합병안이 성립되어 어전회의를 거쳐 8월 29일에 조약이 발표되고 조서를 내리니 조선은 태조 건국으로부터 27세 519년 만에 나라를 잃고 우리 반도강산은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되어 갖은 압박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