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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R씨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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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가(畫家)여서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지금 십년(十年)만에 대(對)한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면
채색(彩色)이 없어 파레트를 들지 못하겠소이다.
화필(畫筆)이 떨려서 획(劃)하나도 긋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의 얼골에 저다지 찌들고 바래인 빛갈을 칠할
물감은 쓰리라고 생각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마에 수(數) 없이 잡힌 주름살을 그릴
가느다란 붓은 준비(準備)도 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물결 거칠은 황포탄(黃浦灘)에서 생선(生鮮) 같이 날뛰던 당신이
고랑을 차고 삼년(三年) 동안이나 그물을 뜨다니 될뻔이나 한 일입니까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고 물오른 버들만치나 싱싱하던 당신이
때아닌 서리를 맞아 가랑잎이 다 될줄 누가 알았으리까

「이것만 뜯어먹고도 살겠다」던 여덟 팔자(八字) 수염은
흔적(痕迹)도 없이 깎이고 그 터럭에 백발(白髮)까지 섞였습니다그려.
오오 그러나 눈만은 샛별인듯 전(前)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불똥이 떨어져도 꿈쩍도 아니하던 저 눈만은 살았소이다!

내가 화가(畫家)여서 지금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백호(百號)나 되는 큰 캄바쓰에서 저 눈만을 그리겠소이다.
절망(絶望)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悲觀)ㅎ지 않는
저 형형(炯炯)한 눈동자만을 전신의 힘을 다하여 한 획(劃)으로 그리겠소이다.

1932.9.5.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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