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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적과 목표[편집]

개인의 완성과 사회에 대한 봉사[편집]

個人-完成-社會-奉仕

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목적·목표에 관해서는 두 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항상 맞서, 마치 한쪽의 목적·목표를 위해서는 다른 한쪽의 그것이 배제되어야만 할 정도로 양자의 대립은 예리하고 심각했었다고 하겠다.

인문주의적 교육 입장[편집]

人文主義的敎育立場

교육작용의 목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능성이나 소질(素質)의 전체에 작용하여, 그것들을 가능한 최대한도까지 발전시키고 실현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목적은 결국 개인의 완성에 있으며, 개인의 완성·자기실현 이외에서 교육의 목적을 찾을 수는 없다. 이것이 개인적 교육학의 주장이며, 이 주장은 그 전형을 훔볼트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인문주의 교육이념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마땅히 개인주의 내지는 개인 중심주의, 때로는 이기주의적인 교육관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사회·민족·국가도 자기완성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보게 되며, 자기완성에만 전념하고, 국가나 정치, 민족의 운명 등에는 관심이 없는 냉담한 인간을 형성케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교육계에서 리트(Th. Litt)나 슈프랑거(E. Spranger)가 독일 교육의 최대 결함을 독일인의 비정치성이라고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였다. 그것은 이른바 독일인의 '체질적 결함'으로까지 되어버렸는데, 그 원천을 따져보면 적어도 일부의 원인은 훔볼트 이후의 신인문주의(新人文主義)의 개인주의·독선주의 가운데에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리트는 지금까지 독일인의 교양은 '가짜 교양'이었다고 말하며, 그 증거로서 히틀러의 독재주의·반문화성(反文化性)에 대해 아무런 비판이나 항의도 하지 못했던 그 '가짜 교양'을 예거하고 있다. 또한 리트는 개개인을 포괄하고 움직이며, 개개인의 참된 교양의 획득을 좌우하는 정치의 부패·타락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자가 어떻게 개인으로서의 참된 교양을 익힐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다.

사회·국가·민족의 일원으로서 사는 이외에 개인으로서 살 곳이 없다고 리트는 주장한다. 어떠한 국가, 어떠한 민족에도 속하지 않고 단순히 개인 스스로만이 독립하고 자존(自存)하는 개개인이라는 것은 실상 생각뿐인 추상관념이며, 이 세상에서는 실재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성과 그 교양 등을 형성하는 내용이나 요인은, 개개인을 그 일원으로서 포괄하는 객관적·역사적인 문화재이며, 그것을 담당하고 지탱하는 것은 현실, 구체적으로는 일정한 국가이며 민족인 것이다. 개개인의 완전한 교양을 가능케 하는 국가나 민족과, 거기에서 잉태된 문화 및 그것들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니는 국가의 정치나 경제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변하건 그것은 개인의 발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든가,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사회적 교육학의 입장[편집]

社會的敎育學-立場

사회적 교육학의 입장에서의 교육목표는 국가라든가 민족이라고 하는 사회의 존속·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인간의 형성에 있다. 고대에서는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 등의 교육이 그 좋은 예이며, 독일에서는 앞서 말한 히틀러의 독재적인 국민사회주의 교육,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파시즘 교육, 제2차 대전 중의 제국주의 일본을 비롯한 일제치하의 우리나라에서의 식민지교육, 그리고 2차대전 이후에는 중공·북한 등의 공산주의 국가군의 교육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에서는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개개인의 독립성·자주성에 엄격한 한계를 두든가, 혹은 그러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교육이 실시됐으며, 또한 현재에도 실시되고 있다. 국가라는 전체야말로 최고의 사회이며, 개개인은 국가를 전제로 한 개개인이며, 개개인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라고 하는 전체사회를 위해서 헌신·봉사해야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며, 국가에 있어서만 최고선(最高善)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을 계승한 헤겔도 국가를 객관정신의 발현이라 하여, 개개인은 그 '조종인형'에 불과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또 유명한 교육학자 나토르프(P. Natorp)는 교육작용을 정의하여, "사회에 의한 사회에까지의 교육"이라고 하여, 개개인의 개성이나 독자성을 경시한 교육목표를 역설하고 있다.

위에 말했듯이 개개인의 형성에는 사회나 민족을 창조하고 전달하는 객관적 문화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사회이건 민족이건 국가이건, 결국 한사람 한사람의 개개인을 제외하고는 그의 존재를 생각할 수가 없다. 한 나라 한 민족의 문화의 유지·발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개개인의 개성 속에 이문화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새로이 개성화되어, 이로써 문화에 새로운 개성적 생명의 요인이 부가되는 것이 아니고서는 국민문화나 민족도 생성·발전할 수가 없다. 객관정신이건 국민문화이건 그것들이 개개인의 마음이나 의식 속에 사는 이외에 달리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문화나 객관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그대로의 형태로 개개인의 의식이나 심정 속에 어떤 개성화·특수화도 되지 않은 채 투영(投影)·반사(反射)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수천년이 흐르고 수억 명의 개개인이 잇달아 태어나도 국민문화나 객관정신은 원래의 형태, 원래의 성질과 구조 그대로 지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심화(深化)·향상(向上)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인류의 역사, 각국의 역사가 사실로서 나타내는 바에 의하면, 개개인에게 그 독립과 자유, 그 특수성과 개성이 허락되는 한에 있어서만 각국이 모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나 독자적인 가치, 독특한 발명이나 발견을 다양하게 계속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만약 극단적인 전체주의적 국가나 전체주의적 사회가 나타나, 교육의 목적을 다만 이 국가나 사회의 전체적·공통적·일반적인 이상이나 목적·내용 등의 실현에만 한정시킨다면 개개인의 존재의의(存在意義)는 순식간에 소멸되고, 나아가서는 개개인의 개성·창의·독자성마저 소멸해 버릴 것이다. 즉 개개인은 전체정신, 전체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그릇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때 개개인은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의미,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마치 개미집의 개미, 집단으로 몰려 있는 벌 가운데의 한 마리 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으로 인간은 격하된다. 그때는 이미 개개인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고 비인간화될 것이다. 주체성이나 개인의 존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도 허락될 여지가 전혀 없다.

이와 같이 간주되고 이와 같이 다루어지는 개개인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고 기쁨을 지니며 생활하고 활동할 수 없다. 개개인이 이렇게 되면 이와 같은 개개인이 모여들어 형성되는 사회나 국가가 참된 사회나 국가일 수 없는 것이다. 동일한 내용·동일한 이상·동일한 가치를 지닌 많은 개개인의 집합, 그것은 다만 동일한 것의 수와 양이 증대한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개개인은 국가·사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든가, 국가·사회라는 전체의 무조건적·절대적인 봉사자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사회주의적인 교육이상이 얼마나 교육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인가는 오늘날에 와서 자명해졌다. 국가나 사회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반대로 개개인을 너무도 경시 또는 무시하는 국가나 사회는 오히려 스스로가 그 중요성을 강조해야 할 자기 자신마저 빈약하고 무기력하고 발전성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스스로를 절대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도 또한 상대적인 것이라 하여 스스로가 포함되는 개개인에 대해 그 개개인의 수와 똑같은 정도의 개성적인 자유와 발전을 허락하는 국가나 사회만이 참되게 생성·발전할 수 있는 국가이며 사회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만을 절대화 하지 않고, 스스로도 하나의 상태자로서, 국가나 사회의 권위와 존엄을 시인할 때 비로소 참된 개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개인과 국가, 사회와 개인의 상호간에 상대방의 권리와 가치를 시인할 경우에만 양쪽이 모두 각기 지닌 바 장점을 살릴 수 있고, 서로 협력하여 진보·향상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이나 국가, 개인이나 사회도 상호간에 서로를 목적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상호간에 스스로를 다른 수단으로서 승인할 때에, 여기에 비로소 양자의 공존과 공영(共榮)이 모두 가능해지며, 개인적 교육목적과 사회적 교육목적이 함께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개개인을 경시 또는 무시하는 국가나 사회도, 또는 사회나 국가를 수단으로서 경멸하는 개개인도 모두 자멸·쇠퇴의 운명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교육과 직업교육[편집]

一般敎育-職業敎育

교육목적·목표의 유형으로 일반교육을 목적·목표로 하는 유형과 직업교육을 목적·목표로 하는 유형이 있다. 이 두 개의 유형은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교육학면에서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일으켜 왔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어느 시대에서나, 또 어느 국가·민족에 있어서나 영원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일반교육의 정의[편집]

一般敎育-定義

일반교육이란 성별·직업·직위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필요불가결한 교육을 말한다.

즉 사람이 장차 어떤 직업을 택하고, 어떤 지위에 올라도, 또한 남녀의 차이는 있어도,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건강한 신체, 기초적인 국어의 실력, 다시 말한다면 일상생활에 결여될 수 없을 정도의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힘, 일상생활을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계산능력, 생활을 합리적·과학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인 힘, 생활에 윤택과 아름다움을 가져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적인 힘, 인간 상호간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덕적·시민적인 자질, 나아가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질이나 금전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소비하는 힘 등을 습득하고, 인간으로서의 사는 실감을 느끼고, 또 실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인 한 이를 원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이와 같은 인간 전반의 교육목적을 다하기 위해 편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교양학부에서의 일반교양 과정도 그 목적은 같다. 다만 다른 점은 초등학교는 일반교육의 기초인 초등의 일반교육을, 중학교는 중등 정도의 일반교육을, 고등학교는 고등 정도의 일반교육을 실시하며, 대학에서는 더욱 고도의 일반교육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뿐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각 단계의 일반교육에 의해서, 앞으로는 능력·신분·지위 등에 의해 각자가 제각기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지위나 신분을 달리하는 경우에도 상호간에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과 연대감으로 맺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동일한 국가·사회에 소속하는 각 개인은 공동의식을 지닐 수 있게 되며, 상호간의 이해와 융합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초등학교의 교육은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모든 아동·학생이 똑같은 종류와 단계의 일반교육을 받으므로, 그들이 성장한 뒤에 직업·신분·지위 등이 다른 생활을 할 경우에도 그들 전부의·사이에는 인간으로서의 공감과 이해가 교류되며, 그들 사이에 '우리'라는 의식이 공통으로 번지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나 민족이 좋은 의미에서 단결하고 통일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일이기도 하다.

일반교육의 목적[편집]

一般敎育-目的

일반교육은 교육과정에 있는 여러 교과나 내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니는 여러 가능성을 전체적·조화적으로 발전·형성함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바로 인간 그 자체의 형성, 인간다움의 형성이라는 것이 중심이 되고, 또한 최고의 목적이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교육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다른 어떠한 것의 수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참되게 하고, 인간을 동물적·비인간적인 생존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특히, 아테네에서는 일반교육을 자유인을 위한 교육이라고 했으며, 이 교육에서 얻은 힘을 돈벌이를 위해 이용하거나, 직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자유인답지 않은 천한 것으로 보았을 정도이다.

아테네인의 이러한 일반교육의 사고방식에는 약간 보편적이 지 않은 귀족취미 같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거기에는 우리가 깊이 배워야 할 것이 간직되어 있는 것도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오늘날 너무나도 근시안적(近視眼的)이며 성급하고, 또한 너무나도 공리적·영리적이기 때문에 인간다워지기 위한 교양을 이해(利害)·공리(功利)·실용(實用)을 떠나서 순수하게 몸에 익히려는 태도가 너무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인간다움은 소멸되어 버리고 이해(利害)의 악착 같은 생활태도, 즉 동물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인간의 교육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일반교육의 중요성, 더구나 영원한 중요성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일찍부터 직업적·전문적인 지식·기술을 익혀, 보다 나은 수입, 보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너무나 악착스럽게 매달린다고 하겠다. 그 때문에 인간다움이나 인간적인 일반교양은 경시되기가 쉽다. 일반교양이 없는 직업인의 범람, 여기에 바로 현대사회의 비극이 있으며 부덕(不德)·범죄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해타산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어떠한 것도 부정하여 추호의 부끄럼이 없는 사회상이란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것이다. 직업이나 그것을 다하기에 필요한 전문지식·기술의 의미와 중요성을 경시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인간적 교양을 무시한 직업인이나 직업교육은 부인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직업의 참으로 올바른 효과적 수행을 위해서는 그 기초·근저에 반드시 폭 넓고 풍부한 인간적인 일반교육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특히 널리 알려져 있듯이 오늘날의 시대는 변화·유동의 시대이며, 일단 익힌 직업적인 지식·기능도 순식간에 낡은 것이 되고 소용없이 되는 시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시대의 변화, 사회상의 변전(變轉)에 유연(柔軟)하게 적응할 수 있는 융통성이 풍부한 직업적·전문적인 지식이야말로 현대세계 각국에서 열렬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융통성이 풍부한 지식·기능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해지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오늘날의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다. 이 문제에 답하는 것이 광범하고 풍부한 일반교육인 것이다. 성급하게 직업적인 지식이나 기능을 구하는 자가 현대에서는 가장 참된 직업적 기능을 구하는 데는 가장 느린 자이다. 왜냐하면 일반교육은 넓은 시야와 편중되지 않고 고정적인 것이 아닌 판별능력, 사고방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유동적·역동적(力動的)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힘, 그것은 일반교육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직업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며 그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직업적 책임을 보다 잘 수행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기초·토대로서의 일반교육을 중시(重視)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교육과 직업교육과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다음으로 직업훈련 내지는 직업교육의 의미와 특질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직업교육의 의미와 특질[편집]

職業敎育-意味-特質

직업교육은 인간성 전반의 전면적 교육이 아니라, 각 개개인이 지니는 독자적인 개성·능력·관심·흥미와 같은 특수성에 착안하여, 이를 충분히 신장(伸長)시키고 발휘하여, 이로써 국가·사회 또는 인류를 위해 헌신·봉사함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 교육은 일반교육의 넓은 기초 위에 확립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능력·가능성을 바로 구체적·전면적으로 고찰한다면, 거기에는 개개인이 다른 인간과 공통으로 갖고 또한 필요로 하는 일반적 인간성 내지는 공통성의 면과, 개개인이 각각 자기만이 지니는 특수·고유한 면이 이상적 방법으로 한개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성이야말로 참된 전체성인 것이다. 또한 시점(視點)을 바꿔 말한다면, 앞서 보았던 일반교육이 경제적 이해라든가 실용적인 손실을 잊고, 오로지 인간성 그 자체를 위하고 인간성의 발전을 목적으로 함에 비해, 직업교육은 그것에 의해서 국가·사회·인류에 봉사하면서, 이 봉사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보수·금전의 획득을 그 목적의 하나로 삼고 있다. 전자가 오직 정신에 관계함에 대해 후자는 봉사라고 하는 점에서 정신적인 면을 지님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생활의 양식, 가족을 부양하기에 필요한 금전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물질에 관계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은 정신과 신체, 물질과 마음과의 극(極)의 통일이기 때문에, 참되게 전체로서의 인간형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업교육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지상에서 사는 인간은 정신적·문화적·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나 돈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지만, 빵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교육으로 익힌 광범한 전체적 교양을 직업생활·직업활동에 나타나는 각자의 개성과 독자성의 한 점에 응집(凝集)시키고 발휘하는 외에는 일반교육이 바로 살아서 작용할 수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참된 인간형성은 이와 같은 직업생활에 있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모든 인간은 제각기 스스로에게 적합한 직업에 의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실현하는 것이나 인간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직업교육에 철저해진다는 것, 직업으로써 사회나 사람들에게 이바지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불가결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직업교육은 특수적·전문적인 교육인 동시에 모든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만드는 공통된 일반교육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현대의 교육은 전문지식·기능을 수여하기 여념이 없으며, 직업인은 또한 금전의 다소에만 관심을 갖는다. 직업을 통해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의 노예, 금전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인간교육은 종래의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이 통일되는 곳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직업교육과 일반교육도 상호간에 상대를 예상하고, 상대의 도움없이는 참으로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참된 인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자의 통일과 융합을 꾀해야만 한다. 일반교육이라는 기초가 없는 직업교육은 돈벌이에 불과하며, 직업교육을 망각한 일반교육은 은둔자(隱遁者)의 독선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과 창조[편집]

傳統-創造

교육작용의 목적이나 목표에 관해서 인류·국가·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온갖 고심끝에 창조하고, 현대에까지 면면히 전승된 문화재를 현대의 청소년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교육작용의 중점은 청소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손으로 문화재를 창조하도록 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 두 가지 입장도 앞에서 고찰한 입장과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논쟁이 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장래에도 그것이 되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은 바꾸어 말하면 보수와 혁신의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두 개의 입장은 상호간에 상대를 배제하거나 거부하고서는 스스로의 입장을 지키기도 주장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에 관해 그 주장의 근거나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고, 이어 그 한계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육작용과 전통[편집]

敎育作用-傳統

대체로 어떠한 교육작용이건 이 작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내용이나 또는 대상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르친다고 하는 작용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체인 누군가는 교육의 객체인 누군가에게 반드시 있는 어떤 내용이라든가 대상을 가르치는 것으로서, 가르쳐야 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르치는 작용은 이름뿐인 것이 되며,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교육작용 따위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무의미한 관념의 유희(遊戱)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교육작용이 영위되고 있는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나 누가 그것을 영위하고,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라 해도, 반드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을 터이다. 즉, 교사는 학생에게 그림을 가르치거나, 음악을 가르치거나, 수(數)를 가르치거나, 글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그림·음악·수학·글자 등이 그 경우에 내용이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나 대상은 교육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에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어야만 하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육작용을 시작하려고 할 때, 사람은 이 작용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내용이나 또는 대상을 스스로가 창조하거나 형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작용을 시작한 순간에는 일정한 내용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 기존의 것으로서 그의 앞에 있으며,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작용에 착수하기 전에, 혹은 착수하려고 할 때 일정한 내용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어떻게 해서 기존·소여(所與)의 것으로서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육작용을 영위하기 이전에 그의 조상이나 선인들이 다년간에 걸쳐 창조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해 온 것, 그것이 모든 교육작용에 대해 내용으로서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교육작용도 결국 가능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작용은 무엇보다도 우선 만들어져 있는 것, 이미 전통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떠나고 무시해서는 절대로 가능해질 수 없다. 이것이 교육작용의 영구불멸한 본질이며 숙명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또한 교육작용의 본질에 보수적 성격이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다. 그런데 흔히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여 대체로 교육작용은 인간의 혁신, 문화의 개혁, 새로운 국가·사회의 창조를 꾀하는 외에는, 그 존재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참으로 의욕적이다. 또한 그들의 주장은 의기양양하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끊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과연 얼마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우선 그들은 즐겨 더구나 쉽사리 창조라든가 혁신·개혁을 입에 올리나, 도대체 아무런 전통도 없는 곳에 무엇을 혁신하고 개혁할 수 있을까. 사람은 무(無)를 혁신하고 개혁할 수는 없고, 무에서 창조할 수는 더구나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혁신·개혁·창조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사물의 진실과 가치를 이해하고 소유한다고 생각하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기존의 전통은 무가치·무의미하며 그릇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만이 올바르고 선하며 진실하다고 하는 독선·자만심·교만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생각에서 떠나지 못한 채 그들은 전통이나, 이를 만든 조상·선인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올바르다고 증명되지 않는다. 증명의 근거나 증명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다. 아마 이러한 주장의 진위(眞僞)와 시비는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그들만이 자기 주장의 심판자가 될 권리는 전혀 없는 것이며 아무도 주지 않는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전통에 대한 자의적(恣意的)비판자는 좀더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이 세상에 교육작용이 존재하는 이유의 하나는 각 시대의 각 민족이나 사회가 그 스스로 만든 문화재를 후세에 남기고, 후세 사람들은 선인의 문화재를 이어받고, 이것으로써 시대의 전후나 민족 및 사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일관하는 어떤 종류의 연관성·동일성을 유지하고 지속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인간이나 인간사회만이 지니는 역사라는 것이다. 동물에는 그것이 없다. 그렇다면 전통의 유지야말로 인간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각 시대에 사는 인간은 제각기 다른 시대의 인간이 창조하지 못했고 획득할 수 없었던 독자적이며 개성적인 문화재를 모두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만약 교육작용에 의해서 전(前)시대의 다양한 문화재가 전통으로서 후대에 전달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정한 시대의 문화내용은 그것이 창조했던 이외의 문화재를 조금도 지닐 수 없는 셈이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육작용이 전통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선행(先行)의 전통을 무시하고 배제한다면, 후대는 스스로가 창조한 문화 이외에는 소유할 수 없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동물과 다름없는 빈약한 존재로 전락함을 뜻한다. 동물이 동물일 수 있는 까닭은 역사를 갖지 못하고, 전통을 소유하지 않으며, 언제나 최초의 한 걸음부터 경험을 쌓는 이외에는 살아갈 줄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은 경험이나 창조에만 구애됨이 없이, 가슴을 활짝 펴고 선인이나 선행시대의 경험 및 창조를 전통으로서 이어받아, 그것과 스스로의 것을 합친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과 창조를 전체로서 소유하고, 이 가운데에서 스스로가 살아가는 길, 살아가는 방법·지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언제나 조상·선인(先人)들이 걸었던 지점을 스스로 전진의 출발점으로 하여, 항상 전진·진보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동물은 언제나같은 출발점에서 걷기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 인간만이 진보·발전이 있고 동물에게는 없는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교육작용과 창조[편집]

敎育作用-創造

교육작용에서 전통의 전달이 결여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 아니 그것이야말로 교육작용의 목적이며 본질임은 명확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전통의 전달만이 유일하고 최고의 교육목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은 이미 보았듯이 제각기의 시대나 민족·사회가 각각 다른 조건인 환경 속에서 각각의 방법으로 창조한 문화이기 때문에, 어느 한 시대의 전통이 그대로 다른 시대나 다른 민족·사회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며, 그 전통의 전부가 선(善)한 것,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일 수도 없다. 따라서 참된 교육작용은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나 사회의 독자성·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소여(所與)의 전통이 전달될 때 가치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엄격하게 검토하고 분석하며, 이 검토·분석에 의거하여 스스로의 시대나 사회에 필요한 것, 의미있는 것을 선택하며,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비판할 필요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즉, 교육작용의 목적은 전통의 전달, 이것에 의한 선행문화(先行文化)의 수용(受容)·유지에 있다고 하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작용의 목적은 전통 속에서 스스로의 시대·사회·국가 내지는 스스로가 작용하는 청소년 등의 독자성·특수성·개성 등을 고려해 그것에 어울리는 것, 그것에 발전·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골라 전달한다는 점에 있다. 이로써 교육작용의 목적은 전통의 전달·유지인 동시에 창조성의 촉진·옹호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미 고찰했듯이 신처럼 만능의 힘을 갖지 못한 인간은 무(無)에서는 아무런 창조도 꾀할 수 없다. 흔히 창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자칫하면 제멋대로 전통의 파괴나 무시로 치닫기 쉽다. 그것은 파괴 즉 건설, 부정 즉 창조라고 안이하게 착각하는 결과가 된다. 물론 참된 창조나 건설은 어떠한 의미에서, 또 어떠한 정도로는 파괴와 부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로는 전통을 중히 여기는 교육목적과 창조를 존중하는 교육목적 사이에 대립과 투쟁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진정한 교육작용에는 이러한 종류의 대립·투쟁이 어쩔 수 없이 굳게 맺어져 있다. 그리고 이 대립과 투쟁에 견뎌내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끈기가 필요하다. 그것 없이 안이하게 창조를 말하고 전통의 파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인류문화의 부정(否定)과 전통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야만과 동물적 상태로 빠지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를 추구하고 이를 교육작용의 목적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가슴을 펴고 마음을 맑게 하여 전통 속에서 훌륭한 것을 택하고, 여기에 전념·몰두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서 스스로만의 경험이나 사고에만 구애되고, 이 구애로 생겨나는 좁고 한정된 입장이나 시점(視點)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완고성 및 편파성은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선인이나 전통과 협력하면서 새롭고 참된 창조나 혁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없는 창조는 공허하며, 창조없는 전통은 이미 없는 반복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과 창조, 이 두 가지의 통일과 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참된 교육작용의 목적이 존재한다.

물론 지나치게 전통에 구애받는 자는, 선인의 모방이나 일찍이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것의 영구보존에만 몰두하여,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다. 올바른 전통의 유지와 참된 창조를 가름하는 분수령(分水嶺)은 극히 미세하여, 이를 그릇됨 없이 더듬어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를 피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곧 교육작용을 단념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목적[편집]

교육의 목적[편집]

敎育-目的

우리나라의 교육목적(敎育目的)은 1949년 12월 31일 공포된 교육법(敎育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는데,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목표로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을 육성"할 것을 가정하고, 나아가서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을 육성"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학교교육의 목적[편집]

學校敎育-目的

우리나라의 교육법에서는 학교교육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초등학교의 교육목적은 "국민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초등보통교육(初等普通敎育)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교육법 제93조).

(2) 중학교의 교육목적은 "초등학교에서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중등보통교육(中等普通敎育)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교육법 제100조).

(3)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에서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고등보통교육(高等普通敎育)과 전문교육(專門敎育)을 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교육법 제104조).

(4) 대학은 "국가와 인류 사회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深奧)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精緻)한 응용방법을 교수(敎授)·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교육법 제108조).

(5)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은 교육법에 규정하기를 "교육대학은 초등학교 교원을, 사범대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원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교육법 제118조).

(6) 전문대학은 "사회 각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이론을 교수·연구하고 재능을 연마하여 국가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중견 직업인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며(교육법 제128조 2), 방송통신대학과 개방대학은 "일정한 학교교육을 마쳤거나 중단한 자로서, 학술 또는 전문적인 지식·기술의 연구와 연마를 위한 교육을 더 받고자 하는 자에게 대학 또는 전문대학 교육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할 인재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며(교육법 제128조 6), 또 기술학교와 고등기술학교는 "국민생활에 직접 필요한 직업의 지식과 기술을 연마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교육법 제129조).

(7) 공민학교와 고등공민학교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을 초과한 자 또는 일반 성인에게 국민생활에 필요한 보통교육과 공민적(公民的) 사회교육·직업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하며"(교육법 제137조), 특수학교는 "장애인에게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 준하는 교육과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교육법 제143조).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공민적 자질함양을 주로 하는 일반교육에 목적을 두었으며, 고등학교와 이에 준하는 학교들은 일반교육을 주로 하되 전문적 직업교육의 성격도 가미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학과 이에 준하는 학교들은 전문인 양성에 주안을 두었다. 특히 근대화와 산업화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각종 기술학교와 전문대학을 두기로 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학교의 종류와 교육목표[편집]

학교의 종류[편집]

學校-種類

우리나라의 교육법 제81조에 학교의 종류로는 기간학교(基幹學校)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를 들고, 교사양성 교육기관으로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을 들고 있다. 또한 산업의 발달과 교육 기회의 확대에 따라 전문대학·방송통신대학·개방대학·기술대학이 개설되었다. 기간학제와 병립하여 일종의 사회교육기관으로 공민학교·고등공민학교가 있고, 실용적 기술교육기관으로 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가 있다.

또한 맹인·농아자·정신박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교와 취학전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이 있으며, 다른 여러 형태의 학교와 유사한 교육기관이면서도 시설기준 미달 등으로 인하여 학교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각종 학교가 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는 6·3·3·4의 기간학제를 중심으로 한 학교와 부분적으로 복선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기술학교 계통의 학교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교들은 대개 기초학교-중간학교-종국학교의 성격을 띤 초등학교·중고등학교·대학의 단선형 학제에 따르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육목표[편집]

各級學校敎敎育目標

우리나라의 교육법에는 각 학교의 교육목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초등학교 교육목표는 교육법 제93조에 명시된 "국민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초등보통교육"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목표를 달성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즉 ① 일상생활에 필요한 국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며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②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이해시켜 도덕심과 책임감·공덕심(公德心)과 협동정신을 기른다. 특히 향토와 민족의 전통과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시켜 민족의식을 앙양하며, 독립자존의 기풍을 기르는 동시에 국제협조의 정신을 기른다. ③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자연사물과 현상을 과학적으로 관찰하며 처리하는 능력을 기른다. ④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량적인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며 처리하는 능력을 기른다. ⑤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와 직업 등에 대하여 기초적인 이해와 기능을 기르며, 근로역행(勤勞力行)·자립자활의 능력을 기른다. ⑥ 인간생활을 명랑하고 화락(和樂)하게 하는 음악·미술·문예 등에 대하여 기초적인 이해와 기능을 기른다. ⑦ 보건생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이에 필요한 습관을 길러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되게 한다(교육법 제94조).

(2) 중학교의 교육목표는 중등보통교육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목표를 달성하도록 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① 초등학교교육의 성과를 더욱 발전·확충시키어 중견국민(中堅國民)으로서 필요한 품성과 자질을 기른다. ② 사회에서 필요한 직업에 관한 지식과 기능, 근로를 존중하는 정신과 행동 또는 개성에 맞는 장래의 진로를 결정하는 능력을 기른다. ③ 학교 내외에 있어서의 자율적 활동을 조장하며 감정을 바르게 하고 공정한 비판력을 기른다. ④ 신체를 양호(養護)·단련하여 체력을 증진시키며 건전한 정신을 기른다(교육법 101조).

(3) 고등학교의 교육목표는 고등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목표를 달성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즉 ① 중학교교육의 성과를 더욱 발전·확충시켜 중견국민으로서 필요한 품성과 기능을 기른다. ② 국가사회에 대한 이해와 건전한 비판력을 기른다. ③ 민족의 사명을 자각하고, 체위(體位)의 향상을 도모하며, 개성에 맞는 장래의 진로를 결정케 하며, 일반적 교양을 높이고 전문적 기술을 기른다(교육법 제105조).

(4)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의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즉 ① 근검로작(勤儉勞作)의 정신과 협동책임의 관념이 왕성하고, 정확한 판단력과 실천력을 구비한 국민적 품성과 기능을 기른다. ② 국민교육의 이념과 그 실천방도를 체득케 한다. ③ 교육자로서의 확고한 신념과 견실한 사상을 가지게 한다(교육법 제119조).

(5) 기술학교와 고등기술학교의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즉 ① 개성의 경향과 천부의 재능을 자발적으로 발휘하는 연구태도를 조장하며, 창조적 능력을 계발하고 전문적 기술을 습득케 한다. ② 국가사회의 산업과 무역 등의 실정에 신중한 관심을 가지게 한다. ③ 경제적 경영과 실무적 기획에 능숙케 한다고 규정하였다(교육법 제130조).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학교 종류와 그 교육목표는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의 유기적 연관을 짓고, 전통과 창조를 조화적으로 도모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朴 炳 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