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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교육/교육의 이론과 실제/수업의 계획과 전개/수업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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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의 개념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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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교과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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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校-敎科學習

피터슨은 학교는 왜 교과를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상식'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가 존재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역설했다.

싱가포르의 위도를 외우고, TNT의 분자식을 기억 못 한다고 교육이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만약 어떤 종류의 예술에도 관심을 두려 들지 않거나, 과학적 법칙과 도덕적 판단을 혼동한다면, 이것은 분명코 결핍된 교육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가 진실로 가르쳐야 할 것은, "지적 활동의 주양식(principal models of intellectual activities)"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학교수업은 주형(鑄型)과 파형(破型)의 패러독스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학교는 그 목적을 능률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제도나 내용, 방법을 두었음에도 오히려 주형적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비판으로 실버만(C. E. Silverman)은 모든 학교가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이 '질서와 통제에의 집념'이라고 지적했다.

우리의 학교수업도 학생들에게 보다 즐겁고 보람된 일이 되도록 수업과정이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어야 하며,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나 창의적 사고가 자극되고 존중돼야 한다. <金 魯 鉉>

수업과 지도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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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業-指導-關係

수업이 궁극적으로 학생의 인격에 기술적·정신적·도덕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면, 동시에 인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도(생활지도)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는 보통 수업 이외의 시간, 즉 어린이회 또는 학생회활동·학급(회)활동·그룹 활동, 기타 시간에 여러 형태로 행하여진다. 그것은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생활상의 모든 문제에 저촉되기 때문에 때로는 수업 속에도 침투되는 일이 있다. 또 본래 개인적 생활문제를 다루는 문제였으나, 집단의 문제를 집단적으로 다루는 집단지도에까지 발전하고 있다.

방법적(方法的)으로는 학생이 자기문제를 자기책임으로 자주적으로 선택·결정하는 것을 원조하는 미국식(美國式) 가이던스(guidance)와 교사의 지도성을 강화하여, 신속하고 강력하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훈련방식이 대립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하여간 지도는, 교수하여야 할 교재를 마련하여 학급 전원에게 공통된 과제를 부과하지는 않으나, 생활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공통된 사고방식·태도·행위를 장려하는 일은 있다.

그래서 교수와 지도는 서로 자기들의 직분(職分)을 지키면서 각기의 장점을 발휘해야 하지만, 동시에 서로 협력하고 융통적으로 공동의 커다란 교육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수업의 본질과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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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業-本質-目的

수업은 학생의 문화재 수득(文化財修得)을 통해서 그들의 인격형성을 조성하는 활동이다. 이 문화재 수득은 교사로부터 수여(授與)되는 것이며 학생들은 이것을 수용(受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수여와 수용(Geben und Empfangen)'은 수업(授業)이란 교육활동의 본질적 성격이며, 모든 수업은 이것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발전한다. 교육활동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학생의 인격형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수업은 문화재의 수득과정을 통해서 인격의 기술적·정신적(주로 지적)·도덕적 형성을 주요 임무로 한다. 이 임무를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학생의 발단단계·도야단계(陶冶段階)에 따라서 수업의 형태(形態)는 여러 가지로 변화한다. 이 무한한 변화를 초래하는 요인은 한결같이 학생측에 있다. 여기서는 이 무한한 변화를 추구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도야단계의 진전에 따른 허구적(虛構的) 취급에 대해서만 은 언급하고자 한다.

에거스도르퍼의 수업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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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gersdorfer-授業-虛構性

에거스도르퍼(F. X. Eggersdorfer)는 <청년교육(Jugendbildung)>(1928)에서 학생이 완전히 대상에 침잠(沈潛)한 뒤라도 대상은 아직 완전하게 해명되어 있지 못하고, 당면한 진리가 여기서 비로소 규명되어야 한다는 긴장된 허구(虛構)를 논한다. 이 경우의 연구자는 바로 학생이다. 이와 같은 교수학적 허구(didaktische Fiktion)는 도야활동(陶冶活動) 가운데에서 교사를 배후로 밀어내고, 학생이 도야활동에서의 '인격주체(persona agens)'가 된다. 따라서 교사는 '수동자(Passivum)'에 대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적 처치는 도야업무 가운데서는 아직도 때마다, 더욱이 상대적으로(zeitweise und relativ)밖에 적용될 수 없으며, 도야활동의 기본적·항상적 구조가 이 때문에 애매해지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청소년 도야에 있어서는 수여와 수용(Geben und Empfangen)이 원칙이다.

수업의 본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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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業-本質觀

또 한편 "교수란 새로운 인식의 발전, 새로운 내용을 구성시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기존(旣存)의 내용을 전달하고 획득시키는 작용이다. 새로운 내용의 자기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것을 배우게 하면서 마치 창조하는 것같이 생각하게 하는 작용, 혹은 이미 완성된 것을 미완성(未完成)의 것인 것처럼 처리하는 작용, 한마디로 '…와 같이'라는 장면에서의 교육작용이다. 또한 '…와 같이'라는 장면에 존재한 모순적 성격, 즉 주면서 창조시키고, 전달하면서도 획득한다고 하는 모순된 성격이야말로 교수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모순을 '수동적 발동(受動的發動)'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교수는 단순한 수동에 의하거나 단순한 발동에 의한 것도 아니며 수동인 동시에 발동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두 견해를 비교해 보면, 제1의 쟁점(爭點)은 수업의 허구적 성격이다. 에거스도르퍼는 이것을 도야활동의 높은 단계, 즉 성황(盛況)에서 인정하고 있다. 오히려 바람직한 방법으로서, 때로는 상대적으로밖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부에선 이것을 수업 전반의 본질적 성격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을 가지고, 당장에 본질적 성격으로 생각한 과오(過誤)일 것이다. 실제 수업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허구적·발견적·창조적으로 다룰 수 없는 교재가 얼마나 많은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허구적 성격은 '모순적'이기는 하나, 지식·지능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능력을 높이고, 태도를 기르고, 자기도야 및 발견적·창조적 학습의 훈련을 하여 인격형성을 도모시키려고 하는 수업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업의 '추발견적(追發見的)·추창조적 성격'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제2의 쟁점은 에거스도르퍼의 '수여와 수용' 및 '수동적 발동'이다. 수업의 본질을 단순히 이와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수업을 전적으로 수동적 발동이라 하더라도 수동적 발동도 허구적 취급과 필연적으로 결합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업의 임무로서 인격의 기술적·정신적·도덕적 형성은 부분적으로는 지도(생활지도·학생지도)에도 공통된다. 따라서 수업에 고유(固有)한 구체적 목적으로는 뷜만과 에거스도르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생생한 지식, 정신화된 능력, 정화된 의욕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정화된 의욕은 학습을 중심으로 한 바람직한 생활태도에도 연결된다 하겠다.

수업의 통일적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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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業-統一的構造

수업은 본질·임무·목적을 바탕으로 하여 개개 학교나 학급에서 요청되고 있는 도야형식(陶冶形式)과 교수계획에 따라 일관적·통일적으로 전개된다. 이때 구체적 도야형식이나 교수계획은 임무·목적보다는 한층 자세한 구체적 목적 또는 과제를 가지고 특정의 교육환경에서의 교육계획으로 조직된다. 여기서 다음의 문제는 교사와 학생을 위해서 수업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형식으로 진행하느냐는 것이 된다. 개개의 수업은 각각 통일체(統一體)임과 동시에 상호간의 관련성과 일관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학급교수(수업시간만)는 습득단계(학습능력을 포함)·교재의 특질·활동방식에 따라서 통일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습득단계·교재·활동방법이라는 3요소의 변화에 의한 수업형태의 변화는 무한한 것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유형적(類型的)으로 파악할 수는 있다. 물론 거기에는 엄격한 도식(圖式)을 주장하는 입장과 자유로운 무정형(無定型)을 즐기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유형적 형태를 전연 무시한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으로, 거기서는 일단 시간적 순서로서의 형식적 교수단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교재의 종류에 따라서 규정되는 교수형태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되겠다. 형식적 교수단계는 헤르바르트 이래의 문제로서, 오랫동안 헤르바르트파의 사고방식이 지배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교재의 종류에 관련하여 보다 자세히 입안(立案)하는 경향이 있다. 교수형태에 대해서는 같은 헤르바르트파의 계통을 계승하는 에거스도르퍼의 생각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모든 교재를 크게 관찰적 교재·해석적 교재·표현적 교재 및 발견적 교재로 분류하고, 여기에 따라 관찰적 교수·해석적 교수·표현적 교수·발견적 교수(문제 해결학습)의 네 가지 기본형(基本型)을 생각하고, 그 이외의 것은 이들의 혼합형이라고 간주한다.

수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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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학교와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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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Greece-學校-授業

수업이란 주로 학교의 교과를 다루는 학급교수(class instruction)와 그 전후에 연관되는 준비와 사후처리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수업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학교의 역사와 병행한다. 현대적 학교개념에 적합한 학교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렵다. 학교에는 전속(專屬)의 교사(校舍), 교과 또는 학과전임의 교사(敎師)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류의 원시시대에 일족(一族)의 자제(子弟)에게 자기방어 수단으로서 무술(武術)을 가르친다든지, 생활을 위한 수렵이나 어로의 기술을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수업이 아니다. 또한 승려(僧侶)나 신관(神官)·이발사가 여가를 이용하여 절간이나 자택에서 아이들의 읽기·쓰기를 지도했다고 이것을 수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서양의 교육사상 학숙(學塾) 또는 학교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그것은 B.C. 4세기에 개설된 소크라테스의 수사학교(修辭學校,B.C. 400년경)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B.C. 380년경),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B.C. 335년경) 등이다. 더 오랜 교육으로 B.C. 6세기-10세기경 스파르타에는 군사교육의 기초로서 체육이 철저하게 실시되고 있었으며, 아테네에서도 여기에 음악을 첨가한 체육이나 정신적 교양을 부여하는 '교수소(敎授所,다스칼레온)'가 어느 정도 학교로서의 체재를 갖추고 있었는데, 교과가 확립되어 있었는가는 불명이며, 그곳에서 수업이 실시되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비해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나 학숙은 교사(校舍)를 가졌고, 교과(敎科)를 확립했고, 전임의 교사가 교수했다. 뒷날의 7자유과(七自由科)의 기초는 플라톤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며, 또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 여러 학과는 청년 자제에 대해서 연구적(硏究的)으로 교수된 것으로, 현대 대학교육에 해당한다. 수업형식으로 플라톤은 연구적 토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의를 존중했다.

한편 유소년(幼少年)에 대한 정신교육에서는 읽기·쓰기의 지도에서 시작해서 신화(神話)와 시(호메로스의 서사시, 헤시오도스의 교훈시, 시모니데스의 조가) 등을 교재로 사용한 도덕교육, 체육을 통한 정신적 단련, 일상생활의 예법(禮法)을 통한 훈련이 중시되었다.

로마 시대 중세의 학교와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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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時代-中世-學校-授業

로마 시대는 공화정시대(B.C. 509-27)와 제정시대(B.C. 27-A.D. 476)로 구분되는데, 공화정시대(共和政時代)에는 가정교육이 중시되어 상류가정에서는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시켰다. 일반서민의 자제를 위해서 초등학교(ludus)가 번영한 것은 로마 시대의 커다란 특색이다.

'루두스'란 원래 유희나 경기를 의미했으나, 바뀌어서 여가를 이용하여 취미로 하는 작업에 쓰여졌고, 다시 아동을 놀게 하면서 읽기·쓰기·셈의 기초를 가르치는 초등학교의 명칭이 되었다. 교육내용으로서의 읽기·쓰기·셈은 별로 중요성을 갖지 않고 아동의 여가를 메우는 놀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로마 시대·중세기·근세를 통해서 차차 발전하여 오늘의 초등학교가 되었다. 독서는 12동판법(銅板法)의 암송과 결합하여 '독서교사'에 의해 지도되고, 다시 습자·작문으로 발전했다. 다음, 산수는 로마인에게 있어서 특히 중시된 교과로, 소년기에 들어서도 '산수교사'의 집에 통학한 자가 많았다고 한다.

중등학교는 고등교육에의 준비기관이며, 이 때문에 '문법학교'가 설치되어 '문법교사'가 그 교육을 담당했다. 문법이란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문법으로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의 대표적 작품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인에게 있어서 라틴어는 모국어(母國語)이며, 그리스어는 외국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교사나 학생이나 그리스어에 매력을 느껴서 호메로스 시편(詩篇)이 중심적 교재가 되었다. 또한 그리스의 수사법(修辭法), 즉 의회나 법정에 있어서의 논란변호술(論難辯護術)도 가르쳤다. 제정시대(帝政時代)에 들어서서 문법학교에서는 문법 이외에 수사학·변증법·수학·기하학·천문학·음악을 추가한 소위 '7자유과(septem artes liberales)'를 교수하여 고등교육에의 예비과정으로 삼았다. 고등교육은 수사학교와 그 위에 연결되는 철학학교에서 담당했다. 철학학교의 교과목은 윤리학·변증법·논리학·수학·물리학이었는데, 각각 전문교사가 교과서 또는 강의·필기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강술(講述)했다.

중세기의 교육은 승려교육(問答學校·僧院學校·本山學校)·기사교육·대학교육·세속교육으로 나누어지나, 수업의 면에 있어서는 커다란 진보가 없다. 단지 승려교육에 문답교수(問答敎授)가 도입되었다는 것, 세속교육 가운데서도 하층시민자제의 보통교육기관으로서 교구학교(敎區學校)·조합학교(guid school)·독일어학교(Deutsche Schule)·습자학교(Schreibschule)가 생겨서 모국어 중심의 교육으로서 '루두스'에서 후세 초등학교에로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근세 이후의 수업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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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世以後-授業理論

수업의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고 수업방법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한 것은 근세 이후의 교육이론이다. 교육이론은 근세에 들어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발전해 온 것으로, 근세 이후의 특색은 교수학(Didaktik)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 그 제1인자는 코메니우스(Johann Amos Co-menius, 1592-1670)이다. 그는 자신의 교육적 경험과 자연동식물의 성장에 성찰(省察)을 가하여 교수원리를 체계화했다. 그것은 <대교수학(大敎授學)>에 해설되어 있는 37원칙으로서, 효과적인 수업을 지향하는 모든 수업의 공통된 원칙이다. 당시의 수업원칙론은 코메니우스보다 약 1세기경 전에 비베스가 창시한 것으로, 코메니우스가 거의 동시대에 출현한 알스테르 라이케에 의해서 고찰된 여러 원칙도 고려하면서 완성시킨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원칙론은 현대의 수업에 대해 직접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지 못할지는 모르나 수업원칙의 기초가 되고 있다.

교수원칙은 그 후 차차 보다 간결한 말로 표현되어 수업 지도이념이란 뜻을 가진 교수원리라고도 불려진다. 코메니우스의 원칙은 경험적·심리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전통은 오히려 학습심리학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머셀(J. L. Mursell)·힐거드(E. R. Hilgard)·거리(R. Garry) 등은 이 방면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적으로 수업효과만을 노리고 학습을 촉진시키는 데만 유의하는 원칙론은 자칫하면 수업의 본질을 잃어버려, 교육의 근본을 그르칠 위험이 있다고 하여 헤르바르트의 교육적인 교수를 재인식하고, 도야론(陶冶論)에 입각한 교수원리를 주장하는 일파가 있다. 그것은 도야론에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멀리는 페스탈로치·실라이어마허 및 훔볼트를 찾고, 가깝게는 뷜만·케르센슈타이너에 입각해서 도야론적 교수원리를 체계화하려 한다. 이의 최종의 완성자가 에거스도르퍼이다. 그가 주장하는 "도야활동의 제원리"란 자발성·주의·직관·향토·사회·진리와 가치·정착의 7원리이다.

수업구성상 '원리'에 대응하는 중요한 시점은 '형태'이다. 수업형태론은 헤르바르트의 교수단계론에서 시작하여 에거스도르퍼의 형태론까지 일단의 기본선(基本線)이 나왔다. 그러나 에거스도르퍼의 소위 혼합형에 대한 논의는 아직 충분히 완성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장래 다시 새로운 도구가 개발되고, 그 사용법이 연구됨으로 해서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브루너 교수이론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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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er 敎授理論-性格

브루너는 학습이론이나 발달이론은 근본적으로 기술적(記述的)인 성격을 가지고 교수이론은 규범적(規範的)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6세의 어린이는 아직도 가역성개념(可逆性槪念)을 갖지 못한다"라는 발달이론이 제시하여 주는 하나의 사실적 기술(事實的記述)이다. 그러나 교수이론은 가역성 개념을 아동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는 데 도움되는 지침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즉 교수이론은 지식이나 기능을 학생들에게 학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관한 여러 원리와 규칙을 제시해 준다는 의미에서 규범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그의 교수이론은 특정 교수 ― 학습과정의 계획 전개에 지침을 제시해 줌과 동시에, 교수 ― 학습과정을 비판·평가할 수 있는 준거(準據) 내지 척도를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학습이론과 교수이론의 관계는 서로 모순(矛盾)되어서는 안 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교수이론이 학습이론에서 추출(抽出)되는 것이거나, 혹은 학습이론을 증보(增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교수이론의 형성에 필요한 독립적인 형태의 연구활동이 있다는 의미이다.

브루너 교수이론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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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er

敎授理論-範圍

브루너는 교수이론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국면 혹은 특징을 완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1) 교수이론은 학습자 개개인 속에 학습에 대한 경향성(predisposition)을 가장 효과적으로 심어주는 구체적인 경험들을 명백히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2) 교수이론은 학습자가 한 영역의 지식을 가장 쉽게 학습할 수 있도록 구조화(構造化)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3) 교수이론은 학습되어야 할 자료가 어떤 계열로 제시되어야 하는가를 명백히 시사(示唆)해 줄 수 있어야 한다.

(4) 교수이론은 학습과 교수의 과정에서 적용될 상벌(賞罰)의 성격과 그 적용방법 등을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학습경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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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習傾向性

학습에의 경향성이란 학습하고자 하는, 혹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욕이나 경향을 뜻한다. 문화의 특징·동기체제(動機體制) 기타 개인적 요인들이 학습경향성의 결정에 작용한다. 교수이론에서는 이러한 여러 요인들을 어떻게 이용하여 설정된 교육목표 달성에 적합한 학습경향성을 학생 속에 촉진시킬 것이냐에 관심을 가진다. 학습경향성에 관계되는 명제(命題)를 브루너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학습과 문제해결은 선택을 요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의 탐색을 필요로 한다. 최적(最適)의 탐색을 촉진해 주기 위해서 탐색에 따르는 위험성을 극소화하고, 오류(誤謬)로부터의 교훈을 극대화하며, 탐색과 호기심을 저해하는 학습내부의 억압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교수방법이 고안되어야 한다.

(2) 사회계층·성(性)·연령 등의 차이에 따라 지적 활동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

(3) 학습자의 학습 스타일과 학습자료의 종류 및 정도와의 관계가 학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최적의 학습은 학습자의 스타일과 학습자료의 성격이 일치될 때 성립될 수 있다.

(4) 교수자와 피교수자의 관계 역시 학습경향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지식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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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識-構造

브루너의 지식의 구조개념에 대해 교수이론 형성에 관계되는 몇 가지 명제를 연결하면 아래와 같다.

(1) 어떠한 교과목의 내용도 보다 경제적이고 적용력이 있는 형태로 단순화할 수 있다.

(2) 어떠한 지식을 이해한다는 것과 그 지식을 획득하는 절차 및 방식과는 분리될 수 없다.

(3) 어떠한 지식영역이든 ① 탐구하는 행위(doing) ② 종합적인 이미지의 형태(picturing) ③ 법칙성을 지닌 논리적 명제의 형태(symbolizing)로 묘사될 수 있다.

(4) 어느 정도까지 경제적이고 단순한 표상화(表象化)가 가능하느냐는 학문 영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학습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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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習系列

학습계열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교육목표 달성의 효과를 증감시킬 수 있다. 최적의 학습계열 결정에 관계되는 몇 가지 명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학습자에게 최적의 유일한 계열이란 있을 수 없다. 학습자의 과거의 경험배경·발달단계·학습자료의 성격·기타 개인차에 따라 최적의 계열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2) 특정 지식영역의 경제적인 구조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여러 상황에 쉽게 적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 사실들을 기초로 한 귀납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더 좋다.

(3) 계열 속의 단계간의 간격 크기는 달성하고자 하는 교육목표의 성격과 학습자의 현재 능력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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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化

브루너는 학습에서의 강화를 외적 보상에 의한 것과 내적 보상에 의한 것으로 나눈다면 내적 보상에 의한 강화가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학습한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에 연결되는 발견의 기쁨, 성취의 만족을 바탕으로 하는 내적 보상이 지니는 강화의 힘이 외부의 상이나 칭찬보다 더 힘이 크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브루너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시하였다.

(1) 상이나 벌이 외적(外的) 기관(교사·부모)에 의해서 통제되는 정도만큼 성취(成就)로부터 받는 보상에 감소가 온다.

(2) 학습에 실패한다는 것은 다음의 성취 혹은 향상을 위한 가치있는 정보를 구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실패에 대해서 외적으로 가해지는 벌은 실패에 따르는 정보성(情報性) 혹은 교훈을 감소시키게 된다.

(3) 성공에 따르는 강한 외적 보상은 성공한 바로 그 행동을 다음에도 또 하게 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많다.

(4) 외적인 벌이 따르는 오류는 행동을 와해시킬 가능성이 높으며, 시정과 향상을 위한 기반이 되기는 힘들다.

위에 제시한 명제들을 토대로 하여 생각해 볼 때 교수상의 임무의 하나는 내적·외적 상벌의 균형을 정하는 일이 된다. 사실상 외적 상벌이 지나치게 작을 경우 학습을 위한 노력에 감소가 오지 않을 수 없다.

가네의 학습단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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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ne-學習段階說

가네(R. M.Gagne)는 인간의 학습이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는가를 여덟 가지 종류로 나누고, 그러한 여덟 가지 단계 아래서 어떻게 학습자가 그의 능력을 바꾸어 가는가를 연구하였다. 그는 그러한 여덟 가지 단계의 하나하나에 따른 신경계통의 변화가 무엇인가 알아내어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자극과 반응 또는 문제해결의 학습만을 내세우는 방법을 물리치고,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학습의 단계를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배열하였다.

신호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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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號學習 signal learning

어떤 신호나 자극(조건화되지 않은 자극과 매우 가까운 것)에 대하여 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예를 들면 종소리나 자동차의 경적 또는 어린이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치는 손뼉소리에 대한 반응 등이다.

자극과 반응의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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刺戟-反應-學習 stimulus response learnig

학습자가 식별된 자극에 대하여 정확한 반응을 보이는 것, 예를 들면 말을 배우는 첫 단계의 학습이 그것이다.

연쇄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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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鎖-chaining

자극과 반응의 연결이 둘 또는 그 이상이 연결(連結)되어 습득되는 학습이다. 예를 들면 어린이가 사각형을 그릴 수 있게 되거나 혹은 알파벳이나 1에서 10까지를 순서로 욀 수 있게 되거나 외국어의 단어를 번역할 때 따르는 언어적 연상이 그것이다. 또 글자를 쓰거나 과학실험기구를 다루거나 모형을 다루는 일도 이것에 속한다.

언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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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語聯合 verbal chaining(association)

대체적으로 위의 연쇄에 의한 학습과 비슷한 조건에서 학습되는 것이나, 여기에서의 연쇄는 언어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특질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한 내면적인 연결은 개인이 이미 배운 말 등에서 선택하여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문장의 학습, 구두(口頭) 표현의 기억, 시의 암송 등의 학습이 여기에 속한다.

다양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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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樣識別 multiple discrimination

개인이 개개의 각각 다른 자극들에 대해 같은 수효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 경우, 그 자극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한 형태의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교사가 많은 학생의 이름을 각각 바르게 부른다든가, 학생이 식물이나 동물·광석 등의 이름을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개개의 자극과 반응의 연결은 그 학습과 비슷한 다른 많은 자극과 반응의 연결들 때문에 기억의 지속이 방해된다. 다른 예를 들면 외국어의 단어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념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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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念學習 concept learing

학교학습에서 얻어지는 수많은 행동은 대상물이나 학교에 대한 개념의 활용을 포함한다. 예컨대 수학교수에 있어서는 1, 2, 3, 4라는 수의 개념, 집합(集合) 또는 집합의 구성요소에 관한 개념, 결합과 분리의 개념 등을 가르치게 된다. 생물학을 배우는 학생이 세포라는 개념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학습 혹은 능력을 가네는 개념학습(槪念學習)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다시 말하면 개념학습은 형태가 서로 다른 일군의 자극에 대하여 공통된 반응을 보이는 능력을 습득하는 학습이다. 그러한 학습들은 때로는 형태가 크게 다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물이나 사건 등의 전체의 종류를 식별하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원리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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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理學習 principle learning

원리는 개념들의 연쇄이다. 그 가장 단순한 형태는 "만약에 A가 어떻게 되면 B는 이렇게 된다"식으로 표시된다. 이러한 많은 원리들은 사실(facts)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한다. 개념의 연쇄는 언어의 연쇄와 구별이 된다. 개념을 연결하여 원리(原理) 또는 공식(公式)에서 보는 바와 같은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둥근 것은 구른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산소의 원자량은 16이다' '직사각형의 면적은 가로 곱하기 세로이다' 등이다.

문제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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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解決 problem solving

문제해결은 사고(thinking)라고 부르는 내면적 과정을 요구하는 학습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이미 습득한 원리들이 결합된 보다 높은 정도의 원리에 의거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능력이 습득된다. 예를 들면 더하기·빼기·곱하기·나누기 등의 원리를 적용하여 산수문제를 푸는 것, 비탈길에서 자동차가 굴러 내려 가는 속도를 계산하기 위해 뉴턴의 운동의 제2법칙을 적용하는 것, 혹은 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이 작문에서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거기에 적합한 비유를 선택할 수 있는 등등의 학습이 여기에 속한다.

가네는 특히 학습이란 계속적으로 누가(累加)되어 가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어떤 학습에 있어서든지 그 학습에 선행되는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교사가 의도한 최종적인 행동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학습지도의 연속성이 단계적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과학에서 문제해결을 가르칠 때 학생들은 거기에 선행되는 원칙들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원칙의 바탕이 되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며, 그렇게 거슬러올라갈 때 언어의 연합·연쇄까지 다루지 않으면 안 되므로 결국 학습지도의 연속성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朴 炳 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