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교육/교육의 이론과 실제/학 습 자/학습지도의 기초
학습지도의 철학
[편집]學習指導-哲學
학습지도는 학습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그에 부수(附隨)된 환경을 조직하고 움직여 나가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이 학습지도 속에는 학습이 잘 되기 위한 활동이면 모두 환영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런데 학습지도의 위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학습지도를 지탱하고 있는 철학을 해부(解剖)해 보고 우리의 갈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학습지도의 구체적 모습은 그 기본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육목적이 다르면, 그에 따라 나타나는 교육과정·학습지도·평가·제도까지 하나같이 달라지는 현상과 마찬가지이다. 말을 바꾸면 한 교사의 교육철학은 바로 그의 학습지도의 방향과 목적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교사가 갖는 교육철학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교육을 형식도야(形式陶冶)의 과정으로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인간심정 위에 인상(印象)을 남기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또 자극과 반응 사이에 연결을 지어주는 작업으로 생각했던 때, 학습자가 처하고 있는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라 했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교육철학·교육개념이 곧 학습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어 놓고 만다.
교육은 학교의 모든 기구·학습지도의 목적·학습활동·교육과정·실지 학습에 이르기까지 학습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학습자의 교육적 요구를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교육활동에 반영시켜야 하며, 가능한 한 학교와 학습의 배치조건도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습자가 '있는' 교육과정이나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에 따라 교육과정이나 학교가 '움직여야'한다. 또한 교사의 개인적인 문제나 관심·흥미·철학은 제2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한때 교육이 성인중심, 교사중심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학습자라는 존재는 성인이 보는 관점, 교사가 보는 관점으로만 해석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우리의 교육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채 뽑혀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학습자인 아동을 '어른의 축소판'으로 생각하고, 아동을 다만 작은 성인으로 다루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동은 양적(量的)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質的) 면에서도 성인과는 다르다.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이 결국 교육의 성격과 내용의 방향을 선 긋는 데 밑받침이 되었다. 학습자는 성인과는 다른 성장하는 유기체이며, 성장하면서 지적·신체적·도덕적·사회적 경험을 쌓는다. 학습지도는 이들의 성장 정도에 맞추어 가면서 이같이 잡다한 경험을 통합된 전체로 승화시키는 데 그 최종목표를 두어야 한다.
학습지도의 준거
[편집]學習指導-準據
학습지도란 학습자가 효과있고 능률적인 학습을 하도록 해주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방법이야 무슨 방법을 쓰든, 또 그것이 낡은 방법이든 새로운 방법이든, 또 그것이 교사의 머리 속에서 아무렇게나 짜낸 방법이든 실험이라는 엄격한 과학적 근거 위에서 나온 것이든, 또 그것이 전통적이든 진보적이든, 그런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문제는 학습지도의 성패(成敗)의 최종 준거는 결과에 있다는 점이다. 무슨 방법을 어떻게 사용했든지, 그것이 학습자의 동기·흥미·요구·발달 정도에 꼭 맞아서 바람직한 결과, 효과있는 결과가 생겼다면 좋은 것이다.
학습지도의 성패를 결정짓는 준거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 어떤 결과로써 성패를 판단해야 하느냐이다. 이 문제는 흔히 듣는 질문이면서도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대답이 곧 교사의 태도·철학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종류의 결과이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대답은, 계속하는 결과(results that last)와 학습자가 실제 자기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use in his life)결과이어야 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흔히 잊어버리기 위한 공부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은 1년 후에는 배운 내용의 90%를 망각한다고 한다. 이렇다면 몇 년 동안의 노력·시간·금전이 아깝다. 어느 정도의 망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학습심리학이 가르쳐 주는 원리이다. 그러나 배운 내용을 1년 후에는 깨끗이 잊어버릴 교육이라면 심각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또 묻는 문제에 대해서는 물을 그때만 대답할 줄 알고, 실제생활에서 활용하지 못한다면 이것 역시 큰 일이다. 흉내만 내는 학습이라면 필요없는 것이다. 집안의 라디오가 고장이 나면 과학에서 배운 지식을 응용하여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국어시간에 배운 지식으로 실용문을 작성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암기를 중심으로 하던 학습에서, 사고력·판단력·적용력·종합력·분석력과 같은 고등정신기능(高等精神機能)을 강조하는 학습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 이러한 행동을 강조하는 학습은 망각도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곧 실생활에 응용되기 마련이다.
(2) 교과목의 결과를 중시해야 할 것이냐,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중시해야 할 것이냐이다. 이것 역시 현재의 교육에서 가장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습자가 인간으로서 건전한 발달을 하고 있으면, 독(讀)·서(書)·산(算)이나 역사·과학은 못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말하자면 교과목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인간을 형성시킬 것이냐가 학습지도의 성패 결정의 관건(關鍵)이 된다.
바람직한 학습지도는 문화의 내용이 학습자의 생활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게 해줌으로써, 학습자가 인생을 보다 풍부하고 인간답고 현명하게 살게 해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배격해야 할 것은 효과있게 학습한 교과목이 아니라, 기계적인 학습, 의미없는 학습,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는 학습지도이다.
(3) 학습지도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어떤 특정된 계획·절차·방법에만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라는 반응이다. 학습자에게 효과적인 학습을 시키기 위해서는 교사가 여러 가지 기술·통찰력·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의 학습장면·학습자·교사의 능력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써야 한다.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의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어떻게 적절히 사용하느냐하는 것은 교사의 능력에 달려 있다. 또 한 가지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방법의 창안(創案)이야말로 교사의 큰 의무이다. 이런 창안에 있어 요구되는 것은 교사의 지적 능력, 통찰력, 인간 이해력, 사고력 및 창조력으로 실로 무거운 업무이다. 각 교사에 따라 학습지도의 방법에 차이가 있어야 하고, 또 창안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 모든 분야의 학습에 공통된 원형(原型)이다.
(4) 위에 제시한 준거(準據)가 교사에게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즉 너무 교사에게 과중하고 지나친 준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또 한 교실에 50-60명이나 수용된 학습자를 상대로, 교육적으로 별 효과가 없는 한 권의 교과서를 가지고 교구(敎具)·교편물(敎鞭物)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 놓여 있으면서, 위에 제시한 준거를 실시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부정(否定)적 대답밖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뜯어 고치려는 개혁의욕(改革意慾)에 있다. 교사는 이러한 비교육적 현상을 보다 나은 지점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욕과 꿈을 가져야 한다.
학습지도의 조직
[편집]學習指導-組織
바람직한 학습지도의 문제는 타당하고 효과적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학습을 조직하는 문제에 귀착된다. 아무리 잘못된 학습이든 또 훌륭한 학습이든 거기에는 조직이라는 문제가 따른다.
서당의 훈장도 천자문을 가르치기 위해 학습조직을 따른다.
그런가 하면 원자물리학(原子物理學)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도 마찬가지로 학습조직을 한다. 다만 우열(優劣)과 질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당 훈장은 암송(暗誦)·천자문·회초리·설명·천자문쓰기 등을 적당히 배열하여 학습조직을 할 것이고, 원자물리학 교수는 강의·설명·연습·실지실험·계산·견학·실습 등을 통하여 학습을 좀더 복잡하게 조직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의 우열을 결정짓는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 학습자의 심리에 기초를 둔 심리학적 조직인가 하는 것이다. 고대→중세→근세→현대의 순서가 반드시 심리학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근세→중세→고대가 더 학습자의 심리에 부합되는 순서일지도 모른다.
또 학습을 조직하는 데 반드시 교사라는 존재가 있을 필요는 없다.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는 대학원 학생은 교수 없이 자기들끼리 모여 공부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시험을 치기도 한다. 또 혼자 독학을 하는 사람은 교사 없이 자기가 학습을 조직한다. 재료를 모으고 방법을 생각해서 적당한 시간표를 작성하고, 방법을 생각해서 적당한 시간표에 의해 공부한다. 혼자서 훌륭히 교사와 학습자의 이중역할을 원만히 하는 셈이다.
그러나 학습지도를 학습의 조직이라고 한다면 교사는 어디까지나 조직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조직자의 할 일은 집단이나 개인의 공통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 이것이 아마 교사의 고유한 역할이요, 직책이라 하겠다. 훌륭한 조직자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준거를 들면 아래와 같다.
(1) 훌륭한 조직자가 되려면 독재성(獨裁性)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결정을 혼자서 다 하고, 남에게는 시키기만 하는 명령형의 조직자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려면 민주주의를 믿는 정도에 그쳐서는 어렵다. 민주주의를 한 가지 신앙으로 믿을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인간이란 도대체 젊든 늙든 독재적인 지배나 통제 아래에서는 자기의 최선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리학에서 밝혀진 원리이다. 비록 선택의 자유와 결정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느끼는 불안이 있기는 하지만, 이 불안, 이 불균형(不均衡)이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집단의 학습자가 각각 제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방임하는 태도, 또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다고 거기에만 따르는 것은 모두가 다 이 지도력의 결핍 때문이다. 적극적인 지도력의 발휘가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3) 학습자들이 집단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그들의 목표를 발견하고 형성하고 분명히 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것 저것 하라고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다. 가치있고 바람직한 목표를 갖도록 격려·응원을 해 주는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 교사가 학습자의 동기를 크게 문제삼아야 할 근거가 놓여 있는 셈이다.
(4) 훌륭한 조직자가 가질 태도는 책임을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위임하고 분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학습자에게 다 맡기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아동에게 모든 것을 전부 맡길 수는 없다. 책임의 분배라는 문제도 분배받을 학습자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배한다는 것은 손을 뗀다는 뜻은 아니다. 분배와 위임의 뒤에는 반드시 지도와 배려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5) 창의성(創意性)의 존중이다. 두 개의 머리가 한 개의 머리보다 낫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지(集團知,group intelligence)의 존중 속에서도 창의성은 언제나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 개개인의 잠재적 가능성의 풍요함을 믿는다는 것은 훌륭한 조직자가 유의해야 할 점이다.
(6) 약점보다 강점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학습자가 교사의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그 성과가 목적한 대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흔히 있다. 이런 때라도 학습자의 약점을 찌를 것이 아니라 그 강점을 북돋아주는 데 내일에의 약속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7) 한 집단의 학습자들이 스스로 자기비판과 자기평가를 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어디가 잘못 되었으며, 어디가 잘 되었는지 스스로 평가·비판하여 발견하도록 해주는 것은 다음의 발전을 위해서 꼭 있어야 할 과정이다. 교사는 학습자 앞에 거울을 걸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다.
(8) 최소한의 통제를 가함으로써 학습자가 잘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대개 학습자의 자율성은 최초의 최소한의 통제 아래에서 배우게 된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자기 스스로의 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의미있는 학습
[편집]意味-學習
배운 것은 학습자에게 의미있는 것이어야 한다. '한 권 떼면' 모든 공부를 다 마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사나 학습자의 공통된 생리이다. 이것은 큰 암(癌)이다. 흔히들 그 교과서 속에 학습자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내용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한 권 뗀 교과서 내용을 잘 알고 암기하고 있으면 학습이 훌륭히 된 것으로 본다. 여기에 현대교육의 맹점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학습은 따져보면 의미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시작해서 그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미발견의 고도를 찾아가는 탐험가(探險家)의 심리, 새로움을 발명하는 과학자의 심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문제로 시작하지 않는 학습이란 결국에는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이다. 문제해결이란 문제에 관계된 여러 객관적 사태의 상호관계(相互關係)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상호관계의 단서(端緖)를 찾기 위해 학습자는 여러 가지 경험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동원된 경험이 단서를 풀기에 부족하든지 초점(焦點)이 맞지 않으면 학습은 실패하는 것이며, 성공하면 학습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학습이란 엄격히 따져보면 전혀 의미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의미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학습자에게 다소의 의미는 주기 마련이다. 이 원칙은 곧 바람직한 학습이란 가능한 한 학습이 의미가 있도록 학습장면과 학습활동을 조직하는 것에로 귀착(歸着)된다.
의미있는 학습을 부여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교사가 해야 할 것은, 불분명하고 멀고 별 관계가 없는 학습장면이나 학습경험을 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원숭이게 재주를 가르쳐 주듯이, 학습자에게 위태위태한 줄타기학습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2+1=3'을 기계적으로 배운 학습경험은 학습자의 머리 속에 있을 때만이 생명을 갖고, 그 고향을 떠나면 죽고 만다. 어쩔 수 없이 교사가 시키는 일이니 마지못해 하는 학습경험(아마 현 학교의 대부분의 학습이 이런 학습이겠지만)은 옷에 묻은 휘발유와 같은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곧 잊혀지기 마련이다.
학습지도의 방향
[편집]學習指導-方向
심리학은 바람직한 학습지도가 되기 위한 열 가지의 준거(方向性)를 밝혀 놓았다. 심리학의 여러 학파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음 몇 가지의 공통성(共通性)을 띠고 있다.
(1) 학습은 목적이다. 학습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어야 성과가 있을 뿐 아니라 효과도 빠르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학습, 혼이 없는 학습은 교사나 학습자 쌍방에게 낭비만 초래할 뿐이다. 교사는 학습자에게 배우고 싶다. 알고 싶다, 만지고 싶다, 사색하고 싶다라는 '싶다'의 감정이 움직이도록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에서 양자택일(兩者擇一)이나 용서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습자에 관한 여러 가지 인간심리의 원리를 응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시험 칠 테니 공부하자, 매맞을 테니 숙제하자, 미움받을 터이니 하는 척이라도 하자"는 심리가 학습자를 지배할 때, 학습이 된다고 해도 공포와 불안에 찬 분위기 속에서 이지러진 인생을 길러 낼 위험이 많은 것이다. 학습자의 일상생활·관심·흥미·능력·경험·발달 정도 등을 깊이 고려하지 않을 때 문제는 더커지는 것이다.
(2) 학습은 탐구와 발견의 과정에 의해 바라는 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목적이 정해지면 탐험가나 과학자의 위치에서 문제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교사가 학습경험을 조직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맹목적인 반복이다. 이러한 원칙을 뒷받침해 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학습이든 시행착오(試行錯誤)가 바로 맞는 경우보다는 많다.
바로 맞힌 것보다 착오의 빈도가 많았으니, 착오를 외우고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음은 이것을 증명해 준다. 또 적응이나, 단 한번의 경험으로도 학습하는 것이 심리학이 가르쳐 주는 원리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반복을 해 보아도 학습되지 않는 것은 아예 안 되는 것이다. 교사는 학습자가 학습이라는 발명·발견을 하도록 가능한 한 능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에 미국에서 브루너를 위시한 교육학자들이 과학적인 실험으로 입증한 바 있다.
(3) 학습자가 성취한 결과는 통찰력·이해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학습하는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 곳에 완전한 학습, 진짜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고등정신기능을 요구하는 학습경험은 거의 완전에 가까울 정도의 이해를 요구한다. 이해력뿐 아니라 관찰력·사고력·응용력·비판력·분석력·종합력 등을 요구한다. 암기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이러한 사고과정을 밟아야만 학습이 되는 경험이 현대생활에는 많이 있다.
(4) 심리학이 가르쳐 주는 바 학습의 전이(轉移)라는 준거이다. 학습의 궁극적 생명은 이 전이(轉移,transfer)에 있다. 산수의 셈법이 곧 실생활의 계산문제에 응용되기 바라며, 도덕과목에 100점 받은 학생은 훌륭한 공민적 자질을 나타낼 것을 기대한다. 전이가 없는 학습 자체를 위한 학습이란 교육에서는 의미없는 도락(道樂)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둘째·넷째는 근래에 와서 갑자기 각광(脚光)을 받기 시작한 고등정신기능(高等精神機能)의 학습에 기반이 되는 준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