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인도의 사상/인도사상의 역사적·사회적 배경
인도의 원주민
[편집]印度-原住民
인도는 예로부터 많은 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어 다수의 민족의 문화가 번영하였지만, 인도문화 형성의 주도적 지위를 점유해온 것은 아리아인이다. 인도인이 사용하는 주요 문화어는 거의 전부 아리아인의 언어에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아인이 침입해 오기 이전에 인도에는 이미 다른 제민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각각 이질적이고 정도가 상이한 여러 문화(文化)가 발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인더스문명이라 하겠다. 근년 인더스강 유역(아무리, 모헨조다로, 하라파, 찬프다로)의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3000년보다도 그 이전에 시작하여 기원전 3000∼2000년경 이 지방에는 한 민족이 존재하였으며 정연한 도시 계획하에서 광대하고 장엄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때 그들은 고도의 동기시대 문명(銅器時代文明)을 성립시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흥미 있는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주민의 일부는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다른 일부는 여러 외국과의 교역(交易)에 종사하고 있었다. 문자가 아직 해독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민족의 사상을 알 만한 방도가 없으나, 지모신(地母神)의 상(像)이라든가 시바신(神)의 상의 원형 같은 것, 또는 성기숭배(性器崇拜)의 형적(形蹟)도 보인다. 수신숭배(樹神崇拜)·동물숭배도 행하여졌고, 특히 소가 숭배(崇拜)의 대상이 되었다. 또 선정(禪定)의 수행(修行)이나 목욕도 행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사원·전당(殿堂)·제단(祭壇) 등은 보이지 않으며 또한 제구(祭具)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아리아인이 침입하여 왔을 당시 인도에는 여러 종류의 민족이 생존하고 있었다. 갈색(褐色)·단신(短身)·저비(低鼻)의 민족이었던 문다인(人)이 북부 인도 일대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인에 있어서 주요한 적대자(敵對者)는 드라비다이었다. 그들은 평원(平原)의 여러 곳에 작은 촌락을 형성하여 모계적(母系的)인 가족제도와 부족의 구성에 의한 집단생활을 영위하여 정주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아직도 동기문명(銅器文明)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철제 무기를 사용한 아리아인에 의해 정복 압도되어 버렸다고 추정된다. 그들은 공동사회의 수호신으로서 여신(女神)을 숭배하였으며, 또 성기숭배(性器崇拜)·사신(蛇神) 및 수목(樹木)의 숭배도 하고 있었다. 인도에 침입해 온 아리아인은 처음에는 이런 풍습을 혐오했지만 그것들은 훗날 인도 여러 종교의 민간신앙 속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리아인의 오하지방 침입
[편집]-人-五河地方侵入
아리아인의 원주지는 대략 카프카스의 북방 지방이었다고 하는 것이 근년에 입증되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시대의 경과와 함께 아리아 민족은 원주지인 초원을 출발하여 타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서쪽으로 향하여 이동한 제부족은 유럽에 정주하여 유럽 여러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동방으로 향하여 이주한 여러 부족 중에서 그 일부가 서남으로 이동하여 이란으로 들어가서 아리아계 이란인의 조상이 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동남으로 진출하여 서북인도에 들어가 5하지방(五河地方)을 점거하였다. 그들이 이른바 인도 아리아인이다. 이 침입은 기원전 13세기 말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국토에 거주하며 아마도 기원전 1000년경까지 <리그 베다>의 종교를 성립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이 토지를 점거하기 위하여 흑색저비(黑色低鼻)의 원주민과의 사이에 맹렬한 전투를 벌였던 것 같다. 그 경과는 <리그 베다>의 신화 속에 반영되어 있다. 원주민은 인구 수효는 많았지만 완전히 아리아인의 지배하에 예속되어 인도 사회에서 최하층 예민계급(隸民階級)을 구성하게 되었다. 아리아인의 사회구성을 보면 가부장(家父長) 제도에 의한 대가족생활을 영위하면서 순차로 대가족·씨족·부족을 구성해 나갔다. 부족의 장자(長子)를 왕이라고 한다. 왕은 하나의 부족 속에서 선거로 되었으나 후에는 보통 세습제도로 바꿨다. 당시의 아리아인은 혈연 관계·언어·종교에 있어서 공동체인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간에 정치적인 통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의 통일적 국가를 형성하는 일은 없었다.
카스트적 농촌사회의 확립
[편집]- 的農村社會-確立
펀자브 지방에 정주하고 있던 아리아인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동방으로 이주를 개시하여 갠지스강 상류의 비옥한 평원을 점거하였다. 이 지방의 기름진 토지와 혹심한 더위와 강우가 많은 기후는 농업에 대단히 적합하였다. 때문에 아리아인은 목축과 함께 농경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조그만 촌락을 이루었고, 사제자(司祭者)를 중심으로 씨족제(氏族制) 농촌사회를 확립하여, 고립적이고도 폐쇄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여 바라문교(敎)의 문화를 완성하게 되었다. 정복당한 선주민(先住民)은 예속된 백성으로서 노동이나 혹은 가정의 잡무에 종사하였다. 또 아리아인 속에서도 사제자(司祭者)와 왕족은 특별히 독립된 계급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각각 세습으로 되었으며, 그들 사이의 계급적 구별은 차츰 깊어져 4성(四姓)제도가 확립되었다. 4성(四姓)이라고 하는 것은 (1) 바라문(婆羅門:司祭者) (2) 크샤트리아(刹帝利:王族) (3) 바이샤(毘舍:庶民) (4) 수드라(首陀羅:隸民)의 4계급을 일컫는다. 바라문이 가장 존귀하고, 왕족이 이에 다음 가고, 예민은 가장 비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상이한 계급간에서는 결혼이 제한되었다. 후대에 다수의 카스트가 성립하여 상이한 계급간에는 결혼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금지되어 일부의 카스트는 부정하다고 간주되었다. 사제자(司祭者)인 바라문은 사회의 지도자로서 제사교학(祭祀敎學)을 전담하여 '인신(人神)'으로서 존숭(尊崇)되었다.
자유사상가의 출현
[편집]自由思想家-出現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정주하고 있던 아리아인은 그 뒤에 차츰 동방으로 진출하여 그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그와 함께 사회적 문화적으로 괄목할 만한 변동이 일어났다. 우선 아리아인과 선주 민족(先住民族)과의 혼혈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형성된 새로운 민족은 이제 벌써 아리아인의 전통적인 풍습 의례를 충실하게 준수하려고 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베다 문화를 무시하고 아리안계(系)의 변형된 속어(俗語)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물질적 생활은 풍족하였으며 또한 안락하여서 점차로 상공업이 성대하게 되어 다수의 소도시를 성립시켰다. 최초에는 이들 소도시를 중심으로 군소 국가가 많이 병존해 있었고, 그 중의 어느 것은 귀족정치를 혹은 공화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차츰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大國)으로 병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들 대국에서는 왕권이 현저하게 신장하여 왕족은 인간 중에서 최상자(最上者)로 간주되었으나, 반면에 바라문은 이전 만큼 위신을 갖지 못하였다. 또 모든 도시에서는 상공업이 대단히 발달하여, 화폐경제의 진전과 함께 막대한 재화가 축적되어 갔다. 마침내 상공업자들은 여러 조합을 만들어 도시 내의 경제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구래(舊來)의 계급제도는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으로 물질생활이 풍부해지고 안락하게 됨에 따라서 물질적 향락에 탐닉하여 도덕적 퇴폐의 현상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베다의 종교는 단지 미신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따라 유물론자(唯物論者), 회의론자(懷疑論者), 쾌락론자(快樂論者) 등이 대거 출현하여 다양한 논쟁을 벌였다. 그런가 하면 다른 면에서는 향락생활에 권태를 느낀 나머지 출가하여 선정(禪定)에 전념하는 행자(行者)가 많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사상가들을 '도를 닦는 사람(沙門)'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은 당시는 사상의 자유 및 발표의 자유가 극도로 용인되었다는 점이다. 불교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 시대의 일이다. 또한 당시의 이단설로서는 (<原始佛敎聖典> 속에 62見이라 하여 수록되어 있다) 푸라나, 고사라, 아지타, 파구다, 산쟈야, 니간다, 나타푸타의 6사(六師)가 특히 유력하였다.
마우리아 왕조
[편집]Maurya 王朝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7년에 서인도에 침입하여 몇 곳에다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부하 장병이 그 이상의 행군을 완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에 왕은 군대를 인솔하여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갔고, 이듬해 서방으로 귀환하여 323년 7월에 바빌론에서 객사하였다. 당시 갠지스강 유역의 평원에 있어서 최대 세력을 가졌던 것은 마가다국이었다. 마가다국은 난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기원전 317년경에 그 나라의 한 청년인 찬드라굽타가 마우리아(孔雀)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는 다시 서북 인도에서 그리스 군사세력을 일소(一掃)하여 거의 인도 전체에 이르는 최초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하였다.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왕(아육:阿育, 재위 대략 전 268∼전232)의 때에 마우리아 왕조의 위세는 절정에 달하였다.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의 역사상 전에 없던 대국가를 건설하였으나, 중앙집권화를 철저하게 수행하지 못하였다. 관료적인 국가 체제도 정치의 상부조직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는 데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왕조 자체도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으나 또 각 지방에 각각 다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다. 또 불교 교단에 거대한 장원(莊園)을 공여하여 준것은 왕조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리게 하였다.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도 인도 전체에서 통하는 표준어 또는 공통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소카왕의 이상은 당시의 실정에 비하여 너무도 고원한 이상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왕이 죽은 후에 점차 세력을 잃어 가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원전 180년경에 장군(將軍) 푸샤미트라에게 멸망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도 전체는 또다시 분열 상태에 빠졌다. 푸샤미트라왕은 슝거 왕조를 창시하였는데, 불교를 탄압하고 바라문교(敎)의 제사(祭祀)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왕실에는 불교에 귀의(歸依)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의 카누바 왕조(약 전75∼30?)도 바라문교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양 왕조는 갠지스강 유역을 지배하는 데에 그친다. 서북 인도에서는 그리스인의 여러 왕들이 서로 잇달아 침입한 끝에 몇 개의 왕조를 성립시켰다. 그들 여러 왕은 그리스적 교양을 쌓고 그리스의 신(神)들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국왕과 관리 중에는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그리스인의 고관으로 힌두교의 비시누신(神)에 귀의하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스인에 이어서 사카족이 침입하였다. 그후에 파르티아족이 침입하였다.
쿠샨제국시대
[편집]Kushan帝國時代
쿠샨족은 대월씨족(大月氏族)의 일종이다. 대월씨족은 원래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었으나, 기원 25년경에 쿠샨족의 족장 쿠주라 카드피세스가 대월씨의 다른 네 개의 부족을 지배하고, 60년경부터 서북 인도를 공략하였다. 그의 아들 웨마 카드피세스는 그 제국(帝國)을 확대하였다. 그후 카니슈카왕(약 132∼152 재위)이 인도에 침입하여 북방 인도 전체를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은 중앙 아시아·이란에까지 미쳐 아소카 왕 이래의 일대 제국(一大帝國)을 건설하였다. 그의 왕조는 약 3세기 중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이 제국은 그 영토가 광대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 로마와도 정치적·정치적·문화적 교섭이 있었고, 또한 영토 내의 서북 지방에 남아 있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동쪽은 중국으로부터 서쪽은 로마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문화를 포용하며 융합하여 여러 계통의 문화적 요소를 병존시키고 있었다. 경제적 방면에서는 경제정책의 성공이 통일국가 형성(形成)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이와 같은 융합적·포용적 경향은 종교 방면에 있어서도 현저하다. 예를 들면 카니슈카 왕의 화폐에는 그리스의 신(神)들과 조로아스터교, 힌두교의 신(神)들이 새겨져 있다. 불타의 형상을 새긴 것도 더러 남아 있다. 쿠샨제왕(諸王)은 여러 종교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쿠샨제왕이 스스로 신적 칭호를 사용한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는 대외 교섭이 활발하였으므로 새로운 학술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로마의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인도 고래의 천문학이 변화하여 새로운 천문학이 성립하였다. 의학(醫學)도 진보하여 외과, 내과가 나뉘어 있었으며 챠라카(2세기)와 같은 명의(名醫)도 출현하였다.
논리학도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점차 상식이 될 만큼 보편화 되었다. 예술 방면에서는 간다라 지방에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은 일종의 불교 예술도 출현하였다. 한편 남방인에 있어서는 안드라 왕조가 유력하였다. 이 왕조는 순수한 인도적인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바라문교를 국교(國敎)로 하여 바라문을 보호하였다. 인도 전체로 봐서는 다수의 소번후국(小藩候國)이 산재해 있었다. 그들은 다층의 신분적 구별을 기본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신분은 세습이었다. 그러한 사회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법전(法典)이 편찬되어 그것이 정당화하였다.
굽타 왕조
[편집]Gupta 王朝
쿠샨 제국 및 안드라 제국은 3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로 쇠미하여 허다한 군소제국(群小諸國)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마가다로부터 일어난 찬드라굽타 1세가 320년에 즉위하여 굽타왕조를 창립하였다. 그 다음의 사무드라굽타(330년경 즉위)는 남북으로 걸쳐 전 인도를 정복하여 마우리아 왕조 이후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풍만하고 염려(艶麗)한 인도의 고전문화는 이 시대에 꽃을 피웠다. 천문학이나 수학도 거의 이 시대에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초이론으로서 인도 고래의 바라문 교학(敎學)이 부흥되었고, 대체로 바라문교가 국교(國敎)로 채용되어,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바라문의 법전(法典)이 규준(規準)이 되었다. 또 힌두교 제파(諸派)는 바라문교의 학문·신화·습속을 풍부하게 섭취하여 바라문교와 융합함과 동시에, 점차로 사회의 상층 계급의 지지를 받아 사회적으로는 대단히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또한 철학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학문에 있어서 학파의 전통 즉 학계(學系)가 확립되었다. 각 학파마다 근본 경전(根本經典) 혹은 교과서가 작성되어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해졌다. 그 후의 모든 학자는 그 근본적 교설(敎說)을 받들고 하고 주해(註解)하여 그것을 상세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철학은 여러 학파의 체계가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굽타 왕조는 5세기 말기에 쇠미하여 붕괴하였다. 480년경부터 훈족이 침입해 와서 인도 문화를 파괴하였으나, 하르샤왕(戒日王 606∼647년 통치)이 북방 인도 일대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하르샤왕이 죽은 후에 인도는 또다시 분열 상태에 빠졌다.
회교도의 침입
[편집]回敎徒-侵入
회교도는 이미 8세기에 통상로(通商路)를 따라서 서북 인도에 침입하였으며, 1205년에는 인더스 하구(河口)로부터 갠지스 하구에 이르는 북인도 일대를 석권하였다. 불교 사원(寺院)이 철저하게 파괴된 것도 이때이다. 1221년에는 칭기즈칸(成吉思汗)의 군대가 인더스강변까지 쇄도하였고, 1398년에 티무르가 델리에 침입하여 5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하여 10만 명을 학살하고 본국의 수도건설에 필요한 기술자와 노예와 재보(財寶)를 끌고서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 티무르 5대 자손으로서 카불왕이었던 바베르는 1526년에 델리에 입성하여 무굴(蒙古)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왕조는 아크바르제(1542∼1605) 때에 이르러서 안정되었다. 그는 스스로 황제를 신(神)으로 하는 신종교(新宗敎)를 계획하였으며, 힌두 제왕(諸王)들을 회유하였고, 제수이트 선교사까지도 쾌히 맞아들였는가 하면 자이나교나 조로아스터교에도 관대하였다.
인도 북부는 10세기 이후, 남부는 12세기 이후 회교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회교도는 <코란>을 굳게 받들고 있어 그들의 초민족성(超民族性) 때문에 인도 고유의 사상가들과의 교섭은 없었다. 그렇지만 회교는 주로 인도 사회의 하층 사람들을 개종(改宗)시켰고, 그 때문에 자연적으로 인도적(印度的)인 변화를 받게 되었다. 이 시대에 북방에서는 회교도의 정치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였지만, 남인도에 번영하였던 비자야나가라 왕조(1336∼1646)는 바라문교 문화를 번성하게 하였다. 또 서방의 마라타 지방의 시바지(1630∼1680)는 농민군(農民軍)을 조직하여 회교도를 격퇴하고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서해안에 도달하였고, 포르투갈은 1510년 이래 고아를 점령하여 경영하였다. 17세기부터 유럽 제국(諸國)은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를 설립하여 인도에 진출하였다.
민중들 사이에서는 최고신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운동이 성행하여 수많은 종교적·문예적 작품이 근대 인도의 여러 언어로 저작되었다. 민중 문화의 흥륭(興隆)과 함께 종래의 학문 계통과는 관계없이 민중 속으로부터 새로운 사상가가 출현하였으며, 거기에서는 근대적 사유의 맹아를 볼 수 있다.
인도연방공화국의 성립
[편집]印度聯邦共和國-成立
영국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는 1600년에 설립되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적극적으로 인도 경영에 착수하여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차츰 프랑스의 세력을 능가하여 시크교도를 분쇄하고 서인도(西印度)를 약취(略取)하였다(1849년 종료). 세포이의 반란(1857)과 함께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1876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女帝)의 위(位)를 겸하게 되어, 인도는 완전히 영국의 영토가 되었다. 영국은 인도의 토착공업을 파괴하고 과중한 세금과 속박으로 민중을 괴롭혔기 때문에 점차 반영운동(反英運動)이 치열해졌다. 1885년에는 인도 국민회의가 설립되었고,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1905)는 인도 민족의 독립운동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는 바네루지 데이락(1856∼1920) 등이 활동하였으나 최후에 전인도적인 정치 지도자가 된 사람은 간디이다. 1947년에 독립이 인정되어 1950년에 인도연방공화국이 성립하여 헌법을 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