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인도의 사상/정통바라문 계통의 철학체계
정통바라문 계통의 철학
[편집]正統婆羅門系統-哲學體系
정통바라문 계통의 철학체계로서 종종 여섯 가지를 드는데 이것을 <6파 철학(六派哲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키아 학파와 요가 학파, 니야야 학파와 바이셰시카 학파, 미맘사 학파와 베단타 학파는 각각 자매관계에 있다. 그외에 언어의 형이상학이 문법학자들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이들 제학파(諸學派)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베다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통으로 생각되고 있다.
삼키아설
[편집]Samkhya說
삼키아, 즉 수론학파(數論學派)의 개조는 가피라(전 350∼전250 ?)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하고 있는 최고 원전은 이시바라크리슈나(自在黑, 4세기)의 <삼키아 송(領)>이다. 삼키아 학파에서는 <우파니샤드>의 철학자인 웃달라카(전 600 ?∼전 500 ?)의 사상(思想)을 비판적으로 개혁하여 유일(唯一)한 유(有) 대신에 두 개의 실재적 원리를 산정하였다. 하나는 정신적 원리로서의 순수정신인데 푸루샤(神我), 혹은 아트만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또 하나의 원리는 물질적인 근본원질(根本原質:프라크리티, 自性 또는 프라다나)인데, 이것은 현상세계의 개전(開戰)의 원리가 되기 때문에 미개전자(未開展者:아브야크타, 非變異)라고도 불린다. 순수정신은 실체로서의 개아이며 원자대(原子大)로서 다수 존재하는데 그 본질은 지(知, 즈냐) 또는 사(思, 칫트, 체타냐)라고 한다. 그것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다만 근본원질(根本原質)을 관조할 뿐이요 그 자체는 상주불변이며 순수청정한 것이어서 생사도, 윤회도, 해탈도 모두 순수정신 그 자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없다. 이에 대하여 근본원질은 근본적인 질료인(質料因)이지만 순수정신의 관조를 기회인(機會因)으로 하여 개전(파리나마, 轉變)을 개시한다. 그때에 근본원질에서 최초로 생기는 것을 근원적 사기능(根源的 思機能:붓디, 覺) 또는 큰 것(마하도, 大)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확인의 작용(作用:決智)을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어서 정신적 작용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순수한 물질적인 것으로 신체 속의 한 기관이다. 다음에 이 근원적 사유기능(思惟機能)으로부터 자아의식(自我意識:아항카라, 我慢)을 생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내가 한다. 이 물건은 나에게 속한다. 이것이 나다"라고 하여 자기 본위의 견해를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자아의식의 그릇된 생각이 우리들의 윤회를 성립시키는 근본이 되고 있다. 다음에 그 자아의식으로부터 두 종류의 창조가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10가지의 기관(目·耳·鼻·舌·身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발성기관·수·족·배설기관·생식기관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의 행동기관)이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섯 가지의 대상영역의 미세한 요소(要素:단마트라, 唯)가 생기는데, 후자로부터 5원소가 생긴다(聲唯→空大, 觸唯→風大, 色唯→火大, 味唯→水大, 香唯→地大). 이상 열기한 제원리를 합쳐서 <25원리>(二五諦)라고 일컫는다. 순수정신은 본래 순수청정(純粹淸淨)한 것이기는 하지만 물질에 의하여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이 생존은 괴로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수청정한 본성이 나타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허탈의 직접적인 원인은 지(智)인 것이다. 수행에 의하여 순수정신의 자가 완성되었을 때에 해탈이 일어나지만 그 해탈도 근본질료인(根本質料因)의 편에서 일어나는 것이요, 순수정신 그 자체에는 하등의 변화도 없다.
요가파
[편집]Yoga派
요가파는 요가수행에 의해 해탈에 도달하는 것을 가르치는 학파이다. 그 근본 정전 <요가 수트라>의 편찬자는 파탄잘리라고 일컫는데, 사실은 기원 400∼450년경에 현형(現形)과 같이 편찬되었다. 이 학파에서는 불교의 영향도 인정되지만 그 형이상학설은 대체로 삼키아 학파의 그것과 거의 같고, 다만 요가파에서는 최고신을 인정하는 점이 상이하다. 요가파에 의하면, 최고신(最高神)은 한낱 영혼에 불과하며 세계창조는 행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극히 오랜 옛시대부터 삼림(森林)의 수목 아래에서 정좌 명상(靜坐瞑想)에 몰두하는 일이 행해졌다. 그 기원은 아마 인더스 문명시대의 원주민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경지 자체를 즐겨 안락한 것을 구하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점차로 종교적인 의미가 강화되어 뜻을 제어(制御)하는 실천법으로서 존중되었다. 일상생활의 상대적인 동요를 초월한 곳에 절대정(絶對靜)의 신비경이 있어, 그 경지에서는 절대자와의 합일이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수행을 요가라고 부르고, 그 수행을 행하는 사람을 요가행자(行者)라고 이르며 그 완성자를 무니(牟尼, 聖者)라고 일컫는다.이와 같은 신비적 경지는 많은 학파에 있어서 해탈의 경지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학파들이 다 함께 요가의 수행을 실천법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요가
[편집]Yoga
요가의 어의는 마음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의 지멸(止滅)>을 의미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따라서 외부적인 속박을 떠남과 동시에 내부적인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한정(閑靜)한 장소를 선정하여 좌정하되, 좌법에 쫓아 다리를 여미고 호흡을 가라앉게 하여 마음의 산란을 막아서, 5관(五官)을 제어하여 유혹을 피하고, 다시 나아가 마음을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매(三昧=等持)에 달하는 것인데, 삼매에도 천심(淺深)의 구별이 있어서 유상삼매(有想三昧)와 무상삼매(無想三昧)로 나눈다. 전자는 대상의 의식을 수반하는 삼매이며, 또한 대상에 속박 제어되어 있고 또 심작용(心作用)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종자삼매(有種子三昧)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무상삼매(無想三昧)에 들어가면 이미 대상의식(對象意識)을 수반하지 않고 대상에 속박되지 않으며, 그 경지에 있어서는 심작용(心作用)의 여력마저도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라고도 한다. 이것이 참된 요가이며 그때에 푸루샤는 관조자로서 그 자체 속에 안주한다. 후대에 곡예와 같은 무리한 수행을 하는 하타 요가의 실천도 성행하였다.
미맘사 학파
[편집]Mimamsa 學派
미맘사 학파는 <베다 성전(聖典)>속에 규정되어 있는 제사 의례(祭祀儀禮)의 실행 의의를 철학적으로 연구하여 통일적 해석을 주는 학파이다. 이 학문을 제사(祭事) 미맘사(카르마 미맘사)라고 하는데 미맘사라고 하는 것은 심찰고구(審察考究)라고 하는 의미이다. 이 학문은 쟈이미니(전200∼전100 ?)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이 계통의 학설을 기록한 짧은 문구가 암송에 의하여 전해져, 기원 100년경 하나의 조직으로 종합 편찬되어 근본 경전(根本經典) <미맘사 수트라>가 성립되었다. 이 학파는 법(法:달마)의 고찰 연구가 그 목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법은 <베다 성전>에 규정되어 있는 제식(祭式)의 실행이며, 그것이 종교상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제식(祭式)의 실해은 상층3계급(上層三階級)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미맘사의 학자에게는 <베다 성전>의 절대성을 논증하는 것이 우선 제일 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베다 성전>은 인간이 제작한 것이 아니고 우주의 변화생멸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실재하고 있다. 그러나 베다는 언어로 된 것이기 때문에 베다의 상주영원성(常住永遠性)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상주성(常住性)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언어라는 것은 단지 음성(音聲)뿐 아니라 음성을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다. 음성은 무상(無常)한 것이지만 언어는 음성과 의미와의 매개체(媒介體)이므로 상주(常住)이다. 그런데 정당한 관념 내지 지식은 항구적으로 실재하는 것(常住)으로서 선천적인 것이요,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베다 속에만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된다. 이것에 복종하는 것이 이른바 법(法)이다. 특정한 제사를 실행하면 우리들 자신에 일종의 여력이 남아 그것이 나중에 과보(果報)를 가져온다. 그 여력을 신득력(新得力:아푸르바)라 한다. 그 신득력(新得力)이 바르고 착하면 미래에 있어서 생천(生天) 등 번영(繁榮:아브휴다야)의 과보(果報)를 얻어 복락을 향수한다. 후에 쿠마릴라 (650 ?∼700 ?)와 프라바카라 (650 ? ∼ 750 ?)가 나타나서 약간 상이한 학설을 주장하였다.
바이셰시카 학파
[편집]Vasesika 學派
바이셰시카 학파의 개조(開祖)는 카나다(별명 울루카, 전 150 ? ∼전 50 ?)라고 하는 사람이다. 기원 50∼150년경에 이 학파의 근본 경전인 <바이셰시카 슈트라>가 편찬되었다. 바이셰시카 학파의 한역(漢譯)으로서는 <승론(勝論)>·<위세사(衛世師)>·<폐세사가(吠世史迦)> 등이라 쓴다. 이 학파는 우리들의 지식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는 직접 지각(直接知覺, 現量)과 추론(推論, 比量)만을 인정한다. 여러 철학파가 일반적으로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데 대하여, 이 학파는 성전에서 얻는 지식을 추론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식의 일종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독립된 지식근거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 어상주론(語常住論)을 배척한다. 일반적으로 언어와 의미와의 결합관계는 편의적·습관적이어서 선천적 혹은 항구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여하한 지식도 전부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학파는 실체·성질·운동·보편·특수·내속(內屬:實·德·業·同·異·和合)이라고 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原理:句義)를 세워서 현상계의 여러 사물의 구성을 밝힌다. 실체로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4원소(元素=四大)와 허공(虛空)과 시간과 방위(方位)와 아트만(我)과 의(意)라는 아홉을 내세우고 있다. 이 4원소에는 각각 성질이 다른 무수한 원자(原子)가 있다. 원자는 단순미세한 것으로 구체(球體)를 이루고 있어 불멸이다. 성질로서는 색(色)·향(香)·미(味)·가촉성(加觸性, 觸)·수(數)·양(量)·별이성(別異性, 別體)·결합(結合, 合)·분리(分離, 離)·저쪽(彼體)·이쪽(比體)·지각작용(知覺作用,覺)·쾌감(快感,樂)·불쾌감(不快感, 苦)·욕구(欲求, 欲)·혐오(嫌惡, 瞋)·의지적 노력(意志的 努力, 勸勇)이라는 17가지를 인정한다. 운동으로서는 상승·하강·수축·신장·진행의 다섯 가지를 인정한다. 보편과 특수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최상의 보편은 유성(有性)인 것이요, 이에 반하여 극한에 있어서의 특수(特殊)는 원자(原子)속에 있어 보편을 포함하지 않는다. 유성(有性)과 극한(極限), 특수와 중간에 있어서 표준을 세우는 방법에 따라서 동일물(同一物)이 보편으로도 되며, 또한 특수로도 된다. 그런데 성질과 운동, 보편과 특수는 본래 불상리(不相離)인 것으로서 실체에 내속(內屬)한다. 따라서 이 내속이라고 하는 관계를 독립된 원리로 간주한다. 이것은 보편도 아니며 특수도 아니다. 이 학파에 의하면 <베다 성전>은 일단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베다의 내용을 쫓아서 행동할 것 같으면 다만 과보(果報)로서 생천(生天)을 가져오게 할 뿐이고 윤회(輪廻)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바이셰시카의 6원리의 연구와 실수(實修)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트만이 암매(暗昧)해진 것은 뜻(意)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뜻을 제어하는 요가의 수행(修行)을 중심으로 하였다. 요가에 의해 전생(前生)으로부터의 여력 즉, 불가견력(不可見力)을 소멸시키면 해탈이 실현된다. 그 경지에 있어서는 아트만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순수한 실체로서 존재한다. 후에 바이셰시카 학파에서는 혜월(慧月 550 ?∼650 ?)이 <승종10구의론(勝宗十句義論)>(玄裝譯)을 저작하였다. 10구의(十句義)란 6구의(六句義) 외에 보편이면서도 특수한 것(俱分), 가능력(可能力:有能), 무능력(無能力:無能), 무(無:無說)을 말한다. 그는 보편을 유성(有性)에만 한정시키고 특수를 극한에 있어서의 특수에만 한정하였기 때문에 그 중간자(中間子)를 별도로 세운 것이다. 가능력(可能力)은 실체·성질·운동이 그 결과를 생기게 하는 능력이요, 무능력은 그것이 없는 것이다. 또 우주를 지배하는 주재신의 존재를 승인하게 되었다.
니야야 학파와 논리학
[편집]Nyaaya 學派-論理學
논리학 연구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명(因明)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을 조직적으로 대성한 것은 니야야 학파(學派)이다. 니야야라는 것은 원래 이론(理論), 정리(正理)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후에는 논리학적 연구 전반의 의미가 되었고 다시 학파명으로 되었다. 개조(開祖)는 가우타마(別名 아구바다:足目인데, 이 학파의 근본경전(根本經典) <니야야 수트라>는 250∼350년경에 편찬되었다. 니야야 학파의 교설(敎說) 중에서 형이상학에 관한 부분은 대체로 바이셰시카파(派)와 유사하다. 인생은 '고(苦)'에 번뇌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인간이 생존(生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존(生存)은 인간이 활동(活動)을 하는 데 근거한다. 그런데 인간의 활동은 여러 가지 결점 즉 탐욕·혐오 등에 근본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그런 결점은 '오류(誤謬)의 지(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고민의 근원을 추구해 들어가면, 결국 '오류의 지(知)'는 바로 고(苦)가 일어나는 구극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근본적인 오류의 인식(認識)을 제거하여 만유의 진실상을 인식할 것 같으면 자연히 고뇌를 이탈하게 된다. 이것이 해탈이다. 해탈에 이른 사람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하고 요가수행을 해아만 한다. 이 학파는 바이셰시카파(派)아 같이 한없이 많은 원자가 오랜 옛적부터 존재하여 불변불멸(不變不滅)이며 그것들이 합하여 자연세계를 성립시키고 있다고 한다. 또 아트만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정당한 지식을 얻기 위한 인식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직접지각(直接地殼) (2) 추론(推論) (3) 유비(類比), 비유컨대 물소(水牛)는 소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지고 후에 실물(實物)인 물소를 보고서 이것이 물소라고 아는 경우이다. (4) 신뢰할 만한 사람의 언어등이다. <베다 성전>도 이 속에 포함된다. 미맘사 학파 등의 어상주론(語常住論)에 반대한 점은 바이셰서카파와 한가지다.
추론(推論)은 5분작법(五分作法)이라고 일컬어지는 논식(論式)의 형으로 표시된다.
(1) 주장(主張:宗) ; 저 산(山)은 불을 가지고 있다. (2) 이유(理由:因) ; 그것은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3) 실례(實例:喩) ; 어떤 것이든지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는 불이 있다. 비유컨대 아궁이와 같다. (4) 적용(適用:合) ; 연기가 일어나는 아궁이와 같이 저 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5) 결론(結論:結) ; 따라서 저 산은 불을 가지고 있다. 13세기에 미티라에 강게샤(12세기 ?)가 나타나서 신(新) 니야야파(派)를 창설하였다.
베단타 학파
[편집]Vedanta 學派
베단타 학파의 근본경전(根本經典) <브라흐마 수트라>(別名 <베단타 수트라>)는 400∼450년경에 현형대로 편찬되었다. 그것은 종전의 제 해석 혹은 제설을 요약·정리·비판하여 한 개의 체계로 조직한 것이어서 그후의 베단타 철학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후의 힌두교 제파(諸派)의 개조들은 각기 독자적인 입장에서 주석을 하고 있다. <브라흐마 수트라>에 의하면 절대자는 브라만이고(여러 베다 성전의 설명 문구는 여러 가지 상이하지만 그것들의 취의(趣意)는 어느 것이나 브라만을 가르치는 데에 있다). 그것은 최고자라고도 불려지며 인격적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순수한 정신적 실체, 순수(純粹)한 유(有)이며, 상주(常住)·편재(遍在)·무한·불멸인 것이다. 만유의 생기(生起)와 존속(存續)과 귀멸(歸滅)이 일어나는 기본인 것이며 만유의 모태다. 브라만은 세계의 질료인(質料因)인 동시에 세계 창조를 사념하여 실행하는 인격적인 행동주체(行動主體)이다. 현상세계의 다양한 양상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창조자는 어구를 생각해내서 활동을 일으킨다. 세계 창조의 목적은 브라만의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다. 현상세계는 세계원인(世界原因)과 다르지 않다. 세계가 개전(開展)할 때에는 브라만에서 허공(虛空)이 생기고, 허공에서 바람, 바람에서 불, 불에서 물, 물에서 땅이 생긴다. 이 5원칙(五元素)가 현상세계를 만들어낸다. 5원소가 브라만의 속에 귀입(歸入)할 때에는 그것과 역(逆)의 순서로 행해진다. 세계의 창조·존속·귀멸(歸滅)의과정은 무한하게 반복한다. 개아(個我)는 브라만의 <부분(部分)>인데, 그것과 다른 것 또한 다르지 않은 것이 무시 이래(無始以來)의 유전윤회(流轉輪廻)를 계속하고 있다. 인생의 목적은 해탈인데 그것은 곧 브라만과의 합일이다. 명지(明知)를 얻은 개아(個我)는 사후에 신로(神路)를 진행하여 최후에 브라만에 도달한다. 브라만과 합일하면 모든 개아(個我)는 구별이 없게 되어, 다만 의욕만으로써 원망(怨望)을 달성한다. 가우다파다(640 ?∼690 ?)가 저작한 <만두키야송(頌)>은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의 취의(趣意)를 천명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우다파다는 대아(大我)를 허공(虛空)에, 개아(個我)를 병(甁)속의 공간에 각각 비유하여 양자(兩者)가 본래 둘이 아닌 것을 논한다. 그 다음에 그는 <우파니샤드>의 속에 여러 가지 상이한 가르침이 설명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사실은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8세기 초에는 인도 최대의 철학자라고 이르는 샹카라가 나타나서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주창하였다. 후에 그의 학계(學系)는 중세 이후의 인도 사상계에 있어서 압도적인 세력을 유지해 내려왔다. 가우다파다나 샹카라의 사상 혹은 그것에 유사한 학설은 인도 일반에게 마야설(說) 혹은 가현설(假現說)이라고 불려진다. 이와 같은 사상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면(假面)의 불교도(佛敎徒)'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후에 바스카라(750∼800 ?)가 나와 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의 입장에 서서<브라흐마 수트라>를 주해하였다. 브라만과 현상세계는 다 함께 실재이며, 브라만과 개아(個我)의 관계는 불과 불꽃과의 관계에 대비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지식 외에 행위도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知行倂合說). 불교나 불이일원사상(不二一元思想)의 영향을 받은 특이한 저서로서는 <요가 바시시타>가 이 시대에 나타났다. 이것은 <라마야나>를 기초로 저작되었다. 이에 의하면 세속의 실제생활 속에서 나무꾼이나 어부(漁夫)들까지도 해탈할 수 있다. 전승설(傳承說)이나 보시나 사원의 의례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설령 성전의 말이라 하여도 이(理)에 맞지 않는 일은 좇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때로는 세속의 규정에 반항하여 연애지상주의적인 사상까지도 나왔다.
샹카라
[편집]Sankara (700∼750 ?)
인도의 최대의 철학자. 그는 남부인도에서 출생하여 베다를 학습하고 유행자(遊行者)로서 여러 지방을 편력하면서 다양한 기적을 행하였다. 또한 승원을 건설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저술하였고, 최후에 북부 인도에서 영면하였다고 한다. 그는 <브라흐마 수트라 주해(註解)>를 비롯한 책을 저술하였으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절대자 브라만은 여하한 한정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무차별의 실재이며, 최고아(最高我)라고 주장한다. 개아(個我)는 그 본체에 있어서는 최고아와 동일한 것이다. 누구든지 아트만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데 그 아트만은 브라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브라만이 현실의 경험 세계에서 개별적인 다수의 개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명(無明) 때문이다. 그것은 각 개아(個我)를 자기중심적인 행동주체로 성립시키고 있는 선천적 원리(先天的 原理)이다. 그것은 순수지(純粹知)를 현혹하여 혼미시키는 작용이 있으며 윤회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현상계의 다양상(多樣相)·차별상(差別相)도 무명(無明)에 의하여 성립하고 있는 것이요, 승의(勝義)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환상(마야)과 같은 것으로 거짓으로 나타나고 있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세계창조는 주재신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지만, 주재신은 브라만이 무명(無明)의 제약을 받고 성립한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무명(無明)은 유(有)나 무(無)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브라만에 따라서 존립하고 있는 일종의 원리이다. 이 무명은 아트만의 본성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소멸한다. 개아(個我)가 사실은 최고아(最高我)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해탈 즉 일체의 고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된다.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있어서 개아는 브라만과 합일하여 그 개별적인 존재를 잃는다.
언어의 형이상학
[편집]言語-形而上學
문법학파(文法學派)는 바르타리하리(530∼630/651 ?)에 의하여 부흥되었다. 그는 문법학의 기초를 베단타 철학에 의하여 세우고 있다. 그는 재가생활과 출가생활의 사이를 일곱 번이나 거듭하였지만 어느 쪽도 철저하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인 브라만은 상주(常住)하는 실체(實體)로서 공간적·시간적 규정을 초월하고 있다. 그것은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일(一)과 이(異), 유(有)와 무(無)라고 하는 대립적 관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유(有)가 무(無)로 되고, 또 무가 유로 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변화 일반이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절대자이기 때문에 현상계의 차별상(差別相)·다양상(多樣相)을 성립시키는 기체(基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브라만이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말(語)과 의미와의 결합관계는 상주 불변(常住不變)이지만, 언어의 본체는 단순한 음성은 아니고 스포타라고 불리는 것이다. 스포타는 음성에 의하여 개현(開顯)되어, 의미를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그것은 음성의 생멸변화를 초월하고 있어 상주이며 단일불가분(單一不可分)이다. 인간의 활동은 언어에 기본하여 행해진다. 언어의 본성을 이해시키고 말(語)의 바른 용법을 가르치는 문법학(文法學)은 해탈에의 문(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