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삼국시대의 사상/삼국시대의 교육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국시대의 교육사상〔槪說〕[편집]

삼국시대의 교육으로 말하면 우선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를 가르쳤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때 태학도 옮겨졌을 터인데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천도 후 2세기, 중국은 당나라의 세상이 되고 3국이 이로부터 얻은 바 컸는데 고구려 27대 영류왕 때에는 당나라에 파견하여 그 국학(國學)에 입학시켰는데 고구려의 태학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백제에는 태학(太學)을 세운 기사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 4세기, 백제의 14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서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역사기록을 만들게 하였다고 전하여져 있다. 또 백제로부터 일본에 간 유명한 박사 왕인(王仁)도 약간 후대이지만 거의 같은 시기의 사람이다. 이리하여 고구려의 영류왕이 자제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킨 것과 동년에 백제의 무왕도 또한 같은 방침을 취하고 있으며 그 후 20년에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크게 교학(敎學)의 발달을 이루지 못한 것같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그러므로 그 문화의 수입도 매우 늦고 있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9년(고구려와 백제의 자제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킨 해와 같은 해)에 비로소 자제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그 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켰다는 것 밖의 그 이전은 아무런 교육에 관한 기사가 없다. 신라가 한반도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은 제30대 문무왕 대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고 간주되는 것은 원광(圓光)의 교육 사상이요, 이것은 또 삼국시대의 교육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소수림왕[편집]

小獸林王

고구려 17대왕(재위 371∼383). 일명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여 처음으로 고구려를 개화시킨 왕으로 왕 2년(372)에는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보낸 불상·경문과 순도(順道)의 입국을 맞아 한국 불교의 기원을 이루게 하였고, 같은 해에 최초의 교육 기관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자제를 교육시켰으며, 다음해(373)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제도를 개혁하였다.

태학[편집]

太學

고구려 때의 교육기관. 소수림왕 2년(372) 중국의 영향을 받고, 중앙에 설치한 국립 학교로서 경학(經學)·문학(文學)·무예 등을 교육하였으며 여기에는 상류층의 자제만이 입학하였다.

경당[편집]

고구려의 사학(私學)기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것. 평민층의 자제에게 경전과 궁술(弓術)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평양 천도 이후 전국 각처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문진[편집]

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의 학자. 태학박사(太學博士)로 600년에 왕명을 받아 국초에 편찬한 국사 <유기(留記)> 100권을 5권으로 요약하여 <신집(新集)>을 편찬하였다.

고흥[편집]

高興

백제 중기의 박사(博士). 375년에 백제에서는 처음으로 국사인 <서기(書記)>를 엮었고, 그 밖에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紀)> 등을 지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의약과 음양5행(陰陽五行)의 설에도 밝았다고 한다.

이사부[편집]

異斯夫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 신라 진흥왕 때 왕에게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거칠부(居柒夫) 등으로 하여금 수찬(修撰)케 하였는데, 그는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서 잘하고 못하는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온데 사기(史記)를 수찬하여 놓지 아니하오면 후대에 무엇으로써 사실(史實)을 볼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니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에 통하는 역사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광의 교육사상[편집]

圓光-敎育思想

신라 진평왕 때의 고승 원광(542∼640)이 세속5계(世俗五戒)를 통해 보여준 교육사상. 그가 강조한 교육이념은 힘과 슬기요, 충(忠)·효(孝)·신(信)·용(勇)·관(寬)이라는 다섯 가지의 덕목(德目)이다. 우리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그 시대의 위대한 교육사상가가 전래의 교육적 예지를 자기 한 몸에 이어받아 다시 그로부터 새로운 정신적 생명을 샘솟게 하는 현상을 보게 되는데, 새삼 그 역사적 의의를 느끼게 되곤 한다. 원광의 경우가 그렇다. 원광은 신라 진평왕 때의 법사로 신라로 치면 그를 전후하여 중국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훗날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낸다. 그는 훗날에 진(陳)나라에 유학하여 진평왕 22년(600) 귀국 후에는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이미 그의 명성이 떨쳐 그의 학덕을 흠모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귀산(貴山)과 추항 역시 그러한 청년중의 하나였는데, 그들이 원광법사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다름 아닌 화랑도의 교육이념인 세속5계(世俗五戒)였다. 그가 추구한 교육적 인간상은 '힘과 슬기의 조화적 인간'이었다. 세속5계가 충(忠)·효(孝)·신(信)·용(勇)·관(寬)이라는 다섯 덕목으로 표시되듯 여기에는 싸움터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강용(剛勇)한 힘이 강조되는 반면 풍부한 인간성을 토대로 한 신의와 관용, 슬기가 강조되어 문무겸비(文武兼備)의 화랑이야말로 이상적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고대 희랍의 이상상(理想像)이 '예지인 (the man of wisdom)'과 '실천인 (the man of action)'을 합친 조화된 인간에 있었듯이 신라의 화랑은 바로 그와 같은 슬기와 힘을 아울러 지닌 조화된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신라의 화랑들이 남긴 용맹스럽고도 슬기로웠던 사실(史實)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항상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방향감각을 제시한 것은 다름아닌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5계에 담긴 '힘과 슬기의 조화적 인간'이었다고 하겠다.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5계는 광대참신(廣大斬新)한 학덕세계(學德世界)의 번득임이었다.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5계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학덕세계를 전제로 하여 가능하다고 본다. 그의 수학(修學)의 과정을 보면 제자백가·4서 3경·<춘추>·<사기> 등을 읽고(유교적 교양을 쌓고), 불경(佛經)을 공부하여 진흥왕 27년(566) 승려가 되었다. 571년 삼기산(三岐山)에 들어가 수도(修道)하고 진(陳)나라에 들어가 금릉(金陵)의 장엄사에 가서 승민(僧旻)의 제자로부터 열반경(涅槃經)과 성실론(成實論)을 배운 후 소주(蘇州) 호구산(虎丘山)에 있는 서산사(西山寺)에서 구사론(俱舍論)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연구하고 불경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진나라가 망하자(589) 수(隋)나라의 장안(長安)에 가서 담천(曇遷)의 섭대승론(攝大乘論) 강의를 듣고 혜원(慧遠)·영유(靈裕) 등으로부터 <열반경(涅槃經)>을 비롯해서 여러 경전을 배웠다. 이리하여 진평왕(眞平王) 22년(600)에 귀국,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니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저술하여 불교의 새로운 지식을 신라에 도입했던 것이다. 이렇듯 원광(圓光)의 세속5계(世俗五戒)는 당대(삼국시대)의 교육사상의 결정체로서 그의 학적(學的)인 배경과 함께 후세에 찬연한 광채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韓 基 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