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삼국시대의 사상/삼국시대의 정치·사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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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정치·사회사상〔槪說〕[편집]

삼국시대는 이른바 고대국가 시대여서 종래의 선거제(選擧制)나 추대(推戴)에 의한 왕의 계승이 세습제(世襲制)로 확립되었으며, 관료제의 확립과 더불어 정치제도의 정비에 따른 율령의 반포가 수반되었다. 동시에 고대국가의 정치이념으로서 불교가 채택되었으며, 중국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독자적인 건원(建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삼국에는 각기 독립된 사직(社稷)과 조묘(祖廟)의 관념이 보존되어 계승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국가가 형성·완성된 이후라 할지라도 그런 부족국가적인 흔적과 유제(遺制)는 고대국가가 존재하는 데까지는 강인하게 존속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고대국가의 정치·사회·사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화백제도[편집]

和白制度

화백은 신라 귀족 대표자 회의로서 씨족공동사회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는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 (其有大事 則聚群官 詳議而完之)"라 하였고, <당서(唐書)><신라전(新羅傳)>에도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事必與衆議 號和白一人異則罷)"라 하여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를 말한다. 이 때의 백관(百官)이란 진골(眞骨) 대표로서 흔히 대등(大等)이라 불려지며, 그 의장이 상대등(上大等)이었다. 이것은 만장일치라는 중의(衆議)의 총화(總和)에 따른 민주적 방식이라 볼 수 있으나, 실은 어떤 사건 처리에 만장일치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 회의 장소인 4영지(四靈地)가 비공개된 산악이란 점과 더불어 커다란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이것은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으니 결국 화백(和白)은 신라의 고대국가 성립이전, 즉 정치제도의 미분화 시대인 귀족 연맹기에 있었던 부족장 연맹정치의 유물이었고, 고대국가가 완성됨에 따라 형식적인 제도가 되고 말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화백회의 모양을 <삼국유사> <진덕왕조>에는 "왕(王)의 대(代)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호림공·염장공·유신공이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할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 좌중(座中)으로 달려들었다. 제공(諸公)이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고 하여 6명의 대신이 우지산( 知山) 바위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했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춘추는 여기서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였다.

골품제도[편집]

骨品制度

신라 귀족간에 존재한 신분제도. 정치·사회·의식주에까지도 차별(差別)과 구분을 둔 신라 사회의 바탕이 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부족국가이던 신라가 고대국가로 등장되면서 기존의 신분, 지위 및 혈통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발생된 것으로 원래는 8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왕족으로서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귀족으로서 6·5·4두품(頭品), 그리고 그 밑에 3·2·1두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현존 사서(史書)에는 4두품 이상만이 남아 있다. 성골은 부모 양쪽이 왕족인 경우로 가장 신성한 품(品)이다. 이는 고대국가가 완성되면서 완비되었으리라 추측되는데 남계(男系)는 김씨(金氏), 여계(女系)는 주로 박씨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골은 진덕여왕의 사망으로 단절되고 제2 왕족인 진골왕이 등장하였다. 진골은 한쪽만이 왕족인 경우로 그 최초의 왕인 무열왕(김춘추)을 본다면, 그는 진지왕자(眞智王子)인 용춘(龍春)의 아들로서 그 부인은 신김씨(新金氏)인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이었다. 그 후 왕은 진골왕으로 세습되었고, 중앙 및 지방의 최고 관직은 진골만이 독점한 실질적인 신라 최상층이었다. 다음 6두품은 일명 '득난(得難)'으로서 지방 부족장이 중앙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6두품이 된 경우나, 또는 족강(族降)해서 진골이 6두품이 된 경우 등이 있으나, 최상의 비(非)왕족 귀족으로 나말(羅末)까지 남은 대표적인 계층이며 가장 반골품적(反骨品的)인 신분이 되었다. 이들은 중앙의 시랑(侍郞 차관)이나, 지방의 태수(군수)까지만 올라 갈 수 있는 신분이었다. 6두품 아래에는 5·4두품이 있다. 그 밑의 3·2·1두품들은 일찍부터 평민화되어 제일 먼저 소멸되었다. 이러한 골품제는 그 외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즉 모든 골품 계층이 관계의 진출에 있어서 하한선(下限線)이 없는 동일선상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며, 대신 상한선(上限線)이 각 품(品)마다 전혀 다른 것이다. 자색의 관복(官服)을 입은 진골은 제5관등(官等)인 대아찬(大阿飡) 이상,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독점할 수 있으며, 비색(緋色)의 관복을 입은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 청색의 관복을 입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황색의 관복을 입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를 각각 한계로 하고 있다. 특히 6·5두품은 그 관계(官階) 내의 재분화(再分化) 현상이 있어 중아찬 및 중나마제(重奈麻制)가 나타났으며, 끝까지 남은 진골과 6두품이 골품제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신라사회와 운명을 같이 한 특수한 제도였으므로 독서3품과(讀書三品科)와 같은 신력본위제가 성공할 수 없었으니 만큼 이는 신라사회의 발전과 개방을 지연시킨 본질적인 고대사회의 모습이라 하겠다.

사직[편집]

社稷

토지의 신(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을 합칭하는 말로서 중국에서 천자(天子)나 제후(諸侯)가 나라의 태평과 천혜(天惠)의 자비를 기원하는 제사. 이는 원래 각 지방의 토속신이나 재래신앙과 부족적 전통이 결합되어 조묘(祖廟)와 더불어 각 부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교사(郊社)>에 의하면 중국은 '皇皇上天照臨下土集地之靈降甘風雨'라 하여 황제 자신의 권위와 국가의 안녕을 축원하는 고대국가의 토착적인 제의(祭儀)였다.

고구려는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 의하면 "본래는 소노부가 맹주였다. 비록 지금은 왕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 부족장인 적통대인은 고추가라 칭할 수 있고, 종묘를 세워 영성 사직에 제사지낼 수 있다(消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大人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祀靈星社稷"라 했듯이 소노부도 독자적인 사직을 갖고 있었으니, 각 부족의 독자적인 전통은 유지되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수혈이라 하였다. 10월에 전국적으로 대회를 열어 수신을 맞이하고 동쪽(강물) 위에 돌아와 제사지냈다.(其國東有大穴 名遂穴 十月國中大會 迎遂神 還於國東(水)上祭之)"고 하여 고구려는 수신(遂神)을 제사하였으며 그 오 산천(山川)·귀신을 제사하고 기우·기곡 등도 겸하였는바 이는 상고 이래 군주의 덕성과 신성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을 교화한다는 현자론(賢者論)에 따른 군주의 성화관(聖化觀)의 표현이라 하겠다. 백제의 경우도 온조왕(溫祚王) 때 이미 천지에 제사하는 단(壇)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부터 존재하였다고 보이나, 삼국이 전부 조묘(祖廟)가 생기면서 대부분 그 곳에서 사직(社稷)의 예(禮)를 겸하게 되었다. 신라는 "제37대 선덕왕 때에 이르러서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또 제사를 모든 경내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지내게 하였다(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 又見於祀典 皆境內山川"(<三國史記>雜志第一祭祀)라고 하여 8세기의 선덕왕 때 사직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은 여제(麗濟)와 다른 중국식 사직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천하(天下)·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하고 제후가 사직에 제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국과 대등한 제사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묘[편집]

祖廟

우리나라는 일찍이 천신(天神)·지신(地神) 조상신(祖上神)을 흔히 3신이라 불렀으며 애니미즘(Animism)에 의해서 영혼불멸(靈魂不滅)이라는 것이 가장 큰 공포 및 신앙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군주들은 조상(始祖)에 대한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제사만이 아니라 국민의 교화(敎化)와 정치수단이기도 하였으며, 역대 군주들은 즉위와 동시에 시조(始祖) 또는 친조(親祖)의 종묘(宗廟)에 제사하는 것을 제1차적인 행사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조묘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신묘(神廟) 2개소가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에 부인상을 새겨 위하고, 또 하나는 고등신이다(有神祠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三國史記> 雜志第 一祭祀)라고 하였으며, 신라와 달리 왕이 친사(親祀)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백제의 경우도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구태왕(仇台王) 을 시조라 하여서 제사하였다. 한편 신라의 경우는 남해왕(南解王) 때 시조묘(始祖廟)를, 소지왕(炤知王) 때에 신궁(神宮)을 세웠으며, 혜공왕(惠恭王) 때에 5묘(五廟)가 설치됐으며, 시조묘의 주신(主神)은 박혁거세(朴赫居世)로서 신라 왕실의 정신적 지주를 제사하는 것이었다. 신궁은 시조 탄생지인 내을(奈乙)에 설치된 것이라 하여 '내을'이 날(日, 太陽)을 뜻하므로 그 역시 혁거세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또한 김씨 시조인 내물왕(奈勿王)을 봉사(奉祀)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그후 김씨 시조로서 불훼지종(不毁之宗)으로 받들어진 미추왕(味鄒王)을 뜻하는 듯싶다. 이렇게 박씨의 막연한 국조묘(國祖廟)인 시조묘가 점차 사회의 발전과 중국의 영향으로 보다 그속에서 직접적인 가조묘(家祖廟)인 내을신(奈乙神)으로 변화하여 골(骨)에서 족(族)으로 분화되었다는 신라사회의 변질을 설명한다. 동시에 김씨 세습이 실질적으로 확인된 소지왕 때 이러한 김씨의 독자적인 가조(家祖)의 출현은 신라 고대국가 발전상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끝으로 5묘(五廟)의 변질이다. 이는 다른 정치·사회·문화의 경우처럼 당제(唐制)의 영향을 받아 "천자는 7묘를 설치하고 제후는 5묘를 설치한다(天子七廟諸侯五廟)"라는 예기(禮記)에 의한 것으로서 5묘란 2소 2목(二昭二穆)(四祖)과 태조를 뜻한다. 이 5묘제(五廟制)는 이미 신문왕(神文王) 때에 고(考, 文武王), 조(祖, 武烈王), 증조(曾祖, 龍春), 고조(高祖, 眞智)에다 태조를 합쳐서 5묘를 만든 바 있다. 따라서 5묘제는 당제(唐制)의 영향과 그에 따라 시호제(諡號制)의 실시와 같이 왕권의 강화를 표시한 말하자면 고대국가가 전형적으로 완성된 사회상을 뜻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5묘제는 각 왕에 따라 봉사자(奉祀者)가 달라지는 것이며골품 중심에서가 아닌 가조(家祖) 중심으로 변질된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태조·태종·문무왕만은 불천지묘주(不遷之廟主)가 되어 시조묘(始祖廟)·신궁(神宮)·왕묘(王廟)의 변화가 곧 골(骨)·족(族)·가(家)로의 분화를 설명한다. 따라서 이러한 5묘제는 골품제의 분화 현상의 표시로서 신라 하대(下代)의 분열상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율령제의 도입과 실시[편집]

律令制-導入-實施

율령이란 고대국가의 관료제에 수반되는 일체의 법령을 뜻하며 점차 왕명이나 국가의 시책이 이 율령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다. 중국에서 발전된 율령은 원래 율(律)·령(令)·격(格)·식(式)을 합칭한 것으로,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3년(373)에 위(魏)·진(晋)의 법제를 모법(母法)으로 하여 처음 반포했으나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고, 백제도 역시 동일하지만 통일 이후 삼국의 율령은 거의 비슷하였다. 신라의 율령은 법흥왕 7년(520)에 <반시율령(頒示律令)>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의 율령제의 완성은 무열왕 원년(654)에 <이방부의 영양수 등에게 명하여 종래의 율령을 상세히 살피어 이방부격 60여조를 수정하게 하였다(命理方府 令良首等 詳酌律令 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 (<三國史記>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條)에서 보이듯이 당률(唐律)에 근거를 두어 이룩되었으니 고구려법의 성격을 벗어났다고 하겠다. 그것은 좌이방부(左理方府)가 이미 진덕여왕 5년(651)에 설치되어 율령을 관장하였으며, 문무왕 7년(667)에 우이방부(右理方府)가 증치(增置)됨에 따라 통일 전후에 율령정치가 완성된 것이라 하겠다. 신라의 율령은 첫째 율(律)로서 ① 형(刑)에는 모반·모역자에게 내린 족형(族刑)·거열(車裂)·4지해(四肢解)·기시(棄市) 및 참(斬-自盡·賜藥) 등이 있고 경범자에게 유형(流刑)·장(杖)·태(笞)등이 있었다. ② 죄(罪)에는 당(唐)의 10악(十惡)과 비슷한 5역이 있어 모반·모대역 등이 이에 속하며 요언(妖言)·요서혹중(妖書惑衆)이란 오늘날의 유언비어와 같은 것, 사병이직(詐病離職), 배공영사(背公營私), 지역사불고언(知逆事不告言), 적전부진(敵前不進) 등이 죄에 속하였다. 다음의 영(令)은 ① 관위령(官位令)은 이벌찬(伊伐飡 ) 등 여러 품계령(品階令)을 말하고 ② 직원령(職員令)은 '상대등 1인이 국사를 총괄한다(上大等一人總知國事)'와 같이 관직령을 뜻하며, ③ 사령(祠令)은 '1년 6제왕묘(一年六祭王廟)'와 같은 제사령이며, ④ 호령(戶令)은 '삼년일조호적(三年一造戶籍)'과 같은 호적령이며, ⑤ 학령(學令)·선거령(選擧令)·국방령(國防令)·의복령(衣服令)·부역령(賦役令) 등이 있었다.

왕호와 건원[편집]

王號-建元

원시시대 이래 각 부족들은 자신의 족장을 특별히 다르게 불렀다. 아즈텍(Aztec)족은 스피커(Speaker)라 했고, 아파치(Apache)족은 말 잘하는 사람이라 했으며, 쇼오쇼오네(Shoshone)족은 테그와니(Tegwani)라 하였다. 원래 왕이란 말은 중국의 황제에 대한 제후의 명칭으로 중국식 표기였다. 따라서 왕이란 명칭이 도입되기 전에 그들의 칭호는 신라의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① 거서간(居西干)이라는 것이 최초의 명칭이었다. 이 말은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한지라,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이라고 이름하였다. 주(注)-아마 향언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天地振動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 注盖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三國遺事 紀異 第一)라고 하여 광명·태양의 뜻을 가진 부족장의 뜻이었다. ② 차차웅(次次雄)이 그 다음이었다. 이것은 "존장을 칭하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일컫는다(尊長之稱 唯比王稱之)"(三國遺事) 라고 하여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킹-프리스트(King-Priest)를 뜻하며, "방언에 무라고 일컫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그를 외경하여 마침내 존장자라고 칭하였다(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故畏敬之 遂稱尊長者)"(三國遺事 紀異 第一) 라고 한다면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것이다. ③ 다음으로 이사금(尼師今)은 몇 부족의 부족연맹장을 뜻하는 것으로 유리왕 때부터 사용되었다. ④ 마립간(麻立干)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사실상의 왕의 뜻을 가진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부터, <삼국사기>에는 눌지왕부터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증왕이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함으로써 법흥왕 이후는 왕호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이 왕호의 사용은 고대국가 완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왕권의 강화와 중국의 정치적 간섭 배제 내지는 그들과의 대등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건원(建元)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즉 광개토왕의 영락(永樂), 법흥왕의 건원, 진흥왕의 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 진평왕의 건복(建福), 선덕왕의 인평(仁平) 및 진덕왕의 태화(太和)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의 독자적인 건원(建元)이 당측(唐側)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었고 특히 태종무열왕의 명칭은 더욱 당제(唐帝)의 반발을 샀다. 따라서 무열왕 이후는 중국식의 시호제(諡號制)를 씀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한화(漢化)하였으나 내면상으로는 명칭상의 독자성을 고수하려 했음도 물론이다.

<邊 太 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