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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사회사상〔槪說〕
[편집]개항(開港)에서 3·1운동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사상을 우리는 대체로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개항에서 갑오경장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때에는 조선후기의 공동체적 구성이 해체되면서 점차 역사속에 '사회'가 발견되고 그것이 실학(實學)으로 파악되어 오던 사상적 맥락을 계승하는 한편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 사조가 거세게 밀려들어와 한국의 사회사상은 전통과 서구 공동체(Gemeinschaft) 및 사회(Gesellschaft) 사이에서 격동과 갈등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던 중에서도 사회사상의 핵심인 민권의식은 급격히 성장하였고, 그것은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양반귀족 출신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기도 하고 갑신정변을 낳기도 했다. 김옥균은 상소문에서 '양반을 삼제(芟除)'하여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고, 박영효는 "<연암집(燕巖集)>의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라고 술회하고, 자기의 개화사상은 곧 평등론, 민권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동이 되었던 갑신정변에서는 하나의 개혁정강으로서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의 평등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官)을 택하게 하고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말 것"을 내걸었던 것이다. 제2의 단계는 1894년의 갑오경장에서 1910년 한일합방을 강요당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갑오경장에서는 정치적·경제적 개혁과 아울러서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양반과 상민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을 불구하고 인재를 등용한다든가 같은 양반에서도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제도를 없앤다든가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법전을 혁파하고 인신(人身)의 매매를 금한다든가 역인(驛人)·창우(倡優) 등은 면천(免賤)케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 외에도 조혼(早婚) 금지, 개가(改嫁) 허용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홍범(洪範) 14조에서도 "용인(用人)에 있어서 문지(門地)를 불구하고 인사를 두루 조야(朝野)에서 구하여서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회개혁은 1880년대를 통하여 성장한 개화파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지만 특히 유길준(兪吉濬)의 사회개혁사상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유길준은 천부인권(天賦人權)사상에 입각하여 민권론을 전개한 바 있다. "사람이 태어난 후에 점유한 지위는 세상이 만든 구별이요, 향유한 권리는 하늘이 부여한 공고이니 사람이 사람되는 이치는 천자(天子)로부터 필부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큼의 차이도 원래 없는 것이므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으니……". 이런 인권사상에서 그의 사회관은 당연히 사회계약설적인 입장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법치주의적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표현되었다. 한편 갑오경장의 사회개혁에는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의 요구도 반영되었었다. 동학군은 폐정개혁(弊政改革) 12개조에서 '노비문서(奴婢文書)는 소각할 것' '7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두상(頭上)의 평량립(平凉笠)은 탈피할 것' '관리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등을 내세웠던 것이다. 1896년에 결성된 독립협회에서는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민권사상을 고취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이 중심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한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마는 그 배후에는 강력한 민권의식이 깔려 있었다. <독립신문>에서는 "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께 받은 권리는 같다"고 하고, 나아가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귀하니 남에게 종이 되어 살기를 얻은 것은 지극히 귀한 인명을 천하게 대접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를 얻음"이라고 하여 천부인권사상을 적극 고취하면서 "정부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백성의 종이라"하여 관권을 민권에 귀속시키는 논리를 펴는가 하면 또한 "백성들에게 권리를 주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하여 민권론을 국권론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근대적 사회개혁운동은 더욱 확대 발전되어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만세보(萬歲報)> 등의 신문간행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독립협회보> <대한협회월보> <대한자강회월보>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호남학회월보(湖南學會月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등의 잡지발간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각종의 학교설립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이성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의 형태로 기독교청년회(YMCA)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 회사설립운동,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개된 것도 이 때였다. 이러한 사회개혁운동을 주도한 것이 곧 애국계몽(愛國啓蒙)사상이다. 한말(韓末)에 애국계몽사상을 전개시킨 이로는 양기탁(梁起鐸)·장지연(張志淵)·박은식·이기·유근·안국선·유길준·이상재·윤치호 등을 들 수 있지만 특히 박은식(朴殷植)과 장지연(張志淵)의 사상이 매우 주목된다. 박은식은 종래의 개화파와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사상적 쟁점을 극복하고 전통과 서양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유교개혁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첫째 유교가 양반 중심의 공동체적 윤리였음을 비판하고 민중 중심의 사회적 윤리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고, 둘째로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적인 세계관에서 자국 중심의 주체적이고 만국병존(萬國倂存)의 평등적인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셋째로 공리(功理)·공담(空談)인 관념론을 극복하고 진취적이고 현실적인 실천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교 개혁(儒敎改革)으로 척사론(斥邪論)의 보수성을 극복하면서 다른 한편 개화론의 비정통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의 언론 활동이나 교육운동 및 역사연구는 이러한 사상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었다. 장지연은 종래의 유학은 이미 부허무실(浮虛無實)하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서양근대문화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양자택일적인 형태가 아니라 참호변통(參互變通)적인 형태라야만 된다고 지적하고, 그 스스로는 유교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을 통하여 이를 실험해 보고자 했다. 한일합방 후에는 식민지적 강압이 진행되는 속에서 한말단계의 적극적인 애국계몽사상은 지하로 잠복하였다. 그것이 다시 거세게 표면화하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전개된 것은 3·1운동을 기다린 후에 가능했다.
갑신정변 개혁정강
[편집]甲申政變改革政綱
1884년 12월 5일(음 10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서광범(徐光範) 등의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이 작성한 시정요강(施政要綱). 홍범 14조의 개혁안으로, 다음날 국민에 반포키로 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 내용은 (1) 청국(淸國)에의 조공(朝貢) 폐지 (2)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人民平等權) (3) 지조법(地租法) 개혁과 관기숙정, 궁민보호(窮民保護), 재정확보 (4) 내시부(內侍部) 폐지 (5)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치죄(治罪) (6) 환상(還上) 징수폐지 (7) 규장각(奎章閣) 폐지 (8) 순검(巡檢)제 실시 (9) 혜상공국(惠商公局) 혁파 (10) 죄형(罪刑) 감면 (11) 군제개혁과 근위대(近衛隊) 급설 (12) 재정의 호조(戶曹) 관장, 재부아문(財簿衙門)의 혁파 (13) 의정소(議政所) 회의에서의 정령의정(政令議政)과 포행(布行) (14) 공관(空官)혁파와 대신·참찬(參贊)의 의정(議政)·품계(稟啓)권 등으로 이상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봉건적인 신분·문벌제의 타파와 평등권 보장, 관제·재정 등의 개혁을 통한 궁민보호와 민생(民生)문제 해결에 대한 개화당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갑오경장의 사회개혁
[편집]甲午更張-社會改革
1894년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 정권은 동년 6월 26일 ∼ 7월 11일 간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의결공포(議決公布)를 거쳐 대략 다음과 같은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1) 문벌과 반상(班常)의 계급을 타파하고,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인재(人材)를 등용할 것 (2) 문존무비(文尊武卑)의 구별을 철폐하고 품계에 따라 상견의(相見儀)를 규정할 것 (3) 연좌율(連坐律)의 폐지 (4) 적실(嫡室)·첩(妾)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때에 한하여 양자(養子)를 허용하며 조혼(早婚)을 엄금하고 결혼연령을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상으로 한다. (5) 과부(寡婦)의 재혼(再婚)을 허용 (6) 노비지전(奴婢之典)의 혁파와 인신매매(人身賣買)의 금지 (7) 평민의 청원(請願)·상서(上書) 허용 (8) 조관(朝官)의 의복, 사서인(士庶人)의 복장, 관원의 승용물 간소화. (9) 재관친피(在官親避)의 규례 적용범위 축소 (10) 조관품급(朝官品級)의 정·종(正從) 구별 폐지 (11) 역인(驛人)·창우(倡優)·피공(皮工) 등의 천민대우 폐지 (12) 인재선용조례(人材選用條例)의 제정, 과거제의 격하와 축소, (13) 문패(門牌) 게부(揭付)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이 개혁은 일본의 강요, 유길준(兪吉濬) 등의 개화사상, 동학혁명의 영향 등으로 이루어진 것 같고, 이것이 발표되자마자 유생(儒生)들의 거센 반발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한자강회
[편집]大韓自强會
한말의 정치·사회운동 단체. 1906년 윤효정(尹孝定)·장지연(張志淵)·나수연(羅壽淵)·김상범(金相範)·임병항(林炳恒) 등이 주동이 되어 이준(李儁) 등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확장하여 새로 발족한 것으로 초대 회장에 윤치호(尹致昊)가 추대되었다. 취지는 국민이 분려자강(奮勵自强)하여 국력을 배양, 독립을 성취하는 데 있었고, 자강(自强)의 방법으로는 교육·산업의 발달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의 규칙은 (1) 교육확장·산업발달의 연구실시에 의한 자국(自國)의 부강(富强)을 계도(計圖)하여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는 목적과 (2) 국법 범위와 문명궤도 내에서의 합법적인 행동, 인민지도, 대정부 건의 등의 방법 (3) 매월 1회의 회원(會員) 의안 표결, 연설 등의 운영규칙을 명백히 규정하였고, 교육·산업, 사회 계몽 등의 주제로 한 연설회를 열었다. 정부에 대하여 교육정책·사회정책·형정(刑政)·미신타파 등을 건의하였으며 일본의 식민지교육·경제침략을 규탄하였고, 의무교육 실시안을 작성, 제출하였다. 1907년 고종 양위(讓位) 반대운동으로 해산되었으나 동년 11월 10일 결성된 대한협회(大韓協會)에 의하여 계승·발전되었다.
이상재
[편집]李商在 (1850∼1927)
한말의 정치가·사회운동가. 자는 계호(季浩), 호는 월남(月南), 충남 한산(韓山) 출신. 1867년 과거에 낙방, 박정양(朴定陽)의 식객(食客)으로 있다가 1881년 신사유람단 도일시 박정양을 따라 가서 홍영식(洪英植) 등과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주사로 인천에서 근무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 1887년 주미(駐美)공사관 1등 서기관, 1894년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慶筵參贊)에 이어 학무국장으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실시하였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 중추원 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개최에 앞장섰다. 1898년·1902년 2차 투옥되었으며, 기독교에 입교,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으로 청년운동을 주도하고, 1921년 조선교육협회 회장으로서 만국기독교 청년연합대회에 대표로 참석했다. 1923년 소년척후대 초대 총재,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그 해에 서거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죄가 있다면 벌을 받을지언정 도망하여 불의(不義)의 생을 도모치는 않으리라. (2) 부정부패의 숙정은 3정승(政丞)부터 엄징해야 성공할 수 있다. (3) 국내 정치가 잘 되어야 외교(外交)도 성공할 수 있다. (4) 신교육을 실시하되 일제의 교육계 침투를 경계해야 한다. (5) 백성의 원성을 듣는 전운사(轉雲司) 복설(復設)에 철저하게 반대한다. (6) 정치운동이나 구국운동도 신(神)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신앙운동이라야 하며, 중교운동, 청년운동으로 국민을 먼저 각성시켜야 한다. (7) 인간들이 서로 죽이려고 무기를 만들기에 급급한 것은 신의 사랑을 저버린 큰 죄악이다. (8) 무엇이든지 한번 붙으면 떨어지는 때가 반드시 있는 법, 한일합방도 그와 마찬가지다. (9) 노인이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에게 노인이 되라고 해선 안 된다.
신민회
[편집]新民會
1907년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노백린(盧伯麟) 등과 같이 만든 비밀결사로서 정치·사회운동 단체. 비밀주의로 일관하여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총감독에 양기탁, 총서기는 이동녕 등이었고, 임원단 외에 의결기관으로 의사원(議事院)이 있어 각도 단위로 선출되었으며, 도에는 총감, 군에는 군감을 두었고, 회원구성은 완전한 점조직(点組織)이었다고 한다. 안창호가 기초한 회칙에 의하면 목적은 (1) 민족의식·독립사상의 고취 (2) 동지의 발견·단합과 국민운동의 역량축적 (3) 교육기관 설치와 청소년 교육진흥 (4) 각종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재정·부력(富力)을 증진시킬 것 등이었고, 회원은 '믿을 수 있는 사람, 애국 헌신할 결의가 있는 사람, 단결의 신의에 복종할 사람'으로 제한한다. 대성학교, 오산학교, 태극서관(太極書館), 자기회사(磁器會社) 등을 표면에 내세우고 활약하다가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사건에 타격을 받아 회원들이 투옥 또는 망명하여 자연 해체되었다.
이기
[편집]李沂 (1848∼1909)
한말의 학자·애국자,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 전라도 만경(萬頃) 출신.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의 실학 학통을 계승,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접하여 진보적인 신학문을 주창하였고, 그의 저서 <해학유서(海鶴遺書)>를 통하여 한말의 정치·경제·사회·교육 전반에 대한 비판과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에 가담, 서울 진격을 주장하다가 김개남(金介男)의 반대로 뜻을 못이루었고, 1905년 포츠머스에서의 러·일 강화조약 체결시에 한국입장을 호소하러 도미(渡美)하려다 일본 공사의 방해로 좌절, 일본 도쿄에 건너가 각계 요로에 일본의 한국침략 규탄서한을 발송·항의하고,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활약하였다. 1907년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 을사5적(乙巳五賊) 암살을 결행했으나 실패, 진도(珍島)로 유배당했다.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 민중계몽에 주력했다.
안국선
[편집]安國善 (1854∼1928)
한말의 신소설 작가. 경수의 아들. 1907년 <연설법방(演說法方)>을 저술하였고, 신소설로 우화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을 지어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침략주의, 약육강식(弱肉强食) 등의 정책을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다가 일본통감부(統監府)로부터 금서(禁書)처분을 받았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단편집 <공진회(共進會)>를 남겨 신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기독교청년회 운동
[편집]基督敎靑年會運動
1907년 이펜젤러(Appenzeller) 등이 설립한 기독교 중심의 단체인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가 현재까지 꾸준히 전개해온 사회운동, 청년운동. 여기에는 이상재·윤치호·이승만·김규식(金奎植)·신흥우(申興雨) 등이 참가하여 신앙운동뿐만 아니라 교양강좌, 토론회, 계몽운동, 체육지도, 농촌운동, 학술강좌, 소년단운동 등을 전개하여 민족운동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정치적인 집회·교제를 통하여 청년지도뿐만 아니라 기계공작(機械工作) 등의 실무교육도 시키는 한편 근대 스포츠를 소개·보급시키고 일제하에서의 유일한 청년모의처로서 해외와의 연락이 용이하였고,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여 민족주의·기독교, 구미의 자유주의, 근대 학술 등을 고취·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