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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근대사상/한국의 근대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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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정치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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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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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化思想-成長

대원군의 실각에 이어 일본이 문호개방을 강요하자 1876년 한·일간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부터 밖으로부터 밀려들어온 일본·청·서양 각국의 도전을 받아 낙후된 우리의 현실을 절감하고, 과감히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정을 개혁하고 근대국가의 재출발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진보적인 지식인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청·서양 여러 나라의 새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며, 아시아적인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청국에의 종속관계를 청산하여 근대적인 독립국가 체제를 이룩하려는 개화사상의 본령(本領)이 싹텄던 것이다. 개화사상이 성장하는 과정을 본다면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직후에 김기수(金綺秀)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와 <일동기유(日東紀遊)>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를 써서 근대화된 일본의 실정을 소개하여 당시 우매한 조정을 경각시켰고, 그 결과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김홍집(金弘集)·박영효(朴泳孝) 등도 유사한 일기를 남겼다. 다시 1881년에 청나라를 돌아보고 온 김윤식(金允植)의 저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主役)인 김옥균(金玉均)의 상소(上疏)와 <갑신일기(甲申日記)> 등도 모두 개화사상(開化思想)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대표적인 저서는 역시 1896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으로, 저자는 이곳에서 일본·미국 유학시절의 견문을 적는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자본주의 이론을 처음으로 전개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선각자가 되었다. 다시 1896년∼1899년 간에 활약한 서재필(徐載弼) 등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개화독립사상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1909년 호놀룰루에서 간행된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정신(獨立精神)>,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대동역사(大東歷史)> <홍경래전(洪景來傳)> 등은 새로운 역사인식을 통하여 개화·독립·근대화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밖에 <황성신문(皇城新聞)>을 통한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의 언론활동, <대한매일신보>의 항일투쟁, 박은식·신채호(申采浩)의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민족사 연구 등도 개화사상을 민족주의 독립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새 시대의 문명을 이해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화사상은 곧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반격을 받아 국론을 분열시켰고, 외세(外勢) 특히 일본의 힘에 의존하는 일부 지식인에 의해 친일매국(親日賣國)의 명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보수적인 민중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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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正斥邪運動-展開

19세기 후반에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프랑스·러시아·미국 군함의 내침, 일본의 수교요구가 잇달아 일어나자 개화당(開化黨)이 이에 호응하여 개국·독립을 주장한데 반하여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척사(斥邪)·척양(斥洋)·척왜(斥倭)를 부르짖고, 그들이 정도(正道)로 신봉하는 주자학(朱子學)과 동양적인 봉건체제를 수호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곧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으로, 초기에는 천주교·동학과 같은 사교(邪敎)의 배척으로 시작되어 병자수호조약 전후에는 척화론(斥和論)으로 전개되었고, 개항(開港) 이후 서양의 문물과 일본세력이 침투해 오자 국가의 자주권(自主權)을 옹호하는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었을 때에는 국권수호를 위한 의병(義兵)운동으로 전개되다가 망국(亡國)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양이책(鎖國攘夷策)에 이어 천주교 박해가 가중되었고, 1866년에는 기정진(奇正鎭)·이항로(李恒老) 등의 척화소(斥和疏)가 있었으며,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개방을 하게 되자 이에 분개한 이만손(李晩孫) 등의 만인소(萬人疏)가 개화반대의 여론을 일으켰고, 김평묵(金平默)·유인석(柳麟錫)·최익현(崔益鉉) 등의 척양척왜(斥洋斥倭) 상소가 잇달았는데 이는 민중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화당이 득세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각지에서 항일의병(抗日義兵)이 일어났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국권수호, 매국역도(賣國逆徒) 격살, 일본 배척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동안에 주자학적인 명분론과 사대주의는 퇴색되어 근대적인 민족운동 속에 포섭되기에 이르렀다.

동학혁명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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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革命-理念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1864년의 교조 순교와 2세교주 최시형의 포교활동에 의하여 혁명적인 종교로 발전하였고, 1871년에는 이필제(李弼濟)의 봉기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교세가 확장된 1889년부터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여 삼례(參禮) 집회, 보은(報恩) 대시위 등으로 위세를 보였으나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부딪쳐 1894년에는 전봉준(全琫準) 등의 혁명봉기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민중혁명으로, 관군·일본군과의 대결에서 비록 동학군은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역사적·사상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엇다. 동학학명의 이념을 간단히 열거하면 (1) 신앙의 자유를 쟁취한다. (2) 폭정(暴政)을 타도하고 민중을 구출한다. (3) 일본과 구미 열강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권을 수호한다. (4) 낡은 질서, 낡은 윤리를 타도하고 새 질서, 새 윤리의 나라를 건설한다. (5) 빈부·귀천·적서(嫡庶)의 차별을 없애고 만민평등의 사회를 실현한다. (6) 유·불·선(儒佛仙)을 종합하고 서학(西學)에 대항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확보한다. (7) 민중의 정신생활을 개혁하여 근대화를 성취한다. (8) 노예제도, 문벌제도를 타파한다. (9) 나라를 지켜 민생을 안정시키고, 동학을 널리 펴서 이상국(理想國)을 실현한다 등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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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民主主義의-普及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미(歐美)의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소개하고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의 타당성을 밝힌 것은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으로 이는 개화파 사상가들에 의하여 섭취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소화하여 국난타개운동의 일환으로 민주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은 1896년에 서재필(徐載弼) 등이 창설한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10년간 망명생활을 하여 민주주의를 습득한 다음 1896년에 중추원(中樞院) 고문관으로 귀국하자, 국민에게 자유와 독립 및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일깨우기 위해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민중계몽을 통한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나타난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보면 준법정신(遵法精神), 지방수령의 민선제(民選制), 관리공복설(官吏公僕說), 여권존중(女權尊重), 국민교육론, 국민의 자유 등이 강조되어 있고, 독립관(獨立館)을 세워 고관대작도 참가하는 공개토론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반동세력의 질시와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자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에 이어 다음해 2월부터는 독립협회 주동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민주집회로 정부시책을 비판하니 민주주의적인 대중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 활약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남궁억(南宮檍)·윤치호(尹致昊)·이준(李儁) 등은 한국 민주주의의 선각자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10월 29일에 결의된 만민결의(萬民決議) 6개조는 정부재정의 인민에의 공표, 죄인의 자복(自服)후 처벌, 정부 자문기관의 설치를 요구하여 국정에 반영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운동은 1899년말 황국협회등 반동세력의 대두와 보수집권당의 탄압으로 종식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단 보급되기 시작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신교육(新敎育)의 보급과 함께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의 압제 하에서 그 명맥을 지켜온 주축은 역시 이상재(李商在)가 이끄는 기독교 청년회와 배재학당 등의 사립학교, 안창호(安昌浩) 등의 흥사단(興士團) 등이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1912년 미국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대의제(代議制)를 채택하였고,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는 한국이 '자주·독립·민주의 나라'임과 '동권(同權)·동부(同富)로서 일체의 차별을 두지 않는 민족평등'이라는 건국이념을 제시했으며, 이런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3·1운동을 거쳐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으로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으로 결실되었다.

근대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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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民族主義-胎動

개화독립당의 혁명사상, 위정척사론자의 척화론, 동학혁명의 민족혁명사상,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국권수호의 운동 등이 서로 연원을 달리하여,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외세에 이용되어 더욱 불행한 사태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빼앗기게 되자 그들은 공동의 적 일본을 향해 다시 단결하고, 새 시대의 진운에 맞추어 보다 합리적인 구국광복운동(救國光復運動)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광범위한 민족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이를 개탄하여 <오늘이야말로 대성통곡할 날(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장지연(張志淵), 유생들과 노(老)대신들의 상소항거(上疏抗拒), 이한응(李漢應)·민영환(閔泳煥) 등의 자결(自決)에 이어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잇달았고, 비밀결사로 자신회(自新會)·신민회(新民會) 등의 활동이 나타났다. 또한 1907년의 헤이그 밀사(密使) 파견과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은 민족주의 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합병을 전후한 애국지사들의 해외 망명, 해외교포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의 출현, 민족주의의 근거를 민족사에서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신규식(申圭植) 등의 저술이 나오고, 미국에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나와 한국 민족주의 방향이 귀일점(歸一點)을 찾기에 이르렀다.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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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綺秀 (1832∼ ? )

조선 고종 때의 문신.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 고종 12년에 문과에 급제,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직후 수신사에 임명되어 단원 75명을 인솔,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왕에게 복명할 때 개화된 일본의 부강(富强)노력, 산업개발, 서양문물 등을 찬양하였고, 수기로 <일동기유> <수신사일기>를 써 개화사상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대일(對日)인식을 호전시켜 뒤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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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均 (1851∼1894)

조선말의 혁명가.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 시호는 충달(忠達). 1872년에 문과에 급제, 1875년경 <기화근사(箕和近事)>를 써 개화의 새 지식을 소개하였고,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人)과 사귀어 일본견문을 넓혔고, 임오군란(壬午軍亂) 직후 박영효(朴泳孝)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차관(借款)교섭을 하였으며, 왕에게 도로 근대화를 주장한 <치도론(治道論)>을 상소하고, 국토개척론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힘을 빌어 친청 사대수구파(親淸事大守舊派)인 민씨세력 제거를 기도하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일본의 배신과 청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그는 1885∼1894년간에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894년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일본망명 중에 혁명기록인 <갑신일록(甲申日錄)>을 남겨 전하고 그 밖의 것은 말소되어 전하지 않는다.

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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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珪壽 (1807∼1876)

조선말의 정치가·개화사상가. 자는 환경, 초자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 초호는 환재(桓齋),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헌종 14년 증광문과에 급제, 철종 11년에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2년 진주민란을 수습, 고종 3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상선 셔먼호(The General Sherman)를 불살랐으며, 1875년 운요오호(雲揚號) 사건 때 일본의 수교(修交) 요구가 있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척화(斥和)론을 물리치고 개국수교(開國修交)를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 저서에 <환재집)> <환재수계> 등이 있다. 뒤에 개화독립당을 일으킨 김옥균·박영호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유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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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大致

조선말의 개화사상가. 일명 홍규(鴻逵)·홍기(洪基). 중인계급 출신의 한의(漢醫)로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서적을 탐독, 일찍부터 개화에 눈떠서 김옥균·박영효·서광범(徐光範) 등을 지도하였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문호의 개방과 정치의 혁신을 주장하면서 개화당을 배후에서 움직여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렸다. 일본 침략의 기미를 보고 시국을 개탄, 행방을 감추었다고 한다.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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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吉濬 (1856∼1914)

한말의 개화사상가.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서울 출신. 한학을 공부, 고종 18년(1881)에 도일(渡日),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거쳐 1883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 유학, 1885년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돌아와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중앙관직에 참여, 1896년 러시아공사관 파천 때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에 귀국, 흥사단(興士團)에 참여, 국민경제회를 설립하였다. 교육계(敎育契)를 만들어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세우고 서양학문에 관한 많은 저술을 냈다. <서유견문> 이외에 <프러시아 7년전쟁사> <영·불·러·터 크리미아전쟁사> <대한문전(大韓文典)> <정치학> <평화광복책(平和光復策)> <이탈리아 독립전쟁사>등 여러 책이 있어 정치·경제·역사·문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서양문물을 소개하고 민족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개화사상 보급을 위한 신문발간이 필요하다. (2) 외국인들의 어업권 침해에 대비해야 한다. (3) 국권을 수호하고 인민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4) 민족적인 의식과 국제적 신의가 중요하다. (5) 직분(職分)정신을 애국적인 신의로 지향시킨다. (6) 정치제도를 근대화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책을 세워야 한다. (7) 봉건적인 신분제도·음력·상투머리를 폐지하고, 조세를 금납제(金納制)로 해야 한다. (8) 민족자주경제를 이룩하기 위하여 교통·공업·농업을 근대화해야 한다. 요컨대 그는 민주주의·자본주의 이론을 도입하고 경제개혁을 주장하여 조국근대화의 선각자가 되었다.

서유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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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遊見聞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의 저서. 미국 유학시 서양 학문을 닦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여 견문한 것을 기록한 최초의 국한문(國漢文) 혼용체의 기행문. 총 20편으로 세계의 인종·물산·도시를 소개하고, 국가의 주권, 국민의 권리, 교육문제, 정부의 기원과 종류·제도·직분·세금·국채·군대양성·화폐론, 법률, 경찰의 역할과 규칙, 상인의 위치·역할, 개화의 바른 길, 사회복지, 서양의 근대기술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어 개화사상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뒤에 갑오경장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기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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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正鎭 (1798∼1876)

조선말의 유학자·척사론자(斥邪論者).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유학에 전심,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조선 성리학 8대가의 최종 인물이다. 그는 1866년에 (1) 양·호(洋胡)의 흉책(凶策)을 경계하라. (2) 국론(國論)을 척화(斥和) 쪽으로 통일시키라. (3) 서양의 종교·도덕은 백해무익한 것이다. (4) 거험소격(據險遡擊)의 육전(陸戰)으로 적을 격퇴시키자. (5) 천주교를 배척하고 인심을 단결시키라는 내용의 척화소를 올려 척사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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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益鉉 (1833∼1906)

한말의 유학자·의병장(義兵將).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철종 6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고종 5년에는 토목공사로 인한 국민부담 가중,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재정파탄 등을 들어 대원군(大院君)의 실정을 비판하였고, 1873년에는 서원철폐 등을 항의했다. 이어서 대원군을 탄핵,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대원군 은퇴를 가져왔으며, 병자수호조약 때 척화소를 올려 반대하였다. 그 뒤에 단발령을 반대, 척왜와 매국적신(賣國賊臣) 처형을 주장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을자조약에 반대하다가 다음 해인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전선을 폈다. 그러나 일본군에 패배, 쓰시마(對馬)섬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대원군 섭정은 부당하고 왕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2) 비굴하게 적에게 화친을 청해선 안 된다. (3) 적의 우수한 공업력과의 경쟁은 불리하다. (4) 일본과의 친교는 천주교를 들여와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니 수교해선 안 된다. (5) 친일파의 복귀, 의복변혁, 단발령에 반대한다. (6) 성학(聖學:주자학)을 장려하고, 내핍경제를 실시하라. (7) 칭제건원은 명실상부하지 못하니 철회하라. (8) 취렴(聚斂)을 금지하라. (9) 일본차관 및 외국에의 의존심을 근절하라. (10) 친일매국의 역도배를 처단하라. (11) 납세를 거부하고 일본제품·일본철도를 이용치 말라. (12) 일본의 조약위반, 배신 16대사(大事)를 규탄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라. (13) 사대주의(강국에의 의뢰)를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히라. (14) 일본은 미구에 망할 게 틀림없다 등이었다. 요컨대 그는 한말의 국난(國難)을 당하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입장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운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자였던 것이다.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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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琫準 (1854∼1895)

동학혁명의 지도자. 초명은 명숙(明叔),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북 태인(泰仁) 출신. 30세경에 동학에 입도, 고부 접주(古阜接主)가 되고 사회개혁 혁명을 꿈꾸다가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분개, 1894년 1월 동학교도와 농민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켜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관군을 격파, 혁명 정책시행 등을 관찰시키려 하였으나 일본군 개입으로 실패,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3월 처형당하였다. 그의 기포시(起包時)의 <창의문(倡義文)>, <백산맹약(白山盟約)>, <4대명의(四大名義)>, 수차의 통문(通文), 포고문(布告文), <12조계령(十二條戒令)>, 방문(榜文), <원정조항(原情條項)>, <집강소 폐정개혁안 12조(執綱所 弊政改革案 十二條)>와 대한 <공초기(供招記)>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왜·양(倭洋)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여 백성을 안정시킨다. (2) 중앙의 부패정권을 타도하고, 성훈(聖訓)에 따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 (3) 탐관오리, 횡포한 토호를 숙청하고 민중을 구한다. (4) 노예·천민을 해방시키고,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며, 빈부귀처의 차별을 없앤다. (5) 곤경에 빠진 자, 선한 자, 굶주린 자, 가난한 자, 병자를 구해내고, 탐욕이 있는 자, 교활한 자, 불충불효(不忠不孝)한 자, 반역자를 징계한다. (6) 점령지역에 우선 집강소를 설치하고 12개조의 혁명정치를 실시한다. (7) 3정(三政)을 혁파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한다. (8)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민족전쟁을 수행한다. (9) 동족상잔(同族相殘)은 비극이니 일본의 침략 앞에 단결해야 한다.

동학집강소 폐정개혁안 1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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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執綱所 弊政改革案十二條 동학혁명 때 전봉준(全琫準)의 혁명군이 전주(全州) 점령시 관군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의 합의하에 점령지역에 동학집강소를 설치하고 여기서 실시키로 한 일종의 혁명정책. 즉 그들은 갑오경장 초기에 원정(原情)31조를 이원회(李元會)를 통해 중앙정부 개혁에 반영시켰고, 그 중 12항목을 관군에 통고하고 자기의 점령지역 내에서 실시한 것이니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동학교도와 정부간의 원한을 풀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패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를 엄징할 것. (5) 노비문서를 소각할 것. (6) 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白丁)의 평량립(平凉笠)을 제거할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용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를 폐지할 것. (9) 관리채용에 지벌(地閥)을 타파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외적과 간통한 자를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의 지나간 것은 물리지 말 것 (12) 토지를 평균분작(分作)시킬 것.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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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載弼 (1866∼1951)

독립운동가·계몽사상가. 호는 송재(松齋), 전남 보성(寶城) 출신. 1879년 장원급제하여 김옥균·서광범(徐光範) 등과 사귀면서 개화사상(開化思想)에 접하고, 1883년 일본 도쿄(東京)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유학하고 돌아와 조련국(調鍊局) 사관장(士官長)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세균학을 전공, 1896년 귀국하였다. 그는 유길준(兪吉濬) 등과 교섭,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하여 자주독립, 민주주의적 개혁, 민중계몽을 위한 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반동세력의 배척과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후 1947년에 귀국, 과도정부 정무관(政務官)이 되었으나 국내 세력의 냉대로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자주독립의 주권(主權)을 수호한다. (2) 인민의 자유·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3) 민중을 계몽하여 조국을 근대화한다. (4) 사대주의·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주체의 민주국가를 실현한다. (5) 대의기관(代議機關)을 설치·강화한다. (6) 당파·상하·귀천·경향의 차별을 묻지 않고, 전인민을 위해 일한다는 것 등이다.

중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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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樞院

한말에 최초로 나타난 민선대의기관(民選代議機關). 1898년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결의안 6개조를 정부가 수락하고, 민의대변(民意代辯)을 위한 중추원 장정(章程)을 작성키로 발표하고, 이에 따라 동년 11월 2일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여 의장(議長)은 황제가 임명, 부의장(副議長)은 중추원 공천을 거쳐 황제가 임명, 의관(議官)의 반수는 정부에서 합의·주천(奏薦)하고, 반수는 인민협회(人民協會-독립협회) 중에서 27세 이상의 사람이 선거하여 구성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반동적인 정부의 배신으로 곧 깨지고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만 가중되었다. 독립협회는 이를 항의·규탄하면서 일시 각료 불신임결의까지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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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儁 (1859∼1907)

순국열사. 초명은 성재(性在). 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북청(北靑) 출신.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 다음해 한성재판소 검사보(檢事補)가 되었다가 곧 사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초대 평의장(評議長)이 되었고, 친러파 내각이 서자 일본에 망명, 1898년 와세다(早稻田)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독립협회 일을 보았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민중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저지시키려 하였고,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는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친일대신을 규탄하다가 유배되었다. 1905년에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 항일운동과 민주주의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확대시켰다. 동년 국민교육회를 조직,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평리원(平理院)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이다 일본인에게 체포되었고, 이해 4월 22일에는 고종의 밀령을 받고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참석을 위해 서울을 떠났으나 일본측의 반대로 좌절되자 분사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법관으로 조신(朝臣)들의 불법·비행을 징계한다. (2) 혁신구국운동에 전심한다. (3) 민론(民論)을 환기시켜 매국적 행위를 견제한다. (4) 헌정(憲政)을 연구·실천하여 법치국가를 확립한다. (5) 사법권(司法權)을 독립하고 법관은 자유롭게 재판한다. (6)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을사조약을 무효화시킨다 등이다. 요컨대 그는 국권수호를 위해 생애를 바쳤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법(法)사상에 투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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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1879∼1910)

한말의 의사(義士). 아명은 응칠(應七), 교명은 도마, 해주 출신. 한학을 수학하고 승마(乘馬)·궁술(弓術)을 익혀 문무를 겸하였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영하던 석탄상점을 팔아 1907년 남포(南浦)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우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1908년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 갔으나 실패, 1909년 우덕순(禹德淳) 등과

이토 히로부미 살해를 결의,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체포되었다가 1910년 뤼순(旅順)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자서전(自敍傳) 등을 집필,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고 자기의 신념을 밝혔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이토는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15조목의 죄인이다. (2) 나의 거사는 한국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본 재판정에 설 의무가 없다. (3) 삶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면(永眠)하는 것이다. (4) 나의 행동은 오직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5) 청장년(靑壯年)은 의병으로 투쟁하고, 어린이는 잘 교육시켜 후일에 대비하라 등이다.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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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圭植 (1880∼1922)

독립운동가.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 觀), 청주(淸州) 출신. 1890년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 3년간 수학하고,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부위(副尉)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을사조약 때 자살미수로 오른쪽 눈이 실명됐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등 단체에 가입·활약하고, 1909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가담, 중국 국민당 간부들과 사귀었다. 1915년 박은식(朴殷植)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 잡지 <진단(震壇)>을 발간했고, 1919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1921년에는 국무총리대리·외무총장을 겸직하였다. 이해 중화민국 광둥정부(廣東政府)의 쑨원(孫文)과 교섭하여 임시정부를 승인받고,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있자 이를 개탄하고 25일간 단식 끝에 죽었다. 저서로 <한국혼(韓國魂)> <아목루(兒目淚)>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1) 매국정권 타도를 위해 군사혁명을 일으킨다. (2) 산업개발, 교육진흥이 중요하다. (3) 중국의 민주혁명을 지지한다. (4) 한국역사, 한국문화를 재인식, 선양한다. (5) 독립을 위해선 청년교육이 중요하다. (6) 민족종교(대종교)를 통해 민족을 단결시킨다. (7)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하고 국제기구에 가입시켜야 한다. (8)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항일민족전선을 구축한다. (9) 민족정기로 단합해야만 조국광복을 성취할 수 있다 등을 들 수 있다.

13도 유생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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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道儒生通文

1905년 9월 일본의 한국보호국화 획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13도의 유생대표가 주한 각국 공사관으로 보낸 공함(公函)과 함께 작성된 통문. 김동필(金東弼)·이칙·김석렬(金錫洌)·정대화(丁大華) 등은 각국 공사관에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보호권 확립획책을 반대하면서 국제공론에 의한 한국 지원을 청원하는 내용의 공함을 보냈고, 이 통문(通文) 속에서는 일본의 배신을 국제공법(國際公法)을 논거로 하여 증명하고 일본침략 27개조를 열거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려는 것은 병자수호조약 제1조, 제12조와 시모노세키(下關) 조약 제1조 등의 <독립자주> 조항에 위배된다고 했고, (2) 일본인의 한국민 압박조례로 갑오경장(甲午更張)에서부터 을사조약까지 27개의 실례가 있으며, (3)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은 국제공법 위반이라는 것 등으로 유생들의 민족주의가 단순한 위정척사론을 넘어서서 근대적인 민족주의로 발전하였음을 입증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