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창 극/창극의 작품과 감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창극의 작품과 감상〔개설〕

[편집]

唱劇-作品-鑑賞〔槪說〕창극은 창(唱)을 위주로 하여 극적인 대사와 약간의 동작을 가미한 오페라와 같은 것으로, 광무(光武) 연간에 원각사(圓覺社)의 설립과 함께 극장을 갖추고 작품을 공연하게 되었다. 그 작품 공연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극의 작품 연혁

[편집]

唱劇-作品沿革

1903년 원각사(圓覺社) 시절에 강용환(姜龍煥)이 청국의 협률창극(協律唱劇)을 모방하여 <춘향가(春香歌)>를 창극화한 이래, 당시의 명창(名唱)인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유공렬(劉公烈)·염덕준(廉德俊)의 노력으로 창극으로서의 <춘향전>이 비로소 연행(演行)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춘향전>의 창극은 무대장치와 도구도 없이 배경으로 둘러친 흰 포장 앞에서 그것도 '앞과장' '뒷과장'으로 나누어 공연하였으며 그 후 <심청전(沈淸傳)> <흥보전(興甫傳)> 등이 차례로 창극화되어 무대예술로서의 발길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와 전후하여 광무(光武) 연간(1897-1907)에 협률사원(協律社員)이 일단을 조직하여 지방순회를 하였으며, 이때의 상연물은 <춘향전> <심청전> <장끼전> <흥보전> <섬동지전> 등이었는데, 1914년경 이 협률사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1905년 원각사가 폐쇄된 이후 연흥사(延興社)·장안사(長安社)와 광무대(光武臺)에서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백상서가(白尙書歌)> <백진사가(白進士歌)> <화용도(華容道)> <삼국지(三國志)> <토공전(兎公傳)> 등이 상연되었으나 초기의 빈약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2년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발족하고, 1936년 그 산하에 창극좌(唱劇座)가 조직되어 본격적인 창극운동이 전개되면서 창극은 본궤도에 올라섰다. 또 신극의 영향을 받아 무대장치와 대소도구를 제대로 갖추어 전편을 공연하게 됨으로써 창극의 전통과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리하여 <별주부전(鼈主簿傳)> <배비장전(裵裨將傳)> <유충렬전(劉忠烈傳)> 등의 새로운 창극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명창 정정렬(丁貞烈)의 편극(編劇)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939년에는 한주환(韓周煥)·전일도(全一道)·박동실(朴東實)·김여란(金如蘭)·김소희(金素姬)·박후성(朴厚性)을 중심으로 한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의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가 상연되었고, 같은 해에 임방울(林芳蔚)·정광수(丁珖秀)·강남중(姜南中)·이화중선(李花中仙)·김추월(金秋月)을 중심으로 한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이 <일목장군(一目將軍)>을 가지고 지방을 순회하였다. 그 후 1942년 창극좌(唱劇座)와 화랑창극단이 합동하여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이라 칭하고, <입담춘몽(入譚春夢)> <항우(項羽)와 우미인(虞美人)>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이 차례로 상연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일제의 모진 탄압으로 창극계는 극도로 위축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45년 10월에 국악원(國樂院)이 창설되고, 그 산하에 국극사(國劇社)·국극협단(國劇協團)·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김연수창극단(金演洙唱劇團)이 조직되었고 국극사의 <대춘향전(大春香傳)> 공연을 비롯하여 <아랑애화(阿郞哀話)> <선화공주(善花公主)> <만리장성(萬里長城)>, 조선창극단의 <논개(論介)> <왕자호동(王子好童)>, 김연수창극단의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 국극협단의 <고구려의 혼>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탄야곡(嘆夜曲)> 등이 계속하여 상연되었다. 더구나 1949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가 조직되어 <해님과 달님>의 전편(全篇)을 상연하자, 같은 해에 여성국극동지회(女性國劇同志會)가 조직되어 <해님과 달님> 후편을 들고 나왔다. 이에 이르러 창극은 바야흐로 일대 붐을 이루었으나 6·25전쟁으로 이들 단체는 모두 해산되고 말았다.

1952년부터 창극계는 차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여성국극단이 우후죽순격으로 쏟아져 나와, 1955년에서 1957년 사이에는 창극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창극단의 난립은 필연적으로 경영난을 초래하여 1950년대말부터 하나둘씩 해산되었으며 196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전멸상태로 그때부터 창극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이 창립되고 <대춘향전>의 공연을 계기로 창극 재건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극의 감상법

[편집]

唱劇-鑑賞法

창극은 오페라와 같이 창(唱)을 부르며 연기하는 경우와 연극과 같이 대사를 하며 연기하는 경우, 드물기는 하지만 무언극(無言劇)이나 무용극(舞踊劇)과 같이 마임(mime)으로 연기하는 경우로 대별된다.

창을 부르면서 연기하는 경우에는 창의 음악을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창은 판소리형의 가락을 부르므로 판소리에 나오는 조(調)·장단(長短)·창법(唱法)·고법(鼓法)·반주음악(伴奏音樂) 등의 판소리 음악을 이해해야만 한다.

조에는 우조(羽調)·계면조(界面調)·평조(平調)·경드름(京調)·덜렁제 등이 있다. 우조는 영웅적이고 호탕하며 남성적인 표현을, 계면조는 처절하고 유연하며 여성적인 표현을, 평조는 화평하고 화기애애한 표현을, 경드름은 이색적이고 경쾌한 표현을, 덜렁제는 무사적이고 경쾌한 표현을 한다.

장단에는 매우 느린 진양, 보통 속도의 중모리, 조금 빠른 중중모리, 매우 빠른 자진모리 및 휘모리, 이색적인 박자인 엇모리·엇중모리가 있다. 진양은 서정적인 표현을 하며, 중모리는 서정적인 표현 혹은 서술적인 기능, 중중모리는 흥겨운 표현과 절규하는 기능, 자진모리는 극적이고 긴박한 표현과 사건을 길게 나열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창극은 앞뒤를 연결하거나 극중인물의 심정을 하소연하는 대사를 도창(導唱) 및 극중인물끼리의 교창으로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1인창(一人唱)으로 일관하는 판소리와는 음악적으로 다른 면도 있다. 대사를 하며 연기하는 경우에는 판소리의 '아니리식(式)'으로 하는 경우와 가면극식의 대사를 쓰는 경우, 신극식의 대사를 쓰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판소리 아니리식 대사법, 가면극식 대사법, 신극식 대사법을 이해하고 이것이 창극에서 어떻게 연기되는가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이 좋다.

무용극과 같이 마임(mime)으로 연기하는 경우는 최근에 국립창극단이 결성되면서 시도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몸짓과 동작을 찾고자 하는 것이며, 한국 전통민속극의 마임을 이해해야 한다. 또 창극의 시대적 배경이 사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극중에 나오는 모든 민속적인 요소를 알아야만 한다.

창극은 60년의 역사를 갖고 많은 시행착오를 하면서 그 정립에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창극 특유의 양식을 찾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朴

旭>

일목장군

[편집]

一目將軍

1939년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서 상연한 작품. 김아부(金亞夫) 작, 박진(朴珍) 연출, 박동실(朴東實) 편곡, 일목장군(一目將軍)에 박귀희(朴貴姬), 아리주(阿里珠)에 김소희(金素姬), 당 태수(唐太守)에 김득수(金得洙), 서팔(西八)이에 공기남(孔基南), 백운(白雲)에 김경애(金瓊愛)가 분장하여 당시에 인기를 끌었던 창극(唱劇)이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패망한 후 고구려의 일목장군이 재기를 위하여 변방의 성을 회복하는 동안, 당의 태수(太守)는 일목장군의 애인인 아리주를 탐내어 성내로 불러 들였다. 이에 아리주는 당의 태수를 독살하려다가 탄로되어 죽게 되었다. 그때 일목장군이 그 성을 공격하여 당태수를 참살하고 아리주를 구한다는 내용의 야사(野史)이다.

장화홍련전

[편집]

薔花紅蓮傳

1944년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의 제3회 작품. 박진(朴珍) 편극·연출, 김연수(金演洙) 편곡, 배좌수(裵座首)에 김연수(金演洙), 계모에 성추월(成秋月), 장쇠에 박후성(朴厚性), 장화에 김녹주(金綠珠), 홍련에 김옥련(金玉蓮), 사또에 박영진(朴英珍)이 분장했다. 특히 장쇠 역(役)의 박후성과 홍련역의 김옥련은 최고의 명성을 떨쳤으며, 이 작품을 계기로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도달하였다. 소설 <장화홍련전>을 그때에 비로소 창극화(唱劇化)한 것인데 창극사상 전무후무한 대성황을 이룬 작품이다.

철산(鐵山)고을의 배좌수(裵座首)의 전실(前室) 딸인 장화와 홍련이 계모의 학대와 흉계로 비명에 죽어갔으며 명사또의 부임으로 그 사실이 밝혀져 계모와 장남인 장쇠는 처형되었다. 원귀가 되었던 장화와 홍련은 원한을 풀고, 천상으로 올라가 선녀가 된다는 가정비극이었다.

대춘향전

[편집]

大春香傳

1946년 1월 국악원 주최로 국악인을 총망라, 국극사(國劇社)의 창립공연으로 상연했다.

이도령에 정남희(丁南希), 임방울(林芳蔚), 춘향에 신숙(愼淑), 향단에 임수(任洙), 방자에 오태석(吳太石), 사또에 조상선(趙相善), 월매에 임소향(林小香), 임유앵(林柳鶯)이 분장했다.

이 <대춘향전>은 해방의 감격과 우리의 음악, 우리의 창극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작용했거니와, 새로운 의욕과 열연으로 크게 환영받았다.

단종과 사육신

[편집]

端宗-死六臣

1946년 김연수(金演洙) 창극단의 창립공연작품. 김아부(金亞夫) 작, 박진(朴珍) 연출, 김연수(金演洙) 편곡. 조선왕조의 궁중애사(宮中哀史)를 창극화한 것이다. 단종역의 박옥진(朴玉珍)이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대도시의 극장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며, 관중을 울렸던 작품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자기 조카인 단종(端宗)을 제거하여 왕위를 찬탈하는 내용이다.

선화공주

[편집]

善花公主

1948년 국극사(國劇社)의 2회째 작품. 유리촌 작, 안영일(安永一) 연출, 조상선(趙相善) 편곡·안무. 서울 공연 때는 도창(導唱)에 강장원(姜章沅), 진평왕(眞平王)에 백인(白仁), 왕비에 성추월(成秋月), 맛동방에 박귀희(朴貴姬), 선화공주에 신숙(愼淑), 상대등(上大等)에 오태석(吳太石), 석품(石品)에 정남희(丁南希), 길치에 성순종(成順鍾), 전옥(典獄)에 장기호(張基浩)였다. 지방공연시에 일부 배역이 바뀌어 맛동방에 장석원(張碩原), 선화공주에 조순애(曺順愛), 쇠돌이역에 성순종(成順鍾), 전옥에 김재선(金在先)이었다. 신라의 야화(夜話)로 일대 호평을 산 창극이다.

신라의 민요인 서동요(薯童謠)를 토대로 하여 극화(劇化)한 것이다.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때에 백제의 서동(薯童:훗날의 武王)이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노래를 지어 장안의 모든 어린이로 하여금 부르게 하여 드디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서동요의 본문은 '선화공주(善花公主)님은 남그으지 얼어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이다. 이것을 현대역하면,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취가(聚嫁)하여 두고 서동서방(薯童書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이다. 창극화된 노래에서는 '선화공주님은 남그지시 정을 두고 맛동방을 밤마다 남몰으게 안고 간다'로 되어 있다.

만리장성

[편집]

萬里長城

1950년 3월 국극사(國劇社)의 3회째 작품 추해상 작, 박춘명(朴春明) 연출, 조상선(趙相善) 편곡·안무. 배역은 만명(萬明)에 장석원(張碩原), 맹강녀(孟康女)에 조양금(曺良琴), 맹노인에 정남희(丁南希), 부인에 성추월(成秋月), 하인 석흥에 조상선(趙相善), 정도령에 김준옥(金俊玉), 장백(將伯)에 백점봉(白點奉). 서울 공연을 마치고 전주·광주를 거쳐 대전 공연시 6·25전쟁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진시황(秦始皇)이 6국(六國)을 통일하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때 전국의 청장년을 징발하여 노역케 하였는데, 사람을 생매장해야 장성이 빨리 완성된다는 미신으로 역군(役軍)을 수없이 생매장하였다. 만명(萬明) 도령 또한 생매장되게 되자 도망하여 맹강녀(孟康女) 집에 은신한 것이 인연이 되어 맹강녀와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맹강녀를 짝사랑하는 정도령의 밀고로 필경 만명도령은 붙들려 생매장 되고만다. 맹강녀는 만명도령을 찾아 만리장성으로 갔으나 만명도령이 이미 생매장된 뒤였다. 이에 그녀는 자결하고, 두 남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慰靈祭)로 막이 내린다.

예도성의 삼경

[편집]

濊都城-三更

1952년 국악사(國樂社)의 창립공연작품. 박황(朴晃) 작, 이진순(李眞淳) 연출, 한일섭(韓一燮) 편곡. 맥왕(貊王)에 김원길(金元吉), 예왕(濊王)에 양상식(梁相植), 태자에 장석원(張碩原), 공주에 박홍도(朴紅桃), 시녀에 남연화(南蓮花), 맥왕자에 박후성(朴厚性), 부하장(部下將)에 한일섭이 분장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상고시대의 예맥사기(濊貊史記)를 엮은 것이다. 포로가 된 맥왕은 예도성(濊都城)의 지하실에 20년간 유폐되는데, 맥왕의 왕자는 부왕을 구출하려고 부하장과 예도성에 잠입, 예왕의 공주와 사랑하게 되고, 이로써 삼경의 부왕을 구출하고 맥군이 급습하여 예도성이 함락되는 내용이다.

대심청전

[편집]

大沈淸傳

1957년 대한국악원 직속 시범국극단 창립공연작품. 박황(朴晃) 각색, 박진(朴珍) 연출. 배역은 심봉사에 김연수(金演洙), 박후성(朴厚性), 심청에 조애랑(趙愛娘), 화주승(化主僧)에 김득수(金得洙).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얻어 시공관(현 국립극장)에서 상연되었다. 그 인기는 절정에 달하여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미국의 성조지(星條紙)에 게재되어 창극 예술의 진가를 내외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으로 창극이 외신에 의해 소개되기는 그때가 처음이다.

고제 춘향전

[편집]

古制春香傳

1958년 대한국악원 직속시범국극단의 2회째 작품. 박황(朴晃) 각색, 박진(朴珍) 연출. 배역으로는 이도령에 장석원(張碩原), 방자에 박후성(朴厚性), 춘향에 조애랑(曺愛娘), 남연화(南蓮花), 월매에 박초월(朴初月), 향단에 남연화(南蓮花), 사또에 박영진(朴英珍), 안태식(安泰植) 등이 맡았다. 오늘의 <춘향전>은 1936년 창극좌(唱劇座)의 공연 이후 윤색된 것인데, 1903년 원각사(圓覺社) 때부터 1935년 사이에 상연되었던 옛날 그대로의 <춘향전> 공연을 시도하여 시공관(市公館)에서 상연, 호평을 받았다.

이도령이 책방에서 공부하다가 광한루 구경차 방자에게 나귀에 안장을 하게 하고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광한루 장면, 책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이 해지기를 기다리는 장면, 춘향의 집에서 백년가약 맺는 장면, 이부사(李府使)와 낭청(郎廳)의 대화 장면, 사랑가 장면, 이별 장면, 신관사또의 부임 장면, 춘향의 옥중 장면, 이도령의 과거 장면, 어사가 된 이도령과 나무꾼 장면, 방자와 어사의 상봉 장면, 농부들의 장면, 어사와 월매의 상봉 장면, 옥중의 춘향의 해몽(解夢) 장면, 옥중 상봉 장면, 어사출도 장면 등 무려 5시간 소요의 장편인데 이를 전·후편으로 나누어 상연하였다.

배비장전

[편집]

裵裨將傳

국립창극단 제18회 공연작품. 이 <배비장전>은 1936년 창극좌(唱劇座)에서 처음 상연되었으나 창극으로 구성되는 데 난점이 많아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국립극단에서 이 작품을 두번째 상연하여 예술작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 1973년 2월 15일부터 19일까지 3부 11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이 국립극장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제주목사를 따라 제주도에 가게 된 배비장은 외도를 않겠다고 아내에게 한 약속을 지켜 여자를 멀리한다. 그러나 한 번 그를 유혹해 보라는 목사의 명을 받고 그에게 접근해 온 애랑(愛娘)에게 혹해 배비장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어느날 밤 둘이 함께 있는데, 각본대로 본부(本夫)가 나타난 것으로 가장, 배비장은 알몸으로 궤짝 속에 숨는다. 남편으로 가장한 하인이 궤짝을 바다에 버리겠다고 떠들고 목사는 관청 앞마당에 궤짝을 놓고 마치 바다에 집어 던질 것 같이 한다. 결국 배비장은 알몸으로 관청 앞마당에 나와 웃음거리가 된다는 야유와 풍자가 넘치는 해학소설을 창극화했다.

<朴

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