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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판 소 리/판소리의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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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창본〔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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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唱本〔槪說〕

'판소리'란 광대(廣大)가 한 손에 합죽선(合竹扇)을 멋있게 들고 온갖 너름새를 곱게 섞어가면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로써 보는 이에게 연극적 효과를 전달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예술형태 중 하나이다.

연극이 상연되자면 각본(脚本)이 있어야 하고 그 각본은 원전희곡(原典戱曲)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판소리도 광대에 의하여 소리가 되려면 그 이전에 '판소리 사설(辭說)'이 있어야 하며, 이 판소리 사설을 기록한 문서를 '판소리 창본(唱本)'이라 한다. 즉 판소리에 있어서 창본은 연극에서의 희곡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 창본에는 연극의 희곡이 갖지 못한 큰 특색이 있는데 그것은 희곡이 누구에 의해서든 상연될 수 있는데 반하여 판소리 창본 중에는 특정된 광대를 위한 창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창본을 '유명창본(有名唱本)'이라 부르며 특정된 광대가 없는 '무명창본(無名唱本)'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송만갑(宋萬甲) 창본'이라 하면 그것은 송만갑이 부르던 판소리의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송만갑 자신의 창작적 작품은 아니다. 물론 광대 본인의 작품인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뛰어난 문사(文士)나 후원자가 지어준 것들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광대들은 문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립(定立)된 창본들은 대개 구구전승(口口傳承)으로 후대에 이어온 것(無名唱本)이거나 문사들이 어떤 특정된 광대를 위해 지어준 것(有名唱本)이다.

판소리의 창본은 그 전승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즉 몇 백년동안 전승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 창본의 내용에 있어 약간의(때로는 상당한) 변이(變異)현상이 일어난다. 가령 초기의 <춘향가>는 3시간이면 그 한 마당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인데 오늘에 와서는 8시간 반을 부를 만큼 내용이 대폭 부연되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판소리의 창본은 동일 계보의 창본일 경우에도 차츰 많은 창본이 파생된다.

판소리 열두 마당에 대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현재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를 꼽는데, 이 중에 창본에 관한 기술이 없으므로 1810년대 이전의 창본에 대해선 그것이 어느 광대의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1810년 이후의 문헌에서도 뚜렷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전에 의한 것으로 누구누구의 창본이라 하여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사본 또는 전사본(轉寫本)의 창본이 몇 개 있으며, 유진한(柳振漢)의 <만화문집(晩華文集)>에도 그것이 누구의 창본이라고는 밝히지 않은 채 <춘향가(春香歌)>가 실려 있다.

창본은 무명(無名)의 창본과 유명(有名)의 창본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즉 완판본(完板本)인 <별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 세창서관본(世昌書館本)인 <원본 별주부전> 등등은 누구의 창본인지 알 수 없는, 즉 무명의 창본들이며, 신재효(申在孝) 창본인 <판소리 여섯마당> <방만춘(方萬春)창본> <송만갑(宋萬甲)창본> 등은 주인이 뚜렷한, 즉 유명창본(有名唱本)들이다.

<姜 漢 永>

별춘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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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春香歌

완산(完山:全州) 판각(板刻)의 창본으로 간행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48∼1860년경의 판각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창본은 이병기(李秉岐)가 소장(所藏)하고 있었는데 6·25전쟁 때 분실되어 현재 소재가 알려진 것이 한 권도 없다. 이 책이 '판소리 사설' 본이란 것은 권말에 "……어사또 행아차려 춘향이를 거늘려 경성으로 가다 광대목도 쉬니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이란 부분이 수록된 것으로써 알 수 있으나 어느 광대의 창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창본은 모두 <춘향가> 사설본 중 원형이 되는 것의 하나이다.

열녀춘향수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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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女春香守節歌

이 창본 역시 누구의 창본인지 알 수 없으나 출간지(出刊地)는 완산(完山:全州)이다. 판각 연대에 대해서 1848년에서 1866년 사이로 보는 이와 1873년 전후로 보는 이가 있다.

원본 별주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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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本鼈主簿傳

이 책은 지금까지 흔히 고대소설 또는 조선소설 등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 1페이지 제7행 이후의 몇 행은 헌종·철종·고종의 3대에 걸쳐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김거복(金巨福)의 '더늠사설'과 유사하다는 점과 역시 이 책 54페이지 제10행에서 59페이지 제7행까지의 부분은 고종 때의 명창인 신학준(申鶴俊)의 '더늠사설'과 동일한 점으로 미루어 이 책은 1800년대의 창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책이 누구의 창본이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그 밖의 무명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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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名唱本

완판본(完板本)인 <심청전(沈淸傳)> <적벽가(赤壁歌)> <토별가>, 국립중앙도서관본인 <토생전(兎生傳)> <자치가(雌雉歌)>, 국제문화관본인 <배비장전(裵裨將傳)>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느 때 누구의 창본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밖에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몇 가지는 창본으로서 정착되지 못했다.

신재효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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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在孝唱本

신재효(1812∼1884)는 전라도 고창(高敞) 사람으로 판소리 연구가이며 작가인데, 그의 창본은 흔히 '판소리 여섯 마당'이라 불린다. 즉 <춘향가>(男·女·童唱)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토별가> <가루지기타령> 등의 여섯 소리가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이 여섯 마당은 전사(轉寫)되는 동안에 몇몇 이본(異本)을 냈는데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 <성두본(星斗本)> <고수본(古水本)> <가람본> <새터본> <일사본> 등이 있다.

이 여섯 마당은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간 많은 명창들의 창본이 되기도 한 전형적인 창본인데 1969년 12월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 의하여 <경인 신재효 판소리 전집(景印申在孝-全集)>으로 강한영(姜漢永)의 해설을 붙여 영인(影印)간행되었다. 또한 1971년 9월 간행된 <한국고전문학대계> 12권 속에 그 원본과 현대어역 및 주(註)와 교(校)를 붙여서 수록되어 있다.

옥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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獄中花

이해조(李海朝)의 편저로 1912년 8월 보급서관(普及書館)에서 출판하였는데, 누구의 창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내용은 완판본(完板本)인 <열녀춘향수절가>와 신재효의 여섯 마당 중의 <춘향가> 등을 대본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창본은 5명창(五名唱) 등의 소리사설의 몸체를 이루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옥중화>를 신소설(新小說)로 다루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성급한 결론이며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증수연예옥중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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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修演藝獄中佳人

1926년 경성서적조합에서 간행한 활자본으로, 정북평(丁北平)의 창본이다. 이 <증수연예옥중가인>의 내용은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와 같다.

5가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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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歌全集

이선유(李善有)의 창본으로서 1933년에 대동인쇄소(大東印刷所)에서 인출(印出)한 활자본이다. 이 창본에 수록된 5가는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華容道)> <수궁가(水宮歌)> <박타령> 등인데 이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서 다섯만을 추린 것이다. 이 창본의 범례의 1절에 "본 전집은 5가 전부를 고조와 중고조와 신조 중에서 가장 현대 적절한 원문을 수집하였음"이란 구절이 들어 있는데 이로 보아 많은 다른 창본에서 적절히 차용하여 편수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완판 <열녀춘향수절가>와 신재효본에 의거하고 있다. 이 창본의 특색은 '아니리'와 장단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인데, 현존 광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방만춘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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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萬春唱本

방만춘은 순조·철종 때의 명창으로 충청도 해미(海美) 출생인데, 필사본인 이 창본은 현철(玄哲)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창본의 내용은 정노식(鄭魯湜) 저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31페이지에 의하면 "<적벽가(赤壁歌)>와 <심청가(沈淸歌)>의 고전(古典)에서 윤색·개작하였다"고 되어 있어, <적벽가> <심청가> 두 마당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창환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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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煥唱本

김창환(1848∼1933)은 고종(高宗) 때의 국창(國唱)이며 5명창의 한 사람으로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아 의관(議官)이 되었고 그 후 원각사(圓覺社)의 주석이 되었다. 이 창본에는 <흥보가>와 <춘향가>가 수록되었으며 현재 박녹주(朴綠珠)·정광수(丁珖秀)가 그 전사본(轉寫本)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송만갑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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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萬甲唱本

송만갑(1865∼1939)은 5명창의 한 사람으로, 역시 판소리 명창인 송우룡(宋雨龍)의 아들이고, 판소리계의 제1인자인 송흥록(宋興祿)의 종손인데 후에 원각사의 간부직을 지냈다. 그의 창본은 <춘향가>와 <흥보가>이며 현재 박녹주(朴綠珠)가 그 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이동백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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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伯唱本

이동백(1866∼1947)은 5명창의 한 사람으로 충남 비인 출생이다. 고종(高宗) 때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김창환·송만갑 등과 원각사에서 공연하다가 뒤에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활약했다. 그의 창본은 <적벽가>이며, 제자인 강장원(姜章沅)·정광수(丁珖秀) 등이 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정정렬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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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貞烈唱本

정정렬(1875∼1938)은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전북 익산 출생이다. 원래 타고난 소질은 뛰어나지 못했으나 오랜 수련 끝에 명창의 경지에까지 이르렀고 이동백이 설립한 조선성악연구회의 상무이사였다. 그의 창본은 <춘향가>이며, 전사본은 김연수(金演洙)·김소희(金素姬) 등이 소장하고 있다.

유성준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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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成俊唱本

유성준(1874∼1949)은 5명창의 한 사람으로 동편제 판소리 이론의 대가이다. 특히 <수궁가(水宮歌)>를 잘 불렀으며 더늠은 토끼와 자라의 문답 대목이었다. 대목의 사설이 앞에서 밝힌 <조선창극사> 198∼205페이지까지에 실려 있는데 신재효 창본의 이 대목과 동일한 점으로 미루어, 유성준의 창본인 <수궁가>는 결국 신재효 창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전사본은 박귀희(朴貴姬)가 소장하고 있다.

정응민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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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應珉唱本

정응민(1896∼1964)은 고종(高宗) 때의 명창 정재근(鄭在根)의 조카이며, 현존(現存)한 강산제 판소리 기능보유자인 정권진(鄭權鎭)의 아버지이다. 즉 이 집안은 3대가 모두 당대의 명창들이며, 이들은 강산제의 창시자인 박유전(朴裕全)제의 순수 계승자들이다. 정응민 창본은 원래 박유전의 창본이었으며 <심청가> <적벽가> 등이 수록되었는데 원본은 현재 정권진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밖의 유명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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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名唱本

이상의 창본 외에도 현존하고 있는 명창들의 창본으로서 간행된 것들이 몇 권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정광수(丁珖秀)의 <창극조 대춘향가>이다. 이 창본은 1954년 5월에 광주(光州)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책머리에도 밝혔듯이 김창환(金昌煥)과 정정렬(丁貞烈) 창본의 합사본(合辭本)이다.

또 김연수(金演洙)의 창본 <춘향가>가 있다. 이 창본은 1967년 서울에서 출판되었으며 이것의 특색은 아니리와 장단을 하나하나 붙여 놓은 점인데, 여러 다른 창본의 사설을 적당히 적출하여 종합한 것이다.

<姜 漢 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