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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법의 연혁
[편집]韓國法-沿革 한국의 문물제도는 일찍부터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법제(法制)도 상고(上古)에는 우리 고유의 것이 극히 원시적이었으나마 없지 않았으나, 삼국시대 중엽부터 중국의 문물이 수입됨에 따라 중국 법제를 계수(繼受)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비로소 국가 체제가 갖추어지기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당(唐)·송(宋)·원(元) 및 명(明) 등 역대 왕조가 발달시킨 중국법전에 규정한 제(諸)제도를 순차적으로 수입함으로써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법전에 못지않은 법전을 편찬하게끔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 한국은 중국법제 지역에 속하였고, 한국법은 중국법의 발달과 규(規)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한말에 이르러 한반도에도 개화의 물결이 밀려와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하여 서구의 대륙법을 계수하기 시작,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후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영미법의 원리까지도 가미하여 현재에는 구미법을 계수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법제사는 중국법 계수시대와 구미법 계수시대의 두 시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중국법은 전제왕권과 유교윤리를 기반으로 하고 그 유지를 위하여 규정된 것인 데 대해, 근세 구미법은 멀리 로마의 고대시민사회에 거점을 두고 근세의 민주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두 법은 서로 이질적이었다. 따라서 한국은 한말의 개화기를 구획으로 하여 원리와 체계가 다른 법의 교체가 있었다. <李 熙 鳳>
조선조의 법전편찬 약사
[편집]朝鮮朝-法典編纂略史 조선은 동양의 전통적 법전편찬의 형식인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한국 최초의 왕조이며, 또한 역대의 국왕은 법전편찬에 노력하여 많은 법전이 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태조가 유훈(遺訓)으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인 6전에 의하여 치정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법치사상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이와 같이 법전편찬에 힘을 기울이고 법치를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은 내력에서였다. 즉 고려 말기는 왕권이 쇠미하여 문신과 무신이 서로 다투어 권력자의 교체가 무상하였다. 권력자로서 등장한 자는 국가의 의장(儀章)·법제 등의 모든 준칙을 방자하게 유린하며, 임의대로 치정함으로써 사당(私黨)이 일어나고 모함이 자행되어 정사가 문란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민심도 매우 혼란하였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무력으로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는 난세를 광구(匡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의 확립과 그 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즉위하자 조준(趙俊)에게 법의 제정을 명하여 <경제6전(經濟六典)(태조 6년:1371년)>을 간포하였다. 제2대 정종(定宗)은 부왕을 따라 즉위교지(卽位敎旨)로서 백관(百官)에게 <경제6전>을 준수하여 치정할 것을 교시하는 한편 법전을 정비하기 위하여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제3대 태종(太宗)은 <경제6전>이 개국 초의 황망한 중에 찬수(撰修)된 것이므로 이어(俚語:한국어)가 섞여 조잡을 면치 못하였다 하여 이를 법문(法文:한문)으로 개정하는 한편 <경제6전> 편찬 후의 수교(受敎:왕명에 의하여 법으로 제정된 것)·조례(條例:소관 관서에서 立案·啓請하여 裁可를 얻어 법으로 제정된 것) 및 기타 탈락된 법규를 집록(輯錄)하여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였다. 제4대 세종(世宗) 또한 그 후의 법규를 집록하여 <경제6전 등록(謄錄)>을 편찬하였으며, 제7대 세조(世祖)는 찬위(簒位)로 인하여 법이 해이해지고 준법이 되지 않음을 규지(窺知)하여 다시 법도(法度)를 갖추고 기강을 단속하기 위해 그간의 모든 법전의 수교·조례를 검토하여 영세부동(永世不動)의 법으로 할 법전을 집대성하려는 의도 하에 법전편찬에 착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간행하여 그 중 우선 '호전(戶典)'과 '형전(刑典)'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론이 있어 그 나머지의 4권과 더불어 수차 수정을 가하여 완성한 <경국대전 을사본(乙巳本)(성종 16년:1485년)>을 간포하기에 이르렀는 바 이는 조선 왕조 법전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전자의 <경제6전>은 창업주(創業主)인 태조의 치정의 기본 유훈을 골자로 하여 편찬된 것이므로 <경제대전>은 <경제6전> 중의 국기(國基)가 되는 규정은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라 하여 이를 변경 없이 계수하였고, 이러한 입법의 태도는 조선조 역대의 국왕을 통하여 견지된 원칙이었다. <경제대전>의 편찬 이후에도 사화(士禍)·변방사단 (邊方事端)·붕당(朋黨) 또는 외적의 침구(侵寇)가 있을 때마다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또는 권력의 쟁탈·유지를 위하여 수교·조례가 속출·남발하였으며, 그와 같은 법은 때로는 성헌을 유린하고 정국을 혼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소강(小康)을 얻을 때마다 역대왕은 그러한 법의 정리를 위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성종 22년)>·<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중종 38년)>·<수교집록(受敎輯錄)(숙종 24년)>·<전록통고(典錄通考)(숙종 32년)> 등을 편찬하는 등 법의 정비에 힘썼다. 그러한 중에도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때에는 붕당이 심하여 성헌이 공문화(功文化)하는 망발된 법이 남발하여 법의 위신이 극도로 추락하였다. 이에 영조는 숙고 끝에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경국대전>과 같은 영세(永世) 준수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을 해명함으로써 분규를 방지할 목적으로 <속대전(續大典)(영조 22년:1746년)>을 간포하고, 그간의 모든 법은 폐기하였다. 따라서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두 법전만이 병용·시행되었으나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정조(正祖)는 그 두 법전의 전(全)조문 및 그 후의 수교·조례를 선택하여 동일 성질의 조문을 분류·정리함으로써 한 법전으로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정조 9년:1785년)>을 간포하였다. 그 후 조선조 말엽에 고종이 등극하자 섭정(攝政)인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다시 <대전통편> 이후의 수교·조례 등을 증보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고종 2년:1865년)>을 간포하니 이것이 한국 최후의 동양식 법전이다. 이와 같이 조선조의 법전 편찬사업은 왕성하였다 하겠으나 그 중에서도 <경제6전>·<경국대전>·<대전통편> 및 <대전회통>의 넷이 가장 획기적인 4대 법전임을 알 수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경제6전>은 창업주 태조의 치정대본(治定大本)의 유훈을 담은 것이고, <경국대전>은 그것을 변경없이 답습하여 입법 지침을 견지하였다. <대전통편>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합편에 불과하고, <대전회통>은 <대전통편> 이후의 법을 선택·중보한 것으로서 <경국대전>·<대전통편> 중의 <속대전>·<대전통편> 이후 증보된 규정 등을 두루 재록하고 있으므로 금일의 법령집이 현행 법령만을 수록한 것과는 달리 <대전회통>만을 일람하면 고종때의 현행 법규뿐 아니라 법규가 개정된 연혁을 역력히 알 수 있어, 그를 통하여 조선조의 제반 제도의 변천까지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대원군이 서둘러 <대전회통>을 편찬한 것은 조선 중엽 이후로 외척세도로 인하여 왕권이 쇠미하였으므로 전제왕권을 법제로 재확인하고 선언하려는 데에 그 동기가 있었다. 동법전이 간포된 해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달성, 근대화에 성과를 얻은 때였는데 우리 한국은 전제왕국의 구각(舊殼)을 더욱 교착시키려 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는 눈을 돌릴 틈도 없었음을 볼 때, 후일에 한국이 국제경쟁에서 비운을 당하게 됨도 당연한 경로라 하겠다. <李 熙 鳳>
조선조의 역대법전의 내용과 성격
[편집]朝鮮朝-歷代法典-內容-性格 조선조의 역대법전은 동양의 전통적 법전 편찬형식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 및 공(工)의 편별(編別)로 된 6전식(六典式)이다. 이와 같은 편찬형식은 중국의 당조(唐朝)에서 비롯한 중국 역대왕조의 법전 편찬형식으로서 그것은 멀리 중국 상고의 주(周)관제에 연원을 둔 것이다. 중국에서는 관제(官制)를 천지4계(天地四界)에 비겨 행정기관을 나누었는데, 한국에서도 고려조 이후 이를 모방하여 중앙관제를 천관(天官:吏)·지관(地官:戶)·춘관(春官:禮)·하관(夏官:兵)·추관(秋官:刑) 및 동관(冬官:工) 등의 6조(六曹)로 나누어 행정 각부를 삼아 정무를 관장하게 하고, 각 조가 관장하는 정무에 속하는 것은 국왕이 그 조에 수교를 내리거나 또는 각 조는 해당 정무에 관한 것을 입안하여 국왕의 하비(下批:裁可)를 얻어 조례로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각 조는 각각 그 수교와 조례를 법규로 집록하여 정무의 규준(規準)으로 삼으며, 각 조가 집록한 것을 통합하여 한 법전을 꾸미면 당연히 '6전식 편별'이 되었다. 6전에 실린 규정들을 보면, (1) 국왕의 시정 보고기관인 관료기구의 조직, 그 관장 사무의 분류 및 관원의 감독 등에 관한 행정법적 규정 (2) 국민을 관리·지배하기 위한 형법적 규정 (3) 유교입국(儒敎立國)을 표방한 조선인 만큼 유가의 법률관인 '제률(制律)은 예(禮)의 보(輔)이다'에 따라 유교 윤리의 실행을 강제하기 위한 예의 법제화 규정 등의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또한 조선조의 법전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체제에 있어 중국의 6전식에 의거하였고, 선진의 전제왕국인 중국의 역대왕조가 어신제민(御臣制民)과 유교윤리의 법제화의 원리에 의하여 오랜 동안 탁마(琢磨)한 여러 법전을 검토하여 절충·계수한 것이므로 동양법전으로서는 상당히 정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육전식 편별의 내용
[편집]六田式編別-內容 6전식 편별은 다음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이전(吏典) ― 이조(吏曹)의 소관이 문반(文班)의 관직·품계(品階)·관원(官員)의 임면(任免)절차, 관원의 고과(考課:근무규정), 관원이 포폄(褒貶:근무성적을 사정하여 陞級·승진 또는 징계하는 것) 등 문반의 관제와 관원의 근무에 관한 관원법(오늘날의 공무원법)을 포함한다. (2) 호전(戶典) ― 호조(戶曹)의 소관인 경비(經費:예산)·회계(會計:지출)·호적·양전(量田:토지측량)·제전(諸田:國有 및 公有토지)·전제(田制)·요역(賦役)·무농(務農)·비황(備荒:收獲穀) 및 해유(解由:審計) 등 재정·경제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3) 예전(禮典) ― 예조(禮曺)의 소관인 제향(祭享)·과거(科擧)·취재(取才) 등의 고시 시행규칙, 교육·종교·외교의전(外交儀典), 새보(璽寶:國印·國王印)·관인(官印), 사령서(辭令書)형식 및 관혼상제 등 외교공문서, 교육·국가고시 및 예교(禮敎)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4) 병전(兵典) ― 병조(兵曹)의 소관인 무반(武班)의 관직. 군관의 근무규칙, 군기(軍器), 우체역로(郵遞驛路), 경성(京城)·궁궐의 경비 등 관제·병역·군무·우체 및 교통 등의 규정을 포함한다. (5) 형전(刑典) ― 형조(刑曹)의 소관인 소송·형벌·수사 및 노예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6) 공전(工典) ― 공조(工曹)의 소관인 교량(橋梁)·영선(營繕)·공장(工匠)·도량형(度量衡)·주차(舟車)·산림(山林)·도요공(陶窯工) 및 야금(冶金) 등 건축·식림 및 공업 따위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李 熙 鳳>
관제사
[편집]官制史 한국의 관제는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변천하였고 볼 수 있다. (1) 신라의 관제 ― 신라는 6부연맹(六部聯盟)의 부족국가로 출발하여 차차로 국력이 강대해짐에 따라서 인근을 병합 또는 정복함으로써 국가가 팽창하여 갔다. 이에 따라 국무가 폭주(輻輳)·복잡해져서 종래의 대소 족장회의(族長會議:和白會議)에서 국무의 의결을 거치는 것이 불가능해지므로 국무의 결정·집행을 국왕에게 일임하고 중대사에 관하여서만 화백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보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집권이 강화되어 국왕은 국무의 집행부를 정비하게 됨으로써 전제왕국으로 그 변모를 변하여 갔다. 그 후 통일신라기에 이르러 당(唐)과의 왕래가 빈번해져서 당의 관제를 수입·절충하여 관제를 대폭 개혁하였다. 그러나 관제가 완전히 중국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관서(官署)·관직(官職)을 신라 고유의 것과 당의 것으로 혼합하고 그 명칭도 신라 고유어와 한어(漢語)를 혼용하여 관제의 체계가 잡히지 못함으로써 후일의 왕조의 관제에 불완전한 모형을 예시함에 불과하였다. 또한 신라는 전제왕국 체제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부족사회의 잔재를 끝까지 불식하지 못하여 씨족의 계급인 골품(骨品)에 의해 관원의 임용이 결정되고, 당의 과거제에 의해 씨족의 고하에 관계 없이 인재등용을 하기 위한 삼품과(三品科)를 창설하였으나 끝내 활용되지 못하였으며 또 남당(南堂)이 잔존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족장(화백)회의에서 의결하는 등 이러한 일들을 감안할 때 신라에서는 전제왕국이 완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2) 고려의 관제 ―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조는 처음부터 부족사회를 탈피하고 전제왕국으로 등장한 최초의 왕조이다. 건국 초에는 관제의 정비를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신라와 태봉(泰封)의 관제을 절충하여 미봉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성종(成宗:6대)은 수성(守成)의 현군(賢君)으로서 유신(儒臣) 최승로(崔承老)의 보필을 받아 당제(唐制)·송제(宋制)를 절충하여 관제의 기틀을 잡았다. 그 기구는 당·송제를 모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서와 관직의 명칭까지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고려의 관제는 완전히 중국화되었다. 그 조직은 삼성(三省:門下省·中書省·尙書省)·6부(六部:상서성 감독하의 吏·戶·禮·兵·刑·工의 행정각부이며 행정부의 중추), 제각관시(諸閣館寺:행정각부의 감독하에 있는 實務관서)를 행정 기구의 주축으로 하고 있다. 그 외각에 3사(三司:금전·물품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서)·밀직사(密直司:일시 中樞院이라고도 칭하였으며, 政令의 출납·宿衛·軍機를 관장하는 관서로 宋의 관제의 樞密院에서 유래) 및 사헌부(司憲府:司憲臺·御使臺 또는 監察司 등으로 칭하기도 하나 국왕에 대한 諫官과 百官에 대한 감찰기관의 임무를 담당하는 관서) 등으로 중앙관제가 편성되었는데, 대개 당시의 당·송관제의 답습이었다. 그 후 고려가 원(元)에 신복(臣服)한 이후에는 외번(外蕃)으로서 천자국(天子國)의 관제를 습용(襲用)하였으므로 축소하라는 원의 간섭에 의하여 관서의 폐합과 아울러 일부 몽고제(蒙古制)를 가미하여 신제(新制)를 마련함으로써 비위를 맞추다가, 원의 쇠망으로 공민왕(恭愍王)때에 다시 성종 시대의 구제(舊制)로 환원하는 등의 변천이 있었다. 지방관제와 고려의 특유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등에 대하여는 조선 관제에서 비교·설명하기로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려조는 완전히 부족 사회가 붕괴된 후 전제왕국으로 출발하였으므로 씨족의 고하에 관계없이 능력에 의한 인재의 등용을 위하여 과거제를 채용하여 원활히 활용하였으나, 관료 조직의 강화는 관인(官人) 계급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관인 계급의 횡포가 일어났다. (3) 조선의 관제 ― 조선조는 역성(易姓) 혁명에 의한 왕조의 교체일 뿐 사회구조에 변혁이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관제도 대체로 고려조의 것을 모형으로 하여 실정에 맞게 수정을 가함으로써 관제의 토착화를 꾀하였을 따름이다. 세종때에 조선조 관제의 대개의 윤곽이 확정되었고, 그 관제는 상술한 바와 같이 법전의 편찬으로 관서·관직 및 그 정원, 관장사무의 분류, 사무처리의 규정, 그리고 인사제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법률규정으로 정한 것은 앞서의 두 왕조에 비하여 특기할 만한 일이다. 조선조의 관제를 개관하면, 고려조의 삼성을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三議政으로 구성된 최고의 합의제 관청으로 국토계획·외교정책의 수립을 고유의 관장 정무로 하고, 또한 百官의 감독에 임한다)를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기축으로 하여, 그 아래 많은 실무관서인 제각(諸閣)·관 (館)·시(寺)·서(署) 및 창(倉)을 예속시킨 것이 중앙관제의 골격이었으며, 그 외의 외각관서로서는 종부시(宗簿寺:宗親府)·돈령부(敦寧府) 및 충훈부(忠勳府) 등의 명예관서와 의금부(義禁府)·사간원(司諫院) 및 사헌부(司憲府) 등의 국왕에게 직속된 감찰기관 등이 있었다. 또 지방관제로 군현제도(郡縣制度)가 완성된 것은 조선시대가 처음이다. 신라때에도 지방을 주(州)·군 (郡)·현(縣) 등으로 나누어 도독(都督)·태수(太守) 또는 현령(縣令) 등을 주재시켜 지방행정을 시행하였으나, 주·군 및 현은 중앙에서 직할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부(府)·주·군 또는 현 등으로 나누어 도호부사(都護府)·지사(知事) 또는 현령을 두어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고 때로는 안찰사(按察使)를 순회시켜 지방관의 치적을 등제(等第:成績査定)하여 포폄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지방장관을 상주시켜 수령(守令)을 총괄하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조에서도 군현제도가 완성되었다고 는 볼 수 없다. 여기에 반해 조선조는 전국을 8도로 구분하여 관찰사(觀察使)를 지방장관으로 상주시켜 도내의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군수(郡守)·현령 및 현감(縣監) 등의 관하 고을의 수령을 감독하며 도정(道政)을 총괄하게 하였으므로 비로소 군현제도가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李 熙 鳳>
형정사
[편집]刑政史 신라와 고려조의 형정에 관하여는 문헌이 없으므로 상세하지 않으나, 조선조의 형정은 이 두 왕조보다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형정도 조선조의 형정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조의 형정을 현대의 형정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 수 있다. (1) 동서제국의 전근세(前近世)에서와 같이 조선조에서도 삼권분립이 없으므로 행정관이 범죄의 수사와 재판을 겸임하였다. (2) 수사기술이 미숙하여 범죄의 수사는 규문주의(糾問主義)에 의하여 고문으로 자백을 받게 됨으로써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라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3) 조선조는 계급사회였으므로 양반과 사족(士族)은 의금부에서 재판하고, 서민은 지방관이나 형조에서 재판하여 양반 재판소와 상민(常民) 재판소의 분류가 있게 되었다. (4)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적용되어 형률(刑律:刑典 기타 각 典의 政 및 大明律의 正文)에 규정이 없으면 형벌할 수 없으나 '단죄무정조, 인율비율응가응멸(斷罪無正條, 引律比律應加應滅:죄를 처단함에 있어 바른 조례가 없으므로, 법을 끌어 어떤 법에 비하여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다)'에 의하여 법조의 유추해석이 허용되어 남형(濫刑)의 여지가 있었다. (5) '단죄의신송률(斷罪依新訟律)'에 의하여 형법불소급의 원칙이 배제되었다. (6) 조선조는 ① 전제왕국인 한편 관료국가이고, ② 가부장제(家父長制) 사회였으며, ③ 양반·사족을 지배계급으로 하고 서민과 천민(賤民)을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계급사회이므로 이러한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범죄도 '왕권 침해에 대한 범죄(예;대역죄·모반죄)'·'관원의 관기(官紀) 침해에 대한 범죄(예;수뢰죄·직무상 횡령죄·挾勢乞索罪 등)'·'가부장제의 침해에 관한 범죄(예;綱常罪)' 및 '사회계급의 교란 및 침해에 관한 죄(예;奴娶良女罪·양반모독죄)' 등 네 부류의 범죄가 중시되어 중벌(重罰)되고, 구타·상해 또는 재산법 등 일련의 자연법은 경시되었다. (7) 형벌은 5형제(五刑制)로 사(死)·유(流)·도(徒)·장(杖) 및 태(苔) 등의 5종이 있다. 또한 도형(徒刑:오늘날의 징역)과 같은 자유형(自由刑)이 동양에서는 일찍부터(隋시대) 발달되었는바, 이는 자신(自新:改過遷善)하여 사회복귀의 기회를 주는 목적형(目的刑) 또는 교육형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또 유럽에서 최초로 암스테르담에 징치장(懲治場)이 설치되어 징역형을 과하게 된 것이 18세기경이니, 동양이 서양보다 12·3세기나 앞섰다고 하겠다. (8) 유교의 영향으로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대부에게는 형을 가하지 않는다)'라는 유가의 법률관에 따라 중신 또는 종친이 사죄(死罪)에 해당하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사약을 내려 자진(自盡)을 권한 것은 그 한 특징이다. 또 한국에는 일찍부터 압슬(壓膝)·자자(刺字) 또는 낙형(烙刑) 등의 육형(肉刑)이 있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숙종·영조의 엄금으로 이를 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