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현대의 사상/변증법적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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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편집]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의 철학적 부분을 레닌과 스탈린이 당적 교조(黨的敎條)로서, 소련의 고정세계관(固定世界觀)으로서 공식화한 관제철학(官制哲學)이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적(唯物論的) 입장에 서기는 했으나 유물론과 변증법의 다리를 놓으려는 철학적 논의를 한 바가 별로 없고, 엥겔스가 '자연변증법(自然辨證法)'에서 그 점을 시도했으나 미완(未完)에 그쳤다. 원래 유물론의 원칙을 관철하려면 변증법이 죽게 되고 변증법을 옹호하려면 유물론은 포기되어야 한다. 마르크스 주의 문헌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론의 발전 과정에서 포이어바흐의 기계적 유물론을 극복하고 대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意識)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한 마르크스의 간단한 언급 이외에 그 유물론의 정식화(定式化)는 철학 술어로, '유물론'이란 용어는 곧 관념론(觀念論)의 대어(對語)로 간주하고 암암리에 실재론의 입장임을 풍긴다. 마르크스는 인식론적 반성 없이 다만 반관념론적(反觀念論的) 입장에 서서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위(優位), 인간에 대한 자연의 우위만을 강조하여, 이 물질결정론(物質決定論)으로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의 경제결정론의 기초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레닌은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의 경험비판론 등 실증주의와 경험론으로부터 유물론의 교조를 옹호하기 위해 유물론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의식은 존재의 반영에 불과하고 고작해야 근사적(近似的)으로 정확한 반영에 불과하다"라고 해서 반영론적(反映論的) 유물론을 공식화했다. 물질이 제1차적이며 의식이나 관념은 물질의 '반영'이거나 모사(模寫)에 불과하다는 반영론적 논증으로 관념론과 대항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의식도 결국 근사적 반영에 불과할 것이므로 "의식은 존재의 근사적 반영에 불과하다"는 명제의 진리성마저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보다 더 유물론의 공식화를 극단화시킨 것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볼셰비키 당사(黨史) 제4장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마르크스 주의 철학을 교조(敎條)로 고정시키고 마르크스 주의 해석을 스탈린 1인만이 할 수 있도록 독점화했다. 여기서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 레닌 주의당의 세계관(世界觀)이다'라고 해서 당적 교의(黨的敎義)로 단정하고 이른바 'DIAMAT(소련 공산당의 세계관의 약칭)'로 굳어지고 통속화되었다. 이 철학의 변증법적 해석은 자연 및 사회, 역사 등 모든 현상이 보편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요, 운동하고 발전한다고 하는 세계의 통일성을 인정한다. 이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은 서로 대립하는 한편 배제하면서도 서로 제약하는 모든 과정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 'DIAMAT'는 스스로 과학을 자칭하면서도 전체학(全體學)을 표방하는 형이상학임이 분명하다. 이 형이상학적 도그마는 세계의 전체적 법칙으로서 ① 대립물(對立物)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② 양(量)에서 질(質)로의 전화(轉化)법칙, ③ 부정의 부정의 법칙 등을 귀결한다. 이러한 법칙들이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통일적 법칙이요, 동시에 모순에 의한 발전법칙이라고 주장하는 점이 바로 야스퍼스가 지적한 '전체지(全體知)'를 가장한 사이비과학성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 된다. 흐루시초프대에 와서 비로소 과학자들이 'DIAMAT'를 억지로 적용하지 않아도 되었고, 비(非)스탈린화와 더불어 극단적 공식화가 약간 완화된 것이다. 사실 'DIAMAT'에서의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위원칙은 인간의 주체적 사고나 능동성은 거세(去勢)되고 타성적(惰性的) '물질'에 의해 규정당하는 결정론을 낳았으며, 따라서 이 객관주의적 물질1원론(物質一元論)에서 귀결된 역사필연성(歷史必然性)의 강조는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인간의 역사창조자로서의 능동적 역할을 부정하고 오로지 당(黨)의 공식적·폭력적으로 강요될 수 있는 스탈린 주의적 강제사회의 신조로 이용된 것이다. 이 철학적 교의(敎義)는 비록 유물론임을 자처하나 그 철학적 '당파성(黨派性)'의 원칙에서 모든 이론은 실천의 도구, 즉 당에서 유용한 이론적 도구라고 보는 프래그머티즘 경향과 아울러 당적(黨的) 실천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강조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관념론' 경향으로 흘러, 결국에 가서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모순'인데 이 '모순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해서 계급투쟁설과 계급혁명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철학적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아래에 모순문제가 야기되어 과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순이 해소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모순 없이도 사회발전이 가능한가의 이른바 '모순 논쟁'이 야기되었다. 모순 없이는 사회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려면 사회주의 사회에도 모순이 상존(尙存)한다고 자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 논쟁'은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논쟁'으로 발전하여 자유·공산 양대진영의 관계를 모순관계로 보고 전쟁불가피론을 주장하는 파(正統派, 중국)와 흐루시초프의 평화적 공존의 이론(修正主義, 소련)으로 갈라섰다. 이는 변증법의 핵심인 모순법칙의 공식화가 초래한 결과이다. 이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은 스탈린 주의적 공식화(당적 교의화)의 산물로서 이미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변하고, 산 철학이 아니라 조로(早老)해서 동맥경화된 허위의식적(虛僞意識的) 이데올로기로 판명되고 말았다. 이 세계관적 도그마는 서구(西歐) 사회주의 정당에서서 1959년 독일 사민당(社民黨)이 포기한 바 있고 동구(東歐) 공산당 여러 나라에서도 비스탈린화 이후 사실상 버린 지 오래다. <申 一 澈>

유물사관[편집]

唯物史觀

마르크스·엥겔스가 주장한 유물론적인 역사해석의 체계. 이를 '사적 유물론' 혹은 '유물사관'이라고 한다. 역사해석에 있어서 물질적 생산력을 그 인과적 요인 중 가장 중요시하는 역사관이며, 세계정신(Weet geist)의 자기 전개과정이 역사라고 주장한 헤겔류의 관념사관과 반대된다. 즉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하면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인간의 의식이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양식이란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단계는 그 시대마다 노동도구의 발달 단계로 표현되기 때문에 유물사관에는 생산기술 발달에 중점을 두는 태도가 있다. 그러나 유물사관의 중심은 인간이 생산에 참가할 때는 사회적이 되며 따라서 일정한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관계란 것은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대응하는 사회관계인데, 그 관계는 주로 그 사회의 주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사이의 계급관계로 표현된다. 이러한 생산관계가 변하면 전 사회구성체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토대이며 그 위에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생긴다는 것이다. 유물사관의 토대결정론은 경제사회(토대)와 국가(이데올로기)의 구분법 성립이 가능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사회를 모체로 해서 구성한 이론이다. 따라서 당 관료나 국가권력이 경제를 지배하는 공산사회 같은 곳에는 경제적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보다는 그 반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엥겔스는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원시 공산제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고대 자본주의 사회, 다시 사회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의 차례로 발전한다고 주장하며, 노예제에서 자본제까지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인정되고 따라서 계급대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역사관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변신론적(辯神論的) 역사 해석의 전통이 세속화되어 계승되어 있고 따라서 계몽사관의 전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독창적인 부분은 매우 근소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 역사관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비롯해서 계급적 모순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변증법적 역사해석을 시도해 왔으나 1958년 이후 공산권의 모순 논쟁(矛盾論爭)에서는 모순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아니요, 모순의 지양이나 통일 단결이 그 원동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중·소 분쟁이나 체제내의 반목·비판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유물사관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스탈린의 논문 <마르크스 주의에서의 언어학> 이래 언어·문법·수학 등은 토대(土台)도 상부구조(上部構造)도 아니며, 따라서 계급적인 것도 아니라고 수정하게 됨으로써 유물사관의 토대·상부구조의 구분법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다.

<申 一 徹>

마르크스[편집]

(카를) Karl Heinrich Marx (1818-1883)

마르크스 주의의 개조. 독일 라인주(州) 트리르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무렵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조약이 성립한 후이나, 혁명(7월혁명, 2월혁명 등)과 반혁명의 싸움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산업혁명 중의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 10시간 노동법의 제정 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격심해져서 참으로 파란 많은 시대였다.

김나지움을 마친 마르크스는 본(Bonn)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예니와 약혼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학문적 관심은 역사나 철학으로 기울어져 갔다. 헤겔 철학이나 당시의 헤겔 좌파(左派)가 마르크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한(1841) 마르크스는 다음해에 쾰른으로 옮겨가, <라인 신문>의 편집국장이 되어 현실적인 정치문제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래서 이 신문은 탄압을 받아 발행금지를 당했다.

예니와 결혼한 마르크스는 파리로 옮겨가 <독불연지(獨佛年誌)>를 발간했다(1844). 이 잡지에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비판 서설>을 게재하고, 시민사회 속에서 학대받고 있는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시민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 때 엥겔스가 찾아왔다. 모든 점에서 두 사람은 의견이 일치하여 생애를 통한 협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정부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되어 벨기에의 브뤼셀로 갔다(1845).

이 무렵의 경제학 연구를 담은 최초의 노트가 <경제학·철학 수고(手稿)>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본질이 노동에 있다는 것, 그런데 시민사회에서는 노동의 생산물이나 노동과정 그 자체가 타인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것, 여기에서 노동자의 빈곤이나 비인간화(非人間化)가 유래한다는 것, 사유제에 의한 시민사회의 폐지 없이는 노동자나 인간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분석되고 있다.

엥겔스와의 최초의 공저 <신성가족(神聖家族)>(1845)에서는 바우어(1809-1892) 등의 대중을 경멸하는 철학이 비판된다. 또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을 "거꾸로 서 있다…"고 비판한다. 세계를 변화, 발전시키는 근원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생존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를 뒤쫓아 브뤼셀에 온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를 계획했다.

이 책은 헤겔 이후의 독일 철학이나 독일 사회주의를 결산하고, 생활 속에서 종교, 철학, 도덕 등 의식 형태가 생겨난다는 세계관을 내세우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 다음에 <철학의 빈곤>(1847)이나 <임금(賃金)노동과 자본>(1849)이 씌어졌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강령이 바로 <공산당선언>(1848)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가 불가피하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단결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매진할 것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1848년의 프랑스 2월혁명이 실패하자 브뤼셀에서 추방되어 파리로 도피, 곧 쾰른으로 옮겨가 <신(新)라인 신문>을 통해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방령을 받아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런던으로 갔다(1849).

엥겔스도 왔으나 당시의 마르크스 일가는 가난과 불행의 극에 놓여 있었다. 차남, 3녀, 장남이 계속해서 죽고, 때로는 장례조차 지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난 속에서도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에 나가 경제학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 공부했고,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돕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상업을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을 써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비판했다.

런던에 망명한 지 10년 후인 1859년에 <경제학비판>이, 다시 8년 후인 1867년에 <자본론> 제1권이 간신히 세상에 나왔다.

'제1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 결성되어(1866) 마르크스는 지도자로서 노력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금난과 파벌 때문에 뜻대로 추진되지 않아 10년 남짓해서 해산되고 말았다(1876).

1881년 말에 아내 예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67세). 마르크스는 두뇌도 육체도 쇠약해져, 중병만을 거듭 앓다가 간장암으로 죽었다(65세).

대저 <자본론> 제2권, 제3권은 엥겔스에 의해 완성되어 출판되었다.

경제학·철학 수고[편집]

經濟學·哲學手稿 (1844)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을 편집해 보고(1842-43), 느낀 바 있어 이때부터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노트, 또는 초고(草稿)의 일부가 오늘날 <경제학·철학 수고>로 세상에 나와 있다.

특히 주목되는 이론은 편자에 의해 <소외(疎外)된 노동>이라고 이름붙여진 장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본질이 분명히 '노동하는 인간'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르크스의 노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인간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관련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한다(類的인 생활).

유적인 생활은 자연에 작용하며 노동하는 것이다. 자연에 작용을 가해 물품을 생산하고 이에 의해 사는 것이다. 생산적인 노동이야말로 자기의 실현이며 유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시민사회 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정은 거꾸로 되어 있다.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노동자와는 낯선 소원한 것으로서 오히려 노동자를 괴롭히고 있다. 곧 노동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독점되고 사유(私有)되어 노동을 한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여기서 노동자는 자기 실현으로서의 부(富)를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진다. 요컨대 노동에 의해 물품을 만들고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는 인간다움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것이 '소외'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러한 소외는 단지 생산의 결과(생산물)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생산활동 자체가 이미 타인의 것이 되고 소원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에서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고통·불행·자기희생을 느낀다. 그래서 노동하지 않을 때 자유와 편안을 느낀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였다. 인간은 함께 노동하고 함께 한없이 자기를 발전시키며 인류의 공존을 실현시킨다. 그런데 이기적 욕구의 충족을 추구해 마지않는 시민사회에서는 인간의 공동성, 공존은 무시되고 사람들은 서로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 이데올로기[편집]

Die deutsche Ideologie (1845)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 이래 독일 관념론적 견해에 대한 대립적 견해를 공동으로 정리하고, 그들 자신이 이전의 철학적 의식을 청산하려고 하였다. 이 공동작업은 1845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독일 이데올로기>는 헤겔 이후의 독일 철학과 독일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아무리 혁신적인 서구 사상도 그것이 낙후된 독일에 들어오면 그 사상을 낳은 사회 기반으로부터 유리되어 단지 이론적인 문제로만 취급되고 해석된다. 이 점에 독일 이데올로기(철학적 의식)가 추상적·비현실적이며 구체성이 없는 철학적 공론에 빠지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비판을 통해서 실천적인 사회적·역사적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역사는 전체로서 어떠한 구조를 갖고 있는가?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품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관계, 그것이 역사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 기초를 근거로 하여 종교·철학·도덕 등의 의식형태가 결정된다. 곧 의식으로부터 생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생활로부터 의식의 여러 형태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련에서 생산과정, 인간관계, 의식형태는 발전·전개되고 여러 단계를 밟게 된다. 역사를 이러한 발전단계로 파악하는 것이 참된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공산당선언[편집]

共産黨宣言 (1848)

1847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상순에 걸쳐서 공산주의자 동맹의 제2회 대회가 런던에서 열려 마르크스·엥겔스가 작성한 강령 원칙을 채택하고 동시에 두 사람에게 선언의 기초를 일임하여 두 사람에 의해 작성 채택된 것. 전문 4장으로 되어 있어, 유물사관적으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몰락해 가는 과정을 사회의 필연 법칙으로서 분석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전과 역사적 사명과 계급투쟁의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경제학비판[편집]

經濟學批判 (1859)

이 책의 서론에서 소위 '유물사관'의 정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간은 공동으로 물품을 생산한다. 이 때 일정한 인간관계(예를 들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같은 생산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물품을 생산하기 위한 관계는 그 때의 상품을 생산하는 힘(생산력)에 대응한다.

이 생산관계가 현실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법률·정치, 더 나아가 종교·철학·도덕 등의 상부구조가 형성된다.

곧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사회생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생활 양식이 인간의 상부적(上部的) 의식을 결정한다. 그러나 물품의 생산력은 끊임없이 상승한다. 따라서 물품을 생산하기 위한 관계(예컨대 노동자와 자본가 관계)는 우수한 생산력에 맞지 않게 되어 생산력을 저해한다. 우수한 생산력에 맞지 않게 된 생산관계는 맞도록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에 대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적대관계는 알맞지 않다. 적대가 없는 생산관계(사회주의)야말로 적합한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그의 논리는 뒤에 인간의 창조적 자유를 부정하는 경제결정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자본론[편집]

資本論 (1867)

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의 주저. <자본론>은 시민사회 내지 자본주의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법칙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현대사회에서 생산은 분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생산물은 거의 모두가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상품은 인간에 유용하기 때문에 생산, 판매된다. 상품은 가격을 갖고 있다. 그 가격은 대체로 그 상품을 생산할 때 사회적으로 평균하여 어느 만큼의 노동시간이 필요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화폐도 원래는 상품이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누구나 구하는 상품으로서 매개 역할을 한다(지폐는 상품이 되는 화폐, 예컨대 금화와 언제나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화폐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상품이 화폐를 매개로 교환된다는 것은 사실 인간의 노동이 교환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산하는 데 10시간 걸린 A라는 상품을 팔아 마찬가지로 10시간 걸린 B라는 상품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낳은 노동자라는 인간은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몸=정신적·육체적 능력='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이 유일한 소유물='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을 얻고 그것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노동자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 매매된다는 데에 자본주의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 있다. 이 노동력이라고 하는 상품의 가치, 곧 임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를 생산하기 위한 가치(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은 바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비인 것이다.

사들인 상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구매주(購買主)의 권리이다. 따라서 노동력을 산 주인(자본가)은 임금이 회수될 수 있을 만큼 노동자를 부리는 동시에 반드시 그 이상으로 노동자를 노동시킨다(구입한 노동력을 사용한다). 임금을 회수하기 위한 노동이 '필요노동(必要勞動)'이며, 이를 초과한 노동은 '잉여노동(剩餘勞動)'이다. 잉여노동은 자본가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기 몫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착취'라고 말했다.

잉여노동이 생산하는 생산물의 가치가 '잉여가치'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사는 목표는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없으면 자본가는 살아갈 수조차 없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생산은 불가결의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실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의 착취)라는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이 관계를 확대하기 위해 잉여가치를 전부 소비하지 않고 일부분을 축적하여 생산의 확대에 돌린다.

자본의 축적이 진척되면 기계 등이 사용되어 생산력이 증대한다. 그 결과 자본 중에서 생산수단(원료·도구·기계 등)을 위해 투하되는 부분과 임금에 투하되는 부분의 비율이 달라진다. 곧 전자의 후자에 대한 비율이 증가한다. 사회 전체의 자본에 대해 볼 때, 사회 전체의 자본이 증대함에 따라 임금에 할당되는 비율은 누진적으로 감소된다. 그래서 노동자가 남아돌게 된다. 게다가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자가 몰락하여 노동자가 되고 실업자는 증가한다.

그러므로 한쪽의 극(極, 자본가 계급)에서의 부의 축적은 다른 쪽의 극(노동자 계급)에서의 빈곤, 노동고(勞動苦)·예속·불안·무지·도덕적 타락의 축적인 것이다. 물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노동 자체가 노동자 자신을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들고 더욱더 비인간화하며, 거꾸로 착취하는 자본가를 더욱더 강력하게 만든다. 자본이 지배하는 한 이 모순은 계속되고 확대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학대받는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일어나고, 그들에 대한 억압·착취, 그들의 빈곤·예속·퇴폐가 증대하면 할수록 그들의 반역도 증대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무덤을 팔 사람(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의 법칙과 역사적 필연성을 자기 나름으로 분석하고 마치 예언자처럼 노동자 계급의 생성과 운명과 반항, 그리고 사명을 밝혔다. 그러나 이 논리는 현재 세계적으로 많은 회의와 비판에 부딪히는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엥겔스[편집]

Friderich Engels (1820-1895)

독일 사상가·사회주의자. 라인주 바르멘 태생으로, 경건하고 상업에 열중하는 가풍 속에서 자랐으며 문학·음악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고교를 중퇴하고 상업도시 브레멘으로 가서 장사를 배우기도 했다. 1841년에 1년간 지원병으로 베를린 포병대에 입대, '청년 독일파'나 베를린의 급진적인 '청년 헤겔파', 특히 모제스 헤스(1812-1875) 등과 접촉하여 그때까지의 신앙심을 버렸다.

1842년에 아버지의 명령으로 영국의 에르멘 엥겔스 상회에 근무하며 망명혁명가나 차티스트와 교제하고 산업혁명가 중 '영국에서의 노동자 상태'(같은 이름의 저서가 1845년에 출간)를 직접 목격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한 <국민경제학 비판대요(國民經濟學批判大要)>(1844)를 저술했다.

1844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와 만나, 필생의 교우 관계가 성립되었다.

1845년에는 두 사람의 최초의 공저 <신성가족(神聖家族)>에서 바우어 형제 비판, 청년 헤겔파적 입장의 청산을 거쳤으며, 그해 여름부터 다음해 가을에 걸친 브뤼셀에서의 공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을 암시하였다.

1847년 당시 독일의 비합법적 결사인 '공산주의 동맹'의 강령으로서 <공산주의의 원리>를 기초하고 이를 근거로 1848년에 마르크스와 공저로 <공산당선언>을 출간했다.

1848-49년의 독일혁명 때에는 쾰른에서 마르크스와 함께 <신(新)라인 신문>을 편집하고 혁명을 개괄한 <독일농민전쟁> <혁명과 반혁명>(1851)을 저술했다.

1869년까지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자본론>을 집필중인 마르크스를 도와주었다. 1864년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널의 결성에 참가하고, 1870년부터는 런던의 마르크스 집 근처에 살며 <반(反)뒤링론> 등을 썼으며, 마르크스의 유고인 <자본론> 제2·3권을 간행했다. 후두암으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자연변증법[편집]

自然辨證法 (1870-1880)

엥겔스의 유고로 1925년에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헤겔이 죽은 후 독일에서는 사변적 철학이 쇠퇴하고 1870년대의 대공업과 자연과학의 비약적 발전을 배경으로 뷔히너 등의 생리학적 유물론이 대두했다. 진화론(進化論)을 사회 다윈 주의로 바꾼 뷔흐너 등의 사회주의 비판은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엥겔스는 반(反)뷔흐너론의 집필을 계획했으나 자연에서의 변증법에 관한 일반적인 저술을 하기로 계획을 바꾸고 자연과학, 수학에 있어서의 변증법에 관한 자료를 모아서 1875-76년에는 '서론'을 대략 완성하였다.

'서론'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신학과 대결하며 근대 자연과학이 거둔 성과를 기술하는 동시에 근대 과학이 자연의 절대불변성(絶對不變性)이라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형성을 도와서 과학의 발전을 저지하게 된 유래를 해명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는 이 형이상학적 사고를 과학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여러 견해를 탄생시켰고, 새로운 자연관(자연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소멸한다), 자연을 운동·발전에서 파악하는 변증법적 견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의도는 당시 자연과학의 성과를 기초로 해서 역학운동(力學運動)·열(熱)·빛·전기·화학적 제 과정·생명 등을 물질의 제 형태로 파악하고, 이 제 형태의 통일과 상호이행(相互移行)을 해명하고 상급운동형태를 하급형태로 환원하는 기계론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자연사 과정(自然史過程)의 변증법적 파악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사회로의 기원 문제로서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데 있어서의 노동의 역할'을 특별히 취급하고, 진화이론을 평가하면서 진화이론에서의 노동이 지닌 의의의 인식 결여를 지적하고, 기술이 인간을 멸망시킨다는 체제문제 부재(體制問題不在)의 속론(俗論)을 이미 비판하였다.

공상에서 과학으로[편집]

空想-科學- (1882)

엥겔스가 <반뒤링론>의 일부에 가필(加筆)하여 독립된 저작으로 정리한 것으로 마르크스 주의 사상을 간결하게 기술한 것.

제1장-엥겔스 당시의 사회주의는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의 원칙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은 봉건제도의 타도에 의해 영원한 진리·정의·평등이 지배하는 '이성의 나라'의 실현을 기대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빈부의 차가 더욱 증대했다. 게다가 노동자 계급은 미성숙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갭으로부터 생 시몽·푸리에·오언 등의 사회주의 사상이 빈부의 차를 도덕 감정에만 입각하여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실재적 기반 위에 놓지 못했으므로 '공상적(空想的)'이었다.

제2장-변증법적인 견해와 비변증법적·형이상학적 견해는 역사적으로 어떤 관련을 갖고 발전해 왔는가 하는 유물사관 성립의 유래를 설명한다.

제3장-자본주의 사회에 입각하여 유물사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자본가·노동자의 계급적 모순을 낳게 한 경제적 조건들 자체에서 모순 해결의 수단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은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서만 모든 계급 대립이 소멸하고 국가도 소멸하고 인류는 참된 자연의 지배자가 되며, 필연(必然)의 나라에서 자유의 나라로 비약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편집]

家族·私有財産-國家-起源 (1884)

유물사관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 변혁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인류사 전체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이 인류사는 원시사회를 제외하면 계급투쟁의 역사로 일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원시(야만·미개)로부터 계급사회(문명)로의 이행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만년에 루이스 헨리 모건의 <고대사회>에 계발되어 이 책을 상세히 발췌하였으나 저술에 이르지 못하고, 그의 뜻은 별도로 원시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던 엥겔스가 계승하였다.

곧 엥겔스는 우선 이 책의 부제에도 있듯이 '모건의 연구와 관련하여' 선사사회(先史社會)를 채취(採取)·수렵에 의해 생활한 '야만'과 목축·농업이 시작된 '미개'로 나누고, 이러한 사회에서의 여러가지 가족·혼인형태의 전개, 부족으로부터 부족으로의 이행, 사유의 발생에 따르는 모권적 씨족제(母權的氏族制)의 해체에 대해 말하고(1-2장), 현존하는 미개인을 예로 하여 국가 성립 이전의 씨족제 상태를 유추하고(3장), 다음에 자신의 연구성과도 첨가하여 그리스·로마에서의 씨족제와 해체, 국가의 발생을 해명하고(4-6장), 끝으로 엥겔스의 독자적 연구를 기초로 독일인 내지 게르만인에 있어서의 국가 형성과정을 설명하고, 국가가 결코 밖으로부터 주어진 권력이거나 헤겔적인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원시공동체 속에 발생한 분업이 생산·소유의 공동성을 파괴하여 인류사 최초의 계급 대립을 발생시키게 되었을 때, 이 대립을 한 계급의 이익(=질서)의 틀 안에 묶어두기 위한 권력이었다고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후의 계급 대립은 노동자 계급에 의해 극복되고, 국가는 사멸해서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주장한다.

반뒤링론[편집]

反D

hring論 (1878)

정확하게는 <오이겐 뒤링씨의 과학의 변혁>. 엥겔스의 주저 가운데 하나.

1875년에 독일 최초의 사회주의적 노동자 운동의 통일조직('독일 사회주의 노동당', 후의 사회민주당)이 성립했으나 마르크스 주의에 반대한 베를린 대학 사강사(私講師) 뒤링 등의 영향이 컸고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엥겔스는 뒤링에 대한 반론을 쓸 것을 결심했다.

뒤링은 맹인(盲人)으로 박학자·진보파로 명성이 높았으며, 광범한 사상(事象)을 포함한 독자적 철학체계에 근거를 두고 과학의 변혁을 제창하면서 독특한 사회주의 이론을 수립하였으므로 이 책은 뒤링의 체계에 입각하여 비판을 전개하고 그의 사회주의를 반박하면서 마르크스·엥겔스의 과학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방법과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설에 이어 3편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1편:철학―마르크스 철학의 변증법의 기본적 법칙들을 설명한다.

제2편:경제학―마르크스 경제학의 개념들을 해명하여 뒤링의 정치 편중을 비판한다.

제3편:사회주의―종래의 여러가지 사회주의를 검토하면서 유물사관을 설명하고, 자본주의 사회 자체내에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필연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과 인간생활을 설명한다.

<공상에서 과학으로>는 이 책의 일부분을 편집한 것이다.

포이어바흐론[편집]

Feuerbach論 (1888)

엥겔스가 1886년에 신시대(新時代)(노이에 자이트)지에 발표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결말>의 약칭으로 수정을 가해 출판되었다.

마르크스 주의가 유럽 이외에도 전파된 엥겔스의 만년에 자기의 세계관을 19세기 독일 철학의 원천에 입각하여 해명·개설한 것이다.

제1장―헤겔 철학이 체계로서는 광대한 관념론이지만, 방법으로서는 변증법적이며, 인간의 사고·행위의 모든 산물의 영원성을 종결시키는 혁명적인 철학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헤겔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제2장―모든 철학, 특히 근세철학에서는 정신과 자연, 마음과 존재의 어느 쪽을 근원적·제1차적으로 보는가 하는 근본문제가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갈라진다고 하여 존재론과 인식론을 혼동하고 있으며, 유물론으로서는 17-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들고 있다.

제3장―포이어바흐의 종교론·도덕론을 인용하면서 그의 유물론을 상세히 설명하고 인간적 사상(事象)을 사회적 연관에서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제4장―포이어바흐처럼 헤겔의 변증법을 폐기하지 않고, 이를 유물론의 토대 위에 재건한 것이 마르크스 주의의 유물론이다.

세포·에너지 전화(轉化)·진화론 등의 발견으로 명확하게 된 자연과정의 연관·발전은 마르크스 주의의 유물론에 의해서만 파악되며, 사회도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을 열쇠로 하여 발전과정으로서 파악되므로 세계의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 문제가 된다.

뒤링[편집]

Karl Eugen D

hring (1833-1921)

베를린 태생의 독일 사상가.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을 배운 다음 사법실무 수습중에 실명. 1864년에 베를린 대학의 철학·경제학의 사강사(私講師)가 되고 눈먼 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과거의 거의 모든 철학·그리스도교에 반대하여 일종의 유물론 '현실철학'을 제창하고 과학·인류의 변혁자로 자처하였으며, 또한 반(反)유대 주의자였다. 1870년경부터 사회주의를 표방, 파리 코뮌을 찬미하는 진보파였으나 마르크스 주의에 반대했다. 1877년에 사강사 직에서 쫓겨나자 대학 내외에서 강력한 뒤링 지지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저서로는 <자연변증법>(1865), <생활의 가치>(1865), <국민경제학의 비판적 기초>(1866), <비판적 철학사>(1869), <국민경제학 및 사회주의의 비판적 역사>(1871), <국민의 사회경제학 교정(敎程)>(1872), <철학교정(敎程)>(1875) 등이 있다.

레닌[편집]

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가이며 마르크스 주의 이론가.

볼가강 중류의 심비르스크(현재의 울리야노프스크)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가 본명이며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펜네임이었으나 후에는 이것이 본명처럼 되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지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또 농노해방 이후에도 여전한 농촌의 참상을 목격하고, 19세기 러시아의 진보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생애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은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형 알렉산드르가 19세에 처형된 사건이었다(1887).

이를 계기로 레닌은 혁명가로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형의 뒤를 좇아 개인적 테러리즘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주의를 택했다.

레닌의 사상과 행동에는 두 개의 조류가 합류·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곧 19세기 러시아의 국민적 필요에 대응하여 세워진 민족주의적인 혁명운동의 전통과 마르크스 주의의 융합인 것이다. 혹은 러시아에서 국민적인 전통이 된 혁명적 영웅주의의 정신(국가권력 타도의 사상)이 마르크스 주의라는 외래사상을 매개로 하여 러시아적인 변형을 거쳐 러시아의 땅에 현실화한 것이 마르크스·레닌 주의인 것이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발달[편집]

Russia-資本主義-發達

레닌은 나로드니키 주의와 합법 마르크스 주의와의 2면적인 투쟁과 지양을 통해 전체성(全體性) 논리로서의 유물사관을 주장한다. 그는 유물론적 견해를 옹호하여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달 검증이라는 구체적인 분석 작업과 결부시켰던 것이다. 카잔 대학 법과 재학중 혁명운동에 가담, 1895년 12월에 체포되어 14개월간 옥중생활을 한 후, 유형지 슈센스코에에서 완성한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달>(1897)은 마르크스의 재생산론(再生産論)을 현실의 자본주의 분석에 적용한 것이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편집]

唯物論-經驗批判論 (1909)

레닌의 저서.

혁명에 대한 탄압은 극렬하여 볼셰비키 대열내에서조차 많은 동요가 야기되고 이러한 동요의 철학적 표현으로 유물론에 대해 마흐 주의를 옹호하려는 경향, 사회주의와 종교를 절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때에 레닌이 철학적 유물론의 옹호를 위해 철학 문제를 다룬 것이 1909년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다.

이 책은 여러 종류의 절충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유물론적 견해를 지킨다는 의미는 갖고 있었으나, 현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엄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 섰다고 할 수 없는 면도 있으며, 특히 속류반영론(俗流反映論)에 빠진 설명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진리론의 오류도 지적되고 있다.

레닌의 철학 저서로서는 이 책과 또 하나, 사후에 공표된 <철학 노트>가 유명하지만, 레닌의 변증법은 전문적인 철학적 저술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저술에 더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편집]

資本主義-最高段階-帝國主義

1914년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레닌은 소위 제국주의 체제의 이론적 분석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분석에 의해 레닌은 선진 자본주의국에 있어서의 생산의 집적·집중이 진척되어 독점이 형성된다는 것, 은행 자본과 결부된 독점 자본은 국내에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 지배를 확립한다는 것, 이 단계까지 발전한 경제는 방대한 자본 과잉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자본 과잉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의 수출을 주축으로 하는 타국의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세계는 몇 개의 국제적 독점자본주의 강국에 의해 완전히 분할되었다. 곧 레닌은 "분할이 종료하고, 독점이 세계체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자본주의의 이러한 단계를 제국주의 단계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국가와 혁명[편집]

國家-革命

1917년 4월 레닌은 귀국하여 혁명의 방향을 명확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립하는 테제를 제기했다(4월 테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쟁취 싸움이 가까워졌다고 보고 <국가와 혁명>을 집필하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국가의 관계를 논하고, 더 나아가 장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 그 사멸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레닌은 이 책에서, 특히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국가학설을 옹호했다.

스탈린[편집]

Iosif Vissarionnovich Stalin (1879-1953)

러시아의 혁명가·정치가·독재자.

카프카스 그루지아의 고리에서 양화점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교내의 소동으로 퇴학 처분을 받고 그 후 혁명운동에 전념.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분열 이후 일관하여 볼셰비키(레닌파)의 입장에 있었으나, 레닌이 사망 직전에 쓴 유서에서 스탈린을 비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본명은 주가시브리라고 하며, 스탈린이라는 필명을 썼는데, 후에 이것이 본명처럼 되고 말았다.

현대의 스탈린 평가는 마르크스 주의자간에도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위대한 혁명가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찬탈자라고 말한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1956)에서 스탈린 비판이 있은 이후 과학적 토론에 의한 평가의 기준이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편집]

Lenin主義-基礎- 스탈린의 주저 가운데 하나로 1924년, 스베르드로프 대학에서 한 강의로써 만들었다. 이 책은 레닌의 혁명이론을 스탈린의 문제의식에 맞추어 상당히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에 의해 재구성된 레닌의 학설이 '레닌 주의'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내의 논쟁은 정통파 레닌 주의자와 트로츠키즘의 투쟁이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스탈린의 후기 저작으로서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史的) 유물론>(1938), <소련연방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 문제>(1952)가 유명하지만 어느 것이나 현재 마르크스 주의자간에서조차 비판·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국사회주의론[편집]

一國社會主義論

그러나 스탈린 이론의 특징은 일국사회주의론에 있다.

일국사회주의론은 처음에는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라, 서구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패 이후 러시아의 자원(資源)에 의거하여 러시아 한 나라에서만이라도 건설을 촉진시키려는 스탈린의 야심으로, 그것이 후에 트로츠키 지노비에프(1883-1936) 등과의 논전을 통해 체계화되는 것이다. 이 분야의 저작으로서는 <11월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의 전술>(1924), <레닌 주의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하여>(1926) 등이 있다.

트로츠키[편집]

Leon Trotskii (1877-1940)

러시아의 혁명가·마르크스 주의 이론가. 스탈린보다 약 2년여 일찍 헤르손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브론슈테인. 일찍부터 노동운동에 가담하여 이르쿠츠크에 유형되었으나 2년 후에 도주, 그때부터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레닌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 레닌과 대립, 독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05년에는 센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발발 후에 다시 귀국하였고 11월혁명 때에는 볼셰비키로서 공적을 세워 외무인민위원장, 육군인민위원장 등의 요직에 앉았다. 그러나 초기의 비(非)볼셰비키적 입장 때문에 레닌의 사후에는 고참 볼셰비키와 잘 융합되지 않아, 곧 스탈린과 격렬한 정쟁을 벌이게 되었다. 1927년 제15회 대회에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1883-1936) 등과 함께 당에서 제명되고 1929년에는 터키로 망명하였다.

이 해에 스탈린은 국가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외쳐 대지만, 추방된 트로츠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 혁명사>와 <나의 생애>를 집필했다. 특히 전자는 스탈린식으로 타락한 소비에트에 대한 만가(挽歌)라고 할 수 있으며 11월혁명의 정신적 유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추방된 다음에도 정력적으로 반(反)스탈린 투쟁을 벌이다가 멕시코에서 암살되어 비극적인 생애의 막을 내린다.

레닌 사후의 제3 인터내셔널[편집]

Lenin 死後-第三 Inter­national

트로츠키즘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트로츠키의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1905년 혁명의 총괄 <결과와 전망>에서 그 원형이 제시되고 스탈린과의 논쟁을 통해 체계화되었다.

스탈린과 논전중에 주장된 견해를 가장 체계적으로 논술한 것이 <레닌 사후의 제3 인터내셔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28년의 코민테른 제6회 대회에 스탈린=부하린 간부파(幹部派)에 의해 제출된 테제 '코민테른 세계강령'에 대한 비판으로 집필되었으나 후에 아메리카 공산당의 제임스 캐논(후의 트로츠키스트)에 의해 공표되었다.

이 저서는 제1장의 제목이 '국제혁명의 강령인가, 일국사회주의의 강령인가?'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소련 사회주의의 미래를 다만 국제혁명과의 관련에서만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루카치[편집]

Gyorgy

Lukacs (1885-1971)

헝가리 문예사상 현대를 대표하는 마르크스 주의 사상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은행 중역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배우고 지멜과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았다. 자유극장(自由劇場) 운동에 참가하여 1909년에 <현대 드라마 발전사>를 저술했으나, 제1차 대전 무렵부터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에 접근하는 동시에 헝가리의 생디칼리스트인 에르빈 사보의 영향을 받았다.

1918년의 독일혁명 직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하고, 1919년의 헝가리 혁명에 참가하여 혁명정부의 문교부장관이 되었다. 혁명이 실패하자 빈으로 망명하여, <역사와 계급의식>(1923), <레닌>(1924)을 써서 혁명이 좌절한 이유와 마르크스 주의의 주체성(主體性) 문제를 추구했다.

1929년 모스크바에 가서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원이 되고, 한때 반(反)파시즘 투쟁을 위해 유럽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전쟁중 대부분을 모스크바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발자크론>을 비롯하여 많은 근대문학·사상사에 관한 논문을 집필. 1945년 헝가리 독립과 함께 부다페스트 대학에 돌아갔다. 1956년의 헝가리 의거(義擧)에서 나치 정권에 가담, 한때 루마니아로 망명했으나 얼마 후 귀국하여 출생지인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역사와 계급의식[편집]

歷史-階級意識 (1923)

루카치의 초기 대표작.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성공했으나 다음해의 독일혁명과 1919년의 헝가리 혁명은 실패했다. 이 헝가리 혁명에 참가했던 루카치는 망명지인 빈에서 이 혁명이 좌절한 원인을 구명하고 유럽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하여, <계급의식>을 비롯한 7편의 논문을 써서 한 권으로 묶은 것이 이 책이다.

그 당시 마르크스 주의의 주류는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을 오직 객관적인 사회의 존재 양식으로부터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역사의 변혁에 있어서 의식이 수행하는 적극적 역할을 중요시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만이 역사의 방향을 바르게 파악한다고 하는 이유를 밝히고, 부르주아 계급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비판했다. 또 헤겔과 마르크스를 결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인간은 물화(物化)된다는 것을 말하고, 그 극복의 길을 추구했다. 마르크스 주의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론과 인간 소외의 사상에 관한 선구적 업적이다.

실존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편집]

實存主義-Marx主義- (1951) 루카치의 후기 대표작으로 1948년에 프랑스어 번역판이 나왔으나 독일어판이 정본이다. 1945년 헝가리 해방과 함께 부다페스트 대학에 귀임한 루카치는 다음해에 제네바의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마르크스 주의의 입장에서 야스퍼스나 메를로퐁티 등 실존주의자와 토론을 벌였다. 이 책은 이 논전을 기초로 하여 실존주의 비판과 마르크스 주의의 현대적 과제를 제시한 5편의 독립된 논문으로 구성되었다. 루카치는 현대의 실존주의를 우선 그 사상사적 계보에서 파악하여, 니체로부터 후설을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는 니힐리즘을 계승한, 제국주의 단계의 비합리주의적 조류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합리주의에 합리주의를 대결시키고 이 합리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고 하는 견해는 <젊은 헤겔>이나 <이성의 파괴> 등 후기의 루카치 사상사 연구에 일관되는 입장이다. 특히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인식론에서는 사이비 객관성에 빠지고, 자유나 도덕에 있어서는 개인주의적인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해명한다. 동시에 현대 마르크스주의를 레닌적 단계라고 규정하고, 실존주의(제3의 길)와 대결시켜, 변증법적 유물론의 객관주의적 성격과 반(反)파시즘적 성격을 역설한다.

디츠겐[편집]

Joseph Dietzgen (1828-1888)

19세기 독일의 유물론자·사회주의자.

노동자 출신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쾰른의 블랑켄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유피공으로 일하며 독학으로 경제학, 철학을 배웠다.

철학의 성과[편집]

哲學-成果 (1887)

이 책은 이미 1869년에 간행된 <인간의 두뇌활동의 본질>에서 행한 인식의 일반적 능력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그 후의 연구성과를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의도는 전 사회적 발달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과 사물의 상호관계 이론인 인식론이 철학의 적극적 성과임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인식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가 인식의 이론은 논리학이 확대된 것이라고 하여 인식론과 논리학의 동일성 사상에 접근한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