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현대의 사상/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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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편집]

후설에 의해서 창시된 현상학은 신칸트 학파와 같이 대상을 의식 또는 사유에 의해서 구성하는 논리적 구성주의에 서지 않고, 객관의 본질을 진실로 포착하려는 데에 철학의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서는 볼차노의 논리학과 브렌타노의 심리학을 들 수가 있다. 볼차노는, 명제가 나타내는 의미는 그 진·위에 상관없이 주관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생각하였다. 브렌타노는 이와 같은 객관적인 진리의 심리학적 포착을 중심문제로 삼는다. 그는 의식이란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점에 조심하여 의식현상의 본질은 대상을 '지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브렌타노의 제자 마이농(Alexius Meinong, 1853-1920)은 이와 같은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관점에 의거해서 대상의 본질구조를 밝히려 하였다. 그의 대상론은 보통 표상되는 현실적인 대상만이 아니고, 다만 사유될 수 있을 뿐인 비현실적인 것도 충분한 대상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위와 같은 두 면을 이어받아, 한편에서는 객관적 진리를 어디까지나 엄밀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동시에, 이것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 하는 '기술학'이다. 그는 '사상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것을 모토로 한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엄밀학, 보편학이어야 한다고 한다. 이제까지의 철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이 불충분하였고, 또 참으로 객관적인 존재로 향하지 않고 다만 주관적인 세계관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철학의 무정부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은 이러한 점을 고쳐야만 수학과 같은 보편학으로 되어 '철학의 기초학',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이 된다고 한다. 거기서 후설은 그의 철학의 방법으로서 '현상학적 환원(Phanomenologische Reduktion)'이라는 것을 제창하였다. 이것에는 두 단계가 구별된다. 첫째의 '형상적' 또는 '본질적 환원(eid­etische R.)'은 주어진 사물, 의식의 내용에 관해서 '자유변경'을 가함으로써 가변적 요소를 제거하여, 거기에 발견되는 '불변요소'를 '본질직관'에 의해서 포착하는 방법이다. 이에 의해서 '본질학(또는 형상학)'으로서의 순수현상학이 가능케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개별물에 즉응해서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환원은 어떠한 본질학에도 필요한 방법으로 반드시 현상학에 특유한 것은 아니다. 현상학에 특유한 둘째의 현상학적 환원, 협의의 현상학적 환원은 또 '선험적 환원(tranozendentale R.)'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상식이나 과학이 우리들의 밖에 초월하여 있다고 이해하는 존재를 순수의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비로소 현상학 본래의 영역이 얻어진다. 그러나 환원에는 또 두 가지가 구별된다. 그 하나는 '자아론적 환원(egologische R.)'이고, 다른 하나는 '간주관적 환원(intersubjektive R.)'이다. '자아론적 환원'이란 초월적 존재를 개개의 자아의 순수의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의식이란 '무엇에 관한 의식(Bewuptsein von etwas)'인데 이와 같은 의식구조를 후설은 '지향성(Intentionalit t)'이라 부른다. 요컨대 상식·과학의 내용을 '지향성'이라는 구조를 가지는 순수의식으로 환원하여 거기에 사물의 순수한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 현상학의 주제이다. 바꿔말하면 모든 의식양태의 근저에 순수의식을 구하여, 일체를 거기에 영사하여 보는 셈이다. 즉 모든 의식 내용에 관해서, 긍정·부정의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류하고, 그것을 일단 괄호 안에 넣는다. 이리하여 최후에 아무리 해도 괄호 안에 넣어버릴 수 없는 '현상학적 잔여'로서의 순수의식에 도달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길을 답습하는 것이다. 거기서 이 순수의식은 칸트의 선험적 주관처럼 초개인적인 논리적 의식이 아니고, 완전한 개인적 의식이다. 그러나 후설은 위의 '자아론적 환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하여 이것에 다수의 자아 또는 주관에 의한 공동적 환원인 '간주관적 환원'을 첨가한다. 그것에 의해서 비로소 세계 전체가 의식내용으로 되는 것이고, 또 거기에 비로소 일체의 존재적 본질의 엄밀한 포착이 성취되는 것이다. '자아론적 환원'이 데카르트에 위치를 잡는 데 대해서, '간주관적 환원'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 있어서의 '예정조화'라는 관념에 위치를 잡고 있다. 후설의 제자들 중에서 한편에서는 스승의 견지를 '선험적 환원'의 방향에서 취하여, 더구나 이 순수의식을 포착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추진하여, 인간존재 자체의 의미를 추구하는 하이데거가 나타나서 실존철학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본질적 환원'의 방법을 사회·문화·종교의 영역에 사용한 셸러나 하르트만 등이 나타났다. <金 淙 鎬>

현상학의 선구자[편집]

볼차노[편집]

Bernhard Bolzano (1781-1848)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수학자.

프라하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796년 이래 철학·수학을 배우고, 가톨릭 신학을 연구, 1805년 사제(司祭)에 서품되었다. 이후 프라하 대학의 종교학 교수가 되었으나 이단이라 하여 1819년 면직을 당했고, 저서의 출판도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는 익명(匿名)으로 나가고 외국 출판물이 많다.

주저는 4권의 <지식학(知識學)>(1837)으로 '명제 자체(命題自體)' '표상(表象) 자체' '진리 자체'라는 세 개의 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명제 자체는 사고나 판단의 내용이지만 결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의미이다. 표상 자체는 그 요소이며, 진리 자체는 객관적인 진리로 명제 자체의 일종이다. 이 논리주의는 후설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수학에서 무한(無限)의 역설(逆說)을 생각했다.

브렌타노 학파[편집]

Brentano 學派

좁은 의미에서는 브렌타노의 제자로 프라하 대학 교수가 되고 기술적(記述的)인 심리학을 철학의 기초로 하며, 특히 언어철학으로 유명한 안톤 마르티(1847-1914), 마르티의 제자로 그 후계자가 되고 브렌타노의 이론을 가치론·법철학·경제철학에 응용하려고 한 오스카르 크라우스(1872-1942) 등 두 사람이 브렌타노 학파이다.

넓게 해석하면 후설, 슈툼프(1848-1936), 마이농(1853-1920) 등이 포함된다.

슈툼프도, 마이농도 브렌타노의 의식의 지향성에서 출발하면서도 심적인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 현상과 대상으로 시야를 넓혔다. 슈툼프는 감각현상과 그 기억상(記憶像)만을 '현상학'의 대상으로 하고, 이를 근거로 마음이 형성하는 것을 '형상학(形相學)'의 대상으로 하였다. 마이농은 이론적인 대상, 존립해 있는 대상적인 것, 상찬(賞讚)의 대상, 욕구의 대상 등을 포괄하는 '대상론(對象論)'을 구상했다.

브렌타노[편집]

(프란츠) Franz Brentano (1838-1917)

시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여류작가 베티스 폰 아르님의 조카인 독일의철학자·심리학자.

경제학자 루요 브렌타노(1844-1931)와 형제간이다. 1856년부터 뮌헨·뷔르츠부르크·베를린·뮌스터에서 배웠다. 1862년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의 다양한 의의에 대하여>로 튀빙겐 대학 졸업, 그라츠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신학을 연구한 후, 1864년 사제에 서품되었다. 1866년 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교수 자격을 얻고, 1872년에 조교수가 되었으나 신앙 문제로 다음해에 사직,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뷔르츠부르크 대학 취임에 즈음하여 철학은 엄밀한 학이며 그 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으며, 이에 감격하여 문하에 들어온 슈툼프흐와 마르티도 스승을 따라서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1874년 빈 대학 교수가 되고 1880년 결혼하여 사직했으며, 1895년까지 사강사(私講師) 생활을 하고, 1896년 이후는 플로렌스·취리히에서 살았다.

브렌타노는 심리학에 의해 철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으며, 발생적(發生的)인 심리학과 기술적(記述的)인 심리학을 구별하고 후자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마음의 여러 현상을 '기술'하는 '현상적 심리학'이며 내적(內的)인 지각에 의해 나타나는 것을 기술한다. 내적인 지각은 명증적(明證的)이며 직접적인 확실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심적(心的)인 것의 자기인식을 지향하고 있다. 물적인 현상, 외적인 지각의 대상은 우리의 내적인 지각에 의해 지향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오히려 내적인 지각의 여러 현상만이 참되며, 그것만이 명증적이다. 심적인 여러 현상의 본질은 그것이 객관을 향하는 것, 지향적(志向的)인 관계를 갖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식이든 대상의식(對象意識)이다. "심적인 현상은 어느 것이나 어떤 것을 객관으로 포함하고 있다." 1892년의 강연 <천재> <시적(詩的) 서술 대상으로서의 악(惡)>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도덕적 인식의 원천[편집]

道德的認識-源泉 (1889)

브렌타노가 1889년 1월에 빈의 법률학 회의에서 <정의와 도덕에 대한 자연적인 시인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을 토대로 주를 가하고 게재하여 공간(公刊)한 것.

<철학문고>판의 제2판(1921)에서는 편자 크라우스가 윤리학 관계 논문들을 첨가하였다. 브렌타노가 생전에 출판한 유일한 윤리학 관계 저술이다. 예링(1818-1892)이 <정의의 감정의 발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법이나 정의와 악은 사회적인 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윤리적인 명제는 보편성을 갖고 도덕적인 명증성(明證性)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판단은 승인하는 것, 거절하는 것이며 논리적인 명증성에 입각하여 옳다,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정서, 곧 애증(愛憎)에 있어서도 옳다, 옳지 않다고 명증적으로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승인이 옳을 때 참이라고 한다.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 옳을 때 선이라고 한다. 올바른 사랑으로 사랑받는 것이 선이다.

후설[편집]

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의 철학자·현대현상학의 창시자.

구(舊)오스트리아의 메렌주(州)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수학을 전공하여 바이에르슈트라스(1815-1897) 및 크로네커(1823-1891)에게 배웠다. 라이프치히와 베를린 이외에도 빈에서 1876-81년까지 배우고 바이에르슈트라스의 조수생활을 한 후 1884년부터 2년 동안 다시 빈 대학에서 연구했는데, 이때 후에 대통령이 된 친구 마사리크(1886-1948)의 권유로 브렌타노의 강의를 듣고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할렌 대학에서 브렌타노의 제자인 슈툼프흐 밑에서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하고 1887년 사강사가 되었으며, 1891년 <산술의 철학>을 출판, 브렌타노에게 헌정하였다. 수학의 기본적인 개념을 심리적인 작용으로부터 이끌어 내려는 입장이었다.

후설은 이 심리주의에서는 수학의 대상인 의미적인 것은 파악되지 않음을 알고 <논리적 제 연구>(1900-1901)에서 '순수논리학'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 첫째 권을 슈툼프흐에게 헌정하였다.

1901년 조교수가 되고, 1906년에 괴팅겐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1년에 잡지 <로고스>에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기고하여 당시의 실증주의나 자연주의 철학과, 세계관학(世界觀學)이나 역사주의 철학을 현상학, 곧 본질을 직관하고 사상(事象)으로부터 이론을 쌓아가려고 하는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으로 비판하였다.

괴팅겐 대학 시대에는 후설의 주위에 많은 학생과 학자가 모였으며, 현상학의 기관지도 발행되어 현상학파가 성립되었다. 191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가 되어 하이데거가 현상학의 방법을 후설로부터 직접 배우게 되었다. 1928년 퇴직했고, 유대계였기 때문에 나치 정권하에서 고독한 가운데 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생전의 주저는 1913년의 <순수한 현상학과 현상적인 철학에의 고찰> 제1권이다. 사후에 부인에 의해 루반의 <후설 문고>에 방대한 유고가 수집되어 1950년 이래 <후설 전집>이 간행되었으며, 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현상학논집>이라는 이름으로 연구서가 발행되었다.

후설의 현상학은 초기의 <논리적 제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본질기술적(本質記述的)인 현상학, 거의 1907년 이래의 선험적(先驗的)인 현상학, 다시 만년의 자아론적(自我論的)인 현상학으로 거의 15년씩 3기로 나누어 생각될 수 있으나, 체험의 본질을 직관으로 파악하고 반성으로 사상 자체에 도달하려는 방법에 의해 다시 부흥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순수한 현상학과 현상학적인 철학에의 고찰[편집]

純粹-現象學-現象學的 哲學-考察 (1913)

후설의 <논리적 제 연구>에서는 '순수논리학'이 주제가 되었다. 그것은 '의의의 범주', 곧 개념·명제·추론 등의 논리학과 '대상적인 범주'의 논리학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논거로서 명제논리학(命題論理學)과 형식적 존재론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객관의 객관성, 여기서는 논리적인 형성물의 객관성 분석이다. 제2권 끝의 두 가지 연구에서 이러한 논리적인 형성물이 거기서 발생하는 주관적인 원천이 문제되고 의식과 그 지향성의 구조가 분석된다. <논리적 제 연구>는 이와 같이 논리적 형성물이라는 지향되는 대상으로부터 지향성 그 자체를 묻고, 의식의 주관성에 있어서 명증적으로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야말로 참이라고 한다. 이 후설의 현상학을 생전에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 <순수한 현상학과 현상학적인 철학에의 고찰>이며, 제1권 <순수한 현상학에의 일반적인 도입>만이 1913년에 현상학의 기관지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연보(年報)> 제1권에 게재되었다. 계속된 제2, 제3권은 생전에 출판되지 않고 1952년의 <후설 전집>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이 제1권에서 순수현상학은 선험적 현상학이라고 불리며, 사실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본질의 학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현상은 사실적이며 경험적인 의식이 아니라, 그 본질인 선험적이며 순수한 의식인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여러가지 사물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의미있는 형성물과 교섭하고 있으나 그때의 자연적인 관점을 배제하여 괄호 안에 묶어둠으로써 '순수의식'내지 '선험적 의식'을 획득한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환원(還元)이다.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로 획득된 선험적인 의식을 직관에 의해 나타내고 기술하는 것이 선험적 현상학의 임무이다. 이에 따라 참된 주관성(主觀性)에 근거를 둔 철학이 성립한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편집]

嚴密-學問-哲學 (1911)후설은 괴팅겐 대학 시절, 그 주위에 학도를 모아 현상학을 체계적으로 다시 고찰하고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1907년의 강의 이래 보편적인 의식분석론(意識分析論)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주저인 <순수한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에의 고찰>의 선험적 현상학으로 결실되는데, 그때까지 그 구상의 계획을 말한 것이 잡지 <로고스> 제1권에 게재된 이 논문이다.

이것은 후설 자신이 엄밀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현상학의 입장을 말한 것인 동시에 이 입장에서 당시 실증주의의 '자연주의'적인 철학, 세계관론(世界觀論)의 '역사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 비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후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피히테 등에게도 '엄밀한 학'의 징조는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철학, 특히 헤겔과 함께 이성비판의 힘이 약해져서 본질을 인식해야 할 의식은 사실적이며 우연적인 것만을 문제로 삼고, 의식은 또한 역사적·상대적인 것에 말려들었다. '자연주의' 철학, 곧 실증주의는 의식을 예컨대 감각의 복합체(複合體)로 보아 의식 자체를 자연화시킨다. '역사주의' 철학, 곧 세계관의 유형론(類型論)을 철학이라고 하는 생각은 철학을 역사적이며 상대적인 범위에만 통용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자연주의 철학이나 역사주의 철학도 모두 우연적이며 개별적인 사실의 영역에서만 움직이고 불완전한 귀납에 의한 일반화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현상이다.

요컨대 철학은 아직은 결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학문으로 시작된 적이 없었다. 기존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 사상 자체, 문제 자체를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선입관을 배제하고, 무엇보다도 순수한 철학적인 직관에 호소하여 현상학적으로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상학이야말로 엄밀한 학문이다.

데카르트적 성찰[편집]

Descartes的 省察 (1931)

후설이 프라이부르크 대학을 퇴직한 다음해,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의 강연에 가필하여 출판한 것.

생전에는 프랑스어 번역판만 나왔고 원문과 준비 초안은 1950년 <후설 전집> 제1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것은 역시 1954년에 <후설 전집> 제6권으로 전부가 출판된 <유럽 여러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836) 등과 함께 후설의 만년 사상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데카르트적 성찰>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후설은 데카르트의 자아와 의식의 분석을 철저히 하면 스스로 선험적 현상학에 도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저 <순수한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에의 고찰>에서 생각한 선험적인 의식의 중핵이 되는 선험적인 자아, 순수한 자아는 데카르트의 자아를 철저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사유하여 가는 자아의 직관적인 파악이지만, 선험적인 의식은 순수하고 선험적인 자아로부터 방사(放射)되는 직관과 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데카르트적 성찰의 특징은 선험적인 자아라는 주관성(主觀性)으로부터 다른 자아의 구성으로 나아간 점에 있다. 감정이입(感情移入)이 타아(他我)에 대하여 생각되고 있으나, 그 유추(類推)의 기초는 역시 자아이다. 감정이입을 할 때 타아는 직접적으로 지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지시되고 있다. 전혀 원초적(原初的)으로 체험되는 자아 속에 타아가 반영된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자아를 라이프니츠적인 모나드의 공동체로 파악하여 간주관적(間主觀的)인 주관성이야말로 주관성의 본질이라고 해야 한다.

이리하여 선험적인 주관성은 간주관성으로 확대되고 간주관적인 연대성으로 확장된다. 상식과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하는 세계는 이러한 선험적인 간주관성에 의해 근거가 세워져야 한다.

셸러[편집]

(막스) Max Scheller (1874-1928)

현상학의 영향을 받은 독일 철학자.

윤리학·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철학적 인간학으로도 유명하다. 뮌헨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었다. 처음에는 의학을 배우고 예나 대학에서 오이켄과 리프만에게 철학을 배웠다. 1900년 <선험적 방법과 심리학적 방법>으로 교수 자격을 얻었으며, 다음해 칸트 협회에서 후설을 알고, 1907년 뮌헨에서 다시 교수 자격을 얻어 거기서 테오도르 립스나 가이거(1829-1870), 팬더(1870-1941), 라이나하(1883-1917) 등 현상학자와 사귀었다.

1910년 뮌헨의 사강사를 그만두고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재야 학자로서 연구. 1913년과 1916년 현상학의 기관지에 주저 <윤리학에 있어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인 가치윤리학>을 발표하고 정의적(情意的)인 것에도 아프리오리한 가치가 있다 하여 윤리학에 새로운 면을 개척하였다. 1913년 <공감과 사랑과 증오의 현상학과 이론>(제2판 이후는 <공감의 본질과 여러 형태>)에서는 공감을 근거로 하여 타아인식(他我認識)을 말했다. 1917-18년에는 제네바와 헤이그에서 활동하고 1919년에 쾰른 대학 교수가 되었다.

쾰른 시대에는 가치의 철학을 종교철학으로 확대하고 종교의 본질현상학을 구상하였다.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1921년에 출판되었다. 또 사회학에도 시야를 돌려 <지식형태와 사회>를 1926년에 출판하고 지식사회학 분야를 개척했다.

1928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의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죽은 다음해의 <철학적 세계관>과 함께 철학적 인간학을 주장하는 것이며,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셸러의 전집은 1954년 이래 스위스에서 간행중이며 다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인 가치윤리학[편집]

倫理學-形式主義-實質的-價値倫理學 (1913-1916)

이 책은 현상학적 입장에 입각한 윤리학서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실질적인 가치를 근거로 하는 윤리학을 건설하려고 한다.

칸트는 최고선(最高善)으로부터 출발하거나 의지의 궁극 목표로부터 출발하는 윤리학을 거부하였다. 또한 칸트는 경험으로부터의 귀납에 근거를 둔 윤리학도 거부한다. 칸트의 견해는 아프리오리한 것을 형식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의 2원론에서는 행위와 체험의 중핵인 전 인격(全人格)은 완전히 파악하지 않는다. 아프리오리하고 실질적인 윤리학이 가능해지려면 근본적으로 정의적(情意的)인 인격에 의거해야 한다. 윤리학, 곧 가치의 현상학은 정의적인 생의 현상학이다. 그것은 논리학으로부터 독립한 영역이다.

우리들의 정신적인 생의 전체는 이에 고유한 순수 활동을 갖는다. 정의적인 것도 이에 고유한 근원적이며 아프리오리한 내용을 갖는다. 파스칼이 말하는 바와 같은 심정의 질서, 심정의 논리는 아프리오리하게 존재한다. 정의적인 것의 활동이나 내용에 대해 그 본질을 명증적(明證的)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치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정의적인 것도, 지성적인 것도 포함하는 전 인격이다. 가치에는 위계(位階)가 있다. 고차적인 가치는 '선발하는 것'에 의해 파악된다. 그것은 의지나 노력에 근거를 둔 '선택'과는 다르다. '선발하는 것' 그것 안에서 고차적인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직관적인 선발의 명증성'이 가치의 위계를 결정한다. 가치의 실질적인 질서는 쾌·불쾌라는 양상, 고귀·비속이라는 양상, 정신적인 가치의 양상, 성스럽다고 하는 가치의 양상 등 네 가지가 있다.

우리의 정의적이며 지향적(指向的)인 생의 최고 단계는 사랑과 증오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가치 영역이 확대되고 증오에 있어서는 좁아진다. 새로운 고차적인 미지의 가치는 사랑의 움직임 속에서만 빛난다.

철학적 세계관[편집]

哲學的世界觀 (1929)

셸러가 죽은 다음해에 출판된 논문·강연집이며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함께 만년의 철학적 인간학을 아는 데 중요한 책이다. <뮌헨신보(新報)>에 게재된 <철학적 세계관>(1928), <신평론(新評論)>에 게재된 <인간과 역사>(1926), 강연 <평균화(平均化) 세대 속의 인간>(1927), 강연 <지식의 여러 형태와 교양>(1925), 강연 <스피노자>(1927)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철학은 교회의 노비(奴婢)도 과학의 노비도 아니다. 철학은 적극적으로 세계관을 정립(定立)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적인 세계관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사색이며 형이상학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갖는 세 가지 지식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실증적인 개별과학의 지식이며 사물을 개조하는 데 소용된다. 셸러는 이를 지배지(支配知)·실행지(實行知)라고 불렀다. 둘째는 본질지(本質知)·교양지(敎養知)라고 불리며 인간의 교양형태를 개조하는 데 소용된다. 실증적인 지배지는 현실적인 존재에, 철학의 교양지는 본질에 관계한다. 이에 대해 셋째의 구제지(救濟知)·형이상학적인 지식은 절대적인 것을 다시 세운다. 여기서는 실증과학의 한계문제, 예컨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문제가 된다. 또한 셸러는 철학적 인간학을 인간의 형이상학이라 하고, 인간은 자유로운 결단에 있어서 신이 그 본질을 실현해가는 존재자이며, 이 인간이 신에 이르는 최초의 통로라고 하였다.

하르트만[편집]

(니콜라이)

Nicolai Hartmann (1882-1950)존재론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출생, 고등학교는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에서 다니고, 의학·고전문헌학·철학을 도르파트, 페트로그라드, 마르부르크에서 배웠다.

1907년 코헨과 나토르프 밑에서 배운 뒤에 대학을 졸업, 1909년에 철학교수 자격을 얻어 사강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후 1920년에 조교수, 1922년에 나토르프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다. 1925년에 킬, 1931년에 베를린, 1945년에 괴팅겐에 옮겨, 괴팅겐에서 사망하였다. 최초의 <플라톤의 존재 논리학>(1909)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마르부르크 학파의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의 논리주의에 점점 불만을 느끼게 되어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후설이나 셸러의 현상학적 분석이나 마이농의 대상론(對象論)을 알게 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이다. 1919년 무렵부터 새로운 존재론을 지향하고 인식도 존재의 파악이며 존재관계라고 보았다. <인식의 형이상학>(1921)을 출판하고 이어서 이념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문제로 하여 <윤리학>(1926)을 출판, 주관적인 인식론으로부터 객관적인 존재론으로 사색을 전개시켜 나갔다.

킬에서 베를린 시대에 걸쳐 새로운 존재론의 각 부분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정신적 존재의 문제>(1933), <존재론의 기초>(1935), <가능성과 현실성>(1938), <실재계(實在界)의 구조>(1940) 등이며, 만년에 <자연의 철학>(1950), 사후에 <미학(美學)>(1953)이 출판되었다.

하르트만은 존재를 물질·유기체·마음(의식)·정신의 4층으로 나누고, 각 범주 및 층 상호간의 법칙을 분석하고 존재론의 체계를 구성하였다. 저급한 범주는 반드시 전부가 고급의 층에 침입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윤리학[편집]

倫理學 (1926)

하르트만은 칸트의 아프리오리한 도덕률에 근거를 둔 윤리학과 니체가 인정한 가치의 다양성(多樣性)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며, 셸러의 실질적인 가치윤리학(價値倫理學)의 기반 위에 선다.

가치는 이념적인 존재이며 가치감정이 이를 파악한다. 가치가 다양하고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은 가치감정의 상대성 때문이다. 가치 자체는 이념적인 존재이며 그것만으로는 현실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가치는 언제나 현실적인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가치로 하여금 스스로를 실현하게 하기 위한 중개자가 되어야 한다. 가치 자체는 무력하지만 인간의 힘은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그 사명이다.

도덕적인 가치는 의지나 행위가 좋다고 하는 사물의 가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의지나 행위는 좋다고 하는 사물을 지향(志向)하지만, 도덕적인 가치는 그 자체로는 지향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지향 자체의 가치이다.

최고의 도덕적 가치는 단적으로 선의 가치이며, 그 자체로서는 직접 파악되지 않고 그때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 속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에의 성향(性向)이 최고이며, 그때마다 좋다고 선발된 가치에 지향하는 고귀에의 성향, 일체의 가치 있는 것을 긍정하는 충실(充實)에의 성향, 반(反)가치적인 것을 모두 거부하는 순수에의 성향, 이것들이 덕(德)으로서의 가치를 형성한다.

일체의 도덕성의 제약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칸트에 있어서와 같이 현상계(現象界)의 인과계열(因果系列)에 대하여 자유로울 뿐 아니라 도덕적인 원리에 대해서도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의지(意志)는 동시에 적극적으로도 소극적으로도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인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