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현대의 사상/신칸트 학파
개설
[편집]칸트에서 시작된 독일 관념론은 1830년대의 헤겔 철학에 이르러 정점(頂點)에 도달하였다. 피히테나 셸링이 칸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것이 헤겔에게서 절대관념론(絶對觀念論)으로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관념론으로 내닫는 경향에 반대하고, 실증적(實證的)·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유물론적(唯物論的)인 실재론(實在論)의 입장을 취하는 학파들이 이미 19세기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헤겔 철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헤겔 학파가 좌·우·중간파로 분열되어 혼선을 일으키고 자연주의·실증주의·통속적 유물론이 한편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자 이들 양자를 모두 불신하고 오히려 칸트의 담백한 이성비판(理性批判)으로 돌아가 지식·과학의 기초를 새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신칸트 학파이다. 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칸트 철학을 그의 비판주의(批判主義)에 연결지어 그 정신을 부활·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헤겔 생전에도 자기의 사상을 칸트에 연결지으려 한 사람들이 있었고, <칸트 전집>이 두 곳에서나 나왔으며, 헤겔 사후에 이런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져 칸트의 입장으로 돌아가 철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1840년대에 현저해졌다. <제1기> 19세기 중엽에 통속적 유물론자들의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 정신(精神)을 단순한 물질의 부대현상 내지 대뇌(大腦)현상으로 보는 데 반발하여 이것을 인식론적으로 비판하기 위하여 칸트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생리학자 헬름홀츠(1821-1894), 철학자 랑게(<유물론자(唯物論者)>) 등이다. 그들은 유물론 역시 다른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허구적인 것이라고 반박하고 일종의 특수한 아프리오리한 정신의 제 법칙, 즉 정신의 체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역시 <칸트와 그의 아류(亞流)들>(1865)을 쓴 리프만이었다. 그는 사실판단도 가치판단도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치적인 요청 또는 규범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인간이성의 한계내에서 비판적인 형이상학을 수립하려고 하여 칸트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2기> 1870년대부터는 칸트 철학의 연구가 본격화되어 코헨의 <칸트 경험의 이론>(1871)이 나오고, 빈델반트가 <역사와 자연과학>(1874) 속에서 개성기술적 방법과 법칙정립적 방법을 분류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 밖에 문헌학(文獻學)적인 칸트 연구가 1880년에 융성하여 아르놀(1828-1905), 파이힝거 등의 활약이 있었다. <제3기> 그러나 신칸트 학파의 독자적인 철학체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890년대 이후였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는 코헨·나토르프·카시러, 서남(독일) 학파에서는 빈델반트·리케르트·라스크 등이 칸트 철학의 입장에서 자기의 철학체계를 구성해 내놓았고, 1896년에는 잡지 <칸트 연구>도 창간되었으며, 이 때부터 개별과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독일 이외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에도 파급되었다. 법철학에서는 루돌프 슈탐러(1856-1938)가 마르부르크 학파의 생각을 순수법학에 응용하였고, 교육학에서는 나토르프가 헤르바르트 주의에 대해 사회교육학을 설했으며, 신학에서는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이 종교를 가치판단의 총괄로 보았고, 트뢸치도 신학에서 리츨의 제자로 서남독일학파 계통이다. 베버도 리케르트와 관계가 있고 사회문제에서는 베른슈타인·슈타우딩거(1865-1923)·아들러카를 포를렌더(1860-1928)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코헨 자신도 윤리적 사회주의를 부르짖었고, 나톨프는 이를 사회이상주의로 전개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루느비에·피롱(1830-1914)·라셸리에,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케어드(1835-1908)·토머스 힐 그린(1836-1882),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간트니(1840-1906) 등이 신칸트 학파에 속한다. 이와 같이 발전하던 신칸트 학파도 1930년대에 와서는 현상학자(現象學者) 후설·하이데거, 마르부크크 학파 출신의 N. 하르트만 등의 칸트 형이상학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생철학자(生哲學者) 딜타이·짐멜 등의 칸트 인식주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자,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쇠퇴하게 되었다. <田 元 培>
신칸트주의의 선구자
[편집]新Kant主義-先驅者 1855년 헬름홀츠가 칸트의 업적을 찬양하고 2년 후 루돌프 하임(1821-1901)이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선험적(先驗的)인 것으로 바꾸어야 될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신칸트 주의는 실제로 1860년대에 개시되었고, 젤러·피셔·랑게·리프만의 이름을 들 수 있다. 피셔의 <근세철학사> 중 <칸트>(1860)는 칸트 철학을 상세히 서술하고, 젤러의 <인식론의 의의와 과제에 대하여>는 헤겔의 사변적인 논리학을 비판하고 인식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리프만은 <칸트와 그 아류들>(1865), 랑게는 <유물론사>(1866)에서 각기 칸트 철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였다. 또 로체의 <철학체계>(제1부), <논리학>(1874)은 현실과 당위를 구별하여 서남독일학파에 영향을 미쳤다.
젤러
[편집](에두아르트) Eduard Zeller (1814-1908)
독일의 고대철학사가.
이미 1862년부터 칸트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뷔르템베르크주(州)에서 태어났으며 튀빙겐과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1839년 튀빙겐 신학원의 복습교사(復習敎師), 다음해에 튀빙겐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847년 베를린의 신학교수, 1849년 마르부르크의 교수, 1862년 하이델베르크의 철학교수가 되고, 1872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으며 1894년 퇴직하였다.
처음에는 헤겔에서 출발하였으나 철학사가(哲學史家)로서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했다. 주저 <그리스인의 철학>(1844-1852)은 처음 3권으로 나오고 후에는 6권이 되었는데 고대철학에의 좋은 안내서이다. 인식론의 의의도 강조하였다.
피셔
[편집](쿠노) Kuno Fischer (1824-1907)
독일의 근세철학사가.
실레지아 출신으로 1844년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언어학, 할레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2년간의 가정교사 생활 후에 180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교수 자격을 얻었으나 3년 후에 강의가 불허되었다. 1856년에는 베를린에서 새로이 교수 자격을 얻어, 동년 예나 대학 교수로 초대되었다. 187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헤겔 학파의 중앙파에 속해 있었으나 1860년의 칸트 연구서로 칸트 철학의 부활에 기여하였다.
대저 <근세철학사>는 1852년부터 1877년에 걸쳐 나온 6권으로 된 저서로, 1897년에는 10권이 되었다. 이 철학사는 유려하고 빛나는 필치로 쓰여졌으며 근세철학 연구가에게는 좋은 입문서이다.
랑게
[편집](프리드리히 알베르트) Friedrich Albert Lange (1828-1875)
독일의 철학자.
<유물론사(唯物論史)>로 유명하며,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은 생리학과 칸트에 의해 반박되었다고 한다. 헬름홀츠와 함께 신칸트 학파의 단서를 열었다. 마르부르크 대학에 코헨을 초빙, 마르부르크 학파 형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취리히와 본에서 언어학을 배우고 4년간 본에서 강사 생활을 한 후, 1858년부터 1862년까지 고등학교에 재직, 후에 저널리즘과 실업계에 종사하고, 1866년에 취리히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 1870년에 취리히의 철학교수, 1872년에 마르부르크의 교수가 되어 거기서 사망했다.
유물론을 자연과학의 개별연구 방법으로 인정하였다.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은 칸트의 인식론에 의해 반박된다. 랑게의 칸트 해석은 헬름홀츠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감각생리학(感覺生理學)의 성과에 입각하고, 인식은 인간이 유(類)로서 갖는 심신적(心身的)인 체제에 따른다고 생각하였다.
유물론사
[편집]唯物論史 (1866)
<유물론의 역사와 현대에 있어서의 의의 비판>은 랑게의 주저.
초판은 1권이나 1873년부터 1875년에 걸쳐 증보되어 2권으로 된 제2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책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의의는 유물론의 역사를 서술하고, 당시 유물론의 한계를 밝혀 간접적으로 신칸트 주의를 촉진시켰다는 점에 있다. 랑게의 칸트 해석은 당시 감각심리학의 대표자인 요하네스 페터 뮐러(1801-1858)나 헬름홀츠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칸트의 인식론에만 의존하여, 이를 인간이 유(類)로서 가지고 있는 체제에 대한 이론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轉回)를 주장하고 대상은 우리들의 개념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개념은 인간의 심신적(心身的)인 체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사물을 공간과 시간에 따라 직관한다. 우리들의 지각은 이러한 심리학적 조직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
형이상학은 전체를 생각하려고 하지만, 전체는 시(詩)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인류의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형이상학은 개념시(槪念詩)인 것이다. 그것은 종교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를 보충하는 이상계(理想界)에 속한다. 유물론은 자연과학의 개별연구의 격률(格律)이며 방법인 한에서만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으나, 하나의 철학적 세계관이 되려고 하면 사변적으로 되어 현실세계를 초월하게 된다. 이것이 랑게의 주장이다.
리프만
[편집]Otto Liebmann (1840-1912)
독일의 철학자.
25세 때의 저작 <칸트와 그 아류들>은 각장 끝에 "그러므로 칸트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풀이하여 칸트에의 관심을 고취하였다.
그는 예나·라이프치히·할레에서 수학·자연과학·철학을 배우고 1865년 튀빙겐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 1872년 슈트라스부르크의 조교수, 1882년에 예나의 교수가 되었다.
랑게처럼 감각심리학에 입각하여 칸트를 인식론적으로 이해한다. 우리들의 경험은 오성의 선물이다. 사실의 언명은 언제나 사실을 넘은 것에 대한 언명을 포함하며 후자가 전자를 가능하게 한다. 주어진 지각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동일성(同一性)·연속성(連續性) 등의 비경험적인 전제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마르부르크 학파
[편집]Marburg 學派
랑게, 코헨, 나토르프처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칸트 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을 말한다.
카시러, 게르란트(1869-1952), 카를 포를렌더(1860-1928) 등도 이 학파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도 처음에는 이 학파에 속해 있었다. 창립자는 코헨으로 코헨과 나토르프가 죽은 다음에는 마르부르크 학파가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코헨은 칸트처럼 감성(感性)과 오성(悟性)의 2원론을 취하지 않고 공간과 시간도 카테고리(범주)라 하고 순수사유(純粹思惟)야말로 근원(根源)의 산출(産出)이며 근원의 사유라고 하여 과학의 논리학을 수립하고 수학과 자연과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다. 근원의 사유는 근원의 산출이며 근원은 곧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다. 곧 인식의 내용은 이러한 사유의 형식에 의해 근거가 부여되고 구성된다. 순수인식(純粹認識)은 끊임없이 근원으로부터 산출되고 있는 것이다.
나토르프도 인식은 무한한 과정이라고 한다. 그도 논리학은 과학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여러 법칙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였다. 순수한 사유가 내용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마르부르크 학파는 논리주의(論理主義)라고 지목되지만, 코헨이나 나토르프는 칸트의 정신을 살린 윤리학을 세우려고 했으며, 코헨은 미학(美學)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고 나토르프는 사회교육학을 주장했다. 슈탐러의 법철학이나 포를렌더의 사회철학도 이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학파는 인식 곧 과학비판을 사명으로 하였다.
코헨
[편집]Hermann Cohen (1842-1918)
유대계 독일 철학자.
마르부르크 학파를 창설하였다. 안할트주(州) 출신으로 1861년부터 브로츨라프 대학에서 철학·언어학·유대 신학을 배웠고, 1864년 베를린으로 옮겼으며, 철학을 트렌데렌부르크(1802-1872), 민족심리학을 슈타인탈(1823-1899)에게 배웠다. 다음해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의 필연성·우연성에 관한 논문으로 할레 대학을 졸업했다. 베를린에서 청강을 계속하고, 플라톤을 연구하는 한편 수학·자연과학도 연구했다.
칸트 연구는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1871년에 <칸트의 경험의 이론>을 출판, 이 책으로 베를린의 사강사(私講師)가 되려고 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하고 랑게의 초청으로 마르부르크의 사강사가 되었으며, 1875년 조교수, 다음해에 랑게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다. 70세까지 마르부르크에 살았으며, 퇴직 후에는 베를린의 유대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거기서 사망했다. <칸트 윤리학의 기초 부여>(1877), <칸트 미학의 기초 부여>(1889)는 전기한 <칸트의 경험의 이론>과 함께 칸트 연구의 3부작이며, <순수인식의 논리학>(1902), <순수의지의 논리학>(1904), <순수감정의 미학>(1912)은 체계의 3부작이다. 체계의 제4부는 문화의식의 통일을 논하는 심리학이었으나 출간되지 않았다. 코헨은 칸트 철학을 발전시켜 주관은 과학의 의식이며 인식은 대상의 산출(産出)이라고 하여 과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순수인식의 논리학
[편집]純粹認識-論理學 (1902)
코헨의 <철학체계> 제1부에 해당되는 것.
논리학은 사유의 교설이며 인식에 관한 이론이다. 사유의 특질은 인식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사유는 그 자체 외에는 어떠한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사유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와 같은 순수한 사유만이 순수한 인식을 산출한다. 인식을 행하는 사유는 창조적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는 사유와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유는 근원에 관한 사유이다. 근원에는 외부로부터 무엇이든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근원은 원리인 것이다. 원리란 바로 근거를 세우는 것이다. 근거는 근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사유가 근원에 있어서 존재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하면, 이 존재는 사유가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는, 근거와 다른 근거를 가질 수는 없다.
일체의 순수인식은 이 근원의 원리가 변화한 것이다. 근원의 사유는 합일(合一)에 있어서의 분화(分化)의 전개이며, 분화에 있어서의 합일의 전개이다. 인식은 폐쇄된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인식은 산출하는 데에만 존재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것이 갖는 성격이다. 개념은 사유의 요구를 만족시켜 줌으로써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물음인 것이다.
나토르프
[편집]Paul Natorp (1858-1924)
코헨과 함께 마르부르크 학파의 중심적 철학자.
1871년 이래 베를린과 본에서 우제너(1834-1905)에게 언어학을 배우고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라스(1837-1885)에게 철학을 배웠다.
1881년 마르부르크의 코헨 밑에서 철학 교수 자격을 얻었다. 4년 후 조교수가 되고, 1892년에 교수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1903), <정밀과학의 논리적 기초>(1910), <일반심리학>(1912) 등 외에 <사회교육학>(1899), <사회이상주의(社會理想主義)>(1920) 등의 저서가 있다. 이로 미루어 그가 비판주의의 입장에서 행한 광범한 활동을 알 수 있다. 코헨이 죽은 후, 사유·존재·인식에 일체의 통일적인 의미를 주는 것, 사유와 존재의 원점에 있는 것을 구해 그때까지의 논리주의(論理主義)로부터 이상주의적인 존재론(存在論)으로 전환하였다.
카시러
[편집]Ernst Cassirer (1874-1945)
유대계의 독일 철학자.
브로츨라프 태생으로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법률·독어학·근대문학사를 베를린, 라이프치히, 하이델베르크, 다시 베를린에서 배웠으며, 짐멜로부터 코헨의 말을 듣고, 1896년부터 마르부르크의 코헨 밑에서 철학을 배우고 1899년 졸업하였다.
베를린에서 연구하고 <근세의 철학과 과학에서의 인식문제>(1906-1920)에 착수, 1906년 베를린의 강사(講師), 1919-1933년 함부르크의 교수. 주저 <상징형식(象徵形式)의 철학>(1923-1929)을 공간(公刊), 나치스 정권에 쫓겨 스웨덴·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예일·컬럼비아에서 가르쳤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 출발하였다. 인식문제를 넘어서 의식(意識)을 학(學)의 의식으로부터 신화적(神話的)인 의식으로 확대하고 자연과학의 사유구조(思惟構造)로부터 정신과학·문화과학의 사유구조로 나아가, 문화의 기본개념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를 명백히 하였다. 고대·근세의 철학사적 연구나 인식론 분야에서도 유명하며 <칸트 전집>을 편집(1912-1918)하였다.
인간
[편집]人間 (1944)
카시러가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한 책으로 만년의 사상을 아는 데 편리하다.
주저 <상징형식의 철학>에서 언어·신화적인 사고·인식의 현상학(現象學)을 분석한 카시러는 인간의 문화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상징형식을 찾아내려고 한다.
인간도 생물이므로 환경 안에 있으나 생물처럼 환경의 자극에 직접 반응할 뿐 아니라 상징형식이 개재(介在)한다는 점이 인간의 특성이다. 의미있는 상징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서 응답하는 것이 인간이므로 인간이란 상징적 동물(象徵的動物)인 것이다.
문화는 의미의 세계이며 상징의 형식적 전체이다. 신화·종교·언어·예술·역사·과학의 분야에 걸쳐 카시러는 상징형식을 구했다.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
[편집]西南-學派(Baden 學派)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빈델반트, 리케르트, 라스크 등으로 대표되는 신칸트 학파의 하나로, 주명(州名)을 따서 바덴 학파(Baden 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르부르크 학파가 주로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비판, 곧 근거 부여를 주안점으로 한 데 대하여 역사과학·문화과학의 근거 부여를 시도했고, 또 사실적인 존재에 대해 타당한 가치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빈델반트는 피셔의 후임인데, 피셔는 원래 헤겔 학파에 속해 있었다. 라스크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함으로써 이 학파는 리케르트로 끝난다. 리케르트의 뒤를 이은 것은 야스퍼스였기 때문이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브루노 바우흐(1877-1942)나 리하르트 크로너(1884- ? )를 들 수 있다. 또 막스 베버도 리케르트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신학에서는 리츨과 트뢸치 등이 서남독일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학파가 철학계에 기여한 것은 역사과학 내지 문화과학을 대상과 방법면에서 자연과학과 대비시켜 그 방법론적 특성을 보여준 점에 있으며, 문화과학의 기본이 되는 문화가치, 일반적으로 그 가치의 철학에 대해서 반드시 영향력이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학파는 가치의 철학을 주장함으로써 인식론적인 칸트 해석으로부터 객관주의와 존재론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컨대 라스크는 신칸트 주의를 고대철학과 종합하려고 했으며, 대상의 원형(原型)으로서의 형식이나 범주를 생각하고 인식주관(認識主觀)은 이미 형식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감각적인 사태를 체험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년의 리케르트도 지각될 수 있는 존재, 이해될 수 있는 예지적인 존재,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체험할 수 있는 전 대상적(前對象的)인 존재의 세 가지를 생각하고 존재론적인 다원론(多元論)을 말하고 있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도 나토르프나 하르트만이나 카시러는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으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였다.
빈델반트
[편집]Wilhelm Windelband (1848-1915)
리케르트와 함께 서남독일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
포츠담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었다. 예나·베를린·괴팅겐에서 철학·역사·자연과학을 배우고 피셔와 로체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괴팅겐 대학의 로체 밑에서 <우연론(偶然論)>으로 학사가 되었으며, 1873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인식의 확실성>으로 철학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1876년에 취리히의 철학교수, 다음해에 프라이부르크의 교수, 1882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리프만의 후임교수가 되었으며, 1894년부터 총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03년에는 피셔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어 죽기까지 재직하였다.
<철학사교본>(1892)과 <근세철학사>(1878-80)는 현대에도 잘 읽히는 책이며, <철학개론>(1914)은 자신의 체계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자연과학은 법칙과학이며 법칙정립적(法則定立的)인 데 대하여, 역사과학은 사건의 과학이며 개성기술적(個性記述的)이고, 전자가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데 대해 후자는 일회적(一回的)인 가치가 있는 것을 향한다고 하며, 자연과학에 대한 역사과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철학은 보편타당적인 가치를 취급하고 인간의 문화창조의 목표이며 규범인 문화가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서남독일 학파의 문화철학·가치철학이라는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철학사가(哲學史家)로서도 유명하며, 그 문제사적인 방법은 전임자 피셔의 서술 방식을 일보 전진시킨 것이다. 동시에 체계적인 사색에도 힘을 기울여 특히 논문·강연집 <서곡(序曲)>(1883)이 잘 읽히고, 또 <의지의 자유>(1905)는 영향력이 큰 책이다.
사실적인 것과 요구되는 것, 주어진 것과 부과된 것, 실재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 현실과 가치, 인과율과 목적성(目的性) 등의 대립을 인정하고, 전자는 설명과학(說明科學)의 원리, 후자는 로체가 말하는 바와 같이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타당한 규범적인 가치라 하고 논리학·윤리학·미학을 규범과학이라고 불렀다.
철학개론
[편집]哲學槪論 (1914)
빈델반트의 체계적인 주저.
'철학개론'이라는 명칭의 저서는 독일을 중심으로 19세기 이래 많거니와 파울젠(1846-1908), 퀼페(1862-1915), 윌리엄 예루살렘(1854-1924), 분트 등의 철학개론과 함께 널리 읽혀진 저작 중의 하나이다.
철학은 인간의 본성 중 형이상학적 요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철학적인 세계관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과 여러 과학이 갖는 과학 이전의 개념이나 철학 이전의 개념을 추궁하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문제와 그 해답은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과의 필연적인 상호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철학의 역사에 나타나는 주요 문제와 해결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기초를 부여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적인 세계관의 가능한 여러 형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철학개론의 임무이다.
철학개론은 역사적인 지식을 주거나 저자의 사색에 끌어들이는 것을 임무로 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적인 사색 그 자체 안으로 독자를 이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개론은 철학의 역사와 체계에 내재적(內在的)인 비판을 하고 철학의 역사를 매개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본질인 이성적 의식에 눈뜨게 해야 한다.
그것은 지(知)와 생(生), 존재와 가치, 이론과 실천, 이론 문제와 가치론 문제라는 두 가지 분류를 통해 각각의 영역을 밝히고 쌍방을 종극적으로 결합하는 종교의 문제에 도달하는 것이다.
리케르트
[편집](하인리히) Heinrich Rickert (1863-1936)
독일의 철학자로 빈델반트의 후계자.
단치히 태생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1888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학사가 되고, 1891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다. 1894년에 동교의 조교수, 1896년에 릴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으며, 1916년 빈델반트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시대에는 하이데거가 그의 연습에 출석, 또 야스퍼스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1921년 이래 동료로 지냈으며, 1932년 퇴직 후에는 야스퍼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처음은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은 판단하는 주관으로서 인식론적인 주관이며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라는 입장을 취했다.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 <문화과학(文化科學)과 자연과학>(1899)에서 자연과학은 가치를 떠난 자연을 일반화(一般化)의 방법에 의해 기술하는 데 대해, 문화과학은 개성적이며 가치에 관계하는 문화재를 목표로 하는 개별화(個別化)의 방법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인 태도를 취하고,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다. 이것은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며 서남독일 학파가 문화가치의 철학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과학의 방법론은 막스 베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철학은 가치의 철학이며,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도 문화가치의 체계이다. 가치를 가치 이외의 것과 구별하고, 세 개의 세계, 곧 객관계(客關界)·가치계(價値界)·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계를 생각하고 제3의 세계는 실재적(實在的)인 것과 타당한 것이 결합된 세계로 이론적·예술적·도덕적·종교적인 생(生)의 세계라 하였다. 그것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로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다. 형이전학적 세계, 감성적 세계, 가치의 예지적인 세계가 구성하는 세계 전체를 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는 형이전학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잉태하는 생을 인정하지만, 당시 유행하는 생철학(生哲學)은 반성을 결여하였다 하여 <생의 철학>(1920)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인식의 대상
[편집]認識-對象 (1892)
신칸트 학파는 인식론적인 칸트 해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세기 말에 나온 리케르트의 이 책은 칸트를 인식론적인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철저화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순수화하고, 오히려 여기서부터 주관과 객관과의 논리적인 존재관계(存在關係)를 반성시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관주의를 논리적으로 추궁하여 역(逆)으로 논리적인 객관주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다. 주관도 객관도 실재성(實在性)을 상실한 의미적(意味的)인 존립(存立)이 된다.
인식에는 주관의 밖에 대상이 있다. 대상이란 인식이 참되고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리케르트는 주관과 객관을 세 가지로 나눈다.
① 자기의 신체와 정신으로 구성되는 자아, 이 자아의 신체 이외의 공간적인 외계(外界), ② 일체의 내용을 포함하는 자기의 의식, 일체의 자존적(自尊的)인 세계, 곧 초월적인 객관, ③ 내용과 구별된 의식, 의식 내용, 곧 내재적(內在的)인 객관으로 나눈다.
제①의 객관은 제③의 객관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사실이라 하고 제②의 객관과 주관을 음미한다.
이 주관은 판단주관(判斷主觀) 또는 인식주관이며, 그 객관은 판단의 피안에 있는 초월적인 대상이다.
판단은 가치의 승인 또는 비가치의 거부이며, 판단이 규범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 당위(當爲)이다. 주관은 무명(無名)이고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의식일반이며 일체의 내재적인 객관의 형식이다. 이러한 주관과 객관은 의식일반과 초월적인 규범이 되어 사실성(事實性)과는 전혀 소원(疏遠)한 것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