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러시아의 제국주의와 차리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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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제국주의와 차리즘의 위기〔槪說〕[편집]

러시아에서는 1861년 농노해방으로 자본주의로의 길이 열리고, 1890년대에는 프랑스를 주로 한 다량의 외국 자본 유입으로 중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시베리아 철도도 기공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러시아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외국 자본에 제공하는 종속국에 가까운 지위로 떨어져 있었으며, 엄격한 전제정치 아래에서 국민의 생활은 조금도 향상되지 않았다. 이 일은 사회혁명 운동을 격화시켰으며, 나로드니키 운동이 실패한 후로는 무정부주의자의 테러가 빈발하여 사회불안이 높아지고 세기말에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황제 정부가 국내의 불만을 전환하기 위해서도 한층 무모한 침략주의로 달리는 경향이 강해졌다. 전통적인 남진정책에 근거한 발칸 진출은 1878년 베를린 회의에 의하여 일시 저지되었으나, 그 후 동아시아·중앙아시아에 진출하여 영국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프랑스 자본의 유입[편집]

-資本-流入

러시아에서는 후진국이 그러하듯이 외국 자본이 이룩한 역할이 컸다.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에는 충분한 자본의 축적이 없었고, 외국자본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값싼 노동력과 국내 시장에 있어서의 공업 제품의 고가격(高價格)이 보증된 유리한 투자장(投資場)이었다. 그런 점에서 1890년대부터 중공업이나 은행업 등에 프랑스·벨기에·영국 등의 외국 자본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1900년에는 전자본의 약 절반) 외교 정책도 이들 나라의 동향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시베리아 철도[편집]

-鐵道

우랄 산맥의 동쪽 기슭 첼리빈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남시베리아 횡단 철도. 시베리아를 영유하고, 동방의 부동항(不凍港)을 얻은 러시아가 물자 수송 및 동아시아 진출을 위하여, 1891년부터 1904년 사이에 건설했다. 프랑스의 재정적 원조 아래 완성되어, 시베리아 개발과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유리하게 했다. 본선은 전장 6,484㎞이다.

사회민주노동당[편집]

社會民主勞動黨

1898년 3월 14일 민스크에서 개최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全)러시아 대회에서 기초가 마련되고, 1903년의 브뤼셀, 런던의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확립되었다.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사회혁명당이 나로드니키의 후계자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했다. 제2회 대회에서 레닌에 의해 기초(起草)된 강령(綱領)이 채택되고, 당(黨)의 규약,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 중앙기관지(中央機關紙) 「이스크라」 및 평의회(評議會)가 성립되었는데 동시에 당은 레닌이 인솔하는 볼셰비키(多數派)와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小數派)로 분열, 런던에서의 제3회 당대회(黨大會)에는 멘셰비키가 참가하지 않았다. 다음 1906년의 스톡홀름 대회에서 양파의 결합이 기도(企圖)되었으나, 멘셰비키는 카데트와의 제휴를 주창하고 대립, 1907년 제5회 대회에서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사회혁명당[편집]

社會革命黨

러시아의 정당. 1901년 인민의지파(人民意志派)의 잔당(殘黨)에 의해 조직되었다. 사회민주노동당과 더불어 20세기 초엽의 러시아 사회운동을 지도하였다. 나로드니키의 경향을 따라 투쟁의 수단으로서 테러를 제창, 실행기관으로서 전투단(戰鬪團)을 조직, 전제(專制)를 위협하고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진 원인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미르제(制)의 확보 및 그것의 광범위한 발전의 결과로 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1917년 2월혁명 당시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를 점하여, 당수(黨首) 케렌스키가 임시 정부를 장악하였다. 농업정책에서 정부와 대립, 독일대사 밀하바 암살사건을 발단으로 반소 쿠데타를 일으켜 국내전의 발단이 되었다. 임시정부 부활을 기도했지만 패망, 대부분 국외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