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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아프리카의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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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분할〔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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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은 일부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 거의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19세기 중엽 내륙부(內陸部)의 탐험이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유럽 열강의 주목을 모으게 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열강이 다투어 식민지 획득에 온 힘을 기울였다.

17세기에는 영국, 네덜란드가 케이프에 진출했으나 네덜란드는 영국의 소극책을 틈타 중기에는 케이프를 식민지화시키고, 그 후 북방에 진출하여 포르투갈 세력에 타격을 주었다. 이 때 유럽인들이 인도와 아메리카에 주의(注意)를 돌리자 이 지방에 대한 관심은 잠시 누그러졌다. 동북방에는 투르크가 1517년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제리 방면에 많은 번왕국(藩王國)을 만들어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여 왔으나, 나폴레옹 전쟁 시대가 되어 영국, 프랑스가 교대로 이집트에 침입하자 투르크는 이집트의 직접 지배를 기도하여, 도리어 그 독립화를 초래하였다.

18세기 전기에 활발했던 노예무역(奴隸貿易)이 이 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때까지 노예 무역으로 거리(巨利)를 보던 네덜란드 대신에 산업혁명을 끝낸 영국이 아프리카에 큰 세력을 갖게 되었다. 빈 회의로 케이프는 영국령이 되었고, 기니 지방의 네덜란드령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한편 프랑스는 알제리에 진출하게 되었다.

19세기 중기에는 영국의 선교사 리빙스턴의 중앙 아프리카 탐험이 유명하나 이 당시는 자유무역의 전성기였고 식민지열은 식어갔는데,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태는 일변하여 유럽 제국의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아프리카는 일약 상품 원료의 시장으로 중요시되었다. 더욱이 1869년에는 이집트가 프랑스 원조에 의하여 수에즈 운하(運河) 개통을 완성하자, 유럽인의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더욱더 높아졌으며 스탠리의 탐험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둔 것도 이때로서, 이른바 아프리카의 분할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1875년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주(株)를 5할 가량 매점(買占)하여 이집트에 우위(優位)를 차지하고 1914년에는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하였으며, 다시 남·중앙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확장하고 카이로·케이프를 연결하는 종관철도(縱貫鐵道)를 계획하였는데, 이는 북아프리카 횡단을 획책한 프랑스와 충돌되어 결국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그 대신 모로코를 획득하였다. 독일, 이탈리아는 약간 뒤져서 분할에 참가하여 요지(要地)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이디오피아를 제외하고는 전부 유럽 제국(諸國)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프리카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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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險

유럽인에 의한 아프리카 내륙부의 탐험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세기 중엽에 성행하였다. 수많은 탐험자 중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리빙스턴(영국, 1813

1873)과 스탠리(미국, 1841

1904)이다. 리빙스턴은 1840년 선교사로서 아프리카에 건너가 이후 벽지(僻地) 탐험에 생애를 바쳐 많은 지리적 발견을 하였고 대륙 횡단에도 성공했다. 스탠리는 1871년 행방불명이 된 리빙스턴 수색에 성공하여 유명해졌으며, 전후 4회에 걸쳐서 오지를 탐험했다.

수에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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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河

지중해와 홍해를 연락하는 수에즈(Suez) 운하는 1869년 프랑스인 레셉스(1805

1894)에 의해 완성되었다. 운하는 고대부터 여러 번 계획되었으나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레셉스는 1858년에 만국(萬國)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하여 개굴(開掘)에 착수, 영국의 방해를 배제해 가면서, 10년의 세월과 막대한 자본·노동력을 투입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어 완성했다. 덧붙여 말하면 회사의 자본 2억 프랑, 40만 주(株)의 대부분을 이집트와 프랑스가 소유했다.

수에즈 운하 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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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河買收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영국은 본국과 인도를 잇는 가장 짧은 길로서, 운하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수상 디즈레일리는 이집트의 태수(太守) 이스마일이 재정난에 빠져 있음을 틈타서, 1875년 이집트 소유의 운하 회사 주식 17만 6천6백 주(株)를 매수했다. 그 결과 영국은 수에즈 운하 회사 최대의 주주(株主)가 되고, 운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스마일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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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 Pasha (1830 ∼1895, 재위 1863∼1879)

이집트의 번왕(藩王). 유럽의 여러 제도(制度)를 모범으로 하여 교육·산업·교통 등 각 방면에서 이집트 근대화에 노력하였다. 레셉스의 수에즈 운하 개착을 도와 그 자본금의 44%를 부담하였으나, 재정적 궁핍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다액의 차관을 받았으며, 1875년 운하 회사의 주권을 영국에 매각하였고, 다시 열강의 재정관리를 받았다. 그의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종속(從屬)은 결정적인 것이 되고, 양국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였다.

아라비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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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mad Arabi Pasha (1839∼1911)

이집트 독립운동의 지도자. 농가 태생의 군인으로 일찍부터 반터키 비밀결사에 참가하였다. 1870년대부터 급격히 시작된 영국, 프랑스의 이집트에 대한 경제적 지출과 내정간섭에 반대하여 두 차례의 반란을 지도하였고, 1882년에는 육군장관이 되어 독립과 입헌정치확립을 위한 국민운동과 배외(排外) 운동을 일으켰다. 영국, 프랑스는 이 국민운동을 불온시(不穩視)하여 번왕(藩王) 이스마일 파샤를 위협하여 퇴위시켰으나 아라비 파샤는 새 번왕에 반대하고, 배타적 국수주의 운동을 지도, 반란을 일으켜 한때 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이 단독 출병하여 수주간에 이집트 전토를 제압하여 그는 체포되어 실론섬으로 유배되었다. 18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1901년 대사(大赦)를 받아 1911년 이집트에 귀국했으나 곧 사망했다. 이후 이집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명목적인 종주권 밑에서 실질적으론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후 영국의 보호국이 되어 완전한 종속국이 되었다.

영국의 이집트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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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配

수에즈 운하 회사의 주식을 매수한 후, 영국은 프랑스와 더불어 이집트의 재정을 관리하고 간섭을 강화했다. 특히 1882년 아라비 파샤의 난이 일어나자, 영국은 프랑스가 주저하고 있음을 틈타, 단독으로 출병하여 진압했다. 이후 영국은 수에즈 운하 지대의 주병권(駐兵權)을 획득하여 이집트를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아라비 파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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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 1881 1882년에 일어난 이집트의 독립을 표방한 민족주의적 반란. 농민 출신의 군인인 아라비 파샤(Arabi Pasha)는 영국과 프랑스의 진출에 강한 반감을 품고, 1881년 정변(政變)을 일으켜 육상(陸相)이 되었다. 그후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받자 1882년에는 군대를 중심으로 한 국민적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구열강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입헌제의 확립과 의회의 개설 등을 요구하는 근대 이집트 최초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집트인 장교, 상인, 터키계 대지주, 개혁파 등의 일부도 포함한 폭넓은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출병으로 진압되고, 이후 이집트는 사실상 영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수단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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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出

수단(Sudan)은 1823 년 이집트의 메흐메 알리에게 정복되고, 19세기 후반에는 이집트에 진출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1881년 무하마드 아마드를 수령으로 하는 마디의 난이 일어나, 1885년에는 영국의 고든 장군을 패사(敗死)시킴으로써 영국의 지배는 일시 중단되었다. 그 후 1898년 파쇼다 사건에 즈음하여 영국은 수단을 정복, 재차 지배 아래 두었다.

영국의 종단 정책(3C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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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縱斷政策

아프리카에 있어서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케이프타운·카이로·캘커타를 연결하려고 하는 3C정책의 일환인 아프리카 종단정책이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과 카이로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정책(縱斷政策)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橫斷政策)과 충돌하여 1898년 파쇼다 사건을 일으켰다. 또 카이로와 캘커타를 연결하는 영국의 인도정책은 처음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하고 뒤에는 독일의 3B정책과 교차되었다.

이 영·독 제국주의의 대립은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콩고 자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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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國

벨기에 왕 레오폴트가 건설한 식민지. 레오폴트는 콩고(Congo)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진출을 기도했으나 이것이 국제 문제가 되어 1885년의 베를린 회의에서 통치권이 인정되어 콩고 자유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레오폴드의 사유지(私有地)로서, 원주민에 대하여 극단적인 수탈이 단행되었기 때문에 국제적 비난을 받아 1908년 왕은 자유국을 벨기에 정부에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랑스의 횡단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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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斷政策

프랑스가 아프리카 분할에 즈음하여 취한 정책. 북·서아프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고 동안(東岸)의 소말릴란드의 일부를 영유한 프랑스는 대륙 횡단을 목표로 했다. 이의 실현을 위해, 1896년 마르샹 대령을 프랑스령(領) 콩고에서 나일강 상류로 파견했으나 영국의 종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이 되고, 프랑스는 횡단 정책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튀니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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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占領

튀니지(Tunisie)는 투르크의 영내(領內)에서 독립에 가까운 상태에 있었으나 1803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부터 국제적 중요성이 증대하여 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이권 획득 경쟁에 나섰다. 1881년 프랑스는 주민의 반란을 틈타서 튀니지를 점령, 보호권을 획득했다. 이 사실은 이탈리아를 분격시켜서 3국동맹이 성립하는 직접 원인이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섬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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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占領

17세기 이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 주목하고 있던 프랑스는 호바족(주민의 중심이 되는 동남아시아계 종족)의 왕국을 격파하고, 1885년 사실상 보호권을 획득했다. 이것은 얼마 후 영국에도 승인되었으나 원주민의 반항이 계속되므로 1896년 프랑스는 무력으로 점령, 이듬해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었다.

파쇼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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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件

1889년 영국의 종단정책(縱斷政策)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충돌하여 일어난 것으로, 제국주의 여러 나라의 식민지 획득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대립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다. 마르샹 대령이 인솔하는 프랑스군은 프랑스령 콩고에서 나일강 상류 지방으로 진출하여 1898년 7월 수단의 파쇼다(Fashoda)를 점령했다. 이 무렵 수단을 정복하고 있던 영국의 키치너는 이 보고(報告)를 듣고 파쇼다에 들어가(9월), 이 지방이 영국의 권리에 속해 있음을 주장하여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마르샹은 이를 거부, 영국·프랑스군이 대치함으로써 사건은 양국의 외교 문제로 발전했다. 양국의 세론은 비등하여 일시 전쟁 위기가 감돌았으나 프랑스 정부는 내외 정세를 고려하여 영국에 양보, 파쇼다 철수를 승복했다. 그 결과 위기를 피할 수 있었고 이듬해 중부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영·프 세력 범위에 관한 타협이 성립되어 수단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케이프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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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

남아프리카 남단의 영국 식민지. 최초에 발견한 포르투갈인이 이를 방기한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7세기 중엽부터 식민지로서 경영을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농민이 이주하여 보어인을 형성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814년 빈 회의의 결과, 영국령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영국인의 이민으로 1872년에는 영국의 자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와 금 등이 발견된 이래, 로즈가 인솔하는 대자본이 진출하여 이를 지배하였고, 로즈는 또 보어인의 정당(政黨)인과 결합하여 정계(政界)도 지배하였다. 제임슨 침입사건으로 로즈가 실각한 후, 케이프 식민지의 보어인은 트란스발, 오렌지 양국을 지지하였고, 보어 전쟁 발발 후에도 영국인에게 저항하였으나 차츰 회유(懷柔)되어,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의 성립과 더불어 그의 한 주(州)가 되었다.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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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cil John Rhodes (1853

1902)

남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영국의 식민지 정치가. 1870년 남아프리카에 이주하여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 채굴에 종사하였고, 트란스발 북방지방(로디지아) 개발을 위해 남아프리카 회사 설립의 특허를 받았다. 그 사이 다이아몬드 광산(鑛山)을 통합 독점하고 거부(巨富)가 되었다. 케이프 식민지 정계(政界)에 투신, 1890년에 수상이 되었으며, 행정 개혁, 영국 세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L 제임슨의 침입을 원조한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후로도 로디지아 개발에 노력하였고 보어전쟁이 일어나자 킴벌리에서 농성하였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전쟁이 끝나기 전에 케이프 타운 근처에서 죽었다.

보어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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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보어인(Boer人) 국가를 정복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1899

1902). 보어인은 19세기 전반 북방에 이주하여 트란스발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땅에 1867년 다이아몬드가, 1884년 금이 발견되자 영국인이 속속 이주(移住)하여 정치적 지배까지도 바라보더니 1899년 영국은 양국에 개전(開戰)했다. 보어인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군에 대하여 게릴라 전술로써 잘 대항하여 세계 각국의 동정을 모았으나, 1902년 마침내 항복하여 전쟁은 끝났다. 이후 양국은 영국령이 되었는데, 영국은 백인인 보어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취하여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니그로 원주민에 대해서는 차별정책이 계속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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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國

에티오피아(Ethiopia)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아프리카의 제국이다. 아프리카 분할의 물결은 이 나라에도 미쳐, 1860년에 영국이 출병했으나 점령의 가치가 없다 하여 버려두었다. 다시 1885년 이탈리아가 침입했으나 자연적 조건에 방해를 받아 이듬해 아두와의 싸움에서 패퇴했다. 이후, 열강의 세력균형상태 속에서 독립이 유지되었다.

리베리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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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和國

아프리카 분할 시대에도 독립을 보전한 흑인 공화국. 리베리아(Liberia) 공화국은 노예 해방의 기운이 고조되었던 19세기 전반 미국 식민협회가 추장(酋長)들로부터 토지를 매수하고 미국의 해방노예를 이곳에 보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1847년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건국의 사정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