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영국의 번영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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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번영과 제국주의로의 발전〔槪說〕[편집]

일찍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19세기에 미증유의 번영기를 맞아 국내의 민주화도 진척되어갔다. 즉 19세기 후반에 보수당과 자유당의 2대 정당에 의하여 전형적인 의회정치가 운영되고 두 차례에 걸친 선거법 개정에 의하여 선거권이 확대되어 보통선거제도에 가까워졌다. 또한 국민교육법이 제정되어 보통교육이 보급되었으며, 그리하여 노동조합법이 제정되어 조합운동이 합법화되었다. 이 시대에 노동운동은 온건하게 되어 의회에 대표를 보내 노동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영국의 노동자가 다른 나라의 노동자에 비해서는 높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한편 대외면에서는 세기의 중기(中期)경에 세계시장을 제패하여 자유무역이 전형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므로 식민지 무용론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1870년대 이후가 되면 금융자본의 해외투자가 활발해지고, 또한 발전하는 다른 강국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식민지 정책을 강화해야만 했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수상은 대영제국주의를 내걸고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매수하여 이집트에 진출하고, 1877년에는 인도를 제국으로 만들어서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추대하는 등, 적극적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19세기 말에는 식민지 회의가 자주 열려 본국과 식민지 관계가 강화되고 식민상(植民相) 체임벌린은 남아프리카를 정복하여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연결하는 3C 정책의 실현을 도모하였다. 또한 영국은 아시아, 중·남아메리카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빅토리아 시대[편집]

-時代

19세기에 있어서 영국의 빛나는 번영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되므로 빅토리아 시대라고 불린다. 64년에 걸친 여왕의 치세는 1870년경을 경계로 해서 전·후 두 기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은 영국의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우위를 확보하고, 국내적으로는 선거법 개정 등 시민계급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든 자유주의적 여러 개혁이 단행되었던 시기이며, 후반은 영국의 우월성이 차츰 위협을 받아 제국주의적 정책으로의 전환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빅토리아 여왕[편집]

-女王 Alexandria Victoria (1819

1901, 재위 1837

1901)

영국의 여왕. 조지 3세의 넷째 아들 켄트 공(公) 에드워드의 딸. 백부 윌리엄 4세의 뒤를 이어 즉위, 1840년 외종형 앨버트와 결혼하였다. 즉위 당시는 휘그당(黨)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수상 멜버른의 감화로 처음에는 휘그당을 편애하여, 1839년 토리당 필의 조각(組閣)에는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냈다. 부군 앨버트 공의 영향으로 화해하여, 멜버른의 사후에는 토리당에 접근하였다. 특히 앨버트 공을 사별하였을 때 보수당 당수 디즈레일리를 알게 되고부터는 여왕의 이러한 경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여왕의 64년간에 걸친 치세(治世)는 영국 자본주의가 세계적 우위를 확보하고, 국내적으로는 선거법 개정, 기타 중산층 시민계급의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한 자유주의적인 제반개혁이 행하여진 시기와 영국의 우위가 위협을 받아 제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전향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성립되어 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요한 전환기에 해당한다. 여왕의 지위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것이었으나, 특히 치세의 후반기에 있어서는 영국의 대외발전에 동조하여, 그 빛나는 상징으로서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1877년 이후에는 인도 여제(女帝)의 칭호도 겸했다.

자유당[편집]

自由黨 Liberal Party

1830년경 신흥 산업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당으로서 결성되었다. 휘그당의 후신(後身). 자유주의를 신조(信條)로 의회개혁, 자유무역의 실현 등,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단행했지만 휘그당이 그 귀족적 냄새를 완전히 불식한 것은 1868년 글래드스턴이 당수가 된 이후이다. 그리고 보수당과 교대로 정권을 담당했으나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당세가 약화됐다.

보수당[편집]

保守黨

Conservative Party

지주귀족의 이해를 대표하는 것으로 1830년경 출현한 정당으로 토리당의 후신. 현존 질서의 유지를 신조로 하지만, 그 반면 유연성도 풍부하여 반대당의 정책도 받아들였다. 보호무역주의를 취하여 19세기 후반에는 디즈레일리가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현재도 노동당과 함께 2대(二大) 정당 정치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글래드스턴[편집]

William Ewart Gladstone (1809

1898)

자유당의 지도적 정치가. 처음 보수당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후에 자유당으로 옮겨, 1868년 이후에는 4차에 걸쳐서 수상이 되었고, 선거법 개정, 아일랜드 문제의 해결 등에 노력했다. 보수당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평화주의 외교를 주장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의해서 대외진출로 전환했다.

디즈레일리[편집]

Benjamin Disraeli (1804

1881)

보수당의 지도적 정치가. 19세기 후반 글래드스턴과 교체해 정권을 담당했다. 2차에 걸쳐서 수상이 되었고, 보수주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선거법 개정·노동 입법 등에도 노력했다. 대외면에서는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수에즈 운하의 매수, 인도제국의 확립, 러시아의 남진정책 배제 등을 실행했다.

제2차 선거법 개정[편집]

第二次選擧法改正

제1차 개정은 시민층에 참정권(參政權)을 인정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선거권의 확대가 요구되어, 1867년에 디즈레일리 내각 아래에서 제2차 개정이 실현되었다. 선거구의 개정이 실시되었고, 선거권은 도시에서는 셋집을 포함하여 10파운드 이상의 가치가 있는 집의 주민에게, 농촌에서는 5파운드 이상의 토지 소유자·장기 차지인(借地人)에게 부여되어, 도시 노동자의 대부분이 유권자가 되었다.

제3차 선거법 개정[편집]

第三次選擧法改正

1884년과 1885년의 2번에 걸쳐서,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 아래서 제3차 개정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똑같은 선거 자격 조건이 농촌에도 인정되어, 농업노동자에게도 선거권이 부여됨으로써 보통선거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부인참정권의 문제는 20세기 초까지 보류되었다.

국민교육법[편집]

國民敎育法

Education Act

영국의 국민 교육은 타국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었으나 1868년 처음으로 전국적 조직이 형성되었다. 다시 1870년의 국민교육법에 의하여 지방교육국이 설치되어서 13세까지 아동의 강제 입학이 정해졌고, 빈곤한 가정의 아동에 대해서는 수업료가 면제되었다.

노동조합법[편집]

勞動組合法 Trade Union Act

1871년 노동조합을 합법화하여, 그 재산의 보호를 규정한 법률. 19세기 중엽 이후의 노동운동은 영국 자본주의의 번영에서 이점을 얻어 종래의 사회 개혁적 운동에서,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운동으로 전환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노동조합 합법화의 배경이 되어 있다.

디즈레일리의 제국주의적 단결[편집]

-帝國主義的團結

1870년대 이후, 다른 강국의 진출에 직면하여 영국은 세계 각지에 산재하는 식민지와의 제국주의적 단결을 강화하는 일이 급해졌다. 디즈레일리는 인도제국을 확립하여 본국 정부의 직할 지배하에 두고, 정치적으로 분리해 나가는 경향에 있던 영국인 이민(移民)이 많은 식민지를 차츰 자치령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식민지회의를 열어 본국과의 결합 강화를 기도했다.

자치령[편집]

自治領 Dominion

원래의 영국 제국 중에서 자치권이 주어졌던 속령(屬領). 1867년 캐나다가 자치권을 획득한 것이 최초였다. 이들 자치령 정부는 처음엔 국내문제에만 자주적 권한이 주어졌으나, 차츰 외교에도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에서는 본국과 별개의 대표를 보냈으며, 국제연맹에도 각각 독립국으로서 참가했다. 1926년의 영국제국회의에서 왕관(王冠)에 대한 충성에 의해서만 결합되며, 그 외에 있어서는 완전히 독립한다는 것이 결정되어,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성문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이들 자치령은 전부 연합국에 참가하여 싸웠다.

식민지회의[편집]

植民地會議 ColonialConference

영국 본국과 자치령과의 결속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188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년제(祭) 때, 런던에서 제1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후 1897년·1902년에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1907년에 와서 제국회의(帝國會議)라 개칭되었다. 본국 수상이 의장이 되고, 참가 정부는 평등한 발언권을 가지며, 영국제국 내의 국방·특혜관세 문제 등을 자유로이 토의하여 서로간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을 지향했다.

체임벌린[편집]

Joseph Chamberlain (1836

1914)

영국의 정치가, 제국주의 정책의 주창자. 버밍엄에서 사업가로 성공, 3년간 동 시장(市長)을 지냈다. 교육제도의 개혁, 기타 일반 시정상(市政上)의 업적으로 명성을 획득, 1876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종래의 보수계 정치가와 달리 지주적·귀족적 문벌에 의하지 않고, 공업 특히, 버밍엄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업의 발달을 배경으로 정계에 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886년 제3차 동 내각의 지방자치상을 지냈으나, 아일랜드 자치법안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자유 통일당을 만들어 그 영수가 되어 보수당에 접근하였다. 1895년 제3차 솔즈베리 내각의 식민상(植民相)이 되어 남아프리카에서의 적극적 진출책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99년 보어 전쟁이 발발하여 1902년에는 남아프리카 정복이 실현되었다. 또한 식민지제국의 긴밀한 통일조직의 확립과 이에 입각한 보호관세정책의 열렬한 주창자로서, 1897년, 1902년, 식민지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재무상, 외상을 지낸 J.A. 체임벌린과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수상이 된 A.N. 체임벌린은 그의 아들이다.

노동대표위원회[편집]

勞動代表委員會 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

노동당의 전신이 된 단체로서 1900년에 창립되었다. 19세기 말에는 노동자 계급의 정당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었는데, 1900년 런던에 65개의 노동조합과 3개의 사회주의 단체(독립노동당·사회민주연맹·페이비언 협회)의 대표를 모아서 노동자 계급 대표자 협의회가 개최되어, 회의의 결과로서 성립되었다. 그 후 1906년 대회에서 정식으로 노동당 명칭이 결정되었다.

독립노동당[편집]

獨立勞動黨 Independent Labor Party(ILP)1893년에 결성된 영국의 사회주의 단체. 강령(綱領)은 ‘생산·분배·교환 등 모든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목표로 하였으나, 당면의 운동방침은 페이비언 협회와는 달리, 노동자의 일상적인 요구를 채택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독립정당을 수립함에 있었다. 영국 노동조합회의에 있어서의 보수적(保守的) 조합 간부와의 투쟁을 통하여 1900년대에는 노동대표자위원회(勞動代表者委員會), 1906년에는 영국 노동당(勞動黨)의 결성에 성공하였다. 독립노동당은 노동당에 가입한 좌익(左翼) 사회주의 단체로서 노동당의 기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역할을 하였다.

사회민주연맹[편집]

社會民主聯盟 Social Democratic Federation(SDF)영국의 사회주의단체. 1881년 창설된 민주주의자연맹이 1884년 자칭 마르크스주의자 하인드만에 의해 사회주의 단체로 개조된 데서 비롯된다.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의 실행을 목표로 하여 1885년의 총선거에 3명의 후보자를 내세웠으나, 토리당으로부터 자금의 원조를 받아 모리스 등 반수의 회원은 이러한 기회주의에 반대하고 탈퇴했다. 그후 연맹은 실업자(失業者)의 구제에 노력하였으나, 1893년 이후의 독립노동당에 의한 노동자 정당 수립을 위한 운동에도 참가를 거부하여, 사회주의 단체로서의 발전을 볼 수는 없었다.

페이비언 협회[편집]

-協會 Fabian Society

1884년에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 버나드 쇼·웨브 부처 등을 이론적 지도자로 하여, 토지와 자본의 사회적 공유(共有)를 주장했는데, 마르크스주의적인 혁명을 배제하고 점진주의(漸進主義)를 취했다. 처음엔 중산계급을 설득해 목표에 도달하는 방침을 취했고, 노동당에의 접근은 제1차 세계대전중부터 시작되었다. 명칭의 유래는 고대 로마의 장군 페비우스가 결전을 피해서 적을 피로하게 하여 승리를 얻었다는 일화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