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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19세기 후반의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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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프랑스〔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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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에 제3공화제가 성립했으나, 그 후 소당 분립(小黨分立)이 계속되어 정정(政情)은 불안하고, 공화제가 유지되었다고는 하지만 블랑제 사건이나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서 군부·우익 세력이 대두하였다. 또 경제면에서 프랑스 혁명 이래의 소농경영(小農經營)이 많았으므로, 농업의 발달이 기술적으로 늦어지고, 공업의 발달도 완만하여 새롭게 일어나 독일·미국에 곧 뒤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자본주의는 산업면에서는 뒤떨어져 있으면서도, 금융면에서는 소시민의 자본을 모아 일찍부터 해외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제국주의 시대에 중요한 의의를 가졌으며, 특히 1890년대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가 악화되자 프랑스의 자본은 대량으로 러시아에 유입(流入)되었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대자본과 군부는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러·프 同盟), 비스마르크의 외교 전술로 인하여 빠졌던 국제 고립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 동안에 프랑스는 동(東)아시아나 아프리카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공화제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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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和制-確立

1876년 신헌법 아래 처음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하원에서는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보수적인 막마웅 대통령은 왕당파나 가톨릭 세력과 결합, 누차 반(反)공화적 행동을 취했다. 그 때문에 양파의 대립은 점차 심해졌으나 1879년 선거에서 공화파는 상원에서도 다수를 차지했으므로 막마웅은 퇴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공화파는 정부를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기고, 7월 14일을 국제일(國際日)로 하는 등, 대혁명의 전통을 이어받는 공화제를 확립했다.

고리대금적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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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利貸金的帝國主義

프랑스에서 독점자본의 성립은 독일보다 훨씬 늦었으나 대혁명 이래 성장해 온 금융 자본은 정계·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으며, 농민·소시민의 저축을 모아서 해외에 유리하게 투자할 곳을 구했다. 그 무렵 프랑스는 자기의 식민지보다도 유럽, 특히 러시아에 자본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산업투자가 아니라 대부분 국채(國債)였으므로 가끔 고리대금적 제국주의라고 비평되었다.

블랑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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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件

1880년대에 제3공화제를 위협한 블랑제(Boulanger) 장군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운동이다. 그는 1886년 육상(陸相)이 되고, 병제(兵制)의 민주적 개혁을 단행, 대(對)독일 관계에도 강경한 태도를 보여 한때 공화파와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정부는 그를 두려워하여 파면했는데 우익(右翼)과 결합하여 1889년 센현(縣)의 보궐선거에서 대승한 여세를 타고 쿠데타를 감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불결단(不決斷)과 정부의 긴급 조처로 실패하여 공화제의 위기가 극복되었다.

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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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件

유태인 사관(士官) 드레퓌스(Dreyfus)의 재판 문제로 발단되어 제3공화제에 중대한 위기를 몰고 온 사건. 1894년 드레퓌스는 대(對)독일 스파이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 진상이 판명되었음에도 군부는 사건을 묻어두려 했으므로 1898년 문학자 졸라가 군부를 탄핵하는 공개장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세론(世論)이 비등하고, 드레퓌스파(좌익·공화파)와 반(反)드레퓌스파(군부·우익·보수파)가 격심한 대립을 하였다. 그러나 사건은 공화파의 승리로 끝나고 드레퓌스는 1899년 대통령 특사(特赦)를 받았으며, 1906년 무죄가 되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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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主義

파리 코뮌 후, 일시 쇠퇴했던 사회주의 운동은 1870년대 말부터 부활하고, 1884년에는 노동조합도 합법화되었다. 처음 사회주의 단체는 많은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906년 드디어 통일사회당이 생겼다. 노동조합도 1895년에 노동총동맹을 결성했는데, 의회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혁명적 행동에 의한 자본주의의 극복을 부르짖는 신디칼리즘이 주류(主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