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시민혁명과 신대륙/프랑스의 절대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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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절대왕제〔槪說〕[편집]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백년전쟁 말기 샤를 7세(찰스 7세) 시대에서 시작되어 앙리 4세(헨리 4세) 시대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절대주의가 최성기(最盛期)를 이룬 것은 17세기 후반의 루이 14세 시대였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영국과 달리 봉건적 세력의 해체는 극히 불분명하고 농노 해방은 철저하지 못하여 독립 자영농민의 광범한 형성은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농민의 대부분은 현물지대(現物地代)와 각종 의무 부담이 부과된 절반 소작(折半小作)이었으며, 자본의 축적도 불충분하여 자유로운 공업의 전개는 늦어지고, 도매 상인에게 지배된 길드적 수공업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한 국내 산업의 육성도 결국 왕립(王立)·국립(國立) 혹은 특권적 매뉴팩처를 조성하는 데 그쳤다. 프랑스에서의 귀족의 세력은 뿌리가 깊어,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왕권에 도전하려 했으며, 특권의 회복을 기도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앙리 4세 이래 이러한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의 강화와 국내 통일을 이루려는 시책이 역대 여러 왕에 의하여 실행되어 루이 14세 친정 시대(親政時代)의 왕권은 비할 데 없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에 의한 대외 전쟁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고, 위그노의 추방은 프랑스의 경제적 발전을 극히 저해했다. 루이 15세 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절대주의의 모순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루이 16세 시대에는 이미 이러한 모순은 개선할 수 없는 것이 되어 프랑스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루이 13세[편집]

-世 Louis ⅩⅢ (1601

1643, 재위 1610

1643)

앙리 4세의 아들. 어려서 즉위하였으며 모후(母后)가 섭정하였다. 섭정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귀족들이 반항을 시도, 내란의 위험이 생겨 1617년부터 친정(親政)을 하였으나, 국무(國務)보다 음악이나 사냥을 좋아하여 국내의 동요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귀족들은 이 기회에 옛 특권을 회복하고자 삼부회(三部會)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왕측은 삼부회 내부의 대립을 이용하여 이것을 해산시켰다. 그 후 프랑스 혁명의 전야까지 한 번도 삼부회는 개최되지 않았고, 전제적 정치가 행해지게 되었다. 1624년 당시 추기경(樞機卿)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점차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부르봉 왕권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또 30년전쟁(三十年戰爭)에도 개입하였다.

리슐리외[편집]

Richelieu (1585

1642)

프랑스의 정치가. 루이 13세 때의 재상(宰相)으로서 절대 왕정의 기초를 쌓았다. 1614년 삼부회에 성직자 대표로서 참가, 곧 궁정에 등용되고, 1624년 이후 재상으로서 부르봉 왕권의 강화에 노력하였고, 국내 통일을 강화하기 위하여 위그노를 탄압하고 지방의회의 활동을 견제했다. 그는 국왕에 직속한 지사(知事)를 각지에 파견하여 지방의 정치·치안·재정을 감찰하게 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확립을 꾀하였고,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지 않고 프랑스 절대주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또 지방의 지사로 임명된 귀족이 성을 만들어 독립화하는 경향을 단속하고, 귀족의 반격 거점이었던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했다. 30년전쟁에 즈음하여서는 구교국이면서도 신교측에 가담하여 에스파냐 독일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 약체화를 꾀하여 프랑스의 안정을 희구하였다.

프롱드의 난[편집]

-亂 프랑스의 부르봉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최후의 반항에 의해 일어났던 내란. 프롱드라 함은 투석기(投石機)의 뜻인데, 제1회는 고등법원(高等法院)의 프롱드(1648∼1649), 제2회는 귀족의 프롱드(1649∼1653)이다.

루이 14세의 즉위(1643) 당시 모후(母后)와 재상 마자랭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파리의 고등법원「(법복귀족(法服貴族)」이 칙령의 등록을 거부함으로써 왕권에 반항하여 왕실도 한때는 피난하여 파리를 퇴각하였으나, 왕당파의 콩데 공(公)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콩데 공은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었고 지방에서는 반왕당파 귀족이 동맹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왕실과 마자랭은 다시금 파리를 퇴각하였다. 파리는 에스파냐의 원조를 받고 있는 콩데 군(軍)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의 반감을 사서 드디어는 왕당파에 의한 탄압으로 왕실은 파리로 귀환하였다.

이 프롱드의 반란은 프랑스에 있어서의 귀족세력의 왕권에 대한 최후의 반란으로 부르봉 절대왕권 확립의 길을 터놓은 것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마자랭[편집]

Jules Mazarin (1602

1661)

프랑스의 정치가. 이탈리아에서 출생. 로마 교황의 사절(使節)로 프랑스에 갔으며, 1639년 프랑스에 귀화했다. 루이 13세, 리슐리외에게 인정받아 추기경이 되어 정계에도 등장하였다. 리슐리외, 루이 13세의 사후(死後), 루이 14세의 모후(母后)와 더불어 정치를 좌우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알사스를 획득하였으며, 독일의 약체화에 성공하고 또 피레네 조약으로 에스파냐의 간섭을 배제(排除)하여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을 삭감(削減)시켰으며, 부르봉가(家)의 국제적 우위(優位) 확립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내정에 있어서는 프롱드의 난을 비롯해서 국내안정에는 실패하였다. 막대한 치부(致富)를 한 그는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확립에 공헌하고, 문화보호에도 노력하였다.

루이 14세[편집]

-世 Louis ⅩⅣ (1638

1715, 재위 1643

1715)

프랑스 국왕. 프랑스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전제 군주, 태양왕이라고 불린다. 5세에 즉위하였는데, 모후가 섭정이 되고 마자랭이 정무의 실권을 잡았다. 프롱드의 난(1648∼1653) 때에 몇 차례나 파리를 도망하여 모후와 유랑생활을 하였으며, 이 추억이 그에게 오랫동안 파리를 혐오하는 감정을 갖게 하였다(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김). 1661년, 마자랭의 죽음과 더불어 루이 14세 친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루이 13세와는 달리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친정의 처음부터 “짐(朕)은 곧 국가다”라고 선언하고 모든 국가적 이해는 왕권에 종속됨을 주장하여 절대군주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행정적으로도 중앙에는 궁정내의 여러 회의, 지방에는 지사(知事)로써 집권화를 기도, 콜베르를 비롯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경제적, 군사력 그 밖의 국력의 충실을 기했다. 대외적으로는 자연 국경설을 주장하여 자주 침략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플랑드르 전쟁, 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전쟁, 에스파냐 계승전쟁 등이 있다. 이들 전쟁에서는 소득은 적고, 반대로 영국의 세계적인 우위, 프랑스의 국고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화되었다. 1685년에는 낭트의 칙령을 폐지하였기 때문에 위그노의 국외 이주로써 산업상에 큰 타격을 받았다. 왕의 치세의 만년에는 절대주의의 모순이 더욱 표면화하여 개혁적인 사상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프랑스 문화의 황금시대로서, 문학·예술에도 많은 뛰어난 시인·예술가, 사상가를 배출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가 전개되었다.

콜베르[편집]

Jean Baptiste Colbert (1619

1683)

부유한 상인의 아들 콜베르는 1665년에 재무총감(財務總監)으로 임용되어 절대주의의 재정 정책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국고 수입을 늘리는 방법으로서 부르주아지를 보호 육성하고, 여러 산업을 일으킴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보호의 대상으로 된 것은 주로 대기업이었고, 수출용이나 상류 계급의 사치품 제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콜베르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억제하기 위하여 관세율(關稅率)을 인상하고, 독점적인 무역회사를 창설하여 국산품의 수출을 장려한다는 전형적인 중상주의 정책을 썼다. 그는 세계의 무역 총량은 일정불변(一定不變)이라는 그릇된 가설(假說)을 세우고 보다 큰 ‘파이(π)’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나 영국의 진출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루이 14세의 대외 침략 전쟁[편집]

-世-對外侵略戰爭

루이 14세는 전유럽에 군림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친정 시대 최초의 대외 침략은 네덜란드로 향했다. 1665년 루이 14세 왕비의 아버지인 에스파냐국의 필립 4세가 죽었다. 루이 14세는 남네덜란드를 상속 유산으로 요구,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강대해짐을 두려워하고 있던 영국·네덜란드·스웨덴 등이 에스파냐측을 지지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의 일부를 입수한 데에 그쳤다. 루이 14세는 무역 정책에 있어서도 가장 적대시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정복할 의도를 굳혀 우선 외교적으로 네덜란드의 고립화를 기도했다. 1670년 루이 14세는 영국의 찰스 2세와 도버 밀약(密約)을 맺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원조로 영국을 구교국으로 함과 동시에 신교국인 네덜란드에 대하여 공동으로 선전포고할 것, 통상에 있어서는 프랑스에 대폭적 권익을 인정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1672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찰스 2세는 의회의 협력을 얻지 못한 채 프랑스의 원조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네덜란드는 고전을 계속하다가 최후에는 스스로 제방(堤防)을 파괴하여 프랑스군의 철퇴(撤退)를 불가피하게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영국은 1674년에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네덜란드 전쟁의 시작과 때를 같이하여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가(家)에 타격을 주려고 팔츠로 출병했는데 1688년에는 재차 출병하여 전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전개했다. 프랑스는 육상에서는 연승을 계속했으나 해상에서는 영국에 패하고, 결국 현상유지에 그쳤다. 1700년 에스파냐의 찰스 2세는 루이의 손자인 필립에게 상속을 유언하고 죽었다. 부르봉가(家)는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의 지배권을 얻었다. 이에 부르봉가가 강대하게 됨을 두려워한 영국·네덜란드는 독일의 황제 레오폴드 1세의 지지에 의하여 에스파냐의 왕위를 요구한 오스트리아의 찰스를 지지하여 프랑스·에스파냐에 전쟁을 걸었다. 이것이 에스파냐의 계승전쟁(繼承戰爭)이다. 루이 14세는 일시 곤경에 처했으나 레오폴드가 죽은 후 찰스가 황제에 오르자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보다 강대해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네덜란드는 1713년에 프랑스측과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