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시민혁명과 신대륙/30년전쟁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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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쟁과 독일〔槪說〕[편집]

독일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종교화약(宗敎和約)에 의해서 신구 양교파의 전쟁은 대체로 종지부를 찍었으나 종교화약의 미비점이 있어서 그 후에도 양파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17세기 초에 동맹을 결성하여 대립, 정세는 극히 험악하게 되었다. 양파의 대립은 1618년 보헤미아의 신교도 반란을 계기로 폭발하여 30년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독일의 종교 내란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어 구교측에 에스파냐가, 신교측에 덴마크·스웨덴·프랑스 등이 가담하여 국제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의 진전과 함께 독일 제후와 황제와의 대립, 합스부르크가(家)와 부르봉가(家)의 대립, 스웨덴의 북유럽 제패(制覇)와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하는 정치적·국가적 이해를 주로 한 국제 전쟁이 되었다. 독일은 이 전쟁의 무대가 되어 혼란스러웠고, 차차 평화를 열망하는 소리가 높아져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로 30년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독일은 이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되고 인구도 ⅓을 잃은데다가 제후는 조약에 의하여 영토 내의 주권을 인정받음으로써 국가의 통일이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에 근대화는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에서는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이 전쟁으로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이 후퇴하고, 이에 반대하여 프랑스가 강대화하고 스웨덴도 강국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편집]

-世 FerdinandⅡ (1578∼1637, 재위 1619∼1637)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 반동 종교 개혁의 전형적인 군주이다.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의 왕이 되어 프로테스탄트를 압박하고 가톨릭주의의 재건에 노력했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의 폐위를 선포,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하여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1619년 황제가 되어 내외의 가톨릭 세력의 원조를 얻어, 1620년 바이센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를 격파하고, 보헤미아에 합스부르크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어서 발렌슈타인을 기용하여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세력을 내몰아 한때는 전독일을 제패했으나,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침입 및 그에 대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의 원조로 그의 기도는 좌절되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페르디난트 3세[편집]

-世 Ferdinand Ⅲ (1608∼1657, 재위 1637∼1657)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 1625년 헝가리 왕. 1627년 보헤미아 왕이 되었다. 30년 전쟁에서 발렌슈타인이 죽은 후(1634) 황제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파를 압박,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고 전란을 종결시켰으나, 이 때문에 독일의 정치적 분열과 스웨덴 및 프랑스에의 영토 할양으로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30년전쟁[편집]

三十年戰爭 (1618

1648)

종교전쟁으로 최후이자 최대의 것. 독일에서는 17세기에 들어와서 신구 양 교도의 대립이 재차 격화되고 있었는데, 1617년 보헤미아 왕이 된 페르디난트는 신교도를 탄압하였으므로 이듬해 보헤미아의 신교도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30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네 시기로 나뉘는데, 전반에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반면에 후반에는 정치적 항쟁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제1기〕 (1618

1625)

보헤미아의 신도들이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받들고, 영국 왕 제임스 1세나 프로테스탄트 제후(諸侯)의 지원(支援)을 기대하고,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반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가 바이센베르크 싸움(1620)에서 패배,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의 신도들은 탄압당했다. 〔제2기〕 (1625

1629)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軍資金)을 얻어, 프로테스탄트 군(軍)의 수령(首領)으로서 발렌슈타인 지휘하의 황제군(皇帝軍)과 싸워서 패전, 1629년 5월 22일 뤼베크 조약으로 양자간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조약하였다. 이 기간 중 황제는 배상령(賠償令)(1629.3.29)을 내려 종교제후(宗敎諸侯)의 영지(領地) 회복과 루터파만을 공인(公認)할 것을 포고하였다. 〔제3기〕 (1630

1635)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구스타프 아돌프)는 신교를 옹호하고 황제권력의 북상(北上)을 저지하는 한편, 북유럽에서의 패권을 확립할 목적으로 1630년 프랑스로부터 자금을 얻어 독일에 침입, 황제군을 라이프치히 싸움에서 격파하고, 뉘른베르크에서 발렌슈타인과 대치(對峙)하여 뤼첸의 싸움(1632.11.16)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사하였다. 발렌슈타인이 그후 모반(謀反)의 혐의를 받고 암살되자, 황제와 프로테스탄트 군(軍)의 수령 작센 선제후(選帝侯) 사이에 프라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제4기〕 (1635

1648)

프랑스는 1631년부터 참전하였지만, 이 때부터 스웨덴과 결탁(結託)하고 적극적으로 독일에 진출하여, 스웨덴군과 프랑스군은 황제군과 싸워 일진일퇴의 전황(戰況)을 보였다. 1643년경부터 평화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다가,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성립으로 전쟁은 끝났다. 30년 전쟁은 주로 독일을 전장(戰場)으로 하여 싸웠기 때문에 독일은 극도로 황폐되어, 이후 독일의 반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막시밀리안 대공[편집]

-大公 Maximilian (1573∼1651)

바이에른 대공(1623∼1651). 1597년 바이에른 공령(公領)을 계승하였다. 이후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 운동의 선두에 서고 1609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동맹(諸侯同盟)에 대항해서 가톨릭 제후연맹(諸侯聯盟)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다. 30년전쟁 발발(1618) 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도와 1620년 바이센베르크 싸움에서 팔츠 백(伯) 프리드리히 5세에게 인솔된 반란군(反亂軍)을 격파하고, 1623년 팔츠 선제후(選帝侯)의 자리와 상(上) 팔츠를 획득하였다. 황제가 발렌슈타인을 기용(起用)한 후는, 황제권력의 강대화(强大化)를 두려워하여 1630년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를 파면(罷免)시키고 자신의 지도적 지위 회복을 기도하였다. 스웨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불리한 형세에 놓이자, 1647년 울름에서 단독으로 강화(講和)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동맹[편집]

-諸侯同盟 Protestant Union (1608∼1621)

가톨릭 제후들의 반동 종교개혁의 압력에 대항하여, 1608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가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의 지도하에 결성한 동맹. 이듬해에는 약간의 프로테스탄트 제국도시(帝國都市)도 가입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가톨릭 제후도 1609년 막시밀리안 대공의 지도하에 가톨릭 제후연맹을 결성하였다. 1612년에 영국, 1613년에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1618년 보헤미아의 반란 발생 후 프리드리히 5세를 지원하였지만, 제후간의 협조가 약하였고 또 카톨릭 제후 연맹에게 압도되어 1621년 해산되었다.

가톨릭 제후연맹[편집]

-諸侯聯盟 Liga

독일의 가톨릭 제후와 도시가 결성한 연맹. 가톨릭 제후에 의해서 취해진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제후와 도시는 1608년 프로테스탄트의 제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대해서 남독일과 라인 지방의 가톨릭 제후·도시는 막시밀리안 대공의 지도하에 1609년 7월 연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대치하였다. 연맹은 상호 출자하여 군대를 보유하고, 30년 전쟁에서는 군사적으로 황제를 원조하였지만 황제가 발렌슈타인을 기용한 후에는 그 역할이 감소되어 1648년 이전에 해산되었다.

발렌슈타인[편집]

Albrecht Wallenstein (1583

1634)

독일 30년 전쟁 때의 장군. 보헤미아의 빈약한 귀족출신으로 처음에는 루터파 대학에서 배우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한 뒤 돈많은 과부와 결혼, 막대한 재산을 얻었다. 1617년경부터 보헤미아의 페르디난트 황제를 도와 공을 세워 백작에 봉해지고, 30년 전쟁에 대령이 되어 황제군을 통솔, 프로테스탄트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를 격파하고, 1625년 헝가리를 구축하는 등 큰 공을 세웠으나 성격이 조악(粗惡)하여 제후와 승려들의 미움을 사서 황제에 의해 파면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침입으로 재기용되어 아돌프를 전사시켰으나 싸움에는 지고, 그의 행동은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사서 암살되었다. 그는 큰 용병대(傭兵隊)를 거느리고 급양·급료 지불을 모두 점령지에 부과하는 징발 방식을 취했다.

베스트팔렌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Westfalen

30년전쟁의 강화조약(1648). 조약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프랑스는 알사스의 대부분과 메스·투르·베르됭 등 라인강 좌안의 토지를 얻는다. (2) 스웨덴은 서(西)포메라니아 등을 얻는다. (3)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한다. (4) 독일 제후에게 그 영내(領內)의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을 인정한다. (5)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는 동(東)폰메른 등을 얻는다. (6) 독일의 가톨릭·루터파(派)·칼뱅파에게 각각 동등의 권리를 인정한다.

이 조약은 독일의 분열에 결정적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베스트팔렌의 강화 회의에는 66개국 대표가 참가하여, 세계사상 최초의 큰 국제회의가 되었다.

프로이센[편집]

Preussen

북방 독일의 왕국. 1871년에 건설되어 독일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고대에는 슬라브계의 프로이센인이 살았으나, 12, 13세기경 동독일 식민운동, 독일 기사단의 정복 등을 거쳐, 구츠헤르샤프트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1511년에 독일 기사단령은 프로이센 공국으로 되어, 호엔촐레른가(家)가 지배하게 되었고,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지기스문트가 공국을 상속하게 되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동군연합(同君聯合)이 성립되었다. 1657년 대선제후(大選帝侯)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폴란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1701년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왕국이 되었으며, 프리드리히 3세가 프리드리히 1세로서 즉위하였다. 그 이후 급속히 중앙집권화를 추진시켜 관료제를 정비하고 군대를 강화하여 프로이센 형(型)의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구츠헤르이다. 18세기에 들어서자 프리드리히 2세는 국내의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7년 전쟁 등의 외정(外征)을 통하여 슐레지엔, 서프로이센을 병합함으로써 분산적이었던 영토의 통일을 일보진전시켰다. 18세기 말부터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여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였으며, 또한 3회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싸움에서 패배하고 1807년 틸지트 화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패전을 계기로 슈타인, 하르덴베르크에 의한 프로이센 개혁이 단행되었으며, 또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도 성공하였고, 이어 빈 체제하의 반동시대에 돌입하였다. 자유·통일 운동을 억압하다가 1848년의 3월 혁명을 맞았으나, 이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융커적 지배 체제를 다시 강화하였다. 그러나 반면 관세동맹을 주최하여 통일에 일보 전진하였다. 이 무렵부터 독일 통일에 관하여 오스트리아와 다투었으나, 비스마르크가 나타나면서부터는 군비를 강화하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 독일 연방을 해산시키고 북독일 연방을 건설하였다.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하였는데, 이 제국은 반(反)프로이센주의를 억압하여 프로이센주의를 추진시켜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 결과 독일제국은 무너지고 프로이센도 바이마르 공화국 밑에 그 일부가 되었고, 나치스의 출현으로 이 공화국도 소멸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군부 등에 그대로 남아 있던 프로이센적인 요소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가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오스트리아[편집]

Austria

15세기 이래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유지한 중(中)유럽의 강국. 10세기에 마자르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세운 변경(邊境) 백령(伯領)을 기원으로 하여 13세기부터 합스부르크가(家)가 지배했다. 17세기 초 페르디난트 2세(재위 1619

1637)가 신교도를 탄압한 것 때문에 30년전쟁을 일으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알사스 등을 잃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오로지 자국 영토의 통일에 전념하여, 1683년 빈을 포위했던 투르크군의 격퇴에 성공, 1699년 카를로비츠 화약으로 헝가리 영유(領有)를 인정받았다.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동·중유럽 지배가 확립되었다.

스위스의 독립[편집]

-獨立

스위스는 15세기 말에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을 하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하여 그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되었다. 스위스인은 13

15세기에 오스트리아와 싸워 13주(州)의 동맹 형태로 독립했다. 16

17세기에는 종교적 항쟁이 격심하게 되어 일시 통일이 약화되었으나, 17세기에는 직물업(織物業), 시계 제조, 보석 세공 등의 새로운 공업이 발달하였다. 또 스위스 농민병(農民兵)은 유럽에서 높이 평가되어 가끔 여러 나라의 용병(傭兵)이 됐고, 30년전쟁에서도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