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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3국의 합동과 폴란드〔槪說〕[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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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에 걸쳐서 노르만인에 의해 건국된 북유럽 3국(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은 독일 기사단이나 한자 동맹의 진출과 대항하면서 발전했다. 그 후 덴마크의 발전이 눈부시고 1397년에는 칼마르 동맹을 맺어 덴마크를 중심으로 북유럽 3국의 연합 왕국이 형성되었다. 이 연합 왕국은 1523년 스웨덴이 분리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폴란드는 10세기경 국가적 통일을 지향하여 11세기 초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왕국으로 공인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을 받아 발전이 늦어졌다.

13세기에는 몽골인의 침입을 받아 국토는 황폐화되고 더욱이 독일인의 동방 식민의 결과 세력은 현저히 후퇴했다. 그러나 1386년 야겔로 왕조(1386

1572) 아래서 리두아니아 대후국(大侯國)과 연합하고부터는 독일인의 동진(東進)에 대항하면서 약 200년간 동유럽의 강국으로서 번영했다.

칼마르 동맹(덴마크 연합왕국)[편집]

-同盟(-聯合王國)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의 국가연합.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의 왕비 마르그레테는 그녀의 부왕인 발데마르 4세와 그녀의 남편 호콘의 사후, 그 아들 올라프에게 덴마크와 노르웨이 양국의 왕을 겸하게 했으나, 실권은 그녀가 장악하여 실질적인 양국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마르그레테는 스웨덴 왕 알베르트에게 불만을 품은 반란군과 손을 잡아 동(同)왕을 격파하고, 올라프의 사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른 에리크 7세를 스웨덴 왕위에 추대하였다(1389). 이어 1397년에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 시(市)에서 3국의 귀족회의를 개최하고, 3국의 연합을 결의하게 했다. 이에 칼마르 동맹이 성립되어 유럽 최대의 왕국이 수립되었다. 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잡고, 나머지 국가는 그 종속적 지위에 놓여졌다. 15세기 중엽부터 이에 대해 불만이던 스웨덴에 독립의 기운이 일어나 연합은 약체화되고, 구스타프 바사(구스타프 1세)가 이끄는 반란군이 크리스티안 2세를 격파하여, 1523년 독립을 달성하고 동맹은 해체되었다.

에리크 7세[편집]

-世 Erik Ⅶ (1382?∼1459)

노르웨이 왕(1389∼1442). 덴마크, 스웨덴 왕(1396∼1439). 스웨덴 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의 아들. 부친의 이모 마르그레테에 의하여 노르웨이 왕이 된 후, 덴마크, 스웨덴 왕위에도 추대되었다. 1397년 칼마르의 삼국연합의 군주가 되었으나 실권은 마르그레테가 장악하였다. 1412년 마르그레테의 사후, 정권을 잡았으나 3국을 장악할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한자 동맹과 싸워 패배함으로써 스웨덴, 노르웨이에 내란을 초래하여 각국에서 폐위되었다.

칼마르 전쟁[편집]

-戰爭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1611∼1613, 1643∼1645).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30년 전쟁 때도 프로테스탄트 군에 참가했는데, 한편 스웨덴과도 발트 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제1회 전쟁 때는 승부가 나지 않았으나, 제2회 전쟁에서는 스웨덴이 승리했기 때문에 덴마크는 영토의 일부를 상실하였다.

덴마크 왕국[편집]

-王國 Denmark

유틀란트 반도(半島)에 위치하고 있는 왕국(王國). 기원전 2000년경부터 게르만인의 일파인 북게르만이 거주하였으며, 8∼9세기경에는 통일적인 왕권(王權)이 성립되었다. 그 무렵 주민의 일부는 데인인(人)으로 잉글랜드에 침입 이동하였다. 11세기에 카누트 대왕(大王)은 한때 영국, 노르웨이를 지배하여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였으나, 그의 사후(死後) 와해되었다. 1397년 마르그레테는 칼마르 동맹(同盟)을 성립시켜 사실상 스웨덴, 노르웨이 양국도 지배하였는데, 1523년 스웨덴은 독립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세 말기 한자동맹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근세에 들어와서 그 동맹의 특권을 배제하고, 특히 크리스티안 4세는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발트해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30년전쟁(三十年戰爭)과 북방전쟁(北方戰爭)에 개입하여 영토를 잃고, 다시 나폴레옹 전쟁에 프랑스측으로 참전하여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하였다. 1848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가 일어나 1863년에 양공국(兩公國)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였다. 국내적으로는 1848년 2월혁명(二月革命)의 영향하에 자유주의적 헌법(憲法)이 발포되고,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가 성립되었다. 경제적으로는 1848년부터 농업의 발전이 현저해지고, 1873년 이후 미국, 러시아의 값싼 곡물의 유입으로 한때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곧 낙농업(酪農業)으로의 전환, 협동조합(協同組合)의 발달로 기초가 튼튼해졌다. 1918년 아이슬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유지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침입을 받아 전토(全土)를 점령당하였다가, 전후(戰後)에야 주권(主權)을 회복하였다.

야겔로 왕조(폴란드 왕국)[편집]

-王朝(-王國)

리투아니아 대후(大侯) 야겔로가 세운 폴란드의 왕조(1386

1572). 1386년 리두아니아 대후 야겔로는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폴란드 왕 블라디스라프 2세(재위 1386

1434)라 칭하고 양국은 연합했다. 이 연합은 양국의 독립성을 인정한 다음 공통의 군주를 섬기는 왕조적(王朝的) 연합에 불과하며, 국내에서 소(小)귀족이 독립하여 국가의 통일성은 결여되어 있었으나 독일 기사단을 격파하고 발트해의 출구를 확보하여 15세기의 카시미르 4세(재위 1447

1492) 때에는 최성기를 이룩했다. 최후의 왕 지그문트 2세(재위 1548

1572) 때 양국은 단일(單一)이며 분할되지 않는 국가로서의 방향을 결정했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야겔로 왕조는 단절되고, 이후 폴란드 왕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게 되어 분열을 더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