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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중국과 일본의 변천/명대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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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의 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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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이민족(異民族)의 사슬을 끊고 한민족의 힘으로 중국을 회복하였다. 따라서 그 문화는 민족성을 강하게 가졌다. 그러나 전기(前期)에는 이것이 황제 권력에 의한 복고주의로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거(科擧)의 재개와 관학(官學)으로서의 주자학(朱子學)의 확정이다. 한편 전대(前代)와 같은 문화 교류도 단절되었다. 전제(專制)와 자대(自大)의 문화는 표면적으로는 화려했어도 독창성과 활력이 결여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중기부터 경제적 중심지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식 속에 위축된 구(舊) 문화에 대해서 일정한 한계 속에서도 상당히 강하게 개성을 표면에 드러내었다. 그것은 ‘도시(都市)’의 발생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양명학(陽明學)의 전개는 이와 같은 사회의 진보와 낡은 형식과의 모순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시’의 경제력이야말로 서민의 것이었다. 종래는 일부 사대부(士大夫)층에 독점되었던 문화가 서민 생활에 꽃피게 된 것도 실로 명대 문화의 특징이다.

또한 유·불·도 3교의 융합도 진전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유교를 중심으로 했던 구대의 사대부적 가치 체계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교(名敎)’의 이단자 이지(李贄)에 이르러 최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민중은 구체제에 힘으로써 반항했다. 이지를 낳게 한 저류(底流)는 끊이지 않았고, 거기에 새로운 문화적 창조로 향한 ‘명말 청초의 문화’가 전개된다.

영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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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樂大典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 百科全書). 영락제(永樂帝)는 찬탈자(簒奪者)인 자기에 대한 비판을 금지시키고, 학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 책의 편찬을 해진(解縉) 등에 명령했다. 1408년에 완성, 전권 2만 2877권이나 된다. 그 때까지의 모든 전적(典籍)을 수집하여, 원형 또는 분단하여 운(韻)의 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원본(原本)이 없어진 많은 문헌을 포함한 귀중한 것이나, 근대의 전재(戰災)나 도난으로 산실(散失)이 심하여 세계 각국으로 분산되어 약 3분의 1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사서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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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書大典

1415년 영락제가 호광(胡廣) 등에게 편찬시킨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의 국정 주석서(國定註釋書)로 전 36권이다. 한대 이후의 많은 소주(疏註)에 대해서 통일적 해석을 붙여서 과거 시험에 있어서의 해석의 일원화를 도모했다. 이후 수험의 참고서가 되었다. 단기간에 만들었기 때문에 내용이 빈곤하고 또한 그 원본은 원(元)대의 학자 예원의(倪元毅)의 저서 『사서집석(四書輯釋)』이라고 한다.

오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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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經大典

영락 연간, 호광(胡廣) 등이 칙명에 의해서 작성한 오경의 주석서. 그 목적하는 바는 『사서대케전』과 마찬가지인데 과거에 있어서 경의(經義)의 통일이다. 형식은 당(唐)의 공영달(孔穎達)이 편찬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본뜨고 있다. 해석의 표준은 모두 정이(程?)·주희(朱熹)의 학(程朱의 學)에서 찾았다. 여기에 의해서 사상 통제가 실질화되어 명초 사상계의 저미(低迷)를 초래했다.

대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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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明律

1397년에 반포되어 명·청(明淸)시대의 약 500년간을 통하여 형률(刑律)의 근본(根本)이 된 것. 총 30권. 이전에도 당률(唐律)을 본(本)으로 하여 종종 편찬개정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그 체계가 현실에 맞지 않아 원(元)의 법률서 『원전장(元典章)』의 편목을 따랐다. 행정 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에 따라 율(律)도 6부로 나눈 뒤에 명례(名例)를 더하여 7률(律)로 했다. 그 후 시세의 추이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 1550년 『문형조례(問刑條例)』 249조를 반포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이 대명률은 우리나라를 위시하여 일본·안남(安南)의 법률에 영향을 끼쳐 법률사상 당률(唐律)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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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明學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주관적 실천 철학. 주자(朱子)는 ‘이(理)’를 중시하고 객관적으로 봉건 질서를 합리화했는데, 명조 중기부터 서민층의 대두와 체제 모순의 폭발(농민반란 등)은 형해화(形骸化)돼 버린 주자학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명은 이 가운데서 ‘이’는 선천적으로 사람의 마음 속에 있고(心卽理), 따라서 ‘지(知)’=‘이(理)’의 인식은 ‘행(行)’=‘실천’과 일체불가분이며, ‘격물(格物)’이란 이 ‘지’를 다하여 실천을 바로잡는 일(致良知)이라 말하고 ‘이’=‘체제이념’과 ‘오(吾)’=‘현실’과의 모순을 관념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는 현실의 유교 윤리 그 자체에 비판을 가한 것은 아니나, ‘이’의 주관화=상대화는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 자체를 중시하고, 권위주의적인 예로부터의 유교에 적대하는 양명학 좌파(左派)를 탄생시켰다.

왕수인(왕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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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守仁(王陽明) (1472

1528)

저장(浙江) 위야오(餘姚) 사람, 통칭 양명 선생. 어려서 성인(聖人)을 꿈꾸고 주자학을 배웠으나 ‘물(物)의 이(理)와 나의 마음의 불일치’에 고민하고, 시문·도교·선(禪)에 마음을 두었다. 성격은 강직 다감(剛直多感)하였고, 임협(任俠)·병(兵)을 즐겼다. 28세에 진사 합격, 35세 때 환관 유근(劉瑾)에 반대하여 귀주 용장(貴州龍場)에 역승(驛丞)으로 유적(流謫)되었다. 이 역경 속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본의를 ‘심즉리(心卽理)’라 깨닫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39세에 중앙에 복귀, 1516년 장시(江西)·푸젠(福建)의 순무(巡撫)로서 이 지방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보갑법(保甲法)과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농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의 설은 이(理)를 마음(心)의 수양(修養)에 의해 직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데에 특색이 있어 심학(心學)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설은 번거로운 지식주의(知識主義)에 빠져 있었던 당시의 주자학에 비해서 매우 이해하기 용이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명말(明末)에 가서는 그의 제자들 중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을 희롱하는 일파(一派)가 나오고, 동시에 대담한 체제비판(體制批判)을 행하는 일파도 나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왕간(王艮:心齋)은 양지(良知)를 구비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문하(門下)에 제염인부(製鹽人夫), 초부(樵夫), 도공(陶工), 농민 등 서민을 모아 태주학파(泰州學派)를 형성하고 전통적 권위를 비판했다. 또한 이지(李贄)처럼 인욕(人慾)도 천리(天理)라고 긍정하고, 지식이나 인습(因習)에 물들지 않은 동심(童心)이 곧 진심(眞心)이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교(儒敎)의 권위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인물도 나왔다.

그는 관료로서는 불우했으나 만년에 치량지설(致良知設)을 대성시켜 그가 주장한 양명학은 일세를 풍미했다. 광시(廣西)의 반란 평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서성에서 죽었다.

왕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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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心齋 (1483∼1540)

명대의 유학자. 이름은 간(艮), 자는 여지(汝止), 심재는 호이다. 장쑤성(江蘇省) 사람. 상인으로서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효경』 『대학』 『논어』를 언제나 몸에 지니고 면학하였으며, 1520년 왕양명의 ‘치량지설(致良知設)’에 심취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문하에는 영세농민, 나무꾼 등의 하층민이 많았고 학문을 서민층에 해방하였다. 그는 격물(格物)을 중히 여기고 개인주의적인 안신설(安身設)을 주장하였으나, 후에 그의 파를 따르는 안산농(顔山農)·하심은(何心隱) 등이 유교의 속박적 윤리를 무시하고 농민운동을 일으켜 과격파로 지목되었다.

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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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贄 (1527

1602)

호는 탁오(卓吾), 푸젠 진장현(福建晋江縣) 사람. 윈난 야오안부 지부(雲南姚安府知府)를 55세로 사임한 후 후베이(湖北)에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는데, 격렬한 봉건제 비판의 언동은 지배자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인심 풍속의 혹란(惑亂), 성인 모욕’이란 죄명으로 쫓겼다. 후에 잡혀서 북경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좌파(左派) 양명학 최대의 인물, 인욕(人欲)을 가진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존중하고, ‘동심(童心)’설을 주창하고, 개성의 존중을 역설했다. 남녀 평등을 주장했고 연애소설도 동심의 유로(流露)라 논평했다. 예리한 유교 비판 때문에 그의 저작은 오랫동안 금단(禁斷)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