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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로마의 지중해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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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지중해 진출〔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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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탈리아를 지배한 로마는 그리스인 식민시(植民市)의 편에 서서 예로부터 경쟁 상대인 카르타고와 싸웠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의해서 최초의 해외령(시칠리아섬)을 얻음으로써 로마의 국정(國政)이 크게 변화했다.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몇 번이나 위기에 직면한 제2차 포에니 전쟁(전 218

전 201)을 치르고 난 뒤부터는 본격적인 지중해 진출이 시작된다.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그리스를 보호하에 두어 로마의 위세는 동지중해를 석권했지만 로마의 내부에는 위험한 조건이 쌓이고 있었다. 하나는 전쟁 노예의 유입(流入)과 토지 겸병(兼倂)에 의한 대농장 경영이 진전하여, 로마를 뒷받침하여 왔던 중장보병(重裝步兵:자유농민)이 격감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싸고 지배층 사이에서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사회문제에는 유효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내란을 유발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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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戰爭

카르타고(Carthago)는 페니키아인(라틴어로 포에니人)의 식민시로서 일찍부터 해상 무역이 활발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 경쟁 상대인 그리스인 식민시가 로마와 싸워서 세력을 잃은 이래 지중해 가운데서 제일의 해군국이 되어 시칠리아를 세력하에 두었다. 기원전 261년 시칠리아 시라쿠사시의 반란군이 로마, 카르타고의 양쪽에 원조를 요청했기 때문에 양자는 정면 충돌했다. 로마는 급히 함대를 편성하여 중무장 보병으로 적선을 점령케 하는 새 전법으로 싸웠다. 일진일퇴의 싸움은 기원전 241년 아에가테스 해안의 해전에서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는 시칠리아섬을 속주(屬州)로 하고 지사를 파견했다. 이후 해외 영토는 모두 이 방식을 따랐다. 속주는 전장(戰場)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지사의 권한은 군사, 민사에 걸쳐 대단히 컸다. 더욱이 동료가 없고, 변방 속주의 경우는 임기가 1년에 지나지 않았다. 공화정치의 공직에 관한 대원칙은 해외령의 지배에서부터 무너져 갔다.

한니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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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

로마에 복수를 맹세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Hannibal, 전 247

전 183)은 에스파냐에서 군대를 편성, 기원전 218년에 멀리 이탈리아를 공격했다. 한니발은 연전연승하였고, 이탈리아 각지에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호소했다. 로마는 동맹자의 충실성에 힘을 얻어 항전을 계속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파비우스가 결전을 피하고 한니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에스파냐에서는 대(大)스키피오가 카르타고 세력을 일소하고 계속해서 카르타고 본토에 육박했다. 급히 아프리카에 돌아간 한니발은 자마의 전투에 패하여 다음해인 기원전 201년 강화가 맺어졌다.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은 아무런 원조도 받지 않았으나 책임을 추궁당해서 해외령과 함대를 모두 폐기당하고, 교전권도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도 황폐해졌다. 중소 지주의 몰락, 대토지 소유의 진전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카르타고·마케도니아 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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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滅亡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로마군을 섬멸했을 때 한니발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5세 사이에 로마에 대항하는 동맹이 성립되어 있었다. 이것을 구실삼아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압박하여(전 200 전 196) 그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를 ‘해방’시켰다. 당시 동방의 시리아 왕국(안티오코스 3세)은 마케도니아의 동맹국이면서도 그 고경(苦境)을 이용하여 소아시아, 발칸 방면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우연히 한니발의 망명을 받아들인 사정도 있다). 로마는 안티오코스를 테르모필레에서 격파하고(전 191), 소아시아에 진출했다. 한편, 농업국으로서 부흥한 카르타고를 포위 3년 만에 멸망시켰다(전 146). 카르타고는 이웃 나라 누미디아의 도발에 응해서 로마의 허가 없이 교전했다고 견책받은 것이다. 그 영토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같은 해인 기원전 146년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삼았고, 또한 ‘헬라스의 별’ 코린트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라티푼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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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ifundium

‘광대한 토지’라는 뜻의 라틴어로 고대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도를 말한다. 라티푼디움은 로마의 영토 확장과 영유지에 대한 처분법에 의해 성립·발전했다. 로마는 영토 확장과 함께 점령한 토지를 국유화하였으나, 유력자가 국유지를 점령, 사유화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장기간의 전쟁으로 토양이 황폐해지고, 중소토지 소유농민은 오랜 기간의 종군으로 이농(離農)하게 되어 그들의 사유지가 유력자에게 넘어가 몰락하였고,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평정하면서 노예공급원이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유력자의 토지겸병의 증가로 노예제에 의해 대규모 경영을 하는 대토지소유제가 크게 확대·발전하자,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운동이 발발했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 노예공급원이 줄어들어 노예제에 의한 경영이 실효를 얻지 못하자, 라티 푼디움 경영은 노예제보다는 자유 소작제 형태로 점차 바뀌었다.

로마 공화제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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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和制-危機

예로부터 로마군의 중심은 자비로 출정하는 중무장 보병이었다. 그 모태(母胎)인 중소 지주의 몰락은 군사력의 저하를 의미한다. 사실 기원전 3세기 후반의 누만티아(Numantia) 전쟁(속주 에스파냐의 반란), 시칠리아의 노예 반란으로 로마군의 약체가 명백해졌다. 한편 무산(無産) 시민은 로마에 유입되어 곡물의 배급을 받아서 생활했다. 그들도 시민이며, 민회(民會)에 출석한다. 그 수를 이용하여 민회를 조종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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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弟-改革

기원전 134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전 163

전 132)는 토지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공유지(公有地)의 점유를 1,000유게라로 제한하고, 규정 이상의 점유지를 토지 없는 시민에 분배한다는 것이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중소 지주를 육성할 필요는 지배층도 인정하고 있었으나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민회에 제안한, 그의 전통을 무시한 행위는 호민관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거부권 발동을 초래했다.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면직과 토지법을 민회에 걸어서 성립시켰으나 암살되었다. 10년 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Caius Sem­pronius Gracchus, 전 153

전 121)가 형의 뜻을 이어받았다. 그는 값싼 곡물의 공급으로 무산 시민을, 그리고 속주 아시아의 징세권(徵稅權)으로 기사급(騎士級)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기원전 122년 식민시 건설에 착수했다. 로마인·이탈리아인을 옛 카르타고에 입식(入植)시키는 안이 인정되어 가이우스는 준비를 위해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반대파인 호민관 드루수스가 유리한 대안을 제출하여 민회를 선동했다. 귀국한 가이우스는 로마에서 암살당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분배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으나 기원전 111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대토지 소유는 계속되고 정세는 불안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