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진의 중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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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중국 통일〔槪說〕[편집]

기원전 238년 진왕(秦王)은 즉위 후 10년 만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정치에 임하게 되었다. 진(秦)은 이미 효공(孝公) 이래의 부국강병책이 열매를 맺어, 전국(戰國)의 열강 7개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다. 이 충실한 국력을 배경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동방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적대하는 6국의 정복에 나섰다. 진은 강대한 군대와 교묘한 외교술(外交術)이나, 밀정에 의한 열국의 이간공작(離間工作) 등에 의해서 우선 기원전 230년에는 정면(正面)의 적인 동시에 중원(中原)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韓)을 멸망시켜서 동방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어서 북으로 진격하여 조(趙), 연(燕)을 정복하고, 또한 동쪽의 위(魏), 남쪽의 초(楚)를 넘어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강국 제(齊)를 기원전 221년에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위업을 완성했다.진왕은 이사(李斯)를 발탁하고 통일국가의 기초를 굳게 다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단행했다. 이사는 법가사상을 신봉하는 정치가였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가의 정치는 상앙(商?) 이래의 진 나라의 전통이요, 이것은 또한 통일국가의 완성에 의해서 타고난 자신(自信)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천하를 지배하려고 한 진왕의 심정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왕이 이사를 발탁한 것은 신생의 통일국가 통치의 기본방침을 명확히 내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왕조는 결과적으로는 단명으로 멸망했으나, 동부 아시아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재빨리 민족적 통일을 달성하여 중국 문화의 진보 발전에 기여하였다.진왕(秦王)은 왕의 칭호를 폐지, 황제(皇帝)라 자칭하고, 황제 전용어를 만들어서 군주의 권위를 높였다. 이 제(帝)라는 말은 본래는 하늘의 신으로서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신(最高神)을 의미하고 있었다. 또한 황(皇)은 ‘빛나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지상의 왕인 진왕이 왕의 칭호를 고쳐서 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은 세계는 물론이요 전우주를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강한 자부의 표명이요, 또한 군주(君主)라는 사람의 성격의 표명이었다. 진왕은 또한 지배자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군주의 사후에 업적에 비추어 호(號)가 추증되는 시(諡)의 제도를 폐지하고, 초대(初代)는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고, 이하 2세도 황제(皇帝), 3세도 황제라 하여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영원히 전해 내려갈 것임을 선언했다. 이리하여 진왕은 초대의 황제가 되고, 사후에 시황제라고 일컫게 되었다.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으로서 종래와 같이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봉지(封地)를 내주어 자치(自治)를 인정하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이것을 지방 행정의 단위로 삼았다. 진(秦)에서는 상앙 이래 현제(縣制)를 시행하고, 또한 새로운 정복지에는 군(郡)을 두어 직할지로 삼고 있었지만, 전국 규모로 획일적 군현제가 시행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그와 동시에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우선 중앙에는 행정, 군사, 감찰의 최고 책임자로서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두고, 그 밑에는 사법(司法)의 정위(廷尉), 국가 재정을 맡는 치속내사(治粟內史), 제실(帝室)의 재정을 맡는 소부(少府), 궁전 경비를 맡는 낭중령(郎中令), 궁문 경비를 맡는 위위(衛尉), 외교를 맡는 전객(典客), 종실관계의 종백(宗伯), 종묘(宗廟)의 태상(太常), 거마(車馬)를 맡는 태복(太僕) 등의 9관(九官)을 배치하여 서무(庶務)를 통할했다.한편, 지방의 군(郡)에서도 중앙을 본따 장관(長官)에는 수(守),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 감찰관으로는 감(監), 현에는 장관으로서 영(令),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가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어 통치에 임했다. 이리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정연한 행정조직을 만들어, 황제의 명령이 그대로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이 진 나라의 행정조직은 다음의 한(漢)나라에 계승되어 나중에는 많은 변화가 가해졌지만, 중국에 있어서의 통치의 기본적인 조직으로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랫동안 천하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戰國)의 각국에서는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고, 저마다 독자적인 문자나 계량의 단위, 화폐 등이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운영의 필요성에 의한 군현제의 전국 실시에 따라 각종의 통일이 시행되었다. 문자(文字)는 이사(李斯)가 고안했다고 하는 소전(小篆)으로 통일되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정하게 정하며, 화폐는 포전(布錢)이나 도전(刀錢) 등을 폐지하고 진(秦)의 원형방공(圓形方孔)의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했다. 또한 도로망(道路網)의 전국적인 정비를 시행하여 마차의 수레바퀴의 폭까지 동일규격으로 고쳤다. 역시 이 도로망은 치도(馳道)라고 불리면서 시황제의 순행용(巡幸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방과의 연락용 외에 비상시에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키는 군용 도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사상의 통제도 엄격하여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자(儒者)를 생매장하였고, 정치에 유해하다고 인정된 서적을 불태워버렸다. 이것이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대외적으로는 북쪽의 흉노를 치고 춘추 이래의 만리장성을 보수하여 북변의 방비를 강화하고 남쪽은 화남(華南)에서부터 지금의 베트남 북부까지를 영유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빈번한 원정과 장성(長城), 궁전, 능의 수축 등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을 괴롭혔으며, 또한 개혁도 급격했기 때문에 백성의 불만은 차츰 높아졌다. 기원전 210년 순행(巡幸) 도중 황제가 급사하자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亂)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진나라는 통일 후 불과 15년에 멸망했다.

시황제[편집]

始皇帝 (전 259

전 210, 재위 전 221

전 210)기원전 221년은 오랜 세월에 걸친 분열·항쟁에 종지부를 찍고 일국이 중국 전토를 지배하게 되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국가가 탄생한 기념할 만한 해이다. 이 대사업을 성취한 사람은 진나라의 효공(孝公)으로부터 헤아려 6대째인 진왕(秦王) 정(政), 훗날의 시황제(始皇帝)이다. 진왕 정은 기원전 259년에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즉위하였다. 법가(法家)의 입장에 선 이사(李斯)를 재상에 명하고, 기원전 221년 전국을 통일하여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했다. 중앙에 재상(행정)·대위(大尉, 군사)·어사(御史, 감찰)의 3관(官)을 두어 황제에 직속시켰다.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로 전해지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칭호를 합쳐서 황제라고 칭하고 짐(朕)·폐하(陛下)·조서(詔書) 등의 황제 전용어를 만들었다.시황제는 때때로 폭군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역사상 많은 인민을 징발하여 만리장성·여산(驪山)의 능(陵)·아방궁 등을 구축하였고, 분서갱유로 사상 탄압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최초의 민족적 통일을 이룩하고 흉노의 침입을 막고 한민족의 국경을 확립하여 통일 왕조의 기초를 구축한 공적은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는 신하가 시호(諡號)를 붙이는 것을 불손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시황제라 호칭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황제라고 칭하였으며, 2대 황제 호해(胡亥) 이후에 최초의 황제를 시황제라고 불렀다.

군현제[편집]

郡縣制

시황제는 전국을 통일하여, 지배하의 전 영역을 모두 군·현의 행정 구역으로 구분했다. 이와 같이 황제를 정점으로 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군현민을 지배하는 지방 제도를 말한다. 춘추시대의 중엽쯤 씨족적 색채가 농후한 읍제(邑制)국가를 단위로 하는 정치 체제, 즉 봉건제도가 차츰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후(諸侯)는 영토 확대를 꾀하여 서로 부국강병에 노력하였다. 대국은 소국을 병합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종래의 지배자였던 제후·경(卿)·대부(大夫)에 대신하여 새로이 등용한 관료에 의한 행정 기구를 정비했다. 군현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진나라이다. 진나라는 동방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자 일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었다(뒤에 48군이 된다). 군에는 군수·군위(軍尉)·군감(軍監)을, 현에는 현령(縣令)·현위·현승(縣丞)을 두어 각각 민정·군사·감찰의 3권을 분장했다.이들 관리는 모두 황제에 의해서 임명되어 세습(世襲)은 인정되지 않고 황제에 의해서 통솔되었다. 여기서 주(周)나라 이래의 봉건제도는 소멸하고 군현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개혁이 급격했기 때문에 황제의 구제후(舊諸侯)·호족(豪族)·상인·농민 등의 심한 반항에 봉착하여 진나라는 단시일에 붕괴되었다. 진나라의 군현제를 계승한 타협적인 제도가 한(漢)나라의 군국제(郡國制)이다.

화폐·문자의 통일[편집]

貨幣·文字-統一

진나라는 화폐와 문자의 통일을 실시하여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에 노력했다. 화폐로서는 종래 포(布)·도(刀)·청동화 등 잡다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것의 사용을 금지하고 중량이 반량(半兩), 원형반공(圓形方孔)의 반량전(反兩錢)을 주조하여 화폐의 통일을 꾀하고, 주조권을 국가가 관장하였다. 이후 반량전은 중국 동전의 기본적인 형태가 되었다. 문자는 진나라에서는 주문(大篆). 전국(戰國)의 여섯 나라에서는 고문(古文)이 사용되었고, 문자의 자체(字體)는 갖가지였다. 진나라는 전국 통일에 성공하자 새 문자의 제정에 착수했다. 이것이 소전(小篆)이다. 소전은 아름다움 자체였으나 실용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 후에 예서(隸書)가 출현했다. 한말(漢末)경 예서에서 해서(楷書)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분서갱유[편집]

焚書坑儒

진나라에서 실시했던 언론 통제 정책이다. 진나라는 군현제도를 채용했으나 유자(儒者) 가운데는 주(周)나라의 봉건제도를 찬미하고 황제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다.황제는 이설(異說)을 탄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 박사관(博士官) 소장의 서적과 의(醫)·약(藥)·복서(卜筮)·농업 서적 이외의 민간 소장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 다음해에는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 460여 명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갱유에 대해서는 후세 유학자의 작위(作爲)가 있는 것 같으며,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다.최근 후난성(湖南省)의 장사마왕퇴(長沙馬王堆) 3호묘(三號墓)에서 백서(帛書)인 『노자(老子)』, 『전국책(戰國策)』 외에 천문(天文), 역법(曆法), 오행(五行), 잡점(雜占) 관계의 다수의 서적이 발견되고, 또한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懸) 인차오산(銀雀山)에서 죽간(竹簡)인 『손자병법(孫子兵法)』, 『손빈병법(孫?兵法)』 등의 병법서가 발견되었다. 모두 한(漢)의 문제(文帝)로부터 무제(武帝) 초년까지의 것인데, 이와 같은 서적이 정리되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분서(焚書)가 어느 정도까지 엄중히 실행되었는지 의문이다. 다만 이러한 서적 중에 유교 관계의 서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유가에 대한 탄압이 특히 철저했다는 것만은 추측할 수 있다.

아방궁과 여산릉[편집]

阿房宮-驪山陵

시황제의 토목공사는 단지 장성의 축조에만 그치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아방궁(阿房宮)과 여산릉(驪山陵)의 조영(造營)이다. 시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완성을 보지 못했던 아방궁은 동서 약 7백 미터, 남북 약 1백 20미터에 이르고 당상(堂上)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이 지상(地上)의 궁전이라면, 지하(地下)의 궁전으로서 시황제의 즉위와 동시에 착공하게 된 것이 여산릉이다. 아방궁과 함께 70여만 명의 죄수를 동원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 대분묘(大墳墓)는 높이 76미터, 주위 2천 미터에 달하고, 깊이 파진 묘실(墓室)에는 죽은 후에도 생전과 마찬가지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보(財寶)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의 도구로부터 식량에 이르기까지 쌓여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역시 그 웅대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1대 황제에 이어 2대 황제의 시대에도 조영은 계속되었는데,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 진나라는 멸망했다. 진말의 동란 때 항우(項羽)에 의해서 불태워졌다고 한다. 또한 아방궁이란 이름은 지명을 붙인 가칭(假稱)이며 궁전의 완성을 기다려서 웅장한 궁전에 알맞은 이름이 붙여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만리장성[편집]

萬里長城

북방 유목민족의 중국 침입을 막고 황제 지배의 북쪽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중국 북변에 건조된 장성이다. 동아시아의 세계에서는 예로부터 중국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대립이 빈번히 되풀이되어 왔는데,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국의 역사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몽골지방의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족은 중국 농경지대에 침입하여 종종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의 문화는 일반적으로는 지극히 낮은 것이었으나, 그들의 일부는 일찍부터 흑해(黑海) 방면에서 발달한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했고, 용감한 군대는 금속무기로 무장한 기마대(騎馬隊)로 조직되어 종종 남방에 있는 중국의 농경지대에 침입했다. 이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제(齊)나라가 시초가 되어 전국제후(戰國諸侯)들도 앞을 다투어 국경에 장성을 구축했다. 전국시대에 흉노의 침입으로 고통을 당한 것은 북방에 자리잡은 진(秦), 조(趙), 연(燕) 등의 여러 나라인데, 각국에서는 저마다 북변(北邊)에 장성을 쌓아 기마(騎馬)의 침입을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통일국가인 진나라는 종래의 장성에도 서쪽은 간쑤(甘肅)에서부터 동쪽은 랴오둥(遼東)에 이르는 소위 만리장성을 구축했다. 한대(漢代)에 서쪽은 옥문관(玉門關)까지 연장되었는데 당시의 장성은 오늘날의 것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고, 흙과 대와 나무로 축조된 낮은 토성(土城)이었다. 현존하는 장성은 명대(明代)인 15, 16세기경까지에 완성된 것으로 외벽은 벽돌로 만들어져서 극히 견고하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종래의 장성의 보수·증축에 임하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 수백 년 전의 이 공사가 얼마나 대규모의 것이었는지, 또한 거기에 들어간 노동력과 비용이 얼마나 막대한 것이었는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중국민족과 북방민족을 사이에 둔 만리의 장성이야말로 중국민족의 발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눈부신 기념물이었고, 그것은 지상(地上)의 절대자로 군림한 시황제 자신의 위대한 상징이기도 했다.

불로장생의 꿈[편집]

不老長生-

중국의 판도가 확립되고 국내도 안정이 되자, 시황제는 각지를 순행(巡幸)했다. 황제의 위력을 인민에게 과시하고, 진제국(秦帝國)의 지배를 철저하게 하고자 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천하 제일의 명산인 타이산리(泰山黎)에서 하늘의 신(神)을 제사지내고, 산기슭인 량후산(梁父山)에서 지신(地神)을 제사지내고, 이른바 봉선(封禪)의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것을 비롯하여 해마다 각 지방을 순행하고, 명산을 찾아가서 자기의 공적을 예찬하는 글을 돌에 새기게 했다. 지금도 전해지는 타이산(泰山)의 비문(碑文)의 일절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황제께서 이곳에 즉위하사 세상의 형세를 정돈하시고 세상의 법을 밝히시니, 신하는 이를 삼가 닦았느니라. 즉위하신 지 26년,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시니, 제후(諸侯)는 모두 신민(臣民)으로서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 없도다. 황제께서 스스로 먼 지방의 백성의 땅을 돌아보시고 이 타이산에 오르사 널리 동편을 끝없이 다 바라보시니라. 수행하는 신하는 황제의 위대하옵신 공적의 자취를 생각하고 근원을 밝히어 삼가 그 공덕을 칭송해 드리노라.’ 엄숙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기양양해 하는 시황제 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그러나 시황제도 신(神)도 아닌 선인(仙人)도 아닌, 결국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이전에는 하루에 1석(石), 즉 3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서류를 결제하는 놀랄 만한 활동을 계속해 온 시황제였으나 만년에 이르자 그도 역시 피로의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더구나 현세에 있어서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해 왔던 것이니만큼 노쇠해 가는 자기의 육체를 의식함에 따라서 생(生)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품게 되었다. 해가 갈수록 그러한 갈망이 더욱더 심해져, 천하의 순행(巡幸)도 어느 틈엔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기원하고 그 비약(秘藥)을 구하려고 하는 순행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시황제의 삶에 대한 집착은 얼마 안가서 진제국으로서는 중대한 결과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