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헬레니즘 제국
헬레니즘 제국〔槪說〕
[편집]알렉산더 대왕의 급사(急死)에 따라 그의 대제국은 삽시간에 대혼란 속에 빠지고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즉 마케도니아의 부장(部將)들은 모두가 놀라운 정력적 야심가들로서, 각기 ‘후계자’라고 주장하여 죽은 왕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3세 아리다이오스, 어릴 때 독약을 먹어서 저능)나 유일한 자식인 알렉산더(4세)의 포섭에 열을 올렸고, 또한 제국의 유토(遺土) 쟁탈을 위해 서로 할거하면서 왕을 자칭하여, 대왕이 죽은 후의 40년 동안은 안정될 줄 모르는 상쟁과 흥망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광대한 알렉산더 제국은 아직도 형성 중이었으며, 그 지배는 그의 뛰어난 통솔력에 의한 것이었던만큼 그가 죽자 혼란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곧 후계자 전쟁이었다. 이 쟁난으로 말미암아 알렉산더 왕통은 덧없이 단절되고, 여러 장수들도 또한 도태되어서, 최후에 남은 것이 안티고노스가(Antigonos 家)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가(Seleucos 家)의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가(Ptolemaeos 家)의 이집트 3왕국이다. 기원전 323년부터 이 확립에 이르는 기원전 281년까지를 ‘후계자(Diadochoi) 전쟁의 시대’라 부른다.세 왕국은 전력을 기울인 무력항쟁으로 지새웠는데 기원전 200년 전후부터 이 항쟁에 로마의 개입이 두드러진다. 로마는 교묘하게 제3자를 조종, 서로 싸우게 하고, 혹은 동맹을 맺고, 혹은 공격하여 차례로 정복해 버렸다(마케도니아 전 168, 시리아 전 63, 이집트 전 30). 세 왕국이 결속해서 로마에 대항했더라면 세계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헬레니즘
[편집]Hellenism
그리스인을 표현하는 본래의 명사 ‘헬레네스’에서의 조어(造語)로서 기원은 신약(그리스화된 유대인:Hellenistai)이다. 보통 그리스도교=헤브라이즘에 대립하여 그리스 문명 전반을 말할 때에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별도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로마의 세계사에의 등극(登極)에 이르기까지 역사 기록이 빠진 300년 간에 대해서 드로이젠(Droysen)이 붙인 명칭이다. 정치사적으로는 기원전 338
기원전 30년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지역 범위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세계를 중심으로, 대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지 전지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를 포함한다. 그리스인이 광대한 오리엔트의 여러 지역을 지배한 결과, 그리스 문화가 인더스강 서쪽에 부식되어 여러 토착문화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각 지역에 양자 융합의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서――특히 사상·종교·예술 등에 현저하다――이 시대의 특색이 되었다. 그러나 뿌리깊은 토착문화는 후반에 차츰 세력을 되찾아서 오히려 헬레니즘 제국(諸國)의 토착화(東方化)가 촉진된다. 그것은 그리스인 지배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편집]-王國 Ptolemaeos
건조한 국토로부터 근년 속속 그리스어 내지 토어(土語)의 파피루스(Papyrus) 문서가 발견되어 많은 양에 달하고 있다. 그 결과 종래에는 가장 미지의 세계였던 이 나라가, 특히 사회·경제 및 민중의 생활 등에 있어서 오늘날에는 세계사상 가장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고대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제왕(諸王)은 파라오 시대 이래의 전통적 사회 체제를 가급적 다치지 않는 방침으로, 현지민의 그리스화 정책을 강행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 질서 위에서 지배를 강화했다. 즉 이집트의 여러 신전 및 제사층(祭司層)의 특권을 인정하고 지배 체제에 협력시키는 한편 지배자와 현지민과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전국토는 완전히 왕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원리를 관철시켰다. 노예는 극히 적었던 반면, 토민(土民)은 세습적으로 토지에 묶인 예농(隸農)으로 하여 전생산을 장악했다. 직물·맥주 양조·기름·향료, 그리고 수출품으로서 첫째인 파피루스 초지(草地)의 제조 등 중요 산업은 전부 국가(王家)의 독점사업이 되었고, 따라서 왕가의 가산적 관료제의 발달은 공전의 규모에 달했다. 국가예산을 확립시키는 ‘징세청부제도’는 후에 로마제국까지 모방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이집트 역사 이래의 국토의 완전한 활용은 헬레니즘 여러 나라 중 최대의 부와 번영을 가져오게 했다. 알렉산드리아 시(市)에 학사원(學士院, Museion)을 건설한 2세 필라델포스의 시대가 왕국의 최성기였다. 토착 신관단(神官團)에 대폭적인 ‘칙혜(勅惠)(유명한 로제타석 비문, 전 196)’를 주어야 했던 5세 에피파네스 때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또한 이집트화(化)의 양상이 현저해진다. 토민 봉기의 빈발, 왕조적 퇴폐, 거기에다 로마로부터의 압도적 외압(外壓)이 가해진다. 이리하여 최후에 클레오파트라(7세 피로파톨)의 비극으로 현란했던 이 왕조도 멸망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편집]Cleopatra (전 69∼전 30, 재위 전 51∼전 30)
이집트의 여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 아버지의 사후(기원전 52) 그 유언에 따라 9세이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하였다. 그녀의 가계는 원래 이집트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 왕통의 혼혈이었으나 높은 교양과 미성(美聲)을 자랑하고, 특히 미녀로서뿐만 아니라 그 지성과 수완으로 이집트의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태양신 라(Ra)의 딸처럼 행세, 이집트인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으며 강대한 로마의 세력 앞에서 기울어져 가는 이집트의 국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한 비극의 제왕이기도 했다.기원전 51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했으나 그는 곧 사망했으며, 궁정 안의 권력다툼으로 한때 동생에게 쫓겨났다. 기원전 48년 이집트에 원정 온 카이사르의 힘을 빌어 동생과 그 일파를 패사(敗死)시키고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그를 따라 로마에 왔는데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되자 기원전 44년 귀국, 그 해 전 남편의 동생과 재혼했다.그후 암살범 브루투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온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배신 행위를 문책코자 그녀를 만났으나 그녀의 유혹에 매혹, 재입국하여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노한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정벌군과 아르메니아에서 싸워 이겼으나 악티온의 해전에서 패전,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그녀는 포로가 되어 로마에 연행되었다.그녀는 틈을 보아 태양신 라의 사자라고 믿어온 독사를 풀어 자살을 감행, 옥타비아누스의 감복을 받아 여왕의 예우로서 안토니우스와 합장되었다. 그녀는 소문처럼 뛰어난 미녀는 아니었으나, 비범한 화술, 풍부한 결단력, 겁을 모르는 용기와 뛰어난 재기 등이 그 미모와 어울려 파란 많은 그녀의 생애와 함께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어왔다.
셀레우코스 왕국
[편집]-王國 Seleukos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일찍부터 이집트를 근거지로 삼았음에 비해서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312년에야 겨우 바빌로니아에서 세력의 기초를 굳혔다. 이 해로써 셀레우코스 조(朝) 기원(紀元)이 시작되며, 그 기년(紀年)은 후에 서 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이어 셀레우코스 왕은 인도 서변(西邊)으로까지 원정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시조(始祖) 찬드라 굽타와 군사협정을 맺었다. 이때 그는 찬드라굽타에게서 코끼리 5백 마리를 선물로 받았으며, 그 뒤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인도의 코끼리를 전쟁에서 사용하게 되었다.그후 셀레우코스 왕은 시리아에서 아나톨리아로 지배 영역을 확대시켰는데, 기원전 281년까지 아나톨리아 북부, 이집트, 팔레스티나를 제외한 옛 페르시아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초기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로서는 이러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3개의 중추지(中樞地)인 아나톨리아의 이오니아, 북 시리아,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이란에 이르는 각 지역 사이에는 산맥이나 사막 등이 있어 지리적으로도 통합하기가 어려우며, 각 지역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고유의 전통을 지닌 원주민(原住民)이 있어 분리(分離)의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리된 이집트에 왕국의 기반을 닦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대조적이었다.이리하여 처음에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모방하여 왕국을 25개에서 30개의 주(州)로 나누고, 각 주의 행정을 맡아 볼 총독(總督)을 두었다. 또한 서 아시아의 전제 군주로서 군림함과 동시에 알렉산더 대왕의 신성왕권(神聖王權)을 모방하여, 제왕 숭배에 의한 절대왕권(絶對王權)의 강화에 힘썼다.이러한 제왕 숭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도 행해졌으며, 헬레니즘 시대부터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현지민의 문화 수준이 높다는 것과 주민 구성의 복잡성은 국토의 경영을 어렵게 했고 지방 행정에는 아케메네스 왕조 이래의 전통적 태수(太守, 사트라프)제를 답습했기 때문에 중앙집권도 확립하기 어려웠다.따라서 일찍부터 왕국 판도는 분해 작용을 일으키고, 소아시아(전 3세기 전기), 박트리아, 파르티아를 잃고, 건국 1세기 후에는 시리아의 북부와 동부까지의 본부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역대 왕은 영내의 그리스화 정책에는 열심이어서 이 정책의 강행은 오히려 유대인 등의 끈진길 반항을 격발시켜(마카베아 전쟁, 전 168
전 141), 소란과 격동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에도 로마의 도전, 내우외환으로 차츰 영역을 잃고 소판도로 전락하여 드디어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한 정복을 자초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