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노르만의 정복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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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의 정복 왕조〔槪說〕[편집]

데인인(Dane 人)은 11세기 전반에 잉글랜드를 지배하게 되는데, 본디 단명(短命)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민족의 지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유럽 중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거의 프랑스화(化)한 노르만인이 잉글랜드 및 남이탈리아에 세운 노르만 왕조이며,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다른 데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통일 왕권이 탄생했다. 한편 이러한 지배를 피할 수 있었던 프랑스에서는 애당초 많은 잉글랜드 영토(領土)를 국내에 안고 고심하였는데, 필리프 2세 때 차차 이것을 탈환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 문제는 본질적으로는 통일 왕권의 취약성과 제후 체제에 있었고, 최종적 해결은 백년전쟁(百年戰爭)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카누트왕[편집]

-王 Canute, Knut (994?

1035)

980년경부터 재개된 데인인의 잉글랜드 침입은 대단히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잉글랜드 왕은 이에 대항하지 못했다. 결국 1013년 덴마크 왕 스웨인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그해 죽었으나 아들 카누트가 재차 침입, 1016년 앵글로색슨의 법에 의해 정식으로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재위 1016

1035). 그는 점령자로서보다 앵글로색슨의 왕으로서 행세했으며,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의 한 사람이었다. 1018년 형인 덴마크 왕의 죽음으로 그 왕위에도 앉고(재위 1018

1035),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도 되어(재위 1028

1035), 하나의 큰 북해(北海)제국을 이룩했으나 그의 죽음과 더불어 북해제국은 와해되고, 잉글랜드의 데인 왕조도 이윽고 멸망하였다.

데인겔트[편집]

Danegeld

991년 잉글랜드 왕 에들레드 2세(968

1016)는 데인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공조(貢租) 비용을 국민에 대한 과세에 의하여 충당하려 했다. 이 과세를 데인겔트라 한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당시에 항시적(恒時的)인 조세 징수(租稅徵收)의 수준에 달하고 있었음을 나타낸 것인데, 데인인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데인겔트는 존속되었다.

노르만 콩케스트[편집]

Norman Conquest

카누트 왕이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웨섹스 왕가의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왕이 되었는데 그는 1066년 사자(嗣子)를 두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웨섹스 귀족인 해롤드가 즉위하자,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에 상륙, 해롤드를 무찌르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이것을 노르만 콩케스트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노르만이란 노르망디의, 거의 프랑스화된 노르만인을 말하며 결코 바이킹은 아니다.

윌리엄 1세(정복왕)[편집]

-世(征服王) William Ⅰ(the Conqu­eror) (1027?

1087, 재위 1066

1087)

제6대 노르망디공(公). 1066년 죽은 에드워드의 모계(母系) 혈통이 있음을 근거로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 노르만 귀족을 이끌고 헤이스팅스의 전투에서 해롤드를 격파하고 각지의 저항을 배제하여 잉글랜드를 통일했다. 그는 앵글로색슨계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노르만계 귀족에게 봉해줌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봉건적 계층제(階層制)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지배계급은 색슨 귀족으로부터 노르만 귀족으로 옮겨졌다. 노르만 국왕 중심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과의 문화교류가 성행되는 등 영국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또한 전국의 토지대장 『돔즈데이 북』을 1086년 완성하고 징세 제도를 정비했다. 그는 강력한 집권적 행정조직을 구축하여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까지 무릅쓰면서 사교, 성직자를 그 통제 밑에 두었다. 그 뒤에 윌리엄 2세에 의해서 계승된 이러한 정책은 잉글랜드의 정치·사회·문화의 프랑스화(化)를 결정적으로 방향짓게 되었다.

노르만 왕조[편집]

-王朝 Norman (1066

1154)

노르망디 공(公) 윌리엄 정복왕의 즉위에서 비롯되는 영국 왕조. 그 뒤 왕위는 윌리엄 2세, 헨리 1세로 계승되었다. 헨리 1세는 그의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했으나, 귀족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블루와 백(伯) 스티븐(정복왕의 손자)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마틸다는 의형(義兄) 글로스터 백(伯) 로버트와 함께 서부 영국을 근거로 스티븐 왕과 대립, 19년간의 내란을 겪은 뒤, 마틸다의 아들 앙주 백(伯) 헨리 2세가 즉위(1154)해서 앙주 왕조를 열어 이에 노르만 왕조는 끝나고, 플랜태저넷 왕조가 대신한다. 정복왕(征服王)은 노르만적 봉건제를 도입(導入)하여 귀족을 지배,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유지했으나, 헨리 1세 시대에 다시 중앙 정부가 전문화(專門化)되고, 주법정(州法廷)에 중앙에서 임명한 사법관을 두어, 왕의 순회재판(巡廻裁判)이 행해지는 등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 뒤 스티븐 시대의 내란에 의해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왔으나, 앙주 백(伯) 헨리의 즉위로 다시 봉건 왕정의 질서가 회복되었다.노르만 왕조의 왕들은 외국 출신자이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잉글랜드 왕으로서 행동하고 100년 후에는 노르만인과 색슨인의 구별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앵글로색슨인의 언어(Old Engligh)와 데인로에 정착한 데인인의 북유럽어에 대해서 노르만인이 가져온 언어는 프랑스어였으나, 마침내 여기서 행정·재판 용어에 어느 정도의 프랑스어를 남기면서 문법적으로는 앵글로색슨어에 의한 영어가 성장하게 되었다.

헨리 2세[편집]

-世 Henry Ⅱ (1133

1189, 재위 1154

1189)노르만 왕조는 모계(母系) 혈통에 의하여 프랑스의 앙주 백(伯) 앙리가 이어받았다. 그는 헨리 2세라 하여 플랜태저넷 왕조(王朝)를 세웠다. 그는 혼인에 의하여 아키타니아를 추가하여 앙주 백령(伯領)인 앙주와 멘 지방과 함께 프랑스 내에 있으면서도 프랑스 왕보다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만 기사(騎士)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에 봉토(封土)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랐으며, 아키타니아나 멘, 앙주와 잉글랜드 사이에는 혼인에 의한 우연(偶然) 이외의 결합 필연성은 없어서 차차 프랑스 내의 영토는 잉글랜드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헨리 2세는 대외적으로는 대륙 봉토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사단을 벌이고, 한편 혈연관계가 있는 하인리히 사자후(獅子侯)와 결탁하여 프리드리히 1세와도 적대했다. 대내적으로는 가령(家領)을 확대하여 자립하려는 유력한 봉건 제후의 견제에 힘씀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고, 중앙관제의 확립, 지방관습법의 통일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은 암담하여 맏아들 헨리가 일찍 죽고,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 리처드, 셋째 아들 존이 그에게 반역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1189년 실의 속에 죽었다.

나폴리(양시칠리아) 왕국[편집]

-(兩-)王國

노르망디의 노르만인은 11세기 이탈리아에 있어서, 제각기 여러 도시와 동로마 등에 용병(傭兵)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스스로 봉건 영주가 되고, 로베르토 기스카르드(1015?

1085)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남이탈리아를 봉토(封土)로 받았으며, 로저 2세는 시칠리아섬의 사라센인을 구축(驅逐)하여 이 섬을 점령, 남이탈리아와 합쳐서 양시칠리아 왕국(1130

1194)을 건설하고 아라비아, 이탈리아, 노르만의 유니크한 혼합 문화를 낳았다.

필리프 2세[편집]

-世 Philippe Auguste Ⅱ (1165

1223, 재위 1175

1223)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아들. 그의 치세는 카페 왕가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영국의 플랫태저넷 왕조와 대립했는데, 처음에 헨리 2세와 다투고, 그후 제3차 십자군에 함께 참여했던 리처드 1세와 결렬, 그가 전사한 뒤 존 왕(리처드의 동생)을 프랑스의 귀족 법정으로 소환했으나 불응하여 궐석재판에 의하여 노르망디, 메인, 앙주, 브르타뉴, 투렌 등의 봉토(封土) 몰수를 선언하고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1204).또한 부빈 싸움 때는 황제와 함께 플랑드르 백(伯)의 연합군을 격파했으며(1214), 또한 알비즈와 십자군을 보냄으로써 남(南)프랑스에 왕권을 신장하였다. 특히 왕령의 사법행정기구에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는데, 바이라고 하는 행정관을 배치하여 지방관료조직을 형성했다. 중앙에서도 처음으로 전문적인 법률가를 채용하고 상소(上訴)의 길을 확립함으로써, 왕실법정의 권위를 높여 뒤의 파리 고등법원의 기초를 세웠다.

플랜태저넷 왕조[편집]

-王朝 Plantagenet

영국의 한 왕조. 앙주 왕가의 별칭. 시조 헨리 2세의 부친 제프리 백(伯)이 항시 투구에 금작화의 가지(planta genista)를 꽂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을 포함한 대영토를 지배하여 국내에서는 일련의 행정(行政)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으나, 그 후 왕의 전제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존왕은 실정(失政)을 거듭하여 대륙의 영토를 잃었고, 귀족의 반항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하였다.헨리 3세 때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에 의해 봉건사회를 정비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 후인 만년에 이르러 왕권이 실추되었는데, 반면 시민계층·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된다. 특히 1381년의 농민반란은 그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