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신성 로마 제국의 발전과 이탈리아 지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성 로마 제국의 발전과 이탈리아 지배〔槪說〕[편집]

962년 오토 대제(大帝)의 로마 대관(戴冠)으로 성립한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의 세속적 제권(帝權)을 보편적인 그리스도교적 제권에까지 높여 정당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황제의 정책은 황제로 하여금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심화시켜, 이탈리아에 대한 간섭을 촉구하게 하였다.이리하여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는 황제권과 교황권의 두 중심을 가진 중세 유럽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듯하면서 양자의 대립 항쟁의 역사까지도 전개하고 있다.1024년 콘라트 2세의 즉위에서 시작되는 잘리에르(프랑켄) 왕조 아래서 황제의 교회 정책은 이 현실정치적 정책 밑에서 퇴폐한 교회의 숙정(肅正)을 도모하려는 로마 교황과의 대립을 낳는다. 즉 하인리히(헨리)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성직 서임권(敍任權) 투쟁이다. 이 싸움은 카노사의 굴욕을 거쳐서 황제가 교황을 살레르노에서 분사(憤死)케 한다(1085). 그러나 국내 상급 귀족의 반란에 패하여 하인리히 5세 시대에 보름스의 협정으로 종결됐다. 이 사건이 독일에 끼친 영향은 컸다. 오토 대제(大帝)의 체제는 무너지고 말하자면 카를 대제 이래의 혹은 동로마적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이념이 부정되었다고도 한다.황제는 세속적 특권 수여의 권리에 의하여 사교를 봉건법적(封建法的)으로 국제(國制) 속에 편입하게 된다. 즉 사교도 또한 제후와 함께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국왕적 국제(國王的國制)’에서 ‘제후제적 국제(諸侯制的國制)’로의 이행(移行)을 예고했다고 하겠다.서임권 투쟁에 의하여 동요한 제국의 재흥(再興)을 기도한 것은 호엔슈타우펜(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이다. 그는 이탈리아 및 독일 국내의 왕령(王領)을 황제의 가산제적(家産制的) 관료인 제국 미니스테리알렌에 의해서 경영하고 황제권의 실질적 기반을 확립하려 했다. 이 정책은 국내의 제후 세력과 대립, 특히 벨프가(家)의 하인리히(헨리) 사자공(獅子公)과 충돌했다. 1180년 사직공은 성실 의무 위반이란 이유로 실각했다. 그는 제국 제후에 대하여 황제권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 국가 체제를 만들어 내려고 했으나 좌절됐다. 그는 이탈리아 정책을 강화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혼인 정책에 의해서 취득했다. 그러나 여기를 거점으로 하여 제국의 형성을 기도한 하인리히 6세(1165

1197)는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황제권 확립 기회가 없어지고, 제국 제후의 분립적(分立的) 지배 체제가 진행된다.

잘리에르 왕조[편집]

-王朝 Salier

독일 국왕 및 신성 로마 황제를 지낸 왕가. 작센 왕조의 단절로 프랑켄 공국(公國)의 콘라트 2세가 선립(選立)되면서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프랑켄 왕조라고도 한다. 콘라트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에 두고, 부르군트를 병합하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유력주교(有力主敎)의 제국(帝國) 직할화, 하급가신(下級家臣) 봉토(封土)의 세습화에 의해 제후(諸侯)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3세도 보헤미아·헝가리를 정복하고 국내 제후를 억압하여, 그 시대의 제권(帝權)은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념에 공명하여 로마의 3교황을 폐하고 독일인 교황을 세운 일 때문에 도리어, 다음 2대간의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투쟁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하인리히 4세 즉위 얼마 후,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맹렬히 황제와 싸웠으며, 국내의 제후도 대립국왕(對立國王)을 세워 대항하니, 다음 왕인 하인리히 5세 때 보름스협약이 성립되어 겨우 양자의 타협이 성립되었으나, 이로써 이전에는 황제권력의 기둥 역할을 했던 국내 고위 성직자는 황제의 장악 밖으로 물러나, 독일의 지방분권화(地方分權化)가 촉진되게 되었다. 1125년 작센 공(公) 로타르 2세에게 타도되어 단절되었다.

콘라트 2세[편집]

-世 Konrad Ⅱ (990?∼1039, 재위 1024∼1039)

본래는 프랑켄 공국의 슈파이어 백(伯)이지만, 1024년 작센 왕조 단절(斷絶)의 뒤를 이어 독일 왕에 선출되어 잘리에르(프랑켄) 왕조를 창건했다. 1027년 대관(戴冠)하여 폴란드를 지배하에 두고, 부르군트를 합병하였으며(1034), 국내에서는 유력한 사교직(司敎職)을 독일 제국(帝國) 직할로 하여 그의 부하를 배치하고, 또 그 하급 가신(家臣)을 보호하여 그 봉토를 세습하게 함으로써(1037), 국왕에 대항하는 제후(諸侯)의 세력을 억압하여, 다음 대(代)의 하인리히 3세와 더불어 독일 제권(帝權)의 최융성기를 이룩하였다.

하인리히 3세(흑왕)[편집]

-世(黑王) Heinrich Ⅲ (1017∼1056, 재위 1039∼1056)

신성 로마 황제. 잘리에르가(家) 출신. 부친(父親) 콘라트 2세와 더불어 외정(外征)에 힘썼으며, 즉위 후 1040∼1041년에 보헤미아, 1042∼1044년에는 헝가리를 토벌하고, 로트링겐을 평정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의 교회 개혁운동을 지지하고, 1046년 이탈리아를 원정, 교회숙청의 종교회의를 열고, 정립(鼎立) 중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 및 대립 교황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투스 9세를 폐위시키고, 처음으로 독일인 교황 클레멘스 2세를 세워 그의 손으로 대관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듬해에 독일에 돌아와 연이어 다마수스 2세와 레오 9세를 옹립했다. 재래의 국왕 행재소(行在所) 순회의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고슬라르에 굉장한 왕궁을 건설하였다. 중세 독일의 최강의 지배자였다.

하인리히 4세(헨리 4세)[편집]

-世 Heinrich Ⅳ (1050

1106, 재위 1056

1106)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황제권의 확립을 기도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 서임권 투쟁을 한다. 5세 때에 즉위하고 모후(母后) 아그네스가 섭정했다. 어릴 때 브레멘의 대사교 아다르베르트 등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미니스테리알렌을 이용하여 남(南)작센과 튀링겐에 왕권을 확대했으며(고스랄에 궁정을 조영), 1070

1075년 작센의 자유인(自由人)·귀족의 반란을 진압했다.전후, 왕권 회복에 불만인 제후의 반감을 이용한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권확장책(敎權擴張策)과 충돌하여,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투쟁에 휩쓸려 들어갔으나, 카노사의 굴욕을 견디어 위기를 타개했다. 귀국 후 시민과 농민의 조력으로 반대파 제후를 토평(討平)하고, 이윽고 로마에 진군하여 그레고리우스를 추방, 1084년 클레멘스 3세를 옹립하여 황제관을 받고, 1103년에는 ‘신의 평화’ 운동의 이념을 계승한 최초의 제국 평화령(平和令)을 공포하였다. 1106년 상층 귀족들과 결탁한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배반당하여 기구한 운명 속에 죽었다.

하인리히 5세[편집]

-世 Heinrich Ⅴ (1081∼1125, 재위 1106∼1125)

신성 로마 황제. 1098년 독일 국왕. 제후와 짜고 반란을 일으켜 부친 하인리히 4세를 감금했다가, 사후 즉위하였다.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및 로트링겐을 원정하여 동서의 변경을 견고히 하고, 1110년에는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교황 파스칼리스 2세와 협약을 맺고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장악, 제관(帝冠)을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 로마의 종교회의가 이 협약을 무효화시키자, 재차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토스카나를 영유하고 대립 교황을 세웠으나, 성속 제후의 반란의 위협으로 마침내 1122년 새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보름스 협정으로 화해하여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을 일단락지었다. 만년에 네덜란드에 원정하여 프랑스 왕과도 대전하였다. 후계자가 없어 잘리에르가(家)는 단절되었다.

미니스테리알렌[편집]

Ministerialen

가인(家人)·가사(家士) 등으로 번역된다. 원래는 부자유인(不自由人). 중세 독일에서 성속(聖俗)의 유력자가 그들을 각종 가직(家職)이나 병역 근무에 이용하고 있었다. 콘라트 2세 이래 황제는 미니스테리알렌을 가산제적(家産制的) 관료로서 조직적으로 이용, 제국의 직할 행정 지역 확대를 도모했다. 그들의 지위 향상에 따라 부자유성을 탈피하여 13세기에는 기사(騎士) 신분의 근간이 되기에 이르렀다.

콘라트 3세[편집]

-世 Konrad Ⅲ (1093?∼1152, 재위 1138∼1152)

독일 왕. 1116년 프랑켄공(公), 1127년 로타르 3세의 대립왕(對立王)으로 추대되어 왕과 항쟁하였다. 한때 이탈리아 왕이 되기도 하였으나 1138년 로타르의 사후, 정식으로 독일 왕이 되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열었다.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는 하인리히 오만공(傲慢公)과 싸워 그를 추방했지만, 공의 사후 반란이 일어나자, 공의 유자(遺子)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의 작센 공위(公位) 계승을 승인했다. 1147년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더불어 제2회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다시 이탈리아 원정의 길에 올라 도중 병사하였다.

호엔슈타우펜 왕조[편집]

-王朝 Hohenstaufen

슈바벤에서 일어난 신성 로마 제국 왕조. 슈타우펜 왕조라고도 한다. 11세기말 프리드리히 1세가 슈바벤에 축조한 슈타우펜 성(城)에서 유래한 가명(家名). 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도와 그의 부마(駙馬)가 되어, 1096년 슈바벤 공에 임명되었다. 그의 장남 프리드리히[단안공(單眼公)]는 슈바벤을 계승하고, 차남 콘라트는 프랑켄 공이 되었다. 잘리에르 왕조가 단절된 뒤 작센의 로타르 3세를 거쳐 1138년 콘라트 3세가 왕위에 올라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작되는데, 다음의 프리드리히 1세, 하인리히 6세 때에는 벨프가(家)와 싸우면서도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하여 시칠리아 왕위까지도 얻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후에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필리프는 대립국왕 오토 4세에게 패하고, 4년 후 프리드리히 2세가 복위(復位), 다음의 콘라트 4세가 계승했는데 권세가 쇠퇴하고 독일 국내는 영방(領邦) 제후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콘라트 4세(1237∼1254)의 아들 콘라딘은 시칠리아 왕위 회복에 실패하고 1268년에 단절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 (프레데리크 1세)[편집]

-世 Friedrich (1123

1190, 재위 1152

1190)

독일 중세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 1155년 로마에서 대관(戴冠). 신성 제국(Sacr­um lmperium)의 이념 아래 제국의 재건을 기도하여 황제정책(皇帝政策)을 전개했다. 1154년 이후 여러 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원정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제후 세력과 경합하면서 서남 독일 지방, 알사스, 라인팔츠 지방 및 동부의 포크트란트, 에가란트 등 동방 식민지에 제국의 영역 지배 정책을 전개하였다. 그는 또 란트 평화령(1152), 롱카리아 법령(1158)과 같이 입법 활동에 의한 제국 내부의 질서 확립을 꾀했다. 여기에는 황제의 관방장(官房長)이었던 레오나르드 폰 다셀(1120

1167)의 활동도 있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인물과 업적의 평가에 있어서 혹자는 ‘창조적·개혁적’이라 하고, 혹자는 ‘보수적·반동적 시대 착오’라 하여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어진다. 1189년 제3회 십자군으로 출정하여 1190년 소아시아의 사례프강에서 익사했다.

하인리히(사자공)[편집]

-獅子公 Heinrich (1029∼1195, 재위 1142∼1180)

작센공(公). 하인리히 오만공(傲慢公)의 아들. 사자공(獅子公)이라 일컫는다. 공권력(公權力)의 강화에 힘쓰고, 엘베 강을 건너 메클렌부르크 지방의 벤드족을 정벌하고 식민 정책, 도시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뤼베크을 중심으로 발트해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포메른을 복속시켰다. 1154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바이에른 공국을 부여받아 황제에 협력하였으나, 1176년 롬바르디아 도시 공격의 원조를 거부한 까닭으로 1180년에 추방되고 그 영토는 분할되었다. 신황제 하인리히 6세 때에 영국에서 귀국하여 작센의 구령(舊領)의 영유를 허가받았으며, 문예를 장려하였다.

하인리히 6세[편집]

-世 Heinrich Ⅵ (1165∼1197, 재위 1190∼1197)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1169년 독일 왕, 1186년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 왕위에 오르고, 시칠리아 왕녀와 결혼하였다. 부제(父帝)의 사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로마에서 대관(戴冠)하고, 시칠리아 및 남이탈리아의 상속권을 주장하여 나폴리를 포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벨프가(家)를 중심으로 하는 반(反)황제파의 제후와 대립하였으나, 영국왕 리처드 1세를 생포함으로써 화해하고, 다시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1194년 시칠리아 왕위를 획득하였다.하인리히는 보편제국(普遍帝國)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위의 세습화(世襲化)를 도모하고 황제를 국왕의 봉주(封主)로서의 지위로 끌어올려 교황령(敎皇領)을 제국 속에 병합하려고 했으나, 교황과 제후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97년 제3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시칠리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십자군 원정 도상(途上) 급사하였다.

수봉강제[편집]

授封强制 Leihezwang

중세 독일의 봉건법상 규정. 봉주는 복귀된 봉토(封土)를 1년 1일 이내에 재차 수봉(授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작센공(公)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에게 성실 의무 위반이란 이유로 영지(領地)의 몰수를 선고했다(1180). 그러나 몰수된 작센과 바이에른은 제국 제후에게 재수봉(再授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복귀한 제후 봉토(Lehen)를 영국, 프랑스처럼 국왕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제국 제후 신분의 란트(Land) 형성에의 길이 열려 통일적 국가 형성은 좌절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정책[편집]

-政策

오토 대제 이래 역대 황제의 이탈리아 간섭 정책. 여기에 대해서는 독일 역사가들 사이에 비판 논의가 분분했다. 혹자는 그것이 독일 국가 통일을 저해하였다고 하고, 혹자는 이탈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에 의한 황제의 현실적 정책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1세 또한 경제적 동기와 두 시칠리아 왕국·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진출이라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국제 관계에 이끌려 자주 이탈리아에 원정했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1167년 결성)의 반항에 부딪혀 레니야노 싸움에서 패배(1176), 콘스탄츠의 강화(1183)를 맺고 동맹 도시의 자치 특권을 인정한다. 도시는 또한 명목상으로는 황제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했다. 황제는 토스카나, 로마니아 등 중부 이탈리아에 지배권을 확대했다. 후에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거점으로 제권(帝權)의 확립을 기도했으나 13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15

1250)가 죽음으로써 독일 황제의 이탈리아에 대한 지도권은 점점 상실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