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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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槪說〕[편집]

십자군은 11세기의 유럽이 종교적·정치적으로 발효(發酵)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적인 세계정복이 개시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십자군의 발단은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이다. 이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이를 포함하는 제국을 확립하며 정치적·도덕적인 퇴폐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구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도의 의무이며, 가톨릭 교회의 이상이라고 생각했다.11세기 말부터 200년간에 걸쳐 서유럽의 그리스도 교도가 성지 탈환이라는 이름 아래 행한 원정으로 여덟 번 있었다. 11세기에 이슬람 세계의 주인공이 된 셀주크 투르크는 예루살렘에 순례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소아시아에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을 압박했다. 이 때문에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용병 모집을 로마 교황에게 의뢰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우르반 2세)는 그리스 정교(政敎)를 지배하고 전 유럽에 군림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십자군(Crusades)이란 형식으로 이에 응했다. 사람들이 종교적 정열을 품고 있음은 확실하였으며, 따라서 영주(領主)는 영토와 전리품을 노리고, 상인은 동지중해의 상권을 획득하고, 농민은 영주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심산으로 참가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주가 소비의 증대와 더불어 주위의 자유 농민을 농노화(農奴化)하고 다시 다른 영주의 영지를 빼앗아 농노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기 때문에 영주 사이의 전쟁, 농민의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봉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대립을 밖으로 빗나가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장기에 걸친 활동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당시 유럽이 ‘지리상의 발견’ 이후와 달라서 계속적이고 조직적인 식민을 할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며, 십자군의 일시적 성공은 다만 이슬람측의 분열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었으므로 통일이 회복되면 십자군 국가의 명맥이 끊어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자군은 교황권의 성쇠, 국왕권의 강화, 상업의 발달 등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십자군이라고 하는 말은 가톨릭 교도가 이단파나 이교도의 박멸을 명목으로 하여 행한 침략 활동을 가리키며 자주 사용된다.

클레르몽의 종교회의[편집]

-宗敎會議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선언한 회의로 1095년 가을 남프랑스의 클레르몽(Clermont)에서 열렸다. 우르바누스 2세는 그 후 시외에 모인 많은 청중을 앞에 놓고 성지(聖地)의 해방, 동방의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지원, 이교도에 대한 성전(聖戰)을 호소하고 아울러 십자군 참가자의 죄를 사(赦)할 것, 그들의 가족이나 재산을 교회가 보호할 것도 약속했다. 우르바누스 2세의 이 권유는 유럽 각지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동안 청중은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입을 모아 부르짖고, 붉은 십자(十字)를 의복에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동시에 동방 세계의 풍요와 부인의 아름다움까지 강조하여 사람들의 야심을 불러일으키고, 유럽 내부의 대립을 밖으로 빠지게 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제1회 십자군[편집]

第一回十字軍

프랑스와 남이탈리아의 제후(諸侯)가 중심이 되어 행해진 것으로 8회에 걸친 십자군 중에서 가장 성공했고, 예루살렘(1099) 등 시리아 연안을 점령하여 네 개의 식민국가를 만들었다.1098년 가을에 십자군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슬람과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 일, 이슬람 측의 반격이 격화된 일, 보에몽과 보두앵이 자기의 영토의 경영에 몰두한 일, 십자군 전사의 정신적 지주였던 교황 특사 아데마르가 죽은 일, 십자군 제후들간에 질시와 반목이 생긴 일 등이 십자군의 운동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성지탈환을 요구하는 일반 십자군 병사가 폭동을 일으켜 이 일시적 공백상태에 에너지를 보전(補塡)함으로써 이듬해 봄에는 다시 십자군을 남쪽으로 향하게 할 수 있었다.이렇게 해서 다시 진격을 개시한 십자군은 피사, 제노바의 함선(艦船)으로부터 물자의 보급을 받으면서 해안을 끼고 진공했다. 이어서 유대 고원(高原)으로 들어가 파티마 왕조 치하의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099년 7월 15일 약탈, 살육을 마주 자행하면서 마침내 성지 예루살렘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예루살렘 왕국[편집]

-王國

제1회 십자군 때에 고드프르와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운 국가. 정식으로는 그의 아우 보드안 이후 ‘왕’이라 칭한다. 시리아에는 이외에도 안티오크 공령(公領)·에데사 백령(伯領)·트리폴리 백령이 만들어져, 예루살렘 왕은 이들 제후와 형식상 봉건적 주종 관계를 맺고 국내에서도 봉건제도를 채용했다. 적은 군사로 영토를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이 국가가 취한 정책은 약한 이슬람교 군주와 짜고 강한 이슬람교 군주에 대항하여 이슬람 교도의 통일을 방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의식은 급속도로 상실되어 계속 이어지는 십자군과 대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도 강력한 이슬람교 군주의 출현에 의하여 파탄되었다. 즉 알레포의 누르 에딘은 에데사를 정복하고 또한 시리아, 이집트를 통일한 살라딘은 예루살렘(1187)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 트리폴리, 안티오크 등 약간의 도시가 남았을 뿐이었다. 후에 제3회 십자군이 악콘을 점령하자 이 곳을 수도로 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이름이 계속 사용됐으나(1191

1291), 이미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베네치아, 제노바는 시리아 여러 도시에 자치 지역을 획득, 동방 무역의 거점으로 하였다.

제2회 십자군[편집]

第二回十字軍

제2회 십자군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트 3세가 참가했는데, 그들은 상호협력은 전혀 생각지 않고 비잔틴 군이나 현지 프랑크 군으로부터의 지원조차 얻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이슬람군과의 싸움을 추진했다. 예루살렘 도착 후에도 그들은 똑같은 전략상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안티오크 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다마스쿠스를 공략했다. 그리고 그 일에 실패한 채 유럽으로 철수했다.

제3회 십자군[편집]

第三回十字軍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일어난 것으로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영국 왕 리처드 1세가 참가한 국왕의 십자군이다. 로마 교황 클레멘스 3세로부터의 요청에 의해서 여기에 참가한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육로로 동로마 제국령으로 들어가 단기간 안에 아나톨리아의 횡단에 성공했다. 그러나 1190년 6월에 소아시아에서 프리드리히는 불행히도 익사하고 말았다.한편,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해로(海路)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들은 아크레의 정복에는 성공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극히 악화되어 마침내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를 남겨 놓은 채 귀국해 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는 1192년 살라딘과의 사이에 휴전협정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제3회 십자군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