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유럽의 중세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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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문화〔槪說〕[편집]

소위 중세 ‘암흑시대’ 설(說)은 그리스·로마 문화와 르네상스 문화의 사이에 끼여 중세 유럽 문화가 부진했다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최근 중세사 연구의 발달 결과 중세 문화에 있어서 고대 로마의 유산인 그리스도교가 발전하여 중추(中樞)를 이루었던 사실이나 동방의 비잔틴·이슬람 양문화가 그리스적 요소를 내포하면서 서유럽 문화와 대립·교류를 전개한 사실 등 중세 유럽 문화의 세계사 속에서의 역할은 새로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 사실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유럽 중세 문화가 계승하여 후세에 전했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했다.메로빙거 왕조(王朝)의 확립은 그리스도교의 수용(受容)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는데, 카롤링거 왕조에 들어와서 카를(찰스) 대제의 카롤링거 르네상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고전 부활을 위한 노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이 시대의 문화를 담당한 사람들이 대부분 성직자들이었다는 것은 그 무렵의 교회나 수도원에서의 교육 활동이나 문화 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유럽 중세의 대학이 교수와 학생의 통일적 조직으로서 생겨나 신학·고전의 연구를 촉진하고 다시 법학·문학·의학 등의 연구도 시작하게 되었다.한편 이미 9세기경부터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의 한 양식(樣式)으로서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보이기 시작하고, 중세 문학의 서광도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사도(騎士道) 이야기나 무훈시로 친숙하게 알려진 소위 중세의 로망티시즘을 보인 문학 작품의 대부분은 12,13세기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제히 개화(開花)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 무렵 안셀무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스콜라 철학은 신앙과 이성, 종교와 정치·사회와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었다.

라틴어[편집]

-語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는 교양인의 언어였으며, 성직자 등 겨우 일부 사람들의 언어였다. 그러나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있어서 중세 라틴어가 확립된 이래 라틴어는 ‘쓰이는 언어’라 하여 중요시되었으며 교회 용어도 라틴어였다. 물론 일반 서민은 라틴어와는 관계가 없었으나 곧이어 로마 문화 색채가 농후하게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프랑스어·에스파냐어와 같은 라틴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언어가 생겨났고, 북방 게르만인 사이에서는 독일어와 영어와 같은 게르만어가 생겨났다.

볼로냐 대학[편집]

-大學

볼로냐(Bologna)는 북이탈리아의 도시로, 로마법의 연구가 이르네리우스 등에 의하여 성행하고, 그 영향을 받아 볼로냐 대학은 1119년에 창립, 특히 법학 연구로 유명했다. 이 대학은 학생수도 많고, 단결과 자치로 유명했으며, 자주 볼로냐시 당국에 대하여 강경한 요구를 내세웠다. 더욱이 이 대학의 법률 연구는 세속 국가의 법제적인 기초를 확립하려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파리 대학[편집]

-大學

프랑스의 파리 대학은 신학부(神學部) 창설자의 이름을 따서 소르본 대학이라고도 불린다. 창립은 1200년으로 되어 있으며 이 해는 교회의 강력한 감독, 사교 교회(司敎敎會)에 부속된 상태에서 독립하여 대학의 자치·독립을 쟁취한 해라고 한다. 일반 교양을 배운 다음, 학생은 배철러라는 칭호를 얻고, 다시 신학·법학·의학 과정을 마치고 마스터가 되었다. 이 대학에서는 신학부가 중심이며, 유럽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 마스터 학위를 받기가 아주 어렵고, 15년 정도 기간이 걸린다.

옥스퍼드 대학[편집]

-大學

옥스퍼드(Oxford)는 런던의 서부 템스강에 연한 유력한 도시였다. 대학은 헨리 2세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파리에 유학하고 있던 교수나 학생이 본국의 지령을 받아서 귀국하고 이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는 바로 이 도시의 역사며 로저 베이컨, 윌리엄 오컴, 위클리프 등이 교수로서 활약했다. 대학에서 국회가 열리기도 하고 시민 혁명 때에는 가끔 학생도 시민측에 서서 저항했다.

안셀무스[편집]

Anselmus (1033/34

1109)

이탈리아 출생으로 노르망디에서 수도사(修道士)가 된 후, 인정을 받아 캔터베리의 대사교가 되었다. 교황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영국 왕의 의향과 세속권력을 지배하려는 교황의 의도 사이에 끼여 안셀무스는 취임 이래 끊임없이 그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자신은 신앙한다”라는 실재론(實在論)의 입장을 취하여 이성(理性)과 신앙(信仰)과의 조화를 탐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스콜라 철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기사도 이야기[편집]

騎士道-

유럽 중세기의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사랑이나 이에 관한 모험이나 용기를 제재(題材)로 한 문학. 무훈시(武勳詩)인 동시에 서사시(敍事詩)인데, 무훈시가 역사 사실에 어느 정도 바탕을 두고 씌어 있음에 대하여, 이것은 다분히 현실을 떠나서 주로 가공(架空)과 몽환(夢幻)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테베 이야기』, 『브르타뉴 이야기』, 프랑스의 크레티앙 드 트로아의 『랑슬로』 등이 유명하다.

아벨라르의 서간[편집]

-書簡

아벨라르는 프랑스의 낭트 부근의 기사 집안에 태어나, 신학·철학 연구와 교수로 일생을 보내고 수많은 논전(論戰)을 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했다. 정결한 인격은 당시 종교계의 일부 부패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런만큼 파리에서의 청강생 에로이즈와의 열렬한 연애는 비판과 방해를 받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제각기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의 왕복 서간은 인간성(人間性)을 노래한 아름다운 문학으로서 유명하다.

음유시인[편집]

吟遊詩人

12,13세기의 프랑스나 독일에 있어서 연애 서정시를 읊으며 다닌 시인들. 프랑스 내에서는 트루바두르, 독일에서는 민네징거라 불리었다. 남프랑스의 랑독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독일에 영향을 주었다. 시인으로서는 프랑스의 기욤 9세, 반다두르, 독일의 디트마르 폰 아이스트,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 발터 폰 데어 포켈바이데 등이 유명하다.

로마네스크 예술[편집]

-藝術 Romanesque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행하여졌던 건축(建築)과 이에 부수되는 조각(彫刻)·회화(繪畵)를 포함하여 로마네스크 예술이라 한다. 이 건축양식은 바실리카 양식에다 비잔틴적 및 이슬람적 전통과 켈트·게르만적 전통의 3방면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유럽 각지에서 볼 수 있다. 여러 양식(樣式)의 교류는 특히 십자군이나 성지순례에 기인하는 바가 크며, 그 전파는 수도회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다. 남유럽에서는 10세기에 초기 로마네스크의 활동이 시작되고, 동방(東方)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나며, 정통의 북유럽 로마네스크와 취향을 달리한다. 바실리카식 건축의 양식을 강하게 풍긴 피사의 성당은 그 예이다. 남프랑스에서는 비잔틴 양식과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식 아치를 받아들인 모사라브 예술의 양식을 출현하게 했다. 전통적 로마네스크 예술은 북유럽에서는 11, 12세기에 사회질서의 회복과 동시에 대두하여 북유럽적 중세양식이 되었다. 평면도(平面圖)는 십자형(十字形)으로서 외부는 장식이 보잘것없고 창은 작았으며, 신의 세계로서의 내부도 두꺼운 벽과 굵은 기둥에 둘러싸여 중후해서 동적인 느낌이 결여된다. 그것은 마치 당시의 강력한 봉건적 고정질서의 중압에 대응하는 것이다. 내부 벽면은 성서 중의 제재(題材)가 벽화로 묘사되었으며, 외부는 장식무늬와 기괴한 금수(禽獸) 외에, 인물조각으로 꾸며졌다. 조각의 출현은 5세기부터 조각의 공백기를 깨뜨리는 것으로 사실을 무시하고 정신내용의 표현을 목표로 했다. 이탈리아의 피사의 성당(聖堂), 영국의 런던 탑(塔) 등이 그 대표적 건축이다.

피사 교회당[편집]

-敎會堂

이탈리아의 피사시(市)에 있다. 아르노강 북쪽 기슭의 구시가에 팔레르모 해전(海戰)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대가람(大伽籃, 1063)·세례당(洗禮堂, 1278)·종탑(鍾塔, 1350) 등으로 되어 있다. 종탑은 피사의 사탑(斜塔)으로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