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 유럽의 성립/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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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의 대이동〔槪說〕[편집]

4세기경부터 6세기경에 걸쳐 게르만 민족 및 관련 여러 민족이 서유럽·남유럽 방면에 이동한 사실을 말하는데, 넓게는 노르만인의 이동도 포함시켜 11세기경까지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이동의 원인으로서는 일반적으로 인구의 증가, 경지의 부족, 타민족의 압박 등을 들고 있으나, 구체적인 대이동의 계기는 훈족의 서진(西進)이며, 게르만 여러 족속은 보다 좋은 기후와 비옥한 땅을 찾아서 당시 방위력이 약화되었던 로마제국으로 대거 침입했다.게르만 민족의 일부(수에비족 등)는 일찍이 기원전 2세기 말 부터 로마 영내에 침입하였는데, 로마제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로마의 장성(長城, 리메스)이나 방위군단에 저지되어 라인강의 선에서 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트족 등은 2세기 후반에 흑해(黑海) 연안 방면에 진출하고 있었으며, 라인강 방면에서도 게르만인은 용병이나 콜로누스(토지를 가진 소작인)로서 영내에 조금씩 침입해 들어갔다. 침입한 게르만 민족은 동게르만·서게르만·북게르만 민족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동게르만 민족에는 반달족·부르군트족·고트족 등이 있으며, 훈족 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아프리카 등의 여러 지방으로 이동했는데, 대부분은 그곳 민족과 동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앵글족·색슨족과 롬바르드족·프랑크족 등이 서게르만 민족으로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각지에서 건국했다. 북게르만 민족은 소위 노르만인으로서 10세기 이후에 남하했다.유럽 각지에 침입한 게르만인의 수는 로마인 등 원주민의 약 3% 이하의 소수였다. 이 때문에 이주한 곳의 원주민에게 문화적으로 동화한다든지 가톨릭 교회와 대립한다든지 하여, 단명(短命)으로 끝나는 부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 이동의 대세로서는 프랑크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정교를 신봉하는 동로마제국에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와 제휴하는 중세 서유럽 세계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게르만족[편집]

-族 Germans

인도 유럽어족의 분파이다. 현재의 덴마크인·스웨덴인·노르웨이인·독일인·네덜란드인·영국인 등의 조상이다. 원주지는 스칸디나비아 남부·유틀란드 반도·북독일에 걸친 지역이며, 청동기 시대의 말기에 동쪽으로는 바이크젤강(비슬라강)에서 서로는 네덜란드 방면에까지 발전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인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동 전의 게르만인을 원시 게르만인이라 부르며 그 시대의 게르만인에 관한 사료(史料)로서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저명하다. 특히 『게르마니아』는 원시 게르만인의 신앙·경제생활(土地制度)이나 정치생활을 기록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키비타스[편집]

Civitas

본디 도시라든가 국가를 의미하는 말(라틴어)이다. 원시 게르만인의 소규모 정치 단위이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50여 개의 키비타스가 입증되고 있다. 키비타스에서는 왕제(王制) 또는 수장(首長) 합의제의 어느 하나가 채용되었는데, 어느 것이든 간에 민회가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키비타스는 파구스라는 단위로 나뉘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다시 훈데르트샤프트로 나뉘어져 있었다. 키비타스가 붕괴하고 부족 왕국으로 변질한 것은 민족 이동 이후이다.

종사제[편집]

從士制 Cefolgschaft

원시 게르만 사회로부터 부족국가 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주종(主從)관계의 제도이다. 이것은 수장(首長)·왕의 종자(從者)로서, 젊은이가 측근에서 주인을 지키며 충성을 다하고 주인은 젊은이에게 무기·말·의식을 지급하여 보호한다는 관계로서 처음에는 청년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대토지 소유의 전개와 함께 종자는 종신적인 것이 되었다. 종사제는 봉건제에 있어서 가사제(家士制) 성립의 중요한 기반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민회[편집]

民會 Concilium

원시 게르만 사회에서의 정치 최고 기관. 무장한 성년 남자 자유민 전체가, 매년 봄의 신월(新月) 또는 만월 때 모여 민회를 개최했다. 개전(開戰)과 강화의 의결, 성인 군인으로서의 자격 부여, 수장과 왕의 선출, 사죄(死罪)의 결정 등이 민회에서 이루어졌다. 참가자는 소란을 피우는 것으로 부결의 뜻을 표하고, 무기를 두드리는 것으로 찬의를 표명했다. 또한 왕과 수장은 집안과 출신이 좋아야 된다는 것을 조건으로 선출하였다.

훈족[편집]

-族 Huns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방에 원주(原住)하였던 투르크계의 목축민족. 중국사상(史上)에 등장하는 흉노와 같은 종족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4세기 초엽에 유럽 방면에 이동을 개시하여 약 반세기 동안 머문 후, 370년경 동고트족의 대부분을 굴복시키고, 이어 서고트족을 압박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의 발단을 만들었다. 아틸라왕 때에는 그 전성기를 이루어 동로마 및 서로마를 압박하고 주변의 게르만 부족을 복속시켜서 카탈라우눔 싸움에 패하기는 했으나, 헝가리를 중심으로 서는 라인강, 남은 다뉴브 강, 북은 스칸디나비아 남부, 동은 이란에 걸치는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아틸라 왕이 죽은 후(453)는 게피드 인(人)의 반란, 판노니아에서의 패전 등으로 대제국은 급속히 해체되고, 훈족은 다뉴브 강 하류로 후퇴하고, 얼마 후에 타민족과 혼혈하여 민족으로서는 멸망하였다. 훈족의 이름은 몽골족과 함께 동방의 위협으로서 서유럽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아틸라 제국[편집]

-帝國

훈족의 왕 아틸라가 지배하고 있었던 국가(433

453)이다. 서쪽으로는 라인강,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에 걸친 대제국으로 한때는 동고트, 게피드, 알라만, 프랑크 등의 여러 민족을 거느리고 강대함을 자랑했다. 아틸라의 사후(死後), 제국은 붕괴하여 단명(短命)으로 끝났다.

아틸라 대왕[편집]

-大王 Attila (406?

453, 재위 434

453)

훈족의 왕으로 434년에 즉위, 결혼 문제로 동로마제국을 협박하여 451년에는 여러 부족을 이끌고 서진(西進)했다.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에 대항하기 위해서 서(西)고트, 부르군트 등의 여러 민족과 동맹을 맺어 아틸라가 포위한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아틸라는 오를레앙에서 후퇴하여 카탈라우눔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452년에 북부 이탈리아를 한때 공략했었으나, 교황(敎皇) 레오 1세에 설득되어 물러가서 다음해 급사했다. 그의 이름은 독일의 「니벨룽겐 이야기」에 ‘에첼’이라고 기록되었고, 아이슬란드 문학 작품 「사가」에는 ‘아트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카탈라우눔의 싸움[편집]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기타의 군과, 서로마·서고트 등 서유럽 제민족의 연합군이 싸운 결전이다. 카탈라우눔(Catalaunum)은 당시의 베르기카 중심의 마른느강에 연한 도시로서 현재의 샬롱(Chlons)시 자리이다. 실제 전장(戰場)은 근처 마울리아크스의 평야로서 ‘마울리아크스 들판의 전쟁’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싸움에서 아틸라는 패배하여 판노이아에 귀환했기 때문에, 이 싸움은 동방민족으로부터 서부 유럽을 지킨 결전으로서 유럽인에 의해서 후세에 높이 평가되었다.

서고트 왕국[편집]

西-王國

서고트족(族)이 415년 로마에서 아키텐을 정식으로 양도받아 건설한 게르만 부족 국가. 카탈라우눔 싸움을 거친 후 에우리히 왕(466∼485) 때에는 거의 전(全) 에스파냐를 정복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인 지주(地主)로부터는 농지의 3분의 2를 몰수하였으며, 한편 법전의 편찬에도 주력하였다. 507년 알라리크 2세가 클로비스와 싸워 패사(敗死)하고 아키텐의 땅을 프랑크족에게 빼앗기자 그의 장인인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는 프로방스를 병합하여 왕국 전체를 그의 후견하에 두었다. 테오도리쿠스의 사후 동로마군의 침입과 내란으로 시달렸으나, 알라리크의 후계자들은 에스파냐를 통일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계 국민과의 융화를 도모, 654년경에는 서고트 법전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711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툴루즈를 본거로 하였던 507년 이전을 톨로사 제국, 에스파냐의 톨레도로 본거를 옮긴 507년 이후를 톨레도 제국이라고 한다.

서고트족[편집]

西-族

게르만 민족의 일파(一派). 타키투스 시대 이래 3세기까지 바이크셀 하류지방으로부터 남방으로 이동한 고트인 중에서 다뉴브 하류 북안에 정착한 부족. 동고트족이 훈족(族)에게 정복되자, 376년 로마령(領) 모에시아로 피난하였다. 아드리아노플 싸움 후 로마의 맹방(盟邦)이 되었으나, 395년 알라리크 왕 때 로마와 대립하고, 그리스 각지를 약탈하면서 이탈리아로 침입, 이어 412년 아타울프의 인솔하에 남(南) 갈리아를 정복하고, 서고트 왕국을 건국, 이어서 에스파냐 북부로 침입하였다.

알라리크[편집]

Alaric (370∼410, 재위 395∼410)

초대 서고트 왕. 다뉴브 강 하류 지방의 출신. 서고트 족장으로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황제가 사망한 후 왕을 칭하고 동로마에 침입을 개시하여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로부터 일리리쿰(아드리아 해 동안 지방)의 총독직을 받았다. 400년 이후 자주 서로마에 침입하여 그 때마다 서로마 재상 스틸리코에 의하여 격퇴되었으나, 408년 그가 죽자 재차 로마에 진격하여, 410년 호노리우스 제(帝)와의 교섭이 결렬되자 마침내 로마 시내로 침입하였다(게르만 추장으로서는 최초). 이어서 곡창(穀倉)인 아프리카로 전진하던 남이탈리아의 코센차에서 수난(水難)으로 급사하였다.

알리리크 2세[편집]

-世 Alaric Ⅱ (?∼507, 재위 484∼507)서고트 왕. 아키텐, 프로방스 지방을 영유하고, 부친 에우리크의 가톨릭 박해 정책을 완화하였으며, 국내의 로마계 백성만을 위한 로마 법원(法源)을 편찬. 506년 ‘알라리크의 적요(摘要)’ 즉 서고트 로마 법전을 발포하였다. 그러나 507년 아리우스파 신앙을 구실로 한 클로비스 휘하의 프랑크군의 침입을 초래하여 패주(敗走) 중 살해되었다.

동고트 왕국[편집]

東-王國

테오도리쿠스가 인솔한 동고트족(族)이 이탈리아에 건설한 왕국. 정주지(定住地) 부근의 로마인 지주로부터 로마의 군주둔제(軍駐屯制)에 따라서 농지의 3분의 1을 몰수(비할양(非割讓) 지주로부터는 수익의 3분의 1을 과세)당했는데, 로마 인구에 대한 동고트 인구의 비중은 2% 또는 그 이하였으므로 양민족의 융화에 힘써 거의 로마 법원(法源)에 유래하는 테오도리쿠스 칙령을 법전으로 편찬하여 로마·게르만풍의 국가로서 전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507년부터 526년까지 서고트 왕국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트인이 믿는 아리우스파 신앙과 로마 가톨릭의 대립을 비롯하여 많은 내부 동요를 완전히 피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테오도리쿠스의 사망 후 곧 왕위 찬탈(簒奪)을 둘러싼 내분(內紛)이 일어나 535년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제(帝)의 간섭을 초래케 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이 북이탈리아를 위협하여 결국 554년에 동로마에 의해 멸망되었다.

동고트족[편집]

東-族

타키투스 시대에 바이크셀 하류(下流)지방에 단일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3세기까지 동남방으로 이동한 고트인(人) 가운데 흑해(黑海) 서북안(西北岸)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일파(一派). 4세기 후반 헤르만리크 밑에서 전성기를 이루고 370년경 동방으로부터 이동한 훈족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아틸라의 죽음에 의하여 훈 제국이 와해되자 독립하여 457년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어서 483년 테오도리쿠스 대왕 아래서 다키아, 모에시아로 옮기고, 488년 이탈리아에 들어가 전(全)반도를 정복, 동고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테오도리쿠스왕[편집]

-王 Theodoricus (456?

526, 재위 474

526)

동고트의 왕. 동로마제국의 위임을 받고 489년에 오도아케르의 군을 공격, 라벤나에서 포위하였고, 493년에 오도아케르를 죽였다. 이후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 판노니아 등을 지배하였고 한때는 서고트 왕국을 지배한 일도 있다. 테오도리쿠스는 로마의 옛 제도를 존중하면서 문화의 보호에도 노력했다. 「철학의 즐거움」을 쓴 보에티우스라는 로마인 철학자도 그에게 보호되었다. 그러나 동고트족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로마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사교(司敎) 요하네스 1세와 대립, 사교와 손잡은 보에티우스 등의 반역으로 처형되었다.

롬바르드족[편집]

-族 Lombards

민족 이동시 게르만의 한 부족. 1세기에는 엘베 강 하류에 있었으나, 2세기 후반에는 다뉴브 강 방면, 5세기 후반에는 하(下)오스트리아로 이동하였다. 500년경 아리우스파(派)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고, 바이에른인(人), 게피드인과 싸우면서 성장했다. 그 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노리쿰, 판노니아 이주(移住)를 허락받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동(東)고트 원정을 배후에서 지지하였다. 그 아들 알보인은 568년 아바르인에게 노리쿰, 판노니아를 양도하고, 이탈리아로 들어가 롬바르드 왕국을 건설하였다. 포강(江) 유역의 소위 롬바르디아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했었으나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大帝)에 의해서 멸망했다.

부르군트 왕국[편집]

-王國 Burgund (443∼534)

게르만 부족 국가의 하나. 군디카르의 손자 군데리크가 패잔(敗殘)의 부르군트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443년 제네바를 중심으로 론, 센 지방에 건설한 국가. 로마 속주민(屬州民)에 대해서는 합법적 점령의 형식을 취하고, 로마 제정(帝政) 말기 이래의 군주둔제(軍駐屯制)를 원용(援用)하여 로마계(系) 지주로부터 경지의 3분의 2, 주택지·삼림·목야지(牧野地)·과수원 2분의 1, 노예 3분의 1을 몰수하였다. 군데리크의 사후에 분할 상속되었는데, 이를 다시 통일시킨 군드버드왕 때에 서고트로부터 프로방스를 빼앗아 최성기를 이루고, 이른바 부르군트 법전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크리스트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로마 속주민과의 융화가 곤란하였다. 군드버드의 아들 지기스문트가 520년경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그 뒤 프랑크족의 잇단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534)

반달족[편집]

-族 Vandals

민족 이동기의 게르만의 한 부족. 5세기 초에 갈리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 다시 북아프리카에 침입,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반달 왕국(429

534)은 동로마제국에 멸망되었다.

앵글로색슨족[편집]

-族 Anglo-Saxons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앵글족과 색슨족의 병칭(倂稱)이다. 그들은 덴마크 제도(諸島)·유틀란드 반도·북독일 방면에서 도래(渡來)하여, 제7왕국 시대를 거쳐서 에그버트왕에 의하여 통일 왕조를 건설했다. 잉글랜드라든가 이스트 앵글리아라든가 하는 명칭은 앵글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또한 웨섹스, 서섹스 등의 명칭은 색슨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지역적·문화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양 부족이 이주 전에 이미 동화되어 한 민족을 형성했다는 설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