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 유럽의 성립/프랑크 왕국의 성립
프랑크 왕국의 성립〔槪說〕
[편집]프랑크족은 라인강 하류 유역에서 차츰 용병과 그 밖의 형태로 로마제국 영내에 침입하여, 5세기에 들어서자 몇 개의 프랑크족 소왕국이 건설되었다. 5세기 말기에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어서 메로빙거 왕조가 군림했다.특히 창시자 클로비스왕은 훈족의 격퇴에 공을 세워 라인강에서 피레네에 이르는 대영토를 수중에 넣었다. 더욱이 동게르만 제족(諸族)과는 달리,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프랑크 왕국 발전의 열쇠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었다. 한편 클로비스는 로마 황제의 관리로서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왕국도 분할 상속제나 왕위의 공동세습제 등에 의해서 분열과 내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후의 카톨링거 왕조의 동향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 프랑크 왕국의 성립은 서유럽 세계의 형성과 그리스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지위 확립, 그리고 봉건제의 성립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족
[편집]-族 Franken
민족 이동기(期) 게르만의 한 부족이다. 크게 살리족·리부아리족·상(上)프랑크족의 3부족으로 나뉘어졌고 각각 군소부족을 포함하고 있었다. 각 부족은 많은 파구스로 갈라졌고, 파구스는 각각 수장(首長)을 가지고 있었다. 용병이나 콜로누스로서 로마 영내에 정착한 사리족의 한 수장 가문에서, 훗날 왕국의 성립을 가져온 메로비스가 탄생했다.
메로빙거 왕조
[편집]-王朝 Merovingian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가(448∼457).
그 이름은 5세기 중엽 살리족(族) 프랑크를 지배한 메로비스에서 유래한다. 메로비스의 손자 클로비스에 의하여 기초가 확립되고, 그 아들 클로타르 1세(511∼561) 때에 거의 갈리아 전체에 걸쳐서 번영했다. 시리아인(人), 유대인 등 오리엔트 상인의 내왕이 많아, 고대적 상업으로부터의 관세(關稅) 수입에 의존하는 로마양식의 관료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게르만 고유의 재산 균분(均分) 상속의 원칙 때문에 왕국은 항상 분열의 위기에 놓여져, 그 후 지중해 상업이 쇠퇴하는 한편 각 분국왕(分國王)들이 서로 싸우자, 대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귀족세력이 대두하여, 클로타르 2세, 다고베르트 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상의 실권은 이들 귀족 중 제일 세력이 강한 분국의 궁제(宮帝)의 손으로 넘어갔다. 분국 아우스트라시아에 이어서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된 카롤링거가(家)의 쿠데타로 751년 단절되었다.
클로비스 1세
[편집]-世 ClovisⅠ(465?
511, 재위 481∼511)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 힐데리히 1세의 아들. 투르네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16세에 즉위했다. 스와송에서 시아그리우스(430경)의 나라를 정복하고
솜(Somme) 강에서 르와르 강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 뒤에 알라만(Allamanni)인 서고트 족을 라인 강변에서 격파하고, 마인 강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지역을 획득, 프랑크 족의 통일을 완성했다. 아내의 감화로 기독교에 개종, 교황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로마문화를
수입했다. 서고트 족을 부이에에서 격파(507), 르와르 강에서 가론 강까지의 서고트 왕국을 획득했다. 수도를 스와송에서 파리로 옮기고, 성(聖) 아포스톨 성당을 건립, 동로마 황제로부터 명예 콘술(Consul)의 칭호를 받았다. 클로비스는 살리족의 관습법을 살리카 법전으로 성문화하였고, 특히 성직자를 등용하여 적극적으로 로마의 행정조직을 도입함으로써 국가통치의 기초를 견고하게 하는 데에도 진력하여, 장차 프랑크 왕국이 발전할 터전을 굳건히 다졌다. 파리에서 사망하였고. 그가 죽은 후 왕국은 게르만의 관습에 따라 네 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살리카 법전
[편집]-法典 Lex Salica
살리족(族) 프랑크의 부족법전(部族法典).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거쳐 고전문화의 세례(洗禮)를 받은 결과 편찬(編纂)된 라틴어의 이른바 만인법(蠻人法)·부족법(部族法) 중의 하나. 다른 게르만의 부족법전에 비해 게르만 고래의 전통이 가장 강하다. 5, 6세기에 성립(클로비스가 죽은 511년 이전)된 것으로, 살리족이 프랑크의 중심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리부아리아 법전이나 프랑크 제국법(帝國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후대의 유럽 제법(諸法)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메로빙거 왕조의 분왕국
[편집]-王朝-分王國
프랑크족 고래의 분할 상속의 원리 및 왕위 공동 세습제의 원리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왕 후부터 이 왕국의 분열과 내분에 의한 국내 혼란과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대토지 소유자(귀족)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국 내에는 메츠, 오를레앙, 파리, 스와송의 4수도가 생기고, 7세기 초의 클로타르 2세 후에는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의 3지역으로 실질상 나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