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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 유럽의 성립/로마 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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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멸망〔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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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정책은, 4세기의 지배자가 이어받아 강화시켰다. 그러나 방대한 관료기구는 부패하여 오직(汚職)이 계속되었고, 군대와 장군은 차츰 ‘만인(蠻人)’에 점유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공인 이래 세속(世俗)권력자인 전주(專主)가 교회 내의 논쟁에 개입하는 새로운 문제가 가중되었다.대토지 소유는 한층 진행되었다. 통화(通貨) 악주(惡鑄)의 결과인 인플레에 시달리고, 무거운 세금과 국가 봉사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신분 고정 정책을 외면하여 유력자의 보호 지배하에 들어갔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은 고트족·반달족·훈족의 침입을 받아 로마인이 아닌 게르만 출신의 재상과 무장(武將)이 제국을 지키는 상태로 멸망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는 오리엔트적 전제지배, 그리스도교의 우월, 그리스 문화의 전통 등 비잔틴제국의 성립 조건이 갖추어졌다.

콘스탄티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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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의 사후 일족간의 피비린내나는 후계 투쟁을 거쳐,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

361)와 3남 콘스탄스(재위 340

350)(西半)의 분할 통치가 실현되었다. 동쪽의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밀고(密告)와 비밀경찰로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페르시아의 공격에 견뎠으나, 서쪽의 콘스탄스는 종교 정책의 실패로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당했다. 콘스탄스는 전통적 제의(祭儀)를 금하여 로마 귀족과 대립하였고, 농민 봉기의 성질을 띤 도나투스파(派)의 운동을 탄압, 민중의 반감을 샀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리아에서 마그넨티우스(재위 350

353)를 패사(敗死)시키고, 부제(副帝) 율리아누스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페르시아 전선으로 돌아왔으나, 율리아누스 반란의 보고를 받고 갈리아로 향하던 도중에 병사했다. 다음의 율리아누스(재위 361

363)는 유명한 반동정치(反動政治)를 실행했다. 전대 이래의 고관을 죽이고 도시와 그 유산자층을 보호하고, 그리스도 교회의 특권을 빼앗고 전통적 다신교(多神敎)의 부흥에 노력했다. 파르티아에도 적극적 공세로 나갔으나, 전사하여 3년간의 치세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콘스탄티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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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ConstantiusⅡ (317∼361, 재위 337 ∼361)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337년 아우구스투스(正帝)가 되어 처음에는 형제인 콘스탄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와 제국통치를 분담 처리하였으나 350년 이후는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사산 조(朝)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와 싸워 큰 타격을 받았다. 제국의 방비를 위하여 갈리아에 파견된 율리아누스가 군대에 의해 정제(正帝)로 옹립되어(360), 이를 토벌하러 가는 도중 죽었다.

율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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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nus (332∼363, 재위 361∼363)

로마 황제. 엄격한 크리스트교적 금욕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리이스 철학을 배우게 되자 점차 크리스크교에서 이반(離反)하더니, 아테네에서 몰락해가던 이교(異敎)의 신자가 되어 신플라톤 철학의 신봉자가 되었다. 357년 갈리아의 알라만족을 토벌하고, 361년 파리에서 군대의 추대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362∼363년 페르시아 원정 중에 사망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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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 Valentinianus

율리아누스의 후계자 요비아누스(재위 363

364)의 급사 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

375)와 그의 아우 발렌스(재위 364

378)가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전자가 서로마, 후자가 동로마). 세 사람은 군대에 의해서 옹립된 전주(專主)로서,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알라만족과 쿠와디족의 침입, 바가우다에의 반란에 고민했으나, 동로마는 더욱 큰 위기를 만났다. 중앙아시아의 훈족이 볼가강(江)을 건너서 서쪽으로 진격하고, 이들에 압박된 고트족은 다뉴브강(江)을 넘어서 제국 내로 이주했다. 6만 명의 고트족은 식량난 때문에 약탈을 시작했고, 378년 진압차 파견된 발렌스 지휘하의 로마군을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전멸시켰다. 두 사람의 전주(專主)는 유력자의 보호지배를 금지하고 부유층의 재산을 몰수하고 제국 재정의 재건에 노력했으나, 관료의 오직(汚職)과 중세(重稅)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고트족의 침입을 환영하는 형편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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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Valentinianus Ⅰ (321∼375, 재위 364 ∼375)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가(家)의 창시자. 그는 군대의 지지를 얻어 요비아누스(Jovianus)의 뒤를 이어, 나라의 반을 갈라 그 동쪽을 아우 발렌스에게 맡기고 자기는 서쪽을 다스렸다. 그는 게르만 민족을 쳐서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정하였다.

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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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s (328∼378, 재위 364∼378)

로마 황제.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즉위하여 사산왕조의 페르시아군과 싸우고, 서고트(西 Goth)족이 훈족에게 쫓겨오자 다뉴브강 남쪽에 이주할 것을 허가해 주었으나 그들이 이를 어기고 트라키아(Thracia)까지 밀려와 그들을 친정(親征)하다가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아리우스파를 믿어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를 억압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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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Valentinianus Ⅱ (371?∼392, 재위 375∼392)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 형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밀라노를 기점으로 로마의 반을 나누어 서쪽을 다스렸는데, 형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막시무스(M.C. Maximus)에게 쫓겨 도망하였다(383). 어머니의 청원을 받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도움을 받아 복위했지만(388), 프랑크의 아르보가스트(Arbogast) 장군에게 피살되었다.

그라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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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tianus (359∼383, 재위 375∼383)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맏아들. 판노니아에서 출생. 부제(父帝)재위 중에 정제(正帝)의 칭호를 받고(367), 아버지 사망 후, 어린 이복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영토를 나누었으나, 실권을 장악, 378년에 알라만인을 크게 격파했다. 기독교 교도로서 밀라노 사교(司敎) 암브로시우스의 감화를 받은 뒤, 로마의 원로원에서 ‘승리의 여신의 제단’을 철거하고, 이교도 의원의 항의를 물리쳤다. 리용에서 군대의 반란을 만나 살해당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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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Theodosius Ⅰ (346

395, 재위 379

395)

발렌티니아누스의 장자 그라티아누스(재위 375

383)는 발렌스의 후계자로 에스파냐 출신의 테오도시우스를 임명했다. 테오도시우스는 고트족을 타협과 책략으로 약화시켜 382년 트라키아 방면에 정주시켜서 자치를 인정했다. 서로마의 그라티아누스도 반달족과 고트족을 판노니아에 프랑크족을 라인강 하류에 정주시켜서 방위를 맡겼다. 383년, 브리타니아 군단이 추대하는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를 죽이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방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재위 383

388)를 격파하고 2세를 서로마의 분치자(分治者)로 삼았는데, 그 후견역인 프랑크인 아르보가스트가 2세를 죽이고 에우게니우스(재위 392

394)를 옹립했다.아르보가스트는 로마 귀족 플라비아누스와 함께 로마의 옛 전통을 부활시켰기 때문에, 에우게니우스와 테오도시우스의 대결은 동로마의 그리스도교와 서로마의 전통적 다신교와의 종교전쟁 성격을 띠었는데 테오도시우스의 압승으로 끝났다. 테오도시우스는 관료의 권한을 증대시켰고 그것은 부패의 확대를 의미했다. 농민들을 유력자의 보호 지배하에 두는 것을 금하고 징세법을 고쳐서 대토지 소유자로부터는 관리가, 일반 자유인으로부터는 평민 보호관이 징수토록 했으나, 중세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가 변경의 방위에 태만했던 것이 서로마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회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앞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전된 바 있는 아리우스파 교의(敎義)의 금지와 아타나시우스파 교의의 승리를 확정시켰고, 391년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교(異敎)를 엄금했으며, 393년에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시켰다. 죽기 직전, 제국을 한 사람의 황제가 통치하는 것에 곤란함을 느껴 제국을 동서로 이분(二分)하여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동제국)와 호노리우스(서제국)에게 분장(分掌)시켰다.

호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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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ius (384∼423, 재위 395∼423)

서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제(帝)의 말자(末子). 부제(父帝)의 사후 그는 스틸리코의 섭정 밑에 서로마 제국을,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다. 처음에는 밀라노에, 후에는(402) 주로 라벤나에 거주하였다. 408년 음모의 혐의로 스틸리코를 처형하였으나 곧 410년 고트왕 알라리크 1세의 침략을 받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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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Valentinianus Ⅲ (419?∼455, 재위 425∼455)

서로마 황제. 숙부인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하여 즉위했으나 인물이 똑똑하지 못하여 어머니(Galla Placidia)가 대치(大治)하였다. 반달족의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게르만 제족(諸族)의 라인·다뉴브강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452년에는 아틸라의 침입을 받았으며, 방종하고 기골(氣骨)이 없는 왕으로서 455년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테오도시우스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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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典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집록(集錄)하고 실시한 법전. 편찬사상(編纂史上)으로는 로마법 대전(大全)의 선구를 이룬다. 형법·회계법·행정법·육군법·종교법·민법을 포함하며, 전전(全典) 16권이다. 이 법전은 동로마 제국은 물론 서로마 제국에서도 실시되었으므로, 그후의 로마의 만족법(蠻族法)에 직접적인 큰 영향을 주었다.

레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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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Leo Ⅰ (400?∼461)

로마 교황(敎皇:440∼461). 고대 말기에 이단(異端)과의 대결을 통하여 로마 교회의 권위를 높였으며, 451년에는 칼케돈 공의회의 교의논쟁(敎義論爭)에서 그 입장의 정통성(正統性)이 확인됨으로써 로마 교황권(敎皇權)의 전(全) 교회에 대한 우위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452년 훈족(族)의 아틸라가 이탈리아에 침입하였을 때 설복하여 평화롭게 퇴각시켰고, 또 455년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도 역시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더욱 높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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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帝國-滅亡

테오도시우스의 사후, 395년에 장자 아르카디우스(동로마 제국, 재위 395

408), 차남 호노리우스(서로마 제국, 재위 395

423)가 제국을 분할 통치한 이래, 제국의 통일은 가고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급속화했다. 로마는 알라리크가 지휘하는 서고트족(410)과 가이세리크왕 휘하의 반달족(495)에 점령되고, 이 동안 서로마 제국을 지킨 것은 ‘게르만 민족’ 출신의 사람(반달인 스틸리코, 서고트인 리키메르 등)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리키메르가 세 사람의 전제군주(마요리아누스·리비우스세베루스, 안테미우스)를 차례로 죽인 후에 네포스가 일어났으나 오레스테스에게 폐위당하고, 다음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오레스테스의 아들)는 476년, 오도아케르(434

493?)에게 페위되어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오도아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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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oacer (434?∼493?)

게르만 출신의 용병대장(傭兵隊長)으로서 이탈리아 왕. 470년경 로마의 용병이 되었다가 이윽고 친위대장이 되었다. 용병대장 리키메르의 반란에 참가하여 472년 로마를 점령하였다. 그후 리키메르가 죽고, 오레스테스가 용병을 지휘하여 황제 네포스를 축출하고 그 아들 로물루스를 옹립하였으나(476), 반란에 참가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 토지의 3분의 1을 분배한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군대는 오도아케르를 지도자로 하여 반기를 들었다. 오도아케르는 이듬해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로물루스를 폐위시켜 상당한 수당을 지불할 것을 약속한 후 군대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고 원로원도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동로마에 대해서는 그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여 478년 동로마 황제 제노로부터 파트리키우스(총독)의 칭호를 받았다. 480년 네포스가 죽자 오도아케르는 명실 공히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후에 동로마의 내정에 간섭, 황제 제노의 뜻을 받은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라벤나에 포위되어 항복(493), 곧 그에게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