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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 유럽의 성립/육조시대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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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시대의 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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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시대는 정치상으로 왕조의 대립과 교대가 심했던 불안한 시대였으나, 문화상으로는 빛나는 특색을 가진 시대였다. 종교상으로는 불교가 많은 계층에 뿌리를 박아 눈부신 전개를 이룩하고, 또한 도교(道敎)가 성립되어 종교로서의 체계가 확립되었으며, 나아가서 문학이나 예술이 유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한대(漢代)는 유교적 정신의 지배가 강하여, 종교나 문학이나 예술은 모두 정치나 도덕에 봉사할 것을 요구당하여, 독자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후한(後漢)말부터 왕조의 지배가 약체화되고, 유교의 권위가 동요하여, 지식인은 유교 명분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의식의 확립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기운이 나타났다. 위·진 시대는 아직 한대의 전통이 존재하면서도 선기운이 양성되고 있었다. 남북조 시대가 되자, 화북(華北)에서는 이민족(異民族)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으나, 이민족은 잔류의 한민족과 함께 전통문화를 지속하면서 강건한 문화를 형성하고, 강남(江南)에서는 화북의 한(漢)민족이 다수 남하하여, 강남의 온아한 풍토에서 자주성이 있는 문학이나 예술을 성립시켰다.

육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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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朝時代

진(秦)·한(漢)시대가 붕괴되고 육조시대가 전개되었는데, 현재의 남경(南京)에 도읍한 왕조가 오(吳)·동진(東晉)·송(宋)·남제(南齊)·양(梁)·진(陳)의 6왕조였기 때문에 육조시대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 육조시대의 명칭은 당(唐)대에 있어서, 문예상의 양식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어, 당시(唐詩)에서 건강(建康)의 영화를 회고했을 때에 사용되었다. 6조시대에 수도의 명칭은 건업(建業, 212

280)·말릉(?陵, 280

282)·건업(建業, 282

313)·건강(建康, 313

606)으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육조시대라고 부를 때, 화북(華北)에 전개되었던 위(魏)·서진(西晉)·북위(北魏)·북제(北齊)·북주(北周)·촉한(蜀漢) 등 각 왕조의 시대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이 시대는 위진 남북조 시대 또는 3국 진 남북조 시대라고도 불린다.

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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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選

남북조시대에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편수(編修)한 시문선집(時文選集). 춘추(春秋)시대로부터 양대까지의 127명의 대표적 문인의 시(詩)·부(賦)·문장 약 800편을 시·부·조(詔)·논(論) 등 39가지로 편수하였다. 시가 가장 많아 전체의 반수를 차지하고, 작자를 시대별로 보면, 진인(晋人)이 가장 많다. 수(隋)로부터 당(唐)에 이르러 주(注)가 작성되었으나, 당의 이선(李善)의 주가 뛰어났다. 처음에 30권, 후에 주석이 추가되어 60권이 되었다. 육조(六朝)문화를 대표하는 책으로, 우리나라 한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과거의 시험과목이 되기도 하였다.

오두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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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斗米道

후한(後漢)말, 패(沛, 江蘇省)의 장릉(張陵)이 촉(蜀)나라에서 창립한 종교 또는 교단(敎團)으로서 태평도(太平道)와 함께 도교(道敎)의 원류(源流)가 된다. 기도로 병을 고치고, 사례로서 쌀 5두(5되 전후)를 받음으로써 오두미도라고 불리었다. 아들인 장형(張衡), 손자인 장노(張魯) 때에 교법과 교단이 정비되었다. 태평도의 영향도 받고 불교의 영향도 인정되며, 단순한 무축적(巫祝的) 기도뿐만 아니라 도덕성과 사회성이 부가되어 성대해져 갔다.

태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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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道

후한(後漢)말 거록(鉅鹿:河北省)의 장각(張角)이 일으킨 종교 또는 교단으로서, 오두미도와 함께 도교의 원류(源流)가 된다. 후한 중기에 우길(于吉)은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바탕으로 태평도라는 민간신앙을 일으켰는데, 장각은 그것을 이어받았다. 질병은 자기의 죄악에 의한 것이라 하고, 죄과(罪過)를 반성시키고, 부수(符水)를 마시게 하고, 주술(呪術)을 하여 질병을 고쳤다고 하며, 사회정세의 불안에 편승하여 중도(衆徒) 10만에 달했다.

불도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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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圖澄 (?

348)

후조(後趙)의 왕 석륵(石勒)·석호(石虎)의 두터운 귀의(歸依)를 받아 많은 절을 세우고 많은 문하생을 양성하여 북방불교의 기초를 만든 명승(名僧)이다. 성은 백(帛)이라 하고 구자(龜玆) 사람인 것 같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문(經文) 수백만 자를 외우고, 글 뜻도 잘 통달했다. 뒤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310년(晉·永嘉 西)에 뤄양(洛陽)에 와서 신이(神異)를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후조(後趙) 석륵의 군사(軍事)와 민정(民情)의 고문이 되어 대화상(大和尙)의 칭호를 받았다. 333년 석륵이 죽은 뒤에 석호(石虎)가 임금이 되어 역시 스승으로 섬기며, 대전에 올라와서 정사에 참여케 하였다. 약 30년 사이에 불도징은 불사(佛寺) 853개를 건립하였고, 문하생은 1만에 가까웠으며, 중국 불교를 확립한 도안(道晏)도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구마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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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摩羅什 Kumrajiva (350

409)

구자(龜玆) 사람으로,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의 초청으로 장안에 와서 중국 불교사상 한 시기를 이루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승(名僧)이다. 부친인 구마라염(鳩摩羅炎)은 인도의 재상집에서 태어났으나, 출가하여 구자(龜玆)에 와서 국사(國師)가 되었고, 왕의 누이와 결혼했다. 습(什, 羅什)은 그의 장남이다. 라습은 카슈미르로 유학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배웠고, 용수계(龍樹系)의 사상을 연구하여 명성이 중국에까지 떨쳤으며, 요흥의 간청을 받아 국사로서 예우를 받았다. 운집한 사문(沙門)이 3천 명이라고 하며, 불전(佛典) 3백여 권을 한역(漢譯)하여, 그의 공적은 당의 현장에 비길 만하다. 그 제자 3천인 가운데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를 습문(什門)의 4철(哲)이라 한다.

둔황 천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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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煌千佛洞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현(敦煌縣) 동남 20㎞, 다취안강(大泉江)에 임한 석굴(石窟)사원으로서,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한다. 20세기 초, 스타인과 페리오 등에 의해서 미술사료나 문헌이 소개되어 주목받았다. 석굴 조영의 개창(開創)은 366년(前秦·建元 2)에 승(僧) 낙준(樂?)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이어 당나라말·송나라초에 최성기를 이루고, 원(元)대에 이르기까지 1천년에 걸쳐 개굴(開窟)·보수가 계속되었다. 이 석굴은 역암(礫岩)을 뚫어서 벽화를 그리고, 소조(塑造)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윈강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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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崗石窟

북위(北魏)의 석굴사원으로서 산시성 다퉁(山西省大同) 서쪽 20㎞ 윈강에 있고, 본래 영암사(靈巖寺), 현재는 석불사라고 부른다. 쌍간강(桑乾江)의 지류 우저우천(武周川)에 의해서 개석(開析)된 사암의 단애(斷崖)에 조영되어, 동서 1㎞, 대소 40관굴(館窟)을 남향으로 뚫었다. 북량을 멸망시킨 북위는 북량 왕가 일족을 비롯한 관민 3만 호(戶)를 장성에 가까운 수도 평성(平城)에 이주시켰다. 이주자 가운데는 승속(僧俗) 불교신도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북량을 병합한 결과 서역 각국으로부터의 불교 전래로(傳來路)가 북위의 수도와 직접 연결되게 되었다. 이것은 태무제의 최초 정치 고문격이었던 재상 최호(最浩)와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호는 청하(淸河) 최씨라는 명문 귀족 출신으로서, 5호의 여러 왕조가 유교를 경시하고 불교에 귀의한 데 대해 분개를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최호는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불교에 대한 대박해를 가하게 했다. 446년, 마침내 전국의 불교 승려를 모두 죽이고 사원이나 불상 및 경전을 모두 파손시키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이때 불교 신자였던 황태자 황(晃)은 이 조칙의 발표를 미루어 승려에게 도피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있었던 4대 폐불(廢佛),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 가운데서 첫 번째 사건이었다. 452년에는 태무제가 환관에게 살해되고 얼마 후 이미 죽은 태자 황의 아들이 새로 황제가 되었다. 그가 곧 문성제(文成帝)이다.문성제는 즉위하자 곧 불교부흥의 조칙을 내렸다. 이에 종교신앙에 불타는 사람들의 불교재흥은 급속적이고도 열광적이었다. 이때 불교재흥의 중심인물이 된 사람은 승려인 담요(曇曜)였다. 그는 원래 북량의 고승으로서 나라가 망하자 평성에 끌려와 있었다. 폐불(廢佛)을 당한 뒤에는 환속승(還俗僧)으로서 산간에 숨었으나, 그동안에도 호법(護法)하는 정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고 부처를 받드는 마음은 갈수록 더욱 두터워져 갔다. 담요가 이룩한 불교 부흥 사업의 하나는 윈강(雲崗)의 석굴사원 조영이었다. 석굴 사원은 인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래되어 둔황에도 조영되어 있었다. 고향인 양주(?州) 가까이에 있는 둔황 석굴 이야기를 들었던 담요는 수도의 서쪽 교외 원강에 석굴사원을 조영하도록 건의했다. 이에 따라 산의 암벽을 파서 석굴 다섯 개를 만들고 석굴마다 큰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이리하여 도무제(道武帝)에서 문성제에 이르는 다섯 황제의 치하를 거치는 동안 거대한 불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석굴사원의 조영은 그 뒤에도 계속 추진되었다. 크고 작은 무수한 불상과 보살상(菩薩像) 가운데는 간다라 양식의 것도 있고 굽타 양식의 것도 있으며, 북위 발흥기의 민족적 기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수도와 지방에서 불교 부흥사업이 진행되고 윈강 석굴이 막 완성될 단계에서, 북위의 수도는 평성에서 뤄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룽먼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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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門石窟

담요가 이와 같은 석굴조영 등 대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문성제의 황후 풍씨(馮氏)가 열렬한 불교신자여서 그녀의 강력한 비호를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성제가 죽은 후 헌문제(獻文帝), 효문제(孝文帝) 등이 천자가 되었으나, 풍태후는 절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북위에서는 삼장제(三長制)라 불리는 촌락제도를 만들고, 일정 면적의 토지를 농민에게 주어 자영농민의 육성을 도모하려 한 균전법(均田法)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연소한 효문제를 대신하여 풍태후가 행한 것이다.490년에 풍태후가 죽자 효문제가 친정(親政)을 행하게 되었다. 그는 철저한 화화정책(華化政策)을 추진하며 스스로 중국의 천자가 되어 중국의 정치양식을 채용하려 했다. 이에 따라 탁발씨의 고유한 부족제도를 파괴하고 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수도를 평성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지나친 화화(華化)정책의 추진으로 마침내 북변의 6진(六鎭)에서 크게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534년에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지고, 얼마후 동위는 고씨(高氏)의 북제(北齊)와, 서위는 우문씨(宇文氏)의 북주(北周)와 각각 대체되었다. 북위의 효문제는 뤄양 천도를 일단락짓자, 그는 새 도읍 뤄양 남쪽, 즉 이수(伊水)가 산골짜기를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곳에 있는 룽먼(龍門)에 새로 석굴 사원을 조영하여 불교 흥륭을 바라는 민중의 여망에 부응하려 했다. 룽먼의 가장 오래된 석굴은 고양동(高陽洞)이라 불리는 것인데, 기원 500년 전후의 명문(銘文)을 가진 불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효문제의 아들 선무제(宣武帝)는 즉위한 이듬해 부모를 위해 두 개의 석굴을 조영했다. 룽먼의 암석은 암질(巖質)이 치밀한 현무암이기 때문에 매우 단단하여 공사는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윈강에서는 불가능했던 유려한 기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조상기(造像記) 등 문자를 새기는 일이 많이 행해지게 되었다. 이 사업은 당대(唐代)에까지 계속되었는데, 윈강과 함께 북위가 후세에 남긴 귀중한 문화재로 되어 있다. 북위의 것은 서산(西山)에 많고 제14굴은 룽먼식(龍門式)의 대표작이다. 당대에 와서 많은 천자(天子)들이 조굴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종(高宗) 때의 봉선사동(奉先寺洞) 대불(大佛)은 저명하며 전형적인 사실 수법에 따랐다.

도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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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成立

도교는 중국 고대의 민간 신앙과 신선설(神仙說)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도 역(易)·음양·오행·복서(卜筮)·무축(巫祝)·도가(道家)·유가(儒家)·참위(讖緯) 등의 제설(諸說)을 첨가하여, 다시 잡다한 방술(方術)이나 주술(呪術)도 결합시켜서, 불교의 조직과 체제에 따라서 종교적 체제로 만든 것이다. 도교 성립의 계기가 된 것은 후한(後漢)말에 장각(張角)이 일으킨 태평도와 장릉(張陵)이 일으킨 오두미도이며 후에 오두미도는 태평도를 흡수하여 천사도(天師道)라고 불리었다. 위(魏)·진(晉) 시대에 들어가자 차츰 귀족층에 침투하였고, 진의 갈홍(葛洪)이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여 신선설을 합리화시켜 도교의 이론화에 기여했다. 동진(東晉)에서 남북조로 되자 신자가 증가하였고, 북조에 있어서는 도사(道士)인 구겸지(寇謙之, 363

446)가 나타나 불교의 의례적(儀禮的) 방면을 도입하여, 북위의 재상 최호(崔浩)와 손을 잡았고, 드디어는 태무제(太武帝)를 움직여서 국가적 종교의 지위에까지 높여서 수도에 천사도장(天師道場)을, 지방에 도단(道壇)을 세우고, 연호를 태평진군(太平眞君)이라 칭하고, 배불(排佛)까지도 단행시켰다. 남조의 송(宋)에서는 육수정(陸修靜), 양(梁)에서는 도홍경(陶弘景)이 나와서, 도교 경전의 정리와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도홍경은 문인으로서 저명했고, 양나라 무제를 섬겼으며, 후에 모산(茅山:句曲山)에 은거하여 모산파의 실질적인 개창자가 되었다. 당(唐)대가 되자 도교는 국가적 보호와 존신(尊信)을 받게 되었다.

제민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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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民要術

중국에 있어서의 현존하는 종합적 농서(農書)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북위(北魏)의 고양(高陽:山東省) 태수(太守) 가사협(賈思?)이 편찬한 것으로서 10권이며, 532

549년경에 이루어졌다. 화북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나라 이후의 곡물·야채·과수 따위의 경종법, 가축 사육법, 술·된장의 양조법 등이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인용서는 약 160종이며 특히 전한(前漢)의 농서인 『범승지서(氾勝之書)』와 후한의 농서인 최식(崔寔)의 『사민월령(四民月令)』이나 남조의 『식경(食經)』 등 유문(遺文)이 중요시되고 있다. 이 책은 영농생활의 실제에 관해서 농경·축산부터 가공·판매·조리에 이르고, 서술은 엄밀하여 동아시아 건지이경농법(乾地犁耕農法)과 그 농경문화의 정식(定式)이다.

죽림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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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林七賢

위·진 시대의 청담가(淸談家)로서 완적(阮籍)·혜강(?康)·산도(山濤)·향수(向秀)·유령(劉伶)·완함(玩咸)·왕융(王戎)의 일곱 사람을 말한다. 완적을 중심으로 한 반(反)예교(禮敎)주의적, 노장(老莊)적인 청담가를 7명 선정한 것으로서, 이 일곱 사람들이 그룹을 만들고 있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멋대로의 행동이나 기행(奇行)을 일삼았으나, 그것은 세속에 대한 저항 정신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공감을 받고 있었다. 죽림이란 이름은 그들이 자주 죽림에서 회합하고 청담으로 때를 보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사상가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특정 장소를 무대로 하여 음악, 서화 등의 예술을 즐기며 자유롭게 인생이나 종교문제를 토론하는 풍조는, 한 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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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談

위(魏)·진(晉) 시대에 명리(名利)나 도덕을 경시하고, 일체의 속사(俗事)를 피하고 노장(老莊)이나 불교 등의 고원(高遠)한 의론을 논하던 것을 말한다. 후한말 환관이 선거(官吏採用)를 문란케 한 것에 대항하여 재야기절(在野氣節)의 선비가 세론을 일으켜서 청담(淸談)이라 불리었는데 이것이 청담 원류이다. 청담가에는 위나라의 하안(何晏)·왕필(王弼)이나, 위에서 진(晉)에 걸친 죽림7현, 조금 뒤의 팔달(八達) 등이 있다. 후한말의 혼란은 예교(禮敎)주의에 대한 비판이 생겨서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운이 되었고, 유교보다도 노장이나 불교로 기울어지게 했으며, 개인주의적 자유를 찾아 현실사회로부터 도피하여 상궤(常軌)를 벗어나는 자도 생겼다. 동진(東晉)이 되자, 노장·불교·유교의 교양을 몸에 익히고 청담에 열중하는 일이 귀족 사이에 유행했다. 청담은 오히려 미문(美文)에 중점을 두었다. 시와 산문 중국 최고(最高)의 문집으로서 후인의 필독서가 되었고 수·당 시대에 주석서가 나왔다.

도잠(도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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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潛(陶淵明) (365?

427)

동진(東晉)의 시인. 심양(尋陽:江西省九江) 사람으로 자는 연명. 정절(靖節)선생이라고 칭송되었다. 명장 도간(陶侃)의 증손이다.그의 생애는 대략 3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28세(365∼392)까지 독원 독서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로 환온(桓溫), 사현(謝玄)이 활약하고 진실(晋室)의 세력이 아직 공고했을 때로 20세까지는 가정은 비교적 유복했다. 그러나 20세 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운(家運)은 기울기 시작, 정국도 불안, 그는 일가(一家)를 지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2기는 29세에서 41세(393∼405)까지 방황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393년 강주제주(江州祭酒)를 지냈으며, 395년(?) 진군참군(鎭軍參軍)이 되었다. 401년 어머니 맹씨(孟氏)와 사별한 후 405년(41세) 건위참군(建威參軍), 동년 8월 팽택령(彭澤令)이 되고 11월 사직했다. 팽택령을 사임했을 때 노래한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이 시기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제3기는 42세에서 63세(406∼427)로 사망하기까지의 세상은 더욱 험악해지고, 유유는 횡포를 자행, 제위(帝位)에 올라 송조(宋朝)를 일으켰다. 연명은 이때 전원에 은서(隱棲)했다. 그는 산해경(山海經)을 읽고 농민과 담소하며 시를 지었는데, 유토피아를 몽상하며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있다. 그의 문학은 중국 문학사상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그 용어는 극히 평이하며 자연스럽고, 조사(助辭)를 자주 사용하였으며 속어적(俗語的) 표현도 때때로 섞여있다. 그러나 그는 평이한 용어 중에 깊은 철학을 말하였으며 전원생활이 그 주제였다.

사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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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靈運 (385

433)

남조 송(宋)의 시인. 천쥔양샤(陳郡陽夏:河南省大康縣) 사람으로 자는 선명(宣明)이며 진나라 차기(車騎)장군 사현(辭玄)의 후손이다. 조부인 작강락공(爵康樂公)을 닮아서 성격은 호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생을 통해서 산수를 벗삼고 아름다움을 시문으로 노래했으며 수사적 기교와 표현력의 탁월함은 특이한 존재였다. 고향에서 만든 「산거부(山居賦)」를 비롯한 그의 시는 호방하고 섬세하다. 도연명의 시가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탄한 데 비해 한구절 한구절을 갈고닦아 자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산수시(山水詩)의 길을 열었다. 또한 불학(佛學)에도 깊어 혜원(慧遠)과 벗하여 『열반경(涅盤經)』 36권의 교정(校訂)에 참가했다.

고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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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愷之 (344?

405?)

동진(東晋)의 화가로서 화성(畵聖)이라고 불리었다. 자(字)는 장강(長康), 진릉무석(晋陵無錫:江蘇省) 사람이다. 평생토록 건강(建康)·강릉(江陵) 부근에서 살았고, 만년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어 62세로 죽었다. 노장(老莊) 사상에 경도(傾倒)하였고, 자기의 예술에 대해서 자신이 강했으며, 기행일사(奇行逸事)가 많았고, 후세의 문인화(文人畵)의 선구자이다. 런던 대영박물관의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은 고개지의 붓으로 된 것으로 당초(唐初)의 모본(模本)이라고 한다. 화론(畵論)으로서 독창적인 『논화(論畵)』가 있다.

왕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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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羲之 (307?

365?)

진(晉)시대의 서예가로서 서성(書聖)이라고 불리었다. 낭사임기(琅邪臨沂:山東省臨沂市)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 관명에 따라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불리었다. 퇴관 후에는 회계(會稽)의 산수 속에서 유유자적 일생을 보냈다. 해(楷)·행(行)·초(草)의 3체를 예술적으로 훌륭한 서체로 완성켰다는 데에 가장 커다란 공적이 있으며, 그 글씨는 전아웅경(典雅雄勁)하고 기품이 높아 오늘날까지 서법(書法)의 전형으로서 숭상을 받는다. 남조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감수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