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당의 문화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당의 문화〔槪說〕

[편집]

6조시대(六朝時代)의 귀족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나아가서 아시아 대륙의 전역에 당제국의 지배가 전개되고 외래문화를 향수(享受)하여 사상·미술·공예·음악·풍속·습관 등 모든 면에서 외국의 요소를 수용하여 국제적인 색채를 강하게 가진 문화였다.수도 장안(長安)은 당문화의 모체로서 정치 중심지임과 동시에 주변 제국의 사절이나 유학생으로 붐비었고, 시가에 삼이교(三夷敎) 사원이 불(佛)·도(道)의 절이나 도관(道觀)과 나란히 서서 풍속도 호화(胡化)가 현저했다. 요리도 서역(西域)풍으로서 주루(酒樓)에는 외국 술이나 호희(胡姬:외국 미인)의 접대가 있어 이국적 정서가 넘치는 인구 백만 또는 2백만이라고 전해지는 세계 제일의 문화 대도시였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를 융합하고,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성숙한 당문화는 외형의 아름다움과 귀족 취미로 넘쳤고, 특히 문학과 예술면에서 그 특징을 발휘했다. 중국 문학 사상 ‘당시(唐詩)’라고 불리는 시의 현저한 진보는 절구(絶句)·율시(律詩)의 형식을 완성하였고 문장도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를 배제하여 힘찬 문장이 쓰여졌으며 서·화에는 많은 명인(名人)을 배출시켰다. 예로부터 당대(唐代)의 문학발전을 논할 때 4변(四變), 즉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 등 네 시기로 나뉘어 변화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초당의 시인 가운데는 남조의 시풍을 계승한 사람이 많아, 이 시기에 7언율시(七言律詩)의 정형(定型)이 만들어졌다. 성당 시기의 최대 시인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이다. 도교적인 신선(神仙) 사상에 공명하고 청춘의 찬가를 구가한 이백과는 대조적으로, 5언율시(五言律詩), 7언율시의 완성자로서 시성(詩聖)이라 일컬어진 두보는 현실사회를 소재로 하여 민중의 고통을 파헤쳤다.중당의 백거이(白居易)는 더욱 절실히 사회의 부정(不正)에 대한 분노를 시로써 표현했다. 그 용어는 매우 평이하여 당대(唐代)를 통해 가장 많은 독자를 가졌다. 만당의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은 소멸되는 것의 아름다움을 감상적으로 노래하여 퇴폐적 경향이 농후한 시인으로 유명하다.산문분야에서는 중당기에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나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 불린 육조(六朝) 이래의 미문(美文)을 비판하고 고문(古文)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사륙변려문은 운문(韻文)과 비슷한 리듬을 가졌고 출전이나 고사를 존중했으나, 고문에서는 고정된 리듬을 따르지 않고, 낡은 표현을 버리고,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을 제일로 삼았다. 한유의 고문은 고대정신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문의 부흥운동에 따라 유교의 새로운 해석도 시작되었으나, 고문이 압도적인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은 북송(北宋) 시대에 이르러서이다.또한 호화로운 궁정 생활을 반영하여 비단·금은 세공·자개 거울·당삼채(唐三彩) 등 장식이나 의장의 훌륭한 공예품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비해서 유학(儒學)은 저조하여 정치적 사상 통일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외래 종교를 맞아서 불·도 2교는 국가의 비호로 왕성해졌으며, 불교는 중국화하여 여러 종파가 생기고 당(唐) 양식의 불교 예술이 발달하였다. 이리하여 당의 문화는 주변 제국(한국·일본 등)에 전파되고 흡수되어서 중국 문화권은 확대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외래 종교

[편집]

外來宗敎

조로아스터교·마니교(摩尼敎)·네스토리우스교(景敎) 및 이슬람교(回敎) 등이 서역 경유 또는 남해 경유로 들어와서, 장안(長安)과 기타 지역에 사원이 세워지고 포교되었다. 이러한 외래 종교는 종교계를 흥성하게 하였고, 당문화에 국제성을 농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佛)·도(道)의 두 종교는 중국인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고, 재화(在華) 외국인에게 신앙될 따름이었다. 무종(武宗)의 외교(外交) 배척 정책은 이러한 여러 교의 쇠퇴를 촉진시켰다.

현장

[편집]

玄?(602?

664)

당대(唐代)의 승려. 법상종. 속성은 진(陳). 낙주(洛州) 구씨현(?氏縣) 사람. 12세에 낙양 정토사에서 승려가 되고, 혜경(慧景)·도기(道基)·보천(寶遷)·법상(法常)·승변(僧辨)·도심(道深)·도악(道岳)·엄법사(嚴法師)·진법사(震法師) 등에게서 「열반경」, 「섭론」, 「발지론」, 「비담론」, 「구사론」, 「성실론」 등을 배웠다. 그러나 이들의 말이 서로 모순되어 서역(西域)의 승려들에게 직접 물어 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29세에 뜻을 결정하고 혼자서 길을 떠나 고창(高昌)·구자국(龜玆國) 등을 지나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에 들어가 여러 곳의 성적(聖蹟)을 두루 참배, 고승 대덕들을 찾아서 불교와 아울러 학문·예술을 연구, 특히 날란다사(寺)의 계현(戒賢)에게서 「유가론」, 「인명론」, 「구사론」 등을 5년 동안 학습, 마침내 인도의 유력(遊歷)을 마치고, 여러 나라를 지나서 645년 장안에 돌아 왔다. 17년 동안에 보고 들은 나라가 130개국,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 150립(粒), 불상(佛像) 8구(軀), 대승과 소승의 경·율·논 520질 657부(部)는 홍복사(弘福寺)에 모셨다. 뒤에 홍복사·자은사·왕화궁에서 번역에 종사, 「대반야경(大般若經)」 등 75부 1335권을 번역 완성하였다. 여러 가지의 학문·예술에 정통, 특히 「유식론」, 「구사론」, 「인명론」을 홍통(弘通)하기에 힘썼다. 그의 여행기 『대상서역기(大唐西域記)』는 역사가들의 중요한 자료이다.

의정

[편집]

義淨 (135

713)

중국 당대(唐代)의 학승(學僧). 성은 장(張)씨, 자는 문명(文明). 하북 범양(河北范陽) 출생. 37세 때 광주(廣州)를 떠나 수마트라(Sumatra)·팔렘방(Palembang) 등을 거쳐 탐라입저(耽羅立底)에 도달하여 범어(梵語)와 성론(聲論)을 배웠다. 법현(法顯)이나 현장의 위업(偉業)을 흠모하여 범본(梵本) 불전(佛典) 등을 얻고 남해 제국을 거쳐 귀국했다. 694년 귀국하여 남해(南海) 제국과 인도에 체재하여 얻은 견문(見聞)을 살려 불교의 상황, 승니(僧尼)의 생활, 일반 풍토생활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삼장(三藏)의 호를 하사받아 역경에 전념했다.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은 당시의 인도 및 동남아시아 등지의 사정이 상세하여 문화교류사상 귀중한 자료이다.

선종

[편집]

禪宗

6세기 달마(達磨)가 중국에 전했다고 한다. 그 완성은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하였다. 좌선수도(坐禪修道)에 의한 불교 진수의 체득을 설교하는 이 파는 법상(法相)·화엄(華嚴) 등이 조정의 비호로 융성을 극한 것에 비하여, 야(野)에서 세력을 뻗쳤다. 안사의 난 이후 그 실천의 간결함이 인심을 모아 드디어 중국 불교계의 주류가 되었다.

도사

[편집]

道士

도교의 승려이다. 북위의 구겸지(寇謙之)가 신천사도(新天師道)를 제창하고, 교리·의식이나 교단 조직을 정비했던 무렵에 이 말이 생겼다. 당의 제실(帝室)은 조상(祖上)을 노자(老子)라 하여, 도교를 동족의 종교로 삼았다.도교는 국가적 비호(관립 道觀의 설립 등)를 받고, 도사도 중용되었다(관리 임용·면세 등). 반면 가짜 도사나 도사의 부정 등 사회악도 생기고, 무종(武宗)의 폐불(廢佛)도 도교 신앙에 기인했다.

정토종

[편집]

淨土宗

아미타불(阿彌陀佛) 신앙에 의한 정토에의 구제를 설교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진(晉)나라 혜원(慧遠)의 백련사(白蓮社)에서 비롯되는 중국 정토교는 당대에 들어서서 도작(道綽)·선도(善導) 등이 완성하여 융성해졌다. 후에 선(禪)의 유행과 함께 선정 융합(禪淨融合) 사상을 탄생시켰다.

5경정의

[편집]

五經正義

유교의 근본적 경서인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5경의 해석을 중심으로 해서 한(漢) 이래의 고전 해석학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여러 남조(南朝)의 학설이 채용되었다. 323권. 당에서는 유학(儒學)을 존중하여 과거(科擧)에는 필수적이었다. 5경의 주(注)나 해석의 혼란을 피하고, 표준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서 공영달(孔潁達) 등이 칙명에 의하여 종래의 주석을 취사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한(漢)대 이래 훈고학(訓誥學)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5경의 해석은 통일되었으나, 학문적인 고정화를 초래했다.

맹호연

[편집]

孟浩然 (689∼740)

당대(唐代)의 시인. 호연은 자. 양양(襄陽:湖北省) 사람. 절의(節義)를 존중, 녹문산(鹿門山)에 숨은 일도 있다. 40세 때 장안(長安)에 나가, 시로써 이름을 알리고, 왕유, 장구령 등과 사귀었다. 그의 시는 왕유의 시풍과 유사하고 도연명의 영향을 받았다. 성당(盛唐)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왕유와 병칭되었다. 맹양양(孟襄陽)으로 불려지고, 『맹호연집(孟湖然集)』 4권이 있다.

공영달

[편집]

孔穎達 (574∼648)

당의 유교학자. 자는 중달(仲達). 하북성(河北省)에서 출생. 수의 양제때 명경(明經)의 시험에 급제, 태학조교(太學助敎)가 되고, 당초(唐初) 문학관 학사에서 국자박사(國子博士), 국자좨주(國子祭酒)를 거쳐, 643년 동궁(東宮)의 시강(侍講)이 되었다. 그동안 칙명으로 유명한 『오경정의』 180권을 찬정(撰定)하고, 수서(隋書)의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경에 정통, 한유의 설에 기초하여[주 1] 남북의 이설(異說)을 절충, 경서의 해석을 통일시켰다.

왕발

[편집]

王勃 (647∼674)

당대(唐代)의 시인. 자(字)는 자안(字安). 수(隋)나라의 왕통(王通)의 손(孫). 고종(高宗) 때 궁정(宮廷)에 들어가 조산랑(朝散郞)이 되었다. 검남(劒南)으로 가서 도독(都督) 염백서(閻伯嶼)를 위하여 쓴 등왕각(?王閣)의 서(序) 및 시는 특히 유명하다. 노조린(盧照?)·낙빈왕(駱賓王)·양형(陽炯)과 함께 초당(初唐)의 4걸(四傑)이라고 일컫는다.

양형

[편집]

楊炯 (650∼695)

당(唐)나라의 시인. 호는 영천(盈川). 왕발(王勃), 노조린(盧照?), 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 4걸의 하나. 섬서(陝西)성 화음(華陰)에서 태어났다. 선배 장열은 그의 시를 '양영천(楊盈川)의 문상(文想)은 현하(懸河)의 물을 쏟는 것과 같아 아무리 퍼내어도 다하지가 않는다’고 평했다. 악부(樂府)에도 뛰어났으며, 시구(詩句)에 '구름이 어두워 기화(旗畵)가 시들고 바람이 세어 고성(鼓聲)에 섞인다’고 했다. 『양영천집(楊盈川集)』 10권이 있다.

이백

[편집]

李白 (701

762)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號)는 청련(淸蓮). 촉(蜀:四川) 사람. 소년기를 쓰촨에서 지내고 25세경부터 후베이(湖北)를 중심으로 천하를 편력하며, 협객(俠客)과 교제하거나 혹은 산둥(山東)에서 도사(道士)들과 은서(隱栖)하여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불렸다. 천보(天寶) 초년 42세경부터 장안(長安)에 들어가 하지장(賀知章)으로부터 적선인(謫仙人)이라 칭찬받았으며, 왕의 부름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 심향정(沈香亭)에서의 모란연(牧丹宴)날 밤에, 술에 취한 이백은 당시 권세가 비길 데 없던 고력사(高力士)를 머슴처럼 다루어,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날 밤 지은 청평조(淸平調)의 시가 양귀비를 비방한 것이라는 중상을 받아, 겨우 3년 만에 장안을 떠나 지방을 방랑하였다. 그동안 허난(河南)에서 두보(杜甫)를 만났다. 안사의 난 때 숙종(肅宗)의 아우 영왕(永王) 인(璘)의 반군에 가담하여 사로잡혔으나, 구지(舊知)인 곽자의(郭子儀)에 의하여 구명(救命)되었다. 뒤에 친척인 이양빙(李陽?)에게 의지하여 그곳에서 작고하였다. 두보와 아울러 성당기(盛唐期) 시인 중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항상 자유와 정열의 발산을 찾아 방랑하였으며, 시적 환상의 세계에 탐닉했다. 그의 시는 음조(音調)가 영롱(玲瓏)하며, 솔직·명랑하고 호방한 기상이 넘치고 있다. 절구(絶句)에 뛰어나고 특히 고체시형(古體詩形)을 좋아하여, 조자앙(趙子昻)에서 시작한 고대에의 복귀를 완성한 점 등이 주목되고 있다. 두보처럼 인생의 우수(憂愁)를 뼈에 사무치게 실감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로 시작되는 「자야오가(子夜吳歌)」 등은 두보의 「병거행(兵車行)」과 더불어 방항여리(坊巷閭里)의 무한한 고뇌의 일단을 잘 대변한 일례이다. 『이태백 전집(李太白全集)』 30권이 있다.

두보

[편집]

杜甫 (712

770)

당대(唐代)의 시인. 자(字)는 자미(子美), 호(號)는 소릉(小陵). 조부인 심언(審言)은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세운 주조(周朝)의 시인이었다. 20세경 장쑤(江蘇)·저장(浙江)에 여행하였으며, 23세경 진사시험에 실패하고, 재차 방랑의 여행길을 떠나 이백(李白)·고적(高適) 등과 만났다. 751년(천보(天寶) 10년) 40세 때, 헌상(獻上)한 부시(賦詩)에 의해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 755년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胄曹參軍)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말 안녹산(安祿山)의 난(亂)을 만나 일시 반란군의 손에 붙잡혔으나, 도망하여 숙종(肅宗) 때 좌습유(左拾遺)에 취임하였다. 그후 불우하여 생활은 곤궁하였다. 48세 때 처자와 함께 쓰촨(四川)의 청두(成都)로 가서 친구인 절도사 엄무(嚴武)의 보호하에 수년간 평화스런 생활을 보냈으며 양쯔강을 따라 삼협(三峽)을 경유, 후난(湖南)에 이르러 불우한 생애를 마쳤다. 이백과 함께 중국시인의 최고봉으로, 오언율시(五言律詩)·칠언율시(七言律詩)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그의 시는 개인적 또는 사회전체의 우수(憂愁)를 표현하는 등 종래의 외형미(外形美)를 혁신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성실·웅혼(雄渾)한 기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으며, 이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다. 당시 거듭되는 토번(吐蕃)의 침입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련병(團練兵) 또는 방추병(防秋兵)으로 징발되었는데, 출정하는 농민들의 무한한 비애를 읊은 「병거행(兵車行)」은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吾歌)」와 함께 특히 유명하다.

백거이

[편집]

白居易 (772

846)

중당(中唐)의 대표적 시인. 자(字)는 낙천(樂天). 산시(陝西) 사람. 798년 진사(進士)가 되었다. 교서랑(校書郞)을 첫 출발로 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형부시랑(刑部侍郞) 등을 역임하고 840년 형부상서(尙書)로써 치사(致仕)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자, 초당(草堂)을 향로봉(香爐峯) 밑에 짓고, 유유자적하며 운명에 순응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 봉사하려고 자주 조정(朝廷)에 간언(諫言)하기도 하였으나, 요로(要路)에 있는 자로부터 배척당하자 정치에 정열을 잃고, 시작(詩作)을 일삼아 주흥(酒興)을 즐겼다. 그의 시는 특히 평이(平易)한 시구(詩句)로써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의 생존시대부터 내외에 유행되고 애송(愛誦)되었다. 저서에는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백씨경사사류(白氏經史事類)」가 있는데, 이들은 시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장시(長詩)로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은 일찍부터 여러 사람에게 애송되었다.

한유

[편집]

韓愈 (768

824)

자는 퇴지(退之). 유자(儒者)·문인.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이다. 남북조 이래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를 싫어하여 문장의 복고를 주창하여 웅혼(雄渾)한 문장을 만들어 냈고, 또한 유학의 복고에도 노력했다. 대표작으로는 「원도(原道)」 「쟁신론(爭臣論)」 등이 있다.

유종원

[편집]

柳宗元 (773

819)

중당(中唐)의 문호(文豪). 하동(河東:山東) 사람. 자는 자후(子厚). 진사(進士)에서 교서랑(校書郞)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순종(順宗)이 병환으로 친정(親政)하지 못하고 왕숙문(王叔文)·위집의(韋執誼) 등이 실권을 잡자, 숙문에게 빌붙어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 그후 숙문 등이 실각하자 그도 또한 영주(永州)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유주(柳州)의 자사(刺史)가 되어 819년 임지(任地)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한유(韓愈)와 마찬가지로 문장은 전국(戰國)·전한(前漢) 시대처럼 달의명쾌(達意明快)한 산문(散文)을 써야된다고 주장하여, 소위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육조(六朝) 이래의 형식적인 사륙문(四六文)을 타도하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한유의 고문이 학술적 의론문(議論文)에 뛰어난 데 비해 그는 서경문(敍景文)에 뛰어났다. 영주(永州) 재직중의 작품 「영주팔기(永州八記)」는 특히 유명하다. 한유와 더불어 당대 고문의 대가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문집에 「유하동집(柳河東集)」 45권이 있다.

염입본

[편집]

閻立本 (?

673)

당나라 초기의 화가. 공부상서(工部尙書)·중서령(中書令) 등 고관을 역임했다. 제실의 선양(宣揚)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고래의 권계주의(權戒主義) 전통을 이었다. 대표작 「역대제왕도권(歷代帝王圖卷)」.

오도현

[편집]

吳道玄 (생몰년 불명)

당나라 현종 시대의 화가. 허난(河南)성 출생. 자는 도사(道士). 집은 가난하며 지방의 낮은 관리였으나 현종에게 그의 그림 재능을 인정받아 궁중에 들어가 인물·산수·초목·조수(鳥獸) 등을 그렸으며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수도의 사원·도관(도교의 절)의 대규모적인 벽화를 맡아 화단의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명장(名將)이라 칭송되었고, 중국 회화사상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천재이다.

왕유

[편집]

王維 (710?

761)

당대(唐代) 중기의 시인(詩人). 또한 서가(書家), 화가(畵家)로서도 유명하다. 자(字)는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사람. 721년 진사(進士)가 되어, 벼슬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까지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장안(長安)에서 살며, 약관에 이미 시문(詩文)과 음곡(音曲)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졌다.그의 시는 정치고담(精緻高淡)하며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능하며, 진(晉)의 도잠(陶潛), 송의 사영운(謝靈運)의 계통을 따랐고, 산수자연을 즐겨 읊어 스스로 일파를 형성했다. 화단에서도 오도현(吳道玄)·이사훈(李思訓)과 아울러 유명했으며, 특히 산수화에서 회화사상 부동의 지위를 확립하여 후세에 남화(南畵)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소식(蘇軾)이 그의 시와 그림을 평하여 ‘그의 시를 읽으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한 유명한 평이 있는데, 시와 그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망천도(輞川圖)」 「강산설제도권(江山雪霽圖卷)」 등은 회화(繪畵)로서의 대표작이다. 또한 그의 시문을 모은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구양순

[편집]

歐陽詢 (557

641)

자는 신본(信本). 서가(書家)이다. 우세남(虞世南)·저수량(?遂良)과 함께 초당(初唐)의 3대 서가라고 받들어진다. 왕희지 이래 정통파의 흐름을 받았고 거기에 독자적인 것을 도입하여 전형미(田型美)를 창작하였으며, 여러 서체를 익혔는데 해서(楷書)에 가장 뛰어나서 후세에 길이 모범이 되었다. 수(隋)의 양제(煬帝)도 섬겼는데 당의 고조 밑에서 『예문류취(藝文類聚)』를 수선(修選)하였고, 태종 때 홍문관(弘文館) 학사가 되었다.작품 중 「황보탄비(皇甫誕碑)」 「화도사비(化度寺碑)」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우공공비(虞恭公碑)」 「방언겸비(房彦謙碑)」 등이 현존하고 있다.

안진경

[편집]

顔眞卿 (709

786)

자는 청신(淸臣). 당나라 충신이며 서가이다. 문집 『안로공집(顔魯公集)』이 있다. 북제(北齊)의 학자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으로, 가문에 능필가(能筆家)가 많아서 어릴 때부터 필법을 익혔다.왕희지(王羲之)류의 서법에 반발하여 서의 혁신을 주장하고 예서(隸書)의 필법을 해서에 도입한다든지 하여 중국 서도사상 새로운 일파를 개척한 사람이다. 서풍은 남성적인 강직성이 넘친다. 평원태수(平原太守)로서 안녹산(安祿山)에 저항했고, 난 후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취임했다.정의감과 강직성이 용납되지 못하여 일시 중앙에서 쫓겨났다. 덕종(德宗) 때 복귀하여 반장(反將)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려다가 그 부하에게 교살당했다.

당삼채

[편집]

唐三彩

중국 전체로 볼 때 장안은 서북쪽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으나, 당과 같이 서북으로 국력을 신장한 시대에는 오히려 전체적으로 보아 중앙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인 동시에 서방경영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장안은 중앙 정부의 관료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자를 소비하는 곳일 뿐 아니라 서역의 호객(胡客), 남해의 번객(藩客)이 모여들어 이채로운 상품을 매매하는 세계적인 무역도시로서 이국정서도 농후한 곳이었다.당시대의 장안에서 발굴된 723년의 무덤에서는 멋진 당삼채 인형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악기를 가진 호인(胡人)들을 등에 태운 낙타 모형이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당삼채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바탕이나 살짝 구운 바탕에 갈색·녹색·백색·황색·감색·벽색(碧色) 등의 색유(色釉)를 칠하여 낮은 화력으로 구워낸 것이다. 기형(器形)은 접시·잔·물병 등 외에도 말·사자·개·여관(女官)·단지·향로·합자(盒子)·베개, 그리고 문무관(文武官), 서역(西域) 풍속의 인물 및 귀신·낙타·날짐승 등이며, 대부분이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지방의 분묘에서 나온 부장품(副葬品)으로서 실용적인 것은 적다. 호병(胡甁)·호인(胡人)을 비롯하여 보상화(寶相華)·당초(唐草) 등 의장(意匠) 무늬는 서역적인 향기가 짙으며, 형태는 세련되고 색조(色調)가 명쾌하여 대체로 호화로운 느낌을 줌으로써 국제적인 당대 귀족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송·원·명대에도 계속 만들어졌으며 일본·발해·요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률소의

[편집]

唐律疏議

당나라의 기본법전인 형법전(刑法典). 7세기 중엽의 영휘율소(永徽律疏)를 737년에 이임보(李林甫) 등이 다시 편찬한 것이 현행본이다. 12편 500조로 편성되어 있는데, 법적 효력을 지닌 관찬(官撰)의 주가 있고, 태·장·도·유·사(笞杖徒流死)의 5단계로 된 형벌체계가 있다.당의 기본법전으로서의 율·령·격·식·(律令格式)은 율(律)이 당률소의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 외에는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 완존(完存)하는 동아시아 최고 법전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형법의 전형을 이루어 한국·일본·베트남 등의 법과 중국 법과의 관계 연구에 근본자료로 중요하다. 총 30권으로 되어 있다.

주해

[편집]
  1. 한유는 공영달보다 후대의 사람이므로 ‘한유의 설에 기초’하였다는 것은 잘못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