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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그리스적 국가 완성〔槪說〕[편집]

7세기는 제국으로서 가장 불안한 시기였으나, 헤라클레이오스 황제(재위 610

641)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그리스화(化)한 국가로 완성되었다. 페르시아, 이슬람, 롬바르드에 의해서 제국의 영토는 축소되었지만, 국가적 통일에는 편리했다. 그리스도교면에서는 단성론자(單性論者)인 아프리카 등의 지방을 잃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통일할 기운(機運)이 일었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도 가톨릭으로부터 독자의 길을 결정적으로 걷기 시작한다.비잔틴 제국은 카르타고 행정부 장관 헤라클레이오스의 반란으로 구제를 받게 되었다. 반란은 이집트에 파급되어 포카스가 쓰러지고, 같은 이름의 아들 헤라클레이오스가 황제로 되었다. 그는 실질적으로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 제국의 재건과 강화를 목표로 하여 정치·사회·종교의 각 방면에 걸쳐 효과적인 재편성을 시도하기 위한 정책을 단행했다.헤라클레이오스 황제는 또한 페르시아 전쟁에서 탁월한 군사능력을 발휘했다. 611년부터 619년에 걸쳐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 불린 호스로 2세는 시리아 지방과 팔레스티나 지방에 침입했고, 614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아바르족도 트라키아 지방에 침입해 들어가 수도 주변에까지 도달했다.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겨우 반격에 나선 것은 622년으로서, 이 때가 이슬람력의 헤지라 기원에 해당한다. 그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지방인 이집트나 시리아 지방의 탈환을 위해 군대를 분산시키느니보다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 지방을 거쳐 페르시아 본토에 돌입하는 길을 택했다. 626년에 아바르족은 육지로부터, 페르시아군은 바다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으나, 철통같은 방어로 그 공격은 실패했다. 이러한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마침내 627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니네베 싸움에서 페르시아군을 궤멸시킴으로써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에 진입할 길이 뚫렸다. 페르시아는 혼란에 빠졌고 628년에 호스로 2세가 암살당했다.페르시아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되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는 재정개혁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슬라브 민족, 세르비아 민족, 크로아티아 민족 등의 일부를 현재의 지역에 정착하게 하고, 또 북방의 만족(蠻族)과 협정을 맺었다. 그 가운데 하자르 족은 반(半)유목 민족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의 동맹군으로서 페르시아와 싸웠다. 앞서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아바르족은 이때에 이르러 분열되고, 따라서 모라비아 족과 체코족인 서부 슬라브족 등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이 그 굴레를 벗었다.그 후 아라비아인의 침입 때문에 재정은 핍박하여, 후계자도 고초를 당했다. 제국의 세위(勢威)는 쇠퇴되나 이 혼란을 구한 것이 이사우리아 왕조의 레오 3세와,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

775)이다. 대외적으로는 아라비아인을 꺾고, 군관구 제도를 재편성하여 내정 개혁도 실시했는데,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성화상(聖畵像) 파괴운동에 의해서였다. 가톨릭 교회와의 분열과 동시에 그것은 서구(西歐)와 비잔틴과의 분열을 의미했다.

우상파괴 논쟁[편집]

偶像破壞論爭

이 논쟁은 726년부터 843년에 이르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성화상(聖畵像) 파괴의 신학적·정치적 운동이다. 성화상파괴 논쟁(운동)이라고도 한다. 이미 4세기경부터 성화상숭배의 풍조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7세기에 성행이 되었다. 레오 3세의 고시(告示, 726)에서 비롯되어, 콘스탄티누스 5세의 종교회의(754) 등에 의해 교회 내에서의 성화상(특히 아이콘) 숭경(崇敬)은 엄격히 금지했으나, 다마스커스의 요하네스와 로마 교황의 반대도 강하여, 787년에 황비 이렌은 제7회 공회의(公會議)에서 성화상 숭경을 부활시켰다(제1기). 주요 원인은 네오플라토니즘적 신학 경향(그리스도 단성론)과 수도원이 국가 재정을 압박했다는 것 등이다. 이 논쟁은 동서 교회 분열의 중대 요인이 되었다(제2기에 대해서는 ‘비잔틴 문화의 번영’ 참조)

레오 3세[편집]

-世 Leo Ⅲ(675

741, 재위 717

741)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국내 이민정책으로 트라키아로 옮긴 동양인의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르메니아 군관구의 사령관 아르타바스데스의 협력을 얻어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유형(流刑)으로 시작된 제국(帝國)의 내란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를 퇴위시켜 717년 3월 제위(帝位)에 올라 이사우리아(시리아) 왕조를 창시했다. 동년 8월에 시작되는 아라비아인에 의한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끝까지 견디었고, 불가리아 왕 테르벨(701∼718)의 원조와 당시의 새 병기(兵器)인 그리스의 불(火)을 사용함으로써 다음 해 8월 드디어 적(敵)을 격퇴하고, 오마르와의 휴전 조약을 체결시켰다. 이슬람의 공세에 대해 제국의 생사를 건 이 싸움의 승리는 14년 뒤의 푸와티에에서의 카를 마르텔의 승리에 비견(比肩)된다. 대내적으로는 광대한 영역을 가진 7세기의 군관구를 분할하여 후세에 군관구 제도를 완성토록 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민법(民法)에 의해서 평등이라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도입하여 농민, 해사(海事)·군사 법전(法典) 등에 따라서 내정을 개선하여 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그는 우상파괴 논쟁에서는 운동의 발단이 된 사람으로 금지의 기수(旗手)가 되었다.

그리스의 불[편집]

-火

시리아로부터 이주한 그리스의 건축가 카리니크스가 발명한 비잔틴의 신무기(新武器). 678년에 처음 사용되었다. 아랍군(軍)이 674년부터 만반의 준비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는데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이 ‘그리스의 불’이었다. 폭발물을 혼합한 것으로서 비잔틴 사람만이 그 처방을 알고 있었다. 시폰이라는 투척기로 먼 곳의 배에 발사하여 배가 부서질 만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그리스의 불이라는 신무기로 콘스탄티누스 4세(재위 668

685)는 싸움에 이기고, 많은 연금(年金) 지불을 약속받아 그리스도교 세계의 확립에 기여했다.

그리스 고전의 보존[편집]

-古典-保存

중세에 있어서 그리스 고전의 보존에서는 이슬람과 함께 동로마제국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수도원은 큰 역할을 수행했다. 수도에는 도서관이 있고, 또한 대학도 특히 성화상파괴 운동 후, 고전 부흥의 커다란 거점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어의 사용도 후년에 르네상스의 토대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는 고전 문화의 전통과 문화재가 상실되어, 알렉산드리아나 가자 등의 고전 연구 중심지를 잃었다. 8세기에 세력을 만회했을 때는 군사적 요소가 강하여, 학문 중심의 헬레니즘적 전통은 자취를 감추고 교회만이 그것을 지속해 왔었는데, 성화상파괴 운동 이후 급속히 고전 문화가 부흥했으며, 5세기 말의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도 하나의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