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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통일〔槪說〕
[편집]수(581
618)는 원래 북조의 하나인데 후에 통일왕조가 되었다.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의 분열시대 이후 중국에는 수(隋)의 뒤를 이어 당(唐)에 의한 통일시대가 계속되었다. 그 수 왕실의 양씨(楊氏)와 당 왕실의 이씨(李氏)는 수에 앞선 북주(北周) 왕실의 우문씨(宇文氏)와 함께, 북위(北魏)가 북변에 배치했던 군단(軍團)의 하나인 무천진(武天鎭) 군벌 출신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북위는 원래 몽골지방에 있던 선비족(鮮卑族)인 탁발씨(拓跋氏)가 화북(華北)에 들어가 한(漢) 민족을 정복하고 세운 왕조(王朝)였으나, 화북에 들어간 그들은 새로 몽골지방을 점령한 유목민과 항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그들은 만리장성 북쪽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서 전선기지(前線基地)를 설치하고 유목민과 한족(漢族) 출신을 주둔시켜 국방을 담당하게 하고, 이를 진(鎭)이라 일컬었다.5세기 말,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화화정책(華化政策)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성(長城) 가까이의 평성(平城)에서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평성이 수도였던 동안에는 북변 6진의 진민(鎭民)이 조정으로부터 우대를 받고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이 뤄양으로 천도한 뒤로는 차차 경시되어, 관리가 될 수 없는 천민적인 존재가 되어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소외감은 심해질 뿐이었다.효문제가 죽은 후 북위는 급속히 쇠망하여 국가 기강이 매우 어지러웠다. 효문제가 세운 제도가 차차 무너지면서 북방에서 잇따른 반란이 일어나 국방 군인의 세력이 커졌다. 마침내 산시성(山西省)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추장(酋長)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주영이 죽은 뒤 그 휘하 장군들은 고환의 통솔을 받았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는 무천진 출신으로서 장안(長安)에 근거를 두고 있던 우문태(宇文泰)였다.그런데 고환이 옹립한 효무제(孝武帝)는 서쪽 장안에 있던 우문태에게로 도망했다. 이에 고환은 그 대신에 효정제(孝靜帝)를 추대하고 수도를 동쪽에 있는 업(?)으로 옮겼다.이로써 북위에는 업과 장안에 동시에 두 황제가 출현하게 되었다. 업을 수도로 한 것이 동위(東魏), 장안을 수도로 한 것이 서위(西魏)였다. 얼마 후 동위는 실력자였던 고씨(高氏)에게 넘어가 북제(北齊) 왕조가 되고, 서위는 실력자 우문씨(宇文氏)에게 넘어가 북주(北周) 왕조로 바뀌게 되었다. 효문제에 의한 화화정책(華化政策)의 일환으로 출현한 수도 뤄양성(洛陽城)은 불과 40년만에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북위 효문제의 지나친 화화정책은 6진의 반란을 불러 일으키고 북위 왕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6진의 하나인 회삭진 출신의 고씨, 그리고 무천진 출신인 우문씨가 일으킨 북제(北齊)·북주(北周) 두 왕조의 초기에는 양쪽에서 모두 화화정책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18세에 즉위하면서부터 황제 칭호를 쓴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처음에는 주공(周公)을 자처하는 우문호(宇文護)에게 정치를 위임했었다. 그러나 572년에 우문호를 타도하고 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그는 갑자기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쓰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국가재정의 견지에서나 국론통일이라는 견지에서도 불교(佛敎)와 도교(道敎)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앞서 북위의 태무제에 이어 두 번째로 574년에 폐불(廢佛)을 단행했다. 이번에는 도교도 금지했고, 승려와 도사(道士)들에게 환속을 강요했다. 577년에는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화북(華北)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이듬해 무제는 병을 얻어 36세의 생애를 끝맺었다.이민족 출신으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무천진(武川鎭) 출신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주국대장군의 하나인 이호(李虎)는 뒤에 당(唐)을 세운 이연(李淵)의 조부였고, 대장군의 하나인 양충(楊忠)은 수(隋)의 건국자 양견(楊堅)의 아버지였다. 주국대장군 독고신(獨孤信)의 넷째 딸은 이호의 며느리이자 이연의 어머니요, 일곱째 딸은 양견의 아내가 된다.무제가 죽은 뒤 선제(宣帝)가 뒤를 잇고, 같은 무천진 출신의 군벌 양견(楊堅)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선제가 재위 1년도 못되어 재위를 태자에게 물려주어 정제(靜帝)로 삼고 상황(上皇)의 지위로 물러난 것은 천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도락(道樂)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자연히 조정의 권력은 상황의 장인인 양견에게 옮아갔고, 이어 상황이 죽자 양견은 불과 8세밖에 안 된 정제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수왕조(隋王朝)를 성립시켰다. 이가 수의 문제(文帝)였다.문제는 589년 건강(建康, 南京)을 점령하여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켰고, 또 진(晉)의 남천(南遷)으로부터 약 270년을 지나서 남북의 통일을 성취하였다. 문제는 내정에 힘을 기울여 그의 치세는 개황(開皇)의 치(治)라고 불렸다.604년 문제를 죽이고 제위를 빼앗은 아들 광(廣, 陽帝)은 토목공사와 외정(外征)에 힘을 기울여 서로는 칭하이(靑海)의 땅을 처음으로 지배하에 넣고, 남으로는 지금의 북베트남·대만까지 지배하였으며, 다시 고구려를 세 번이나 침범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 때문에 국력은 소진되어 생산물과 노동력을 대량으로 착취당해 오던 농민의 반란을 초래했다. 처음 허베이(河北)·산둥(山東) 방면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반란은 613년에 양현감(楊玄感)의 난이 일어나자 그 후 전국적이 되어 각지의 호족(豪族)들은 여러 집단을 통합하여 할거했다. 617년 양제가 장뚜(江都)에 있을 때, 당공(唐公) 이연(李淵)은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의 권고로 군사를 일으켜서 양제의 손자 양유(揚侑, 恭帝)를 옹립했다. 다음해 양제가 살해되자 공제에게 자리를 물러나게 하고 즉위하여 당조(唐朝)를 창립했다. 이리하여 수나라는 불과38년, 실질적으로는 2대로 멸망했다. 그러나 수나라는 문제에 의해서 종래 화북(華北)에서만 실시되어 왔던 균전(均田)·조용조(租庸調) 제도를 중국 전토에 넓히고 서위(西魏)에서 시작된 부병제(府兵制)를 시행하여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를 확립하고 다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는 등, 후에 세계제국이라고 일컬어진 당조(唐朝)의 번영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문제
[편집]文帝 (541
604, 재위 581
604)
수(隋)의 고조(高祖), 이름은 양견(楊堅)이다. 3세기 이래의 정치적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의 재통일을 실현시켰다. 서위(西魏)·북주(北周)를 섬기고, 특히 북주의 선제(宣帝) 즉위 후에는 외척(外戚)으로서 조정(朝政)을 후견하고 다음의 정제(靜帝) 제위를 양위케 함으로써 수 왕조를 열었다. 중앙관제의 정비, 지방정치의 개혁, 균전·조용조제나 부병제의 체계화에 노력하였고, 589년에 남조의 진(陳)을 합병하여 전국을 통일하였으며, 595년에는 과거제를 시작하는 등 중앙집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 동안에 국력은 충실해졌기 때문에 그의 치세를 ‘개황의 치(開皇-治)’라고 부른다.
양제
[편집]煬帝 (569
618, 재위 604
618)
수(隋)의 제2대 황제이며, 고조인 문제의 둘째아들이다. 이름은 양광(楊廣). 588년 이후 남조의 진(陳)을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지휘하여 이듬해에 진을 멸망시켜서 중국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600년에 형인 용(勇)이 황태자의 지위를 폐위당하자 그 지위에 올라 604년 문제의 죽음으로 즉위했다. 형의 폐적(廢嫡), 부의 죽음은 모두 중신 양소(楊素)와 짠 양제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위하자 즉시 뤄양(洛陽) 땅에 동도(東都)의 건설을 계획하였고, 또한 조미(租米)의 대량 수송과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목적으로, 황하(黃河)와 회수(淮水), 황하와 탁군(?郡)을 각각 연결시키는 대운하를 개통시켰다. 또한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변에는 장성(長城)을 구축했다. 이리하여 609년 이후에는 스스로가 군을 이끌고 서방·남방의 이민족을 쳤고, 612년 이후에는 매년 1회씩 3회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쉴새없이 실시한 여러 사업은 모두가 대량의 인민 징발, 가혹한 수탈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각지에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전국적인 내란 속에 강도(江都, 楊州)에서 금군(禁軍)의 군사에게 살해되어 생애를 마쳤다.
대운하
[편집]大運河
제2대 황제인 양제는 604년에 즉위하자 뤄양 땅에 동도(東都, 洛陽城) 건설을 실시하고 604년에는 허난 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 명을 징발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개통시켰다. 이것을 통제거(通濟渠)라고 한다. 이어 608년에는 허베이의 여러 군에 남녀 백여만을 징발하여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개통했다. 이것을 영제거(永濟渠)라고 부른다. 이 두 개의 운하는, 그때까지 완전하게 수나라에 의한 지배가 안정되지 못했던, 지난날의 진(陳)과 북제(北齊)의 영역을 중앙에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미(租米)의 대량 수송과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케 한 것으로서, 그 후 실시된 양제의 빈번한 외정(外征)의 전제가 되는 것이었다.수나라 뒤에 왕조를 세운 당나라 중기의 현종(玄宗) 때(8세기)에는 통제거가 개축되어 그 당시 높은 생산력을 자랑하게 된 강남(江南)의 조미는 이 운하를 통해 다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장안(長安)까지 수송되었다. 이러한 대운하는 때때로 보수를 하면서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수의 대외 발전
[편집]隋-對外發展
제2대 황제인 양제는 즉위한 다음 수많은 인민을 징발하여 대운하를 파고 장성(長城)의 구축을 실시한 후 외정(外征)에 착수했다.수의 통일에 앞서 만리장성 북쪽에는 유연(柔然)을 대신한 돌궐(突厥) 민족이 알타이 산맥 지방을 근거로 공전(空前)의 큰 세력을 쌓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몽골고원,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전역을 포함한 주변 민족을 모두 제압하고 있었으나, 때마침 화북을 통일한 수 문제의 교묘한 이간책(離間策)이 성공하여, 583년 몽골고원을 본거지로 한 동돌궐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서돌궐로 분열했다. 그런데 이 동돌궐이 수에서 당초(唐初)에 이르는 중국의 정치적 동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양제는 서역방면으로 세력을 뻗는 데 성공하여 장성의 서쪽 끝은 둔황(敦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남쪽 칭하이(靑河) 지방에서 토욕혼(吐谷渾)이라는 유목민족의 국가가 일어나 동서교통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양제는 「서역도기(西域圖記)」의 저자로 알려진 배구(裵矩)를 서역지방에 파견하여 외국상인을 유치하는 동시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토욕혼을 쳐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양제가 토욕혼 정벌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감주(甘州) 장액군(張掖郡)에서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여 양주(?州) 무위군(武威郡)에 도착하자, 사막의 소국(小國)인 고창(高昌), 이오(伊吾), 기타 27개국의 사신이 양제에게 배알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서쪽으로부터 상인들이 중국에 몰려와, 이듬해에는 동도 뤄양에서 외국 상인들을 위한 견본시(見本市)가 열리기도 했다.수는 동남아시아로도 발전했다. 양제는 605년(大業 원년)에 참파(林邑)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수(隋)는 육군과 해군의 공동작전으로 참파의 수도를 점령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았다. 607년에 양제는 사신을 보내 유구국(流求國)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그 후 612년부터는 3회(612, 613, 614)에 걸쳐서 고구려의 정벌을 결행하여 자신이 전장에 출동한 일도 있었으나 모두 고구려군의 격렬한 반격을 받아서 전황은 언제나 수나라군에게 불리했다.그와 같은 전황 속에서 615년에는 돌궐(突厥)의 북변 침입을 받고 이것을 맞아 싸운 양제는 돌궐군에게 포위당하여 곤궁에 빠졌다. 이러한 외정의 실패가 가혹한 수탈을 당해 왔던 농민의 반란을 유발시켜, 드디어 전국적인 내란으로까지 발전하는 가운데 수나라의 지배는 종막을 고했다.
수의 멸망
[편집]隋-滅亡
양제에 의한 대운하 건설을 비롯한 대토목 공사강 부과했던 가혹한 노동과,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민중의 지지를 급속히 잃게 했다. 반란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그 규모와 기세는 2세기 말에 발생한 황건(黃巾)의 난을 능가할 정도였다.근거지인 장안의 군대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양제는 새로 근위군(近衛軍)을 편성하여 대운하를 따라 내려가 강도인 양조우(揚州)의 이궁(離宮)에서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려 했다. 각지에서 이연(李淵), 이밀(李密) 등 군웅이 군사를 일으키는 정세 속에서, 양제는 618년 강도에서 자신의 친위대(親衛隊)에 의해 살해되고, 얼마 후 같은 무천진(武天鎭) 군벌에 속하는 이연이 당(唐)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수 왕조는 대운하를 충분히 이용하기도 전에 멸망해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