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티베트인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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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인의 건국〔槪說〕[편집]

티베트인은 진(秦)·한(漢) 시대 때 저(?)나 강(羌)이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쓰촨(四川)·산시(陝西)·간쑤(甘肅) 지방에서 일찍부터 한민족과 교섭해 오다가 6조시대의 혼란기에는 몇 개의 지방 정권을 세운 일도 있었으나 후에 북조(北朝) 국가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자 토번(吐蕃)이라고 불리는 일대 왕국을 출현시켜서 당나라와 맞먹는 강국을 형성했다. 중국이나 인도의 문화를 배우고, 또한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성립시켜서 독특한 불교문화를 발전시켰고, 한편으로는 윈난(雲南)지방에 남조(南詔) 왕국이 출현하였다.

토번[편집]

吐蕃

중국인들의 티베트에 대한 호칭. 티베트에서는 7세기 초에 비로소 통일국가가 생겼다. 그들 자신은 보에라고 했지만, 중국인은 토번(吐藩)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왕국이 멸망한 뒤인 14세기 중엽까지 티베트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토번의 선조는 원래 지방귀족이었으나, 7세기 초 송첸감포가 서진하여 라사를 수도로 통일국가를 세웠다. 첸포(强者의 뜻)란 왕을 칭한다. 그 지배계급은 유목생활(遊牧生活)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그 행동반경은 컸으며 강력한 군사력(軍事力)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당(唐)은 서북변경에 끊임없는 위협과 공격을 받았다. 이에 당의 태종(太宗)은 문성공주(文成公主)를 강가(降嫁)시켜(641) 이를 회유하고, 이후 양국은 화친했다. 송첸이 죽은 후, 가르첸냐가 권력을 쥐고 서투르키스탄에 진출, 안서사진(安西四鎭)을 공략하여 당의 서역 경영을 위태롭게 했다. 710년 당의 중종(中宗)은 금성공주(金城公主)를 당시의 첸포(王)인 치데추쿠찬과 결혼시켜 양국의 평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토번은 이것을 기회삼아 더욱 적극적으로 당을 공격했지만 당은 현종(玄宗) 때부터 공세로 나와 이를 봉쇄했다.그러나 755년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탄 치손데첸의 군대는 하서(河西)·농우(?右) 지대를 휩쓸어, 763년에는 당의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수도에서는 단시일에 철퇴했으나, 하서·농우 지대는 당말(唐末)에 이르기까지 점령된 채로 있었다. 그러나 북방의 위구르가 친화(親華) 정책을 견지하고, 남방의 남조(南詔)도 토번을 멀리했기 때문에 토번은 당과 화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송첸이 문성공주(文成公主) 등을 통하여 중국과 네팔의 불교(佛敎)를 도입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인도계(系)와 중국계의 승려가 티베트에서 활약하여, 궁정(宮庭)에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두 파(派)의 승려는 서로 대항했는데 인도계가 승리를 거두었으며, 카슈미르에서 온 파드마삼바바는 삼예사원(寺院)을 세워 티베트 밀교(密敎)의 개조가 되었다. 티베트인 승려도 이때부터 경전의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의 고유 종교였던 샤머니즘은 이러한 불교에 수차 반동적 작용을 했기 때문에 폐불(廢佛) 운동이 일어나는 등 불교는 대타격을 받았다. 이에 토번 왕국의 통일은 와해되었다.

라마교[편집]

-敎

라마(bla ma)란 ‘지덕(知德)을 겸비한 승려(上人)’라는 뜻이며, 산스크리트의 guru(師匠)와 대응한다. 일반적으로 티베트의 승려를 라마라고 불렀으며, 또 그 종교에 특이한 면이 있기 때문에 중국인이나 유럽인이 이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 라마교는 티베트는 물론 내몽골, 네팔, 부탄 등에서 성행했는데, 그 이전에는 외몽골, 서투르키스탄의 일부에서도 성행하였다.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지기는 7세기 초엽부터인 토번(吐藩)시대이다. 치손데첸 시대에 국교(國敎)적 지위가 확립되고, 치추크데첸 시대에 더욱 발전되었는데, 다음의 다르마 왕 때에 철저한 폐불정책(廢佛政策)으로 쇠미해졌다. 본교(Bon)라고 불리는 토착(土着)의 샤머니즘적 종교와는 오랫동안 투쟁과 융합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는 치손데첸 시대에 티베트로 들어온 캬슈미르 승려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蓮華生)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티베트 불교의 밀교적(密敎的) 색채는 그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대승(大乘)은 5세기부터 쇠퇴하고, 그 존속(存續)을 위해서는 힌두교와의 타협으로써 밀교적 색채를 짙게 하여야 한다. 라마교는 그 무렵의 불교를 받아들였던 까닭으로 괴기영악(怪奇獰惡)한 제상(諸相)과 남녀 포합(抱合)의 여러 불상(佛像)과 그 공양법(供養法)을 본받고 있다.

남조[편집]

南詔

당나라 때 티베트 버마족이 지금의 윈난(雲南) 지방에 세운 왕국. 조(詔)란 왕(王)의 뜻. 당시 쓰촨성(四川省)의 서부에서 윈난성에 걸치는 지역에는 몽수(蒙?)·월석(越析)·시랑(施浪)·등섬(▩?)·낭궁(浪穹)·몽사(蒙舍) 등의 6조국(六詔國)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그중 몽사조국(蒙舍詔國)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조(南詔)라고 한다. 당(唐)의 정관(貞觀) 연간에는 남조가 대몽국(大蒙國)이라 칭하고, 당나라에 조공(朝貢)하였다. 그 후 대몽(大蒙)은 당과 결속하여 세력을 확장하더니 8세기 중엽 피라각(皮羅閣) 때 다른 5조국(詔國)을 병합하여 6조(詔)의 통일에 성공한 후 다리(大理)에 도읍하였고 이 지방에 세력을 신장해 오던 티베트 세력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당나라와 불화(不和)가 생겨서 한때는 당나라의 토벌(討伐)을 받았으나,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당의 윈난 경략(經略)이 주춤한 틈을 타서 남조는 도리어 쓰촨(四川)까지도 세력을 뻗쳤다. 특히 8세기 말기에 이모심(異牟尋)이 남조를 다스릴 때는 티베트와 결속해서 당에 침공(侵攻)하기도 하여 남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모심은 티베트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당에 귀순하였다. 이모심의 사후 당과 남조 사이는 여러 해 동안 불화가 계속되어 당말의 혼란기에는 당과의 교통은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리하여 901년 한인(漢人) 정매사(鄭買嗣)의 찬탈(簒奪)로 멸망하였다. 남조에서는 부친(父親) 이름의 끝 자(字)를 아들 이름의 첫 자에 붙이는 독특한 부자연명(父子連名)의 형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