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독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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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화국〔槪說〕[편집]

1918년 11월의 독일혁명으로 독일은 공화국으로서 재출발했다. 1919년 1월에는 혁명을 다시 철저하게 하려고 한 스파르타쿠스단(團)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사회민주당 정부는 군부와 협력하여 이 행동을 진압하고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참살되었다. 사회민주당·민주당·중앙당이 다수파가 되어 2월에 헌법 제정 국민회의가 개최되고, 8월에 공화국 헌법이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 헌법이 보통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초대 대통령에는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가 선출되었다. 공화국 정부는 독일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전혀 불리한 베르사유 조약에 부득이 조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출발 당초부터 곤란한 문제를 지니게 되었다. 배상금 총액이 1천3백20억 금태환(金兌換) 마르크로 결정되자, 그 지불을 위하여 국민 생활은 악화되었다. 1920년에는 이러한 사회 혼란을 배경으로 우익운동(右翼運動)인 카프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암살이 횡행하여 사회 불안이 증대되었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가 배상 지불 불이행을 이유로 루르 점령을 단행하자 정부는 ‘소극적 저항’ 방침을 세우고 일체의 생산 활동을 정지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생산은 격감하고 자본가에의 보상이나 노동자의 생활 보장에 많은 액수의 불환지폐(不換紙幣)를 발행하니 화폐 가치는 폭락하여 미증유의 인플레이션이 되고 국민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다.

히틀러가 뮌헨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때이다. 이 위기는 슈트레제만의 거국 일치 내각에 의하여 렌텐마르크의 발행 등으로 해결되어 1924년에는 미국의 원조로 배상 지불 방법 ‘도즈안(案)’이 나와 겨우 경제 부흥에의 길이 열렸다. 1925년에는 로카르노 조약에 의하여 국제연맹에의 가입이 인정되어 국제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독일혁명[편집]

獨逸革命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 패전을 계기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 1918년 11월 킬 군항의 수병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11월혁명이라고도 하며, 이 혁명으로 인해 제정(帝政)이 붕괴되었다. 베를린 폭동을 발단으로 하여 제제(帝制)의 폐지와 공화제 정권의 수립을 목적으로 베를린에 인민대표위원회 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스파르타쿠스단(團) 등 여러 세력은 방침이 일치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이 실패하여 혁명 세력이 분열했다. 결국 사회민주당이 승리하여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했다.

스파르타쿠스단[편집]

-團 Spartacusbund

독일 공산당(共産黨)의 전신(前身). 로마의 노예 반란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쿠스』지(誌)의 발행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의 좌익(左翼)의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등은 정부의 전쟁계속정책을 지지하는 방침을 취한 당(黨)의 지도에 반대하여, 반전운동(反戰運動)과 사회주의실현(社會主義實現)을 주장하면서 급진분자(急進分子)를 모아 비합법활동을 개시하였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이 성립되자, 이에 참가하여 극좌파(極左派)가 되었다.

1918년 11월 혁명을 지도하여 제제(帝制)를 붕괴시켰으나,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과 독립사회민주당(獨立社會民主黨)이 조직한 혁명 정부에는 참가하지 않아 세력은 미약했다. 1919년 1월 독일 공산당을 창설하였으나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실패에 그쳤다가,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의 좌익을 합침으로써 공산당의 기초를 겨우 세웠다.

바이마르 헌법[편집]

-憲法

바이마르(Weimar) 헌법은 1919년 8월 실시된 독일공화국 헌법.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고 찬사를 받았다. 20세 이상의 남녀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지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민투표가 행해지며,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이나 경영참가권도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운용에 관해서는 봉건 세력인 융커 세력이나 제정 시대의 관료·군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행해지지 못하고, 후년에는 대통령의 비상대권(非常大權) 등이 남용되게 되었다. 히틀러가 대두함과 동시에 효력을 잃었다.

루르 점령[편집]

-占領

프랑스에 의한 독일의 공업지대 루르(Ruhr) 지방의 점령(1923

25).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프랑스의 푸앵카레 정부가 벨기에와 함께 루르 지대에 파병, 점령했으나 독일은 생산 중지로써 저항하였으며, 그 결과 독일은 파국적 인플레이션 상태가 되었다.

슈트레제만[편집]

Gustav Stresemann (1878

1929)

독일의 정치가. 1923년 공화국의 수상 겸 외상이 되고 루르 철병, 렌텐마르크 발행으로 통화 안정에 노력했다. 도스안(案)을 승인,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 국제연맹 가입 실현 등 독일 회복과 평화 유지에 노력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

뮌헨 반란[편집]

-反亂

히틀러 및 루덴도르프를 중심으로 하여 뮌헨에서 기도(企圖)된 공화국 정부타도의 쿠데타. 1923년 1월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은 독일경제를 파멸시켜, 국내의 좌우(左右) 양익(兩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히틀러가 인솔하는 나치스는 조국 구제를 위해 공화국 정부를 타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바이에른 군부(軍部)와 결합하여 베를린 진군(進軍)을 기도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임시국민정부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베를린 정부는 무력탄압방침을 명백히 하였고 또한 바이에른 군부내에도 폭동 반대자가 많았기 때문에 다음날 9일 폭동 참가자의 뮌헨 시내 데모 행진은 경관대와 군대에 의해 저지되어 폭동은 간단히 진압되었다.

렌텐마르크[편집]

Rentenmark

1923년 독일에서 발행된 지폐. 루르 점령 후 미증유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마르크의 가치가 1조분(兆分)의 1로 떨어져 사회 불안이 증대되었으므로 수상 슈트레제만은 1조(兆) 마르크를 1렌텐마르크로 환산하여 인플레이션을 극복하려 했다. 1924년 라이히스마르크로 바뀌었다.

도스안[편집]

-案

독일 배상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도스(C. G. Dawes)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결정한 독일 경제 부흥안(1924). 미국 자본을 독일에 투입하여 독일 경제를 부흥시켜 영국·프랑스에의 지불 능력을 기르며, 독일로부터 지불받은 배상금을 가지고 영국·프랑스는 대(對) 전채(戰債)를 지불한다는 상호 관계가 성립한다.

영안[편집]

-案

미국의 영(O. D. Young)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결정한 지불 배상 방법의 수정안(1930). 배상 총액은 358억 금태환(金太換) 마르크로 경감되고, 59년 동안의 연부 지불(年賦支拂)로 된다. 그러나 세계공황으로 인하여 외국 자본이 회수되자 거듭 독일 경제는 혼란, 1932년 로잔 회의에서 다시 수정되어 30억 금태환 마르크로 감액(減額)되었다. 나치스는 영의 안에 반대 운동을 일으켜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