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전후의 동유럽권
전후의 동유럽권〔槪說〕
[편집]동유럽은 지리적으로 서부 유럽, 서남 아시아, 러시아 연방 등과 인접하고 있어 주변 지역으로부터 자주 침입을 받아왔다. 5세기경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았고 15
17세기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을 받는 등 주변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국경선의 변화가 심했으며 인구이동도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경선이 조정되면서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인구이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 등 7개국이 공산화되었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이탈,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노동자의거, 1960년 알바니아의 이탈, 1964년 루마니아의 자주노선 선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운동 등 일련의 반소련 또는 반사회주의 사건이 전개되었다.
1989년 이후 민주화운동으로 알바니아를 제외한 국가들에 비공산당정권이 수립되었고, 민족분쟁으로 다민족 연방국가들의 해체가 이루어졌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1991년 6월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1991년 9월 마케도니아, 1992년 3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을 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 1일 연방체제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하였다.
동유럽 국가들은 1991년에 각각 해체된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와 동유럽경제 상호원조회의(Comecon)를 통해 결속해왔다. 1989년 이후 알바니아를 제외한 국가들은 과거 40여 년간 추구해 온 공산당 독재체제 및 중앙통제 경제체제를 포기하고 헌법 개정을 통하여 다당제에 입각한 의회민주주의제도 및 시장경제체체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외교 관계를 다원화하고 경제교류의 폭을 확대하고 있다.
유고 제명
[편집]-除名
1948년 6월 28일 베를린 봉쇄를 둘러싸고 동서의 긴장이 증대되고 있을 때 유고가 참가하지 않은 제2차 코민포름 회의에서 유고 공산당을 제명하기로 결의,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광신적 존재였던 독재자 스탈린의 절대적 지배하에 놓여 있었던 동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 유독 티토가 지도하는 유고 공산당만은 자주성을 찾으며 독자적인 노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제명 이유를 민족주의적 편향(偏向)과 관료주의적 당풍(黨風)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 후 1955년 흐루시초프는 유고를 방문하고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1960년 세계 81개국 공산당회의에서 유고의 공산당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이탈한 당으로 비난하였다.
티토
[편집]Tito (1892
1980)
유고의 종신 대통령. 크로아티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유고 공산당에 입당, 1941년 독일군 점령하에서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저항운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수상, 1953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독자적인 민족주의 노선으로 유고를 이끌었으며, 적극 중립주의를 기조로 인도의 네루, 통일 아랍공화국의 나세르와 함께 비동맹주의 여러 나라를 이끌어 왔다. 1969년 루마니아와의 회담에서 내정불간섭을 강조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중공과 10년 만에 복교(復交)에 합의했다. 1970년에는 닉슨 미대통령의 유고방문을 받았고, 서독과 프랑스를 방문하여 공산국가로서는 처음으로 EEC를 승인하였다. 그는 국내에서는 기업의 채산, 이윤의 원칙에 입각한 생산 분배의 대폭적인 자유를 인정하였다. 1968년 소련의 체코 침입을 의식한 티토는 자신의 사후 소련의 침공을 염려하여 1971년 9월 25일 브레주네프의 방문을 받아들여 유고·소련 관계를 호전시켰으며, 1972년 6월에는 티토 대통령 자신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1974년 5월 연방의회에서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민족적·종교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을 지키며 경제건설을 추진하였다.
헝가리 의거
[편집]-義擧
1956년 자유를 희구하는 헝가리의 각 대학생·노동자들이 반소(反蘇)·반정부 데모를 일으켜 대폭동으로 바뀐 사건.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소련에서는 약간의 정치생활 개선,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동유럽 여러 나라에도 파급되어 1956년 6월에 폴란드 포즈나니 폭동(Poznan 暴動)에 영향받은 헝가리의 대학생들이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데모를 일으키고 대소(對蘇) 관계에서 민족평등을 요구하였다. 소련군(蘇聯軍)의 출동은 반소감정을 격화시켜, 전국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게 되었다. 나지(Nagy) 수상이 폭동 참가자의 불체포(不逮捕) 등 개혁안을 발표하고 소련군의 철수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탈퇴, 중립선언 등을 요구하자 소련은 비등하는 세계여론을 무시하고 나지를 비롯한 정부 수뇌들을 처형하여 헝가리의 반공혁명을 진압하였다. 이리하여 수많은 헝가리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국외로 망명하였다. 헝가리 의거로 수천 명이 희생되었고, 무력저항은 11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체코의 자유화운동
[편집]-自由化運動
1967년 체코는 계속된 경제침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경제 방식을 채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상·문학·예술의 자유화에 대한 요망도 강력하게 일어나 두브체크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와 당 제1서기의 노보트니 집권파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해 12월에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개혁파가 대세를 제압하게 되었고, 실력으로 당 제1서기의 직위에 오른 두브체크는 공산당 이외의 정당의 인정,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허용, 선거법 개정 등 강력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코의 자유화운동이 다른 동구 제국들에게 전파될 것을 우려한 소련은 1968년 8월 21일 바르샤바 조약군을 체코 전국토에 진주시켜 그 불을 끄고, 1969년 4월 17일에 진소파 후사크를 등장시켜 두브체크를 실각시킴으로써 ‘프라하의 봄’으로 일컬어지는 체코 자유화운동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두브체크, 시사르, 스므르코프스키 등 자유화운동의 기수들이 축출되어 체코 자유화운동은 일단 침체기에 들어갔으나, 1977년 244명이 서명한 ‘77헌장’을 발표, 1983년 반소·반체제 시위가 발생, 1988년에 ‘77헌장’ 회원을 중심으로 ‘시민자유운동’을 결성하였다.
1988년 가을, 소련의 개혁 바람이 동구권에 미치자,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도 민주세력인 ‘시민포럼’을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함에 따라 12월 공산정권이 퇴진하고 ‘시민포럼’의 지도자 하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 3월에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 6월에는 자유총선을 통한 민주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후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
[편집]Republic of Bosnia and Herzego- vina
1946년 북부 보스니아와 남부 헤르체고비나 지방이 합쳐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고연방의 제1공화국이 됐다가 91년 10월 주권국가를 선언하였다. 회교도 크로아티아인과 소수민족 세르비아계간에 유혈 분규가 발생함으로써 유교내전의 초점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이행하였다. 1992년 4월 보스니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가 각각 독립 쟁취를 위한 내전에 돌입하였다. 95년 12월 평화정착을 위한 위한 ‘데이턴협정’ 체결 이후 회교 크로아티아 연방과 세르비아계의 스르프스카공화국 간에 국가연합 형태로 외형상 한 나라를 구성하지만 대통령과 의회, 법률로 구성하였다. 이와 함께 크로아티아 연방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형식상 하나로 묶는 연방정부가 구성되는데, 3인의 대통령단과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연방정부는 외교적 상징을 나타내며 분쟁을 조정하는 상설협의체에 불과하다. 96년 6월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과도수반 카리지치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부통령인 빌야나 플라브시치가 승계하였다. 12월 내전 이후 최초의 내각 구성에 합의했으며, 97년 7월 플라브시치가 의회 해산과 조기총선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계 민주당 강경파들이 당에서 축출하였다. l8월 세르비아계의 카라지치 지지 세력과 나토 평화안정군 간의 충돌사태로 내전 위기를 맞았으며, 11월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공화국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카라지치를 지지하는 세르비아 민주당이 승리하였다.
코소보
[편집]Kosovo
유고연방 내 세르비아공화국에 위치한 자치주(自治州). 알바니아와 국경을 맞댄 코소보의 주민 2백만 명 중 90%가 알바니아계이다. 고(故) 티토 대통령 치하에서 자치를 누려왔던 코소보는 ‘대(大)세르비아 주의’를 내건 밀로셰비치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지난 89년 자치권을 상당부분 박탈당했다. 1998년 2월 코소보내 민족주의 무장단체인 코소보해방군(KLA)이 분리독립을 추구하자 세르비아 당국은 가혹한 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8백여 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숨졌고, 30만 명 가까운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난민들은 박해를 피해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세르비아측이 코소보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전성기였던 14세기 스테판 두산 왕조 시절에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가 그곳에서 출발했고, 특히 1389년 오스만 투르크가 침공했을 때 기독교 군대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바로 ‘코소보 전투’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지금도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세르비아인들의 정교(Orthodox) 교회들이 밀집해 있다. 이후 5백년 동안의 오스만 제국 통치 시절에 같은 회교도들인 알바니아인들이 대량으로 코소보 지역에 이주해와 지금의 인구 분포를 이루게 됐다. 코소보 사태의 씨앗이 이때 잉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