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후기 문학/가사의 성행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가사[편집]

歌辭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를 정점으로 하던 가사는 한동안 주춤하였다가 소설문학의 자극을 받아 새로운 장편가사로 널리 창작되었다. 원래 가사는 4·4조의 운문으로 그 표현이 자유롭고 또 낭랑(朗朗) 음송(吟誦)할 만하므로 부녀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 가사는 잡가와는 달리 양반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숙종 이후에는 장편으로 변모 창작되었다.

이 시대의 작품은 서사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은 역사·설교·교훈·기행 등을 표현했다. 묘사가 사실적이며 날카롭고 능란한 것은 실학·소설 등의 영향과 이 시대의 추세였던 것 같다. 그러나 기록에 이름이 보이는 가사는 허다하지만 실제로 작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선조 무렵에 이루어진 것은 송강·노계 가사 외에도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이수광의 <조천록(朝天錄)>, 조위한(趙緯韓)의 <유민탄(流民嘆)>, 임유후(任有後)의 <목동가(牧童歌)> 등의 이름 또는 가사가 유전(流傳)한다. 영·정조시대에 내려와서는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 강응환(姜膺煥)의 <무호가(武豪歌)>,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이 나왔다. 정조 때의 안조환(安肇煥)의 <만언사(萬言詞)>, 순조 때 조성신(趙星臣)의 <개암가(皆岩歌)> <도산별곡(陶山別曲)>, 그리고 정학유(丁學游)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발표되었다. 현종 때의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漢陽歌)>, 철종 때에는 동학(東學)교주 최수운(崔水雲)의 작이라는 <용담유사(龍潭遺詞)>

<교훈가> 등이, 고종 때에는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가 창작되었다.

이 시대의 가사문학은 형식 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져 현실의 율조와 산문적인 내용이 분화됨을 볼 수 있다. 즉 완전히 산문에 가까워지고, 다른 일부는 전통적인 민요 등의 영향으로 창(唱)의 부수적인 창사(唱詞)로 변질된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가사는 <일동장유가> <연행가> <한양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은 가사의 산문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노계의 가사[편집]

蘆溪-歌辭

송강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송강이 문인임에 비하여 일개 무인(武人)으로 가사작품을 남겨 놓은 사람이 노계 박인로이다. 그의 작품은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인 호흡 속에서 창작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임란이 끝나고 부산에 남아 있던 왜병이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졸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태평사>, 용진(龍津) 동사제(東莎堤)에 있는 이덕형(李德馨)을 방문했을 때 지은 <사제곡(莎堤曲)>, 누항에 있으나 낙도(樂道)함을 읊은 <누항사(陋巷詞)>, 부산에 수자리가며 지은 <선상탄(船上嘆)>, 이언적(李彦迪)의 옛집을 찾아 지은 <독락당가(獨樂堂歌)>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와 그 밖에 시조 60여 수를 남기고 있다. 그의 가사는 우국애의 발로였고 또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 화려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고공가(雇工歌)[편집]

조선 선조 때 작가 미상의 가사. 허전(許▩) 또는 선조가 지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만조 백관을 머슴에 비유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살림을 상전인 임금의 입장에서 탄식한 것이다.

이원익[편집]

李元翼 (1547-1634)

조선 명종-인조 때의 학자·문인. 호는 오리(梧里). 선조·광해군·인조의 3대에 걸친 명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다. 가사에 <고공답주인가>가 있고,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이 있다. <가곡원류>에 다음 시조 1수가 전한다.

"록양이 쳔만자인들 가난 춘풍 매여 두며

탐화 봉뎝인들 디난 고즐 어이하리.

아모리 근원이 듕한들 가난 님을 어이리."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편집]

선조 때의 학자·공신인 이원익이 지은 가사. 내용은 <고공가>에 답하는 형식을 빌어 작가가 영의정을 어른 종에 빗대어서 왕인 상전의 말을 듣지 않는 종·머슴들을 꾸짖는 한편, 어른 종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상전을 간한 것이다.

조천록(朝天錄)[편집]

선조-인조 때의 학자 이수광이 지은 가사. 전후 2곡으로 되었다 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박인로[편집]

朴仁老 (1561-1642)

조선 명종-인조 때의 무신(武臣)·시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무하옹(無何翁). 무과에 급제.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고, 수군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 왜군이 퇴각하자 사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사>를 지었으며,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벼슬이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고, 뒤에 고향인 노계에 숨어서 독서와 시작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은 조국애와 자연애를 바탕으로 시정(詩情)과 우국애가 넘쳐 흐르며, 무인다운 기백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서사적인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작품에 가사로 <태평사>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이 있고 시조에는 <조홍시가>1수, <오륜가>25수, <입암(立巖)> 29수 그 밖의 13수 등 모두 68수가 있는데 대부분이 그의 문집 <노계집>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태평사(太平詞)[편집]

조선 선조 31년(1598)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왜군이 퇴각하자 사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 한다. 내용은 임진란 싸움의 처참한 광경과 우리 군사들의 출전, 적군의 격퇴 및 종전 후 군사들의 즐거워함을 그린 것으로 가사의 첫머리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라히 偏小하야 海東애 바려셔도 箕子遺風이 古今 업시 淳厚하야 二百年來예 禮儀을 崇尙하니 衣冠文物이 漢唐宋이 되야떠니, 島夷百萬이 一朝애 衡突하야 億兆驚魂이 칼 빗츨 조차 나니 平原에 사힌 뼈는 뫼두곤 노파잇고 雄都巨邑은 豺狐窟이 되얏거날, 凄凉玉輦이 蜀中으로 봐와드니 烟塵이 아득하야 日色이 열워떠니, 聖天子神武하샤 一怒를 크게 내야 平壤群兇을 一劒下의 다 버히고 風驅南下 하야 하海에 더져두고 窮寇을 勿迫하야 몃몃해를 디내연고…"

선상탄(船上嘆)[편집]

선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그가 임진란 때 통주사(統舟師)로 종군해서 부산에 있을 때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배 위에서 지은 것이다. 내용은 배의 유래와 나라에 대한 근심을 적은 것으로 가사의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 … 태평천하애 堯舜君民되야이셔, 日月光華난 朝復朝하얏거든, 戰般 타던 우리 몸도 漁舟에 唱晩하고, 추월춘풍에 놉히 베고 누어 이셔, 聖代 海不揚波를 다시 보려하노라……."

사제곡(莎堤曲)[편집]

조선 광해군 때(1613) 박인로가 지은 가사. 친구 이덕형(李德馨)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진(龍津)의 사제에 있을 때 그의 불우함을 동정하여 친히 찾아가 보고 이 가사를 지었는데 사제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 가운데 소요하는 이덕형의 생활을 읊은 것이다. <노계선생문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일부를 들면,

" … 벽파 양양(碧波洋洋)하니 위수 이천(渭水伊川) 아닌게오. 층만(層巒)이 올올하니 부춘 기산(富春箕山) 아닌게오. 임심 노흑(林深路黑)하니 회옹(晦翁) 운곡(雲谷) 아닌게오. 천감 토비(泉甘土肥)하니 이원(李愿) 반곡(盤谷) 아닌게오. 배회 사억(徘徊思憶)호대 아모 댄 줄 내 몰내라 … "

누항사(陋巷詞)[편집]

조선 광해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언젠가 친구인 이덕형이 노계의 빈한한 생활을 물었을 때 그것에 답하여 지은 노래로 안빈 낙도(安貧樂道)한다는 뜻을 일러준 것으로 그의 문집인 <노계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어리고 우활(迂闊)할산 이애 우애 더니 업다. 길흉 화복을 하날긔 부쳐 두고 누항(陋巷) 깁푼 곳의 초막(草幕)을 지어 두고, 풍조(風朝) 우석(雨夕)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셔 홉 밥 닷 홉 죽에 연기도 하도 할샤…"

독락당(獨樂堂)[편집]

광해군 때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노계가 이언적(李彦迪)이 살고 있던 경주 옥산(玉山) 서원의 독락당을 찾았을 때 이언적을 그리어 그 곳의 정경을 노래한 것으로 <노계문집>에 실려 전한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봉만(峯巒)은 수려하야 무이산이 되여 잇고 류수난 반회(般回)하야 후이천이 되엿나다. 이러한 명구(名區)에 임재 어이 업돗던고. 일천 년 신라와 오백제 고려에 현인군자들이 만히도 지닌마낸 천간지비하야 아선생(我先生)께 기치도다…"

영남가(嶺南歌)[편집]

선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인조 13년(1635) 그의 75세 때의 작품. 영남 안절사(按節使) 이근원(李謹元)이 이곳 사람들을 잘 다스림을 찬미하여 부른 것이라 하며, <노계집>에 전한다.

노계가(蘆溪歌)[편집]

인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내용은 그가 만년에 살던 노계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문집 <노계집>에 실려 전한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 어린 이 몸은 인자도 아니오 지자도 아니로대, 산수에 벽이 이러 늘글사록 더욱 하니, 져 귀한 삼공과 이 강산을 밧골소냐. 어리미친 이 말을 우으리도 하렷마난 아무리 우어도 나난 됴히 여기노라…"

노계집(盧溪集)[편집]

노계 박인로의 시문집. 원명은 <노계선생문집>. 권3에 <태평사> <독랑당> <영남가> <노계가>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의 가사 7편과 <오륜가>를 포함한 시조 60수가 실려 있다(책 끝에 붙은 <도산가(陶山歌)>는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

유민탄(流民嘆)[편집]

조선 선조-인조 때 사람 조위탄이 지은 가사. 가사는 전하지 않았다. <순오지(旬五志)>에 의하면 광해군 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참상을 보고 지었다 함.

목동가(牧童歌)[편집]

조선 광해군-현종 때의 학자 임유후가 지은 가사. 아우 지후(之後)가 역모의 죄로 일문이 화를 입게 되자, 숨어 살며 초사(楚辭)를 본받아 지었다 하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무호가(武豪歌)[편집]

조선 영조 때 무관 강응환(1735-1795)이 지은 가사. 모두 128구로 무인의 호기와 병자란의 원한을 갚겠다는 무인의 결심을 읊은 것이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편집]

조선 철종 때 정학유(鄭學游)가 지은 가사(고상안이 지었다고 하나 잘못임). 내용은 1년 동안의 농가의 할 일을 가사형식으로 해서 권농(勸農)의 내용을 읊은 것으로 '월령'은 그달 그달에 할 일을 적은 행사표를 말하는데 그중 5월령을 들면 다음과 같다.

"사월이라 맹하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국새 자로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농사도 한창이요, 농잠도 방장이라.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한양가(漢陽歌)[편집]

조선 헌종 10년 본명은 알 수 없는 한산거사가 지은 장편가사. 작품은 조선조의 문물을 찬양한 노래로 모두 1622구의 장편이다. 한양의 지세의 뛰어남과 서울의 웅대한 궁전, 찬란한 관아, 번화한 거리의 높이, 임금의 거동, 과거의 광경 등을 노래하고 끝으로 역대 도읍 중에서 한양이 으뜸이라는 것을 찬양하였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편집]

조선 영조 39년에 김인겸(1707- ? )이 지은 장편가사. 일종의 기행문학으로 내용은 그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가는 조엄의 서기로 따라가 그 이듬해 돌아올 때까지 그 곳의 문물·제도·인정·풍속 등을 듣고 본대로 적은 것으로 모두 8천수백 구인데 그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닻 들고 櫓役(노역)하여 半洋으로 나갈 적에 세 배 탄 왜놈들이 점선차로 나오다가 三使臣 만나보고 돛 지으고 닻을 준다. 뮌 대가리 벌건 다리 처음으로 만나보니 人形이 바히 없어 놀랍고 더럽고나. 三絃 소래 듣노라고 般頭에 묶어서서, 가라치고 들레는 양 所見이 驚駭(경해)하다…"

연행가(燕行歌)[편집]

조선 고종 때 홍순학(洪淳學, 1842- ? )이 지은 장편가사. 고종 3년 중국 연경(燕京)을 다녀와서 그 이듬해에 지은 것으로 일종의 기행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일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夏 오월 초 칠일에 渡江 일자 정하였데. 方物을 점검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압록강변 다다르니 送客亭이 예로구나, 의주 부윤 나와 앉고 다담상을 차려다가, 삼 사신을 전변할 제 처창하기도 그지 없다 … "

북천가(北遷歌)[편집]

조선 철종 때 홍문관 교리 김진형(金鎭衡, 1801- ? )이 지은 장편가사. 모두 1040구의 장편. 그가 이조 판서 홍기순의 당파싸움을 논박하다가 몰리어 명천으로 귀양갔는데, 이 가사는 그 때 유배지의 생활과 견문을 노래한 유배문학 작품으로 이 역시 장편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내방가사[편집]

內房歌辭

또한 규중의 여성들에 의하여 여류문학으로서의 가사가 창작되었다. 내방가사는 조선 말 가정에 숨은 부녀의 손으로 지어지고 또 전해진 노래들의 총칭으로 그 수효가 몇십에 이른다. 현재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무명씨의 작이 많고, 선조 때 무옥(巫玉)의 작이라는 <규원가(閨怨歌)>는 대표적인 가사의 하나라 하겠다.

봉건시대의 사슬에 얽매여 규중에 숨어 살던 여성들의 하소연, 슬픔, 그리고 남녀간의 애정, 시집살이의 괴로움, 예의범절, 현모양처의 도리 등 부녀자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양반계급의 부녀자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 많고, 이들은 대개 궁체의 국문으로 두루마리에 적혀 전한다. 대개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 가사의 태내에서 내방가사로서 여류 문학으로, 잡가(雜歌)로서 서민문학으로 각기 분화하여 차츰 민요로 흡수되었다.

규원가(閨怨歌)[편집]

허균(許均)의 첩 무옥(巫玉)이 시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지었다는 내방가사. 내용은 집안에 들어박혀 사는 아낙네의 심경을 하소연한 것으로 가사의 처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엊그제 점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거니. 소년 행락(行樂)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늙거야 설운 말삼 하자니 목이 멘다."

허난설헌[편집]

許蘭雪軒 (1563-1589)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 본명은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 허균의 누이로 특히 한시에 뛰어났으며, 올케인 무옥과 함께 가사 <규원가>를 지었고, 시집에 <난설헌시집>이 전한다.

규수상사곡(閨秀相思曲)[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남녀간의 연정을 그린 것으로 그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야 상사 내 마음을 헤아리고 못 보기는 뉘 탓이며, 못 잊기는 무삼 일고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내 청춘 어여쁘다…"

규중행실가(閨中行實歌)[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여자가 시집가서 행할 도리와 범절을 훈계한 노래. 그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의 흥망 성쇠는 부녀 얻기 달렷니라. 시부모를 호양하여 이웃 사람 칭찬하니, 음식 시비 문안하고 음식 등절 맞기 하소. 의복을 정하기 하고 낯빛을 화하기 하며 한 걸음도 조심하소 … "

노처녀가(老處女歌)[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노처녀의 신세타령으로 가사의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 … 어디서 손님오면 행여나 중매신가, 아희 불러 힐문한 즉, 풍턴 약정 환자 재촉. 어디서 편지 왔네, 행여나 청혼인가 아희다려 물어보니, 외삼촌의 부음이라, 애닮고 설은지고 이내 간장을 어이 할고 … "

계녀가(誡女歌)[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시집가는 외딸에게 어머니가 시집살이를 훈계한 것으로 가사의 일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문이 생긴 후에 오륜이 쫓아나니, 규중의 여자로서 다알수야 있나마는 칠거지악 옛 법이라 삼종지도 모를소냐. 그 중에 사친지도 백행 중에 으뜸이라."

사친가(思親歌)[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시집간 딸이 그 친정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읊은 것인데 그 가사의 일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못 할레라 못 할레라 부모 생각 못할레라. 전생에 무삼 죄로 여자몸 되어 나서 부모 형제 멀리 두고 이십 전에 출가하야 부모 동기 그리는고 … "

시절가(時節歌)[편집]

내방가사의 하나.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부녀들의 봄놀이 하는 춘흥을 그린 것이다.

화전가(花煎歌)[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봄철의 여자들이 잠시 시집살이의 굴레를 벗어나서 즐겁게 화전놀이하던 일을 노래 부른 것으로,

'화전'은 진달래 꽃잎을 쌀가루에 섞거나 무치어 부친 부꾸미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