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후기 문학/사설시조와 가집의 편찬
사설시조
[편집]辭說時調
시조는 선조 때 윤선도(尹善道)를 최고봉으로 점차 참신한 창작 의욕을 잃게 되었다. 영·정조시대에는 점차 시들어 서리(胥吏)들에게 옮아가 김천택(金天澤)·김수장(金壽長) 등에 의해 시조집의 편찬과 함께 평민 작가들의 창작열을 높였다. 또한 여류시인으로 허난설헌이 있었다.
한편 순조 이후 서민으로 흘러간 시조는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형태를 낳아서 평민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 선구적인 작품으로는 정철의 <장진주사> 같은 가곡(歌曲)의 형태가 있지만, 이제까지 평시조를 지배하고 있던 양반 문학적 의식인 자연에의 도피와 음풍영월(陰風詠月)의 성격을 지양하고 그 소재를 서민생활에 확대하였다.
사설시조는 일명 농시조(弄時調)라고도 하며, 그 형식은 장형(長形)으로 그 작가들도 중인 가객·작가·부인네·기생·상인 등 서민들과 몰락한 양반들이 대부분이다. 그 형식은 초장·중장이 짧고, 종장은 대중없이 길며, 종장의 첫구만이 겨우 시조의 형태를 지닌 것과, 3장 중 어느 2장이 보통의 시조보다 긴 것이 발견된다. 사상에서는 양반 귀족처럼 관념적·고답적인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생활을 중심으로 대부분 적나라(赤裸裸)한 남녀간의 사랑을 읊었다. 즉 재담·욕설·음담·애욕 등을 기탄없이 대담하게 묘사 풍자했고, 형식에서도 민요·가사·대화 등이 섞여 잡박(雜駁)한 희롱사로 변하게 되었다.
작가와 시조계
[편집]作家-時調界
영·정시대를 지나면서부터 시조계는 창곡(唱曲)만 왕성했을 뿐 시조의 창작은 점차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 작가로는 경정산 가단(敬亭山歌壇)을 중심으로 한 김천택, 김수장, 김유기(金裕器), 박문욱(朴文郁), 김묵수(金默壽) 등이 활동했고, 대개는 무명씨(無名氏)의 작품이 많다. 영조 때에는 주의식(朱義植), 조명리(趙明履), 이정보(李鼎輔), 김성기(金聖器) 등의 시조작가들이 창곡가(唱曲家)를 겸했고 평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철종(哲宗)·고종(高宗) 때의 작가로는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 등이 있다.
노계의 시조
[편집]蘆溪-時調
송강과 함께 가사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노계 박인로(朴仁老)도 <조홍시가(早紅枾歌)> 1수, <오륜가(五倫歌)> 26수, <입암(立巖)> 29수, 그 밖의 13수 등 모두 68수가 있는데, 대부분 그의 문집 <노계집>에 전한다.
고산 윤선도의 시조
[편집]孤山 尹善道-時調
한때 효종(孝宗)의 사부(師溥)가 되기도 하고, 벼슬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에서 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면서 다감하고 기구한 생애를 보낸 고산 윤선도에 와서 시조문학은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이룬다면, 고산은 조선시대를 통해 시조문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병자호란의 시대적인 와중에서도 그는 주옥과 같은 시조작품을 창작하였으니,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몽천요(夢天謠)>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이 그것이다. 그는 산수와 자연을 사랑하여 경물(景物)과 한흥(閑興)을 즐겨 노래했는데, <산중신곡> 중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읊은 <오우가(五友歌)>는 시조문학의 최고 절창이다. 그의 시조는 아름다운 우리 말로 홍진(紅塵)을 초월한 강호(江湖)의 생활, 그리고 능란한 수사와 격조를 나타낸다. 송강·노계와 같은 연주(戀主)나 교훈적인 내용도 아니고, 한문투의 공식적인 수사를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우리의 언어로 세련·순화(醇化)시켰다. 그가 묘사한 자연은 생명이 약동하고, 자연 및 시악(詩樂)이 혼연일체가 되어 시조문학의 진면목(眞面目)을 이루니, 시조는 고산에 이르러 절정(絶頂)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임란과 호란의 비가
[편집]壬亂-胡亂-悲歌
박인로와 같은 무인이면서도,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閑山島) 시조 같은 것은 애국적인 발상에서 이루어진 시대적인 배경을 잘 보여준다. 또한 임진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병자호란의 비운을 당하게 되니 민족의식과 숭명(崇明)사상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난리가 그치지 않고 당쟁이 끊임이 없는 와중에서 당시 사람들은 비분 강개가 아니면 현실에서 도피, 자연으로 침잠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호란이 남긴 몇몇 가작(佳作)들이 있으니,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孝宗)을 비롯해서 김상헌(金尙憲), 이명한(李明漢), 홍서봉(洪瑞鳳) 등의 시조와 이정환(李廷煥), 낭원군(朗原君)의 비가는 국운이 위태롭던 이 시대를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경정산 가단
[편집]敬亭山歌壇
조선 영조 때 김천택과 김수장을 중심으로 가객들이 시조를 즐기면서 모인 문학 동인회를 말한다. 여기에 탁주한(卓柱漢), 김유기(金裕器), 김우규(金友奎), 김태석(金兌錫), 박문욱(朴文郁), 김묵수(金默壽) 등이 동인으로 참가하여 가창을 일삼았다. 경정산(敬亭山)이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이백(李白)의 <독좌경정산(獨座敬亭山)>이란 시에서 따온 것이며, 이 동인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의 시인들이었다.
조홍시가(早紅枾歌)
[편집]박인로가 41세 때 지은 시조. 친구인 이덕형의 집에 가서 감 대접을 받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 지었다 하는데 <청구영언>에 전한다.
"盤中 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柚子(유자) 아니라도 품엄 즉도 하다마난
품어가 반기리 업슬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오륜가(五倫歌)
[편집]박인로가 지은 연시조. 모두 25수로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함. 그 중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남으로 삼긴 거시 부부갓치 중할넌가
사람의 백복이 부부에 가잣거든
이리 중한 사이에 아니 和(화)코 엇지하리."
윤선도
[편집]尹善道 (1587-1671)
조선 선조-현종 때의 시인. 문신.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광해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후, 한성서윤(漢城庶尹)·예조참의(禮曹參議)·중추부사(中樞府事)·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했다. 벼슬을 하는 동안 직간(直諫)을 하다가 모함에 걸려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했고, 인조반정 때 풀려나온 후 병자호란 이후에 고향인 해남(海南)과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 금쇄동(金鎖洞)에 숨어 시작 생활을 했다.
단가에 있어서 우리 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로 그의 작품은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어부사시사> <몽천요> <우후요> <견회요> 등이 있다.
산중신곡(山中新曲)
[편집]조선 인조 때 윤선도가 지은 시조. 그가 56살 때 유배지인 영덕(盈德)에서 풀려나와 금쇄동에 있으면서 지었다 한다. 만흥(漫興)·조무요(朝霧謠)·하우요(夏雨謠)·일모요(日暮謠)·야심요(夜深謠)·오우가(五友歌)·기세탄(饑歲歎) 등 모두 18수다. 내용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느낀 정취, 천후(天候)의 변화에서 느낀 정취, 자연 경물(景物)에서 느낀 정취 등을 읊은 것이다. 그 중 자연을 사랑하여 경물과 한흥(閑興)이 잘 나타난 <만흥(漫興)> 1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산수간(山水間) 바희 아래 뛰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든 남들은 웃난다 한다마난
어리고 하얌의 뜻에난 내 분인가 하노라."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편집]인조 때 윤선도가 지은 시조. 그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56살 때 금쇄동에 있으면서 주로 음악에 대한 정취를 읊은 것이다 <추야조(秋夜操)> <춘효음(春曉吟)>의 2수이다.
오우가(五友歌)
[편집]인조 때 윤선도가 지은 연시조. <산중신곡> 중에 들어 있는데 모두 6수이다. 물·돌·솔·대나무·달을 읊은 것인데, 이 <오우가>는 조선 시조문학의 최고 절창을 이루고 있다. 그 중 몇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東山의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구름 빗치 조타 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칠뉘 업기난 믈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서 쉬이 디고
플은 어이하야 프르난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산 바희뿐인가 하노라."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편집]조선 효종 2년 고산이 65세 때 벼슬을 그만두고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지은 연시조. 이현보가 고쳐 쓴 <어부사>를 다시 윤선도가 순 우리말을 많이 넣어 새로 지은 것으로, 봄 노래·여름 노래·가을 노래·겨울 노래 등 각각 10수로 모두 40수로 되어 있다. 그 중 봄노래 한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압개예 안개 것고 뒷뫼희 해 비췬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 온다
至菊忿(지국총) 至菊忿 於斯臥(어사와) 江村 온갓 고지먼 빗치
됴타."
몽천요(夢天謠)
[편집]효종 3년 고산이 66세 때 지은 연시조. 가장 만년의 작품으로 그가 은퇴했다가 17년 만에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 지은 것이다. 내용은 왕은 자기를 반겼으나 옆에 있는 신하들이 자기를 훼방함을 그린 것으로 모두 3수이다. 그 셋째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날히 이저신 제 모슴 術(슐)로 기워 낸고
백옥루 즁슈할 제 엇던 바치 일워 낸고
옥황긔 살와 보쟈 하더니 다 몯하아 오나다."
견회요(遣懷謠)
[편집]광해군 시대 고산의 나이 32세 때 유배지 경원(慶源)에서 지은 연시조. 그의 초기작으로 모두 5수로 되어 있고 귀양살이에서 임금과 부모를 사모하는 충정에서 우러나는 감회를 읊은 것이다. 그 5수 중 1편을 들면 다음과 같다.
"秋城(츄셩) 鎭胡樓(진호루) 밧긔 우러녜난 뎌 시내야
므슴 호리라 晝夜의 흐르난다
님 向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랄 모르난다."
우후요(雨後謠)
[편집]광해군 10년 고산이 함경도 경원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지은 시조. <견회요>와 함께 그의 초기작으로 모두 2수이다. 그 중의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
"구즌비 개단 말가 흐리던 구룸 걷단 말가
압내희 기픈 소히 다 맑앗다 하나산다
진실로 맑디옫 맑아시면 갇긴 시서 오리라."
이순신
[편집]李舜臣 (1545-1598)
조선 선조 때의 명장.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공(忠武公). 임진왜란 때의 수군 통제사로서 거북선을 개량하여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노량 싸움에서 왜군의 유탄에 맞아 전사. 유고집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고 많은 한시가 전함. 그의 우국 충정이 담긴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한산셤 달 밝근 밤의 수루에 혼자 안자
큰 칼 녀푀 차고 기픈 시람 하난 적의
어듸셔 일성 호가난 남의 애를 긋나니."
효종
[편집]孝宗 (1619-1659)
조선 제17대 왕.이름은 호(淏), 호는 죽오(竹梧), 봉림대군(鳳林大君). 왕위에 오른 뒤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고자 북벌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시조 몇 수가 <청구영언> 등에 전한다.
"靑石嶺 지나거냐 草河溝 어듸매오
胡風도 참도 찰샤 구즌비난 무스 일고
아므나 행색 그려 내여 님 계신 듸 드리고쟈."
이 시조는 그가 왕자일 때 병자호란 후 볼모로 선양(瀋陽)에 잡혀 가면서 지은 비가(悲歌)이다.
김상헌
[편집]金尙憲 (1570-1652)
선조-효종 때의 문신·학자.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공조·형조 판서, 좌의정에 이름.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탓으로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 갔다가 3년 후 풀려 나왔다. 그의 형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고결 강직한 학자로 이름이 있다. 최립(崔笠)과 더불어 문단의 거성으로서 <청구영언>에 그의 시조 2수가 실려 전한다. 이것은 그가 청나라에 잡혀갈 때 부른 것으로 그의 강직하고 우국적(憂國的)인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쟈 漢江水야
故國山川을 떠나고쟈 하랴마난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南八아 南兒一死矣언졍 不可以不義屈矣여다
웃고 對答하되 公이 有言 敢不死아
千古에 눈물딘 英雄이 몃몃친 줄 알리오."
홍서봉
[편집]洪瑞鳳 (1572-1645)
선조-인조 때의 문신.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고 청나라 진중으로 자주 왕래하여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문집으로 <학곡집(鶴曲集)>이 전하고, <청구영언>에 다음 시 1수가 전하고 있다. "님 離別하든 날에 피눈물이 난지 만지
鴨綠江 나린 물이 프른빗치 全혀 없다
백우희 허여셴 沙工이 처음 본다 하더라."
이명한
[편집]李明漢 (1595-1645)
조선 인조 때의 문신.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이정구(李廷龜)의 아들.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선양에 잡혀 갔었다. 문집에 <백주집(白洲集)> 2권이 있고, 주옥같은 시조 8수가 전하고 있는데 그의 시조 몇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울며 잡운 사매 떨치고 가지마쇼.
초원장제에 해 다 져무렷 내
객창에 잔등 도도고 새와 보면 알니라."
"샛별지쟈 죵다의 띳다 호뮈메고 사립나나
긴 숩풀 촌 이슬에 뵈즘방이 다졌거다.
아희야 時節에 됴흘예면 오시 졌다 관계하랴."
이정환
[편집]李廷煥 (1633-1673)
선조-인조 때의 문인.자는 휘원(輝遠), 호는 송암(松巖). 인조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병자호란의 치욕을 생각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여 시작으로 세월을 보냈다. 병자호란의 국치를 통분히 여긴 <비가(悲歌)> 10수가 한역시와 함께 유고집 <송암유고(松巖遺稿)>에 실려 전한다. 그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풍셜 석거 친 날에 뭇노라 北來使者야
小海容顔이 언매나 치오신고
故國의 못쥭난 孤臣이 눈물계워 하노라."
낭원군
[편집]朗原君 (1640-1699)
선조의 열두째 아들. 본명은 이간(李侃), 호는 최락당(最樂堂). 종신(宗臣)으로 시문에 뛰어나 <산수한정가(山水閑情歌)> <애국도보가(愛國圖報歌)> <자경가(自警歌)> 등의 가사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시조 7수가 전하는데,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日月도 녜와 갓고 산천도 依舊(의구)하되
大明文物(대명문물)은 속절업시 간듸업다.
두어라 天運(천운)이 순환하니 다시볼가 하노라."
인평대군
[편집]麟坪大君 (1622-1658)
본명은 이요(李▩). 조선조 효종의 아우. 봉림대군(효종)과 함께 윤선도에게 학문을 배웠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로 12번이나 선양 등에 왕래했다. 시조 2수가 전하며, 한문 기행문 <연행록(燕行錄)>이 있다. 그의 비가인 시조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主辱臣死라 하니 죽엄직 하건마는
큰 칼 옆희 차고 이대도록 살앗기난
聖主의 萬德重興을 다시 보려 함이로다."
신흠
[편집]申欽 (1566-1628)
조선 인조 때의 학자·문인.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 이정구, 이식(李植), 장유(張維)와 함께 한학 문장 4대가의 한 사람이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경서·의술·복서(卜筮)·산수(算數)에도 능했다. 작품에 시조 31수가 <청구영언>에 전하며 문집 <상촌집(象村集)> 30권이 전한다. 그 중 시조 2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뭇쳣셰라
柴扉(시비)를 여지 마라 날 차즈리 뉘 잇시리
밤중만 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닐러 다 못 닐러 불러나 푸돗단가
진실로 풀릴 거시면은 나도 불러 보리라."
김상용
[편집]金尙容 (1561-1637)
조선 인조 때의 문신·학자.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김상헌의 형.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신, 강화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작품에 연시조 <오륜가> <훈계자손가>가 전하고,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가 있다.
김광욱
[편집]金光煜 (1580-1656)
효종 때의 학자.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김상헌의 재종질(再從姪). 벼슬이 좌참찬에 이름. 연시조 <율리유곡>이 <청구영언>에 전해 오고 문집에 <죽소집(竹所集)>이 있다.
율리유곡(栗里遺曲)
[편집]조선 효종 때 김광욱이 지은 연시조. 모두 14수로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전하고 있다. 그 중의 1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공명도 니젓노라 부귀도 니젓노라
세상 煩憂한 일 다 주어 니젓노라
내 몸을 내 마자 니즈니 남이 아니 니즈랴."
남구만
[편집]南九萬 (1629-1711)
조선 숙종 때의 학자·문신.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사(文詞)·서화에도 뛰어났었다.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東窓이 발갓나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난 아희들은 상기 아니 니럿나냐
재넘어 사래 긴 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김수장
[편집]金壽長 (1690- ? )
숙종-영조 때의 뛰어난 가인(歌人).
자는 자평(字平), 호는 노가재(老歌齋). 평민 출신으로 벼슬이 겨우 병조의 서리(書吏)에 이르렀다. 김천택·김우규 등과 사귀어 당시 가단의 중심이 되었고, 영조 39년(1763년)에 시가집 <해동가요>를 엮었는데, 그의 시조 117수가 이 책에 전해 온다. 그의 작품은 종래의 인생과 자연을 읊은 것이 아니라 사실적(寫實的)인 서경시(敍景詩)임이 특징이다.
김천택
[편집]金天澤 (생몰연대 미상)
조선 숙종 때의 시조 작가이다.
자는 백함(伯涵)·이숙(履叔), 호는 남파(南坡). 평민 출신으로 벼슬이 겨우 포도청 포교(捕校)에 이르렀다. 당시 가인들의 중심인물이며, 영조 3년(1727)에 처음으로 시조집 <청구영언>을 엮어내어 우리 시조사에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해동가요> 등에 그 시조 94수가 전해 온다. 김수장과 함께 경정산 가단에서 후진을 양성, 시조의 정리와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의 시조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잘 가노라 닷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브대 긋지 말고 寸陰을 앗겻슬아
가다가 中止곳 하면 안이 감만 못한이라."
김묵수
[편집]金默壽 (생몰연대 미상)
조선 영조 때의 시조시인. 김수장·김천택의 후배로 경정산 가단의 한 사람으로 시조 8수가 전하고 있다. 그의 시조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촉제의 죽은 혼이 접동새 되야 잇셔
밤마다 슬피 울어 피눈물로 긋치는이
우리의 님 글인 눈물을 어늬 때에 긋칠고."
김유기
[편집]金裕器 (생몰연대 미상)
조선 숙종 때의 가객(歌客)이며 명창.
자는 대재(大哉). 김천택과 사귀었고,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 12수가 전해오고 있다. 그의 시조 1편을 보면,
"난간에 지혀 안자 옥적을 빗기 부니
오월 강성에 흣듯나니 매화ㅣ로다.
한 곡조 舜琴에 섯거 百工相和 하리라.
김우규
[편집]金友奎 (1691- ? )
조선 숙종 때 가객.자는 성백(聖伯). 김수장과 사귀었고,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 11수가 전해온다. 그의 시조 1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강호에 비 갠 후 ㅣ니 水天이 한 빗친 제
小艇에 술을 싯고 낙대 메고 날여간이
蘆花에 나니는 白鷗는 날을 보고 반긴다."
김태석
[편집]金兌錫 (생몰연매 미상)
조선 영조 때의 가객. 자는 덕이(德而). 경정산 가단의 한 사람으로 김수장, 김천택 등의 뒤를 이었다.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 2수가 전하고 있다.
주의식
[편집]朱義植 (생몰연대 미상)
조선 숙조 때 가인·관리.자는 도원(道源), 호는 남곡(南谷). 김삼현의 장인. 일찍이 무과에 급제, 벼슬이 칠원현감(漆原縣監)에 이르렀다. 시조를 잘 지었고 매화(梅花)를 잘 그렸다 한다. 시조 14수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에 전해 오는데 시조 1편을 소개하면,
"하날이 놉다하고 발 뎌겨 셔디 말며
따히 두텁다고 마이 밟디 마올 거시
하날따 높고 두터워도 내 조심을 하리라."
김삼현
[편집]金三賢 (생몰연대 미상)
조선 숙종 때 가객.품계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으며, 그의 장인 주의식과 함께 산수간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즐겼다. 작품은 향락적이고 명랑하다. 작품으로 시조 6수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시조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綠楊 春三月 잡아매야 둘 거시면
셴머리 뽀바 내여 찬찬 동혀 두련마난
올해도 그리 못 하고 그저 노화 보내거라."
조명리
[편집]趙明履 (1697-1756)
조선 영조 때 학자·문신.자는 중례(仲禮), 호는 노강(蘆江)·도천(道川).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해동가요> <청구영언>에 시조 4수가 전하며, 문집에는 <도천집(道川集>이 있다. 그 중 시조 1편을 들어 보면,
"셜악산 가난 길의 개골산 즁을 만나,
즁다려 뭇난 말이 풍악이 엇더터니
이 사이 連하여 서리 티니 때 마잣다 하더라."
이정보
[편집]李鼎輔 (1693-1766)
조선 영조 때 학자·문인.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벼슬이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지사(知事)를 지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는데, <해동가요>에 시조 78수가 전한다. 그 중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화난 무삼 일노 삼월 동풍 다 보내고
락목한텬의 네 혼자 픠엿나니
아마도 오샹고졀은 너뿐인가 하노라."
김성기
[편집]金聖器 (생몰연대 미상)
숙종-영조 때 음악가.
자는 자호(子湖), 호는 조은(釣隱). 평민 출신. 거문고와 퉁소에 능했고 김천택과 사귀며 낚시로 낙을 삼으며 자연을 읊었다. 작품에 시조 강호가(江湖歌) 5수와 그 밖의 3수가 <해동가요>에 전해오는데 그 중 1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강호에 바린 몸이 백구와 벗이 되야
어정을 흘리 노코 옥소를 노피 부니
아마도 세상 흥미난 잇분인가 하노라."
가집의 편찬
[편집]歌集-編纂
영조 때에 이르러 전대(前代) 시가의 수집·정리와 가창이 유행했는데, 그 최초의 가집 편찬은 영조 4년 평민 출신의 가객 김천택에 의해 <청구영언>이 편찬되었다. 이로부터 36년 뒤 영조 39년에는 평민 가객 김수장에 의해 <해동가요>가 편찬되니 시조의 정리와 발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청구영언> <해동가요>와 전후하여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古今歌曲)>이 편찬되니 창곡으로서의 시조가 정리기에 들어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이들의 후배로 철종·고종 때에는 박효관·안민영 등에 의하여 <가곡원류>가 편찬되었고, 이들 시조집 외에도 순 국문으로 된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가 판본(板本)으로 편찬되었다. 이 밖에도 <동가선(東歌選)> <객악보(客樂譜)> 등이 있으며, 고종시대에 만든 정현석(鄭顯奭)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시조가 한역되어 전래한다.
청구영언(靑丘永言)
[편집]조선 영조 4년 김천택(金天澤)이 엮은 시조집.
현존하는 시조집 중에 가장 오랜 것이다. 고려 말 이래의 시조 998수를 싣고, 끝에 가서 가사 17편을 붙여 곡조별로 엮은 것으로 이름을 알 수 있는 작가만도 14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1948년 조선 진서 간행회에서 발행한 <청구영언>에는 시조 580수가 연대순으로 실려 있으며, 유명씨(有名氏)의 작은 앞에, 무명씨의 것은 뒤쪽에 실었다. 이를 진본이라 하며, 앞의 것은 흔히 대학본이라 한다. 진본이 원본인 듯하다.
해동가요(海東歌謠)
[편집]영조 38년에 김수장(金壽長)이 엮은 시조집. 내용은 고려 말부터 당시까지의 유명씨의 시조 568수(자작 117수 포함)를 앞세우고 뒤에 무명씨의 시조 315수를 보탰음. 시조 사상 둘째로 오래된 시가집이다.
청구가요(靑丘歌謠)
[편집]조선 영조 때 김수장이 엮은 <해동가요>의 부록. 작품 수는 77수. 김우규(金友奎) 등 당시의 가객 9명의 작품이 실려 있다.
고금가곡(古今歌曲)
[편집]송계연월옹이 엮은 가곡집. 엮은이의 본명과 엮은 연대 미상. 조선시대의 장가(가사) 11편과 시조 294수가 실려 있으며, 그 분류에 있어 인륜(人倫)·권계(勸戒)·송축(頌祝)·연군(戀君) 등 21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곡원류(歌曲源流)
[편집]조선 고종 13년(1876) 박효관(朴孝寬), 안민영이 엮은 가곡집. 시조 및 가사가 남창과 여창으로 나뉘어 편찬됨. 노래 총수 8백수십 수. <해동가요> <청구영언>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조집. 이본(異本)이 많다.
박효관
[편집]朴孝寬 (생몰연대 미상)
조선 철종-고종 사이의 가객.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 창곡의 대가로 동지들을 모아 승평계(昇平契)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제자 안민영과 함께 시조집 <가곡원류>를 편찬했다. <가곡원류>에 그의 시조 15수가 전해오고 있다.
안민영
[편집]安玟英 (생몰연대 미상)
조선 고종 때의 가객. 자는 성무(聖武), 호는 주옹(周翁). 박효관의 제자로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하였으며, 그의 시조 26수가 여기에 실려 전한다. 저서에 <주옹만필(周翁漫筆)> <금옥총서(金玉叢書)> 등이 있다.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편집]엮은이와 연대 미상의 가곡집. 편찬 연대는 철종 무렵으로 추측됨. 시조·잡가·가사의 셋으로 분류하여 시조에서 224수, 잡가에 <소춘향가(小春香歌)> 등 3수, 가사에 <춘면곡(春眠曲)> 등 4수가 실려 있다. 순전히 노래 부르기에 맞도록 엮은 것이 특색이다.
동가선(東歌選)
[편집]엮은이와 연대 미상의 시조집. 내용은 시조 235수를 모은 것으로 끝에 가서 잡가라 하여 <장진주사> 외에 2수의 시조를 실어 놓았다. 엮은이를 순조 때 백경현(白景炫)으로 추측하는 이도 있다.
객악보(客樂譜)
[편집]엮은이와 연대 미상의 가곡집. 조선 말엽으로 추측되며, 내용은 시조 480수를 곡조에 따라 분류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