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상고시대 문학/상고시대의 시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上古時代-詩歌

한국 상고시대인들은 제천의식과 가무를 통해 문학의 창조적 싹을 틔워 왔다. 제천의식 때 제주(祭主)가 되는 기도사(祈禱詞)나 송축사(頌祝詞), 민족적 시조신(始祖神)이나 영웅을 칭송하는 제사(祭詞) 같은 것은 신악(神樂)이나 율동적인 무용과 아울러 종합예술의 분위기를 형성했고, 또 이것이 민족문학의 모체가 되어 주었다.

신을 즐겁게 하고 민중의 감정을 북돋우어 주던 송축사나 제사는 그 사이에 끼는 노래와 함께 서사시로서의 신화·전설을 낳게 되고, 또 이 노래에서 서정시로서의 시가가 비롯되고 무용이나 그 제단의 분위기는 그대로 연극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본래 우리의 노래(歌)는 고어로 '놀애'이며, 이는 '놀(遊)'이란 어원에서 나와 '노래·놀이·놀음' 등으로 문학과 연극과의 친밀성을 말해 준다.

또 한국 상고시대인들은 '죽음'에 당해 송사가무(送死歌舞)로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습속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두소리(香頭歌), 묘지 다지는 소리, 그리고 도당(都堂)굿, 지신밟기, 두레, 성황당(城隍堂), 당산(堂山) 등 민족적인 행사나 유물은 모두 수천 년 동안 연면히 내려온 고대 생활과 민족 전통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상고시대 시가는 노래와 무용을 통해 운율적인 사설(辭說)이 동반되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시가의 발생으로 <구지가(龜旨歌)> <해가사(海歌詞)> <도솔가(兜率歌)>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노동요(勞動謠)와 제사요(祭祀謠)는 시가의 시원으로 소박한 리듬의 도취로부터 차츰 민요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이 후세에 전래되기는 서사적인 신화·전설의 일부만을 이루고 있는 것만 남게 되었다.

상고시대 시가는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약 반세기의 시가가 이른바 서사시에서 서정시로 넘어오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시가로는 서사에 <구지가>, 과도적인 작품에 <도솔가>, 그리고 서정에 <황조가(黃鳥歌)>를 들 수 있다.

시가가 문학으로서 분화·독립되기 이전에는 원시 종합 예술체로서 음악·무용과 더불어 혼융(渾融)되어 왔음을 보아 왔다. <위지 동이전>이나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에 "진한은 그 풍속이 가무를 즐겨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유풍(遺風)은 오늘날 아직도 지방에 따라서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호남 지방의 <강강술래>, 영남 지방의 <쾌지나 칭칭나네>가 고대의 집단예술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정월 보름날이나 8월 한가위, 달이 밝으면 여자 수십인이 서로 손을 잡고 원무(圓舞)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요컨대 이 두 노래는 우리 민요의 최고의 형으로 가·무·악의 종합예술로서의 잔영(殘影)이라 할 만하다. 일례로 <쾌지나 칭칭나네>의 소재를 살펴보면 '하늘·별·강변·잔돌·솔밭·옹이·대밭·마디' 등 가장 원초적인 자연물로 일관되어 있다. 민속적인 집단 무요(舞謠)와 고대 무요의 내용을 비교하여 시가의 기원을 추측할 수는 없지만 고대 가요 중에서 집단 무요의 성격과 내용의 일면을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헌의 기록을 통해서는 종교적인 무요의 가사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된 가락국 건국신화 속에 낀 <구지가>, 고구려 제2대 유리왕(瑠璃王)의 <황조가>, 고조선 여옥(麗玉)의 작이라는 <공후 인> 등이 신화·전설 속에 묻혀 오늘날까지 그 가사의 내용이 한역(漢譯)으로 전해질 뿐이다.

구지가(龜旨歌)

[편집]

서기 40년경에 이루어진 상고시대 시가의 하나.

'영신군가(迎神君歌)'라고도 한다. 옛날 가락국의 구간(九干=아홉 사람의 추장)이 구지봉(龜旨峰)에 모여 자기네의 최고 통치자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을 맞이하려고 노래했다는 일종의 주문(呪文)으로 고대가요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기록된 것으로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 首其現何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 네 목을 내잖으면 구워서 먹으리.)

이 가요는 형식상으로 사구체가(四句體歌)로 뒤에 7백년경에 이루어진 팔구체가(八句體歌) 형식의 무가인 <해가사>는 이 노래를 그대로 계승한 아작(亞作)이다. <구지가>는 옛기록의 연대로는 <황조가>나 <도솔가>보다는 후대의 소산으로 보이나 작품의 성격으로 볼 때 서정요보다 훨씬 이전인 원시 가요의 영역에 속한다. 원시 신앙에서 오는 주술적(呪術的)인 내용과 노래 자체의 명령적이고 위압적인 마력을 인식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앞의 <구지가>가 신군(神君)을 맞이하려는 일종의 희망적인 노동요라 한다면, 뒤의 <해가사>는 악귀(惡鬼)나 액(厄)에 걸려 거기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라 하겠다.

황조가(黃鳥歌)

[편집]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노래.<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 3년조(條)에 전한다. 유리왕의 본실(本室)인 송(宋)씨가 죽고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두 여자를 계실(繼室)로 맞았는데, 그 중 치희는 중국 사람의 딸이었다. 이 두 여자는 항상 사이가 좋지 않던 중, 유리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화희가 한나라 비첩(婢妾)의 몸으로 왜 여기 와서 버릇없게 구느냐고 욕설로 나무라자, 치희는 부끄럽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그만 제 고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유리왕이 돌아와 치희의 달아남을 알고 곧 말을 달려 좇았으나 치희는 노여움을 풀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쉬면서 꾀꼬리 한쌍이 정답게 날고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비감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翩翩黃鳥 #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오락가락 꾀꼬리는 암놈 수놈 노니는데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이 노래는 창작 연대가 기원전 17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문학사적으로 최초의 서정요라는 데 그 존재 가치가 있다.

도솔가(兜率歌)

[편집]

상고시대 시가 중 최초의 정형시.

신라 유리왕 5년(28)에 지었다는 노래로 가사와 작자 및 그 내용은 전혀 알 수 없고, <삼국사기>에 "이 해에 민속이 환강하여 비로소 도솔가를 지으니 이는 가악의 비롯함이라(是年民俗歡康 始作兜率歌 歌樂之始)"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동왕대에 지은 도솔가에 차사사뇌격(嗟辭詞腦格)이라 했으니, 뒤에 향가의 주류적 형태를 이룬 사뇌가(詞腦歌)의 형태를 암시한 말로 전통적인 시가문학의 출발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솔가>는 '텃소리' '텃노래' '두렛노래(農樂)' '돗노래(神樂)' 등 여러 설이 있는데 이는 신라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신라 궁중가악(宮中歌樂)의 형태를 갖춘 서정적인 가악임에 틀림없다. <도솔가>에 대하여 몇몇 학자의 설을 참고로 소개해 둔다.

"유리왕대에 남상(濫觴)된 도솔가는 상고의 순전한 종교적 의식의 축사(祝詞)와 근고의 서정요의 중간 형식을 보인 것으로 그 가요의 형식이 아직 집단적인 것은 구형(舊型)을 그대로 전수(傳守)하나 그 내용이 현저히 즉 생활적 서정요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양주동 <古歌硏究>)

"유리왕대를 부족국가로부터 귀족 왕국으로 전환한 시기라 추측하고 도솔가는 문학사상 집단적인 서사문학과 개인적인 서정요와의 교량적(橋梁的) 존재를 이룬다."(우리 문학회 <국문학 개론>)

<도솔가>는 왕의 선정(善政)과 태평성세를 구가하기 위해 백성들이 노래로 불렀다. 그러니 이는 벌써 종교적인 주술에서 탈피했음을 뜻하며, 백성 전체가 노래했다는 것은 원시 예술적인 집단의 뜻보다도 개인생활의 안정과 평화를 기리는 서정요의 성격이 많이 깃들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대 가요로 알려져 온 <구지가> <공후인> 등과 비교할 때 이 가요들은 거의 부대 설화(附帶說話)를 갖고 있으나

<도솔가>는 '민속환강(民俗歡康)'이라는 사실만이 부수될 뿐으로 이 노래의 가요적인 성격을 분명히 해준다.

따라서

<도솔가>는 그 때까지 전해온 종교적 신화나 설화적 성격을 씻고 새로운 서정가요의 발생이라는 점에 문화사적인 의의가 존재한다.

또 이 가악에서 비롯하여 사뇌가가 고대 서정문학의 열매를 맺게 되니 이는 각 지방에 존재한 여러 민요 형태 가운데 차츰 왕경(王京) 중심으로 개인적인 서정 가요가 당시 상류계급 사이에 새로 발전해 나간 것을 말해 준다.

공후인

[편집]

일명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 하며, 고조선 시대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노래.

한국 시가 사상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중국 진(晋)나라 때 최표(崔豹)가 쓴 <고금주(古今注)>에 다음과 같이 그 설화와 노래를 기록하고 있다.

"<공후인>이란 노래는 조선 땅의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란 여인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 일찍이 일어나 나룻터에 가서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머리가 새하얗게 센 미치광이 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병을 끼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늙은 광부(狂夫)의 아내가 쫓아오면서 남편을 부르며 말렸으나 그 늙은이는 깊은 물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기어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때 그 아내는 들고 오던 공후를 끌어잡아 타면서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랫소리는 말할 수 없이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자 그 아내 또한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고 말았다.

자고는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에게 자기가 본 사실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 노래의 사설과 소리를 아내에게 들려 주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눈물을 흘리며, 공후를 끌어안고 그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금할 수 없고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는데 여옥은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 여용(麗容)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또한 노래 이름을 <공후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한문으로 번역된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코 물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속에 빠져 죽은 님. 아아, 저 님을 언제 다시 만날꼬.)

이 노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그 견해가 구구한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문학 작품으로서 최고의 것은 고조선의 <공후인>, 유리왕의 <황조가>를 든다. 그러나 이것은 … 당시의 조선문화의 정도로 추단(推斷)하여 아마도 후세인의 위작(僞作)이 아니라면 번역시인 듯하다."(조윤제 <한국문학사>)

"<공후인>은 주로 가곡으로서의 명칭이므로 문학의 처지에서는 <공무도하가>라는 편이 좋고, 원작자는 여옥이 아니고 실명(失名) 광부(狂夫)의 아내이며, 제작 연대는 서기 2세기 후반경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공무도하가>는 애초에 민요였고 광부와 그의 아내의 슬픈 죽음은 민요 발생의 소재로 생각할 수 있다."(양재연 <공무도하가 소고>)

" … <공후인>의 이야기를 하나의 신화로 해석해 보았을 때 …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백수 광부(白首狂夫)는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주신(酒神)이고, 그 아내는 곧 하천의 요정(妖精)인 악신(樂神)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신이기 때문에 생사를 초월하고 범연히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고, 또한 신이기 때문에 그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 보고 공후를 끌어당겨 남편의 죽음을 노래로 조상할 수도 있었다."(정병욱 <한국시가문학사>)

아무튼 <공후인>은 일찍이 구비문학으로 내려오다가 한자가 들어온 뒤에 정착된 것인지, 또는 한인(漢人)이 우리 것을 취재하여 한곡(漢曲)인 <금조구인(琴操九引)> 중에 넣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시가 발전 사상 그 위치를 말한다면 원시적인 서사문학이 이 노래가 제작될 무렵에 들어와 다분히 서정적인 색채가 가미되었고, 우리의 문학이 서사문학에서 서정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이루어진 듯하다. 또 아름다운 이 노래의 배경으로 흥미있는 설화가 곁들여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서정문학이 서사문학을 압도하고 그 시가적인 위치를 굳혔다고도 할 수 있다.

비사(秘詞)

[편집]

고대에 있어서의 한체(漢體)의 시가. 신지(神志)의 작이라 함.

신지는 일찍이 단군 환왕검(檀君桓王儉)의 사관(史官)으로 문자와 사서를 지었다 하나 이는 전하지 않고 다만 <비사> 몇 구만이 전한다.

<비사>는 고려 숙종 때 도술가(道術家) 김위선의 <상서(上書)> 중에 인용된 것이라 하며, <문헌비고(文獻備考)> <예문지(藝文志)> 중에 그 서명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