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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드라마의 연혁〔서설〕[편집]

television drama-沿革〔槪說〕

1962년 1월, KBS-TV의 <금요극장> 프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放映)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6년에 이미 상업방송인 HLKZ-TV가 서울에서 텔레비전방송을 시작한 바 있으나, 영상출력(影像出力) 0.1KW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시절의 이 TV국은 1969년 2월 화재로 말미암아 그 방송이 중단될 당시까지 제대로 드라마 분야에 손이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KBS-TV에 의해서 우리의 브라운관에 처음으로 방영된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유치진(柳致眞)의 희곡을 극작가이며 라디오 드라마 작가인 차범석(車凡錫)이 각색한 단막물이었는데, 이것은 전문적 작가나 충분한 제작·연기 인원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출발해서 강행군을 서두른 우리 텔레비전 드라마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실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단적으로 말해서, 라디오 드라마에 시각(視覺)을 더한 드라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시각을 더한 것'이란 실로 엄청난 가능성과 또한 적지않은 제약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높은 차원의 종합예술적 결정(結晶)을 예상시키는 반면,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의 경우보다도 더 많은 수련을 쌓은 작가와 연기자를 요구하며, 충분한 기재와 능숙한 제작진의 확보를 전제(前提)로 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발전에 필요한 이와 같은 전제요건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풍토가 결코 고무적(鼓舞的)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영화나 연극과 어깨를 겨루는 한 장르로서 문화사적 성과를 충분한 소지(素地)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이 땅에서는 좀체로 예술로서 개화하지도 못하고, 10여년이 지난 오늘날 대중오락 상품으로서의 낮은 차원에서만 번성하고 있는 그 요인 중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실로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거의 상업TV국에 의해서 유지·방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공영방송국인 KBS-TV조차도 초기에는 스폰서로부터의 광고료 수입에 그 운영 재원을 크게 의존했었다).

적은 비용으로써 많은 선전 효과를 거두려는 스폰서들의 기대는 민영 TV국의 방송 프로에 직접·간접의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스폰서들의 보편적 부담능력이 낮다는 사실은 또, 텔레비전 드라마 향상의 필수요건인 작가·연기자·제작담당자 등의 발굴·양성을 위한 장기투자나, 제작경비면의 제한을 개선하는 방향의 노력을 둔화(鈍化) 또는 등한시하게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풍토이고 보면, 그동안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예술적 향기 높은 결실보다도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군무(群舞)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당하여 온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발자취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즉 KBS-TV의 개국으로부터 TBS-TV 개국에 이르는 기간, 그로부터 MBC-TV가 방송을 개시한 1969년까지와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간인데, 그 기간에 나타난 성과·경향 등을 돌이켜 보기로 하자.

텔레비전 드라마의 초창기[편집]

television drama-初創期(1962∼1964)

KBS-TV가 우리 TV방송의 기초를 확립한 이 기간에는, <금요극장(나중에는 금요무대)>, , <일요극장>, <연속사극(連續史劇)> 등의 프로로, 매주 2∼4편의 단막물 또는 연속드라마가 방송되었는데, 이 무렵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류는 30∼60분짜리의 단막물이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에 워낙 갑작스럽게 개척된 TV방송이었으므로, 텔레비전 드라마 분야의 수요를 커버할 만한 전문 작가가 없었고, 영화 시나리오 또는 라디오 드라마 부문에서 활약하던 인기작가 20여명이 긴급 동원되어, 연간 200편 내외에 이르는 이 무렵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분담 집필했다. 이들은 비록 텔레비전 고유의 메커니즘을 극작면(劇作面)에 충분히 활용하는 그런 기교는 미흡했을지 모르나, 개척자로서의 발랄한 의욕과, 비슷한 장르에서의 확실한 소양(素養)으로써 대부분이 알맹이 있는 수준작(水準作)들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김희창(金熙昌)의 <구두창과 트위스트>는 그 후에도 여러번 리바이벌해서 방송되어졌던 걸작이었고, 주태익(朱泰益)의 <결단>, 김영수(金永壽)의 <가족계획>, 한운사(韓雲史)의 <자유의 행방> 등도 하나같이 알뜰한 역작들이었다.

한편, 1962년 여름에 황운진(黃雲眞)연출로 방영된 김석야(金石野)의 <서울의 뒷골목>은 우리나라 최초로 등장한 연속드라마로서 뿐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가 정착할 영역에의 하나를 시사(示唆)하는 작품으로서도 의의깊은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이서구(李瑞求), 최요안(崔要安), 조흔파(趙欣波), 하유상(河有祥), 이용찬(李容璨), 이근삼(李根三), 정소영(鄭素影), 이경재(李慶載), 이성재(李聖載), 임희재(任熙宰), 김동현(金東賢) 등이 각기 개성있는 작품을 발표했고, KBS-TV의 텔레비전 방송국 현상모집에 입선한 신태순(申泰順)의 <빨강 풍선>, 황기용(黃基容)의 <종소리 사랑의 꽃을 피우다>, 신일석(辛一石)의 <흉어(凶漁)>도 기억에 남을 만한 가작이었다.

그리고 KBS-TV가 그 개국당시부터 탤런트 양성에 기울인 노력과 성과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오늘날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역(主役)을 담당하고 있는 탤런트 최정훈, 박병호, 이완규, 최길호, 이우령, 김상순, 남일우, 김나영, 강부자, 김민자 등은 이 무렵 KBS-TV에 의해서 발굴·양성된 연기인인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성장기[편집]

television drama-成長期(1965∼69)

1964년 12월에 발족한 상업방송 TBC-TV에서는 그 개국 프로의 하나로서, 한운사 작의 연속드라마 <눈이 나리는데>를 황운진 연출로 방송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보는 일일연속극이었다. 신문소설 식으로 날마다 연속해서 방송하는 형태의 이 일일연속극은 시청자로 하여금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를 쉽게 따라가게 하는 강점이 있고, 그만큼 많은 시청자의 흥미를 유지할 수 있음은 이미 일본에서도 실증된 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드라마 방송에는 대개 6∼15명의 연기자와 여러 명의 제작진이 동원되는 것이므로 종래의 KBS-TV와 같은 생방송(生放送) 시스템으로서는 그러한 프로를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TBC-TV는 처음부터 녹화용(錄畵用) 기재를 확보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비로소 일일연속극(뒤에는 매일 연속극으로 그 호칭이 바뀌었음)의 방송이 가능했다. 즉, 몇회분을 한꺼번에 녹화해 두었다가 그날 그날 필요한 부분을 방송함으로써,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그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하는 어려움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다음회에의 기대를 돋우며 20분 내외의 짤막한 방송으로 이어가는 이 연속드라마는 취향이 다른 드라마를 다룰 만한 또다른 여유를 마련해주는 것이므로, 될수록 폭넓은 시청층을 흡수함으로써 더 많은 스폰서로부터 더 많은 수입을 올리려는 상업방송에는 아주 적합한 드라마 형태였고, 따라서 TBC-TV가 일일연속극에 쏟은 노력도 그만큼 과감할 수 있었다. TBC-TV의 드라마 치중(置重)은 이윽고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계에 하나의 붐을 형성시켰다. 작가는 집필에 쫓기고, 주연급 탤런트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영화 배우의 동원이 유행하고, 시청자는 또 다른 드라마 프로를 찾아 다이얼을 자주 돌리는 풍경이 흔해진 것이다.

초창기에 활약한 작가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에 정착하였고, 신봉승(辛奉承), 유호(兪湖), 윤혁민(允赫民), 이남섭(李南燮), 이철향(李哲鄕), 박조열(朴祚烈), 서윤성(徐允成), 전범성(田凡成), 김민부(金敏夫), 조남사(趙南史), 추식(秋湜) 등이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 창작 대열에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홈드라마·멜로드라마·코미디·역사극·스릴러 등의 연속물·단막물·시리즈 드라마 등, 온갖 스타일과 소재(素材)를 동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기간의 주류를 이룬 것은 역시, TBC-TV의 일일연속 멜로드라마였고, KBS-TV의 '실화극장' 시리즈가 이에 버금가는 시청률를 차지했다.

TBC-TV는 개국 초부터 김동훈, 김성옥, 김순철, 이낙훈, 이순재, 오현경, 정해창, 안은숙, 나옥주, 최난경, 조희자, 윤소정 등의 주역급 탤런트진을 확보했기 때문에 숙련된 연기가 요구되는 멜로드라마로 많은 시청층을 유지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한편, KBS-TV의 '실화극장'은 1964년 김동현의 <아바이 잘가오>로 시작한 시리즈로서, 반공 실화를 소재로 하는 단막드라마였으나 1965년부터는 주간연속극으로, 1973년 <노동당>부터는 일일연속극으로 전환한 장수 프로이다. 이 프로는 또 드라마 주역에 영화계의 주연급 배우들이 거의가 한 번씩은 동원되어 온 사실로서 그 특색의 하나를 이루기도 했다. 신봉승·김동현·김강윤(金剛潤) 등이 교대로 집필하는 '실화극장' 시리즈는 65년의 <사화산(死火山)>, 66년의 <스타베리 김>, 67년의 <돌무지> <제3지대(第三地帶)>, 68년의 <250조> <그림자>, 69년의 <지령 3호>, 70년의 <악마의 손>, <노동당> 등이 성공적이었고, 77년 말에는 유럽 현지로케로 된 <유럽특급>이 방송되었다.

한편, 1966년 3월에는 KBS-TV도 VTR 기재(機材)를 도입하여, 주(週) 4회의 드라마 방송이 고작이던 종래의 핸디캡을 극복하였고, 1963년 8월에 개국한 또 하나의 상업방송 MBC-TV가 컬러텔레비전 방송도 가능한 최신형 기재를 갖추고 출발하면서, 개국 프로로서 김희창의 <여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 한운사의 <아빠의 얼굴>, 유호의 <초설(初雪)> 등이 매일·주간 연속극과 단막물로 방송되어 텔레비전 드라마 부문에의 의욕을 보인 것들은 모두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계에 여러 가지 의미로서의 새로운 계기를 이룬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황운진, 이기하(李基夏), 김동혁(金東赫), 고성원(高聖源), 정일몽(鄭一夢) 등의 극히 적은 인원이 담당하던 연출진에, 새로이 박재민(朴宰民), 이재춘(李在春), 유길촌(柳吉村), 허규(許圭), 김재형(金在衡), 이남섭, 김상봉, 임학송(林鶴松), 표재순(表在淳), 나영세(羅英世), 독고중훈(獨孤重勳), 이효영(李孝英), 전세권(全世權), 이윤희(李潤熙) 등이 참가 활동한 것도 이 기간의 성황을 나타내는 기록의 하나가 되어 준다.

한편, 한일간 국교정상화 이후에 급격히 증가한 극중 일본인 등장인물들의 대사 처리(臺詞處理)에 있어서, 그 지나친 일어 사용이 비판이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개화기의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開花期-television drama(1970∼1972)

국영 KBS-TV와 민영 TBC-TV, MBC-TV의 3개 TV국이 각각 폭넓은 시청층의 확보와 높은 시청률의 유지를 노려 과열경쟁을 벌였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기간에,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는 실로 백화난만한 화원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난만한 꽃밭이 과연 그 빛깔에 어울리는 향기를 지녔는가, 그리고 장차의 알찬 결실을 안심하고 기대할 만한 꽃송이들이었는가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런 문제야 어쨌든, 이 기간에 나타난 특징의 하나는 대하물(大何物)의 등장과 그 유행이다. 1970년 봄 고성원의 연출로 TBC-TV에서 방송되기 시작한 임희재의 <아씨>는 당초에 100회 정도로 끝낼 예정의 일일연속극이었다. 구한말(舊韓末)부터 1·4후퇴에 이르는 최근세(最近世)에 갖는 파란과 고난 속에서 울며 견디며 살아온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엮은 이 드라마는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롱런을 계속한 끝에 252회로 막을 내렸고, 1972년 봄에 시작한 KBS-TV의 연속드라마 이남섭 작·연출의 <여로> 또한 211회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이땅에 다시금 연속드라마 붐을 일으켰다. 시리즈물이 아닌 독립된 드라마로서 이처럼 놀라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음은 우선 비범한 작가의 역량(力量)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지나치게 외래풍(外來風)이 범람한 멜로드라마에 식상(食傷)했던 시청층의 반향도 그 원인의 일부로 지적되고 있다.

대하물 스타일의 복고조(復古調) 멜로드라마는 이 밖에도 김내성 원작, 이철향 각색의 <청춘극장>, 사유선(史有善)의 <형제>를 비롯하여, KBS-TV의 <임진왜란>, MBC-TV의 <사모곡(思母曲)> 등으로 계속됐으나 흥미본위에 치우쳐 시청률을 의식, 민족사관을 정립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궁중 일변도의 애정갈등, 정권쟁탈을 둘러싼 권모술수를 조명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이 짙었다.

이 기간에 성공한 연속드라마로는 조남사의 <정(情)>, 김동현의 <아버지>, 이서구의 <장희빈>, 차범석의 <물레방아>, 한운사의 <아버지와 아들>, 김지헌(金志軒)의 <길>, 안수길 원작, 김영수 각색의 <북간도(北間島)>, 유호의 <사슴아가씨> 등 그 수가 많고,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서윤성의 <통곡의 종>, 남지연(南芝鳶)의 <외아들>, 이근삼의 <꽃집 아줌마>, 김영수의 <문>, 오재호(吳在昊)의 <내코가 석자>, 심영식(沈英植)의 <첫 남자>, 박조열의 <무지개 가족> <개미가족>, 이용찬의 <두 얼굴> 등이 있다. 그리고 MBC-TV의 개국기념 80만원 고료 작품으로 당선된 <역풍>과 200만원 고료 당선작인 <임꺽정(林巨正)>도 의욕에 넘치는 역작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기간에 뚜렷하게 나타난 현상의 하나는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시청률의 꾸준한 유지이다. MBC-TV의 백승한(白承漢)작 <부부만세>는 700회를 넘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TBC-TV의 이성재·이철향 등 집필의 <여보 정선달>, KBS-TV의 윤혁민·이희우 등의 <1통 2반 3번지> 등이 모두 기대했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KBS-TV의 <개화백경(開花百景)>(곽일로 작)과 <고전 시리즈>도 공기(公器)인 텔레비전 방송의 사명을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며, <고전 시리즈>의 하나인 <한중록(恨中錄)>은 126회라는 롱런기록을 수립했던 점에서도 기록에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김민부·김종달(金鍾達) 등의 신인작가가 매회 교대해서 집필한 <서울의 하늘 밑>, 윤혁민·박조열·나연숙(羅蓮淑) 등의 <꽃동네 새동네>, 이남섭의 <아들낳고 딸낳고>, 백승찬의 <구두쇠 아빠>, 여러 작가가 공동집필 하는 <수사반장> 등도 모두 시추에이션 드라마로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고, <꽃동네 새동네>는 AFKN-TV에도 중계된 바 있다.

그리고 이 기간,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그 연기를 빛낸 연기진으로는 김희준, 장욱제, 최불암, 노주현, 신구, 전운, 윤여정, 오지명, 최경자, 유하나, 태현실, 홍세미 등이 있다.

이 밖에 1970년 초 3개 TV국 사이에 탤런트 스카우트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1971년 2월 TBC-TV가 탤런트의 전속계약 제도를 채택한 일, 1970년 1월 MBC-TV에서 김동현 작 <암살(暗殺)>의 제작에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인 야외 녹화를 했던 일, 1971년 8월 KBS-TV가 동시 녹음을 시작한 일, 1970년 5월 MBC-TV에서 방송된, 이철향 작, 이재춘(李在春) 연출의 <옥녀(玉女)> 제작 때에는 단 3명의 출연자와 하나의 세트로서 8회분의 녹화가 가능했던 일 등은 모두 기억될 만하다.

드라마의 예술성보다도 그 흥행성을 중시한 나머지 판매율이 무난한 멜로드라마에 지나치게 쏠린 경향이며 그와 같은 안이한 제작 태도는 작가의 도덕 감각마저 의심될 정도로 불건전, 치졸(稚拙)한 타작(馱作)까지도 브라운관을 통해 연출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101회를 넘어 연속되던 <개구리 남편>이 시청자들의 비난 때문에 도중에서 막을 내린 일, 인기 있는 몇몇 탤런트의 경우, 한꺼번에 5편 이상의 드라마에 겹치기로 출연할 만큼 알려진 얼굴에만 주역을 맡기려는 경향이 조장된 사실 등도 그것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앞날에 미치는 영향이나 나타날 징후(徵候)의 어떠함을 떠나서, 지금 성황을 구가하는 우리 텔레비전 드라마계에 각각 의미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변혁기의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變革期-television drama1973년 7월, 문화공보부는 각 방송국에 일일연속극의 방영 횟수를 감축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따라 각국은 조정에 나섰으나 뚜렷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 해에 방영된 드라마 가운데 기록에 남을 만한 것은 KBS의 경우 1월 1일부터 방영된 <파도>(곽일로 극본, 김연진 연출), 사극 <세종대왕>, 실화극장의 <구룡반도>, 일요사극 <신사임당> 등이다. 신년 벽두에 방영을 시작한 <파도>는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신인 탤런트 이효춘(李孝春)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TBC의 경우, 일일연속극 <달래>(김자림 작 나영세 연출), 토요드라마 <두 나그네>, MBC 일일연속극 <한백년>(이철향 작, 유광열 연출), <민비> 등을 이 해의 문제작으로 꼽을 수 있다. 1974년은 또한 대형 정책 드라마가 등장, 성공한 해이다. 1974년 방영된 MBC의 주요드라마로 <강남가족> <수선화>(김수현 극본·표재순 연출)가 있다. 이들은 72년 <새엄마>(411회방영)로 등장한 작가 김수현의 작품으로 일일연속극의 새로운 형식으로 각광을 받았다. <수선화>는 탤런트 김자옥을 스타덤으로 올려놓은 작품이다.

TBC의 경우는 일일연속극 <꽃네>(김자림 극본·황은진 연출), <윤지경> 등이 있다.

1975년은 전년도에 이어 일일연속극에 대한 사회 각계의 비판이 고조된 해이다. 이에 따라 MBC의 <안녕>이 퇴폐풍조라는 비난을 받아 방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MBC는 좋은 작품을 많이 개발, 방영하였다. 주간연속극 <수사반장>, 75년도 방송대상(放送大賞) 대통령상 수상작품인 <신부일기>가 이 해의 작품이다. 또 다른 주요 드라마로는 일일극 <집념>(이은성극본)이다. 75년 9월에 시작되어 143회까지 계속된 이 프로는 75년 한국연극영화상 TV부문 극본상을 수상하였다. TBC도 75년 일일연속극 <옥피리>(신봉승극본, 김재형연출), 주간극 <형사> 등 4편을 새로이 선보였다. 75년 KBS의 주요 드라마는 6·25 특집극 <어느 한국인>(이상현극본), <전우> 등이 있다. 특히 <전우>는 일선에서 직접 녹화함으로써 현장감을 살렸고, 청소년층에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이다.

KBS는 야외촬영반을 동원, 경향 각지를 순회하면서 경제발전상을 드라마화하였다. 영화의 인기를 그대로 받아서 올스타 캐스팅의 <꽃피는 팔도강산>(윤혁민 극본, 김수동 연출)이 4월에 그 막을 올렸다. 이것은 정책프로였는데도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면서 398회를 방영하였다.

1976년도에도 TV 각국간의 시청률 경쟁은 일일 및 주간 연속 드라마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지속되었는데, KBS는 점차로 이러한 경쟁대열에서 빠져나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76년도의 주요 드라마는 TBC의 경우 <별당 아씨>(신봉승 극본, 김재형 연출)와 <맏며느리>, MBC의 <여고동창생>(김수현 극본, 이효영 연출), <엄마의 얼굴>, <들장미>, KBS의 <아버지와 딸>, <전천후 사나이>, <타향> 등이 있다. 특히 특집극 내지 단막극이 KBS의 경우에 두드러졌는데 6·25 특집극으로 <어느 한국인>(이상현 극본, 김홍종 연출)은 야심작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이 해 방송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1977년에 들어서자 각국은 드라마의 수준향상과 방향전환을 모색하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대형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단막극의 중요성을 인식, 일일연속극에 의한 이미지 악화를 축소시키려 하였다. 이 해의 주요 일일연속극은 TBC의 <외동딸>, MBC의 <당신> 등이 있다. 한편 KBS는 일일연속극 1편을 줄이고 새로운 형식의 5부작 시스템을 도입, 연속극을 주 단위로 묶었다. 5부작은 평균적으로 호평을 받았는데, 특히 좋았던 작품으로 8·15 특집극 <나루터 3대>(한운사 극본, 임학송 연출)는 기록에 남겨도 좋을 것이다. 이 해의 작품으로 기록에 남길 만한 것은 대부분 단막극에서 나왔다. TBC의 프로에서 <부부> <등대지기>(나연숙 극본, 곽영범 연출), MBC의 <제3교실>, KBS의 일요사극 <맥(脈)>과 의 작품 등이 그들이다. 특히 KBS의 5부작 형식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일연속극을 지양하기 위한 시도로서 좋게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의 TV드라마 추세는 대형화·단막극화 등으로 종합할 수 있다. <林 尙 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