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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ㄱ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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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arin, Yurii Alekseevich(1934-1968)

세계 최초의 소련 우주 비행사. 스몰렌스크 시의 집단 농장에서 출생하였다. 사라토프 공업 학교 재학 때, 항공 클럽에서 비행 기술을 배운 뒤 오렌부르크의 공군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다. 1961년 4월 12일 인공 위성 보스토크 1호로 무중력 상태의 우주권에 돌입하여 187마일의 고공에서 시속 1만 8,000마일 속도로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한 뒤 예정지에 귀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지구는 푸른 빛깔이었다"고 한 그의 말은 유명하다. 그 뒤 소령으로 특진하였고, 훈련중에 연습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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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帝(1760-1820)

중국 청나라 제7대 황제. 인제라고도 부른다. 고종 건륭제의 사망과 동시에 건륭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화곤을 처형하고 강기를 숙청하였다. 또 백련교도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천리교도의 난도 진압하였다.

가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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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ay, Juan de(1528년경-1583)에스파냐의 남아메리카 정복자. 페루·콜롬비아를 거쳐 파라과이를 차례로 탐험했으며, 1573년 아르헨티나를 세웠다. 다음해에 리오 데 라 프라타 식민지의 부총독이 되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식민지를 만들어 그곳이 오늘날과 같이 큰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인디언에 의해 피살되었다.

가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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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nier, Jean Louis charles(1825-1898)

프랑스의 건축가. 파리 태생으로 파리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르바의 가르침을 받았다. 1848년 로마 대상을 받고, 이탈리아·그리스·터키 등을 유학한 후 귀국하였다. 그의 작품은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가미한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였다. 대표작으로 <파리 국립 음악원>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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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 Garcra Marquez(1928- ) 콜롬비아의 작가. 보고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기자로 유럽에 체재하였다. 그 후 멕시코에서 창작활동을 하였고,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 쿠바로 가서 국영 통신사의 로마.파리·카라카스·하바나·뉴욕 특파원을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작품으로는 중·단편소설 <낙엽>(1955),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1961),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1962), <암흑의 시대>(1962) 등과, 장편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1967), <예고된 죽음이야기>(1981)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며 또한 그를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Cervantes)라고 일컫게 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콘도(Ma­condo)라는 가공의 땅을 무대로 하여 부엔디아 일족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1981년에는 <신고된 사망자 연대기>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200만부 이상 팔렸으며, 1982년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 이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95년 <사랑과 또다른 악마들에 관하여>의 불어판을 파리에서 출간하였다.

가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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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shin, Vsevolod Mikhailovich(1855-1888)

러시아의 작가. 군인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17세 때 발작이 있은 후 사망할 때까지 여러 번 정신 병원을 찾았다. 러시아·터키 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퇴역하였다. 전쟁의 체험을 그린 단편 소설 <4일간>을 발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사회악에 대한 반항과 절망적인 번민을 그리고 있다. 그 밖에 <병사 이바노프의 추억> <겁쟁이> 등이 있다.

가리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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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ibaldi, Giuseppe(1807-1882)이탈리아의 장군·국가 통일의 공로자. 프랑스 니스에서 출생하였다. 마치니와 함께 이탈리아 혁명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848년까지 우루과이에 거주하다가 귀국하여, 로마 공화당에 가입한 후 교황에 반대하였다. 그 뒤 피에몬테에서 자유 해방 운동에 종사하다가 실패하자 다시 남미로 건너갔다. 1954년, 한때 카프레라 섬에 은거했으나, 사르데냐 왕 밑에서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변절로 실패하자, 1,000명의 '붉은 셔츠대'를 인솔하여 시칠리아 섬의 마르살라에 상륙하여 한 사람의 손실도 없이 섬을 정복하였다. 1860년 다시 진군하여 칼라브리아와 나폴리 지방을 점령하고 이것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바친 후, 다시 카프레라섬에 귀환하였다. 팔레르모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로마 점령을 기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자 노년을 카프레라에서 보냈다. 정치가로서의 식견은 부족했으나, 용감하여 애국자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중심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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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a, Vasco da(1469년경-1524)포르투갈의 항해자·인도 항로의 발견자. 시네슈에서 출생하였다. 카스티야의 전쟁에도 종군하였으며 선원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및 엔리케의 뜻을 이어 항로 발견을 시도하였다. 1497년 4척으로 된 탐험대는 리스본을 떠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다음해 5월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이 항로는 '인도 항로'라 불리며 유럽 인이 아시아에서 활약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후에 인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인도 총독이 되었다.

가상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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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sendi,Pierre(1592-1655)

프랑스의 물리학자·수학자·철학자. 상테르 시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수재라는 이름을 얻고, 엑스 대학에서 신학 및 철학을 배웠다. 1623년까지 엑스 대학에서 신학 및 철학을 가르쳤고 후에 파리 국립 학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1648년 폐병에 걸리자 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저작 활동에 종사하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철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반대하고,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지지하였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와 대립을 보여 약 6년 간 서로 논쟁하였다. 또한 그는 윤리학에 있어서도 에피쿠로스의 행복주의를 부활시켜 고대 유물론을 개진시켰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 및 지중해의 수로도 작성 등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지동설에 관해서는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에 동조하였다.

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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迦葉 석가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 음을 따서 마하가섭, 의역하여 대음광이라 하였다. 인도의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바라문 니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비팔라 나무 밑에서 탄생하였으므로 '비팔라야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가섭은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가 되었다. 선가에서는 가섭을 부법장 제1조로 높이 받들고 있다.

가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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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tein Gaarder(1952- )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에서 몇 년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 1986년 단편집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주로 어린이와 젊은이를 위한 작품을 썼고, 인생의 신비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냈다. 1990년에 <인내의 신비>로 노르웨이 문학비평가 협회와 문화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특히 <소피의 세계>는 북유럽과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94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비롯하여 갖가지 상을 휩쓸다시피 하여 가아더를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다. 이 책은 영어판이 출간되었고, 95년에는 프랑스·브라질·러시아·중국·일본 등 세계 30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어 지구촌 어디에서나 <소피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현재 가아더는 두 아들, 부인과 함께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살며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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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端康成(1899-1972)일본의 소설가.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신감각파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고, 특이한 서정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수정환상> <서정가> <설국> 등이 있다.

가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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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uss, Karl Friedrich(1777-1855)독일의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벽돌 굽는 일을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의 도움을 받아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세기 초에 17각형의 기하학적 작도에 성공한 후 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 최소 제곱법, 2차 형식에 관한 상호 법칙, 복소수 평면의 도입 등을 발견하였다. 1801년 <정수론 연구>를 발표하여 현대 정수론의 기초를 세웠다. 새로 설치된 괴팅겐 천문대장이 되어 평생을 종사하였다. 1931년 괴팅겐 대학에 물리학 교수로 취임한 때부터 베버와 함께 지구 자기에 관해 활발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제정 측량의 '절대단위'를 제창하고 전자 작용을 응용한 유선 전신기를 발명하였다. 1940년 포텐셜에 관한 '가우스의 정리'를 발견하였다. 순수 수학의 정립자로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가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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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Geissler(1815-1879)독일의 기계기술자. 마이닝겐 출생. 가이슬러관이라고 하는 진공방전관을 만들어 진공방전현상의 연구에 기여하였다. 1854년본에 이화학기계 공장을 차려 독창적인 작업으로 유명해졌다. 본대학 교수 J. 플뤼커의 부탁을 받고 수은펌프를 써서 유리관안을 진공으로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관은 1859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진공방전관으로, 플뤼커는 이것으로 방전에 의한 여러 가지 현상(예를 들면, 수소스팩트럼의 3개의 主線)을 발견하였다. 또한 가이슬러는 수은공기 펌프나 기상학기계를 개량하였고, 유리기계의 제작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쳐 1868년 본대학에서 철학박사 칭호를 받았다.

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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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pon, Georgii Apollonovich(1870-1906)

러시아의 성직자·혁명가. 러·일 전쟁으로 금속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에 들어갔을 때, 노동자의 생활 개선을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노동자 데모를 직접 지휘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이 날을 '피의 일요일'이라 부른다. 그 후, 영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06년 귀국하였으나, 사회 혁명당원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가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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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ffky, Georg Theodor August(18450-1918)

독일의 세균학자. 하노버에서 출생하였으며 베를린 왕립 대학에서 의학을 배운 뒤 코흐 밑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다. 코흐를 따라 콜레라 연구 위원회의 일원으로 이집트와 인도 지방을 여행하였다. 1897년 인도에 머물면서 페스트 연구 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장티푸스 균의 순배양에 성공하였으며, 결핵 환자의 객담 중 균의 생성과 소멸을 보는 데 편리한 '가프키 표'를 만들었다.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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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dhi, Mohandas Karmchand(1869-1948) 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무저항주의자. 인도 서부의 사우라슈트라 주의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게서 자이나 교의 교육을 받고, 영국에 유학하여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배운 후, 귀국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893년 남아프리카의 나탈에 부임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인들이 받고 있는 차별 대우를 깊이 체험하여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톨스토이 주의에 의거한 '비폭력 투쟁'의 단서를 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이민 제한을 위해 부과한 지문 등록을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키다가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마침내 철회에 성공하였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노동 운동, 민족 해방 독립 운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전쟁이 끝나면, 영국이 독립을 시켜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반란 진압 법안'을 만들어 탄압하자, "빵을 구하는 데 돌을 준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납세 거부·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925년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다. 1942년 영국에 대하여 인도 철퇴의 요구, 불복종 운동을 일으키다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인도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델리에서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융화에 전력하였다. 저녁 기도를 하러 가는 도중, 반(反) 이슬람의 힌두 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인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의 한 사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종교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무상해)였고, 인류애에 의한 폭력 부정만이 최후의 승리임을 확신하고 이를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다.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고, 때로는 금식에 의해 속죄하였다. 또한 인도 인습인 사회적 계급 제도의 타파에 노력하였으며 불가촉 천민의 해방을 실천하였다.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였으며, 사회악에의 철저한 반항이 정치 활동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마하트마(위대한 혼)'로 불리었으며, 그의 철저한 무저항주의에 의한 저항과 승리는 세계사에 길이 기억될 만하다.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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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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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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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enos, Klaudios(129-201년경)그리스의 의사·해부학자·철학자. 페르가몬에서 출생하였으며 코린토스·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의학을 배운 후 출생지에서 개업하였는데, 후에 로마로 이주하여 유명해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시의(侍醫)가 되었으며 히포크라테스 이래 최고의 의학자로 꼽힌다. 생체 해부를 실시하였고, 특히 신경계의 생리에 관해서는 실험적인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의사는 자연의 소명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400권 이상의 철학 및 의학 관계 저술이 있다.

갈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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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ois, Evariste(1811-1832)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근교의 부르 라 렌에서 출생하였으며,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2차례나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18세 때 5차 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 보냈으나, 코시에 의해 묵살되었으며 다시 보낸 원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푸리에로부터 되돌려져 왔다. 1830년 '7월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가석방되었으나 연애 관계에 의한 결투 끝에 죽었다. 그의 업적은 그가 결투하기 전날 밤, 친구 슈발리에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 오늘날 '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이론에 의해 방정식을 대수학적으로 풀 수 있는 조건을 구한 <갈루아의 이론>과 <아벨 적분>이라 불리는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그의 주요 논문은 후에 저작집 <갈루아의 수학 연구 업적>에 발표되었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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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ilei, Galileo(1564-1642)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철학자. 피사에서 출생하였으며 11세에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가졌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학을 배우기 위하여 피사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맥박계를 고안하였다. 피사 대학을 중퇴한 후,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또한 높은 곳에서 무게가 각각 다른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여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의 낙체 실험'이다. 1609년 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천체 관측에 응용하여 '목성의 위성',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하였다. 이듬해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이때 "그러나 지구는 여전히 움직인다"고 했다 한다. 1637년 무렵에, 장님이 되었으나 낙심하지 않고 <신과학 대화>를 저술하여 근대 역학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그의 최대 공적은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한 점에 있다. '근대 자연 과학의 시조'로 불리운다.

갈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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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vani, Luigi Alosio(1737-1798)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생리학자.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후에 모교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1780년 해부한 개구리의 다리가 해부도에 닿자 경련이 일어남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생물 전기(동물 전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종류가 다른 금속들 사이의 전위차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 A. 볼타와 논쟁했다. 그것은 볼타로 하여금 전지를 발명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기생리학, 전자기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갈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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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braith, John Knneth(1908- )미국의 경제학자.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했으며, 토론토·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배우고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케네디 대통령 밑에서 고문단으로 있었으며, 주(駐) 인도 대사를 역임하였다. 진보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저서로 <풍요로운 사회> <미국의 자본주의> 등이 있다.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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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熙帝(1655-1722)

중국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54-1722). 순치제(세조)의 3남이며 이름은 현엽, 성조라고도 불렀다. 8살에 즉위하였으며 그동안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오배를 물리치고 친히 정치를 하였다. 1673년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평정하고 청나라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20년 동안이나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던 정성공 무리를 1684년에 토벌하고 이어서 헤이룽 강(아무르 강) 방면의 러시아를 몰아내고, 1689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외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스타노보이 산맥을 양국의 경계로 하여 이 방면의 땅을 회복하였다. 또한, 외몽고와 티베트도 지배함으로써 청나라의 영토를 확대하였다. 황제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1678년 박학홍사과라는 과거의 특례를 열어 유학자로서 이름 있는 자들을 등용하였다. 학자들에게 <강희 자전> <연감류함> <패문운부> 등 많은 서적을 만들게 하고, 학문 장려와 한인 회유를 함께 성공하였다. 동양 사상 명군으로 알려져 있다. 손자인 건륭제의 시대와 함께 강희·건륭 시대라고 불리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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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up, George Horace(1901-1984)미국의 심리학자·여론의 통계적 조사법의 창시자이다. 아이오와 주립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후, 트레이크·노스웨스턴·콜럼비아 대학에서 신문학 및 광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광고 대리업을 경영하고 상업 조사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1935년에 '갤럽 여론 조사소'를 창립하였다. 1936년 대통령 선거 때에 선거 승패의 예상 적중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대조사망과 과학적인 조사 기술에 의해 세계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거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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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shwin, George(1898-1937)

미국의 작곡가.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의 아들로 뉴욕에서 출생하여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13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 18세 전후부터 경음악을 작곡하여 성공하였다. 뒤에 본격적으로 작곡에 뜻을 두고,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랩소디 인 블루>를 발표하여 교향악적 재즈의 창시자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피아노 협주곡 F장조> <포기와 베스> 등이 있다.

건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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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帝(1711-1799)

중국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1795). 강희제의 손자이며 옹정제의 아들로 고종이다. 이름은 홍력으로 즉위하여 조부와 아버지에 의해 확립된 국위를 확장시키는 데 전력하였다. 몽고·신장·티베트·네팔 등을 정복하고, 버마·타이·베트남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학자를 동원하여 <대청일통지> <황조문헌통고> <대청회전> 등 방대한 도서를 많이 편찬하게 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사고 전서>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학자들의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없애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는데, 이 시대에 고증학이 성행한 원인이 되었다. 또 만주족에 대한 민족적 차별감을 자극하는 도서를 철저히 금지시키는 한편, <청문감> 등을 비롯한 만주에 관한 문헌을 발간, 만주어를 보급케 하였다. 그는 중국의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장시에 능하였다. 그의 시가 10만 수에 이른다고 하는데 간행된 시문집에 <낙선당 전집> 40권, <청 고종 어제 문집> 4부 92권, <청 고종 어제 시집> 6부 454권이 있다.

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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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in, Camille(1872-1961) 프랑스의 의사. 칼메트와 함께 B.C.G.를 발견하였다. 여러 가지 연구 끝에 결핵에 대해서 면역이 되는 균을 얻었는데, 이것을 '칼메트와 게랭의 균' 즉 B.C.G.라 하였다.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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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vara, Ernesto che(1920-1967)아르헨티나의 혁명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을 졸업한 뒤,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혁명 운동에 참가하였다. 1954년 멕시코로 망명하여 카스트로와 알게 되고 쿠바 혁명군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바티시타 쿠바 정권을 무너뜨린 후, 쿠바 시민이 되어 카스트로 정권 아래서 국립 은행 총재 및 공업상이 되어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7년 군의 게릴라 소탕전에서 사망하였다.

게오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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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eorghiu, Constantin Virgil(1916-1992)

루마니아의 작가. 라즈베니에서 출생하여 부쿠레슈티·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운 후, 루마니아 외무성 특파 문화 사절의 수행 등을 하는 한편, 창작에 주력하여 시집 <눈 위의 낙서>를 발표하여 루마니아 왕국상을 받았다. 1949년 전쟁 소설 <25시>를 발표하여(파리에서 간행)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밖의 저서로 <제2의 찬스>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1974년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게이뤼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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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y-Lussac, Joseph Louis(1778-1850)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 생레오나르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배우고 베르톨레의 조수로 일하였다. 1804년 지상 7,000m 이상의 상공에 기구를 타고 올라가 지구 자기 및 대기의 성분을 조사하여, 산소와 수소가 1:2의 비율로 화합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808년 기체 반응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유기 분석법의 개량 등에 공헌하였다. 공업에 있어서는 항생제 만드는 법을 개량하였고, 사이펀 청우계·알코올 계를 발명하였다. 또 게이뤼삭의 탑을 고안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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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e, James Scarth(1863-1937)

캐나다의 선교사·신학박사·한국어 학자. 한국 이름은 기일(奇一)이다.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에서 출생하여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다. 1889년 대영 성서 공회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897년, 한국 최초의 <한영 사전>을 간행하였으며 <신·구약 성서>와 <천로 역정>을 한국어로 발간하였다. 한국인의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원긍·유성준·김정식 등과 우리나라 교육 기관의 효시인 '교육 협회'를 창립하였다. 또 <춘향전> <구운몽> 등을 영역하여 한국의 언어·풍습 등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왕립 아시아 학회 한국부회 간사를 역임하였으며, 1928년 은퇴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한양지> <한국 결혼고> <금강산지> 등이 있다.

게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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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sell, Arnold Lucius(1880-1961)미국의 아동 심리학자·소아과 의사. 위스콘신·클라크·예일 대학에서 수학·문학·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1년 예일 대학에 아동 발달 연구소를 창설하고, 심리학과 의학을 합한 정신 발달의 실증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영·유아기의 어린이 연구에 큰 업적을 세웠다. 그는 어린이가 자라는 모양을 진단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도 어른과 똑같은 인격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발달이라고 하는 조건이 모든 어린이의 생활을 규정짓고 있다는 발달주의 학설을 세웠다. 1950년 정년 퇴직한 후에, 뉴헤이븐에 아동 발달 연구소를 창설하였다. 저서로 <유아기의 심리학> <이리 새끼와 어린이> 등이 있다.

고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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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愷之(344-406년경)

중국 동진의 화가. 호는 호두, 장쑤 성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미술의 기틀을 닦아 놓은 위대한 화가로서, 인물·동물·풍경화 등 각 방면에 재주가 있었으며,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다. 송나라 육탕미, 양나라 장승요와 함께 6조의 3대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교묘한 필치와 예리한 관찰로 형체의 특징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재절·화절·치절의 '3절'이란 말로써 그를 평하였다. 현존하는 작품 <여사잠도권>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국 그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유명하다.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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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uguin, Eugene Henri Paul(1848-1903)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집안이 가난하였다. 어려서부터 상선의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증권 거래소의 직원이 된 후, 여가가 있을 때마다 회화에 전력하여 살롱 전에 입선하였다. 피사로를 알게 되어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후, 1880년 제5회 인상파전에 참가하였다. 대략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886년부터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벵(Pont-Aven) 파'를 창립하였다. 한때 고흐와 함께 생활했으나 성격 차이로 헤어지고,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3인의 타히티 인> 등 우수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세잔·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 작품으로는 <황색의 그리스도> <타히티의 여인들> <시장> 등의 걸작과 <타히티의 생활을 모은 수필집> 등의 책을 쓰기도 하였다.

고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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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ol', Nikolai Vasilevich(1809-1852)

러시아의 작가·극작가. 러시아 리얼리즘의 시조이다. 우크라이나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9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의 대작의 소재는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암시를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935년 <검찰관>을 완성하여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것은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으나,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그 동안 로마에서 불후의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를 시작하였다. 이것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진 후, 원고의 일부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그는 작품 속에 당시의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퇴폐와 관료 세계의 모순·부정 등을 예리한 풍자의 필봉으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작품으로 <네프스키 가로> <옛 기질의 지주들> <타라스 부리마> 등이 있다.

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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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don, Charles George(1833-1885)영국의 군인. 스코틀랜드의 군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크림 전쟁에 참가하였다. 1860년 중국에 파견된 후, 태평 천국의 난의 평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집트 총독, 수단 지사를 거쳐 수단 총독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통제에 전력, 수단의 반란 토민을 토벌하던 중에 전사하였다.

고 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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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Dinh Diem(1901-1963)베트남의 정치가. 1933년 베트남 왕국 내무상이 되었으나, 바오다이 황제와 뜻이 맞지 않아 50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해 미국의 지지를 받아 바오다이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았으며, 1955년 국민투표로 바오다이를 물리치고 원수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 정치를 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여 농민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63년 돈반 민 장군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이 무너지고 아우 고딘 누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고르기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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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gias(기원전 484-기원전 375년경)

그리스의 웅변가·소피스트. 시칠리아 섬에서 출생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에 외교 사절로서 아네테를 방문하고(기원전 427), 웅변으로써 아테네인들을 움직여 그들의 외교 정책을 바꾸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만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근본 사상으로, 저서 중에 <팔라메데스론> <헬레네론> <비존재론> <화평론> 등이 유명하다.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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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bachyov, Mikahil Sergeyevich(1931- )

소련의 정치가.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55년 모스크바 대학 법과와 스타브로폴 농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1956-1958년 스타브로폴 시 공산 청년동맹 제1서기를 지냈으며, 1966-1968년 제1서기·1968-1970년 제2서기를 역임하였다. 1970-1978년 스타브로폴 주의 제1서기로 있으면서 1971년부터 당중앙위원을 겸하였다. 1978년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이듬해 정치국원 후보에 임명되었다. 85-91년까지 당 서기장을 지냈으며, 1990년 소련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동유럽의 개혁과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2년 소련 연방이 공식 해체됨에 따라 실각되었다. 현재 국제사회정치연구기금 총재로 있다.

고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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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kii, Maxim(1868-1936)

러시아의 작가. 볼가 강 연안에 있는 니주니 노브고로드(지금의 고리키 시)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사환·접시닦이·제빵 기술자 등 온갖 일을 하였다. 1892년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였다. 1895년 <러시아의 부>지에 <체르카시>를 발표하여 크게 절찬을 받았고, 이어서 <오를로프 부부>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05년 사회 민주당에 가입하였으나, 군대의 민중 학살 사건에 항의한 것 등으로 인해 회원에서 제외되고 투옥되었다. 1906년 세계 지식인들의 석방 요청에 의해 석방된 후,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13년 귀국하여 <유년 시대> 등을 집필하는 한편, 무산 계급 작가 양성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32년 소련 작가 동맹 제1회 대회 의장에 취임, 후진 작가의 육성과 노동자 지식인들을 위해 일하다가, 파시스트에 의해 독살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창조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소련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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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ya Lucientes, Francisco Jose de(1746-1828)

에스파냐의 화가·판화가. 18세기 에스파냐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에스파냐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고 1760년 이후부터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다. 1765년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에 감동을 받고, 1769-1771년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뒤 1781년경부터 크게 이름을 떨쳤다. 1799년 궁정 화가가 되고, 1822년 프랑스의 보르도에 체류중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작품으로 벨라스케스풍의 종교화와 초상화 및 민중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초상화 <옷 입은 마야> <벌거벗은 마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등과 역사화 <5월 3일 처형>, 그리고 동판화 <투우> 등은 특히 유명하다. 대다수의 작품이 마드리드 왕립 회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고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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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炎武(1613-1682)

중국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학자. 호는 정림, 장쑤 성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이름을 떨쳤으나, 관직을 가지지 않고 각지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는 명 말의 양명학자가 공리 공론에 흐르는 것을 배척하고, 주자학을 신봉하여 특히 실증과 실용을 중시하는 학풍을 지향하여 황종희와 함께 '고증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저서에 <일지록> <천하 군국 이병서> 등이 있다.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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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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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h, Vincent van(1853-1890)

네덜란드 근대의 화가. 17세에 암스테르담 대학 신학부를 나온 후, 어학 교사·서점의 점원·신학 연구생 등으로 전전한 후, 복음 전도를 위해 보리나슈의 탄광지에 부임하였다. 그곳에서 티푸스 환자를 간호하던 중 병을 얻어 귀향하였다. 이 때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여 헤이그의 미술상에서 일하는 동생 데오도르의 도움을 받아 제작 활동을 하였다. 1886년 3월 파리로 건너가서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츰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 이 때 고갱·베르나르 등을 사귀었다. 남프랑스의 자연을 동경하여 아를로 이주, 고갱을 초청하여 공동 생활을 시작하고 서로 영향을 받았다. 그 동안 <자화상> <해바라기> 등 많은 걸작품을 냈으나, 과로로 인한 신경병으로 고갱과 헤어지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정신 병원에 입원, 치료받는 중에도 제작을 계속하여 140여 점이나 그렸다. 1890년 5월 퇴원하여 파리의 근교에 이주하여 <보리밭 위를 나는 까마귀>를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그는 정열적인 색채와 인상파의 원색 화법으로 유명하며, '근대 회화의 개척자'이다. 대표작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 <귀 잘린 사나이> <알프스 풍경> 등이 있다.

곤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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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zalez, Gabriel Videla(1889-?)칠레의 정치가·변호사. 1937년 인민 전선을 결성하였으며,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급진·사회·공산 각당의 연립 내각을 조직하였다. 1947년 공산당을 추방하고, 친미 정책을 채택하였다. 1952년 9월에 사임하였다.

공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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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康(?-221)

중국 후한 말기, 위 초기의 장군. 공손 탁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가 되었다. 207년 요동에 도망해 온 장수 원상을 죽여 조 조에게 바치고 벼슬에 올랐다.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또 낙랑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을 설치, 한·예도 침공하였다.

공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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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淵(?-238)

중국 삼국 시대의 장군. 공손 강의 아들로 숙부 공손 공의 자리를 빼앗아 요동 태수가 되었다. 237년 위나라가 관구 검을 파견하여 선비·오환을 치고 항복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연 왕이라고 칭하였다. 이듬해 다시 침범한 위나라의 장군 사마 의에게 패하고 살해되었다.

공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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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潁達(574-648)

중국 당나라의 유교 학자. 허베이 성에서 출생하였다. 수 양제 때 명경의 시험에 급제하여 태학 조교가 되었다. 당의 태종에게도 인정을 받아 국자 좨주가 되었다. 태종의 명을 받고 그때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던 오경의 해석을 통일한 <오경정의>를 저술하였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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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유교의 창시자·정치가·대사상가·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 춘추 시대에 노나라 청평향(지금의 산둥성)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구, 자는 중니로서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하였다. 젊어서는 이미 학식이 매우 넓고 깊었으며 회계 출납직인 위리, 목장 경영직인 사직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주의 낙읍을 방문하여 문물을 견학하고 귀국, 이름이 높아지면서 많은 제자가 모였다. 36세 때 노나라에 삼환(맹손·숙손·이손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제나라로 도피, 거기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적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경공은 공자를 고문으로 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함과 비현실적임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 안영의 진언으로 좌절되었다. 이에 실망하여 2년 만에 귀국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때 중도재가 되었다. 후에, 대사구에 임명되어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으며 난신인 대부 소정묘를 죽였다(기원전 496).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경공이 주위 나라의 계략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직을 사직한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그는 인의(仁義)·정도(正道)에 의한 왕도 정치를 실현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귀국하여(기원전 484)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저술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시·서·예(詩·書·禮) 등을 제정하고 노사(魯史)에 의해 <춘추> <주역>을 연설하여 <효전>을 지었다. 공자의 역사적·객관적인 생애가 이러함에 비해 그의 내면적인 인격의 완성은 그 자신이 표현한 자서전적인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나는 나면서부터 이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이것을 빠르게 구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고, 학문이 나아간 과정을 말하여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고, 30세에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고, 40세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50세에 하늘이 내게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알며, 60세에 올바른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70세에는 사물의 옮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알게 됨으로써, 자기 판단에 따라 행동하면 잘못된 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의 언행록인 <논어>에 실려 있다. 그 근본은 '인'으로서 공자 스스로는 이를 명백하게 밝힌 바는 없으나, 대체로 박애·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인도주의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질서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진기:盡己) 남을 부축하며(추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이고 비상대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요 비보편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이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공자 스스로도 인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였다.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상이 현실적이어서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그의 사상은 살아 있을 때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 자사(공자의 손자:<중용>의 저자로 알려진다)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한국·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공쿠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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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court 兄弟 형 에드먼드(1822-1896)와 동생 알프레드(1830-1870)

프랑스의 소설가 형제. 19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자연주의 문학을 지도한 대표적 작가들이다. 18세기의 풍속사(風俗史)를 연구하여 1854년에 공동으로 <대혁명 시대의 프랑스 사회사>를 출판하고, 여성이나 예술에 관한 많은 저서를 냈다. 이어서 상세한 관찰과 자료의 조사에 의거하는 역사 연구의 방법을 창작에 적용하여 1865년 대표적 걸작인 <제르미니 라세르퇴> 등을 썼다. 1870년에 동생이 먼저 죽고 형은 만년에 <우타마로>(1891), <호쿠사이(北霽)>(1896) 등을 써서 일본 예술을 소개하기에 힘썼다. 또, 동생의 서간집 <쥘 공쿠르의 편지>(1885)를 출판함과 동시에, 형제의 일기인 '공쿠르 형제의 일기'(1887-1896)를 <문학 생활의 수기>라는 이름으로 발간했다. 에드몽의 유언을 따라 유산으로 '공쿠르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신인을 배출하고 있다.

관구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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串丘儉(?-255)

중국 위나라의 무장. 유주 자사가 되어 고구려 동천왕 18년(244)에 고구려의 요동정벌을 트집잡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이때 환도성이 함락되어 동천왕이 피신하자 그대로 철수하였다. 이듬해 왕 기를 시켜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으나, 이번에도 왕이 옥저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만주 지아현에 그의 고구려 침공을 기념한 기공비가 있다.

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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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羽(?-219)

중국 삼국 시대의 촉한 장군. 자는 운장, 허둥 출신으로 장 비·유 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다. 한때 조 조에게 포로가 되어 우대를 받고 한수정후로 봉함받았으며, 그를 도와 크게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유 비에게 충성을 바쳐, 208년 적벽전에서는 도리어 조 조를 크게 무찔렀다. 적벽전 후에 유 비가 이저우를 공격할 때 형주를 지켰으나, 오·위 동맹군의 협공에 패배하여 오의 포로가 된 후 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군신, 복록 장수신으로서 신앙되며, 관 우 묘가 각처에 많이 건립되었다.

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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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中(?-기원전 645)

중국 춘추 시대의 정치가. 685년 친구인 포숙의 권고로 제나라의 환공 밑에서 재상이 되었다.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강한 군대를 길러 나라를 튼튼히 하여 환공을 춘추 시대의 모든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그의 친구 포숙과의 우정은 '관포지교'로 유명하다. 중국 법가 사상의 시조이며, 저서에 <관자> 86편이 있다.

광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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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帝(1871-1908)

중국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1874-1908년). 묘호는 덕종(德宗)이다. 청나라 말기의 격동기에 서태후의 도움으로 3세 때 황제가 되었으나, 사실상의 정권을 잡은 서태후의 횡포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치세 때에는 청프 전쟁, 청일 전쟁 등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서구 열강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편할 날이 없었다. 이에 광서제는 캉 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주장대로 1898년에 '무술변법'을 시작하였으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변법파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그는 궁중에 갇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외국군대가 베이징에 들어오자 서태후와 함께 시안으로 피란하였다. 1901년에 화약이 성립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그 후에도 계속 갇혀 살다가 1908년에 죽었다.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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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ing, Hermann(1893-1946)

나치스 독일의 정치가·군인. 1922년 나치스에 참가하여 돌격대를 지휘하였고, 1933년 나치스 정권 수립과 함께 게슈타포를 조직하였다. 그는 나치스의 공군 총사령관, 프로이센의 내상·수상을 역임하였고, 1940년 원수가 되어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 범죄자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으나 처형 직전에 자살하였다.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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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ethe, Johann Wolfgang von(1749-1832)

독일의 최대 시인·작가·과학자·정치가·고전파의 대표. 프랑크푸르트의 암 마인 시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후, 16세 때 법률가가 되게 하려는아버지의 생각대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이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미술을 즐겨 공부하였다. 1767년 병으로 귀향하여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았다. 이때 유명한 문학자 헤르더를 사귀고, 그리스·로마의 고전, 셰익스피어, 민요 등을 배웠는데, 이는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1771년 귀향하여 한때 변호사를 개업하고, 1772년 베촐라르의 제국 고등 법원에서 법률을 실습하였다. 1774년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의 동시에 발표된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힘겐> 등과 함께 슈트름 운트 드랑(질풍 노도 시대:문예 혁명 운동) 시대의 대표작으로 전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을 받아 그의 교육 겸 상담역으로서 바이마르에 부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공을 보좌하면서 대단한 치적을 쌓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공작과 함께 프랑스에 출정하고, 이 무렵 실러와 교제하기 시작하여 실러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서로 격려하면서 걸작품을 세상에 많이 발표하였다. 교양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와 극시 <파우스트> 등에 착수한 것은 실러의 격려에 의해서이다. 1806년 꽃가게 딸 볼피우스와 결혼하여 아들 아우구스트를 낳았으나 곧 잃고, 다시 50년간의 친구였던 카를 아우구스트와도 사별하였다. 그러나 그의 창작 활동은 왕성하여 83세란 고령으로 사망할 때까지 학문과 예술의 양과 질에 있어서 모두 위대한 업적을 남겨,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이지만 복음서의 깊은 윤리관에는 존경을 아끼지 않았고, 혁명에 대하여는 부정적이었으나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대해서는 정열을 기울였다. 문학에 있어서는 낭만주의를 병적이라고 하여 꺼려하였으나, 만년의 작품 중에는 다분히 낭만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대작인 <파우스트>를 완성한 지 반년 후에 사망하였는데,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보다 많은 빛을……"이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에 문학 작품 63권, 자연과학 연구 서적 14권, 일기 16권, 서한집 50권을 남겼다.

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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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unod, Charles Francois(1818-1893)프랑스의 작곡가.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5세 때 석판 화가인 아버지를 잃었다. 피아노 교수인 어머니에게서 초보의 문학·미술·음악을 배우고, 뒤에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다. 1839년 로마 대상을 받았고, 그곳 유학 기간 중에 이탈리아의 옛 종교 음악을 연구하였으며, 독일·오스트리아를 거쳐 파리로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교회 음악에 뜻을 두었으나, 슈만·베를리오즈를 사귀고는 세속 음악으로 전향하여 가극을 시작하였다. <파우스트> <로미오와 줄리에트> 등으로 프랑스 오페라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에서 합창대 지휘자가 되었다. 만년에는 주로 교회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심정의 깊이보다는 극적 효과에 차 있다. 파리에서 사망하였으며, 소곡 <아베 마리아> <구노의 세레나데>는 유명하다.

구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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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urmont, Remy de(1858-1915)프랑스의 시인·소설가·문학 평론가. 상징파의 잡지 <메르키르 드 프랑스>를 창간하였으며, 비평과 미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노르망디의 명문 출신이다. 26세 때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얼굴이 추해지자,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상징주의의 이론가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입장에서 세련된 취미와 학식을 가지고 시·소설·평론을 썼다. 그의 대표적인 상징시인 <낙엽>은 전 세계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설로는 <룩셈부르크의 하룻밤>, 평론집으로 <프랑스어의 미학> <문학 산책> 등이 있다.

구마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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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摩羅什 Kumarajiva(350-409)인도의 승려. 구자국에서 출생하여 7세 때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불도를 닦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소승 불교를 공부하다가, 뒤에는 대승 불교를 공부하였다. 383년 중국 진나라의 초청을 받고 장안으로 건너가, 중국 승려들과 함께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중국 불교 사상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구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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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修(1007-1072)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문학가. 자는 영숙, 호는 취옹, 장시성 지안에서 출생하였다.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중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을 받아, 진사 시험에 합격, 참지정사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왕안석의 개혁 정치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옛날 문체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였으며, 당나라의 화려한 시풍에 반대하여 새로운 시풍을 열고 시·문 양방면에 송 문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당·송 8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에 <신당서> <오대사기> 등의 중요한 역사책이 있다.

구양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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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詢(557-641)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수 양제 때에는 태상박사를 지냈고, 당 태종 때에 태자솔경령이란 벼슬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구양 솔경'이라고 불렀다. 그의 뛰어난 필체는 멀리 고구려에까지 알려졌다. 처음에는 왕희지 체와 비슷했지만 뒤에 독자적인 서체를 세워 해서의 규범이 되었다. 우세남·저수량과 더불어 당나라 초기의 3대 서예가로 손꼽힌다. 작품으로 <구성궁예천명> 등이 남아 있다.

구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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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tenberg, Johannes(1394년경-1468)

독일의 활자 인쇄술의 발명자·창시자. 본명은 요한 겐스플레이슈이고, 구텐베르크는 통칭이다. 마인츠의 구귀족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의 마인츠 입성 후, 시민들에 의해 추방되어 슈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하였다. 1434년 골패 노름에서 생각을 얻어 목판 활자를 만들었다. 다시 금속 활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444년경 귀향하였다.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경, 즉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하였다.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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屈原(기원전 343년경-기원전 277년경)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의 시인·정치가. 회왕과 경양왕 때 높은 벼슬을 했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굴원은 방랑하다가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한다. 그의 작품은 대개 울분의 정이 넘쳐 고대 문학 중 드문 서정성을 띠고 있다. 대부분의 시는 <초사>에 실려 있는데 <이소>라는 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 밖에 <천문> <구장> 등이 남아 있다.

굿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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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year, Charles(1800-1860)미국의 발명가. 코네티컷 주의 뉴헤이븐에서 출생하였다. 고무 제조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와 발명으로 오늘날의 고무 공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금속 상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나, 고무와 유황이 작용하여 굳은 고무를 만드는 것을 발견하였다(1834-1844). 1836년에는 질산에 의한 생고무 표면 처리 방법을 발명하였다. 이 방법은 고무 표면의 점착성 때문에 일어나는 불편을 없애 주었으며, 1844년에 특허를 얻었다. 1852년 에보나이트를 발명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기념한 타이어(tire)가 있다.

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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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ss, Gunter(1927- )

독일의 소설가.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니스크)에서 독일계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전차병으로 참전하고, 미군 포로로 있다가 1946년에 석방되었다. 1955년 슈투트가르트 방송국의 서정시 경연대회에 입상하고, 1959년에 <양철북>을 발표하여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이어 <고양이와 쥐> <개의 해>에서도 전쟁 전과 전쟁 후에 걸친 시대의 과오와 대결하고 있으며, 무대는 다같이 단치히이다. 이밖의 작품에 <달팽이의 일기에서> <넙치> 등이 있다. 1996년 유럽문화공로상을 받았다.

그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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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chus, Tiberius Sempronius(기원전 163-기원전 133)

로마의 정치가·군인. 그라쿠스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아프리카·에스파냐에서 군에 복무하였다. 당시의 로마는 노예제·대토지 소유의 증대와 중소 자작농의 토지 상실·빈민화 등이 현저하였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이 된 그는 대토지 소유의 제한과 자작농 창설을 포함한 토지 법안을 민회에 통과하게 하고, 스스로 토지 분배 위원의 한 사람으로 실무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귀족과 원로원의 반대를 받았으며, 그 해의 호민관 선거 때에 그들 일당의 폭동으로 동지 300여 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그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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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t, Sir James Hope(1808-1875)영국의 군인. 육군 대위로서 아편 전쟁 중에 중국 전선에 참전했으며, 인도의 반란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1860년 베이징 공략 때 공을 세워 영국의 동양 진출의 길을 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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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 Ⅶ(1020년경-1085)

로마 교황(재위 1073-1086)·성인. 본명은 힐데브란트이고,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소아나에서 출생하였다. 로마의 수도원에서 성직 교육을 받고, 1046년 그레고리우스 6세와 함께 독일에 추방된 후, 쾰른에서 공부하였다. 1049년에 레오 9세의 교황 취임과 함께 로마에 귀국, 1073년에 교황이 되어 그 당시 타락해 있던 교회를 엄하게 다스렸다. 성직 매매, 사제의 결혼, 평신도의 임직권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심하게 다툰 후, 황제를 파문하여 교황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황제를 3일간이나 눈 속에 떨게 함으로써(카놋사의 굴욕)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1084년 반격해 들어온 하인리히 4세에게 로마를 점령당하고, 남이탈리아 살레르노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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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 ⅩⅢ(1502-1585)

로마 교황(재위 1572-1585). 볼로냐에서 출생하여 볼로냐 대학에서 법률학 교수, 에스파냐 주재 교황 특사, 추기경을 거쳐 1572년 교황이 되었다. 반종교 개혁 운동 및 교회 내부의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1582년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개정, 이 역법은 가톨릭 여러 국가에서 채용되었다. 그러나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신교도 학살을 축하하는 기념 메달을 프랑스 왕에게 증정)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아일랜드의 반란 지지 등으로 세인의 반감을 샀다.

그레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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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sham, Thomas(1519?-1579)영국의 재정가. 런던의 상인(商人) 집안에서 태어나,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섬겨 왕실의 공채 모집, 군수품 구입 등에 종사하였다. 런던에 영국 최초로 왕립 증권 거래소를 설립하였으며, 그레셤 대학을 세웠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영국 재정의 독립을 제안한 일은 유명하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유명한 '그레셤의 법칙'을 세웠다. 저서로 <환(換)의 이해를 위하여> 등이 있다.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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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ham, Thomas(1805-1869)영국의 화학자.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여 그 곳의 대학에서 톰슨에게 화학을 배우고, 모교 대학 교수가 되었다. 1855-1869년 조폐국 장관, 1836년 왕립 협회 회원, 1841년 런던 화학회 초대 회장, 1848년 캐번디 시 협회 회장도 지냈다. 기체의 흡수, 확산, 삼투압 등에 관한 연구가 있고 '그레이엄의 법칙', 즉 확산 속도는 분자량의 제곱근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또 확산 속도에서 착안하여 결정질과 다른 콜로이드라 하는 것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콜로이드 화학, 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수은류를 가진 조절진자의 발명도 있다. 주요 저서로 <화학 입문> <화학 및 물리의 연구> 등이 있다.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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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co, El(1541?-1614)

에스파냐의 화가.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 그레코의 원뜻은 그리스인이다.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비잔틴회화를 배웠다. 20세 무렵 이탈리아에 가서 베네치아파(派) 화가인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에게서 풍부한 색채를 배웠으며, 코레조로부터는 깊이 있는 명암에 의한 정서적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1577년에 에스파냐의 톨레도로 이주한 후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 속에서 독창적인 작품을 시작하였으며, 선명한 색과 그늘진 배경의 대조, 긴 열굴 표현 등의 틀을 유지했다. 대표적 작품에 <장님의 치료> <에스폴리오>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목자들의 경배> 등이 있고, 풍경화 <톨레도의 풍경>과 <자화상>이 있다.

그로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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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tius, Hugo(1583-1645)네덜란드의 법학자·정치가. '자연법의 아버지' 또는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6세에 법학 박사가 되었다. 1613년 영국에 대사로 파견되고, 1619년 아르미니우스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종신 금고의 선고를 받았으나, 루이 13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동안 저술에 열중하여 <전쟁과 평화의 법>을 냈는데, 이것은 30년 전쟁의 참화를 보고서 인류 평화 확립을 위해 집필한 것이다. 1631년 일단 귀국했다가 다시 망명했다. 1634년 스웨덴의 관리가 되었고, 그 후에 프랑스 대사를 지냈다. 1645년 사직하고 네덜란드에 귀환 도중 로스토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큰 업적은 국제법에 처음으로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 것으로서, 당시의 유럽 각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설 계승자를 '그로티우스 학파'라고 한다. 저서로 <전쟁과 평화의 법>을 비롯하여 <해상 자유론> <크리스트교의 진리> 등이 있다.

그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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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eg, Edvard Hagerup(1843-1907)노르웨이의 작곡가. 베르겐에서 출생하였으며, 극작가인 입센과 비교할 정도로 유명한 민족주의 음악가이다. 라이프치히와 코펜하겐에서 공부하였고, 1869년 오슬로에 음악협회를 창립하였다. 후에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지휘 활동을 하였다. 주로 피아노와 독창을 위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으며, 출생지에서 사망하였다. 노르웨이의 민족적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다. 입센의 극시에 곡을 붙인 <페르 귄트>와 <피아노 협주곡 A단조> 등이 유명하다. <페르 귄트 조곡> 중의 하나인 <솔베이그의 노래>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리말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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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maldi, Francesco Maria(1616-1663)

이탈리아의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볼로냐에서 출생하여 볼로냐 대학의 수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빛의 수리 물리학>에서 프리즘에 의한 빛의 스펙트럼에 대해 처음으로 논하였다. 빛의 회절 현상·빛의 간섭·분산 등을 연구했으며, 빛의 파동 이론을 처음으로 생각해 냈다.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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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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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e, Graham(1904-1991) 영국의 소설가. 하트퍼드셔 주 버크햄스테드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뒤, 1925년 가톨릭 교도가 됐다. <런던 타임스>지의 부주필로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작품의 특징은 항상 쫓기는 자의 불안과 공포를 재미있게 묘사하여, 악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오히려 신의 사랑을 증명하려는 데 있다. 줄거리의 전개가 재미있어 영화화된 것도 많다. 저서에는 <권력과 영광> <조용한 미국인> <제3의 사나이> 등이 있으며, 희곡으로 <거실> <화분 창고> 등이 있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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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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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mm, Jacob(1785-1863) 독일의 언어학자·동화 수집가. 하나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다. 위대한 게르만 언어학자로서 근대 언어학을 개척하였다. 동생과 함께 괴팅겐에 부임, 그곳 대학의 사서 겸 교수가 되었다. 1841년 동생과 함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초빙으로 학사원 회원이 되고,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언어학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실시하여 음운 변이에 관한 '그림의 법칙'을 수립하여 이 방면에서 획기적인 공적을 올렸다. 또 '독일 문법'에 의해 게르만 어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동생과 함께 게르만 민속 중에서 동화를 찾아내어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를 집대성하였다. 이는 뒤의 문학 및 조형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그림 동화>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어린이에게 읽히고 있다. 1816-1818년에 걸쳐서 <독일 전설집>을 출간하였는데, 이 2개의 저서로, 세계 최초로 민족 설화를 문학의 형태로 끌어올렸다. 형제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1852년에 시작하여 8년에 걸쳐 집필한 <독일어 대사전> 16권이다. 이 위대한 유업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1세기 이상이 걸려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이 밖에도 저서에 <독일의 문전> <독일의 신화학> 등이 있다.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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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dstone, William Ewart(1809-1898)

영국의 정치가. 리버풀에서 출생하여 이튼 대학을 거쳐 옥스퍼드를 졸업하였는데, 재학 시절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1833년 보수당 하원의원이 되었다. 필 내각 때에 관세 개혁을 하여 자유무역의 길을 열었다. 또한 1852년 애버딘 연립 내각의 재무상이 된 후, 1853년에 획기적인 예산안을 성립하여 재정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1867년 자유당의 당수가 되고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 상대하여 전형적인 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여러 번 재무장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868-1894년까지 4번이나 자유당 내각을 만들어 교육 제도를 고쳐 국민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894년 정치 생활에서 은퇴하여 하워든에서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할 때 이를 사양하여 대평민(The Great commoner)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내정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하층 계급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글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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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nka, Mikhail Ivanovich(1803-1857)러시아 근대 음악의 창시자·작곡가. 스몰렌스크에서 태어나, 페테르스부르크 귀족학교에서 배우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음악 이론과 작곡법을 공부했다. 그는 러시아의 민요와 민속 무곡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 러시아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한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1836년에 국민 가극 <황제에게 바친 목숨>을 완성하여 널리 이름을 떨쳤고, 1842년에는 둘째번 가극이자 대표작인 <로슬란과 류드밀라>를 완성하였다 그 밖에 러시아 민요에 의한 관현악곡 등을 지어 '러시아 국민악파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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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bon, Edward(1937-1794)

영국의 역사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던 중 종교 문제로 중퇴하고, 로잔에서 칼뱅파의 교육을 받았다. 한때 군인 생활을 하고, 1764-1765년 프랑스·이탈리아에 여행하였다. 이때에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할 생각을 하였다. 1774-1783년까지 하원 의원을 지내고 1783-1793년 로잔에서 고전적인 명작 <로마 제국 쇠망사> 6권을 완성하였다.

기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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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scard, Robert(1015년경-1085)노르만의 정복자. 로저 1세의 형으로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였다. 동생과 함께 남이탈리아를 정벌하여 교황으로부터 풀리아 및 칼라브리아 공이란 칭호를 얻었다. 다시 시칠리아 섬을 공략하고 여기에 노르만 왕국을 건설하였다. 10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구출하였다. 다음해에 그리스를 정복하려다가 케팔레니아 섬에서 전사하였다.

기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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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laume, Charles

douard(1861-1938)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실험물리학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졸업. 1897년에는 열팽창 계수가 실내 온도에 가까워지면 거의 0인 인바(invar) 합금(36% 니켈 철합금)을 발견했다. 인바 합금은 값싼 미터 표준기 외에 각종의 물리 정밀 측정 기기나 시계의 추 등에 널리 쓰여, 길이 측정의 정밀도를 두드러지게 향상시켰다. 그 중에서도 인바선(線)에 의한 기선 측정에 의해 종래의 측정법이 새롭게 바뀌었다. 또한 시간 측정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서 합금의 탄성률을 연구하여, 1919년에 탄성률의 온도 계수가 실내 온도 가까이에서 거의 0인 엘린바(elinvar) 합금(36% 니켈, 12% 크롬, 철합금)을 발견했다. 이 합금은 시계의 태엽 등에 이용되어, 시간 측정의 정밀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2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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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zot, Francois Pierre Guillaume(1787-1874)

프랑스의 정치가·역사가. 님(Nimes)의 신교도 가정에서 출생하여 파리에서 법률을 배우고 뒤에 문학을 공부하였다. 1812년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를 번역하여 역사가로서 출발하였고, 그 해 소르본 대학 근세사 교수가 되었다. 왕정 복고 후에 내무성, 법무성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사직한 뒤 하원의원이 되고, 7월 혁명 때 부르봉 왕가를 쓰러뜨리는 데 힘썼다. 뒤를 이은 오를레앙 왕조의 루이 필리프 왕의 밑에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역사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저서에 <프랑스 문명사> <영국 혁명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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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 Sir David(1843-1914)

영국의 천문학자. 애버딘에서 출생하였다. 천문대에서 천문 관측에 종사하였으며, 뒤에 다느에트 천문대장, 1879년에는 희망봉 천문대장이 되었다. 1874년 금성이 태양을 지나는 것을 관측하였고, 1879년에는 태양의 시차를 결정하기 위해 어센션 섬에서 화성을 관측하여 8″.78이란 태양 시차를 계산해 냈다. 1900년 50만 개에 가까운 별이 들어 있는 '남천 항성표'를 만들어 천문학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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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bert, William(1540-1603)

영국의 물리학자·의사. '자기학(磁氣學)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콜체스터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을 배우고 런던에서 개업하였다. 뒤에 엘리자베스 1세의 시의로 일하였다. 주요 저서 <자석에 관하여>에서 자기 및 지자기(地磁氣)에 관한 학설을 경험적·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전개하였다. 또 전기 현상에 관한 이론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뒤에 케플러, 갈릴레이, 데카르트 등에 이용되었다. 또 '전기'라는 명칭은 그로부터 유래한다. '영국 실험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