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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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편집]

羅貫中

중국 원나라의 소설가. 본명은 본, 호는 호해산인이며, 자는 관중이다. 재능이 비상하여 당시의 경향에 따라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는 연의를 많이 지었다. 특히, 그의 최고 걸작인 <삼국지 연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수호전>의 작가라는 설도 있는데, 이 밖에 <수당지전> <잔당 오대지 연의> <송 태조 용호 풍운회> <평요전> 등의 희곡과 통속 소설이 전한다.

나기브[편집]

Naguib, Mohammed(1901-1984)이집트의 군인·정치가.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출생하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푸아드 1세 대학에서 법률·정치·경제를 공부하였다. 청년 시절부터 이집트와 수단의 통합을 주장하는 결사대에 가담하였다. 1952년 영국과 이집트의 분쟁을 기화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 파루크를 추방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9월에 수상이 되었다가 1953년에 공화국 선포와 함께 초대 대통령에 취임, 수상을 겸하였다. 독재 정치로 국민의 불만을 산 데다가, 군부와의 충돌로 나세르에 의해 대통령의 지위를 잃고 추방되었다.

나나크[편집]

Nanak, Baba(1469-1538)

인도의 종교가·시크교의 창시자. 이슬람 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힌두교를 개혁하여 시크교를 창시하였다. 신이 유일 영원한 존재이며 각종 종교에서는 각각 다르게 말하지만 신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계급과 종족의 차별없이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죄를 지으면 그 후세에 응보를 받는다는 인과응보, 업과 윤회의 사상을 가르쳤다. 또 우상 숭배와 고행을 반대하고 묵상으로 신을 섬길 것을 역설하였다. 시크교는 인도의 펀잡 지방에 널리 퍼졌다.

나세르[편집]

Nasser, Gamal Abdel(1919-1970)이집트의 군인·정치가. 1938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청년 장교들과 함께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였다. 1952년 나기브 장군을 내세워 무력으로 국왕 파루크를 추방하고 이집트를 공화국으로 만들어 부통령에 취임하여 토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그 후 나기브를 추방하고, 1956년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정치·경제면에서 독립시키는 한편,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영국·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대통령 선거에 3선되었으나, 1967년 중동 전쟁(6일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가, 국민의 요구로 다시 취임하였다.

나이팅게일[편집]

Nightingale, Florence(1820-1910)

영국의 간호사·병원 개혁자·군대 간호 사업의 선구자. 영국의 자선가의 딸로 부모의 이탈리아 여행중 피렌체에서 출생하였으며, 교육은 영국에서 받았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 해에, 독일의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1853). 이듬해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선으로 가서 스쿠타리의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이 밖에도 많은 병원 및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남북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로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만국 적십자사에서는 '나이팅게일 상'을 설정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표창하고 있다. 저서 <간호를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세계 모든 간호사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나카소네[편집]

中會根康弘(1918- )

일본의 정치가.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거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28세 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59년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었다. 그 후 방위청 장관·운수상·통상상 등을 역임하였다. 1974년 자민당 간사장이 되었으며, 1976년 총무회장에 선출되었다. 1979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였고, 이듬해 행정관리청 장관이 되었다. 1982년 자민당 총재에 당선됨으로써 수상이 되었으며, 이듬해 재선되었다.

나폴레옹 1세[편집]

Napoleon Ⅰ, 1769-1821)프랑스의 황제(재위 1804-1814).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뒤의 안정기를 틈타 제1제정을 세운 군사적·정치적 천재로서, 세계 역사상 알렉산더 대왕 및 카이사르와 비교되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서 출생하였다. 파리 사관학교에서 배우고, 1786년 포병 소위를 거쳐 중위가 되었다. 그 후 자코뱅 당에 가입하여 코르시카 독립 운동에 참가했으나, 지휘관과 뜻이 맞지 않아 파리로 돌아왔다. 1793년에 혁명군에 참가하여 마르세유에 배속되고, 그 해 툴롱의 포격 점령에 성공하여 이탈리아 국경군 포병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794년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직후에 로베스피에르파로서 투옥되었다. 이듬해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반란을 진압하여 국내군 사령관이 되었다. 1796년 조제핀과 결혼하였으며,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고, 로디·아르콜레 등의 전투에서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오스트리아 군 및 이탈리아 군을 격파하고,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맺고서 개선하였다. 브뤼메르 쿠데타에 가담하여 집정 정부를 수립하여 12월 제1집정이 된 후에 군사 독재의 실마리를 얻었다. 1800년 국내 반대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쟁을 계획하고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 군을 마렌고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루네빌 조약'을 맺고, 1801년 교황 바오 7세와 '콘코르다트(정교 조약)'를 체결하여 왕당파 탄압의 수단으로 하였다. 1802년 종신 통령에 취임하는 한편, 국내 평화를 위해 학제·행정·사법의 개편, 특히 징세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는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개인의 자유·사유 재산의 불가침 등 표현의 간결, 명확함으로 근대 법전의 모범이 되고 있다. 1804년 국민 투표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는 동시에 이탈리아 왕을 겸임하였다. 이로써 다시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즉위 후에 프랑스 산업 발전과 유럽 지배를 위해 영국 타도를 목표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해 오스트리아에 출병하여 울름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빈을 점령하였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 군을 격파하여, 나폴레옹 '최대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1806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16개국을 라인 연방으로 편성하는 동시에 중부 유럽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1805년 해군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에게 패하였다. 1806년 프로이센이 영국·러시아 양국과 제4회 대불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 군을 예나·아우어스테트에서 격파하였다. 그 해 10월 베를린을 점령한 후, 11월에는 여기서 영국의 산업, 정치력 타도를 위하여 대륙 봉쇄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각국의 저항은 강렬했는데, 특히 러시아를 프리틀란드에서 격파하여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해 다시 밀무역의 기지가 된 포르투갈·에스파냐를 정복하였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하고, 이듬해에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 나폴레옹 2세를 낳았다. 러시아는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에 곡물을 수출할 수 없어 고통을 겪다 못해 조약을 위반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나, 러시아의 초토 전술로 50만 병력을 잃고 후퇴하였다. 1813년 정복당한 여러 나라가 해방 전쟁을 일으켜 이들과 싸웠으나 라이프치히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한편 영국군을 거느린 웰링턴이 에스파냐에서 북상, 프랑스를 종단하는 작전에 의해 1814년 파리는 함락되었다. 그 해 4월 퇴위하여 엘바 섬에 유배되고 루이 18세가 복위하였다. 그러나 엘바를 탈출하여 다시 황제로 즉위하였다. 자유주의 제국을 구상하였으나 연합군의 블뤼허, 웰링턴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일 천하로 끝나고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망하였는데, 1840년 파리로 이장되었다.

나폴레옹 3세[편집]

Napoleon Ⅲ(1808-1873)프랑스의 황제(재위 1852-1870).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세워진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며,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다. 1848년 2월 혁명 때 나폴레옹 1세의 명성을 이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51년 무력으로 의회를 눌러 임기를 10년으로 연기하였다. 1852년 국민 투표에 의해 황제가 되고 나폴레옹 3세라 칭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신문 탄압, 의회 종속화, 선거 간섭 등에 의해 권위 국가를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크림 전쟁에 가담하였고,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도왔으며, 인도차이나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가톨릭 세력과 산업 자본가의 반대를 받아, 정치범의 석방·의회 권한의 확대·노동자 단결권 승인·신문 탄압 완화·집회의 자유 등 자유주의 국가의 방향을 취하여 자유주의자·노동자들의 원조를 얻고자 하였다. 반대 세력 억압의 수단인 멕시코 전쟁에 실패하고,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패하자, 1871년 퇴위하였다. 영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나하추[편집]

納哈出(?-1381)

중국 원·명나라의 장군. 스스로를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하며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다. 원나라가 멸망하기 5년 전인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는 전에 고려에게 빼앗겼던 쌍성(함북 영흥)을 되찾기 위해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으나, 이성계의 군대에 의하여 크게 패하였다. 뒤에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서 사신과 예물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다. 그 뒤, 명나라에 투항하여 해서후(海西侯)가 되었으나, 윈난(雲南)으로 출정하던 중에 병으로 죽었다.

난센[편집]

Nansen, Fridtjof(1861-1930)

노르웨이의 북극 탐험가·정치가. 오슬로에서 출생하여 오슬로 대학에서 공부한 후 베르겐의 자연 박물관에 근무하였다. 1888년 사상 처음으로 그린란드의 횡단에 성공하여 그린란드 내부 전부가 두꺼운 얼음층으로 뒤덮인 것을 확인하였다. 1893년 '프람 호'를 설계 건조하여 북극 탐험에 출발, 1895년 북위 86° 14′의 지점에 도착하여 당시 신기록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포로 송환, 난민 구제 등에 노력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크게 공헌하였다. 192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네로[편집]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37-68)

로마의 제5대 황제(재위 54-68). 통치 초기에는 근위대장 브루스 및 세네카 등의 지도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58년경부터 난폭해지기 시작하여 왕후인 옥타비아를 살해한 이후, 폭정은 극에 다다랐다. 64년 로마 시에 큰 불이 났을 때, 그 책임을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돌려 대학살을 행하여 최초의 크리스트 교 박해자가 되었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에는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한 농가로 도피, 자살하였다.

네루[편집]

Nehru, Pandit Jawaharla(1889-1964)인도의 정치가·민족 운동의 지도자·인도 공화국의 초대 수상. 알라하바드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영국에 유학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하였다. 1916년 간디의 영향을 받고 그 해 국민 회의에 참가하였고, 1918년 자치 연맹 간사, 국민 회의 의원이 되었다. 1921년 반영 투쟁으로 투옥된 이래, 1945년까지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9회 투옥되었다. 1929년 국민 회의파 라호르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비로소 인도의 완전 독립이 결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 내각은 총사직하였다. 1942년 영국에 대한 인도로부터의 즉시 철수를 결의하여 간디와 함께 체포됨으로써, 인도는 '피와 눈물'의 비참한 혼란에 빠졌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인도는 파키스탄과 분리되어 독립하였으며, 그는 수상 겸 외상이 되었다. 독립 후 카슈미르에 출병하였으며, 그 이듬해 간디가 암살되는 등 어려운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중립주의는 독립 이래의 외교 정책이었으나, 한국의 6·25전쟁과 인도차이나 반도 전쟁의 조정 알선, 반둥 회의 주창 등은 네루 외교의 목표가 되어 평화 지역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네루다[편집]

Neruda, Pablo(1904-1973)

칠레의 시인, 외교관. 7, 8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신문에 작품을 발표했다. 14세 때 체코의 시인 J. 네루다의 시를 탐독하고, 1920년부터는 '파블로 네루다'를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소년 시절부터 눈부신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 그는 21년에 <축제의 노래> 등을 발표하여 시단의 인정을 받았으며, 23년에는 시집 <변천해가는 것>을 출판하여 시단에서의 위치를 다졌다. 초기 시의 대표작으로서 가장 많은 독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중남미의 시단에서도 인정받은 작품은 24년에 출판된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이다. 이 시집에는 고통과 오뇌, 고독과 절망이라는, 네루다 시의 전형적인 테마가 가득히 담겨 있다. 1933년에는 시집 <지상(地上)의 거주지>를 내어 명성을 떨쳤다.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에스파냐에 주재하고 있을 때, 인민전선정부가 탄생하고, 이어서 내란과 프랑코 독재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인간적 연대(連帶)를 역설하는 정치 시인으로 변모하여 정력적으로 반(反)파시즘의 시를 썼다. 귀국한 후 45년에는 상원 의원이 되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인정되자 지하로 잠입하고, 이어서 망명을 하고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50년에는 멕시코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노래한 웅장한 서사시집 <위대한 노래>를 발표했다. 그 속의 장시 <나무꾼이여, 눈을 떠라>로 50년도 스탈린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52년에는 귀국하여 시 창작에 몰두했다. 70년에 아옌데 인민연합 정권이 수립된 후 주(駐) 프랑스 대사가 되었고, 197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73년 9월의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병상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는 이 밖에 시집 <기본적인 오드> <세계의 종말> <불타는 칼> 등이 있다.

네른스트[편집]

Nernst, Walther Hermann(1864-1941)

독일의 물리학자·화학자. 프로이센 서부의 브리젠에서 출생하여 취리히·베를린·뷔르츠부르크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오스트발트의 조수가 되고 뒤에 괴팅겐·베를린 대학 교수와 물리학회 회장·국립 도량형 검사소장 등을 겸임하였다. 그는 물리 화학의 창시자이고, 산화 환원 반응과 반응 속도, 화학 평형, 액정 등을 연구하고 유도율의 측정, 낮은 온도일 때의 비열의 측정 등을 실험하여 성공하였다. 1906년 열 역학의 제3법칙이라 불리는 '네른스트의 열 정리'를 만드는 등 열화학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19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네스토리우스[편집]

Nestorius(?-451년경)

크리스트교의 한 갈래인 네스토리우스 파의 시조. 시리아에서 출생하여 콘스탄티노플 대사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 일체설을 부정하여 431년에 열렸던 '에페수스 종교 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435년 국외로 추방되어 페트라로 망명, 뒤에 이집트에서 죽은 듯하다. 그러나 그의 교파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의 당에까지 전해져, '경교'라는 이름으로 한때 융성하였다.

네케르[편집]

Necker, Jacques(1732-1804)

프랑스의 재정가·정치가. 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47년 은행에 근무한 후, 은행을 만들어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1763년 정계에 투신하였으며, 1774년 재무 총감으로 일할 때, 긴축 재정을 실시함으로써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1781년 사직하였다. 1788년 다시 복직되어 3부회 소집에 동의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저서로 <프랑스 재정론> 등이 있다.

넬슨[편집]

Nelson, Horatio(1758-1805)

영국의 제독. 노퍽에서 출생하였다. 1770년 해군에 입대하여, 1787년까지 주로 서인도 해역에서 근무하다가 퇴역하였다. 1793년 현역에 복귀하여 지중해 함대장이 되어 많은 공훈을 세웠다. 이듬해 코르시카 섬을 점령할 때, 오른쪽 눈을 잃는 부상을 당하였다. 1796년부터는 프랑스 군에 대한 해상 봉쇄 작전에 종사하였다. 1797년 세인트빈센트의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나 오른팔을 잃었다. 1798년 나일 강 하구의 아부키르 만에서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하여 프랑스 세력을 분쇄하였다. 1803년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 되어, 2년간 프랑스 함대를 툴롱에서 봉쇄하여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을 방해하였다. 탈출한 프랑스 함대를 쫓아 트라팔가 만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를 격파하다 전사하였다.

노벨[편집]

Nobel, Alfred Bernhard(1833-1896)스웨덴의 발명가·화학 공업가·노벨상의 설정자. 스톡홀름에서 출생하여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국에 유학하여 기계공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고, 이를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 1867년에 특허를 얻었다. 1869년부터 파리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여, 1875년 무산 화약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되었다. 그 기부금으로 노벨상 제도가 설정되었다. 이 상은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경제학·평화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자에게 매년 수여되고 있다.

노스클리프[편집]

Northcliffe, Alfred Charles Wil­liam Harmsworth(1865-1922)

영국의 신문 경영인. 어릴 때부터 남달리 글을 잘 써서 17세 때 <유스>지의 부편집장이 되었다. 그 후 1896년 보수당의 기관지인 <데일리 메일>과 <데일리 미러>를 창간하였다. 그는 신문의 저가화 및 대중화에 공헌한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신문을 이용한 독일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힘썼다. <더 타임스>지를 비롯한 신문사들을 사들여 세계적인 신문왕으로 명성을 얻었다.

노자[편집]

老子(기원전 5세기)

중국 주나라의 사상가. 자는 백양, 시호는 담, 허난성 녹읍현 사람으로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라고 이름지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후세에 '도교의 시조'로 불려지고, 그 사상은 '노장 사상' 또는 '도가 사상'으로 발전하여 유교와 함께 중국 정신 사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누르하치[편집]

奴兒哈赤(1539-1626)

중국 후금의 초대 황제·뒤의 청 태조(재위 1616-1626). 건주위 여진 출신으로 아버지 뒤를 이어 푸순 동쪽 지방의 추장이 되었다. 주위를 정복하여 만주 지방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후에 랴오양·선양에 도읍을 두고 1616년 국호를 후금, 연호를 천명이라 하고 왕이 되었다. 명나라의 토벌군과 싸우고 위세를 떨쳤으나, 몽고 원정중에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태종이 국명을 청이라 개칭하여 청나라의 태조로 불린다.

뉴턴[편집]

Newton, Sir Isaac(1643-1727)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 링컨셔의 울스소프 농가에서 출생하여 그랜섬의 킹스 스쿨에서 공부할 때는 학과에 흥미가 없어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유능한 수학자 발로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재학 시절에 이미 이항 정리를 발견하여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해 런던에 발생한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문을 닫아 그도 고향에 돌아갔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1667년 학교가 문을 열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 스승 발로의 뒤를 이어 모교의 수학과 교수가 되어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수학의 발견에 대해서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인 뉴턴 환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호이겐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만유 인력의 구상은 오래전부터 싹텄으나, 케플러의 혹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호이겐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 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 런던으로 이주하여 왕립 조폐국에 들어가 장관에 취임하고, 1703년에는 왕립 학회 회장이 되었는데, 모두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근대 과학 성립의 최대 공로자이다.

니체[편집]

Nietzsche, Friedrich Wilhelm(1844-1900)

독일의 철학자·사상가. 작센 주의 레컨에서 출생하여, 5세 때 목사인 아버지와 사별하고 할머니의 가정에서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1864년 본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신학·철학을 배우고, 후에 리첼의 지도로 문헌학을 연구하였다. 1865년 스승 리첼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에 전학한 후, 주로 그리스 문헌학을 연구하고 몇몇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이때부터 쇼펜하워를 읽는 동시에 바그너의 음악에도 심취하였다. 1869년 리첼의 소개로 바젤 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을 강의하였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으로 바젤로 귀환하였다. 이후에 계속하여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1872년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쌓아 올렸다. 그 후 주로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머물면서 저술에 전념하여 사색의 심화와 함께 가장 독창적인 저서를 냈다. <여명> <환희의 지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선악의 피안> 등에서 그는 크리스트교와 이상주의의 도덕을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 '데카당스'라고 배격하고, '초인' '영원 회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형이상학을 수립하여 뒤에 생의 철학이나 실존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정신병의 발병으로 어둡고 괴로운 말년을 보내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저작에만 몰두하였다. 특히 <즐거운 지식>에서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가 크리스트교를 비판한 것은 유럽을 비판한 것으로, 키에르케고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니콜[편집]

Nicol, William(1768-1851)

영국의 물리학자·발명가. 에든버러 대학 교수로 '니콜의 프리즘' 또는 '니콜'로 불려지는 편광(일정한 방향으로만 진동하는 광선)을 만드는 장치를 발명하여 광학 실험의 진보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암석 및 광물의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1962년 보스토크 3호를 타고 9시간 동안 우주 비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니콜라이 1세[편집]

Nikolai Ⅰ, Pavlovich(1796-1855)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825-1855). 1825년 왕위에 오르고, 즉위 날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진압을 비롯, 이후 혁명 운동 탄압에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의 헌병'으로 불렸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반란을 탄압하고, 1849년 헝가리 반란 때에는 군대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터키와 충돌하여 러시아·터키 전쟁을 유발하였으며, 터키를 돕는 영국·프랑스와 충돌하여 크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패하자 음독 자살했다고 한다.

니콜라이 2세[편집]

Nikolai Ⅱ, Aleksandrovich(1868-1918)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 1894년 왕위에 올라 러시아 세력을 아시아로 뻗치는 데 힘썼으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였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국회를 열고 헌법을 만들 것을 국민에게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어기고 전제 정치로 돌아갔다. 이에 1917년 3월 레닌에 의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11월 혁명' 때 총살되었다.

닉슨[편집]

Nixon, Richard Milhous(1913- )미국의 법률가·정치가. 제37대, 제38대 대통령·캘리포니아 주 출신으로 호이티아·듀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해군에서 복무하였다. 1946년 정계로 진출하여 공화당 하원 의원, 1950년에는 상원 의원에 당선,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1960년 공화당에서 대통령으로 입후보했으나 민주당의 케네디에게 패하였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도 낙선하여 한때는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8년 민주당의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외교 정책의 대담한 변화로 1972년 중공과 소련을 방문하여 냉전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옮기는 기수가 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맺고자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였다. 1974년 워터케이트 사건의 확대로 국민의 여론에 의하여 사임하고 부통령이었던 포드가 대통령이 되었다.

닐센[편집]

Nielsen, Carl August(1865-1931)

덴마크의 작곡가. 노레 린델세 주 소르텔룽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군악대의 트럼펫 주자가 되면서부터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코펜하겐 음악원의 가데에게서 작곡법을 배우고, 작곡가·지휘자로서 활약했다. 북유럽 음악가 중에서는 그리그 이후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그는 작곡을 할 때 다조성을 쓰는 등, 혁신적인 수법을 썼다. 대표작은 여섯 개의 교향곡으로 된 코믹 오페라 <마스케라드> <다윗과 사울> 등이다.